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20일 화요일

침대

 

어두운 방에 앉아 있다. 날씨가 흐려서 낮에도 불을 켜야 하는 지경이다. 이 집은 2층에 있다. 창문으로는 맞은편 건물이 보인다. 아주 가까이 있다. 그래서 불도 안 켜고 앉아 있다. 어두운 곳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밝은 곳에 있어도 마음이 편안하다. 하지만 어두운 곳에 있어도 마음이 불편할 때가 있다. 내가 지금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항상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 아니다. 내가 지금 이런 문장을 썼다고 해서 말이다. 아마도 그 문장은 평행하게 계속 살아갈 것이고 나는 내 길을 간다. 


빈혈이 있다. 방으로 들어서면서 갑자기 빈혈 때문에 침대로 들어간다. 지금은 오후 한 시이고, 그런데 집 안이 어둡고, 낮에도 불을 켜야 할 만큼 바깥이 어둡다. 하지만 지금은 불을 켤 수가 없다. 그냥 일단은 누워 있자. 얽히고설켜 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말이다. 한쪽에서 일어나는 전쟁에서 B는 힘없는 자의 입장이다. 하지만 다른 쪽에서 일어나는 전쟁에서 B는 오히려 힘 있는 사람들 쪽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얽히고설킨 가운데, 가난하기 때문에, 힘들게 살았기 때문에, 인생에서 엄청난 불운을 겪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 가운데는 오히려 그런 일을 다른 사람이 겪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고, 내가 힘든 일을 겪었기 때문에 세상에 똑같이 복수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있다. 빈혈 때문이 아닌 것 같다. 그냥 누워 있고 싶었던 것 같다. 사실은 아무 생각이 없고 사실 빈혈이 있긴 하다. 거짓말을 하고 집에 왔다. 사실 거짓말을 하고 일을 관두고 집에 왔다. 내가 잘하는 거짓말은 아버지에 관한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고향에 내려가야 한다는, 그런 거짓말을 하고 일을 그만뒀다. 사실 아버지는 돌아가신 게 아니라 집을 나갔다. 아버지는 갑자기 집을 나갔고, 집을 나간다고 하고 집을 나갔지만, 누구도 아버지에게 어디로 가는지는 묻지 않았다. 아버지가 집을 나간 다음 날은 평화로웠는데 왜냐하면 가족들은 아버지가 이 집의 평화를 위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아버지에 대한 소식은 없었고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몇 년 후에 내가 집을 나갈 때 가족들은 나에게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는데, 이제는 내가 바로 그 집의 평화를 위협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들이 지키고 싶었던 평화가 뭘까? 서로 비슷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만 살아남는, 그건 왠지 독재하의 평화와 비슷하다. 

2024년 2월 18일 일요일

초월일기 13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다

내가 

잘하는 

화법을 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감정인지까지 말을 해야만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요즘엔 그렇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고 

말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존재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말을 통해 말을 보는 게 아니라 노력을 본다고 쓸 수도 있다 우리는 말을 하고자 하는 

내게 무언가를 전하고자 하는 그 사람의 성의를 그 사람이 하는 말보다 더 높게 친다 그런데 그 성의를 알아채기 위해선 그 말을 듣는 사람 역시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게 내가 내린 모종의 결론이다 결론이라고 하니 좀 이상한 것도 같지만 

나는 계속 힘을 내야 하는 상황에 

조금

지치기도 했고 그럼에도 힘을 내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


그녀는 몹시 피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하지만 그건 그녀가 정말로 원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다만 그녀가 원하는 일에 그녀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해야만 하는 '노력'이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노력을 아무리 해도 지치지 않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그녀가 그녀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써내려가는 순간이었던 것도 같다. 혹은 어떤 의도나, 해석에서 벗어나서 뭔가를 써내려가는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것을 써내려가는 순간에도, 그것을 어떻게 전달할지에 대해 생각해야만 했고 그 방식에 대해 생각하는 일에 피로함을 느꼈으며 그리하여 곧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같은 상태에 직면해 베개를 팡팡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몹시 불안했고

어쩌면

우울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뒤통수에 달라붙은

악령 같은

어떤 이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애쓰고 또 애썼던 걸지도 모른다. 어떤 이? 그녀는 문득, 왜 자신이 그 사람을 '어떤 이'라고 지칭했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10분 간격으로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지만, 자신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닌가? 알았나. 안다고 해도 그녀는 모른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몹시 지쳐버렸고, 그러나 그녀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자신이 지쳤음을 자각하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지쳤다. 그녀는 그것을 인정해야 했다. 



