2021년 6월 29일 화요일

저자

안녕하세요, 저는 『직업 전선』을 쓴 사람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직업들에 관해 쓰겠다는 터무니없는 기획, 기획이라기엔 망상에 가까운 이 글쓰기의 연원에는 크게 보면 두 가지의 생각이 있었다고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첫 번째로는 아우구스트 잔더(August Sander)입니다. 이 유명한 독일 사진가에 관해 누구나 알고 계시겠지만, 모르시는 분들 또한 계실 것이기에 짧게 언급하자면 그는 초상 사진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입니다. 그는 〈20세기 사람들〉이라는 초상 사진 시리즈를 통해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일례로 그의 작품 제목들은 여러 직업명으로 되어 있지요. 옛날 언젠가 그의 작품을 살펴보며 “대단히 멋진 기획이군!”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두 번째로는 직업 예술가가 되지 못한(않은) 예술가들에 관한 생각입니다. 세상에는 예술가가 있고, 그보다 많은 수의 예술가가 되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준 미달이라, 운이 없어서, 그저 열정이 식어서, 다른 취미가 생겨서, 생계 때문에, 때로는 자신에게 예술가가 될 가능성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예술가로 살아가기를 포기한, 그러나 예술가의 성정을 가진 이들이 있습니다. 몽상하고 태업하며 살아갈 그들의 노동에 관해 생각했습니다. 저 또한 몽상하고 태업하며 노동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터무니없는 기획을 시작할 당시에 수백 개의 직업을 다루고자 했습니다만, 원했던 만큼 다루지는 못했습니다. 이 ‘저자’라는 족속들의 게으름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지요…… 봄에 원고를 주겠다고 약속하고 나면 이러저러한 핑계(집필의 어려움, 일의 바쁨, 몸의 아픔, 불만족, 추가 원고, 천재지변, 소통의 불일치……)들로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 이듬해 봄으로 최종 마감을 못 박고 나서도 가을의 냄새가 날 무렵에야 그나마 꼴은 갖춘 원고를 주는 놈들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저도 예외는 아니기에 이미 수차례 미뤄왔습니다만 지금 이 자리를 빌어 이 개떡 같은 원고를 살피고 계실 편집자 선생님께 한마디만 더 청하고 싶군요. 제게 일 년만 더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면 애초에 계획하고 아직 쓰지 못한 직업들을 조금 더 추가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제게 시간을 조금만, 조금만 더 주신다면…… 

지극히 현실적인 여러 이유들로 인해 『직업 전선』은 현재의 꼴로 출간되었습니다만,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기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책이 살아 숨 쉬는 생물이라면, 저 스스로 활자를 집어삼키며 생장하고 거대해지는 것이라면 수 년에 걸쳐(어쩌면 평생에 걸쳐) 『직업 전선』이 자라날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언젠가 수십수백 개의 직업에 관한 이야기가 추가된 증보판을, 증보판의 증보판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릴 수 있다면 좋겠군요. 자, 그러면 저는 출간 이후에 제멋대로 찾아오는 우울을 뒤로 하고 그만 일하러 가야겠습니다.

2021년 6월 25일 금요일

포도의 사람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떨어진다. 나는 그것들을 바구니에 주워 담는다. 저 멀리에 신부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그 사람이 가까이 온다. 나는 그 사람에게 말한다. 그날 있었던 일들이 어땠으며, 포도를 얼마나 많이 주워 담았는지를. 바구니 안에 든 것은 검은 포도들이다. 그 사람은 양해의 손짓을 하고는 내 바구니에 손을 가져가 몇 개의 포도를 집는다. 그리고 하나씩 입에 털어 넣는다. 입맛에 맞으신다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한다. 입맛에 맞았노라고,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한다. 그것은 신을 섬기는 이들이 가져야 할 자질 중에 하나다. 자연의 산물, 특히 나무 위의 생명이 다해 아래로 떨어지게 된 것들을 이렇다 할 감정의 동요 없이 받아들이는 것. 나는 그 사람에게 항상 하던 말을 한다. 나는 신을 믿지 않으며, 가능하다면 그 성당에는 다음에 가 보고 싶다고. 사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한 성당을 운영하는, 아니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가끔 이 포도 농원에 놀러 온다. 아니, 놀러 오는가? 그 사람도 입을 열어 항상 하던 말을 한다. 신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그런 말을 할 때 그 사람은 꼭 등 뒤에 날개가 달린 권 천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천사들의 계급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 권 천사라는 말은 천사 앞에 권 씨가 성으로 붙어 있는 것 같아서 재미있다. 나는 바구니에 손을 담아 검은 포도들을 한주먹 쥔다. 그리고 그것들을, 헨젤이 그레텔에게 따라올 길을 알려주려 빵 조각들을 일정한 거리로 남긴 것처럼 나도 하나씩 바닥에 떨군다. 그 신부는 이쪽의 손길을 가만히 바라본다. 내가 이런 일을 하는 이유는 헨젤처럼 누군가가 이곳으로 따라올 수 있게, 당도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단지 다람쥐나 청설모들을 걱정하는 마음으로(그들은 농원의 과실에 해를 주지 않는다) 바닥에 떨어진 것들이 하나도 없으니만큼 그런 일을 하는 것이다. 신부도 이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신부가 입을 열어 말한다. 그런데 신이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오늘까지라고. 나는 의아해져서 신부에게 되묻는다. 그럼 나는 오늘 안에 죽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십니까? 분명 신은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신부가 이어서 말한다. 사실 성당을 이전하게 되었노라고. 그 때문에 국경선을 넘어가야 하는데, 그러면 당신이 찾아올 성당이 없어지게 되는 거라고. 신부의 말은 분명 듣기에 좀 이상했지만 나는 가끔씩 찾아오던 그를 이젠 못 만나게 되는 것에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신부에게 오늘은 이 포도 농원의 깊숙한 곳까지 한번 같이 들어가 보자고 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 포도 농원에 무언가 이질적인 것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이 걱정됩니다. 그런가요? 한 번도 해준 적이 없는 말씀입니다. 그렇다. 신부가 찾아오는 것이 그 때문이었는가, 나는 그저 이 포도 농원이 좋아서, 아니면 내가 대화 상대로서 적합하기 때문인 줄 알았는데! 아니십니까? 나는 물었고 그 신부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웃었다. 나는 그 신부를 농원 입구까지 배웅했다.

2021년 6월 21일 월요일

사랑의 순간

플란넬 셔츠를 입은 한 아저씨가 걷고 있다. 그의 이마는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것처럼 보이고, 코에는 코피가 잠시 났던 것인지 왼쪽 콧구멍에 휴지 뭉치를 꽂고 있다. 그는 주택가의 어떤 건물, 2층에는 아이들을 위한 미술 학원이 있고 1층에는 코인 세탁소에서 세탁을 마친 사람들이 빨랫감을 들고나오는, 그런 광경의 건물 앞에서 잠시 멈춘다. 여기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러나 확연히 그들이 서로 사귀는 사이란 걸 알 수 있는, 겉으로는 고등학생들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잘 보면 고등학생들이란 걸 알 수 있는 이들이 계단에 앉아서 포옹을 하고 있었다. “이런, 서로 사귀는 모양이군!”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저씨의 목소리였지만 그러나 확연히 느껴지는 공기의 진동이 저 멀리까지 닿은 듯, 서로 포옹을 하고 있던 고등학생들 중에서 나이가 좀 더 어려 보이는 한쪽이 포옹을 풀고 아저씨에게 대답했다. “와, 나처럼 플란넬 셔츠를 입고 계시는군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나는 시력이 별로 안 좋다) 그 말을 하면서 소매를 주섬주섬 꺼내 들더니 반대쪽 손으로 화살표를 만들어 그것을 가리킨 것이 남성 쪽이란 건 알아볼 수 있었다. 아저씨가 입을 열어 말했다. “이런, 자네들 지금 내 가까이에 있는 미술학원에 다니는가? 공부 대신 그림 그리는 일을 배울 수도 있는 노릇이지. 난 지금 이곳에 다닐까 생각 중이라네. 왜냐하면 아이들을 위한 곳처럼 보이거든.” “하하. 꽤나 아이처럼 보이기도 하시는군요. 그런데 조금 부끄럽습니다. 우리들이 서로 사귀는 사이란 걸 보여드리고 말았군요.” “아니, 그것이 아니라네. 나는 자네들을 멀리서 보고 왠지 나까지 부끄러워져 잠시 말을 걸고 만 것이라네.”(하지만 가장 부끄러웠던 건 그들을 묘사한 내 쪽이었다) “저런. 그런데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말을 하기가 힘듭니다. 혹시 거리를 좁혀서 얘기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난 이 거리를 유지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네.” 그 말을 끝으로 이마에 땀이 나고 콧구멍에 휴지 뭉치를 넣은 아저씨는 가던 길로 사라졌다. 나는 묘사를 마치고 집에 가서 언니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있잖아, 언니야. 오늘 묘사를 하고 있는데 거기에 둘이 연애하고 있는 고등학생들이 나왔어. 그리고 그 둘한테 어떤 아저씨가 말을 걸더라? 그러더니 거리가 멀지만 그중에 남자인 쪽이 똑같은 플란넬 셔츠를 입고 있다면서 아저씨에게 화답했어. 그 아저씨는 어쩐지 상황을 무마하려는 것처럼 보였어. 그래서 묘사를 하고 있던 나도 그냥 그 아저씨를 보내주기로 했어. 물론 그때까지 그들과 아저씨의 거리는 절대로 좁혀지지 않았고 말이야.” 언니가 말했다. “그래. 묘사를 하면서 즐거웠니? 그리고 둘 사이의 거리를 설정한 이유는 뭐지?” “어쩐지 부끄러웠기 때문이야. 즐겁긴 즐거웠는데... 서로 사귀고 있는 그 둘 사이의 애정은 그 아저씨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처럼 보일지 잘 모르겠었어. 요즘에는 잘 모르겠는 일들의 투성이야. 그래서 내가 묘사를 하려는지도.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 “나는 네가 좋다면 그걸로 좋다고 생각해.”

