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11일 금요일

가상수


한때는 사람이면 슬픔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슬픔을 가상수처럼 낭비하면서, 쌀을 씹을 때, 콩을 씹을 때, 질긴 줄기를 씹어갈 때, 새로운 물질을 생산할 때 필요한 물처럼. 이제는 슬픔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죽음을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는 더 많다는 말에, 새삼 놀라웠던 기억. 하나의 숨에 하나의 슬픔을 불어넣으며 물을 마시는 세상에서 다시 슬퍼지는 일상에서, 거품이 이는 슬픔을 구경하면서 고민했다.


가장 슬플 때, 보통은 꼬미를 생각할 때다. 가장 기쁠 때, 보통은 꼬미를 생각할 때다. 보통은 내가 사람이라서 가장 괴로운 순간이기도 하다. 꼬미에 대한 글은 《나 개 있음에 감사하오》 책에서도 조금 다뤘는데, 개를 말할 때 어떻게 해야 슬픔을 모르는 듯이 쓸 수 있나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물발자국을 어떻게 안 남길 수 있나.



당근



여름에 가장 좋아하는 건, 개가 당근을 아사삭 씹는 소리를 듣는 것.
안 봐도 알지. 얼마나 맛있게 아껴먹고 있을지.

반만 씹고 반은 바닥에 놓았다가 천천히 아득하게 다시 달달한
붉음을 어떻게 씹고 있을지.

당근의 꽃을 개는 본 적 없고, 작은 잎이 젖히고 갈라지는 걸
궁금해할지 모르겠지만 당근의 맛은 정확히 구별할 줄 아는 개, 너를 지켜보는 여름날의 오후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외출 후 가방을 내려놓으면 가장 먼저 머리를 박고 가방을
뒤적거리는 너에게 당근을 멀리 던져주는 일.

도무지 당근을 좋아할 수 없지만 사람들을 만나면 말했지. 당근을
좋아하는 개는 안다고. 그러니까 나도 좋아한다고.

거기에도 있을까. 풀숲이, 도요새가, 천사가?
거기에도
당근이 있을까.

쏟아진 당근 사이로 너의 짧은 꼬리를, 명주실 같은 털을 본 것도 같은데,

당 근, 하면 너는 어디서든 달려왔지.
이쯤 되면 개는 달려와야 할 텐데.



「당근」 전문



일터에는 이 시가 오래 붙어 있었는데 아이들은 저마다 개가 당근을 좋아해요? 라고 물어보았다. 나는 여전히 당근을 좋아하는 개는 알지만 당근을 좋아하는 건 아니라서 당근을 떠올릴 때마다 하염없이 당근을 보고 있는 눈망울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개는 당근 말고 오이도 좋아했다. 아무래도 아삭한 식감을 좋아했나 보다. 엄마는 외출을 할 때면 당근이나 오이 한 조각을 거실 한가운데에 놓고 문을 닫고 나서야 “먹어” 외치며 자리를 비웠다. 엄마가 자리를 비울 때 외롭지 않게, 엄마의 역할을 채워주는 당근. 나는 당근을 말할 때마다 슬픔을 용수처럼 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낮잠을 자다가 엄마의 외출 소리를 들었다. 이상하게 조용했다. 삼십 여분을 더 잤을까. 문을 열고 나가보니 거실 어둠 속에는 당근을 두고 한참을 쳐다보는 개의 모습이 보였다. 개는 나를 한 번 쳐다보고 당근을 쳐다보며 어서 “먹어.”라는 말을 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한 조각을 어둠 속에서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을 개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문이 닫힐 때 먹어, 라는 말이 안 들렸던 거겠지. 그래도 개인데 너무하다. 허락을 받지 않고 먹어도 개니까 괜찮은 거 아닌가. 


꼬미가 병원에서 혼자 떠난 것도 내 괴로움이다. 살 수 있을 거라고 근거 없이 믿었다. 그날은 비도 왔고, 그날은 시의 마감이 있었고, 그날은 대학원 수업이 있었고, 그날은 개의 장례를 어떻게 치러야 하는지 알아봐야 했고, 거실 한가운데에 잠든 듯이 긴장이 풀린 얼굴로 누워 있는 개의 콧등에 입맞추기도 했다.


개의 장례는 역시 다른 문제다. 유골을 도자기에 담아오거나 유골을 압축해 돌의 형태와 가까운 엔젤스톤으로 담아올 수 있었다. 뼈의 무게와 개의 종류에 따라 돌의 색은 달라진다는데 꼬미의 경우 옥빛이 많았던 게 기억난다. 작은 상자에 돌을 담고 돌아오는 길. 따뜻한 돌이, 전혀 개로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꼬미의 털 일부를 미리 잘라두었던 것이 개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가족은 종종 옷장 작은 상자에 담긴 돌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저마다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종종 꼬미의 털 몇 가닥을 보면서 지냈다. 술 먹으면 울면서 집에 돌아와 몇 가닥을 다시 만졌다가 잃어버리기도 했다. 돌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질 때쯤, 한 가지 소식을 들었다. 엄마가 엔젤스톤을 할머니 산소 옆에 묻어두고 왔다는 것. 의아했다. 외할머니와 꼬미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는데? 엄마는 꼬미가 외롭게 옷장 안에 있는 것보다는 빛 좋은 곳에서 나비도 보고, 새도 보고, 바람도 쐬고, 할머니도 만나면 좋을 것 같아 묻어두었다고 했다. 어른들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를 일.