2024년 2월 17일 토요일

신발을 끄는 녀석들이 있다

우리는 집중을 요하는 종류의 노동을 한다. 우리의 일에는 많은 대화가 필요하지 않다. 대화는 방해에 더 가깝다. 키보드와 마우스, 프린터, 어쩔 수 없는 전화통화 소리 등을 제외하면 사무실은 조용하다. 말 시키지 마세요... 그런데 이 조용한 일터에서 신경을 매우 거슬리게 하는 소리를 내는 딱 세 사람이 있다. 오갈 때마다 슬리퍼를 끌며 귀를 긁어놓는 그 셋, 공교롭게도 그들은 모두 관리자다.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않는다. 신기할 정도로 그 셋만 한 사람처럼, 지금 이 소리를 잘 들어 두라는 듯, 내가 지금 지나가고 있다, 내가 지금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아 두라는 듯 군다. 이상한 일이다. 그들과 우리는 나이로도 성별로도 구분되지 않는다. 그들은 관리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인가? 그저 발이 무거운 사람들이 우연히 관리자가 된 걸까? 아니면 발이 무거운 종류의 사람만이 관리자가 될 수 있는 걸까? 발의 무거움과 관리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성향 사이에 어떤 유전자적 연관이 있는 걸까? 어쩌면, 정말로 자신의 움직임을 알리기 위함일까? ‘발 끌기’는 필요에 따른 관리 업무의 일환일까?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는 없고 수긍할 수도 없다. 그들이 무릎을 더 높게 들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힘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 힘에 맞설 힘... 일테면 그들이 무릎을 더 높게 들도록 만들 힘이 필요하다고 하면 어떨까? 하지만 어떻게? 칙 칙 칙 칙 소리가 들릴 때마다 한 문장씩 떠올려 나는 다음과 같이 쓴다...

어쩌면 이 신비에는 보다 미묘한 역학이 있는지도 모른다. 혹시 실체는 그 반대가 아닐까? 신발을 끄는 편이 더 자연스러운 일인데, 다만 ‘눈치를 보는 이들’만이 관리자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발을 끌지 않는 거 아닐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발을 끌지 않는 묵약이 우리 사이에 작동하고 있는 것이라면? 눈치를 보느라 그런 게 아니라, 혐오스런 녀석들과 스스로 구분되기 위해, 혐오스러움을 양각하기 위해? 이런 상태는 작지만 고약한 불행이다. 우리에게나 그들에게나 그렇다. ‘나한테 일 시키는 사람’이 무조건 싫어질 수밖에 없는 이 구조를 좀 움직일 방도가 필요하다. 그게 내가 느끼는 사태다. 괜찮은 일터를 위해서다. 내가 여기에 몇 시간을 있는데... 괜찮은 일터라는 건 뭔가? 임금, 노동 강도, 노동 시간, 여러 가지로 얘기할 수 있겠지만, 참여가능성으로 나는 정리하고 싶다. 일이라는 총체와 나 사이의 관계가 종합적으로 수긍할 만한가? 나의 수긍 여부가 일터의 요소들 중 하나로 주요하게 다뤄질 수 있는가? 너와 내가 어떤 직무와 직급을 맡고 있더라도? 너와 내가 어떤 노동을 하고 있더라도? 관리자들의 신발 끌기는 수긍하기 어렵다. 그 이유가 그들에게 있건 우리에게 있건 그렇다. 나의 이 의견은 적어도 그들의 보행 습속의 지속보다 주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일터에 참여해야 한다... 일터는... 민주화되어야 한다... 나의 정신을 좀먹는... 일터는... (칙 칙 칙...)