2021년 6월 18일 금요일

미야



“일 년 전의 고양이는
아름답게 자랐을까요?
‘좋은 곳’으로 가꾼 그곳을
아무도 망가뜨리지는 않았는지
문득 궁금해하며,”



시집을 열었는데 미야의 안부가 적혀 있었다. 미야. 일 년 전 미야의 이야기. 잊고 있었던 고양이의 삶을 누군가 대신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미야의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어떤 시인은 왜 이렇게 다정할까. 

미야는 나뭇가지에 앉은 참새를 보면서 입을 벌리고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귀 하나를 접었다가 펼쳤다가 등에 있는 검은 반점이 벌어졌다가 좁혀지는 순간, 아무것도 변한 건 없었다. 그는 사냥을 하지 않았다는 듯 능청스럽게 손에 침을 묻혀 그루밍을 시작했다. 미야는 사냥에 성공한 적이 없다. 그의 실패를 한참 바라보던 나른한 오후.

나의 은밀한 취미 중 하나는 낯선 고양이에게 적정거리로 다가가 눈을 느리게 깜박이는 인사를 하는 것이다. 복권을 긁는 심정에 가깝다. 길에서 만난 고양이들이 곁을 주지 않는 게 좋았으니까. “맞아. 잘하고 있어. 사람 믿지 마.” 나는 그들이 사람을 경계하고 믿지 않기를 원했다. 어떤 사람이 사료를 주면 어떤 사람은 엎어버린다. 어떤 사람인지 사람도 알아볼 수가 없으므로 그들이 사람에게 곁을 주지 않아서 좋았다. 개체로서 길가에 있는 존재라서 그 거리감을 좋아했다.

미야는 처음 만난 날,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인사해주었다. ‘안 되는데.’ 의아한 표정을 지은 건 사람이었다. 미야, 라고 부르자 원래 아는 사이처럼 다가왔다. 희디흰 운동화 코에 자신의 발을 꾹 눌러주었다. 이러면 안 되는 거였다. 주변 고양이를 무서워하고 사람을 따른다는 건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미야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했다. 나는 그들에게서 미야의 정보를 들었다.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 버려진 고양이, 다행히 여기에 있는 고양이들이 미야를 내쫓지 않아서 주차장에서만 지낸다고 했다. 내가 자리를 비우자 미야는 산책을 하듯 그들과 함께 좁은 길가를 걸어다녔다. 미야의 밥을 주던 아래층 아주머니, 아주머니도 미야를 사랑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고양이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어떤 이름으로 불렀을까? 몇 개의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미야는 버려진 고양이, 모두의 고양이. 

“그렇게 좋으면 아줌마가 데리고 살든가.” 그는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시끄럽다고 악을 질렀고 저 멀리 보이지 않는 창문에서는 “그러는 네가 더 시끄럽다.”라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멀리서 들리는 사람의 소리.

고양이의 겨울, 미야의 겨울, 미야와 미아의 겨울. 나는 미야, 미아, 반복하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길고양이의 생은 짧다.

미야가 오래 살기를 바란다.

아주머니가 상자를 접고 그 안에 담요를 깔아주면, 저녁에는 재활용품을 가져가는 사람이 그 상자를 달랑 집어가고는 했다. 미야에게 집을 선물해주고 싶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집을 사는 것보다는 그것을 주차장 옆 블록에 둬도 되는지가 문제라고 말해주었다. 미야의 볼품 없는 상자마저도 재활용품 수거차에, 고양이를 싫어하는 옆집 사람들에게로 잘도 사라졌다. 미야는 그저 사람들을 잘 따랐다. 털 관리도 할 줄 모르는 고양이, 씨앗을 털에 다 묻히고 돌아다니는, 엉덩이를 때려주면 좋다고 엉덩이를 번쩍 드는 고양이. (엉덩이를 자주 팡팡 때려주는 건 좋지 않다고도 들었던 것 같아서 조심했다.) 

어느 날, 미야가 보이지 않았다. 수소문을 해보니 주인을 찾았다고 했다. 주인은 동네 사람들에게 가끔 미야의 사진을 보내주기로 하면서 인사했다고 한다. 그 후, 겨울이 되기 직전에 미야는 주차장에 있었다. 다시 봐서 반갑긴 반가운데. 의아한 표정을 짓는 건 역시 사람이었다.

미야는 화단 구석에 있었다. 잠시도 떠나지 않은 것처럼.

미야가 즐겨 있던 자리에는 새로운 고양이가 와 있었고.

둘은 어색하게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다.



“다시 버린 거지 뭐.”



미야는 훗날 일산으로 갔다. 좋은 집에 분양됐다고 한다. 나는 길을 가다가 검은 점박이 고양이가 내게 반응하면 놀란다. 혹시 미야일까봐. 눈인사를 하는 취미도 귀퉁이에 밀어두었다. “사람 믿지 마. 언제나 멀리서 의심해줘.” 그렇지만 곁에 와서 꼬리를 다리에 말고 응석부리는 걸 보는 건 좋다.

“고양이 키울 마음 있어?”라는 말에는 언제나 단호하게 싫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꾸 “우리집에서 개는 안 된다.” 말하고는 바닥에 드러누워 개의 얼굴만 쳐다봤다는 아버지의 뒷모습과 나의 뒷모습이 겹쳐지는 것이다. 훗날 고양이의 얼굴을 한 번 보겠다고 바닥에 누워 있을 나의 모습이.

2021년 6월 17일 목요일

곡물창고 관리인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내 직업은 곡물창고의 관리인입니다. 공식적으로는 곡물창고에 ‘곡물’을 입하하는 이들이 창고 관리 권한을 나눠 갖기 때문에, 지금 답변하고 있는 나는 1/7 창고관리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문하는 당신도 공식적으로 1/7 창고관리인입니다. 그런 측면에선 자문자답이군요. (웃는다.)


당신이 노동하는 곳은 어디입니까?

곡물창고와 그 근방입니다. 지금 우리가 산책하고 있는.


곡물창고가 무엇인지 모르는 분들을 위해 곡물창고가 어떠한 곳인지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곡물창고는 ‘비일시적 전자문예를 향한 이용자 연합’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여러 사람이 함께 사용하는 팀 블로그죠. 곡물창고의 필자들은 스스로 정한 연재 기획에 맞춰 계절당 최소 한 번 게시물을 입하하고, 독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에 영향을 미치거나 미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독자에게는 시간 외 다른 값이 요구되지 않고, 필자에게는 자신의 글이 으뜸가는 보상입니다…라는 슬로건이 있군요.


당신은 곡물창고를 ‘비일시적 전자문예를 향한 이용자 연합’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비일시적’과 ‘전자문예’는 각각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전자문예’란 종이 지면과 대비하여 전자 지면을 기반으로 하는 문예를 뜻하고, ‘비일시적’이란 일시적 전자문예에 대비하여 일시적이지 않음을 뜻합니다. 사실 내가 아리송하게 여기는 부분은 ‘이용자 연합’ 쪽입니다. 아무나 붙잡고 묻고 싶군요.


이름이 곡물창고가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거기에는 어떠한 뜻을 새길 수 있습니까?

그냥 갑자기 생각난 겁니다. 큰 이유 없어요. 처음에 이름을 지을 때 ‘천국 곳간’이란 단어가 떠올랐던 것 같기도 합니다. 우편함 주소에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곡물창고는 특정 종교와 무관합니다.)


그곳에서 당신은 무슨 일을 합니까?

창고를 관리합니다. 관리예규에 적힌 자잘한 일들. 제일 많이 하는 일은 입하관리입니다. 새롭게 입하된 게시물이 있는지 확인하고, 교정 요청서를 보내고, 교정이 완료되면 알림판에 올려요. 태그와 제목과 주소를 따고 몇 문장 뽑습니다. 저 말고 다른 사람이 할 때도 있습니다만 대부분 제가 합니다. 메일링을 시작한 뒤부터는 같은 내용을 발송 예정 메일에도 추가합니다. 그때그때 해야 안 헷갈리니까.


당신은 그 일을 왜 합니까?

취미죠. 보통은 회사에서 하기 때문에 취미라고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장님이 모르는 일을 하는 것뿐이죠. 지금 이것도 회사에서 쓰고 있어요(곡물창고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취미입니다. 어렸을 땐 취미로 먹고사는 게 꿈이었습니다. 다들 그렇지요? 아닌가요?


사람들마다 다를 것 같네요. 취미를 일로 만들고 싶지는 않은 저 같은 사람도 있으니까요. 취미로 먹고사는 게 꿈이었다고 하니, 결국 직업으로 연결됩니다. 직업 전선에 투입되지 않았던, 다시 말해 직업이 꿈의 영역에 머무르던 때의 자신과 오늘날 산업 역군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초상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습니까?

취미를 일로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복잡한 이야기가 될 것 같군요. 최대한 천천히 말해볼 테니 잘 들어보십시오. 나, 1/7 창고관리인이 태어나기 전의 일들이 기억납니다… (편집됨.)


당신은 그 일을 통해 무엇을 얻습니까?

곡물창고를 얻습니다.


