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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3일 화요일

교정의 요정

교정의 요정이 나타나 내일까지 이 원고를 다 교정해 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교정의 요정은 그 반대의 일을 합니다. 몇 명의 사람이 매달려 아무리 눈이 빠져라 교정을 보더라도 인쇄된 책에 반드시 하나 이상의 오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교정의 요정의 소행입니다. 맞춤법을 지적하는 글의 어디 한 군데는 반드시 틀리기 마련이라는 사실, 그로부터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도 있을 겁니다. 그 또한 짓궂기 짝이 없는 교정의 요정의 소행입니다. 교정의 요정은 문자와 비문자 사이 틈새 차원에 살고 있습니다. 그 차원에 얽혀 있는 것은 인쇄소, 인쇄기, 출판사 사무실, 교정공과 디자이너와 저자의 컴퓨터 내부, 광케이블, 전화선, 수많은 사람들의 뇌신경, 그리고 읽힘이 일어나는 시간과 일어나지 않는 시간, 전 세계 언어문화의 흐름... 글이 책으로 되기 위하여 추상적으로 물리적으로 거쳐 지나가는 모든 것입니다. 교정의 요정은 양지바른 데서 다리를 꼬고 드러누워 있다가 내키는 때가 오면 손깍지를 쭉 밀고 활동에 나섭니다. 한 글자를 슬쩍 바꾸고, 자음이나 모음 한 개를 슬쩍 돌려놓고, 한 칸을 지우고, 두 칸을 넣고, 선과 숫자를 밀고 당깁니다. 그냥 순전히 장난으로요. 어쩌면 요정에게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어떤 의무가 있는지도 모릅니다만, 어쨌든 교정의 요정의 개입은 불가항력입니다. 언제 개입하는지 알 수 없고 어떻게 개입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냥 자기 맘대롭니다. 하나의 거역할 수 없는 신비이지요. 따라서 완벽한 책 같은 것은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점을 적어도 우리 교정공들은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걸 틀릴 수 있느냐, 도대체 왜 아무도 못 본 거냐, 이거를 도대체 왜 틀렸냐고 길길이 날뛰는 이가 있다면 교정의 요정이 그랬다고,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는 속삭여 주십시오.

2024년 4월 15일 월요일

나의 교정 노하우들

나의 실전 교정 노하우들을 대공개한다.

  • 갈지자교정
  • 일필휘지로 썼니? 나도 갈지자로 본다. Z자로 휘저으면서 한 번의 내려감으로 맞춤법과 띄어쓰기만 본다. 뭔가 부족하게 느껴진다면 2회 수행하여 문장의 뜻까지 보는 ZZ교정으로 보충.

  • 5% 샘플링교정
  • 임의의 한 페이지를 펼친다. 틀린 것이 있는지 찬찬히 본다. 틀린 것이 있다면 책 전체에서 해당 오류 패턴만 찾아 수정한다. 모두 수정하였으면 다시 임의의 한 페이지를 펼친다... 전체 페이지수에 0.05를 곱한 수의 임의의 페이지를 확인.

  • 카체이싱교정
  • 막히지 않고 끝까지 가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는 교정. ‘일단 본다’는 데에 주안점을 둔다. (전복폭발엔딩)

  • 통일선봉대
  • 친구들아 그날은 반드시 온다! 소원은 통일, 오직 통일 외길로... 문자와 문자 사이, 벽과 벽, 선과 면, 너와 나를 지나... 차원을 건너 스타일을 통일하는 데 주력한다. 오직 숫자와 모양만 보며 다른 것은 신경쓰지 않는다.

  • 해킹교정
  • 음모론에 맞서는 하나의 방법: 음모론의 논리 안에서 음모론을 해킹(예: 백신 접종 후 50분 내로 150cc의 미지근한 물을 마시면 인간 기지국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 어순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조사 수정·문장부호 추가 등 최소한도의 몰래 교정. 자기가 쓴 거 고치는 데 질색하는 저자의 엉망 문장을 어떻게든 ‘규범상으로는’ 맞게 만든다.

  • 메소드교정
  • 폭주하는 교정욕망을 평상시에도 풀어놓는(unleash)다. 업무 중이건 아니건 교정 ON 상태로 만사를 바라봄으로써 언제 어디서든 어디로든 용암이 흐르듯 무엇이건 교정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한다. ‘모든 것이 마뜩잖다!’

  • 이빨부수기
  • 이가 부서져라 이를 악물고 교정 & 쉴 새 없는 당분 공급의 투트랙 접근. 악으로 깡으로 퇴근까지 닥치는 대로 고치면서 버틴다.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죽을 수도 있습니다). 동시에 탕비실 운영 관리에 대한 강력한 민주적 개입을 위한 사내 조직화에도 매진.

  • 웃는얼굴교정
  • 웃는 얼굴을 만든 채로 교정한다(거울을 보면서 사전 연습). 그 어떤 쓰레기 같은 교정지 앞에서도 웃는 얼굴로 뇌를 속임으로써, 다른 건 몰라도 정신위생 하나만큼은 확실히 챙긴다. 꼬리로 몸통을 흔드는 비책. 개인적으로 가장 애용하는 방법으로서, 기본 교정 기법으로 적극 추천.

  • 킬러교정
  • 다들 살인을 좋아한다. 요즘 세상에 재밌으려면 무조건 살인이 들어가야 한다. 자신을 킬러라 생각하며 오류를 찾아내 냉혹하게 교정, 노동으로부터 재미를 찾는다.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으므로 사적인 감정을 버리는 것이 중요. 피할 수 없음을 즐기는 자세. 망나니교정, 살인마교정, 전쟁영웅교정 등으로 응용 가능.

  • 방통요법
  • 나는 뇌양현의 방통이고, 지난 100일 동안 술만 마셨으며, 화가 머리끝까지 난 장비가 지금 칼을 들고 와 있다. 한나절 안에 어떻게든 밀린 일을 처리해야 한다. 할 수 있다. 별거 아니다. 나는 백리지재가 아니다... 어차피 이게 맞는지 틀린지 알아차릴 사람도 없고... ‘이 세상에 교정공은 너와 나뿐.’

  • 약물교정
  • 진통제 한 알 먹고 교정. 미신이나 헛된 기대, 머리에 힘주기 등이 아닌 의학적으로 검증된 고통 경감 효과를 노린다. 약물은 하나의 분자-기계인데 안경을 쓰는 것과 뭐가 다른가? 못 말리는 교정사이보그 되기. 해당 기법 사용 중 금주할 것. 과용에 주의.

  • 배짱교정
  • 내가 교정 개판으로 봤는데 어쩔? 니가 뭘 할 수 있는데? 어? 어?

  • 인권교정
  • ‘그들도 인간이다!’ 완벽하지 않기에 인간이다. 개들도 거리에 똥을 누면 주인이 주워야 하는데 하물며! 인간권리 옹호의 교정 정신 최대화. 하지만 저도 인간인데요...? 완벽하지 않기에 인간이다... 완벽하지 않기에... 언뜻 오류처럼 보이는 것들도 더 깊은 뜻이 숨겨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용서하는 聖人교정 단계로 심화.

  • 심안교정
  • 눈을 감고 이마 한가운데로 정신을 집중. 시간의 흐름에 몸을 기대고 마음의 눈으로 교정지를 본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응원이 들릴 때까지. ‘일어서라 교정공... 깨어나라 교정공...’ 거대한 활력이 솟아오르는 깨달음의 순간이 올 때까지... 나를 해고해 줄 때까지...

(당신만의 교정 노하우를 친구와 공유하세요!)

2024년 3월 26일 화요일

수발자본주의와

‘아 다르고 어 다른 세상에서’는 뜻하지 않은 원고청탁을 받고 쓴 것이었다. 매호 하나의 주제를 정해 다양한 필자들, 주로는 젊은 연구자들로부터 원고를 받는 잡지였다. 그 호의 주제는 ‘대학’이었다. 편집자님은 내가 블로그에다 써 올린 어떤 부주의한 글을 재밌게 읽으신 모양이었다. 교정공으로서 교수들의 한심스런 원고에 대해 한탄하며 쓴 얘기를... 잡지에 나 같은 사람의 잡문은 격에 맞지 않는 거 아닌가도 싶고, 노동 외 뭔가 원고를 써야 한다는 것이 또 다른 괴롬이기도 하고... 그러나 편집자님께도 나름의 공감과 결단이 있으셨겠거니... 나 자신의 부주의함에 대한 책임으로, 한편으로는 출판산업의 가려진 하청노동자로서 우리 웬수 같은 교수님들에 대해 성토할 공적인 기회가 왔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유수의 출판사로부터 지급되는 고료를 빨아먹을 기회를 거부할 이유가 없다는 일념으로, 꾸역꾸역 썼다. 썼는데, 쓴다는 일이 늘 그렇지만 아무리 뭘 써도 불만족스럽기가 짝이 없고, 왜 더 낫게 쓰지 못했는지 후회가 남고, 뭐가 정리 정돈이 되기는커녕 내면 낼수록 더 내고 싶은 화만이, 더 쓰지 못한 아쉬움만이 남는 것이다. 나는 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다 하지 못한 얘기가 뭔가?