그들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그들의 잘못만으로 둘 수는 없다. 그들이 잘못을 독점하게 둘 수가 없다. 관리자들도 일터의 동료다. 동료가 아니라면 동료가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어떻게? 방법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어떤... 지금 무슨 방도가 있지? 공공에 호소? 디지털대자보 같은 것을 쓴다...? 관리자... 신발끌기... 철폐? 캠페인...? 킹론화(인민머법원)는 우리의 최종심급이다. 이 사안에서 그럴 수는 없다. 그 바로 밑의 하급심은 아마 노조를 통한 협상과 쟁의, 또는 어떤 종류의 법적인 신고일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큰일이다. 신발을 그만 끌게 하는 정도라면 그 아래에 뭔가 있어야 한다. 역으로 가장 낮은 단계로 가보면? 일터에서의 잡담이나 한숨, 우정보다는 가벼운? 동료애? 같은 것들일까? 어쩌면 신발을 끄는 녀석들에 대한 뒷담화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속은 좀 시원해질지 몰라도 녀석들이 신발을 그만 끌게 하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가장 위와 가장 아래 사이가 비어 있다. 일터를 위한 규약이랄지 구조랄지 뭐라 할지... 진실로 필요한 바로 그 부분이 비어 있다고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비어 있음이 위아래로 문제를 뻗치며 위아래로도 문제를 만들고 있다. 적어도 여기서는 그렇다. 어쩌면 필요한 것은 평등한(즉 상향식) 의사 표현 구조일 것이다. 그래, 분별이 있는 대화가 필요하다. 대화 양식이. 회의 시간? 하지만 그걸로 정말 되나? 아닌데... 회의는 고통인데... 건의라는 것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평등한 의사소통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그건 말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모두 말높임/말낮춤 같은 소리는 말고, 또 개개인들의 능력으로 치환되지 않도록 하면서...

의사소통이 평등하려면 실제로 평등해야 한다. 그렇담 ‘실제로 평등’이라는 게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해야 실제로 평등해질까? 고치려면... 이걸 고치려면... 힘이 나눠져야 한다. 어떻게 힘을 나눌 수 있나? 진실로 필요한 건 대화가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임금 평탄화다... 직무 순환이다... 선출 대표다... 그거면 되나? 그 정도면? 하지만 사내에서만 그래서는 곤란에 빠진다. 그것은 전염되어야 한다. 평등은... 사내와 사외의 경계는 더 흐려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최악의 버전과 최선의 버전이 동시에 존재한다. 경계의 흐려짐도 그렇다. 발을 끈다는 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관리자들이 신발 끄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는, 외주 교정자가 되어야 하나? 고치려면... 이걸 고치려면... 우리는 이미 곤란에 빠져 있다. 진실로 고쳐지길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제도만이 아니다. 그것은 제도들의 바로 위와 아래에, 앞에, 뒤에 있다... 무릎을 들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건 더 높이 들게 만드는 힘이건 힘이 구성되는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아니면? 아니면 모든 것을 다시 처음부터 생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좀 뜬금없지만, 노인성 질환으로 발을 끌던 우리 할머니 생각이 난다. 할머니는 지금 납골당에 계시고... 명절 때가 되면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몰려든다. 칸칸이 들어찬 함들 앞에 서려고 그 수많은 사람들이. 그래... 다 관계가 있어... 나 교정공이 보기에는...