이 일을 하면서 어려운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15일이나 말일에 11시 50분 발송으로 메일 예약을 걸어놓았는데 11시 30분에 입하가 있으면 좀 지지고 볶고 해야 합니다. 메일을 발송하는 날엔 입하를 자제해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습니다. 막을 순 없겠지만요. 사실 그런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냥 하면 되죠. 진짜 어려운 건 뭔가를 하자고 하는 겁니다. 이거 합시다, 저거 합시다,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필자들에게 그런 얘길 전달하는 게 나한텐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곡물창고 입하물들 각각의 고유한 특징, 또는 입하물들 서로 간에 공통된 특징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모든 태그를 하나하나 이야기해야 할까요? 나의 감상으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개발서」는 쥐로부터 듣는 강연 형식의 프로파간다입니다.
「곡물창고에서」는 가상의 곡물창고를 배경으로 하는 공동 저작물입니다.
「기괴하고 엉뚱한…」은 어느 TRPG 마스터의 NPC 인명사전,
「도시 전설」은 공유될 수 없는 도시의 공유될 수 없는 전설을 다룹니다.
「뒤편 소각장」은 한량의 쓰레기 기획안 불태우기,
「미아와 접시」는 두 가지만 기억하세요: ① 미아=너 ② 접시=떨어뜨린 것.
「바리에테」는 버라이어티 문예 예능,
「박물지」는 박물학자와 그 제자가 등장하는 위키피디아-소설입니다.
「방공호」는 이진쓰레기 시대의 안티아카이브,
「빙터」는 슬픔의 아포칼립틱 판타지 능력자평화물이죠.
「社名을 찾아서」는 아직 없는 출판사의 이름을 짓기 위한 여정,
「사자를 만나고 있을 때 사자가」는 재미없는 SF인 것 같습니다.
「예쓰 예쓰 티쳐」는 학원선생님의 초등논술 일지,
「요새」는 세계 없는 일기로 나 다시 쓰기,
「우주의 성들」은 ‘성’자 돌림으로 써내린 연작 시집,
「직업 전선」은 너른 시공에 걸친 현대의 노동문학입니다.
「캐비닛」은 곡물창고 운영에 필요하다고 주장되는 문서 뭉치,
「헤어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헤어진 것들에 대한 시인의 에세이,
「PIMPS」는 한국의 정치인들을 위한 이미지 컨설턴팅 모음집입니다.
가나다 순이며, 두 편 이상 연재되지 않은 태그는 제외했습니다. 공통된 특징은… 너무 많은 말인 것 같으니 덮어두겠습니다.


종이 게재와 종이 출판, 전자 게재와 전자 출판 사이에는 각각 어떠한 차이점이 있습니까? 더불어 곡물창고의 지향점은 어디이며 왜 그렇습니까?

종이[게재·출판] vs 전자[게재·출판]이든, [종이·전자] 게재 vs 출판이든, 저로선 투여된 노동의 규모·복잡도에 차이가 있다는 동어반복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편집, 출력, 배송, 지속성, 인프라 등등이요. 그러니까 차이점은 어떤 식으로 그 선이 공동관측 가능한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와 관련된 나 1/7 창고관리인의 최대 지향점이라면 역시 편집권의 시연(데모)입니다. 그걸 가리켜 취미라고 한 거죠. 다른 관리인들은 또 다를 것입니다. 이 질문을 받고 궁금해져 친한 필자에게 물어보니 그쪽은 ‘끝까지 버티기’라더군요. 뭘 버틴다는 건지, 끝이라는 게 뭔지… ‘목표는 한중장로’ 같은 소리도 했습니다. 난 그 생각이 썩 맘에 들지 않아요. 데모는 언젠가 끝나야만 합니다. 시작한 사람이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장로 이야기를 하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장로가 죽고 난 뒤 40여 년이 지났을 무렵 업의 동쪽에 물난리가 나서 장로의 관 뚜껑이 열렸다고 하죠. 그런데 장로의 시신은 썩지 않아 마치 산 사람과 같았다고 하는 옛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월드와이드웹이 1989년에 시작되었으니, 오늘날 펼쳐지고 있는 ‘전자문예’의 나이도 인간으로 보자면 아직은 청년기인 셈입니다. 말씀의 저의에 관계없이 언젠가 곡물창고도 폐쇄되지 않겠습니까? 이때 이 폐쇄된(그리고 폐쇄될) 창고(들)에 남아 있는 곡물들은 후대에게 어떤 자원으로 남게 될까요?


그것은 첫째로 묘의 조성 방식에 달린 일이라고 주장해 봅니다. 물난리가 났을 때 관 뚜껑이 슥 열릴 만하게 되어 있는가? 만약 화장된다면? 능지처참된다면? 말들을 달려 흔적을 없앤다면? 풍장된다면? 그런 측면에서 곡물창고를 조성 중인 묘라고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운영 방식이 곧 폐쇄 방식인 셈으로요. 나의 입장에서는 그래요. 곡물창고도 동시대의 틀에서 대단히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나는 □△○을 보면서 이건 어느 정도 곡물창고 스타일이군, 하겠지만 누군가는 곡물창고를 보며 이건 분명히 □△○ 스타일이군,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확실히, 시신이 누구의 것인지가 훨씬 중요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모르는 일입니다. 그게 실은 장로의 시신이 아니었다는 식이죠. 문자 그대로 어제 죽은 사람이 떠내려왔는데, 야 이 시신이 혹시 장로의 것이 아니냐? 그런가? 그렇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장로의 시신이다! 멀쩡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목에다 매달아뒀던 비석-태그가 발견됩니다. 그 다음 이야기는 후대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쓸 것입니다.


오늘날 문예에 있어 자발성이란 어떠한 가치를 지니는 것입니까?

진귀함? 진귀한 것으로 대해진 적 없는? 지나치게 흔해졌기 때문에? 만약 자발성이 제한선을 만든다면? 우리의 제한선은 고안되어야 한다? 얼른 떠오르는 건 이 정도입니다.


곡물창고의 경쟁 업체로는 어떠한 것들이 있습니까? 곡물창고가 살피기에 그 업체들의 특징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제가 보기엔 유튜브를 제외하면 적수가 없습니다. 넷플릭스인가 뭔가가 치고 올라온다던데 아직은 애송이죠. 둘 다 과도하게 크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여러 의미에서요.


그중 하나가 잘려나간 아홉 개의 촉수를 곡물창고에 보관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어떠한 것들이 권장됩니까?

그런 물품의 보관은 권장하지 않습니다만, 마침 저기 보이는 이사야에게 어떤 힌트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곡물창고에 비전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구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구글의 공공화라고 하는 편이 더 맞겠네요. 비전은 클수록 좋고 저의 비전은 소박합니다.

2021년 6월 16일 수요일

학원 강사

이 도시는 아름답다. 특히 밤의 전경 같은 것을 보면 그렇다. 나는 아침에 조깅을 하는 편인데, 날이 춥거나 덥거나 아니면 몸이 피곤해서, 아니면 피부에 간질거리는 반점이 올라왔다는 등의 이유로 매번 나가기가 싫다. 하지만 막상 운동을 나가면 하게 된다. 하지만 그 운동을 시작하기 아주 직전까지 마음이 괴롭다는 것은 내가 남에게 잘 털어놓지 않는 비밀이다. 지금은 도시의 낮이다. 나의 직업은 강사이고, 나는 이곳까지 드리우고 있는 건물의 그늘을 일터 안에서 잠깐 보고 있었다. 계절이 바뀐 것을 느낀다. 마치 누가 놓고 간 과일을 아무 생각 없이 한 입 집어 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 사람과 나는 친한지 친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친하거나 친하지 않다는 건 무슨 뜻일까? 나는 강사이므로 이런 문득 드는 의문들에 대해 한 번씩 생각해보게 된다. 왜냐하면 내게 있어 중요한 것은 내게 가르침을 받는 이들에게도 중요한 것처럼 전달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과 나 사이에는 항상 어떤 종류의 ‘학교’라는 것이 매개로 존재하고 나는 그 매개를 통해서만이 강사가, 아니면 선생님이 된다. 한국말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에게 한국말을 설명하는 것과, 지금 나처럼 그림을 가르치는 일은 같은 강사의 일이긴 해도 조금쯤은, 아니 꽤나 다르다. 예를 들어 이 도시의 아름다움 같은 것을 전하고 싶을 때도 그러하다. 전자는 ‘이 도시는 아름답습니다.’라고 단순한 예문을 적어줘도 끝나는 일이지만 내 일 같은 경우에는 그림을 가르치면서 그때에 있는 연관성으로 지금 마침 생각이 났다는 듯이, 그런 식으로 말해줘야 한다. 그런 일을 계속하다 보면 나는 딴소리를 잘하는 강사로 비춰질 수도 있을 것이고 그것을 나는 조금쯤은 바라고 있다. 지금은 운동은 아니고, 산책할 겸 밤에 밖으로 나왔다. 저 멀리서 물속에 손을 집어넣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들이 손을 물에 잠그고 흔드는 등의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나는 그 아이들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위험하지 않기 때문이며, 때문에 그들이 하는 양 그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된다. 그들은 그러면서, 여기까지 비치기로는 어떤 종류의 웃는 얼굴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그들과 계속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바란다. 내가 늙을 때까지 어떤 종류의 방해도 없이. 그들은 나를 생각하고 있고 나 또한 그들을 생각하고 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그들이 멀리 떨어진 장소에 있다면 나는 달리면 된다. 그들의 마음속에 나는 달리는 사람으로 남을 것이며, 물론 그런다고 해서 하나도 거리가 가까워지진 않을 테지만, 그들이 빗길을 걸을 때. 흔들리지 않는 보폭처럼 나는 그들에게 서명을 남긴다. 그 서명은 알아볼 수 없는 글씨체로 쓰여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 내재하는 여러 곳으로 튀고 싶어 하는 마음들이다. 이 도시는 지금 아름답다. 내 가슴속에서 아니면 먼 미래에,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들이 자라서 다시 오늘처럼 강물에 손을 잠그고 어떠한 생각도 없다면. 나는 그 풍경을 지키고 또한 바란다.

2021년 6월 15일 화요일

생화가 있는 집

“그들은 그들의 가슴을 열고 여네
그들이 심장 하나를 찾을 때까지
그리고 그 심장 안에서 도둑맞은 장미를 찾을 때까지”

― 바스코 포파,  「장미도둑」



떨어진 장미의 머리를 그대로 놔두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는 걸, 그때 나는 모르고 있었다.



이런 문장을 떠올리면서 장미를 바라본다. 꽃을 정기구독하면 어떤 꽃이 올지 모르고 기다리게 된다. 이번에는 미니 장미의 차례였다. 사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소설의 한 장면처럼, 삶이 피어나는 순간처럼, 일상의 한 부분을 보며 속으로 위태로운 내레이션을 까는 것을 여전히 즐기고 있다.



어릴 때 장미 농원에서 살았다. 최상급의 장미는 사람의 키와 견줄 만큼 큰 편이다. 실제로는 접하기 어려운 상품이라 보통 만나기 어렵다는 것, 더운 여름철 팔 토시를 한 엄마와 아주머니의 뒷모습이 보기 좋다는 것, 개가 언덕을 뛰어다니고 꿩이 짖는 곳에 화원이 있다는 것,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자랐을 수 있었겠지. 



