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17일 목요일

곡물창고 관리인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내 직업은 곡물창고의 관리인입니다. 공식적으로는 곡물창고에 ‘곡물’을 입하하는 이들이 창고 관리 권한을 나눠 갖기 때문에, 지금 답변하고 있는 나는 1/7 창고관리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문하는 당신도 공식적으로 1/7 창고관리인입니다. 그런 측면에선 자문자답이군요. (웃는다.)


당신이 노동하는 곳은 어디입니까?

곡물창고와 그 근방입니다. 지금 우리가 산책하고 있는.


곡물창고가 무엇인지 모르는 분들을 위해 곡물창고가 어떠한 곳인지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곡물창고는 ‘비일시적 전자문예를 향한 이용자 연합’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여러 사람이 함께 사용하는 팀 블로그죠. 곡물창고의 필자들은 스스로 정한 연재 기획에 맞춰 계절당 최소 한 번 게시물을 입하하고, 독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에 영향을 미치거나 미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독자에게는 시간 외 다른 값이 요구되지 않고, 필자에게는 자신의 글이 으뜸가는 보상입니다…라는 슬로건이 있군요.


당신은 곡물창고를 ‘비일시적 전자문예를 향한 이용자 연합’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비일시적’과 ‘전자문예’는 각각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전자문예’란 종이 지면과 대비하여 전자 지면을 기반으로 하는 문예를 뜻하고, ‘비일시적’이란 일시적 전자문예에 대비하여 일시적이지 않음을 뜻합니다. 사실 내가 아리송하게 여기는 부분은 ‘이용자 연합’ 쪽입니다. 아무나 붙잡고 묻고 싶군요.


이름이 곡물창고가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거기에는 어떠한 뜻을 새길 수 있습니까?

그냥 갑자기 생각난 겁니다. 큰 이유 없어요. 처음에 이름을 지을 때 ‘천국 곳간’이란 단어가 떠올랐던 것 같기도 합니다. 우편함 주소에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곡물창고는 특정 종교와 무관합니다.)


그곳에서 당신은 무슨 일을 합니까?

창고를 관리합니다. 관리예규에 적힌 자잘한 일들. 제일 많이 하는 일은 입하관리입니다. 새롭게 입하된 게시물이 있는지 확인하고, 교정 요청서를 보내고, 교정이 완료되면 알림판에 올려요. 태그와 제목과 주소를 따고 몇 문장 뽑습니다. 저 말고 다른 사람이 할 때도 있습니다만 대부분 제가 합니다. 메일링을 시작한 뒤부터는 같은 내용을 발송 예정 메일에도 추가합니다. 그때그때 해야 안 헷갈리니까.


당신은 그 일을 왜 합니까?

취미죠. 보통은 회사에서 하기 때문에 취미라고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장님이 모르는 일을 하는 것뿐이죠. 지금 이것도 회사에서 쓰고 있어요(곡물창고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취미입니다. 어렸을 땐 취미로 먹고사는 게 꿈이었습니다. 다들 그렇지요? 아닌가요?


사람들마다 다를 것 같네요. 취미를 일로 만들고 싶지는 않은 저 같은 사람도 있으니까요. 취미로 먹고사는 게 꿈이었다고 하니, 결국 직업으로 연결됩니다. 직업 전선에 투입되지 않았던, 다시 말해 직업이 꿈의 영역에 머무르던 때의 자신과 오늘날 산업 역군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초상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습니까?

취미를 일로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복잡한 이야기가 될 것 같군요. 최대한 천천히 말해볼 테니 잘 들어보십시오. 나, 1/7 창고관리인이 태어나기 전의 일들이 기억납니다… (편집됨.)


당신은 그 일을 통해 무엇을 얻습니까?

곡물창고를 얻습니다.


이 일을 하면서 어려운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15일이나 말일에 11시 50분 발송으로 메일 예약을 걸어놓았는데 11시 30분에 입하가 있으면 좀 지지고 볶고 해야 합니다. 메일을 발송하는 날엔 입하를 자제해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습니다. 막을 순 없겠지만요. 사실 그런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냥 하면 되죠. 진짜 어려운 건 뭔가를 하자고 하는 겁니다. 이거 합시다, 저거 합시다,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필자들에게 그런 얘길 전달하는 게 나한텐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곡물창고 입하물들 각각의 고유한 특징, 또는 입하물들 서로 간에 공통된 특징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모든 태그를 하나하나 이야기해야 할까요? 나의 감상으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개발서」는 쥐로부터 듣는 강연 형식의 프로파간다입니다.
「곡물창고에서」는 가상의 곡물창고를 배경으로 하는 공동 저작물입니다.
「기괴하고 엉뚱한…」은 어느 TRPG 마스터의 NPC 인명사전,
「도시 전설」은 공유될 수 없는 도시의 공유될 수 없는 전설을 다룹니다.
「뒤편 소각장」은 한량의 쓰레기 기획안 불태우기,
「미아와 접시」는 두 가지만 기억하세요: ① 미아=너 ② 접시=떨어뜨린 것.
「바리에테」는 버라이어티 문예 예능,
「박물지」는 박물학자와 그 제자가 등장하는 위키피디아-소설입니다.
「방공호」는 이진쓰레기 시대의 안티아카이브,
「빙터」는 슬픔의 아포칼립틱 판타지 능력자평화물이죠.
「社名을 찾아서」는 아직 없는 출판사의 이름을 짓기 위한 여정,
「사자를 만나고 있을 때 사자가」는 재미없는 SF인 것 같습니다.
「예쓰 예쓰 티쳐」는 학원선생님의 초등논술 일지,
「요새」는 세계 없는 일기로 나 다시 쓰기,
「우주의 성들」은 ‘성’자 돌림으로 써내린 연작 시집,
「직업 전선」은 너른 시공에 걸친 현대의 노동문학입니다.
「캐비닛」은 곡물창고 운영에 필요하다고 주장되는 문서 뭉치,
「헤어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헤어진 것들에 대한 시인의 에세이,
「PIMPS」는 한국의 정치인들을 위한 이미지 컨설턴팅 모음집입니다.
가나다 순이며, 두 편 이상 연재되지 않은 태그는 제외했습니다. 공통된 특징은… 너무 많은 말인 것 같으니 덮어두겠습니다.