내가 못다 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지금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본다. 내 친구들은 지금 Y랜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거기 얘기는 잊을 만하면 나온다. 웃기는 데라는 거다. 모 지방도시에 있는 Y랜드... 나도 이야기에 끼어든다. 나는 거기 실제로 가봤다. 정말 재밌는... 콘텐츠가 많은 곳이다. 특히 외적 몰아내기 체험이 재밌었다. 심청이 체험도 진실로 기가 막혔는데... 없어지기 전에 다녀와야 할 곳으로 보여 다녀온 지가 벌써 6년이 지났고, 아직도 안 없어졌다는 게 대단하다. 따지자면 지나간 때의 유행이었을 Y랜드는 이제 진정한 밈으로, 웃음거리로 남았다. 안쓰러운 우리의 지방 도시들이 스스로 관광지화 외에는 활로가 없다고 여기는 상황에서 기획력과 집행력이 태부족한 상태로 어떻게든 돈 버는 용도로만 돈을 쓰려다 보니 그런 쓰레기-관광지가 자꾸만 만들어지고, 그런 실패작이 지나간 뒤 빈자리를 채우는 ‘검증된’ 유행들―물 있는 데마다 흔들다리, 산 있는 데마다 케이블카, 무작정 둘레길, 닥치고 데크, 이 악물고 축제, 눈물 나는 마스코트... 그런 것들이 꼭 복제되는 밈 모양으로 지방 구석구석을 채워 가는 모양새를 보고 있자면 너무 즐겁고 팔짝 뛰겠다. 왜 안 즐겁겠나? 유행을 읽어라! 더 이상 관광지에 아무 글자도 쓰지 말고 아무 뜻도 담지 마라! 관광객 모두의 손손마다 들린 스마트폰에 사진으로 남겨짐으로써, 그 구조물들은 그 자체로 글자가 되어야 한다. 이 또한 언젠가 웃음거리가 될 것인가? 이것은 마치 같은 것을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틀리고 마는 저자들 같고, 내 눈 사이로 빠져나가 인쇄되어 버린 오자들 같다. 이미 인쇄되어 버린 것들을 보며 나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다. 그냥 웃음이 저절로 나옵니다. 너무 좋죠. 나는 그것들을 더 온몸으로 만끽하고 싶다! 더! 더 만들어라! 더! 빼곡하게 채워라!

우리 대가리만 남은 좌파의 저작물들(존경과 감사, 안쓰러움을 담아)의 제목에도 돌고 도는 유행이 있다.
  1. ‘선언’ 앞에다가 땡땡 붙이기 → 욕심쟁이 스타일
  2. ‘사회주의’ 앞뒤에다가 땡땡 붙이기 → 세미나 스타일
  3. ‘공산주의’ 앞에다가 땡땡 붙이기 → 도발적인 스타일
  4. ‘자본주의’ 앞뒤에다가 땡땡 붙이기 → 조심스런 스타일
나 같은 필부도 못할 거 없으므로, 조심스럽게 ‘수발자본주의’를 제시해 본다. 어떨까? 모든 것에는 악몽 같은 버전이 있다. 수발자본주의는 이른바 돌봄선언의 악몽 같은(=현실의) 버전이다. 돌봄 대신 수발이다. 자본이 세계의 지배적인 동인인 한, 90% 인간의 삶은 그저 위쪽 10% 정도 인간의 수발을 들기 위한 것으로 격하된다. 자본이 그대로 힘 그 자체를 상징할 수 있는 세계에서 사회구조도 힘의 논리를 따라 상향 수발식으로 재편된다. 노동자가 자본가를, 남반구가 북반구를, 여성이 남성을, 약자가 강자를, 종들이, 여전히 양반들을 수발 들어야 한다는 식이다. 지방의 관광지화도 그 일환이다. 지방은 이제 그냥 수도권에서 관광하러 가는 곳일 뿐이다. 지방자치단체들은 관광부로 전락한다. 왜 관광하는가? 누가 관광하는가? 어떻게 관광하는가? 수발 드는 존재로 격하된 자신들을 잊기 위해서... 내가 그러했듯. 나는 그냥 평생 원청 수발 들어주는 사람이다. 원청은 교수 수발 들어주고... 노동이 쟁취한 권리들을 하나둘 무장해제시켜 온 과정을 거치며, 이제 산업은 원하청과 특수고용, 비정규직의 형태로 정렬되어 그 자체로 사회적 연쇄수발의 형상을 띠고 있다. 이제 경영활동이란 노동력을 뽑아내면서도 노동권을 우회하는 기발한 술수의 고안에 다름 아니게 되었고,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수발의 정점에 오르는 것이 곧 자유와 해방으로 취급받기에 이르렀다. 수발 그 자체인 산업에 발맞춰 수발 스트레스를 다루어줄 산업들, 나 대신 진정한 인생을 살아줄 영웅들을 우리는 찾아 헤맨다. 수많은 종류의 셀렙들이 인간의 이상으로 부상한다. 그들이 우리의 수발을 들어주는 듯이 우리가 그들의 수발을 들어주고... 기업 광고 부서의 수발을 들어주고... 조회수를 따라 기업으로부터 예산을 분배받고... 이건 문자 그대로 수발 중독이다. 우그러지는 중인 대의민주주의다. 착취를 넘어 착즙이다. 착즙이 아니라 복수가 필요하다. 수발이 아니라 돌봄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에겐 필요하다. 돌봄으로서의 복수, 복수로서의 돌봄이. 그것은 무엇인가? 심청이 정신...?

2024년 3월 19일 화요일

교정의 골짜기

이 개새끼들은 대체 뭐가 문제냐? 목줄을 채우고 싶은 두 가지 유형의 쓰는 이가 있다. 하나는 ‘나는 절대 안 틀려’다. 무조건 자신이 맞는다고 아득바득 우긴다. 어디서 뭘 잘못 보고 온 게 있는지, 어떤 감각의 혼란이 있는 건지... 아니면 이상한 신념이 있는지... 하여튼 절대적으로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틀리지 않는다는 식이다. 물론 그는 틀린다. 당연하다. 틀리지 않는다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이런 일은 꿈에도 없으며 결단코 없다). 이 경우 뭔가를 틀린다는 건 전혀 문제가 아니다. 자신은 틀리지 않는다는 그의 확신, 아득바득 우김이 나를 돌게 만든다. 뭐가 됐든 일단 우기고 보는 그 자세가.

다른 하나는 ‘나는 틀려도 돼’다. 그는 자신이 무조건 틀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걸 고쳐야 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아무것도 터치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 거의 아무것도 터치하지 않‘았’다. 그의 원고는 하나의 불모지다. 그는 자신의 원고를 돌보지 않고 떠나간다. 애초에 돌본 적도 없다. 그의 생각은 이렇다: 돌봐야 하는 녀석은 따로 있다. 혹시 그게 나냐? 그는 죽이고 싶은 땅주인처럼 돌아와 검수에 나선다. 이 경우에도 뭔가 틀린다는 건 전혀 문제가 아니다. 똥무더기를 줘 놓고 열매만을, 오직 자신의 열매만을 기대하는 그 무책임함이 나를 돌게 만든다. 쓰기에 가담 중인 우리 모두가 이렇듯 골짜기의 들개들과도 같다.

2024년 3월 7일 목요일

무명용사

애초 혼란한 원고를 준 녀석에게 교정을 보시라고 뭘 줘 봤댔자 혼란한 교정을 해 올 뿐이다. 대체로 봤을 때 제대로 고칠 능력이 있으면 애초에 그렇게 쓰지도 않는다. 사장은 ‘그냥 교수가 해 달라는 대로만 하라’ 하지만, 그런 것은 절대 좌시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 나는 대체 뭐 하러 있나? 오늘은 옳은 로서를 틀린 로써로 죄 고치라 표시해 놓은 끼새수교 때문에 위가 쓰리다. 자신감 있으셔서 좋으시겠어요... 나는 위장에 빵꾸가 나려 하고 있는데... 제발 좀... 그런 거는 내가 할 테니까... 사전 한 번만 찾아보면 다 아는 그런 거를 왜... 왜 모르면서 아는 척하니 왜... 제발... 너네는... 지성의 담지자가 아니고... 이런 거는 그냥 아가리 쌉치고 있어... 제발... ㅅㅄㄲ들 진짜... 그만... 단도 들고 찾아가기 전에...