비닐하우스의 습도가 기억난다. 거머리를 보던 기억, 비가 온 후, 살이 통통하게 오른 뱀이 몸을 둘둘 말고 쉬는 풍경, 흙냄새와 산의 어둠과 밝음에서 자란 기억. 특별한 삶일까? “그랬구나. 그래서 네가 그런 시를 썼구나?” 선생님의 말에 특별한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는 건, 비밀로 해두자. 서늘한 꽃 냉장고에 들어가서 쉬다가 엎어져 장미를 쏟아버린 어린 시절이란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을 테니까. (종종 개와 함께 번갈아 들어가 장미의 향을 맡고, 몸을 식히고 나오고는 했다.)



엄마의 통통한 손은 온통 가시로 긁혀 자잘한 딱지가 많았다. 한 채의 비닐하우스가 쉽게 타버리기도 했다. 상품 가치가 없는 장미의 잎을 뜯으며 좋지, 싫지, 말하며 개랑 놀기도 했다. 비질을 할 때 쓰레기가 아닌 잎을 모았다. 버스가 없어 길을 걸으며 기도하던 밤은 기억하지 않기로 한다. 뙤약볕, 대추나무, 반정도 눌린 짐승의 사체...... 



아무튼 그 당시 내게 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있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어디선가 쏟아져 나오듯이, 언제나 주변에 존재하는 것. 저 혀를 내밀고 나와 놀고 싶어 웃고 있는 개를 향해 뿌려줄 수 있는 것, 그 개의 이름이 장군이었다는 것도 기억하지 않기로 한다. 장군이는 잘생겼고 남의 집 마당에 들어가 닭을 물어뜯어 긴 쇠사슬에 묶여 있었고. 종자개 역할을 했고.



며칠 전 화훼농장 돕기 일환으로 생화를 산 뒤 생화가 있는 집은 더욱 어색하게 느껴졌다. 집에는 꽃이 있던 기억이 없다. 사방이 꽃이니까 굳이 유리병에 넣어 장식을 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느낀 것도 그러했다. 어디에나 있다. 어디에나 있는 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건 다시 어려운 일이 된다.



책상 화병에는 미니 장미가 꽂혀 있다. 좋은 장미는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빛을 받고 얼굴에 표정이 생기고.



내가 어디에서 살았는지 종종 기억하지 못한다. 능청 같지만 사실이다. 기억나는 건 장군이의 이름, 장군이의 눈매, 학교에 있을 때, 장군이가 팔려 갔다는 것, 그 많은 시간을 보내놓고도 인사를 하지 못했다는 것, 그때 있었던 장미는 다 어디로 갔나. 라디오가 걸려 있던 벽, 그 벽을 보면서 라디오 디제이가 되고 싶다고도 느꼈던 것 같다.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익숙하면서도 약간 뒤틀려 있었으니까. 아주머니들의 곱슬대는 머리 사이로 비치는 햇빛, 비닐하우스에 꽂혀 있는 어색한 창문.



특별하지 않은 삶도 기록되어야 한다고, 어린 나는 생각했을 수도 있다. 장미는 소파 옆에, 책상 위에, 화장대에 놓여 있다. 한 달 뒤에 다시 꽃이 도착할 것이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꽃을 미리 생각하는 것, 심장 하나를 열어 장미를 찾는 순간을 떠올리는 것, 그것이 어떤 일을 불러오는지 지금의 나는 모르고 있었다.


2021년 6월 14일 월요일

첼로 연주자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집이 사라졌기 때문이죠.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서 집이 사라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큰 돌개바람이 다가와 원형의 호선을 그리며 떠올라 먼 곳까지 날아가지 않았을까요. 집이 사라져서 난 슬펐습니다. 왜냐하면 거기 사는 가족 또한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난 그들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도 나를 좋아했을까요? 집이 먼 곳까지 날아간 게 사실이라면 그들이 도착한 그곳은 살기 좋은 땅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나는 이러한 사정을 지인인 탐정의 거처에 와서 설명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이 탐정은 추리를 하지 않는답니다. 평소에는 안락의자에 누워 있기만 하고요. 가끔은 추리 소설을 양손으로 들고 펼쳐 봅니다. 그 책들을 꽤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건 내 인상입니다. 그는 입을 열어 말했습니다. 그것참 별로 대수롭지는 않은 일이네, 라고요. 이것이 대수롭지 않다면 어떤 것이 대수로운 일일까요.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날아간 집을 찾고 싶어? 정확히는 날아갔는지도 어떤지도 잘 모르지만 그의 말을 듣고 있으니 왠지 집을 잃은 일이 블랙잭을 하다가 단 몇 개의 숫자 차이로 아깝게 돈을 잃은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되었습니다. 물론 날아간 집을 찾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좀 더 실제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나는 입을 열어 물었습니다. 당분간 여기서 좀 머물면 안 될까? 날아간 내 집에 지갑이 있었거든. 돈이 하나도 없어. 안 돼. 왜.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악기 하나를 들고 왔습니다. 그것은 육중한 몸체의 첼로였습니다. 내가 연주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악기이기도 하고요. 이것 가지고 돈을 벌면 되겠지. 그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어디서? 저쪽 블록의 성당 옆에서 해 봐. 네 실력이면 할 수 있을걸. 그러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문제는 나의 마음속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나는 입을 열어 말했습니다. 그런데 난 좀 슬퍼. 슬프면 연주를 할 수가 없어. 자꾸 손이 엇나가고, 실수만 하게 되거든. 네가 슬픈 이유는 뭐지? 나는 말했습니다. 집이 사라졌던 일이 슬퍼. 이제 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거든. 그리고 거기 살던 사람들의 얼굴도 이젠 보지 못하게 되었어. 모두가 병이 나서 오랫동안 멀리 떨어진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과 같은 일이지. 그가 말했습니다. 다른 점은 그 돈을 네가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겠지. 넌 실력이 있고, 벌 수 있는데 뭔들 못하겠어? 난 말했습니다. 싫어, 취미를 가지게 된다는 일이 싫어! 난 연주만 하고 싶어. 그 일이 뜻하는 건 항상 연주하는 자리에다가 모자를 가져다 놓고, 이국적인 인상을 주면서 때때로 연주를 멈추고 관객들의 호응에 화답하고, 특히 그곳을 거니는 아무 연관도 없는 관광객들이 웅성거리며 내 쪽으로 다가올 거란 거야. 난 그게 싫구나. 난 연주만 하고 싶거든. 그런데 나는 이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어.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뭘까? 그가 입을 열어 말했습니다. 아름다움. 나는 어쩐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2021년 6월 11일 금요일

가상수


한때는 사람이면 슬픔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슬픔을 가상수처럼 낭비하면서, 쌀을 씹을 때, 콩을 씹을 때, 질긴 줄기를 씹어갈 때, 새로운 물질을 생산할 때 필요한 물처럼. 이제는 슬픔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죽음을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는 더 많다는 말에, 새삼 놀라웠던 기억. 하나의 숨에 하나의 슬픔을 불어넣으며 물을 마시는 세상에서 다시 슬퍼지는 일상에서, 거품이 이는 슬픔을 구경하면서 고민했다.


가장 슬플 때, 보통은 꼬미를 생각할 때다. 가장 기쁠 때, 보통은 꼬미를 생각할 때다. 보통은 내가 사람이라서 가장 괴로운 순간이기도 하다. 꼬미에 대한 글은 《나 개 있음에 감사하오》 책에서도 조금 다뤘는데, 개를 말할 때 어떻게 해야 슬픔을 모르는 듯이 쓸 수 있나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물발자국을 어떻게 안 남길 수 있나.



당근



여름에 가장 좋아하는 건, 개가 당근을 아사삭 씹는 소리를 듣는 것.
안 봐도 알지. 얼마나 맛있게 아껴먹고 있을지.

반만 씹고 반은 바닥에 놓았다가 천천히 아득하게 다시 달달한
붉음을 어떻게 씹고 있을지.

당근의 꽃을 개는 본 적 없고, 작은 잎이 젖히고 갈라지는 걸
궁금해할지 모르겠지만 당근의 맛은 정확히 구별할 줄 아는 개, 너를 지켜보는 여름날의 오후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외출 후 가방을 내려놓으면 가장 먼저 머리를 박고 가방을
뒤적거리는 너에게 당근을 멀리 던져주는 일.

도무지 당근을 좋아할 수 없지만 사람들을 만나면 말했지. 당근을
좋아하는 개는 안다고. 그러니까 나도 좋아한다고.

거기에도 있을까. 풀숲이, 도요새가, 천사가?
거기에도
당근이 있을까.

쏟아진 당근 사이로 너의 짧은 꼬리를, 명주실 같은 털을 본 것도 같은데,

당 근, 하면 너는 어디서든 달려왔지.
이쯤 되면 개는 달려와야 할 텐데.



「당근」 전문



일터에는 이 시가 오래 붙어 있었는데 아이들은 저마다 개가 당근을 좋아해요? 라고 물어보았다. 나는 여전히 당근을 좋아하는 개는 알지만 당근을 좋아하는 건 아니라서 당근을 떠올릴 때마다 하염없이 당근을 보고 있는 눈망울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개는 당근 말고 오이도 좋아했다. 아무래도 아삭한 식감을 좋아했나 보다. 엄마는 외출을 할 때면 당근이나 오이 한 조각을 거실 한가운데에 놓고 문을 닫고 나서야 “먹어” 외치며 자리를 비웠다. 엄마가 자리를 비울 때 외롭지 않게, 엄마의 역할을 채워주는 당근. 나는 당근을 말할 때마다 슬픔을 용수처럼 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낮잠을 자다가 엄마의 외출 소리를 들었다. 이상하게 조용했다. 삼십 여분을 더 잤을까. 문을 열고 나가보니 거실 어둠 속에는 당근을 두고 한참을 쳐다보는 개의 모습이 보였다. 개는 나를 한 번 쳐다보고 당근을 쳐다보며 어서 “먹어.”라는 말을 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한 조각을 어둠 속에서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을 개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문이 닫힐 때 먹어, 라는 말이 안 들렸던 거겠지. 그래도 개인데 너무하다. 허락을 받지 않고 먹어도 개니까 괜찮은 거 아닌가. 


