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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25일 일요일

기억 찻집

여기에선 찻값이 기억입니다. 소중한 것이 아닌 기억은 우리들처럼 버릴 수 있습니다. 한번 따져보세요, 이런 데에서 먹는 차 한 잔의 값으로(꽤나 온종일 앉아 있어도) 얼마만큼의 기억을 선뜻 내밀 수 있는지를요. 아시다시피 기억은 그리 값비싼 것이 아니랍니다. 기억보다는 이야기가, 그리고 이야기보다도 다른 것이 훨씬 돈이 되지요. 우리는 기억을 박제하곤 합니다. 어설픈 기억도, 고통스러운 기억도, 기쁜 기억도요. 나중에 한 번씩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감상에 젖곤 하지요. 그것을 하지 않을 기회를 우리는 팔고 있습니다. 감상은 왜 필요한 것일까요? 어쩌면 그것은 독 안에 기억이 흘러넘쳐 주인의 생각과는 반대로 비어져 나오는 것이지 않을까요. 자리에 앉고 기다리고 있으면 테이블 가운데에 팸플릿을 올려둔답니다. 기억이 적힌 팸플릿이지요. 여기선 기억을 팔 수 있거니와 우리가 이렇듯 매뉴얼을 만들어놓은 기억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하지요. 흥미로운 것부터 하나씩 골라보세요. 그러면서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차를 마실 수 있습니다. 기억을 거래하는 데에는 호의가 필요합니다. 이건 조금 당연한 일이지요. 누가 호의를 가지지 않은 사람을 상대로 자신의 기억을 낱낱이 이야기하겠어요? 그러나 그 호의가 클 필요는 없습니다. 누구나 잊고 싶은 기억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니까요. 여기서 얘기한 것은 최소한의 호의입니다. 그러니 판 기억은 이내 잊히게 됩니다. 그게 언제인지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쩌면 팔고 나서도 오랫동안 안 사라질 수도 있지요. 사람들은 기억을 남에게 내주는 행위를 꺼려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았습니다. 그건 거의 본능적인 거부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터인데, 따라서 우리의 사업은 그리 커질 수가 없었고 단지 이 건물 안에 머무르고 있게 되었어요. 우리들의 주머니 사정도 그리 넉넉하진 않아요. 날씨는 아마 흐릴 겁니다. 잘되지 않았어요. 애초에 그걸 알았지만 기억이 필요한 이유 역시 뭐겠어요? 우리들은 잘 기억하지 못한답니다. 이러한 건물을 왜 사게 되었는지. 텅 빈 눈을 갖고 있답니다. 그 아무것도 우리는 소중하지가 않습니다. 어쩌면 동정이나 두려움의 시선으로 우릴 볼지도 모르겠어요. 그저 당신들의 기억이 우리를 구성하고 있다면요. 물을 가득 담은 풍선을 던져 바늘 끝에 맞출 수가 있는 것처럼, 사실 당신들의 기억이 우리에게 있어도 우리가 당신들이라는 사람이 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걸 알게 되었습니다. 요즘 들어 흔해진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은 두렵기도 하였어요, 당신들이 거의 대부분의 기억을 내놓고(잊어버리고) 우리처럼 백치가 되면 어쩌지, 하고요. 그렇게나 차 맛이 좋았을까요. 역시 그렇겠지요. 애매모호하게 벌었대도 돈은 돈입니다. 기억이 단 한 사람의 것인 것만큼요. 그래서 우리는 남의 기억을 차로 우립니다. 이것은 순전히 빗대어 표현한 것이고, 우리들이 내놓는 차에는 어떤 기억이 깃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저 차 맛이 좋을 뿐이죠. 생각하면서 차를 타요. 무엇을 생각하는지 우린 잘 모르겠어요. 그러면서 생각하다 보면 우리가 받은 기억들이 차에 들어간답니다. 남들의 기억들이죠. 식도락가라면 한번쯤 꿈꾸어봤을 그런 마실 것이지요. 네, 그것뿐이에요. 끔찍한 이야기도 아니고 슬픈 이야기도 아니죠. 이런 얘기가 그래서 재미없게 들렸다면 미안합니다. 당신에게 미안해했던 기억이 하나 있네요. 게다가 당신이 그 기억을 우리에게 팔았군요. 당신 눈으로 보기에 저는 서서 곧게 허리를 펴고 머리를 천천히 숙였군요. 왜 사과했는지는 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 당신이 판 기억이니 당신도 잊었겠지요. 어쨌든 같은 소리를 두 번 해서 미안합니다(그 기억 안에 있는 모양대로 똑같이 허리를 숙인다). 이런 것이 우리의 추억입니다. 우리가 매뉴얼로 만들어놓은 기억은 아주 단순한 종류의 것들입니다. 이렇게 고개를 숙인다거나(고개를 숙인다) 손을 내밀어 악수하는 등(손을 내민다)의 누구나 제 것으로 삼기 쉬운 기억들입니다. 사실 여기서 지불해야 하는 기억들도 그처럼 간단한 것들이랍니다. 복잡한 기억은 설명하기도 어렵거니와 소중한 것이죠. 누가 소중한 것을 팔고 싶어 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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