2024년 2월 14일 수요일

역전

세계관은 자신이 가진 잔혹의 정도로 당신에게 말을 건다. 과학이 인간을 별로 좋게 보지 않음에 따라 밀려나고 별다른 주거가 없는 사람들은 안주할 수 있는 가상 공간에 대한 눈높이가 까다로워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까다롭다는 것은 그 욕구 불만이 지속되는 경우 각 문화 산물들의 내용에 대한 감식안, 민감한 정도가 아니라 그 까다로운 기준을 어떻게든 무마, 후퇴, 폐기시키려는 어떤 성급한 활동을 추진하게 되기도 하는데 결국 돈은 유한한 자원이니만큼 그들의 생각 깊숙이에 그 불만족스러움은 쌓여가는 중이었다. 사람들은 잘 만족하지 못했는데 예전처럼 다수의 게임들을 사버린 뒤 몇 날 며칠이고 플레이하면서 자신의 만족과 불만족에 대해 뭔가를 알아가기에도 경제 불황으로 돈이 떨어져 버렸다. 사람들은 뭔가를 배우고 스스로 생각하는 대신 무지향적으로 자기 자신을 어떤 국소한 분야에 투신시켜 훈련하는 일을 즐겼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과학을 애호했다. 과학이 이토록 심각해진 뒤에도 과학이 심각한 위협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에는 논쟁적인 여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 사람들의 존재 탓도 있었다. 아키라가 성년이 된 이후로 현실에 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일부는 그 일에 환호했다. 조금 기이하게도 현실이 게임을 닮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간 게임에서 괴물들을 베어버리는 기술을 연마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적절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태를 위험하고 심각한 것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들이 이미 작성했었던 이념이 작동하기 시작한 탓이다. 사회적 분위기의 변혁 주기가 빨라짐에 따라 다분히 레저 활동에 가까워보였던 길드들이 이번에는 앞질러 권위를 갖고 이익 집단이 되어 신입 공채를 진행하기도 했고 아키라도 한 집단에 소속되어 거기 소속될 만한 이들을 주변에서 찾는 일을 했다. 그들은 앞지른 것이었지만 아키라의 경우 이미 뒤늦은 느낌도 있었다. 그는 이 시대에 적합한 것 같기도 했다. 현실에 괴물들이 나타나게 된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일차적 해명이 끝난 상태였으며 그 조사는 오래전부터 있어왔다고 한다. 각국의 기관들을 통해 권력자들은 그런 일이 실제로 현실에 일어나기 전부터 예측된 사실이었음을 아는 상태로 정책을 만들었다. 놀랄 일은 없었던 것이다. 어떤 이들은 현실에 나타난 그 괴물들에 원더Wonder라는 이름을 붙였고 각국의 군대들은 그 괴물들을 배제하며 조사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세계적인 범위에서 각국의 권력자들에게 괴질이 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반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게 했으며 때로는 공포의 감정으로 진전되기도 했다. 세계는 분명 이전보다 더 잔혹스러워지고 있었고 그것은 과학이라는 체제가 인간을 적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어떤 컬트들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컬트가 아닐지도 몰랐으며 주로 뒤에서 암약하고 있는 과학 쪽의 부정적인 뒷이야기에 대한 세계관이 뒤늦게 그려지기 시작했고 언론에 뿌려지는 보도 자료들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지금껏 출시된 대부분의 사이버 펑크 게임이 그렇듯이 출시 초기에는 인기를 끌었으나 컨텐츠의 종료가 도래하는 시점이 빠른 탓에 금방 사그라지는 그런 부류들과 현실은 동일하지 않았다. 현실에서 후퇴할 곳 따윈 없었던 것이다. 의외로 사람들은 게임을 즐길 땐 완고한 면이 있었다. 지금껏 불감증이던 사람들이 현실에 일종의 게임 클리셰적 사건이 생긴 일에 몰래 기뻐하기도 했고 그런 이들은 그 일의 확산에 기여했으며(소문이나 풍문의 방식으로) 그런 사람들끼리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는 그런 일도 빈번했다. 어떤 사람들은 물론 괴물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의 존재는 임의적으로 산재해 있었는데, 현시점 괴물에 대한 보도 자료들은 전부 경제의 원활한 범지구적 선순환을 위한 인간 배제적 체제, 일종의 소비재들에 대한 강압적 홍보 및 각 국가별의 통제 수단이라 주장하며 그것을 믿지 않음에 몸담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런 사람들이 실제로 꽤 많았고, 이 문명은 괴물을 시민에게 접근시킬 정도로 퇴락하진 않았다는 점이 그런 아젠다를 부추기는 데에 일조했다. 혹은 그 괴물이 실제로 그들의 말처럼 존재하지 않았던 걸 수도 있다. 그러한 입장에 대한 찬반 쪽의 입장들은 일반 시민이 접근 가능하게 하는 데에 신념을 가진 위키 문서에 잘 정리되어 있었다. 다소 피상적이거나 혹은 이르게도 괴물 사냥꾼들이 등장함에 따라 그들이 갈아끼울 강화형 의수, 인체 파츠 등을 실제로 현실에서 판매하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주로 이베이 옥션에서 거래되었는데 그것은 호들갑인 걸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진지하며 냉엄하였고 가차가 없었다. 