꼬미가 병원에서 혼자 떠난 것도 내 괴로움이다. 살 수 있을 거라고 근거 없이 믿었다. 그날은 비도 왔고, 그날은 시의 마감이 있었고, 그날은 대학원 수업이 있었고, 그날은 개의 장례를 어떻게 치러야 하는지 알아봐야 했고, 거실 한가운데에 잠든 듯이 긴장이 풀린 얼굴로 누워 있는 개의 콧등에 입맞추기도 했다.


개의 장례는 역시 다른 문제다. 유골을 도자기에 담아오거나 유골을 압축해 돌의 형태와 가까운 엔젤스톤으로 담아올 수 있었다. 뼈의 무게와 개의 종류에 따라 돌의 색은 달라진다는데 꼬미의 경우 옥빛이 많았던 게 기억난다. 작은 상자에 돌을 담고 돌아오는 길. 따뜻한 돌이, 전혀 개로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꼬미의 털 일부를 미리 잘라두었던 것이 개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가족은 종종 옷장 작은 상자에 담긴 돌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저마다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종종 꼬미의 털 몇 가닥을 보면서 지냈다. 술 먹으면 울면서 집에 돌아와 몇 가닥을 다시 만졌다가 잃어버리기도 했다. 돌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질 때쯤, 한 가지 소식을 들었다. 엄마가 엔젤스톤을 할머니 산소 옆에 묻어두고 왔다는 것. 의아했다. 외할머니와 꼬미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는데? 엄마는 꼬미가 외롭게 옷장 안에 있는 것보다는 빛 좋은 곳에서 나비도 보고, 새도 보고, 바람도 쐬고, 할머니도 만나면 좋을 것 같아 묻어두었다고 했다. 어른들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를 일.


그러나 지금 그 돌은 다시 책상에 있다. 두 개를 잃어버렸지만, 다시 찾아왔다고 했다. 엄마, 근데 나는 엄마가 돌을 묻어두고 왔다는 날에 꿈을 꿨어. 빛 좋은 곳에서 꼬미가 뒷발로 귀를 탈탈 털고 있었어. 표정이 나른하고 평화로웠어. 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암튼 그런 꿈을 꿨다. 두 개의 돌이 남긴 기억일까. 나는 산보를 할 때도, 일터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도, 지금 이 책상에 앉아 글을 쓸 때도 꼬미라면 어디에 앉아 있었을까,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어떤 것을 냄새 맡고, 어떤 표정과 한숨을 쉬면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을까 생각한다.


꼬미는 잉글리시 코카스파니엘로 사냥 능력이 뛰어난 견종이었다. 비록 도시에서 살아 사냥을 해본 적 없는 슬픈 개였지만. 그런 이상한 슬픔이 있었다. 너무 아팠던 기억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고, 우리는 결론지었다. 꼬미가 가고 몽이를 만났을 때, (몽이도 잉글리시 코카스파니엘) 어릴 때부터 사랑만 받아서 슬픔은 하나도 모르는 것 같다고 결론지었다. 다 꼬미 덕이다. 마냥 귀엽기만 할 것 같은 개의 이야기는 다시 방향을 틀어 슬픔으로 이동한다. 몽이는 현재 일곱 살이며 녹내장을 앓게 되어 이제 곧 눈이 멀 것이라 한다. 개에게 이런 사실을 알릴 수 없다는 게 인간의 안타까움이다. 좋은 거 많이 봐야 해. 지금 내리는 저 눈송이를 텁텁 물면서 웃고만 있을 게 아니란 말이야.


몽이가 앞을 보지 못한다면 사람의 얼굴을 잊고, 어떤 걸 기억하게 될까. 평소라면 움직이지 않았을 텐데, 개가 앞을 못 본다고 생각하니까 서러워져서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갔다. 애견 펜션에 가본 것은 처음이었다. 세상이 많이 좋아졌구나. 몽이는 낯선 곳에서 탐색도 하고 부딪히기도 하면서 돌아다녔다. 그날 나는 윗층에서 잠들었으며 새벽 어둠 속에서 몽이를 마주치게 된다.


앞이 잘 안 보이는 개가 나선계단을 올라와 잠든 나의 얼굴을 보러 온 것이다. 정말 개는 너무하지. 언제 너랑 나랑 같이 잤다고. 어둠 속에서 문 앞에 앉아 있는 털뭉치를 보면서 다시 생각했다. 개들은 정말 너무하다.




눈 멀고 있는 작은 동물에게





말을 해주면 좋겠어

    오렌지나무의 흰 꽃송이가

        눈에 젖은 잎사귀가

            눈송이를 따라 허공을 콱콱 무는

                귀여운 주둥이가







오늘 풍경이 가장 아름답니







            아파 이건 뭐야

                놀라워

                두껍고 질긴 생물

                                앞에서 컹컹 짖으며







말해 주면 좋겠어







                바다에 떨어진 슬픔이 눈송이가 되어 흩어질 때







                눈멀고 있는 개의 눈으로







                                신은 빛을 보고 있다







말해 주면 어떨까







                                폭설에 발 감겨 울고 싶은

                                                                                누군가

흔들리는 꼬리를 보며 웃는다는 걸







                                                    그저 입 벌리고 있는

                                                                작은 동물 때문에





                                                                        살려는 사람, 저기 있다고







「눈 멀고 있는 작은 동물에게」 전문



이 시는 웹진 〈문장〉에서 발표했는데, 쓸 때도 고민이 많았다. 쓰고 싶은 문장은 사실 한 문장이었다. 그 한 문장으로 발표를 한다면 마음이 무거울 것 같았다. (원고료를 그냥 받아가는 기분이니까.) 아무튼 개의 온전한 사랑을 받아본 경험자로서, 나는 저런 사랑을 누구에게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슬프겠지만 웃긴 개의 이야기. 몽이는 이제 화곡동 멋쟁이, 화곡동 힙스독*으로 유명하다. 고글을 쓴 개, 고글을 쓰고 돌아다니는 사냥개.



아무래도 나는 개와는 이별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킴몽과 고글






* 킴몽을 그린 낙서 1, 2.












2021년 6월 10일 목요일

‘tㅣ발점’

“선생님은 말투 때문에 지적받은 적 없죠?”

“어조가 차분해서 그럴걸요.”

아이들의 경우도 그렇다. 보통 시끄럽다고 평가를 받는 경우는 목소리가 크거나 억양이 높았을 때 생긴다. (목소리가 큰 건 죄가 아니지만, 상대방이 불편하다는 걸 모르는 건 죄가 된다.) 정작 수다쟁이인 아이들은 나긋하고 조용하게 재잘거린다. 대부분 어디가서나 조용하다고 평가를 받을, 누구보다도 입을 쉬지 않고 떠드는 시환을 보면서 생각한다. 

말의 높낲이는 중요한 것 같다. 한선생은 직설적으로 말하는 편이지만 친절하게 말을 해서 그런가, 아니면 마지막에 웃어주면서 마무리해서 그런가, 이 부분에서는 누구도 컴플레인을 건 적이 없었다. 아이들 앞에서는 욕할 일도 없고 말이다.

대부분 아이들이 욕을 배우면서 생기는 문제는 이 아이가 어떤 욕을 쓰는지 알려줘야 할 때다. 부모는 자신의 아이가 거친 걸 알지만 어떤 말을 하는지 모른다. 

“선생님. 어떤 욕을 썼는지 알려주세요. 제가 정확하게 알아야 아이에게 말을 할 수가 있지 않겠어요?”

“음. 어머님. 형진이는 상대방을 공격하는 욕을 하지 않고요. 본인이 입버릇처럼 붙은 거예요.”

“뭐라고 하던가요?”

이쯤 되면 한선생도 고민이 된다. 학부모한테 욕을 하는 건 이상하지 않나. 정확한 걸 정확하게 말하는 게 중요한가. 한선생은 나긋나긋한 어조로 전달한다.

“어머님. 형진이가 평소에 하는 말은 좆까, 씨발이에요.”

한선생은 아이에게도 욕의 어원이나 (예전 한선생의 국어 선생님이 그랬다. 그는 성기와 패륜에 대해 알려주었다.) 주변의 평가에 대해, 결국에는 타인이 보는 자신의 평가에 대해 알려주었다. 과연 아이는 이해했을까? 아이들이 배우는 신조어나 욕설의 경우, 매체에서 노출된 것이 대부분이다. 마냥 순진해보이는 애들이 ‘선생님, 아편 전쟁 때, 중국 조졌잖아요.’라는 표현을 쓰면 한선생은 “조졌다, 안 된다.”라고 빠르게 경고하는 것이다.

하루는 아이가 엘리베이터에서 시원하게 욕을 하는 걸 보고 타 부모가 대차게 컴플레인을 건 적도 있다. 한선생은 신이 아니기에, 수업 이후의 행동까지는 터치할 수 없다. 다만 그 아이가 어떤 욕을 했는지 궁금하긴 하고, (아주 시원했다고 하던데) 한편으로는 그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야 한다는 것에 난감함을 느낀다. 아이들은 대부분 “선생님, 그럼 몰래 해도 돼요? 화장실에 숨어서 하는 건 돼요?” 이 정도의 수준으로 답하기 때문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런 느낌이긴 하지만, 답은 역시 “안 돼.”이다. 너는 모르겠지만 화장실에서도 듣는 사람은 있단다.

아이들이 니 취팔러마를 쓰는 건 고전이다. 대부분 저열하다고, 말하면서 끊는다. 밥 먹었냐라는 뜻인데요 비실비실 웃으면 네가 왜 갑자기 밥 먹었냐고 중국어로 말하니, 다 안다, 라고 끊는다. 근데 여기서 시발점이 나온다면?

시발점에 대한 반응은 둘이 있다.

씨발과 비슷한 단어라 일부러 “쌤, 시발점이 뭐예요?” 묻는 경우.

씨발과 비슷한 발음인데 문제에 나와 동공이 흔들리며 뜻을 묻는 경우.

