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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6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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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공기
현충
뭐 했는지도 모르게 한 달이 지났다. 나는 이제 교정공이 아니다. 의료 대란에 의한 경영 악화로 3대 사장님과 작별. 나 좀 잘라줬으면 좋겠다 좋겠다 했는데 올 것이 온 것이다. 그 회사에 남은 실무자는 둘뿐. 건투를 빌며 나왔다. 월요일에는 실업급여를 타먹기 위해 고용노동청에 다녀왔다. 예비군 훈련도 이따위로는 안 하겠다고 생각하며 집체교육인지 뭔지를 받았다. 내가 이제껏 얼마나 괜찮은 시스템 위에서 얼마나 잘 훈련된 이들로부터 얼마나 상냥한 가르침을 받았는지 지난날의 교육과정을 새삼 돌아볼 정도. 연단에 올라 그저 뭔가를 해야 하니 하고 있는 그 직원-강사에 대해서도 노동자로서 너무나 이해가 된다는 것으로, 아침부터 하해와 같은 모욕감과 동지애와 혐오감이 뒤섞여 만사 우스운 기분이 되었다. 전에 어머니가 무슨 인터넷 강의를 의무적으로 들어야 한다고 좀 틀어달라 했던 적이 있었다. 그 강의라는 것도 듣는 방법과 내용 양면에서 형편없는 쓰레기였다. 무슨 교수 녀석이 나와 가지고는... 대체 그따위로 누구에게 뭘 가르친다는 건가? 마땅히 쉬워야 할 것이 어렵게 되어 있는 것은 마땅히 어려워야 할 일이 쉽게 되고 있기 때문이다. 책임이 약한 곳에서부터 이해는 모르는 줄도 모르게 무너진다. 책임이란 배려에서부터 나오는 것으로, 배려는 마음보다도 그것의 흔적을, 내가 그쪽으로 가는 역지사지를 가능케 하는 선대의 경사로를 말하는 것이다. 이해는 강물처럼만 될 것이 아니고 파도처럼 시냇물처럼 빗줄기처럼 눈처럼도 되어야 하는데, 이해가 무너진 데 고이는 것은 무지가 아니라 만사의 우스움이고... 꼴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돌아와서는 한참 잤다. 당분간인지 앞으로인지 어쨌건 당장은 교정공이 아닌 나의 교정정신도 금방 희미해졌다. 앞날에 암운뿐인데 별 아무 말을 만들고 싶지가 않다. ‘될 대로 돼라’ 상태에 자꾸만 이르러 헛소리를 쓰다 지우고 쓰다 지우고... 그리고 다음 날은 대선. 지지 후보의 득표율은 1%를 넘기지 못했다. 기도 안 차는 개소리들과 기가 차는 개소리들의 대격돌을 다시 봐야 하는 것에 가슴 답답.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다시 이론과 실천이... 오늘날의 의식화와 조직화가 필요하다... 다시 오늘날의 지혜와는 무관한, 크나큰 염불 속에서 자고 또 잤다.
2025년 2월 18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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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공기
분위기와 계시
매일 늦은 오후가 되면 관리자는 메신저로 오늘의 작업현황을 모두에게 묻는다. 지금 보고 있는 책이 무엇인지, 야근할 건지 퇴근할 건지. 일 많은 때 그냥 퇴근한다 하면 들으란 듯 저 자리에서 한숨 빡빡 쉰 다음 바로 1:1 메시지를 보낸다. “지금까지 몇 장 봤어요” “몇 장 남았어요” “보는 데 얼마나 걸려요” “하루에 몇 장 봐요”...어제 물었던 그대로 오늘 또 묻는다. 일주일 내내다. 혼자 하루 종일 허공에 대고 머리 아프다 저기 아프다 돌겠다 어쩧다 씨부렁대는 것도 진짜 미칠 노릇이다. 아니 일은 씨팔 내가 하고 야근을 해도 내가 하는데 왜 님이 제일 힘드셔요? 그의 고통 호소는 그보다 높은 직급의 사람이 사무실에 있을 때만 딱 멈춘다. 결국 이것은 자신이 중간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한껏 어필하는 식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간당간당한 인간적 연민에 기대어...? 그러지 말고 관리라는 거를 자기 주둥이로 직접 해보면 어떨까?
어쩔 때는 모니터를 뽑아 녀석의 자리에 던져버리고 싶지만, 사실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그도 결국 원청이나 사장에게 애걸복걸해서 겨우 일정을 미루거나 하달받은 일정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일을 되게 하려고’ 그가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해왔던 일들이 이렇게 쌓여 이렇게 된 것을... 그래요, 이해하지 못할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사원들에게 미움받기도 사장에게 깨지기도 싫은 입장을 따라오다 보니 개새관리자보다는 징징관리자가 되는 편이 나았다는 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 인간의 일인데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다. 그 역시 꾸준히 우리를 이해하고 있다는 제스처를 취한다. 그러면서 허공에다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한다. 사장에 대한 불만도 원청에 대한 불만도 교수새끼들에 대한 불만도. 그가 우리의 말을 대신 해주려는 건가? 그가 우리의 의원인가? 어쨌건 그의 대변이 전해져야 할 방향으로 전해지지 않고 역류하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역시 그냥 관리 기술일 뿐이다. 관리자가 우리를 ‘제대로’ 대변해야 하는 걸까? 내 생각에는 그것도 온당치 않다. 우리는 그에게 어떤 권한도 위임한 적이 없다. 그와 내가 서로 이해하는 만큼 우리가 사장 교수 원청 새끼들로부터 이해받고 있지는 않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이해한다면 이런 식으로 일을 밀어 넣으려 들진 않을 것이다. 나로서는 이해를 구할 방도라는 것 자체가 없고, 그들도 당연히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 먼 신비로 있다. 그들에게도 패턴은 있는데, 일단 무조건 최대한도로 들이대는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처럼 들이대고, 우리의 사제는 왼종일 기도하듯 징징댄다. 그 기도의 뜻은 우리가 일을 위해 우리 자신을 관리·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AI가 우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이미 우리의 사회가 만들어낸 가장 최적화된 AI 엔진이다. 따라서 나의 당연한 결론은, 앞뒤의 사정이 이러할진대 내가 나를 관리할 수는 도저히 없다는 것이다. 노동량 산정을 나와 전혀 협의하질 않는데 도대체 왜 내가 알아서 맞춰줘야 한단 말인가? 내가 개 호구냐? 어? 책임이 없는데 책임을 어떻게 지냐? 꼬우면 협동조합 전환이라도 하든가... 이놈의 회사는 도대체가 그런 노력도 없이... 그저 뭘 위해서인지도 모른 채 내 시간 쥐어짜낼 생각뿐인 파렴치한 구조 기계일 뿐...
지난날 사장과 면담할 기회가 딱 한 번 있었다. 업무 폭증으로 사무실 분위기가 아주 개차반이 되어 있던 때였다. 그것은 영문 모를 계시처럼 갑작스러웠고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사장은 내게 뭐가 제일 문제냐고 물었고 나는 당장 생각나는 대로 ‘교수들’과 ‘원청’이라 답했다. 그는 공감을 표하면서 자신이 젊었을 때 교수한테 당한 어떤 치욕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사회 분위기’가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교수한테든 원청에게든 무슨 말을 하려거든 자기도 명분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과연 일리가 있었다. 사장의 말은 그 뒤로도 더 이어졌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위로 치받을 수 있는 분위기... 그저 돈과 시간으로 결정되는 이 시간표 속에서 뭐라도 쥐고 맞설 것은 명분 말고는 없다... 그런데 명분은 땅에 떨어져 있다. 왜? 위와 아래라는 것이 있는 힘을 다해 전력으로 은폐되기 때문이며, 위를 치받는 이미지가 다만 예술화되었기 때문이며, 영웅들과 악당들의 극이 빈자리를 채웠기 때문이며, 돈이니 능력이니 하는 쉬운 말으로 설득력을 집중시켜 온 때문이며, 진정한 변화로 뒷받침되지 못하는 공허한 명분과 세상 사이의 괴리로 좋은 추상들이 점점 빛을 잃었기 때문이며... 그 명분은 추상적이면서도 분명한 실체가 있는, 우리의 계급적 압력으로부터 나올 수밖에는 없을 것... 답은 역시... 답은 역시 ‘그것’뿐, 대표를 직접 뽑는 것뿐... 내 노동의 대표를...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사장실에서 나왔다.
어쩔 때는 모니터를 뽑아 녀석의 자리에 던져버리고 싶지만, 사실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그도 결국 원청이나 사장에게 애걸복걸해서 겨우 일정을 미루거나 하달받은 일정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일을 되게 하려고’ 그가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해왔던 일들이 이렇게 쌓여 이렇게 된 것을... 그래요, 이해하지 못할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사원들에게 미움받기도 사장에게 깨지기도 싫은 입장을 따라오다 보니 개새관리자보다는 징징관리자가 되는 편이 나았다는 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 인간의 일인데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다. 그 역시 꾸준히 우리를 이해하고 있다는 제스처를 취한다. 그러면서 허공에다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한다. 사장에 대한 불만도 원청에 대한 불만도 교수새끼들에 대한 불만도. 그가 우리의 말을 대신 해주려는 건가? 그가 우리의 의원인가? 어쨌건 그의 대변이 전해져야 할 방향으로 전해지지 않고 역류하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역시 그냥 관리 기술일 뿐이다. 관리자가 우리를 ‘제대로’ 대변해야 하는 걸까? 내 생각에는 그것도 온당치 않다. 우리는 그에게 어떤 권한도 위임한 적이 없다. 그와 내가 서로 이해하는 만큼 우리가 사장 교수 원청 새끼들로부터 이해받고 있지는 않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이해한다면 이런 식으로 일을 밀어 넣으려 들진 않을 것이다. 나로서는 이해를 구할 방도라는 것 자체가 없고, 그들도 당연히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 먼 신비로 있다. 그들에게도 패턴은 있는데, 일단 무조건 최대한도로 들이대는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처럼 들이대고, 우리의 사제는 왼종일 기도하듯 징징댄다. 그 기도의 뜻은 우리가 일을 위해 우리 자신을 관리·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AI가 우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이미 우리의 사회가 만들어낸 가장 최적화된 AI 엔진이다. 따라서 나의 당연한 결론은, 앞뒤의 사정이 이러할진대 내가 나를 관리할 수는 도저히 없다는 것이다. 노동량 산정을 나와 전혀 협의하질 않는데 도대체 왜 내가 알아서 맞춰줘야 한단 말인가? 내가 개 호구냐? 어? 책임이 없는데 책임을 어떻게 지냐? 꼬우면 협동조합 전환이라도 하든가... 이놈의 회사는 도대체가 그런 노력도 없이... 그저 뭘 위해서인지도 모른 채 내 시간 쥐어짜낼 생각뿐인 파렴치한 구조 기계일 뿐...