뭐 그런 험한 생각을 속으로만 하며, 도대체 무엇이, 구체적으로 어떤 요소들이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걸까, 나는 나의 직업적 특성상 증오해 마지않는 그들의 얼굴(신기하게도 꼭 얼굴들이 어디 내걸려 있는데)을 들여다보며 단서를 찾아보려 하지만, 그저 보통 사람의 얼굴이 있을 뿐, 사진으로 알 수 있는 건 없다. 어쩌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뛰어난 학자이며 좋은 이웃사람일지 모른다. 아주 개차반 같은 녀석이라고 욕하는 글도 가끔 찾지마는, 어디 다 그렇다고 할 수야 있겠는가. 문제는 분명 그들의 존재양식에, 세계에 있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안 된다. 내가 견딜 수 없다. 그들도 피해자입니다! 암요! 이건 다 그들이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지 않으려는 내 잘못이다. 그렇다. 내 탓이다!

내가 입사하기 전, 어떤 교수 녀석이 □□□이라고 틀리게 쓰려는 걸 끝까지 □○□으로 고치려다 대판 싸우고 퇴사한 교정공이 한 명 있었다고 들었다. 그는 단 하나의 자음, ㅇ을 ㄱ으로 옳게 고치기 위해 자신의 거의 모든 것을, 우리 같은 노동자들에게는 거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 노동 그 자체를 걸었다. 부러질지언정 구부러지지 않은 그의 불굴을 생각하면 내가 지금 로써와 로서 따위에서 물러날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그의 얼굴은 물론이요 이름도 모르지만 그는 오늘 무명용사 되어 내 안에 살아 숨쉬고 있다. 잘못된 교정을 다시 옳게 되돌리며, 나는 그 무명용사가 왜 교수와 대판 싸웠는지 이해한다. 내가 겪은 일인 것처럼 이해한다. 그것은 글자의 옳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전혀 아니다.

2024년 2월 17일 토요일

신발을 끄는 녀석들이 있다

우리는 집중을 요하는 종류의 노동을 한다. 우리의 일에는 많은 대화가 필요하지 않다. 대화는 방해에 더 가깝다. 키보드와 마우스, 프린터, 어쩔 수 없는 전화통화 소리 등을 제외하면 사무실은 조용하다. 말 시키지 마세요... 그런데 이 조용한 일터에서 신경을 매우 거슬리게 하는 소리를 내는 딱 세 사람이 있다. 오갈 때마다 슬리퍼를 끌며 귀를 긁어놓는 그 셋, 공교롭게도 그들은 모두 관리자다.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않는다. 신기할 정도로 그 셋만 한 사람처럼, 지금 이 소리를 잘 들어 두라는 듯, 내가 지금 지나가고 있다, 내가 지금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아 두라는 듯 군다. 이상한 일이다. 그들과 우리는 나이로도 성별로도 구분되지 않는다. 그들은 관리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인가? 그저 발이 무거운 사람들이 우연히 관리자가 된 걸까? 아니면 발이 무거운 종류의 사람만이 관리자가 될 수 있는 걸까? 발의 무거움과 관리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성향 사이에 어떤 유전자적 연관이 있는 걸까? 어쩌면, 정말로 자신의 움직임을 알리기 위함일까? ‘발 끌기’는 필요에 따른 관리 업무의 일환일까?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는 없고 수긍할 수도 없다. 그들이 무릎을 더 높게 들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힘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 힘에 맞설 힘... 일테면 그들이 무릎을 더 높게 들도록 만들 힘이 필요하다고 하면 어떨까? 하지만 어떻게? 칙 칙 칙 칙 소리가 들릴 때마다 한 문장씩 떠올려 나는 다음과 같이 쓴다...

어쩌면 이 신비에는 보다 미묘한 역학이 있는지도 모른다. 혹시 실체는 그 반대가 아닐까? 신발을 끄는 편이 더 자연스러운 일인데, 다만 ‘눈치를 보는 이들’만이 관리자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발을 끌지 않는 거 아닐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발을 끌지 않는 묵약이 우리 사이에 작동하고 있는 것이라면? 눈치를 보느라 그런 게 아니라, 혐오스런 녀석들과 스스로 구분되기 위해, 혐오스러움을 양각하기 위해? 이런 상태는 작지만 고약한 불행이다. 우리에게나 그들에게나 그렇다. ‘나한테 일 시키는 사람’이 무조건 싫어질 수밖에 없는 이 구조를 좀 움직일 방도가 필요하다. 그게 내가 느끼는 사태다. 괜찮은 일터를 위해서다. 내가 여기에 몇 시간을 있는데... 괜찮은 일터라는 건 뭔가? 임금, 노동 강도, 노동 시간, 여러 가지로 얘기할 수 있겠지만, 참여가능성으로 나는 정리하고 싶다. 일이라는 총체와 나 사이의 관계가 종합적으로 수긍할 만한가? 나의 수긍 여부가 일터의 요소들 중 하나로 주요하게 다뤄질 수 있는가? 너와 내가 어떤 직무와 직급을 맡고 있더라도? 너와 내가 어떤 노동을 하고 있더라도? 관리자들의 신발 끌기는 수긍하기 어렵다. 그 이유가 그들에게 있건 우리에게 있건 그렇다. 나의 이 의견은 적어도 그들의 보행 습속의 지속보다 주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일터에 참여해야 한다... 일터는... 민주화되어야 한다... 나의 정신을 좀먹는... 일터는... (칙 칙 칙...)

그들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그들의 잘못만으로 둘 수는 없다. 그들이 잘못을 독점하게 둘 수가 없다. 관리자들도 일터의 동료다. 동료가 아니라면 동료가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어떻게? 방법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어떤... 지금 무슨 방도가 있지? 공공에 호소? 디지털대자보 같은 것을 쓴다...? 관리자... 신발끌기... 철폐? 캠페인...? 킹론화(인민머법원)는 우리의 최종심급이다. 이 사안에서 그럴 수는 없다. 그 바로 밑의 하급심은 아마 노조를 통한 협상과 쟁의, 또는 어떤 종류의 법적인 신고일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큰일이다. 신발을 그만 끌게 하는 정도라면 그 아래에 뭔가 있어야 한다. 역으로 가장 낮은 단계로 가보면? 일터에서의 잡담이나 한숨, 우정보다는 가벼운? 동료애? 같은 것들일까? 어쩌면 신발을 끄는 녀석들에 대한 뒷담화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속은 좀 시원해질지 몰라도 녀석들이 신발을 그만 끌게 하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가장 위와 가장 아래 사이가 비어 있다. 일터를 위한 규약이랄지 구조랄지 뭐라 할지... 진실로 필요한 바로 그 부분이 비어 있다고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비어 있음이 위아래로 문제를 뻗치며 위아래로도 문제를 만들고 있다. 적어도 여기서는 그렇다. 어쩌면 필요한 것은 평등한(즉 상향식) 의사 표현 구조일 것이다. 그래, 분별이 있는 대화가 필요하다. 대화 양식이. 회의 시간? 하지만 그걸로 정말 되나? 아닌데... 회의는 고통인데... 건의라는 것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평등한 의사소통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그건 말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모두 말높임/말낮춤 같은 소리는 말고, 또 개개인들의 능력으로 치환되지 않도록 하면서...

의사소통이 평등하려면 실제로 평등해야 한다. 그렇담 ‘실제로 평등’이라는 게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해야 실제로 평등해질까? 고치려면... 이걸 고치려면... 힘이 나눠져야 한다. 어떻게 힘을 나눌 수 있나? 진실로 필요한 건 대화가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임금 평탄화다... 직무 순환이다... 선출 대표다... 그거면 되나? 그 정도면? 하지만 사내에서만 그래서는 곤란에 빠진다. 그것은 전염되어야 한다. 평등은... 사내와 사외의 경계는 더 흐려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최악의 버전과 최선의 버전이 동시에 존재한다. 경계의 흐려짐도 그렇다. 발을 끈다는 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관리자들이 신발 끄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는, 외주 교정자가 되어야 하나? 고치려면... 이걸 고치려면... 우리는 이미 곤란에 빠져 있다. 진실로 고쳐지길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제도만이 아니다. 그것은 제도들의 바로 위와 아래에, 앞에, 뒤에 있다... 무릎을 들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건 더 높이 들게 만드는 힘이건 힘이 구성되는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아니면? 아니면 모든 것을 다시 처음부터 생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좀 뜬금없지만, 노인성 질환으로 발을 끌던 우리 할머니 생각이 난다. 할머니는 지금 납골당에 계시고... 명절 때가 되면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몰려든다. 칸칸이 들어찬 함들 앞에 서려고 그 수많은 사람들이. 그래... 다 관계가 있어... 나 교정공이 보기에는...