전자의 경우 “왜? 시발자동차 브랜드도 말하지?”라고 답해주고

후자의 경우 “와, 누구야. 선 넘네.”라고 답해준다. 

“아, 저는 그게 아니라,” 

당황하는 아이를 두고 웃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건 그래도 좋은 풍경처럼 느껴진다. 한선생은 첫출발을 하는 시점을 시발점이라고 말해주고, 우리나라 근대화의 시발점은 언제부터인지 수업한다. 그래서 우리의 시발점은, 

“쌤, 그만해요. 기분이 이상해요.”

한선생은 정확하게 발음한다. 

“시발점이 왜?” 

“뭔가 아슬아슬하게 발음이 씨와 시 사이란 말이에요.”

아이의 긴장하는 얼굴을 보고 한선생은 생각한다. 이런 아이들이 나중에는 어떤 욕을 쓰면서 지내게 되는 걸까. 

“선생님은 욕 써본 적 있으세요?”

한선생은 어떨 때는 있지, 라고 답하고 어떨 때는 없지, 라고 답한다. 아이들은 한선생의 욕하는 모습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듯하다. 글쎄. 한선생의 욕의 시발점은 뭐였을까.

찢어진 페이지

영화에서는 어떻게 헤어지나? 소설에서는 어떻게 헤어지나? 사진에서는 어떻게 헤어지나? 시에서는 어떻게 헤어지나? 철학에서는 어떻게 헤어지나? 음악에서는 어떻게 헤어지나? 그림에서는 어떻게 헤어지나? 우리는 왜 헤어지나? 헤어질 때 어떻게 해야 하나? 붙잡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떠날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아이들과 어떻게 헤어지나? 가족과 어떻게 헤어지나? 친구와 어떻게 헤어지나? 연인과 어떻게 헤어지나? 동물과 어떻게 헤어지나? 사물과 어떻게 헤어지나? 종교와 어떻게 헤어지나? 직업과 어떻게 헤어지나? 작업과 어떻게 헤어지나? 도시와 어떻게 헤어지나? 자연과 어떻게 헤어지나? 피, 살, 뼈, 털이랑 어떻게 헤어지나? 영혼과 어떻게 헤어지나? 사랑과 어떻게 헤어지나? 아름다움과 어떻게 헤어지나? 여백과 어떻게 헤어지나? 과거, 진실, 정치와 어떻게 헤어지나? 형이상학과 어떻게 헤어지나? 쓰레기와 어떻게 헤어지나? 책과는 어떻게 헤어지나? 육식과는 어떻게 헤어지나? 침묵과 어떻게 헤어지나? 슬픔과 어떻게 헤어지나?, 정의와 어떻게 헤어지나? 시와 어떻게 헤어지나? 노동과 어떻게 헤어지나? 헤어짐과 어떻게 헤어지나?


사람?

어떻게 헤어지나?

당장 떠나기

나는 자연경관을 즐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 도심 속에서는 숨이 답답했기 때문이다. 나는 작업을 하려고 카페에 갈 때 꼭 식물들을 많이 길러놓고 있는 카페를 찾아다녔다. 왜냐하면 식물 곁에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그 식물들은 관상용이지만 실제로 가까운 자리에 앉으면 나무 냄새, 풀 냄새가 났다. 나는 나무 냄새와 풀 냄새를 좋아했다! 나무 냄새와 풀 냄새는 비슷한 것 같지만 조금 다르다. 나는 그걸 구별할 수 있다. 그리고 조상의 묘가 있는 선산의 냄새도 나는 기억한다. 그때 맡았던 냄새는 나무 냄새, 폴 냄새가 아니었다. 바로 산의 냄새였다! 하지만 그 산의 냄새에는 조상의 묘에 절을 하려고 피워 놓은 향냄새가 섞여 있었다. 나는 향냄새를 꽤 좋아하는 것 같지만 산 냄새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온갖 풀과 나무들의 냄새에 더해 흙냄새까지 났기 때문이다. 나는 흙냄새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비 온 뒤 젖은 땅에서 나는 비 냄새는 꽤 마음에 들어 한다! 갓 성인이 되었을 무렵 나는 향수 한 병을 산 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몸에서 좋은 냄새가 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향수의 뚜껑을 열어서 냄새를 맡아보니 아주 인공적인, 인공적인 냄새가 났다(내가 향에 대해 잘 묘사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나는 향에 대한 묘사에 자신이 없다). 그 인공적인 향은 어쩐지 깨끗한, 아주 깨끗한 공중화장실 냄새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나는 내 몸에서 공중화장실 냄새가 나는 건 별로 내키지 않았기에 그 향수는 안 쓰고 서랍에 넣어두었다. 인공적인 향기는 도심 속의 매캐하고 답답한 공기를 연상시킨다. 나는 냄새가 사람으로 하여금 멀리 떨어진 기억을 확 들게 하는 연상의 작용을 한다고 생각한다. 가끔 봄날에 걸으면 거리에서, 특히 나무와 풀들 주변에서 나는 냄새가 의식된다. 왜냐하면 봄은 공기가 바뀌는 계절이어서인 것 같다. 가끔 봄날의 그런 냄새를 맡다 보면 아주 예전의 일이, 특수했던 어떤 기억이 그곳으로 다가갈 수 없다는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떠오르기도 한다. 그것은 아주 갑작스러운 일이다. 나는 쓰레기 소각장이 있는 동네에서 어릴 때 살았고 그래서 무언가가 타는 매캐한 냄새에 익숙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 그런 매캐한 냄새를 맡았을 때 그런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몇 년 전쯤 평생 걸려본 적 없던 비염이 찾아왔고 그래서 나는 냄새 맡는 기능이 아주 약해졌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다시 좀 나아졌다. 이젠 약도 안 먹는다. 그건 꽤 기쁜 일이면서 동시에 병이란 것을 한 번쯤 생각해보게 만든다. 병이란 무엇일까? 자연에서 유리된 이 도심 속의 삶이야말로, 드문드문 살아서 땅에 뿌리내린 관상용 나무와 풀들을 보면서 생각하건대, 일종의 병이 아닐까? 나는 자연경관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산에 가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왜냐하면 산에서는 위에서도 말했지만 여러 냄새들의 혼합 속에 흙냄새도 나기 때문이다. 나는 흙냄새가 싫었다. 그러면 꽃향기는 어떠한가? 꽃! 그것이야말로 내가 좋아하는 것이다. 나는 자연 경관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하여 이 꽃에 대한 생각을 하기까지 무의미한 생각의 연쇄를 거쳤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시에 내가 언제 한번 걷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런 꽃길이 있었다. 거기는 풀과 나무들과 함께 야생화들이 많이 자리한 곳이다. 그리고 지금은 쓰이지 않는 철길이 있다. 그 선로를 쭉 따라서 걷다 보면, 주택가가 나오고 그건 꽃길이 끝났다는 뜻이다. 아니면 처음부터 그 주택가를 통해 꽃길로 입장할 수 있다. 나는 택시를 부르지는 않고 거기까지 가는 싼값의 교통편을 검색해 봤다. 그런데 거기까지 가는 길이 생각보다 멀어서 그냥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그런데 벌써부터 도심 속의 답답한 공기가 내 앞으로 다가와 있는 것 같아서 난 생각을 바꾸었다. 당장 가야겠다!

2021년 6월 9일 수요일

바퀴하우스



“선생님의 시집, 정말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과 저는 일상을 작게나마 공유하고 있는데,

저와 달리 선생님은 이곳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시는 듯 했어요.”



그는 내게 스피노자의 《지성교정론》을 선물했다. 앞에는 짧은 편지가 적혀 있었는데 조금 부끄러웠다. 나는 아름다운 것만 보려고 하나. 역시 이 시선도 옳지 않다고 느꼈다. 더러운 진흙 속에서도 아름다운 것만 보려 하나. 물론 일터가 진흙이라는 건 아니다. 이곳에서 살아갈 만하다고 느끼는 힘이 있어 기꺼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퀴벌레 이야기를 꺼내본다. 이 이야기는 꽤 더러울 수 있고, 또 이런 말을 하면 읽고 싶을 수도 있으니까. 본인이 선택을 하거나 귀를 살짝 접어두어도 되겠다.



아이들의 이야기는 다른 산문에서 쓰면서 별도로 두고 싶으나 가끔은 모든 것이 이 생활에 함몰되어 구분이 가지 않을 때가 있다. 나를 강사로 두는 시간이 있고, 그들이 “선생님이 시인이에요?”라고 물을 때 퍼뜩 어딘가로 돌아올 때가 있고, 그런 것과는 별개로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서 수업을 할 때도 있고, 다윈의 자연선택설을 이야기하다가 “바퀴벌레” 이야기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나는 스피노자의 책을 말하다가 바퀴벌레로 가는 이 삶이 요즘의 내 삶처럼 느껴진다.