지난날 사장과 면담할 기회가 딱 한 번 있었다. 업무 폭증으로 사무실 분위기가 아주 개차반이 되어 있던 때였다. 그것은 영문 모를 계시처럼 갑작스러웠고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사장은 내게 뭐가 제일 문제냐고 물었고 나는 당장 생각나는 대로 ‘교수들’과 ‘원청’이라 답했다. 그는 공감을 표하면서 자신이 젊었을 때 교수한테 당한 어떤 치욕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사회 분위기’가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교수한테든 원청에게든 무슨 말을 하려거든 자기도 명분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과연 일리가 있었다. 사장의 말은 그 뒤로도 더 이어졌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위로 치받을 수 있는 분위기... 그저 돈과 시간으로 결정되는 이 시간표 속에서 뭐라도 쥐고 맞설 것은 명분 말고는 없다... 그런데 명분은 땅에 떨어져 있다. 왜? 위와 아래라는 것이 있는 힘을 다해 전력으로 은폐되기 때문이며, 위를 치받는 이미지가 다만 예술화되었기 때문이며, 영웅들과 악당들의 극이 빈자리를 채웠기 때문이며, 돈이니 능력이니 하는 쉬운 말으로 설득력을 집중시켜 온 때문이며, 진정한 변화로 뒷받침되지 못하는 공허한 명분과 세상 사이의 괴리로 좋은 추상들이 점점 빛을 잃었기 때문이며... 그 명분은 추상적이면서도 분명한 실체가 있는, 우리의 계급적 압력으로부터 나올 수밖에는 없을 것... 답은 역시... 답은 역시 ‘그것’뿐, 대표를 직접 뽑는 것뿐... 내 노동의 대표를...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사장실에서 나왔다.
2024년 12월 27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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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공기
...도 당신을 들여다본다
교수들 원고처럼 혼란스러운 시국이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같은 오류를 다시 반복할 것인가? 아닌가? 예측을 넘어 개입해야 한다. 개입을 통해 예시해야 한다. 예시를 쌓아 본이 되게 한다... 그들로부터 우리를, 우리로부터 그들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를 그들에게 집어넣고 그들을 우리에게... 물을 것이다. 그 일은 일어난다. 그것이 내가 배운 교정 정신이다. 앞날이 어찌 달리 전개되어야 할지 상상하기 위해서라도, 올해가 가기 전에 이 일을 해둬야 한다.
사적인 얘기로 시작해보자. 내게는 적赤의 좌우명 셋과 백白의 우좌명 셋이 있다. 백의 우좌명 셋은 다음과 같다: 1) 하면 된다. 2) 안 되면 되게 하라. 3) 심판은 하느님께 맡기고 모조리 죽여라. 앞의 둘도 참 좋지만 심판을 하느님께 맡긴다는 건 곱씹을수록 좋은 지혜 같다. 하느님은 번역되길 기다리며 쌓이고 있는 비유다. 사실에 가깝게 보아, 하느님이 있다 치면 죽이는 쪽은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매일같이 아주 오랫동안 떼거리로 죽이고 있다. 하느님은 도살의 광기를 맡아 왔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이성의 심판을 가능케 하는 것은 이렇게 죽고 저렇게 죽은 이들, 죽은 이들에 대한 우리의 물화된 기억이다. 도살의 이성, 광기의 심판이라 바꿔도 무슨 상관일까. 어쨌건 하느님은 잠깐의 반짝임과 긴 역사로 구성되어 있다. 허투루 흘러 사라지는 듯한 개개 모조리에도 포개어진 진실이 있다는 것이고, 피눈물이 나는 참경의 와중에도 차거운 홀가분함이 있다는 것...
너무 갑자기 너무 멀리 간 것 같다. 다시 돌아와서 하려던 이야기를 해보자. 지난여름, 이 교정공기가 원고로 포함된 책 『교정이 요정』이 나온 뒤부터 나는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감상문들에 대한 감상문을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종이책의 물리적인 경계를 통해 인도되는 특정한 종류의 고전적인 광기가 있으며, 그 광기는 오늘날의 방식으로 해방되어야 한다는 생각... 저자이자 독자로서 나는 독자이자 저자인 이들의 길고 짧고 반짝이는 감상문들을 최대한 읽어보았다. 놓친 것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못해도 거의 모두일 것이다(...모조리 죽여라). 그렇게 들여다봤으니, 혼자서만 무슨 생각을 하고 말기에는 음험이고 배임이고 착오다. 그냥 넘어갈 수 있으리란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심판은 하느님께 맡기고...). 독자들이란 도살의 하느님이다. 이 시국, 물질과 환상이 서로를 향해 역류 중인 이 시국에... 독자들이 반쯤 미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자들도 반쯤 미쳐 있다. 이제 나, 교정공의 감상은 다음과 같다:
『교정의 요정』은 글을 교정해주는 요정을 뜻하지 않는다.
『교정의 요정』은 교정을 주제로 삼지 않았다.
『교정의 요정』은 일기장이 아니다.
‘~이 아니’라고만 하는 나를 부디 용서해야 한다. 이어지는 다음의 아닌 것들은 농담이 아니다.
↓천하의 개씨발좆같은새끼들
사적인 얘기로 시작해보자. 내게는 적赤의 좌우명 셋과 백白의 우좌명 셋이 있다. 백의 우좌명 셋은 다음과 같다: 1) 하면 된다. 2) 안 되면 되게 하라. 3) 심판은 하느님께 맡기고 모조리 죽여라. 앞의 둘도 참 좋지만 심판을 하느님께 맡긴다는 건 곱씹을수록 좋은 지혜 같다. 하느님은 번역되길 기다리며 쌓이고 있는 비유다. 사실에 가깝게 보아, 하느님이 있다 치면 죽이는 쪽은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매일같이 아주 오랫동안 떼거리로 죽이고 있다. 하느님은 도살의 광기를 맡아 왔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이성의 심판을 가능케 하는 것은 이렇게 죽고 저렇게 죽은 이들, 죽은 이들에 대한 우리의 물화된 기억이다. 도살의 이성, 광기의 심판이라 바꿔도 무슨 상관일까. 어쨌건 하느님은 잠깐의 반짝임과 긴 역사로 구성되어 있다. 허투루 흘러 사라지는 듯한 개개 모조리에도 포개어진 진실이 있다는 것이고, 피눈물이 나는 참경의 와중에도 차거운 홀가분함이 있다는 것...
너무 갑자기 너무 멀리 간 것 같다. 다시 돌아와서 하려던 이야기를 해보자. 지난여름, 이 교정공기가 원고로 포함된 책 『교정이 요정』이 나온 뒤부터 나는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감상문들에 대한 감상문을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종이책의 물리적인 경계를 통해 인도되는 특정한 종류의 고전적인 광기가 있으며, 그 광기는 오늘날의 방식으로 해방되어야 한다는 생각... 저자이자 독자로서 나는 독자이자 저자인 이들의 길고 짧고 반짝이는 감상문들을 최대한 읽어보았다. 놓친 것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못해도 거의 모두일 것이다(...모조리 죽여라). 그렇게 들여다봤으니, 혼자서만 무슨 생각을 하고 말기에는 음험이고 배임이고 착오다. 그냥 넘어갈 수 있으리란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심판은 하느님께 맡기고...). 독자들이란 도살의 하느님이다. 이 시국, 물질과 환상이 서로를 향해 역류 중인 이 시국에... 독자들이 반쯤 미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자들도 반쯤 미쳐 있다. 이제 나, 교정공의 감상은 다음과 같다:
『교정의 요정』은 글을 교정해주는 요정을 뜻하지 않는다.
『교정의 요정』은 교정을 주제로 삼지 않았다.
『교정의 요정』은 일기장이 아니다.
‘~이 아니’라고만 하는 나를 부디 용서해야 한다. 이어지는 다음의 아닌 것들은 농담이 아니다.