2024년 1월 31일 수요일

아 다르고 어 다른 세상에서(後)

이건 어떨까. 실험용 쥐 rat을 ‘랫드’라고 부르는 과학계의 해괴한 표기법에 대해 황당해하는 이야기를 봤다.
가장 황당하다고 생각하는 한국의 과학용어 중에 실험용 쥐 rat를 “랫드”라는 해괴한 표기로 쓰는 전통이 있음. 왜 이걸 랫드라고 쓰는지 아무도모름. 근데 교과서 같은데도 저렇게 쓴 책많음. 심지어 국가 법령같은데서도 저렇게 씀. 그냥 단체로 이상한 표기인걸 다 알면서도 그냥 다같이 틀리는거임
@JaesikKwak. 2022년 10월 6일, 오후 10:38. Tweet.
‘랫드’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어쩌면 내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 신비에 대해 약간은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직업적으로 이런 일에는 나도 약간의 책임감을 느낀다. ‘랫드’는 물론 일하다가 종종 마주치는 단어다. 나도 처음 봤을 때는 어이가 없었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말이 서로 통할 수 있도록, 또한 책의 바깥과 안의 말이 서로 통할 수 있도록, 정해진 규범을 따르거나 규범을 정해 고치는 것이 우리 교정공의 일이다. 기본적으로 ‘랫드’ 같은 게 나오면 표기법에 맞도록 다 고쳐야 맞는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이거를 왜 맘대로 고쳤느냐고 따지는 교수님이 계실 수 있고, ‘학술적’ 영역이므로 무엇이 표기법에 맞는지부터가 다소 애매한 부분이 있다(그 누구도 나 대신 싸워 주지 않는다). 실상을 말하자면 교재 한 권에서 rat 하나를 놓고 그 번역어로 ‘랫드’, ‘래트’, ‘랫트’, ‘랫’, ‘시궁쥐’, ‘쥐’ 등등으로 다 다르게들 쓴다. 아예 rat이라고 그대로 쓰는 사람도 있다. 세계로 뻗어 나가려면 한국어의 족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뜻? 이게 교수님들끼리만 통일을 못 하고 있는 거면 그래도 행복한 경우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한 교수님이 맡았다 하는 한 장 안에서도, 분명히 한 사람이 썼어야 하는 한 문단 안에서도, 심지어는 바로 옆 문장에서도, 나로서는 다르게 쓸 이유를 전혀 찾을 수 없는데 다르게 쓰시는 (자연히 얼굴을 찾아보게 되는) 분들이 적잖다. 즉 대부분의 경우 이 문제에 대해 아예 처음부터 쥐털만큼의 관심들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책 한 권에서 ‘랫드’로 통일되어 있기라도 하다면 그나마 누군가의 노력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rat은 ‘랫드’라고 옮긴다고 하는, 어쨌든 이 책 안에서만은 통하는 약속을 세우려는 누군가의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도 교정지에 다음과 같은 메모를 달아 물어봐야 한다.
‘rat’의 번역어가 ‘랫’, ‘랫드’, ‘래트’ 등으로 통일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요?
만약 전체 감수를 맡아 끌고 가는 교수님이 없다면, 그 메모를 본 교수님들이 다 같이 모이려 들 수도 있다. 모여서 회의한 끝에 어떤 결과가 나오기까지 우리는 기다려야 하고, 그 결과가 나오면 그대로 반영해야 한다. 어쨌든 출간일은 정해져 있고 우리에게 달라붙어 있는 책은 한 권이 아니다. 시간이 정 부족하면 나 외에 다른 외주 교정자를 구해야 할지도 모른다. 구한다 해도, 그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 달라 하는 것은 결국 내 일이다. 해 달라는 대로 그가 한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처음부터 아예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내 멋대로 고쳐도, 또는 전혀 안 고쳐도 아무도 신경 안 쓴다. 나는 항상 그런 유혹에 시달린다. 어쨌든 그 시점에 전체를 읽어 본 사람은 나 혼자다. 그럼에도 각자 자기 생각들이 있으신 여러 교수님들 사이에서, 무슨 교통정리 비슷한 것이라도 가능한 나이 지긋하신 교수님으로부터 교정공이 받은 답이 ‘랫드’라면, 이 구조 속에서, 그것은 그냥 랫드면 그만인 것이다. 랫드라고요? 왜죠? 이렇게 되물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전에는 있었을까? 나는 모른다. 사장님은 그냥 교수들이 해 달라는 대로만 하라고 말한다. 네가 입씨름을 하려고 들지 말고, 교수들이 해 달라는 대로만 해라. 너는 시간만 맞춰라, 너의 업무보고에 따르면 너는 지금 하루에 몇 쪽을 보고 있는데, 어쨌든 네가 하루에 몇 쪽 이상 봐야 우리가 수지타산이 맞고…….

자, 사장님은 나를 왼쪽으로 당기고 동료님들은 나를 오른쪽으로 당긴다. 원청업체는 앞에서 나를 당기고 교수님들은 뒤에서 나를 당긴다. 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나를 아래로 당긴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이 나를 위로 당긴다. 나는 내가 보고 있는 교정지를 양쪽으로 동시에 당기고 싶다. 이것이 내가 만들고 있는 책이 당하고 있는 얼차려의 구성이고 가련한 예비-책들이 처한 상황이다. 말 못하는 책들, 그러나 만들어져야만 하는. 내가 교정 보고 있는 원고 외의 모든 것이 내 눈과 손과 마우스 포인터를 당긴다. 나도 당연히 업무시간에 몰래 트위터 합니다! 랫드가 어쩌고 하는 얘기도 그러다 본 것이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쉼 없이 교정만 봅니까? 내가 항상 하고 싶은 말: 당신이 한번 해 보세요, 네가 해 보세요! 눈앞이 깜깜해지도록 아침부터 밤까지 한번 봐 보세요! 그리고 항상 하는 생각: 이래서는 어떤 책임 비슷한 것이 나올 만한 구조가 아니다. 무슨 책임? 최선의 의사소통을 시도할 책임? 나와 교수님 사이에, 책과 학생들 사이에, 말하고 싶은 사람들, 책과 책들, 화면과 화면들 사이에? 왜 이렇게 되었는지 말해 보라 하면 다들 저마다의 그럴싸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장님에게는 사장님의 이유가, 편집자에게는 편집자의 이유가, 교수님에게는 교수님의 이유가, 교정공에게는 교정공의 이유가, 없을 리 없다. 어떤 분들은 한마디도 더하실 필요가 없는 분들이신지도 모르지만, 한 말씀에 필요한 값이 다른 분들이신지도 모르지만, 학문에 열심이시라 언문의 필요를 등한시하시는 분들이신지 아니면 그 반대이신지, 그런 것은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바로 그런 필요들의 분배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 문제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된 데에 누구를 탓할까? 다 나의 탓이다! 내가 그 분배들에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나인 한 이 오류들은 바로잡히기 어렵다. 그러면 더 나은 내가 되는 것이 답일까? 내가 더 수준 높은 교정공이 되는 것이? 아니면 교정공보다 나은 것이 되는 것이? 나 교정공의 눈에, 여기에서 분명하게 틀린 것은 우리가 우리 되기에 실패하고 있는 이 사태다. 책은 다름 아닌 우리가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정공처럼 말하자면, ‘모양이 어색하다’. 사랑하는 교수님들, 내가 우리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내가 부르면 그렇게 됩니까? 내가 분배될 수만 있다면 나는 사라져도 좋다.

이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거의 다 한 것 같다. 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는 데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다. 내가 맞게 했나? 내가 내게 주어진 지면에, 일생에 있을까 말까 한 기회에, 필요한 말을, 해야만 하는 말을 적절히 늘어놓은 게 맞나?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말한 게 맞나? 내가 매일 보고 있는 어떤 원고들과도 같이, 헛되이 글자로 똥칠을 해 버린 건 아닌가? 아니, 지면이 굳이 나에게 필요한가? 아 다르고 어 다른 세상에서, 나 교정공이란 이를테면 사라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교정공이 개입할 수 있는 지면은 오늘날 점점 좁아지고 있다. 또는, 교정공이 개입할 수 없는 지면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 아와 어의 다름도 점차 사라지는 듯, 아와 어가 다르지 않다고 우기는 사람들과 어와 어가 다르다고 우기는 사람들 사이의 다름도 사라지는 중인 것만 같다. 가끔 우리가 견딜 수 없이 산산조각이 났다는 생각이 든다. 합쳐졌던 적이라고는 처음부터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만 같으니 이상한 생각이다. 대체 어떻게 감히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수 있겠니? 말하는 얼굴들을 보면 그야말로 박살이 나 있다. 전에도 이랬던가? 이러지 않았던가? 우리 산산조각의 양상이 과연 바뀌는 것이라면 산산조각을 대하는 우리의 양상도 분명 바뀌는 것이겠다. 내가 지금 맞게 대하고 있나? 글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박살 난 우리 사이에 쌓이고 녹고 쌓이기를 반복하며 서로 합쳐지려고 이어지려고 이를 악문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틀림없이 그렇다.