바퀴벌레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소재다. 눈을 희미하게 뜨고 있는 아이들의 눈빛이 변하고 몇몇은 듣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다. 이럴 때는 뜸을 들인다. 굳이 해야 할까? 물론 아이들은 이런 뜸에 더 요동친다. 우리는 바퀴벌레의 생존력에 대해 토론한다. 공기가 없어도 살고 방사선도 견디고 죽기 직전에는 아이큐가 올라가는 존재에 대해. 번식력이 뛰어나 암컷을 죽였을 경우 알집이 남아 있다면 그 알에서 새끼가 다시 태어나는 무한궤도와 택배 상자에 작게 알을 까고 기다리고 있는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는 산으로 간다. 누군가 샌드위치에서 몇 마리의 바퀴벌레를 발견하면 가장 괴로울까, 질문하고. 이제 그들은 샌드위치를 못 먹겠다고 떠들면서도 마리 수를 떠든다. 정답은 반 마리. 누군가의 비명. 다시 수업으로 돌아왔다가도 다른 반에서 이 이야기는 이어진다. 이들에게 바퀴벌레는 사실 머나먼 이야기에 가깝다. 그들이 말하는 벌레는 실험 때 가까이에서 관찰하는 벌레, 혹은 산에서 사는 바퀴벌레 정도이고, 실제 목격한 이들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조의 아파트〉를 생각한다. 변기에서 다이빙을 하며 만화경의 유리조각처럼 퍼졌다가 다시 좁아지는 장면을 떠올린다. 평소 적는 것을 싫어하는 아이들이 다시 물어보며 영화의 제목을 적으려 한다. “선생님, 조? 뭐라고요?” 카프카는 소설 <변신> 에서 한 마리의 갑충벌레가 된 그레고르 잠자를 표지 그림으로 그리지 말아달라 요청했지만 그러거나 말았거나 해맑은 바퀴벌레의 얼굴로 표지를 만든 카프카의 책도 떠오른다. 나는 바퀴하우스에 대해 (종이에 그려진 바퀴벌레 가족의 얼굴) 혹은 어린 시절 일찍 하교하고 집에 왔을 때 목격한 검은 새와 닮은 바퀴벌레에 대해, (이 바퀴벌레는 새처럼 날아다녔다. 그때 가진 가장 두꺼운 과학 교과서로 때려잡았는데, 그 두께감이 볼록하여 책을 덮어두고 그 방을 빠져나왔던 적도 있다. 며칠 뒤 뉴스에서는 미국에서 온 슈퍼 바퀴벌레가 문제라고 떴었다.) 이야기하다가 자연스럽게 다윈의 진화론으로 넘어간다. 선생님은 어릴 때 곰보 여성의 매끄러워진 피부, 바퀴벌레의 괴담을 들으면서 자랐는데, 이거는 숨겨두도록 하자. 마치 내가 바퀴벌레로만 수업을 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정작 시간은 매우 짧다.



이런 이야기로 산문을 몇 페이지는 더 채울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장롱 아래 바퀴하우스에 있는, 끈끈이에 붙은 작은 바퀴의 가느다란 더듬이가 빛을 받아 사르륵 움직이는 걸 한참이나 지켜보던 아이였으니까. 가끔은, 어딘가에 기록하기도 애매하고 누군가와 수다를 떨기도 애매한 일을 남기지 않는 걸 잘못이라고 느낀다. 잘 써야 한다는 것과는 별개의 생각이다. 우리는 수업을 잘 끝냈지만, 다시 질문이 돌아온다. 그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



“선생님. 만약에요. 샌드위치에서 발견된 반 마리가 암컷이었으면요.”


“알.”


어디선가 알, 이라고 외치며 고개를 숙인다. 아이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암컷의 경우 알집이 그대로 있었으면 제가 먹잖아요. 그러면 목에서 알을 까나요?”



나는 건조하게 답해준다. 우리에게는 위산이 있어. 단백질 먹은 거야. 때론 바퀴벌레의 입장도 들어봐야 한단다. 그렇지만 한 달이 지나 여전히 이런 질문 속에 파묻힌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몇 번 웃는다. 과연 이걸 산문집에 실을 수나 있을까.



며칠 전에는 집에서 커다란 바퀴벌레를 발견했다. 모든 이야기가, 나의 죄업이 돌아온 것 같아서 기절하는 게 이런 기분인가 싶었다. 대신 잡아줄 애인이 있어 다행이었다. 비가 온 날에 방충망도 없이 창문을 활짝 열어 들어온 모양이었다. 다음에 또 보면 세스코를 부르자고 난리를 치는 내가 의아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상상 속에서 무수한 바퀴벌레의 알을 보았는걸. 그게 마지막 바퀴벌레였다. 바퀴벌레와 헤어진 이야기는 잘 마무리된 걸까.


그 이후의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자.

(나 때는 화장실 가려다가 비누를 갉아 먹고 있는 쥐도 보았는데.)


아직은, 좋은 거 많이 봐야 하니까.

2021년 6월 8일 화요일

비행선

나는 멀리 떨어진 곳에 닿고 싶다. 지금은 병상에 누워 간호를 받고 있지만 이 몸은 언젠간 나을 것이고 나는 준비가 마쳐지는 대로 내가 염원하던 곳에 가고 싶다. 거기에서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멀리 나왔다는 것에 감회를 느낄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 가문은 부유한 편이어서 아버지께서는 내게 관상용으로 허락된 비행선을 준비해 주셨다. 이 몸이 낫기만 하면, 낫기만 하면 나는 하인스를 데리고 비행선에 올라탈 것이다. 그때부터 비행선의 용도는 이전과는 완전히 뒤바뀌어 순전히 나를 멀리 안전하게 데리고 갈 수 있도록 장수풍뎅이처럼 강력한 내구도를 자랑하게 될 것이다. 탑승자의 안전을 위해 비행선에는 값비싼 헬륨을 가득 채워 놓았지만 나는 아버지에게 부탁드렸다. ‘This is hydrogen.’이라는 문구를 적은 스티커를 내부 관제실 문에 붙여달라고. 왜냐하면 수소는 폭발성이 있는 위험한 기체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위험성으로 인해 수소 비행선은 사장되었지만 그 특유의 저렴한 기체가 갖고 있는 여러 범위로의 범용성! 어디로든 나다닐 수 있고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물건들을 싣고 다니는 유용함에 대해 난 호감이 있었다. 물론 실제로 채워 놓은 것은 helium이니까 이미 안정성은 보장된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그때 나를 보좌해줄 이들 중 하나인 하인스는 나보다 더 병약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내심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집 안에서 가장 병약한 사람은 나여야 하는데! 물론 나는 실제로 병에 걸린 사람이므로 이 집 안에서 가장 병약한 사람인 것이 맞다. 하지만 하인스의 희고 병약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어찌 나를 간호하는 일을 평상시에 잘 처리하고 있는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다행히도 하인스와 나는 기사 편력 소설을 좋아한다는 점에서는 통한다. 만일 그가 그걸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성질이 괄괄한 노인들처럼 침대에 누워 식사를 가져올 때마다 소리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흰둥이 놈! 어서 썩 식사를 가져다 놓고 자리를 뜨지 못할까!’ 물론 훌륭한 가정 교육을 받고 자란 나는 실제로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맛있는 반찬이 있다고 해서 하인스에게 나눠주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자신의 소임을 다할 뿐이고, 그것을 명예롭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아버지께서 비용을 부담해준 관상용 비행선 ‘드럭커’에는(나는 이 이름이 장수풍뎅이 같기 때문에 이렇게 지었다) 내 모든 지식이 집약된 간결하고 아름다운 설계도가 첨부되어 있다. 물론 실제 설계는 비행선 제조 공장에 맡겼지만 말이다! 아니, 사실은 이건 거짓말이고 아직 비행선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단지 내 방 안의 초록색 벽면에 스티커로 붙여져 있다. 사실 내가 걸린 이 병은 낫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 책상 위에는 하인스가 채집해 온 장수풍뎅이가 유리 벽에 갇혀 있고 식사를 가져오는 하인스는 나와 그리 친밀한 관계가 아니다. 비행선은 아직도 공장에서 제조 중이고, 사실 모든 비행선은 이미 퇴역한 지 오래다. 책에서 나는 그걸 읽었다. 나는 멀리 떨어진 곳에 닿고 싶은가? 그러려면 이 병이 낫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길을 떠나야 할지도. 왜냐하면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질 거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때 천사 하나가 다가와서 내게 말한다. 비행선의 죽음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本에 귀속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조금 기다리라고.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그럼 분명히 원하는 곳에 닿을 거라고. 물론 나는 나의 죽음을 그렇게 아름답게 말하는 천사의 말을 믿지 않는다. 나는 천사의 손을 잡고 저 방문을 가리키며 이곳을 나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심 나는 저 천사의 말을 믿고 신뢰할 만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산업에서 비행선을 볼 수 없게 된 지 오래인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럼 나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인가? 그럴지도.

2021년 6월 7일 월요일

달이 잘 보이는 자리에 있어

최근에는 술자리에 갈 일이 없다. 좋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나는 술자리에 가서 술도 제대로 못 마시면서 자리를 채우고 있는 기이한 사람 중에 하나였다. 누군가는 그런 사람이 더 무섭다고 했다. 누군가는 우리는 친해지기 어렵겠네요, 라고 말했다. 자리를 떠야 하는 타이밍을 몰랐고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뼛속까지 유교걸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담배를 피우러 나갈 때, 커다란 테이블에 안주와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비흡연자의 몫도 나였다. 접시에 놓여 있는 젓가락, 붉은 국물이 묻어 있는 냅킨이 반쯤 접혀 선풍기에 흔들리는 걸 보는 남겨진 사람. 6인용 테이블을 혼자 지키는 사람. 대부분의 술자리는 몸이 힘들었던 기억뿐이지만 취기가 올랐을 때 예상치 못하게 들려오는 음악 같은 걸 즐기지 못하는 건 아쉽다.

선생님들과의 자리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어리숙하다. 그때도 나는 자리를 지키는 역할을 충실히 한다. 요령껏 자리를 이동하지 못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동하는 것을 구경한다. 때로는 앞에 놓인 치킨의 살만 유심히 발라 먹는다. “얘가 그런 애가 아닌데.” 나를 데리고 온 누군가가 부끄러울 만큼 집요하게 먹기도 한다. 이런 나를 보고 “그게 컨셉이냐?” 물어본 사람도 있다. 도대체 이런 걸 왜 컨셉으로 잡는지? 그러다가 문득 내가 앉은 자리에서 두 칸 옆으로 이동하게 되면 달이 잘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 자리를 이동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재빠르게 그 자리로 옮겼다.

표정이 밝아졌다는 말에 “이 자리에서는 달이 예뻐서요.”라고 말했고 옆에 그는 “정말 시인이네요.”라고 대답했다. 그 말의 뜻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조롱이든, 칭찬이든, 취해서 아무 의미가 없든 간에. 그때는 머쓱했고, 속으로만 생각할걸 그랬나, 싶었다. 그래도 달이 예뻤으니까 됐다.

자리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건 일터에서 자리를 이동했기 때문이다.

이 자리는 지난주에 퇴사한 동료의 자리다. 그는 자리를 떠나면서도 내가 서랍을 잘 쓸 수 있게 메모를 남겨두었다. 그는 내게 정답 주머니 같은 사람이었는데.