문제는 책이 아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편집자분들의 감상이었다. 어떤 편집자 아저씨는 보도자료만 읽고서는 ‘버티다 보면 자신과 같은 훌륭한 편집자가 될 것’이라고 농을 써놓았다. 그 감상에는 대표적인 면이 있었다. 내가 많지 않은 시간에 기대어 쓰고 싶은 것만 썼듯 많지 않은 시간에 기대어 읽은 척한 다음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도 당연하다. 우리가 서로의 하고 싶은 말을 겹쳐보면? 나는 무슨 훌륭한 편집자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내 노동에 ‘좋은 책’ 같은 개념이 끼어들 여지도 없다. 나는 내 노동의 결과물을 훌륭하게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 아니고 그럴 생각도 없다. 내가 심리적으로 더 가깝게 느끼는 직종은 인쇄기사이지 편집자가 아니다. 나는 훌륭하게가 아니라 당연하게 만들기 위해 있는 사람이다. 나는 상황이 허락되는 한 최대한 태업한다. 책 역시 태업의 결과물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문제는 책에 내 이름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일까? 내 임금이 너무 낮게만 느껴진다는 것일까? 교정이라는 일 자체와 내가 맞지 않는 걸까? 항상 나는 그 생각을 한다. 오직 시간만, 오직 인간의 시간만을 필요로 하는 노동이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바로 그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도 점점 더 많이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그로부터 유리된 각자의 방식대로 인간성의 마모가 관측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문제는 인간이 아니다
저자, 특히 교수에 대한 욕을 중심으로 공감을 표한 감상들도 많았다. 이 감상문도 그렇게 시작했듯 욕하기는 언제나 재밌는 일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교수가 아니다. 누군가들에 대한 욕으로만 문제가 마무리되고 문제가 반복된다는 것이 우리가 직면 중인 최대의 문제다. 바로 지금과 같이, 마모된 우리의 인간성은 드러난 채 화를 모으고 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도 교수님들 덕에 피가 거꾸로 솟는 나 자신을 자료로 삼아 화의 까닭과 단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봤다.- 틀리는 새끼
- 맞아야 하는데 틀리는 새끼
- 틀려놓고 맞다고 우기는 새끼
↓천하의 개씨발좆같은새끼들
- 틀려놓고 맞다고 끝까지 우겨서 기어이 관철할 수 있는 새끼
- 맞고 틀리고의 기준을 지 좆대로 바꾸려는 새끼
- 맞고 틀리는 것은 없으므로 맘대로 써도 된다고 선동하는 새끼
문제는 언어가 아니다
세계가 박살 나고 있는 와중 두 생각이 충돌하고 있다. 언어는 중요하다는 생각과 언어는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네 말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증오스럽고, 내 말은 너무 하찮기 때문에 마구 흐른다. 또는 그 반대... 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렇게 말해도 된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것들은 손잡고 돌다가 서로를 깨물고 껴안았다 쥐어뜯는다. 시대, 시간, 사건, 화자, 독자, 지면... 온갖 것들을 따라 언어는 일렁인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대로 기록되는 듯하고 모든 것이 더 분명한 것만 같은 이 시대에는, 더 높은 해상도로 흔들리며 더 큰 현기증을 부른다. 하느님이 비유라면 지금 그것은 우리를 우리로부터 찢어 놓는 시험을 벌이고 있는 세계에 대한 비유다. 우리는 점점 더 말을 잃고 있다. 우리는 점점 더 크게 말하고 있다. 점점 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게 된다. 언어는 중요하다는 생각과 언어는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동시에 하면서다. 함께 쓰는 말이 찢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세계가 박살 나고 있는 것이 맞나? 박살 나 있던 세계를 우리가 비로소 나눠 갖기 시작했을 뿐이다. 문제는 언어에 있지 않다. 문제는 언어와 언어 사이의 공간에 ‘있다’. 문제는 아직 내가 읽지 않은 곳에, 읽었지만 대충 지나친 곳에, 아직 언어가 등장하지 못한 곳에, 언어가 과잉된 곳에, 자신조차 자신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는 곳에, 언어가 중요하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음성의 허공에, 노출된 인쇄면과 그 상공에 떠있는 것 사이에 있다. 움직이는 쪽은 언어가 아니라 우리다. 죽일 것인가? 언어의 구름을 밀면서 우리는 가게 될 것이다. 혼란은 이제 시작이다.2024년 10월 24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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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공기
오망성
나는 장난질 속에 자신을 파묻고 있다. 나의 수호악마는 더 나아진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악마조차 그토록 진지한데. 최근에는 다섯 권의 책을 같이 보고 있다. 이제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혼란하다. 기억나지도 않는 언젠가 써둔 다섯 개의 작업 파일에 의지해 더듬어 나갈 뿐이다.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일하느라 읽어 오고 읽고 있는 수많은 문자 숫자들이 다 야속하다. 무슨 소린지 몰라도 교정할 수 있다. 아니면 나는 그냥 교정하는 흉내를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아무 뜻 없듯 내게 이 일은 아무 뜻 없다. 그럼에도 그 일은 이루어지고 있는데,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하고, 내가 그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 할 일을. 나는 사전 속에 내 시간을 처박아 버리고 있을 뿐이다. 이 지겨운 시간을. 할 수만 있다면, 회사에서는 그냥 일을 할 때 시간이 제일 빨리 간다. 그 시간에 내가 읽고 싶은 것을 읽었더라면 뭔가 달라졌을까? 거기서 나는 장난질 속에 자신을 파묻고 있다. 널리 흔해진 죽음으로부터 우리가 분리되는 동안 재앙과 불의는 환하게 다가오고,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끔찍한 방언 대결 가운데 시들은 한없이 우스워 보인다. 나의 수호악마는 더 나아진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말을 밀고 당기라… 인간 너머의 세계와 싸우라… 서로 도우라…
2024년 10월 11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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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공기
텔레파시 입문
오류가 이 인터넷을 집어삼킬 것이다. 디지털 쓰레기와 오염된 유사 정보가 이곳을 가득 채워 가고 있다. 가짜뉴스들, ‘견해’들(오해된, 오해한, 곡해된, 곡해한, 모자란, 과한), 개소리를 반박하려는 개소리들, 끝을 모르는 농담들, 되다 말기를 스스로 택한 ‘시’들과 ‘소설’들, 그 비슷한 예술 잔해들, AI잼, 밈, 포르노(인간과 동물과 사물 들), 광고 이미지와 텍스트, 더 많은 조회를 원하게 하려는 그 모든 경사로들 사이에서, 인터넷은 표면을 위한 표면에, 표면의 바다에 미끄러지며 가라앉고 있다. 기술적으로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모든 것을 재현하고 재생산하려는 이곳에서, 더 실감 나게 옮기려 할수록 진실(이것은 미래와 관련된 개념이다)과 더 멀어진다고 하는 언어의 특질은 극대화되고 있다. 어떤 빛나는 진실이 공급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겉에 펴 바를 뿐이다. 감각되는 아무것도 옳을 수 없게 됨으로써 모두가 더 옳음을 원하게 되고, 더 많은 그름 자체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데 그친다. 모든 것이 있고 아무 뜻도 없는, 모든 것을 뜻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인터넷은 총문학(總文學)이 되려 하고 있다. 이곳은 쓰레기-문학의 정점이자 전범이 되려 하고 있다. 감관을 붙잡아 두려는 자본과 자본을 붙잡으려는 강박이 함께, 공산주의 문학 이상理想의 악몽판을 도래시키는 중이다. 모두가 함께 쓴, 그리고 누구의 것도 아닌 것을. 역사가 그것을 쓰이게 만들고 있다. 그것은 역사의 종말에 관해 쓰고 있다. ‘더 큰 숫자’라는 하나의 이념을 따라 그것은 만사를 분열시키며 영원한 미완을 향해 수렴하는 역류가 되는 중이다. 그리고 우리는 읽기 기계가 되어 간다. 그것(우리와 인터넷)은 미래로부터 불길하게 뻗쳐오는 에스에프다. 또는 종말 미래로의 고속화도로다. 우리는 무오류의 감정 노드가 되어 간다. 맹신과 불신을 향해 우리는 치닫는다. 언어가 드디어, 현실에 대한 오랜 열세를 역전시키고 있다. 문자는 숫자의 노예가 되어 간다. 노예들의 감관과 손을 통해서다. 드디어 우리는 꿈에 도달하고 있다. 무정한 현실을 파괴하면서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다. 현실은 실제로 파괴되고 있으며, 우리의 머릿속에서도 그렇다. 우리는 병에 걸리고 있고, 병이 되어 가고 있다. 그러한가? 인터넷인 가장 원초적인 형태인 책을 살펴보자. 그것은 한때 가능성으로 여겨졌고, 그 가능성은 이제 이렇게 되었다. 우리가 다시 종이책을 볼 때에 아쉬움을 느끼는 부분은 ‘검색’ 기능의 부재다. 색인이라는 야만은 우리의 책들을 뒤에서 꽉 밀어붙이고 있다. 아니면 우리의 책들이 색인이라는 야만을 붙들고 있다. 모든 것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있듯, 그 또한 해방되어야 한다. 책 안에서 우리가 검색하고 책들 사이를 검색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 된다면, 표면을 향해 가라앉아 가는 문자의 미래를, 우리의 것이었던 적 없었던(그러나 우리가 파놓은) 미래의 물길을 다시 움직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책들이 공유하는 완전색인에 우리가 접근할 수 있다면... 도래 중인 총문학의 꼬리를 잡아 뒤집어 뺄 수도 있을 가능성이 거기에 있다고 해보자. 그것이 인터넷과 과연 얼마나 다른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다르지 않다. 그것(인터넷)을 총문학이 아닌 그것의 완전색인으로 쓴다면, 본문이 아니라 색인으로 읽는다면. 그것이 스스로 현실에 대한 사전임을 참칭하지 못하도록, 먼저 분명히 해둬야 한다. 무한과 영원이라는 착시가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총문학의 노고(불가능이 아니라)를 헤아림으로써, 유한과 한계가 진실로 도입되어야 한다는 것을.
2024년 9월 26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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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공기
그리고 이제 피는 쏟아져 있다. 비명 사진처럼 쏟아지자마자 굳어 가고 있다. 동지는 손바닥으로 피를 그러모은다. 동지의 시뻘건 손은 굳어가는 피를 제단에 바른다. 아니, 제단에 올리려 하는 것 같다. 피는 제단에서 죽는다. 그다음 잘 마른 해골을 새하얀 그대로 제단에 올려야 한다. 씻을 곳이 없기 때문에 동지는 손을 쳐들어 말린다. 자신을 겨눈 총구를 앞에 둔 듯. 시원한 바람이 젖은 손가락 사이로 지나간다. 해골의 눈구멍은 머리 없는 동지를 향해 뚫려 있다.