그러나 지금 그 돌은 다시 책상에 있다. 두 개를 잃어버렸지만, 다시 찾아왔다고 했다. 엄마, 근데 나는 엄마가 돌을 묻어두고 왔다는 날에 꿈을 꿨어. 빛 좋은 곳에서 꼬미가 뒷발로 귀를 탈탈 털고 있었어. 표정이 나른하고 평화로웠어. 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암튼 그런 꿈을 꿨다. 두 개의 돌이 남긴 기억일까. 나는 산보를 할 때도, 일터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도, 지금 이 책상에 앉아 글을 쓸 때도 꼬미라면 어디에 앉아 있었을까,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어떤 것을 냄새 맡고, 어떤 표정과 한숨을 쉬면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을까 생각한다.


꼬미는 잉글리시 코카스파니엘로 사냥 능력이 뛰어난 견종이었다. 비록 도시에서 살아 사냥을 해본 적 없는 슬픈 개였지만. 그런 이상한 슬픔이 있었다. 너무 아팠던 기억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고, 우리는 결론지었다. 꼬미가 가고 몽이를 만났을 때, (몽이도 잉글리시 코카스파니엘) 어릴 때부터 사랑만 받아서 슬픔은 하나도 모르는 것 같다고 결론지었다. 다 꼬미 덕이다. 마냥 귀엽기만 할 것 같은 개의 이야기는 다시 방향을 틀어 슬픔으로 이동한다. 몽이는 현재 일곱 살이며 녹내장을 앓게 되어 이제 곧 눈이 멀 것이라 한다. 개에게 이런 사실을 알릴 수 없다는 게 인간의 안타까움이다. 좋은 거 많이 봐야 해. 지금 내리는 저 눈송이를 텁텁 물면서 웃고만 있을 게 아니란 말이야.


몽이가 앞을 보지 못한다면 사람의 얼굴을 잊고, 어떤 걸 기억하게 될까. 평소라면 움직이지 않았을 텐데, 개가 앞을 못 본다고 생각하니까 서러워져서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갔다. 애견 펜션에 가본 것은 처음이었다. 세상이 많이 좋아졌구나. 몽이는 낯선 곳에서 탐색도 하고 부딪히기도 하면서 돌아다녔다. 그날 나는 윗층에서 잠들었으며 새벽 어둠 속에서 몽이를 마주치게 된다.


앞이 잘 안 보이는 개가 나선계단을 올라와 잠든 나의 얼굴을 보러 온 것이다. 정말 개는 너무하지. 언제 너랑 나랑 같이 잤다고. 어둠 속에서 문 앞에 앉아 있는 털뭉치를 보면서 다시 생각했다. 개들은 정말 너무하다.




눈 멀고 있는 작은 동물에게





말을 해주면 좋겠어

    오렌지나무의 흰 꽃송이가

        눈에 젖은 잎사귀가

            눈송이를 따라 허공을 콱콱 무는

                귀여운 주둥이가







오늘 풍경이 가장 아름답니







            아파 이건 뭐야

                놀라워

                두껍고 질긴 생물

                                앞에서 컹컹 짖으며







말해 주면 좋겠어







                바다에 떨어진 슬픔이 눈송이가 되어 흩어질 때







                눈멀고 있는 개의 눈으로







                                신은 빛을 보고 있다







말해 주면 어떨까







                                폭설에 발 감겨 울고 싶은

                                                                                누군가

흔들리는 꼬리를 보며 웃는다는 걸







                                                    그저 입 벌리고 있는

                                                                작은 동물 때문에





                                                                        살려는 사람, 저기 있다고







「눈 멀고 있는 작은 동물에게」 전문



이 시는 웹진 〈문장〉에서 발표했는데, 쓸 때도 고민이 많았다. 쓰고 싶은 문장은 사실 한 문장이었다. 그 한 문장으로 발표를 한다면 마음이 무거울 것 같았다. (원고료를 그냥 받아가는 기분이니까.) 아무튼 개의 온전한 사랑을 받아본 경험자로서, 나는 저런 사랑을 누구에게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슬프겠지만 웃긴 개의 이야기. 몽이는 이제 화곡동 멋쟁이, 화곡동 힙스독*으로 유명하다. 고글을 쓴 개, 고글을 쓰고 돌아다니는 사냥개.



아무래도 나는 개와는 이별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킴몽과 고글






* 킴몽을 그린 낙서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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