2024년 1월 30일 화요일

아 다르고 어 다른 세상에서(前)

나는 절망한 교정공이다. 정확히 쓰자면 절망했던 교정공이다. 이제 그런 시기는 지나갔다. 이 일에 대한 나의 마음은 언제부터인가 결딴이 나 버렸기 때문에 이젠 괜찮다. 우리 사랑하는 교수님들의 원고를 교정하다가 이렇게 된 것이다. 아무 탓할 것이 없다. 다 나의 탓이다. 교수님들께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나의 탓! 만약 교수님들께 한마디 전할 수 있다면 뭐라고 할까? 지난 몇 년 동안 여기에서 일하며 그런 순간을 자주 상상해 봤다. 교수님들께 감히 한 말씀 올리는 순간. 하지만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무슨 간절한 말씀 한마디 드리는 건가? 잘 모르겠다. 말이 왜 필요하지? 교수님들께 얼차려를 드리고 싶을 뿐 아닌가? 오, 교수님들, 이쪽으로 모여 주세요! 여기 줄 맞춰 보세요! 하나에 교수도, 둘에 사람이다! 그 왜 요즘은 다들 누군가에게 얼차려를 주고 싶어하지 않나? 안 된다면 자기 자신에게라도. 내가 나 자신에게 되뇌는 말. 하나에 교수도, 둘에 사람이다! 나는 무슨 신세 한탄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아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얘기를?

내가 하루 종일 들여다보는 책들은 대개 대학 학부의 교재다. 번역서도 있고 저서도 있다. 이걸 정말 교재로 쓰는지 어쩌는지는 모른다. 머리말에서 쓴다 하니 쓰는가 보다 할 따름이다. 쓴다고 해도 안 쓴다고 해도 나는 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내가 교정한 책이 책꽂이로 들어가 몇 해 묵은 다음 중고로 팔리거나 폐지로 버려질 때까지 절대 펼쳐지지 않는 상상을 가끔 해 본다. 그것은 고통스럽다. 학생들이 책에서 말도 안 되는 오류를 발견하는 쪽이, 그래도 그보다는 낫다. 그 학생은 교수님께 이 책의 여기 이 부분이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인지 물어볼 수도 있다. 그러면 교수님은 출판사 탓을 하면 된다. 나라도 출판사 탓을 할 것이다. 너무 짜릿한 상상, 강단에 서서 이 책의 어느 부분이 어떻게 틀렸는지 설명하는 우리 교수님들에 대한 상상! 내가 눈에 특별히 불을 켜고 교정해야 하는 역·저자 소개를 보면, 이분들은 모두 어디에서 무엇을 하셨고 무엇을 옮기셨고 무엇을 쓰셨고 무엇을 받으셨고…….

그런 훌륭한 우리 교수님들, 자신이 쓴 원고에 마땅히 전문가 대여섯 정도가 일거에 달라붙어 최상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리라 여기시는 듯한 우리 훌륭한 교수님들 일부의 상상과 달리, 나 한 명의 교정공은 보통 두어 권의 교재를 동시에 본다. 짧은 거 한 권이 500쪽쯤 된다 치면 50쪽씩 10개 장, 대여섯 교수님들이 두 장씩 나눠 맡으므로 나는 열댓에서 스무 분 교수님들의 원고를 한 번에 늘어놓고 보는 셈이다. 그렇게 늘어놓고 보면 교수님들 사이의 문장 수준에 차이가 있다. 아마 A부터 F까지 점수를 매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중에는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정녕 이 문장을 한국 최고의, 뭐 최고까지는 아니더라도, 교양 지성인이라는 이가 썼단 말인가 싶은 그런, F조차 아까운 경우도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 나라 학문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건가,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교수님이 보내는 이메일이나 메모 따위를 함께 살펴보면 이것은 이 교수님의 문장이 분명하다. 아마도 한국어에 원래 서툰 분이시거나, 원래 학문과 문장은 아주 별개인가 보다, 과연 그럴지도 모르고, 그래서 내가 있는 것이다, 내 일이 있는 것이고, 하여튼 내가 찰떡같이 알아들으면 된다, 어떤 개떡이 앞에 놓여도, 그렇게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보다도 긴 장탄식이 나오게 만드는 것은 아무리 봐도 한 인간의 문장이 아닌 경우다. 어떤 교수님들의 원고는 아무리 봐도 거기 적힌 이름보다 많은 사람이 쓴 것이 분명하다. 나는 그것을 모를 수 없다. 도대체 교수님 아닌 누가 그 원고들을 썼단 말인가? 그것은 모른다. 대학에 대해 잘 아시는 분들이 아실지도 모른다. 그래도 ‘사람’들이 썼다면 그나마 다행? 그 자신은 단 한 번도 읽어 보지 않은 게 분명한(읽어 봤다면 인두겁을 쓰고서 그걸 그냥 보낼 수야 없으므로), 번역기의 일차 생산물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뭔가를 원고라며 넘기는 교수님들도 있다. ‘번역 엔진이 역자 서문을 써야겠다’와 ‘차라리 번역기라도 돌려줬으면’ 사이에서 나는 입을 다문다. 이 학부 교재라는 것은 아예 별거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들 하시는 걸까? 더 중요한 책은 이렇게 안 하실까? 아니면 이 교수님의 원고는 일괄적으로 다 이런 식인데, 단지 책의 중요도에 따라 교정공의 수준이 달라지는 걸까? 여러모로 봤을 때, 적어도 교재를 쓰는 일에 있어서는, 이 교수님들이 노고에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럴 수는 없는 법이다. 도대체 얼마를 드려야 노고에 합당하다고 여기실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좀 기분 나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나를 유독 고통스럽게 하는 교수님들의 얼굴은 한번 검색해 본다(하여튼 스무 교수님들 중 두엇의 얼굴은 꼭 검색해 보게 된다).

대충 번역기 한 번 돌린 것을 원고라며 보내는 등의 일이 있으면 교수들끼리 서로 싸우기도 한다. 서로 싸우기라도 하면 차라리 다행이고, 대개는 서로에 대해서든 책에 대해서든 큰 관심도 없다. 아니, 다행인 게 맞나? 교수님들이 책에 세세한 관심을 갖는 편이 좋나? 저마다 나서서 이 교수님은 이렇게 해 주세요, 저 교수님은 저렇게 해 주세요, 이러면 내 일이 두 배 세 배가 될 뿐……. 어쨌든 출간일은 정해져 있다. 내가 교수님들과 싸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상사 또는 원청업체의 편집자가 대신 싸워 주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잠깐, 원청업체라니? 말 그대로 나는 이 일을, 출판 편집을 대행하는 회사에서 하고 있다. 원청업체인 출판사들로부터 일을 받아서 한다는 이야기다. 교수님들과 연락을 주고받고 어르고 달래고 일정을 조율하는 편집자 역할은 그쪽 편집자와 내 상사가 나눠서 맡는다. 내 상사는 원청업체와 교수님들에게 그때까지는 이래서 저래서 안 된다 하소연한 다음에 우리 사장님한테 깨지는 사람이고, 원청업체 편집자는 이때까지 이거 해 주세요 저거 해 주세요 한 다음에 이것도 제대로 못하느냐고 핀잔주는 사람들이다. 언젠가 하도 화가 나서 찾아본 원청 홈페이지에는 무슨 해외 굴지의 교육 계열 어쩌고의 자회사라 적혀 있던데…… 입맛이 달아나며 더 알고 싶지도 않아졌다. 그러니까 내가 만드는 책의 출판사명 자리에는 원청업체의 이름이 들어가고, 책에 이름이 올라가는 사람은 역자 또는 저자인 교수님들 그리고 원청업체 쪽 편집자다. 나 교정공은 힘써 만든 것에 자기 이름이 들어가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같은 처지에 있다. 애당초 몇이나 되겠나? 나는 무슨 신세 한탄을 하려는 게 아니다. 내가 해야 하는 말은 무엇인가?