그리고 이제 동지는 괭이 자루 끝을 양손으로 누르며 턱을 괴고 서 있다. 밭 가운데서. 얼마나 일했는지 보기 위해서인지, 얼마나 더 일해야 하는지를 보기 위해서인지, 이쪽저쪽으로 흔들거리는 동지는 곧 무너져내릴 것처럼 위태롭다. 밭은 더할 나위 없이 기름지고 비옥하다. 동지가 자신의 피와 림프를, 근육과 장기를 거름으로 흘리면서 갈아놓았기 때문이다. 뼈 동지는 밭 가운데 그대로 서 있다. 그곳에는 씨앗도 날씨도 없다.
그리고 이제 짙은 방사능 안개도 헤치고 온 동지를, 그 일이 쓰러뜨린다. 갑자기 도시에 다다라 놀란 표정의 군중과 만나는 일이. 동지의 라디오 방랑은 그렇게 끝난다. 동지의 놀란 얼굴과 함께.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목소리도 거짓말처럼 멎고, 드디어 벗어 본 널빤지 위의 글자는 이미 다 바래서 한 획도 남아있지 없다. 동지는 자신이 옳고 그름을 가리는 지옥을 통과해 온 것인지 드디어 지옥에 도달한 것인지 궁금하다. 아무것도 통과하지 않았고 아무 데도 도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동지의 텅 빈 머리통 속에서 윙윙거린다.
그리고 이제 동지의 얼굴로 비린내가 훅 끼쳐 온다. 맷돌 위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못 본 틈에 쥐라도 뛰어든 걸까? 거적떼기를 걸친 또 다른 동지가 쫓기듯 방앗간에 들어온다. 자신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표정이다. 그렇지, 교대를 하러 왔구나! 새로 들어온 동지는 묻는다. “혹시 선생님을 보지 못하셨소?” 이건 또 무슨 타령인가? “누가 당신의 선생이오?” “쥐... 쥐가... ” 이 동지는 머리가 약간 이상해진 것이 분명하다. “헛소리 말고 교대하시오. 당신의 선생은 방금 막 저 사이에서 으스러진 참이오. 불쌍한 선생을 다시 만나고 싶다면 이 채를 힘껏 미시오. 내가 줄곧 이 방향으로 밀었으니 당신은 이 방향으로 미시오.” 해방된 동지는 방앗간을 나서기 전 양동이에 든 숯덩이들을 매 위에 쏟아준다. “선생은 반드시 되돌아올 거요.”
그리고 이제 재가 된 들판에 숯덩이 일곱 개. 하나는 커다랗고 둘은 둥그렇고 다섯은 길쭉하다. 둥그런 것 하나를 발로 차보는데, 뜻하지 않게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간다. 그것이 동지가 들고 있던 양동이였음을 뒤늦게 안다. 남은 일곱 개의 숯덩이를 양동이에 주워 넣는다. 채 다 들어가지 않아 발로 밟아 바숴야 한다. 아홉 개로, 열한 개로, 그 이상으로. 온통 검댕이 묻는다.
그리고 이제 동이 트며 비가 내린다.
속, 동지들과 여섯 개의 비유
피와 해골 신도
그리고 이제 피는 쏟아져 있다. 비명 사진처럼 쏟아지자마자 굳어 가고 있다. 동지는 손바닥으로 피를 그러모은다. 동지의 시뻘건 손은 굳어가는 피를 제단에 바른다. 아니, 제단에 올리려 하는 것 같다. 피는 제단에서 죽는다. 그다음 잘 마른 해골을 새하얀 그대로 제단에 올려야 한다. 씻을 곳이 없기 때문에 동지는 손을 쳐들어 말린다. 자신을 겨눈 총구를 앞에 둔 듯. 시원한 바람이 젖은 손가락 사이로 지나간다. 해골의 눈구멍은 머리 없는 동지를 향해 뚫려 있다.
지옥에서 밭 갈기
그리고 이제 동지는 괭이 자루 끝을 양손으로 누르며 턱을 괴고 서 있다. 밭 가운데서. 얼마나 일했는지 보기 위해서인지, 얼마나 더 일해야 하는지를 보기 위해서인지, 이쪽저쪽으로 흔들거리는 동지는 곧 무너져내릴 것처럼 위태롭다. 밭은 더할 나위 없이 기름지고 비옥하다. 동지가 자신의 피와 림프를, 근육과 장기를 거름으로 흘리면서 갈아놓았기 때문이다. 뼈 동지는 밭 가운데 그대로 서 있다. 그곳에는 씨앗도 날씨도 없다.
핵 광야의 피케팅과 라디오 방랑
그리고 이제 짙은 방사능 안개도 헤치고 온 동지를, 그 일이 쓰러뜨린다. 갑자기 도시에 다다라 놀란 표정의 군중과 만나는 일이. 동지의 라디오 방랑은 그렇게 끝난다. 동지의 놀란 얼굴과 함께.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목소리도 거짓말처럼 멎고, 드디어 벗어 본 널빤지 위의 글자는 이미 다 바래서 한 획도 남아있지 없다. 동지는 자신이 옳고 그름을 가리는 지옥을 통과해 온 것인지 드디어 지옥에 도달한 것인지 궁금하다. 아무것도 통과하지 않았고 아무 데도 도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동지의 텅 빈 머리통 속에서 윙윙거린다.
연자매
그리고 이제 동지의 얼굴로 비린내가 훅 끼쳐 온다. 맷돌 위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못 본 틈에 쥐라도 뛰어든 걸까? 거적떼기를 걸친 또 다른 동지가 쫓기듯 방앗간에 들어온다. 자신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표정이다. 그렇지, 교대를 하러 왔구나! 새로 들어온 동지는 묻는다. “혹시 선생님을 보지 못하셨소?” 이건 또 무슨 타령인가? “누가 당신의 선생이오?” “쥐... 쥐가... ” 이 동지는 머리가 약간 이상해진 것이 분명하다. “헛소리 말고 교대하시오. 당신의 선생은 방금 막 저 사이에서 으스러진 참이오. 불쌍한 선생을 다시 만나고 싶다면 이 채를 힘껏 미시오. 내가 줄곧 이 방향으로 밀었으니 당신은 이 방향으로 미시오.” 해방된 동지는 방앗간을 나서기 전 양동이에 든 숯덩이들을 매 위에 쏟아준다. “선생은 반드시 되돌아올 거요.”
불타는 들판
그리고 이제 재가 된 들판에 숯덩이 일곱 개. 하나는 커다랗고 둘은 둥그렇고 다섯은 길쭉하다. 둥그런 것 하나를 발로 차보는데, 뜻하지 않게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간다. 그것이 동지가 들고 있던 양동이였음을 뒤늦게 안다. 남은 일곱 개의 숯덩이를 양동이에 주워 넣는다. 채 다 들어가지 않아 발로 밟아 바숴야 한다. 아홉 개로, 열한 개로, 그 이상으로. 온통 검댕이 묻는다.
늪괴물
그리고 이제 동이 트며 비가 내린다.
2024년 9월 6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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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공기
텔레파시
인터넷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이전과 질적으로 다른, 말이면서 생각인 동시에 글인 무엇이다. 문자와 음성과 영상을, 그것들의 교환을, 공간(CYBER~~~)을 포함한다. 이것은 ‘바깥’에서 보면 일종의 초보적인 텔레파시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우리는 이런 식의 언어를 이렇게 대규모로 사용해본 적이 없다. 이 조건 위에서 우리는 타인과 전례 없는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 영향 도중 약하거나 강하게 온갖 방식으로 유형적으로 미쳐버리는 사람들(나 자신 포함하여)을 많이 보았다. 아니 그보다는, 함께 미쳐가고 있다. 아마도 우리는 완전히 변해버린 언어 환경에 맞는 언어 교육을 받아야 할 것이다. 주먹도끼도 모르는데 손에 기관총이 들려 있다. 초등교과에 매스커뮤니케이션(집체대화?) 과목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언어 교과 자체가 일신되어야 할까? 어른들도 자신이 알던 언어와 이곳의 언어 사이의 괴리 때문에 고통받으면서도 하릴없이 녹아든다. 곤란에 처한 건 키오스크 앞의 노인들만이 아니다. 모든 것이 문자화되고, 문자 특유의 곤란이 모든 것 위에 내려앉는다. 인터넷이라는 입체 지면을 들여다보면, [표현의 자유]와 [가짜뉴스]라는 두 개의 날개로 우리는 진창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날개로. 진실의 어려움, 정확해지기의 고난이 이제 모두의(대규모의) 것이 되어가고 있다. 문자와 실제가 일치될 수 없음에 대한 자각이, 언어의 힘을 불완전한 방식으로(독점할 수 있다고) 자각하면서부터 생기는 묘한 마음이, 이제 더 이상 특별함의 표지가 아니다. 내가 보기에 인터넷-읽기에는 문학을 읽을 때와 매우 유사한 조심성이 요구된다. 거짓이며 진실이고 진실이며 거짓인 것들을 상대해야 한다. 인터넷-쓰기는? 거기서부터는, 이건 그야말로 포스트 아포칼립스다. 하지만 생각하다 보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눈을 감고 차근차근 헤아리다 보면, 어떤 교육 가능한 규범들을 도출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순을 배워야 할까? 시간을 배워야 할까? 노이즈를 배워야 할까? 크기를 배워야 할까?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함을? 혼란을? 내가 나를 쥐고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네 것이 없는 것과 같이, 내 것은 없다는 것을? 풀어헤쳐지는 나를? 또는 너를? 거미줄 같은, 자본의 용납불가능한 지도편달을? 또는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라는 것을? 망해가던 세상에서 텔레파시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지금까지는 예행연습을 벌인 것뿐이고... 이 생각은 분명 누군가 했던 생각이다. 그게 나였나? 아니면 너였나?
