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9일 수요일

바퀴하우스



“선생님의 시집, 정말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과 저는 일상을 작게나마 공유하고 있는데,

저와 달리 선생님은 이곳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시는 듯 했어요.”



그는 내게 스피노자의 《지성교정론》을 선물했다. 앞에는 짧은 편지가 적혀 있었는데 조금 부끄러웠다. 나는 아름다운 것만 보려고 하나. 역시 이 시선도 옳지 않다고 느꼈다. 더러운 진흙 속에서도 아름다운 것만 보려 하나. 물론 일터가 진흙이라는 건 아니다. 이곳에서 살아갈 만하다고 느끼는 힘이 있어 기꺼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퀴벌레 이야기를 꺼내본다. 이 이야기는 꽤 더러울 수 있고, 또 이런 말을 하면 읽고 싶을 수도 있으니까. 본인이 선택을 하거나 귀를 살짝 접어두어도 되겠다.



아이들의 이야기는 다른 산문에서 쓰면서 별도로 두고 싶으나 가끔은 모든 것이 이 생활에 함몰되어 구분이 가지 않을 때가 있다. 나를 강사로 두는 시간이 있고, 그들이 “선생님이 시인이에요?”라고 물을 때 퍼뜩 어딘가로 돌아올 때가 있고, 그런 것과는 별개로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서 수업을 할 때도 있고, 다윈의 자연선택설을 이야기하다가 “바퀴벌레” 이야기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나는 스피노자의 책을 말하다가 바퀴벌레로 가는 이 삶이 요즘의 내 삶처럼 느껴진다.



바퀴벌레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소재다. 눈을 희미하게 뜨고 있는 아이들의 눈빛이 변하고 몇몇은 듣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다. 이럴 때는 뜸을 들인다. 굳이 해야 할까? 물론 아이들은 이런 뜸에 더 요동친다. 우리는 바퀴벌레의 생존력에 대해 토론한다. 공기가 없어도 살고 방사선도 견디고 죽기 직전에는 아이큐가 올라가는 존재에 대해. 번식력이 뛰어나 암컷을 죽였을 경우 알집이 남아 있다면 그 알에서 새끼가 다시 태어나는 무한궤도와 택배 상자에 작게 알을 까고 기다리고 있는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는 산으로 간다. 누군가 샌드위치에서 몇 마리의 바퀴벌레를 발견하면 가장 괴로울까, 질문하고. 이제 그들은 샌드위치를 못 먹겠다고 떠들면서도 마리 수를 떠든다. 정답은 반 마리. 누군가의 비명. 다시 수업으로 돌아왔다가도 다른 반에서 이 이야기는 이어진다. 이들에게 바퀴벌레는 사실 머나먼 이야기에 가깝다. 그들이 말하는 벌레는 실험 때 가까이에서 관찰하는 벌레, 혹은 산에서 사는 바퀴벌레 정도이고, 실제 목격한 이들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조의 아파트〉를 생각한다. 변기에서 다이빙을 하며 만화경의 유리조각처럼 퍼졌다가 다시 좁아지는 장면을 떠올린다. 평소 적는 것을 싫어하는 아이들이 다시 물어보며 영화의 제목을 적으려 한다. “선생님, 조? 뭐라고요?” 카프카는 소설 <변신> 에서 한 마리의 갑충벌레가 된 그레고르 잠자를 표지 그림으로 그리지 말아달라 요청했지만 그러거나 말았거나 해맑은 바퀴벌레의 얼굴로 표지를 만든 카프카의 책도 떠오른다. 나는 바퀴하우스에 대해 (종이에 그려진 바퀴벌레 가족의 얼굴) 혹은 어린 시절 일찍 하교하고 집에 왔을 때 목격한 검은 새와 닮은 바퀴벌레에 대해, (이 바퀴벌레는 새처럼 날아다녔다. 그때 가진 가장 두꺼운 과학 교과서로 때려잡았는데, 그 두께감이 볼록하여 책을 덮어두고 그 방을 빠져나왔던 적도 있다. 며칠 뒤 뉴스에서는 미국에서 온 슈퍼 바퀴벌레가 문제라고 떴었다.) 이야기하다가 자연스럽게 다윈의 진화론으로 넘어간다. 선생님은 어릴 때 곰보 여성의 매끄러워진 피부, 바퀴벌레의 괴담을 들으면서 자랐는데, 이거는 숨겨두도록 하자. 마치 내가 바퀴벌레로만 수업을 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정작 시간은 매우 짧다.



이런 이야기로 산문을 몇 페이지는 더 채울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장롱 아래 바퀴하우스에 있는, 끈끈이에 붙은 작은 바퀴의 가느다란 더듬이가 빛을 받아 사르륵 움직이는 걸 한참이나 지켜보던 아이였으니까. 가끔은, 어딘가에 기록하기도 애매하고 누군가와 수다를 떨기도 애매한 일을 남기지 않는 걸 잘못이라고 느낀다. 잘 써야 한다는 것과는 별개의 생각이다. 우리는 수업을 잘 끝냈지만, 다시 질문이 돌아온다. 그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



“선생님. 만약에요. 샌드위치에서 발견된 반 마리가 암컷이었으면요.”


“알.”


어디선가 알, 이라고 외치며 고개를 숙인다. 아이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암컷의 경우 알집이 그대로 있었으면 제가 먹잖아요. 그러면 목에서 알을 까나요?”



나는 건조하게 답해준다. 우리에게는 위산이 있어. 단백질 먹은 거야. 때론 바퀴벌레의 입장도 들어봐야 한단다. 그렇지만 한 달이 지나 여전히 이런 질문 속에 파묻힌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몇 번 웃는다. 과연 이걸 산문집에 실을 수나 있을까.



며칠 전에는 집에서 커다란 바퀴벌레를 발견했다. 모든 이야기가, 나의 죄업이 돌아온 것 같아서 기절하는 게 이런 기분인가 싶었다. 대신 잡아줄 애인이 있어 다행이었다. 비가 온 날에 방충망도 없이 창문을 활짝 열어 들어온 모양이었다. 다음에 또 보면 세스코를 부르자고 난리를 치는 내가 의아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상상 속에서 무수한 바퀴벌레의 알을 보았는걸. 그게 마지막 바퀴벌레였다. 바퀴벌레와 헤어진 이야기는 잘 마무리된 걸까.


그 이후의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자.

(나 때는 화장실 가려다가 비누를 갉아 먹고 있는 쥐도 보았는데.)


아직은, 좋은 거 많이 봐야 하니까.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