계속

2024년 1월 8일 월요일

나머지 여섯 중 셋

연자매의 비유

연자매에 동지가 매여 있다. 누가 매 놓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맨 것이다. 동지는 그것을 밀고 있다. 동지는 자신이 무엇을 찧는지 알고 있다. 매의 윗돌과 아랫돌 사이에서 무엇이 찧이는지, 정확히 무엇이 거기에 들어갔는지 오직 그 동지만이 알고 있다. 하지만 거기서 나온 것들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동지에게는 모두가 주기만 했고, 아무도 그것을 가져가지 않았고, 매를 통과해 나온 그것은 켜켜이 쌓이고만 있다. 동지의 일은 다만 미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져갈 수도 만질 수도 없다. 돌의 힘과 낱알의 으스러짐만이 동지의 팔과 몸으로 전해지고 있다. 연자매의 부속인 동지는 애써 잊으려 한다. 그게 무엇인지, 누가 찧어 오라고 한 것인지, 그 일이 무슨 뜻인지. 민다는 것은 돌린다는 뜻이다. 돌린다는 것은 찧는다는 뜻이고. 동지는 자신이 만들어내고 있는 것에 파묻히고 있다. 자유로운 동지의 육신이 연자매에 붙들려 있다. 동지는 영혼의 노예다. 영혼은 연자매이고, 그것은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것이다.

불타는 들판의 비유

들판이 어디서 끝나는지 모른다. 넓고 마른 들판이다. 끝나기는 끝날 것이다. 강을 만나거나 산을, 절벽을 만나면서, 도로를 만나거나 마을, 도시를 만나면서 끝날 것이다. 어쩌면 들판은 시간적으로 끝날 수도 있다. 어디서 끝나느냐보다 언제 끝나느냐가 중요한지도 모른다. 이 들판은 지금 불타고 있는 들판이다. 반년 뒤나 몇 개월 뒤면 잿더미가 되며 끝난다고 해 보자. 이 불타는 들판을 갈피 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불을 끄려고 하는 동지가 있다. 이 동지가 들판의 끝을 잘해야 1분이나 늦츨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동지의 주변에 다른 이는 없다. 다른 이는 그 동지의 머릿속에 있다. 들판의 끝이 미래에 있는 것과 같다. 머릿속의 그 동지는 뛰어다니는 그 친구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이 들판이 뭐가 중요합니까? 동지는 양동이를 들고 머릿속으로 소리를 지르면서 불을 끄러 뛰어다니고 있다. 나에게 제발 그것을 묻지 마라! 왜 이 들판은 타고 있습니까? 제발 그것을 묻지 말고 꺼져라!

핵 광야의 피케팅과 라디오 방랑의 비유

커다란 널빤지 두 개에 끈을 달아 어깨에 앞뒤로 걸쳐 멜 수 있게 만들었다. 널빤지에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적혀 있다. 그 내용은 정확하다. 그 밑으로 동지는 입은 것 같지도 않은 거적때기 같은 걸 입고 있다. 그런 차림새로 광야를 헤매고 있다. 한 손에는 라디오를 들었고, 라디오에서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나오고 있다. 그 역시 널빤지에 쓰인 것과 같이 정확한 내용이다. 녹음된 목소리가 무한히 반복 재생되고 있다. 십중팔구 죽은 이의 목소리일 것이다. 아마 모두 죽었을지도 모른다. 모두 죽었을 것이다. 모두 죽었기 때문에 정확한 것이다. 동지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도 모를 광야를 돌아다니고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적힌 패널을 걸치고, 원래부터 자신의 목소리였던 것만 같은 목소리를 들으면서, 건전지가 도대체 언제 다할 것인지, 이미 너무 오래된 것 같은데, 어째서 라디오가 꺼지지 않는지 불안해 하면서.

2023년 12월 27일 수요일

일곱 개의 비유 중 하나

(이어서) ... 왜냐하면, ‘내가 틀렸는지 세계가 틀렸는지 확신할 수 없다’고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교정공의 세계에서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은 손댈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인쇄는 어쨌든 이루어진다. 메일을 쓰든 밀어붙이든 전화를 돌리든 모른 척하든 인쇄라는 최종심 전에 결착을 지어야 한다. 지어야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고통받고 있는 교정공의 기분만을 틀린 것으로 정하고 갈 수는 없는 법이다. 오류는 반드시 집단적이고 종합적이다. 고통을 교정하려고 드는가? 그것은 가당치 않다.

하지만 그렇게 해 보자. 고통을 교정해 보자. 교정공은 차원을 오가며 의심해야 한다. 어쩌면 고통도 가려낼 수 있을지 모른다. 옳은 고통과 그렇지 않은 고통으로, 마땅한 고통과 그렇지 않은 고통으로. 마땅한 고통이라면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원인을 찾아낼 수가, 어떤 오류인지 알아낼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규범상의 오류일까? 일관성에 맞지 않는 걸까? 손가락의 잘못된 움직임? 밖으로 이어졌는지 안으로 이어졌는지, 오류의 실타래를 따라가다 보면, 그것을 따라간 끝에 만난 것을 교정한다면, 고통을 좀 덜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게 맞는 것일 수 있다. 그게 바로 으뜸차원의 교정공이 해야 하는 일일 수 있다. 이보십시오, 읽고 있습니까? 그게 바로 해야 하는 일이다!

찾아낼 수 없다고? 찾아내도 고칠 수 없다고? 머릿속이라는 화면에 집게손가락을 대고 꼬집어 보자. 넓게 보자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뭔가를 고쳐야 하는 사람, 고치려는 사람 모두가 겪고 있는 문제인지도 모른다. 고통은, 사람 모두... 어쩌면, 뭔가를 고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좀 더 적절하게 말해, 그 정의상 일이란 뭔가를 고치는 행동인 것이다(‘돈이 나와야 일’이라는 얘기는 최신의 오류다). 뭔가를 뭔가로, 그것이 아닌 것을 그것으로, 씨앗을 열매로, 공터를 집으로, 철을 기계로, 식료를 음식으로, 1학년을 6학년으로, 아픈 사람을 덜 아픈 사람으로, 드러난 것을 덮고 덮은 것을 드러내면서, 맞추고 끼우고 바꾸고 표시하고 가르치고 배우면서, 한 상태를 다른 한 상태로 만드는 행동으로써 세계와 상관하여 얽고 얽히는 것이 일이다. 한편으로는 머릿속의 어떤 것과 이곳의 이것을 대조하면서, 한편으로는 현실과 뭔가를 주고받으며, 누군가와 함께 경험 가능한 이전과 이후를 자아내는 행동이 바로 일이다. 그것은 반드시 공동의 이전과 이후이므로, 오류 역시도, 부정적인 뉘앙스를 걷어내고 말하자면, 바꾸고 싶은 상태 역시도 종합적이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한 인간인 채로 그에 닿는 데에는 한도가 있다. 고치려는 이가 교정불가능성과 대면하는 것, 즉 막대하고 압도적인 고쳐져야 할 것의 더미 앞에서 무력(無力)을, 저·무능을 겪어 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로부터 받는 고통도.

집게손가락을 벌려 다시 확대해 보자. ‘고쳐지기 전’이라는 상상이 주는 막대함 앞에서 손끝 하나도 움직이지 못할 때... 선배 교정공들의 모르는 얼굴(데스마스크)들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이제는 물질을 떠나신 선배님들, 교정규범이란 짚더미를 등에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들었던. 나와 같이 보이지 않는 동료 교정공들의 분투가 재 되어 날린다. 연기 맵고... 눈물 콧물 기침과 함께 ‘나 혼자’라는 상상의 오류는 교정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집게손가락으로 꼬집어 보자. 두 번, 세 번. 만사가 이미 개입들이라고, 이미 협동이라고 생각해 보자. 일이란 어쩌면 사람만의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아니,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이 옳다. 만약 인간들의 상태를 인간 아닌 것들이 고치려고 한다면? 지금 여러 방향의 힘이 있다고도 해 보자. 자연, 문자, 자본... 이것은...? 어쩌면 고통의... 고통의 분배가 문제인 거 아니냐?

오 제발 정신을 좀 차려 봐...

2023년 12월 13일 수요일

정말로 나를...

이런 이야기를 들어 봤을 수도 있다. 한 단어에서 첫 자와 마지막 자를 제외한 나머지 글자의 배열을 마구 뒤섞더라도 우리가 충분히 문장으로 읽어낼 수 있다는 이야기. 인간의 정신은 글을 한 자 한 자씩 읽는 게 아니라 단어째로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Aoccdrnig to a rscheearch at Cmabrigde Uinervtisy, it deosn't mttaer in waht oredr the ltteers in a wrod are, the olny iprmoetnt tihng is taht the frist and lsat ltteer be at the rghit pclae....
영어를 줄줄 늘어놓은 것을 용서해 달라... 이 이야기는 한국에서도 ‘캠릿브지 대학의 연결구과에 따르면...’으로 번역되어 재밌고 신기한 밈 정도로 알려졌는데, 교정공의 입장에서는 꽤 의미심장한 면이 있다. 철자를 뒤바꿔도 문장을 읽을 수 있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이 가능할지라도 일어나게 두어선 안 된다. 독자이긴 독자이되 독특한 종류의 독자인 교정공은, 틀린 문자열을 재정렬해주려는 뇌의 자동 활동을 거슬러야만 한다. 기필코.