2024년 8월 6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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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공기
교정의 악마
아직도 반도 처리 못한 곤란한 책 박스가 집구석에 놓여 있다. 다들 처치 곤란한 책들 때문에 시름하고 있다. 주는 일에 별 기쁨 없다. 유쾌한 내용도 아니고... 애초에 출판사에 보내지 마시라 했어야 했다. 알라딘 가져가서 팔까? 팔리긴 할까? 요즘 잘 안 사준다던데...
저번에는 사인본이 필요하다 하시기에 퇴근하고 ㅁ사에 갔다. 역지사지로 저자들이 사무실 찾아오는 거, 심지어 그 시간에 그러는 건 여간 죽이고 싶은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책 박스 들고 다니면서 씨름할 시간도 없고, 어쨌든 한번 가보고 싶은 맘도 있었다. 다들 이런 마음으로 그랬던 거겠지... 그런 마음으로 찾아간 ㅁ사는 그야말로 혼곤해지는 동네에 있었다. 가는 길에 스콜이 쏟아졌다. 회의실 같기도 하고 포장실 같기도 한 방에 앉아서 사인이란 것을 했다. 그런 시간까지 저자라는 녀석들을 기다리고 심지어 밥도 먹여야 한다니... 교정공의 그것과는 또 다른, 편집자들의 노고(내가 싫어서 도망쳤던)를 새삼 느꼈다. 그래도 난 저자 새끼들이랑 직접 부대끼지는 않아도 되니 다행 아닌가? 예전에 딱 1년 1대 사장님을 모셨던 때는 어떤 일이 있었냐면, 은퇴한 판사라는 녀석이 자비 시집을 내는데...
어쨌든 진짜 문제는 이제 이 연재를 어쩔 것인지다. 그냥 완결을 낼 생각은 없다. 일 같은 일이란 게 다 그렇듯 출간도 기습당하듯 일어난 일이다. 내 비틀린 욕심을 거슬러 ‘인간적’인 책꼴을 위해 나도 나름대로 노력했다... 그러면 내가 원래 쓰려던 것은 뭐였냐? 세상은 이렇게 열심으로 망해가고, 저마다의 아우성 악다구니로 가득하고 자욱한데... 대체 뭘 쓰려고 했었지? 침착해라... 겁먹지 마라... 생각을 다시 해라... 너무 어려우면 쉬운 것부터 해라... 쉬운 것에서 어려운 것으로 가라... 어려운 것에서 쉬운 것으로 가도 좋다... 그 이상을, 그 이상을 해라... 하지만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서부터 해야 한단 말인가? 쉽다면 뭐가 쉬운 것이며 도대체 어떻게 쉬운 것에서 어려운 것으로 간다는 말인가? 교정공기라고? 뭐지? 뭐였지?
어떤 일은 끝나야 알게 된다. 실마리를 풀기 위해 재밌는 이야기를 하자. 나는 교정의 악마를 생각하고 있다. 그 악마는 요정의 반대편에 있다. 完全校正완전교정을 가능케 하는 존재다. 한 자도 한 틈도 틀리지 않았다면 그 책에는 교정의 악마가 강림한 것이다. 말이 변하는 것이므로 그것도 잠시간이겠지만, 그럼에도 그 일은 불가능하지 않다. 다 인간의 일인데 어떻게 불가능하겠는가! 다만 (역시 악마적으로) 등급이 매겨질 뿐이다. 이 책이 바로 19XX년도에 교정의 악마가 강림했던 바로 그 책, 단 한 권의 책입니다... 이건 틀리지 않았나요? 그때는 맞았습니다... 페이지가 많진 않군요... 스타일이 복잡하진 않군요... 문장 자체가 단조롭군요... 재단이 비뚤지 않나요? 이것이 교정의 악마다. 그렇다면 교정공은 교정의 악마를 강림시키려 노력해야 할까? 전혀 아님을 어렵지 않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다. 악마는 악마를 가리키는 손끝에 도사리고 있다.
저번에는 사인본이 필요하다 하시기에 퇴근하고 ㅁ사에 갔다. 역지사지로 저자들이 사무실 찾아오는 거, 심지어 그 시간에 그러는 건 여간 죽이고 싶은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책 박스 들고 다니면서 씨름할 시간도 없고, 어쨌든 한번 가보고 싶은 맘도 있었다. 다들 이런 마음으로 그랬던 거겠지... 그런 마음으로 찾아간 ㅁ사는 그야말로 혼곤해지는 동네에 있었다. 가는 길에 스콜이 쏟아졌다. 회의실 같기도 하고 포장실 같기도 한 방에 앉아서 사인이란 것을 했다. 그런 시간까지 저자라는 녀석들을 기다리고 심지어 밥도 먹여야 한다니... 교정공의 그것과는 또 다른, 편집자들의 노고(내가 싫어서 도망쳤던)를 새삼 느꼈다. 그래도 난 저자 새끼들이랑 직접 부대끼지는 않아도 되니 다행 아닌가? 예전에 딱 1년 1대 사장님을 모셨던 때는 어떤 일이 있었냐면, 은퇴한 판사라는 녀석이 자비 시집을 내는데...
어쨌든 진짜 문제는 이제 이 연재를 어쩔 것인지다. 그냥 완결을 낼 생각은 없다. 일 같은 일이란 게 다 그렇듯 출간도 기습당하듯 일어난 일이다. 내 비틀린 욕심을 거슬러 ‘인간적’인 책꼴을 위해 나도 나름대로 노력했다... 그러면 내가 원래 쓰려던 것은 뭐였냐? 세상은 이렇게 열심으로 망해가고, 저마다의 아우성 악다구니로 가득하고 자욱한데... 대체 뭘 쓰려고 했었지? 침착해라... 겁먹지 마라... 생각을 다시 해라... 너무 어려우면 쉬운 것부터 해라... 쉬운 것에서 어려운 것으로 가라... 어려운 것에서 쉬운 것으로 가도 좋다... 그 이상을, 그 이상을 해라... 하지만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서부터 해야 한단 말인가? 쉽다면 뭐가 쉬운 것이며 도대체 어떻게 쉬운 것에서 어려운 것으로 간다는 말인가? 교정공기라고? 뭐지? 뭐였지?
어떤 일은 끝나야 알게 된다. 실마리를 풀기 위해 재밌는 이야기를 하자. 나는 교정의 악마를 생각하고 있다. 그 악마는 요정의 반대편에 있다. 完全校正완전교정을 가능케 하는 존재다. 한 자도 한 틈도 틀리지 않았다면 그 책에는 교정의 악마가 강림한 것이다. 말이 변하는 것이므로 그것도 잠시간이겠지만, 그럼에도 그 일은 불가능하지 않다. 다 인간의 일인데 어떻게 불가능하겠는가! 다만 (역시 악마적으로) 등급이 매겨질 뿐이다. 이 책이 바로 19XX년도에 교정의 악마가 강림했던 바로 그 책, 단 한 권의 책입니다... 이건 틀리지 않았나요? 그때는 맞았습니다... 페이지가 많진 않군요... 스타일이 복잡하진 않군요... 문장 자체가 단조롭군요... 재단이 비뚤지 않나요? 이것이 교정의 악마다. 그렇다면 교정공은 교정의 악마를 강림시키려 노력해야 할까? 전혀 아님을 어렵지 않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다. 악마는 악마를 가리키는 손끝에 도사리고 있다.
2024년 7월 24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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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공기
복수할 것이다. 교정의 제단에 교정된 피와 해골을 바칠 것이다. 시발… 복수한다…
지옥에서 어떻게 밭을 갈 수 있을까? 지옥은 불타고 있다. 지옥은 형형색색으로 녹고 있다. 지옥은 너희의 것이 아니다. 지옥은 우리의 것이다. 다름 아닌 우리의 지옥이다. 여기가 즉 지옥이다. 사후세계…… 우리에 앞서 죽은 이들의 死後世界는 어디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곳이다. 우리가 사후세계로 가는 게 아니다. 우리가 간 뒤 이곳에 사후세계가 남는다. 이 사후세계에 죽은 이는 없으되 죽음은 남았다. 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너희 죽은 이들은 이곳이 더 나아지리라 믿으면서 죽었을지 모른다. 또는 반대로 ‘드디어 이곳을 떠나면서’ 죽었을지 모른다. 어쨌건 사후세계는 너희 자신이 없는 미래이고 우리에게는 지금이다. 그리고 이곳은 지옥이다. 같은 식으로 아직 죽지 않은 우리에게도 사후세계가 있다. 하지만 그곳에 우리는 없다. 우리는 너희의 사후세계에 틀림없이 살고 있다. 지옥에서 어떻게 밭을 갈 수 있을까? 그것이 우리가 하려는 일이라면
커다란 널빤지 두 개에 끈을 달아 어깨에 앞뒤로 걸쳐 멜 수 있게 만들었다. 널빤지에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적혀 있다. 그 내용은 정확하다. 그 밑으로, 동지는 입은 것 같지도 않은 거적때기 같은 걸 입고 있다. 동지는 그런 차림새로 광야를 헤매고 있다. 한 손에는 라디오를 들었고, 라디오에서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나오고 있다. 그 역시 널빤지에 쓰인 것과 같이 정확한 내용이다. 녹음된 목소리가 무한히 반복 재생되고 있다. 십중팔구 죽은 이의 목소리일 것이다. 아마 모두 죽었을지도 모른다. 모두 죽었을 것이다. 모두 죽었기 때문에 정확한 것이다. 동지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도 모를 광야를 돌아다니고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적힌 패널을 걸치고, 원래부터 자신의 목소리였던 것만 같은 목소리를 들으면서, 건전지가 도대체 언제 다할 것인지, 이미 너무 오래된 것 같은데, 어째서 라디오가 꺼지지 않는지 불안해하면서.