일터에서는 사소하지만 해결되지 않는, 물어보기도 애매한 문제들이 생긴다. 나는 그런 질문이 생기면 그에게 물었다. 가볍게 톡톡 두드리면 빛깔 고운 정답 통이 굴러나오듯이, 중요한 단어를 건네주는 사람이 존재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융통성 있게 해결하라, 가 정답이지만 나는 타인의 오락가락한 감정의 곡선을 같이 타고 가다가 갑자기 나뒹굴며 떨어져 바닥을 짚고 있는 그 기분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을 만나는 일을 하니까 어쩔 수 없다 해도, 수업 때까지는 마냥 행복하게 웃고 있었는데 쉬는 시간 이후 세상 서럽게 울고 있는 아이가 내 반일 때, 같은 반 아이의 목소리가 커서 자기 아이가 괴롭다는 학부모의 컴플레인을 받을 때, 아이가 사춘기라고 엄마와 아이가 서로 말을 하지 않아 결국 가운데에서 전달자가 되어 버렸을 때, 모른 척할 수도 없고 막연한 책임감을 질 수도 없는 애매한 것들의 정답을 찾고 싶었다.

그는 내 감정이 다치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이건 선생님의 비법이라 적지 않습니다. 절 만나면 물어보세요.) 합리적이었다. 이런 선생님을 만났다면 즐겁게 배웠겠다,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뛰어난 아이들을 만나서 숟가락을 얹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내가 너희보다 일찍 태어나서 가르치고 있을 뿐이라고, 세상에, 이런 말을 하는 선생이 내 옆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이제 결혼을 한다.

나는 그를 만나서 “축하드려요.” 인사를 했고 그는 “아, 뒷이야기는 못 들으셨군요?”라는 대답을 받았다. 그는 결혼을 하면서 오랜 직장을 떠난다. 그가 남성이었기에 퇴사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단 것이, 생각의 폭이 좁았다는 증거 같아서 부끄러웠다. 그는 떠날 때도 경쾌하게 떠났다. 좋은 이별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소식을 갖고 연락할게요.” 이 말에 “그렇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연락을 주세요.”라고 말했다. “돈 빌려달라는 말이면 어쩌게요?” 이 말에는 “적당하다면 괜찮아요.”라고 답할 수 있었다. 나는 저런 말에는 언제나 농담을 섞지 않는다. 보통 상대방은 농담으로 듣지만.

그의 책상에 앉아 그가 봤을 법한 풍경을 본다. 책상은 좁고 벽은 깨끗하고 그의 서랍에는 예전에 쓰던 필기구가 정갈하게 놓여 있다. 여기에서는 뭐가 보이려나? 나는 보이지 않는 창문을 그려낸다. 여기서도 달이 보이려나?

국립출판사

‘국립출판사’는 ○○구 □□동 △△빌라 건물의 1층에 있었다. 간판은 정사각형. 안녕하십니까, 하며 길가에 면한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자 입구를 등진 채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던 직원이 벌떡 일어섰다. 젊은 직원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듯 의자를 돌리며 잠시 허둥댔다. 그래도 아주 없는 일은 아니었는지, 대표님은 지금 안 계세요, 약속을 하고 오셨나요, 어떤 일로 오셨나요, 차 드릴까요, 메밀차, 커피, 블랙, 뜨겁게, 정해진 문답을 거쳐 안쪽의 손님용 공간으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책과 잡동사니로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방에서 쓰디쓴 커피를 마시며 직원과 사장이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다. 통화를 마친 직원은 대표님이 한 시간쯤 뒤에 오실 텐데 괜찮으시겠냐고 물어 왔다. 반대로 내 쪽에서 이것저것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직원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며 문을 꽉 닫지 않은 것이 고마웠다. 타이핑하는 소리와 정적이 번갈아 이어졌다. 정적은 무거웠고 타자 속도는 빨랐다. 남은 커피가 링 모양으로 말라 갔다. 손님용 공간 겸 휴게실 겸 창고의 모든 것을 낱낱이 파악했을 즈음, 문이 저절로 쾅 하고 닫혔다. 벌떡 일어나 문을 열자 역시 일어나 있는 직원이 보였다. 직원은 나를 보고 있었다. 어째선지 나는 대표님이 지금 안 계신다고 말하고 말았다. 이것이 국립출판사다.

2021년 6월 2일 수요일

넌 착해?

한선생이 줄곧 해오던 말이 있다. 애들은 선과 악이 없다. 왜 이런 주장을 하게 됐는지 들어나 보자.

복도에서 쪼로로 달려온 낯선 아이가 물어본다. 

“선생님은 착해요?”

한선생은 질문의 저의를 파악한다.

“넌 착해?”

“네. 전 착해요.”

대답을 하고 싶어서 달려온 건 아닐까. 가끔 그들의 행동과 질문을 통해 인간의 본성은 언제쯤 생기는지 궁금할 뿐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성악설을 좋아한다. 선호에 가깝다. 성선설과 성악설에 대한 토론이 있는 날, 성선설 팀 대표가 패배를 선언하고 토론을 시작한 적도 있다.

“저희가 깊게 고민했는데 셋이 모두 성악설이라는 결론이 나왔고 상대방을 설득할 수 없기 때문에 저흰 졌어요. 깔끔하게 숙제 해오겠습니다.”

논리 수업을 할 때도 기억난다. 

“나는 생활 속에서 선후 인과의 오류를 겪었다. 동생은 자신이 견과류를 먹으면 혀가 간지러워서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다고 했는데 몰래 아몬드가 든 빵을 주니까 아무렇지 않게 잘 먹었다.”

역사 수업을 할 때도 기억난다.

“역사 속 인물과 저녁을 먹을 수 있다면 세종대왕님과의 저녁식사를 하고 싶어요. 한정식 집이 세종대왕님 입에 맞으실 것 같고. 앙부일구를 만들 때 어려웠던 점을 물어보고 싶네요.”

“더 궁금한 건?”

“어릴 때, ‘진짜로’ 태조께서 책을 다 가져갔을 때 울었는지?”

예술 수업을 할 때도 기억난다.

“선생님. 고흐는 마스크를 낄 수 없겠네요.”

저의를 생각하지 않는 게 어른의 배려일까. 

어른들은 귀가 없어도 마스크를 낄 수 있는 방법을 우선하는 사회를 생각하라고 말했고 어른들은 고흐의 귀 모양을 본떠 기념품 지우개를 만들었고 탈부착 가능한 귀가 달린 핀을 만들어 팔았고* 어른들은 인간에 대해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고 기록하였다.




*https://philosophersguild.com/products/van-gogh-and-ear-pins





2021년 6월 1일 화요일

리틀 라이언

공책에 곰 인형이 그려져 있다. 이 곰 인형의 이름은 리틀 라이언이다. 이 곰 인형은 리틀 프렌즈라는 그룹에 속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실제 곰 인형 대신 곰이 그려져 있는 이 공책을 품에 안고 잠들었다. 그리고 일어나자마자 당황한 마음이 들었다. 왜냐하면 너무 많이 잤기 때문이다! 이 공책 안에 그려져 있는 리틀 라이언도 멀뚱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불면증이 있는 나로서는 혹시나 하고 이 공책을 품에 안고 침대에 누웠던 것인데 예상보다 깊게 잠들었다. 내일도 품에 안고 자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실제 곰 인형과는 달리 곰 인형이 그려져 있는(나는 이 공책을 600원 주고 샀다) 이 공책은 품에 안고 자기 좋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잘못하면 잠결에 내 몸에 눌려 귀퉁이가 접히게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공책을 코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드는 그림을 코팅해 놓은 책받침처럼. 하지만 코팅은 낱장으로 된 종이로만 할 수 있고... 또 어디서 코팅을 할 수 있는지 잘 몰랐다. 그래서 나는 그냥 최대한 조심해서 이것을 품에 안고 자기로 했다! 다음 날이 되자 나는 서둘러 공책에 접힌 데가 없는지 확인했다. 다행히도 접힌 데가 없었다. 다만... 내가 이 공책을 품에 안고 잠들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들킨 모양이다. 책상 위에 휘날려 쓴 글씨가 적힌 쪽지가 놓여 있었다. ‘왜 공책을 품에 넣고 잠드니?’ 언니의 쪽지였다. 언니가 내 방문을 열고 들어와 말을 걸었다. “네가 자는 모습을 봤어.” “으응.”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왜냐하면 공책을 품에 안고 자니까 깊은 잠에 들 수 있었는데,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먼저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언니, 나 김밥 싸줘.” “김밥?” “으응.” “그런데 왜 공책을 안고 잠들었니?” 나는 오기가 났다. 왜냐하면 먼저 같이 자주지 않은 쪽은 언니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딴청을 부리기로 했다.“내가 문구점에서 600원 주고 산 건데.” “응.” “곰 인형이 그려져 있어. 봐봐.” 그리고 난 공책을 내밀었다. “리틀 프렌즈라는 그룹에 속해 있는 곰 인형이야. 이름은 리틀 라이언.” “그렇구나.” 언니는 내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작은 악어가 그려져 있는 노트였다! “얘도 거기에 속해 있대. 읽어줄까?” “으응. 그리고 다음에 잘 때 책 읽어줘.” “관찰이 취미인 콘은 항상 프렌즈를 관찰하며 비밀노트에 무언가를 적습니다.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 때문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언니와 나는 한동안 멀뚱하게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언니는 얼마 주고 샀어? 그리고 나처럼 잘 때 안고 자?” “난 700원 주고 샀어. 난 여기에 계획이나 그날의 일기 같은 걸 적어. 잘 때 안고 자진 않아.” “그렇구나.” “곰 인형 사줄까?” “아냐, 괜찮아. 그 앤 이름이 뭐랬지?” “콘이래. 리틀 콘. 내가 너랑 요즘에 한동안 같이 자지 않은 것은 네가 그런 방법을 스스로 찾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였어. 그런데 넌 정말로 찾아냈구나. 장하다.” “장해?” “응.” 리틀 라이언은 아직도 멀뚱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작은’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것은 지평선 위에 커다랗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장난감 태양처럼 빈 캔버스 위를 그림 속의 열기로 물들여가기 시작했다.

21년 5월의 모금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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