도대체 어떤 녀석들이 ‘글자들을 뒤바꿔’ 놓는가? 저자, 디자이너, 당연히 교정공 자신까지 포함하여, 글자를 건드릴 수 있는 인간들 모두... 그리고 글자를 건드릴 수 있는 컴퓨터들. (여기서 인쇄 쪽에서의 오류까지 이야기하진 않겠다.) 그런데 틀릴 수 있는 것은 철자만이 아니다. 모르는 어문 규범, 잘못 아는 어문규범, 손가락의 잘못된 입력, 교정 사항이나 의견에 대한 잘못된 읽기, 망각, 누락, 도서 형식상의 통일 사안, 사실 자체, 번호들, 선들, ‘스타일’, 그 외 온갖 종류의 부주의, 똥고집, 마치 요정처럼 왔다 가는, 인터넷과 프로그램상의 전기적 오류들... 틀릴 수 있는 것의 범위는 말 그대로 상상초월이다. 책 만들기에 참여하는 이들은 ‘무엇이 틀렸는지’에 앞서 무엇을 틀릴 수 있는지부터도 알지 못한다. 저자들? 언어에 대해서도 문외한인데 책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디자이너들? 애초에 글자라는 걸 읽기 싫어하고 실제로도 읽지 않는다. 그 외? 그 외 녀석들의 관심은 누구의 관심이건 다 훼방일 뿐이다. (재차, 이렇게 쓰는 걸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틀렸는지 맞았는지 알지 못하는 정도라면 다행이다. 맞는데 틀리다 알고, 틀렸는데 맞는다 안다. 틀린 것을 안다 해도, 고쳐 달라 말하는 방법을 모르고 무엇을 고치라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 고친다 해도, 어떻게 고쳐져야 맞는지를 모르고 맞게 고쳐졌는지를 모른다. 그리고 그 모든 영역들에서 부분적으로만 맞고 부분적으로만 틀린다. 이 엉망 사태 가운데 던져진 사람은 교정공이다. 그 모두가, 교정공이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그게 바로 교정공의 일이다. 이제 다음과 같이 정의해 보자. 교정이란, 교정공을 좆되게 하려는 모든 사람들과 사람 아닌 것들이 어디까지 틀릴 수 있는지를 시험하기 위해 합심하여 만들어내는 온갖 상상도 못할 오류들을 찾아내 고치는 싸움이다. 뜻만 통한다면 그럴싸해 보이기 마련인 글을, 교정공은 읽지 말아야/읽어야 한다. 머릿속에만 있는 ‘무오류의 책’과 대조하면서 그렇게 해야 한다. 교정공은 상상 초월의 오류들 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위로 날아가야 하고 지하로 파고들어야 한다. 모사든들람과 사아람닌것들이 합하심여 만내어들는... 앞서 말한 밈은 어떨까? ‘캠브릿지 대학의 연구’라는 것부터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이제 나, 교정공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으뜸차원의 어떤 교정공이 있다고 하자. 그 교정공은 생각한다.
‘나를 좆되게 하려는 뭔가(들)가 있어서 내가 고통을 받고 있다.’ 이런 식의 생각은 그대로 두기 어렵다. 정말로 저 교정공을 좆되게 하려는 뭔가가 있다 하더라도 그렇다. ‘저 사람(또는 무엇)이 나를 해치려 한다’는 느낌, 악의 가운데 던져졌다는 느낌은, 그가 정말로 악의 가운데 던져졌는지 아닌지와 무관하게 그를 망친다. 두 번이나 반복해서 지적할 정도로 그러하다. 그것은 위험한 도식이다. 사자의 아가리 속에... 손을 넣은 상상만으로 그는 어깨를 쓸 수 없다. 그래서는 허공에 손을 물린 꼴이고, 도탄으로 빠져드는 미끄럼틀을 즐기는(당연히 전혀 즐겁지 않겠지만) 모양새다. 그가 아니라면 꼭 누군가, 일테면 악마가 즐기는 듯이. 미끄럼틀에 스스로 다시 오르는 것은 그다. 다시 양손을 허공에 뻗고... 다시 엉덩이가 갈리고 만다. 저 교정공은 정신적 위기에, 이상한 마음에 빠져들고 있다. 그런 마음은 교정공이 품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맘에 내가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한수의 비유를 들어서라도 교정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교정공은 좆되지 않는다는 걸, 교정공은 하나의 기관차가 되어야 한다는 걸... 잉잉징징이 아니라 칙칙폭폭이 되어야 한다는 걸.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버금차원의 교정공으로선 도저히 좌시할 수 없는 것이다. 자, 무엇이 오류냐면...

2023년 11월 23일 목요일

개꿈

그냥 지들 어디로 가고 어디서 오는 스케줄 맞춰서 지랄 좀 하면 교정이 알아서 끝나서 나와야 되는 줄 아는 끼새수교들... 내가 보기에 우리 사호이 지도층분들은, 만약 지금 그대로의 사회를, 일이 돌아가는 와꾸를 유지하고 싶으시다면, 그러지 않는 게 좋다고 보지만, 주기적으로 매라도 좀 맞으셨으면 좋겠다. 그것만 하면 나도 그냥저냥 큰 불만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나는 타협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분들이 한 달에 한 번 동사무소 가서 카드 찍고 태형을 받으면 된다. 그러면 다른 건 어떻게 하든 좋다. 도구와 대수는 직종별 수입별로 단체교섭을 해서 정하면 된다. 교수 정도 되면 뭘로, 몇 대가 좋을까? 어쨌든 나는 바로 그 태형담당자가 되고 싶다. 뒤늦게 찾아온 꿈... 나, 70세의 은퇴한 교정공은 정부 지원 노인일자리를 알아보다 발견한다. 아, 드디어... 나는 곧장 지원한다. 진심이 담긴 지원서를 쓴다. 면접과 신체검사를 거친다. 나는 내게 다른 종류의 어두운 목적이 없다는 점을, 내게는 ‘오로지 원한뿐’이라는 점을 증명해야 하고 증명해낸다. 기준이 제대로 되어 있기만 하다면 나는 뽑힐 것이다. 문명 사회에서 태형은 좀 그렇지 않은가 싶기도 하지만, 그분들은 또 얼마나 문명인들인가? 꿈은 모두가 꾸는 꿈이다. 나는 주민센터에 도착해 곧장 ‘교정실’로 향한다.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가며 나는 생각한다. 이런 종류의 벌로 그들이 교정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한 일이다... 어쩌겠는가? 교정실 문은 잠겨 있다. 왜지? 안내문도 붙어 있지 않다. 주민센터 사이트에 접속해 본다. 반평생에 걸친 교정 업무로 인해 한없이 어두워진 눈으로 나는 동네소식 게시판의 깨알 같은 글자들을 한참 들여다본다. 태형... 자동화로 인해... 교정직 노인 일자리 지원... 중단...? 나는 주민센터를 나오며 존경하는 공무원분들께 모자를 벗어 인사한다.

2023년 11월 13일 월요일

온라인가나다라는 전쟁터

교정공으로서는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애증의 장소, ‘온라인가나다’는 국립국어원 누리집에 딸린 게시판이다. 어문 규범, 어법, 표준국어대사전의 내용 등에 대해 국립국어원에 직접 문의하고 답을 받을 수 있는 곳. 대화라는 양식의 설명이 필요한 어문 규범이 반드시 있고, 그 대화라는 건 대체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인간의 말이 아니라 개 짖는 소리만으로 개의 짖는 소리를 묘사하려 한다면 어떨지 상상해 보자. 멍멍! 한 다음 월월! 하는 것이다. 온라인가나다의 매일매일은 전쟁터다. 언어는(한국어는?) 수천만 마리의 개다. 그 속성상 각축할 자리가 끝없이 있어 왔고 또 생겨난다. 최전선의 양상은 아비규환일 수밖에 없다. 검색하면 나올 질문을 또 하고 또 하며 무한히 반복할 것만 같은, 무한한 것만 같은 수의 사람들, 자신이 무엇을 묻는지 모른 채 뭔가를 묻는 사람들, 이건 왜 이렇고 저건 왜 저렇냐고 한국어 그 자신이 와도 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왜 우리는 우리인가!), 그리고 언어라는 미로 속에서 눈떠 버린, 인터넷을 떠돌다 ‘국립’이라는 이름의 빛에 이끌려 온라인가나다를 찾아와 자신만의 특색 있는 언어 이론을 전개하는 괴인들... 마지막으로 그 모든 질문에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답을 해야만 하는, 국어의 지난날과 앞날의 진창 속에서 되든 안 되든 뭔가를 어떻게든 해야만 하는, 모니터 너머의 누군가(들?), 그들의 초인적인 인내력, 또는 한번 들여다보고 싶은 답변 양식 목록...