연자매에 동지가 매여 있다. 누가 매 놓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맨 것이다. 동지는 그것을 밀고 있다. 동지는 자신이 무엇을 찧는지 알고 있다. 매의 윗돌과 아랫돌 사이에서 무엇이 이겨지는지, 정확히 무엇이 거기에 들어갔는지 오직 그 동지만이 알고 있다. 하지만 거기서 나온 것들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동지에게는 모두가 주기만 했고, 아무도 그것을 가져가지 않기에, 매를 통과해 나온 그것은 켜켜이 쌓이고만 있다. 동지의 일은 다만 미는 것이므로 그것을 가져갈 수도 만질 수도 없다. 돌의 힘과 낱알의 으스러짐만이 동지의 팔과 몸으로 전해지고 있다. 연자매의 부속인 동지는 애써 잊으려 한다. 그게 무엇인지, 누가 찧어 오라고 한 것인지, 그 일이 무슨 뜻인지. 민다는 것은 돌린다는 뜻이다. 돌린다는 것은 찧는다는 뜻이고. 동지는 자신이 만들어 내고 있는 것에 파묻히고 있다. 자유로운 동지의 육신이 연자매에 붙들려 있다. 동지는 영혼의 노예다. 영혼은 연자매이고, 그것은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것이다.
넓고 마른 들판이다. 들판이 어디서 끝나는지는 모른다. 끝나기는 끝날 것이다. 강을 만나거나 산을, 절벽을 만나면서, 도로를 만나거나 마을, 도시를 만나면서 끝날 것이다. 어쩌면 들판은 시간적으로 끝날 수도 있다. 어디서 끝나느냐보다 언제 끝나느냐가 중요한지도 모른다. 이 들판은 지금 불타고 있는 들판이다. 반년 뒤나 몇 개월 뒤면 잿더미가 되며 끝난다고 해 보자. 이 불타는 들판을 갈피 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불을 끄려고 하는 동지가 있다. 이 동지가 들판의 끝을 잘해야 1분이나 늦출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동지의 주변에 다른 이는 없다. 다른 이는 그 동지의 머릿속에 있다. 들판의 끝이 미래에 있는 것과 같다. 머릿속의 그 동지는 뛰어다니는 그 동지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이 들판이 뭐가 중요합니까? 그냥 타게 두십시오! 동지는 양동이를 들고 머릿속으로 소리를 지르면서 불을 끄러 뛰어다니고 있다. 나에게 제발 그것을 묻지 마라! 왜 불을 끄려고 하십니까? 제발 그것을 묻지 말고 꺼져라!
늪괴물이 여기에 있다. 늪괴물을 뒤덮고 있는 녹갈색 수초들을 아무리 헤집어 봐도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뒤덮고 있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늪괴물은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늪괴물은 바깥에서부터 구성되고 있다. 안에서 빨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어떤 힘에 의해 밀어 넣어지고 있다. 늪괴물 모양의 공백을 향해서다. 늪괴물을 함부로 헤집다가는 늪괴물이 되고 말 것이다. 늪괴물을 향해 뭔가를 밀어 넣는 힘의 정체는 늪에 빠진 것들의 외침이다. 늪괴물은 늪 밖으로 서서히 이동당하고 있다. 이별하지 않으려는 진창의 외침으로. 하지만 늪괴물은 늪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떠도는, 늪괴물은 늪의 유일한 늪 아닌 것이다. 나의 늪괴물 동지는 별빛 아래서 늪과 싸운다.
동지들과 여섯 개의 비유
피와 해골 신도
복수할 것이다. 교정의 제단에 교정된 피와 해골을 바칠 것이다. 시발… 복수한다…
지옥에서 밭 갈기
지옥에서 어떻게 밭을 갈 수 있을까? 지옥은 불타고 있다. 지옥은 형형색색으로 녹고 있다. 지옥은 너희의 것이 아니다. 지옥은 우리의 것이다. 다름 아닌 우리의 지옥이다. 여기가 즉 지옥이다. 사후세계…… 우리에 앞서 죽은 이들의 死後世界는 어디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곳이다. 우리가 사후세계로 가는 게 아니다. 우리가 간 뒤 이곳에 사후세계가 남는다. 이 사후세계에 죽은 이는 없으되 죽음은 남았다. 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너희 죽은 이들은 이곳이 더 나아지리라 믿으면서 죽었을지 모른다. 또는 반대로 ‘드디어 이곳을 떠나면서’ 죽었을지 모른다. 어쨌건 사후세계는 너희 자신이 없는 미래이고 우리에게는 지금이다. 그리고 이곳은 지옥이다. 같은 식으로 아직 죽지 않은 우리에게도 사후세계가 있다. 하지만 그곳에 우리는 없다. 우리는 너희의 사후세계에 틀림없이 살고 있다. 지옥에서 어떻게 밭을 갈 수 있을까? 그것이 우리가 하려는 일이라면
핵 광야의 피케팅과 라디오 방랑
커다란 널빤지 두 개에 끈을 달아 어깨에 앞뒤로 걸쳐 멜 수 있게 만들었다. 널빤지에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적혀 있다. 그 내용은 정확하다. 그 밑으로, 동지는 입은 것 같지도 않은 거적때기 같은 걸 입고 있다. 동지는 그런 차림새로 광야를 헤매고 있다. 한 손에는 라디오를 들었고, 라디오에서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나오고 있다. 그 역시 널빤지에 쓰인 것과 같이 정확한 내용이다. 녹음된 목소리가 무한히 반복 재생되고 있다. 십중팔구 죽은 이의 목소리일 것이다. 아마 모두 죽었을지도 모른다. 모두 죽었을 것이다. 모두 죽었기 때문에 정확한 것이다. 동지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도 모를 광야를 돌아다니고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적힌 패널을 걸치고, 원래부터 자신의 목소리였던 것만 같은 목소리를 들으면서, 건전지가 도대체 언제 다할 것인지, 이미 너무 오래된 것 같은데, 어째서 라디오가 꺼지지 않는지 불안해하면서.
연자매
연자매에 동지가 매여 있다. 누가 매 놓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맨 것이다. 동지는 그것을 밀고 있다. 동지는 자신이 무엇을 찧는지 알고 있다. 매의 윗돌과 아랫돌 사이에서 무엇이 이겨지는지, 정확히 무엇이 거기에 들어갔는지 오직 그 동지만이 알고 있다. 하지만 거기서 나온 것들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동지에게는 모두가 주기만 했고, 아무도 그것을 가져가지 않기에, 매를 통과해 나온 그것은 켜켜이 쌓이고만 있다. 동지의 일은 다만 미는 것이므로 그것을 가져갈 수도 만질 수도 없다. 돌의 힘과 낱알의 으스러짐만이 동지의 팔과 몸으로 전해지고 있다. 연자매의 부속인 동지는 애써 잊으려 한다. 그게 무엇인지, 누가 찧어 오라고 한 것인지, 그 일이 무슨 뜻인지. 민다는 것은 돌린다는 뜻이다. 돌린다는 것은 찧는다는 뜻이고. 동지는 자신이 만들어 내고 있는 것에 파묻히고 있다. 자유로운 동지의 육신이 연자매에 붙들려 있다. 동지는 영혼의 노예다. 영혼은 연자매이고, 그것은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것이다.
불타는 들판
넓고 마른 들판이다. 들판이 어디서 끝나는지는 모른다. 끝나기는 끝날 것이다. 강을 만나거나 산을, 절벽을 만나면서, 도로를 만나거나 마을, 도시를 만나면서 끝날 것이다. 어쩌면 들판은 시간적으로 끝날 수도 있다. 어디서 끝나느냐보다 언제 끝나느냐가 중요한지도 모른다. 이 들판은 지금 불타고 있는 들판이다. 반년 뒤나 몇 개월 뒤면 잿더미가 되며 끝난다고 해 보자. 이 불타는 들판을 갈피 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불을 끄려고 하는 동지가 있다. 이 동지가 들판의 끝을 잘해야 1분이나 늦출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동지의 주변에 다른 이는 없다. 다른 이는 그 동지의 머릿속에 있다. 들판의 끝이 미래에 있는 것과 같다. 머릿속의 그 동지는 뛰어다니는 그 동지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이 들판이 뭐가 중요합니까? 그냥 타게 두십시오! 동지는 양동이를 들고 머릿속으로 소리를 지르면서 불을 끄러 뛰어다니고 있다. 나에게 제발 그것을 묻지 마라! 왜 불을 끄려고 하십니까? 제발 그것을 묻지 말고 꺼져라!
늪괴물
늪괴물이 여기에 있다. 늪괴물을 뒤덮고 있는 녹갈색 수초들을 아무리 헤집어 봐도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뒤덮고 있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늪괴물은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늪괴물은 바깥에서부터 구성되고 있다. 안에서 빨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어떤 힘에 의해 밀어 넣어지고 있다. 늪괴물 모양의 공백을 향해서다. 늪괴물을 함부로 헤집다가는 늪괴물이 되고 말 것이다. 늪괴물을 향해 뭔가를 밀어 넣는 힘의 정체는 늪에 빠진 것들의 외침이다. 늪괴물은 늪 밖으로 서서히 이동당하고 있다. 이별하지 않으려는 진창의 외침으로. 하지만 늪괴물은 늪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떠도는, 늪괴물은 늪의 유일한 늪 아닌 것이다. 나의 늪괴물 동지는 별빛 아래서 늪과 싸운다.