종이 게재와 종이 출판, 전자 게재와 전자 출판 사이에는 각각 어떠한 차이점이 있습니까? 더불어 곡물창고의 지향점은 어디이며 왜 그렇습니까?

종이[게재·출판] vs 전자[게재·출판]이든, [종이·전자] 게재 vs 출판이든, 저로선 투여된 노동의 규모·복잡도에 차이가 있다는 동어반복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편집, 출력, 배송, 지속성, 인프라 등등이요. 그러니까 차이점은 어떤 식으로 그 선이 공동관측 가능한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와 관련된 나 1/7 창고관리인의 최대 지향점이라면 역시 편집권의 시연(데모)입니다. 그걸 가리켜 취미라고 한 거죠. 다른 관리인들은 또 다를 것입니다. 이 질문을 받고 궁금해져 친한 필자에게 물어보니 그쪽은 ‘끝까지 버티기’라더군요. 뭘 버틴다는 건지, 끝이라는 게 뭔지… ‘목표는 한중장로’ 같은 소리도 했습니다. 난 그 생각이 썩 맘에 들지 않아요. 데모는 언젠가 끝나야만 합니다. 시작한 사람이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장로 이야기를 하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장로가 죽고 난 뒤 40여 년이 지났을 무렵 업의 동쪽에 물난리가 나서 장로의 관 뚜껑이 열렸다고 하죠. 그런데 장로의 시신은 썩지 않아 마치 산 사람과 같았다고 하는 옛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월드와이드웹이 1989년에 시작되었으니, 오늘날 펼쳐지고 있는 ‘전자문예’의 나이도 인간으로 보자면 아직은 청년기인 셈입니다. 말씀의 저의에 관계없이 언젠가 곡물창고도 폐쇄되지 않겠습니까? 이때 이 폐쇄된(그리고 폐쇄될) 창고(들)에 남아 있는 곡물들은 후대에게 어떤 자원으로 남게 될까요?


그것은 첫째로 묘의 조성 방식에 달린 일이라고 주장해 봅니다. 물난리가 났을 때 관 뚜껑이 슥 열릴 만하게 되어 있는가? 만약 화장된다면? 능지처참된다면? 말들을 달려 흔적을 없앤다면? 풍장된다면? 그런 측면에서 곡물창고를 조성 중인 묘라고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운영 방식이 곧 폐쇄 방식인 셈으로요. 나의 입장에서는 그래요. 곡물창고도 동시대의 틀에서 대단히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나는 □△○을 보면서 이건 어느 정도 곡물창고 스타일이군, 하겠지만 누군가는 곡물창고를 보며 이건 분명히 □△○ 스타일이군,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확실히, 시신이 누구의 것인지가 훨씬 중요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모르는 일입니다. 그게 실은 장로의 시신이 아니었다는 식이죠. 문자 그대로 어제 죽은 사람이 떠내려왔는데, 야 이 시신이 혹시 장로의 것이 아니냐? 그런가? 그렇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장로의 시신이다! 멀쩡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목에다 매달아뒀던 비석-태그가 발견됩니다. 그 다음 이야기는 후대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쓸 것입니다.


오늘날 문예에 있어 자발성이란 어떠한 가치를 지니는 것입니까?

진귀함? 진귀한 것으로 대해진 적 없는? 지나치게 흔해졌기 때문에? 만약 자발성이 제한선을 만든다면? 우리의 제한선은 고안되어야 한다? 얼른 떠오르는 건 이 정도입니다.


곡물창고의 경쟁 업체로는 어떠한 것들이 있습니까? 곡물창고가 살피기에 그 업체들의 특징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제가 보기엔 유튜브를 제외하면 적수가 없습니다. 넷플릭스인가 뭔가가 치고 올라온다던데 아직은 애송이죠. 둘 다 과도하게 크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여러 의미에서요.


그중 하나가 잘려나간 아홉 개의 촉수를 곡물창고에 보관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어떠한 것들이 권장됩니까?

그런 물품의 보관은 권장하지 않습니다만, 마침 저기 보이는 이사야에게 어떤 힌트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곡물창고에 비전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구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구글의 공공화라고 하는 편이 더 맞겠네요. 비전은 클수록 좋고 저의 비전은 소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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