최근 ‘유모차(乳母車)’라는 단어를 ‘유아차(乳兒車)’ 또는 ‘아기차’로 순화하여 쓰자는 캠페인에 대하여, 일군의 반페미니즘 성향자들이 이 온라인가나다에 찾아가 단체로 따지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이를 두고 ‘이 정도면 정신병 아니냐’라든가, ‘정신병을 욕으로 쓰지 마라’거나, ‘쟤들은 나쁜 거지 아픈 게 아니다’라든가 하는 이야기들도 보았는데... 나 교정공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멍청, 무능, 무력, 무지, 저능... 이런 단어들은 뭔가를 욕할 때, 특히 우리의 적들을 욕할 때 동원되는 단어들 중 특히 맘이 아픈 것이다(맘이 아프지 않은 이와 대체 어떻게 이야기할까!). 어쩌면 바로 그래서 악이란 것이 고안되지는 않았을까? 악은 우리와 저들의 저능을 달리 보지 않으려는 상냥한 마음 때문에 필요했던 건지도 모른다. 마음이 아프니까, 차라리 악한 편이 좋다는 거다. 그들, 아마도 인생에서 처음으로 온라인가나다를 방문해 봤을 일군의 반페미니즘 성향자들은 내게 환상소설 속 악역을 맡은 사교도들처럼 보인다. 특정한 종류의 집단적 망상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속삭인 끝에 드디어 전면에 나서서 뭔가를 소환하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그 소환은 현실에 뭔가를 가져오는 식이 아니라 변화하는 현실을 가로막으려는 식이다. 즉 환상과 달리 이 현실에서 현실은 이미 소환된 것이다. 그래서 환상을 환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니 당연하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뒤집혀 묘사된 환상을 다시 뒤집어, 변화하려는 현실을 사교도적인 것의 자리에 놓고 있다. 바로 이 구조가 그들을 사교도로 만든다... 이런 광경은 화도 나지만 슬프기도 하다. 그들은 마치 빨려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얼굴은 과거를 향해 잡아당겨지고 늘려진다... 쭈욱...

2023년 10월 20일 금요일

나를 좆되게 하려는 모든 사람들과 사람 아닌 것들

잠깐만, 여기서 ‘좆되게’는 ‘좆 되게’로 띄어 씀이 적절할까?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 보니 ‘좆되다’는 한 단어가 아니다. ‘한 단어’라는 것이 말은 쉬워도 모호한 개념이다. 일단은, 국립국어원에서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렸으면 한 단어이고 안 올랐으면 아니다. 국어원에게도 물론 나름의 기준이 있어 어떤 단어를 올리느냐 마느냐를 두고 일정한 심사를 거칠 것이다. 사전에 없는 걸 보면 ‘좆되다’는 아직 심사를 통과하지 못한 모양이다. 혹시 명사 ‘좆’에 피동이나 형용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되다’가 붙은 단어로 볼 수는 없을까? 하지만 ‘좆’이란 명사 자체에 서술성이나 동작성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서술성이나 동작성이 있는지는 어떻게 따진담? 다소 빗나갈 위험은 있지만 공식이 있다. ‘되다’ 자리에 ‘하다’를 넣어서 어색한지 보는 것이다. ‘좆하다’는 어색하다. 만약 어색하지 않다면, 그리고 ‘-되다’를 붙였을 때 원래 명사의 의미를 유지하며 피동이나 형용의 뜻이 더해졌다면, 그때는 붙여도 된다. (뭐가 어색한지 안 한지 어떻게 구분하는지는 제발 묻지 마시라...) 이때 어색하므로 무조건 ‘-되다’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띄워서는 안 된다. 표준국어대사전에 한 단어로 올라가 있는지를 검색해 봐야 한다. 그럼에도 붙이는 편이 적절다고 국어원에서 판단한 단어들은 사전에 올리기 때문이다. 예로 ‘참되다’를 보자. ‘참하다’라는 표현을 쓰긴 하지만 그 경우 ‘참되다’의 ‘참’과는 뜻이 전혀 다르다. 그래서 ‘참 되다’라고 쓰면? 매우 되직하다는 뜻 정도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한 단어로서의 ‘참되다’가 필요한 것이다. ‘좆되다’의 경우 이미 찾아봤듯 없다. 역시 ‘좆 되다’로 띄어 써야 맞는다. 하지만... 하지만 이걸 정말 인정할 수 있나? 분명 국어원의 온라인가나다에도 같은 질문을 한 사람이 있을 것 같다. 찾아보니 역시 있다. 답변은 ‘띄어 쓰라’는 것이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제는... 하지만 나는 끝까지 인정할 수 없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없어도 내 사전(머릿속의)에는 그 단어가 있다. 지읒... 조... 좆... 역시! 나는 머릿속 사전에서 ‘좆되다’를 찾아낸다. ‘뜻하지 않게 몹시 마음에 안 들거나 난처한 상황에 처하다.’ 역시 맞지? 나는 그냥 붙여 쓰기로 한다. 내가 국어원의 개냐? 이래서는 뭔가 좀 좆같은 느낌이다. 여기서 ‘좆같다’는 붙여쓴다. 그것은 한 단어로 보아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좆을 들먹이는 것을 부디 용서해 달라. 하지만 표현하고 싶은 어떤 뭔가에 맞는 어떤 표현을 찾다 보면 뭘 피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렇지 않나? 이런 식으로, 교정공은 누구보다도 자신과 싸워야 한다. 내 맘에 들게 고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고치는 게 맘에 들지 않더라도 고쳐야 한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 아, 나를 좆되게 하려는 모든 사람들과 사람 아닌 것들... 그건 다음에 얘기하자. 오늘 얘기한 것은 사람 아닌 것들 중 하나인데, 그래도 이 정도는 그렇게 좆되는 문제까진 아니다.

2023년 10월 17일 화요일

교정공기는...

내가 도대체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이제는 희미해졌습니다. 교정공이라는 직업도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습니다. 바늘방석의 바늘들처럼 꽂힌 채 일터로 집으로 실려 가는 출퇴근길 나는 생각합니다. 바로 지금이 인류 역사상 상대적으로든 절대적으로든 최대의 읽고 씀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기 아닐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또는 바로 그래서일지, 나는, 나의 일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뭔가로 교정공을 곧 대체할 수 있으리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쓴 사람 자신의 조심성으로, 아니면 무슨 검사기로, 발달한 AI로...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사실을 교정공들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지금은요. 여러 의미에서요. 굳이 대체할 필요도 없이 어차피 헐값이고... 그래도 감사한 말씀입니다. 교정이란 게 필요하지 않다고 하지나 않으면 다행인 판국입니다. 실제로 교정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고 소리 높여 외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여러 이유를 대면서요. 그런 얘기를 들으면 꼭 인종이나 민족에 대한 욕을 들은 것처럼 흠칫 놀랍니다. 나는 청소당하는 걸까요? 그러나 내가 놀라는 진짜 이유는, 견디기 어려운 모욕감을 느끼면서도, 실은 마음 한편에서는, 그에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굳이 외치지 않아도 이 세계가 내 귀에 대고 그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필요하지 않다고요. 맞습니다. 나는 비밀스럽게 공공연하게 분명하게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래, 너희 맘대로들 해... 그겁니다. 맘대로들... 그러나 이 직업에는 내버리기 어려운 특유의 병과 벌도 있습니다. 그 어떤 잘나고 목소리 높으신 분들의 그 어떤 글에서든 고칠 곳이 보인다는 겁니다. 이 말글을 쓰는 이 나라에서 손발로 의전서열이 꼽히는 분들은 물론이거니와, 지성의 첨단에 계시다 하는 박사 교수님들, 심지어는 저 훌륭 대단한 여러 작가 문호님들까지... 그 누구도 관심이 없는 일에 오직 내가, 폭포 아래서 폭포를 멈추려 하고 있다는 그 느낌, 오직 나만이, 혼자서만 유령들을 보는 듯한, 그 위험천만한 느낌에 붙들릴 때마다 나는 눈을 감아 봅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의 기로 앞에서 맘속에서 눈물을 쏟고 분을 토했을, 이제 교정의 전당에 들어가 표정 없이 늘어선 선배 교정공들의 모르는 얼굴(데스마스크)들을 나는 떠올립니다. 선배들의 단단한 이마 너머에 무른 것의 고통이,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한없는 고통과 노고가 있었음을 나는 느낍니다. 이 고통은 도대체 언제쯤 끝날까요? 이 고통이 끝나는 것이 온당할까요? 나의 선생님은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이들을 가장 존경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그런 이들을요. 다른 누구보다도요. 교정공기는 당신으로 나를 대체하려는, 나 교정공의 기록입니다.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