2024년 4월 23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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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공기
교정의 요정
교정의 요정이 나타나 내일까지 이 원고를 다 교정해 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교정의 요정은 그 반대의 일을 합니다. 몇 명의 사람이 매달려 아무리 눈이 빠져라 교정을 보더라도 인쇄된 책에 반드시 하나 이상의 오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교정의 요정의 소행입니다. 맞춤법을 지적하는 글의 어디 한 군데는 반드시 틀리기 마련이라는 사실, 그로부터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도 있을 겁니다. 그 또한 짓궂기 짝이 없는 교정의 요정의 소행입니다. 교정의 요정은 문자와 비문자 사이 틈새 차원에 살고 있습니다. 그 차원에 얽혀 있는 것은 인쇄소, 인쇄기, 출판사 사무실, 교정공과 디자이너와 저자의 컴퓨터 내부, 광케이블, 전화선, 수많은 사람들의 뇌신경, 그리고 읽힘이 일어나는 시간과 일어나지 않는 시간, 전 세계 언어문화의 흐름... 글이 책으로 되기 위하여 추상적으로 물리적으로 거쳐 지나가는 모든 것입니다. 교정의 요정은 양지바른 데서 다리를 꼬고 드러누워 있다가 내키는 때가 오면 손깍지를 쭉 밀고 활동에 나섭니다. 한 글자를 슬쩍 바꾸고, 자음이나 모음 한 개를 슬쩍 돌려놓고, 한 칸을 지우고, 두 칸을 넣고, 선과 숫자를 밀고 당깁니다. 그냥 순전히 장난으로요. 어쩌면 요정에게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어떤 의무가 있는지도 모릅니다만, 어쨌든 교정의 요정의 개입은 불가항력입니다. 언제 개입하는지 알 수 없고 어떻게 개입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냥 자기 맘대롭니다. 하나의 거역할 수 없는 신비이지요. 따라서 완벽한 책 같은 것은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점을 적어도 우리 교정공들은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걸 틀릴 수 있느냐, 도대체 왜 아무도 못 본 거냐, 이거를 도대체 왜 틀렸냐고 길길이 날뛰는 이가 있다면 교정의 요정이 그랬다고,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는 속삭여 주십시오.
2024년 4월 15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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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공기
나의 교정 노하우들
나의 실전 교정 노하우들을 대공개한다.
(당신만의 교정 노하우를 친구와 공유하세요!)
- 갈지자교정 일필휘지로 썼니? 나도 갈지자로 본다. Z자로 휘저으면서 한 번의 내려감으로 맞춤법과 띄어쓰기만 본다. 뭔가 부족하게 느껴진다면 2회 수행하여 문장의 뜻까지 보는 ZZ교정으로 보충.
- 5% 샘플링교정 임의의 한 페이지를 펼친다. 틀린 것이 있는지 찬찬히 본다. 틀린 것이 있다면 책 전체에서 해당 오류 패턴만 찾아 수정한다. 모두 수정하였으면 다시 임의의 한 페이지를 펼친다... 전체 페이지수에 0.05를 곱한 수의 임의의 페이지를 확인.
- 카체이싱교정 막히지 않고 끝까지 가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는 교정. ‘일단 본다’는 데에 주안점을 둔다. (전복폭발엔딩)
- 통일선봉대 친구들아 그날은 반드시 온다! 소원은 통일, 오직 통일 외길로... 문자와 문자 사이, 벽과 벽, 선과 면, 너와 나를 지나... 차원을 건너 스타일을 통일하는 데 주력한다. 오직 숫자와 모양만 보며 다른 것은 신경쓰지 않는다.
- 해킹교정 음모론에 맞서는 하나의 방법: 음모론의 논리 안에서 음모론을 해킹(예: 백신 접종 후 50분 내로 150cc의 미지근한 물을 마시면 인간 기지국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 어순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조사 수정·문장부호 추가 등 최소한도의 몰래 교정. 자기가 쓴 거 고치는 데 질색하는 저자의 엉망 문장을 어떻게든 ‘규범상으로는’ 맞게 만든다.
- 메소드교정 폭주하는 교정욕망을 평상시에도 풀어놓는(unleash)다. 업무 중이건 아니건 교정 ON 상태로 만사를 바라봄으로써 언제 어디서든 어디로든 용암이 흐르듯 무엇이건 교정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한다. ‘모든 것이 마뜩잖다!’
- 이빨부수기 이가 부서져라 이를 악물고 교정 & 쉴 새 없는 당분 공급의 투트랙 접근. 악으로 깡으로 퇴근까지 닥치는 대로 고치면서 버틴다.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죽을 수도 있습니다). 동시에 탕비실 운영 관리에 대한 강력한 민주적 개입을 위한 사내 조직화에도 매진.
- 웃는얼굴교정 웃는 얼굴을 만든 채로 교정한다(거울을 보면서 사전 연습). 그 어떤 쓰레기 같은 교정지 앞에서도 웃는 얼굴로 뇌를 속임으로써, 다른 건 몰라도 정신위생 하나만큼은 확실히 챙긴다. 꼬리로 몸통을 흔드는 비책. 개인적으로 가장 애용하는 방법으로서, 기본 교정 기법으로 적극 추천.
- 킬러교정 다들 살인을 좋아한다. 요즘 세상에 재밌으려면 무조건 살인이 들어가야 한다. 자신을 킬러라 생각하며 오류를 찾아내 냉혹하게 교정, 노동으로부터 재미를 찾는다.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으므로 사적인 감정을 버리는 것이 중요. 피할 수 없음을 즐기는 자세. 망나니교정, 살인마교정, 전쟁영웅교정 등으로 응용 가능.
- 방통요법 나는 뇌양현의 방통이고, 지난 100일 동안 술만 마셨으며, 화가 머리끝까지 난 장비가 지금 칼을 들고 와 있다. 한나절 안에 어떻게든 밀린 일을 처리해야 한다. 할 수 있다. 별거 아니다. 나는 백리지재가 아니다... 어차피 이게 맞는지 틀린지 알아차릴 사람도 없고... ‘이 세상에 교정공은 너와 나뿐.’
- 약물교정 진통제 한 알 먹고 교정. 미신이나 헛된 기대, 머리에 힘주기 등이 아닌 의학적으로 검증된 고통 경감 효과를 노린다. 약물은 하나의 분자-기계인데 안경을 쓰는 것과 뭐가 다른가? 못 말리는 교정사이보그 되기. 해당 기법 사용 중 금주할 것. 과용에 주의.
- 배짱교정 내가 교정 개판으로 봤는데 어쩔? 니가 뭘 할 수 있는데? 어? 어?
- 인권교정 ‘그들도 인간이다!’ 완벽하지 않기에 인간이다. 개들도 거리에 똥을 누면 주인이 주워야 하는데 하물며! 인간권리 옹호의 교정 정신 최대화. 하지만 저도 인간인데요...? 완벽하지 않기에 인간이다... 완벽하지 않기에... 언뜻 오류처럼 보이는 것들도 더 깊은 뜻이 숨겨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용서하는 聖人교정 단계로 심화.
- 심안교정 눈을 감고 이마 한가운데로 정신을 집중. 시간의 흐름에 몸을 기대고 마음의 눈으로 교정지를 본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응원이 들릴 때까지. ‘일어서라 교정공... 깨어나라 교정공...’ 거대한 활력이 솟아오르는 깨달음의 순간이 올 때까지... 나를 해고해 줄 때까지...
(당신만의 교정 노하우를 친구와 공유하세요!)
2024년 3월 7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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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공기
무명용사
애초 혼란한 원고를 준 녀석에게 교정을 보시라고 뭘 줘 봤댔자 혼란한 교정을 해 올 뿐이다. 대체로 봤을 때 제대로 고칠 능력이 있으면 애초에 그렇게 쓰지도 않는다. 사장은 ‘그냥 교수가 해 달라는 대로만 하라’ 하지만, 그런 것은 절대 좌시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 나는 대체 뭐 하러 있나? 오늘은 옳은 로서를 틀린 로써로 죄 고치라 표시해 놓은 끼새수교 때문에 위가 쓰리다. 자신감 있으셔서 좋으시겠어요... 나는 위장에 빵꾸가 나려 하고 있는데... 제발 좀... 그런 거는 내가 할 테니까... 사전 한 번만 찾아보면 다 아는 그런 거를 왜... 왜 모르면서 아는 척하니 왜... 제발... 너네는... 지성의 담지자가 아니고... 이런 거는 그냥 아가리 쌉치고 있어... 제발... ㅅㅄㄲ들 진짜... 그만... 단도 들고 찾아가기 전에...
뭐 그런 험한 생각을 속으로만 하며, 도대체 무엇이, 구체적으로 어떤 요소들이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걸까, 나는 나의 직업적 특성상 증오해 마지않는 그들의 얼굴(신기하게도 꼭 얼굴들이 어디 내걸려 있는데)을 들여다보며 단서를 찾아보려 하지만, 그저 보통 사람의 얼굴이 있을 뿐, 사진으로 알 수 있는 건 없다. 어쩌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뛰어난 학자이며 좋은 이웃사람일지 모른다. 아주 개차반 같은 녀석이라고 욕하는 글도 가끔 찾지마는, 어디 다 그렇다고 할 수야 있겠는가. 문제는 분명 그들의 존재양식에, 세계에 있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안 된다. 내가 견딜 수 없다. 그들도 피해자입니다! 암요! 이건 다 그들이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지 않으려는 내 잘못이다. 그렇다. 내 탓이다!