마치 재난에 대비하는 특정 국가의 자가 주택 보유자들처럼 말이다. 어느 것에도 만족하지 못한 채 눈높이가 까다로워져 있던 사람들은 경제 상황이 불안정한 쪽으로 치달음에 따라 과학이라는 거대하고 위압적으로 작용하는 체제에 대한 팔자 좋은 관념화를 잠시 그만두고 그나마 익숙했던 일에서 생계 수단을 구하게 되었다. 어떤 순박한 게임사는 지금 이 사회의 분위기를 다분히 취재하는 방식으로 이 현실의 체제와 아젠다, 문제 사항들을 기삿거리처럼 만든 게임을 출시하기도 했는데 그와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새로운 게임이 출시되었다. 그 게임의 경우 앞서 말한 까다로운 눈높이의 사람들을 거의 만족시킬 정도였다. 아주 방대하고 구체적인 볼륨들의 가상적 공간을 주거 공급하듯이 전 인구에 필적하는 단위로 서비스하는 데에 성공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 가상적 공간은 현실을 대체하기 시작하였고, 이 즈음에 게임 산업 속의 컨텐츠 경쟁이 잠시 냉각된 채 시대를 다년간 지배할 만해 보이는 이 게임에 같이 머리를 맞대고 대항 IP와 원천기술들에 대한 논의들이 시작되었다. 아키라는 지금껏 알고 지낸 지인들과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이 시대의 어떤 과열화 양상 속에서 같이 아르바이트를 한 뒤 그 거대 게임에 대한 게임 접속용 이어셋을 구매하고 그것을 생계 수단으로 삼을 작정을 했다. 그들의 분위기는 진지하고 엄숙한 기미까지 있었다. 그들은 돈을 벌기도 전부터 정기적으로 보육원에 후원을 하자는 데에 의견을 같이 했고, 그 액수는 여러모로 늘어날 예정이었다. 그들은 수입원을 찾아낸 뒤 점점 잔혹스러워지고 있는 세계의 어떤 분위기에서 휘발성의 음악들을 즐겨들었다. 그 세대의 메이저한 취향이기도 했다. 그 게임은 흥분의 요소뿐만 아니라 안주하고 안온한 휴식의 느낌을 줄 수 있는 기회 및 장소들을 제공하는 데에도 성공적이었고, 그들은 점점 그 게임에 익숙해져 가며 여러 가지 전투 기술들을 배웠다. 그 세계관에서는 전투 또한 아주 중요했다. 다른 게임들처럼 말이다. 아키라는 대형 기업으로 도약한 그 게임사에 대한 감사함까지 들기도 했다. 그들은 그 게임을 하는 데에 비교적 아주 적합했던 것이다. 과학의 잔혹을 그 세계관 내에서 과장시켜 보여주는 것의 반대는 과학이 보다 덜 잔혹함을 어떤 세계관 컨텐츠 내에서 보여주는 것도 있었고, 혹은 현실이 게임보다 더 잔혹스러워지면 된다는 것도 있었다. 후자의 것이 실제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시대의 범인이 과학 체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한 과학 체제에 대한 저항 정신이나 수상쩍게 그들이 쥐고 있었던 권력 조건들에 대한 강력한 감찰이 벌어지기 시작했으며 인간의 생명을 최우선 가치로 놓는 주의 주장이 점차로 힘을 얻기도 했다. 그러면서 앞서 말한 경제 상황 때문에 현실이 보다 더 잔혹스러워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은 여러모로 익숙했던 사이버펑크라는 어떤 세계로의 변화, 도약이 이뤄지기에 적합한 상황이 되고 있는 듯했다. 시대의 그런 변화는 낯설다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역설적으로 이젠 과학 기술이 시대 정신의 분위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기민했던 것이다. 어느 독재 국가에서는 이 시점에서 죄질이 있는 과학에 대해 총력을 기울여 원천 기술을 서둘러 발전시키려 한 탓에 국제 사회로부터 아주 심각한 수준의 제재를 받기도 했다. 이런 사항들에 대한 사변적이고 관념적인 접근은 이미 효용을 다했다는 데에 아키라는 어쩐지 재밌기도 했고 흥분과 희열을 느꼈다. 게임 안의 생계활동을 위해 현실에서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기도 했다. 그것은 인맥 쌓는 일과 어느 정도 유사했다. 게임에서 나온 아키라는 이어셋을 낀 뒤 잠을 잤다. 현실은 벌써 어떤 악의나 범인의 존재 없이도 그가 바라고 염원하던 것과 유사해지고 있었다.

2024년 2월 1일 목요일

24년 1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누계)

모든 격려: 0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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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총격려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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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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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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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9,177원 (0원 + 298,664원 + 513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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