내가 입사하기 전, 어떤 교수 녀석이 □□□이라고 틀리게 쓰려는 걸 끝까지 □○□으로 고치려다 대판 싸우고 퇴사한 교정공이 한 명 있었다고 들었다. 그는 단 하나의 자음, ㅇ을 ㄱ으로 옳게 고치기 위해 자신의 거의 모든 것을, 우리 같은 노동자들에게는 거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 노동 그 자체를 걸었다. 부러질지언정 구부러지지 않은 그의 불굴을 생각하면 내가 지금 로써와 로서 따위에서 물러날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그의 얼굴은 물론이요 이름도 모르지만 그는 오늘 무명용사 되어 내 안에 살아 숨쉬고 있다. 잘못된 교정을 다시 옳게 되돌리며, 나는 그 무명용사가 왜 교수와 대판 싸웠는지 이해한다. 내가 겪은 일인 것처럼 이해한다. 그것은 글자의 옳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전혀 아니다.
뭐 그런 험한 생각을 속으로만 하며, 도대체 무엇이, 구체적으로 어떤 요소들이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걸까, 나는 나의 직업적 특성상 증오해 마지않는 그들의 얼굴(신기하게도 꼭 얼굴들이 어디 내걸려 있는데)을 들여다보며 단서를 찾아보려 하지만, 그저 보통 사람의 얼굴이 있을 뿐, 사진으로 알 수 있는 건 없다. 어쩌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뛰어난 학자이며 좋은 이웃사람일지 모른다. 아주 개차반 같은 녀석이라고 욕하는 글도 가끔 찾지마는, 어디 다 그렇다고 할 수야 있겠는가. 문제는 분명 그들의 존재양식에, 세계에 있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안 된다. 내가 견딜 수 없다. 그들도 피해자입니다! 암요! 이건 다 그들이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지 않으려는 내 잘못이다. 그렇다. 내 탓이다!
내가 입사하기 전, 어떤 교수 녀석이 □□□이라고 틀리게 쓰려는 걸 끝까지 □○□으로 고치려다 대판 싸우고 퇴사한 교정공이 한 명 있었다고 들었다. 그는 단 하나의 자음, ㅇ을 ㄱ으로 옳게 고치기 위해 자신의 거의 모든 것을, 우리 같은 노동자들에게는 거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 노동 그 자체를 걸었다. 부러질지언정 구부러지지 않은 그의 불굴을 생각하면 내가 지금 로써와 로서 따위에서 물러날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그의 얼굴은 물론이요 이름도 모르지만 그는 오늘 무명용사 되어 내 안에 살아 숨쉬고 있다. 잘못된 교정을 다시 옳게 되돌리며, 나는 그 무명용사가 왜 교수와 대판 싸웠는지 이해한다. 내가 겪은 일인 것처럼 이해한다. 그것은 글자의 옳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전혀 아니다.
2024년 2월 17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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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공기
신발을 끄는 녀석들이 있다
우리는 집중을 요하는 종류의 노동을 한다. 우리의 일에는 많은 대화가 필요하지 않다. 대화는 방해에 더 가깝다. 키보드와 마우스, 프린터, 어쩔 수 없는 전화통화 소리 등을 제외하면 사무실은 조용하다. 말 시키지 마세요... 그런데 이 조용한 일터에서 신경을 매우 거슬리게 하는 소리를 내는 딱 세 사람이 있다. 오갈 때마다 슬리퍼를 끌며 귀를 긁어놓는 그 셋, 공교롭게도 그들은 모두 관리자다.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않는다. 신기할 정도로 그 셋만 한 사람처럼, 지금 이 소리를 잘 들어 두라는 듯, 내가 지금 지나가고 있다, 내가 지금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아 두라는 듯 군다. 이상한 일이다. 그들과 우리는 나이로도 성별로도 구분되지 않는다. 그들은 관리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인가? 그저 발이 무거운 사람들이 우연히 관리자가 된 걸까? 아니면 발이 무거운 종류의 사람만이 관리자가 될 수 있는 걸까? 발의 무거움과 관리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성향 사이에 어떤 유전자적 연관이 있는 걸까? 어쩌면, 정말로 자신의 움직임을 알리기 위함일까? ‘발 끌기’는 필요에 따른 관리 업무의 일환일까?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는 없고 수긍할 수도 없다. 그들이 무릎을 더 높게 들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힘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 힘에 맞설 힘... 일테면 그들이 무릎을 더 높게 들도록 만들 힘이 필요하다고 하면 어떨까? 하지만 어떻게? 칙 칙 칙 칙 소리가 들릴 때마다 한 문장씩 떠올려 나는 다음과 같이 쓴다...
어쩌면 이 신비에는 보다 미묘한 역학이 있는지도 모른다. 혹시 실체는 그 반대가 아닐까? 신발을 끄는 편이 더 자연스러운 일인데, 다만 ‘눈치를 보는 이들’만이 관리자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발을 끌지 않는 거 아닐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발을 끌지 않는 묵약이 우리 사이에 작동하고 있는 것이라면? 눈치를 보느라 그런 게 아니라, 혐오스런 녀석들과 스스로 구분되기 위해, 혐오스러움을 양각하기 위해? 이런 상태는 작지만 고약한 불행이다. 우리에게나 그들에게나 그렇다. ‘나한테 일 시키는 사람’이 무조건 싫어질 수밖에 없는 이 구조를 좀 움직일 방도가 필요하다. 그게 내가 느끼는 사태다. 괜찮은 일터를 위해서다. 내가 여기에 몇 시간을 있는데... 괜찮은 일터라는 건 뭔가? 임금, 노동 강도, 노동 시간, 여러 가지로 얘기할 수 있겠지만, 참여가능성으로 나는 정리하고 싶다. 일이라는 총체와 나 사이의 관계가 종합적으로 수긍할 만한가? 나의 수긍 여부가 일터의 요소들 중 하나로 주요하게 다뤄질 수 있는가? 너와 내가 어떤 직무와 직급을 맡고 있더라도? 너와 내가 어떤 노동을 하고 있더라도? 관리자들의 신발 끌기는 수긍하기 어렵다. 그 이유가 그들에게 있건 우리에게 있건 그렇다. 나의 이 의견은 적어도 그들의 보행 습속의 지속보다 주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일터에 참여해야 한다... 일터는... 민주화되어야 한다... 나의 정신을 좀먹는... 일터는... (칙 칙 칙...)
그들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그들의 잘못만으로 둘 수는 없다. 그들이 잘못을 독점하게 둘 수가 없다. 관리자들도 일터의 동료다. 동료가 아니라면 동료가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어떻게? 방법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어떤... 지금 무슨 방도가 있지? 공공에 호소? 디지털대자보 같은 것을 쓴다...? 관리자... 신발끌기... 철폐? 캠페인...? 킹론화(인민머법원)는 우리의 최종심급이다. 이 사안에서 그럴 수는 없다. 그 바로 밑의 하급심은 아마 노조를 통한 협상과 쟁의, 또는 어떤 종류의 법적인 신고일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큰일이다. 신발을 그만 끌게 하는 정도라면 그 아래에 뭔가 있어야 한다. 역으로 가장 낮은 단계로 가보면? 일터에서의 잡담이나 한숨, 우정보다는 가벼운? 동료애? 같은 것들일까? 어쩌면 신발을 끄는 녀석들에 대한 뒷담화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속은 좀 시원해질지 몰라도 녀석들이 신발을 그만 끌게 하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가장 위와 가장 아래 사이가 비어 있다. 일터를 위한 규약이랄지 구조랄지 뭐라 할지... 진실로 필요한 바로 그 부분이 비어 있다고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비어 있음이 위아래로 문제를 뻗치며 위아래로도 문제를 만들고 있다. 적어도 여기서는 그렇다. 어쩌면 필요한 것은 평등한(즉 상향식) 의사 표현 구조일 것이다. 그래, 분별이 있는 대화가 필요하다. 대화 양식이. 회의 시간? 하지만 그걸로 정말 되나? 아닌데... 회의는 고통인데... 건의라는 것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평등한 의사소통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그건 말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모두 말높임/말낮춤 같은 소리는 말고, 또 개개인들의 능력으로 치환되지 않도록 하면서...
의사소통이 평등하려면 실제로 평등해야 한다. 그렇담 ‘실제로 평등’이라는 게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해야 실제로 평등해질까? 고치려면... 이걸 고치려면... 힘이 나눠져야 한다. 어떻게 힘을 나눌 수 있나? 진실로 필요한 건 대화가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임금 평탄화다... 직무 순환이다... 선출 대표다... 그거면 되나? 그 정도면? 하지만 사내에서만 그래서는 곤란에 빠진다. 그것은 전염되어야 한다. 평등은... 사내와 사외의 경계는 더 흐려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최악의 버전과 최선의 버전이 동시에 존재한다. 경계의 흐려짐도 그렇다. 발을 끈다는 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관리자들이 신발 끄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는, 외주 교정자가 되어야 하나? 고치려면... 이걸 고치려면... 우리는 이미 곤란에 빠져 있다. 진실로 고쳐지길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제도만이 아니다. 그것은 제도들의 바로 위와 아래에, 앞에, 뒤에 있다... 무릎을 들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건 더 높이 들게 만드는 힘이건 힘이 구성되는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아니면? 아니면 모든 것을 다시 처음부터 생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좀 뜬금없지만, 노인성 질환으로 발을 끌던 우리 할머니 생각이 난다. 할머니는 지금 납골당에 계시고... 명절 때가 되면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몰려든다. 칸칸이 들어찬 함들 앞에 서려고 그 수많은 사람들이. 그래... 다 관계가 있어... 나 교정공이 보기에는...
어쩌면 이 신비에는 보다 미묘한 역학이 있는지도 모른다. 혹시 실체는 그 반대가 아닐까? 신발을 끄는 편이 더 자연스러운 일인데, 다만 ‘눈치를 보는 이들’만이 관리자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발을 끌지 않는 거 아닐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발을 끌지 않는 묵약이 우리 사이에 작동하고 있는 것이라면? 눈치를 보느라 그런 게 아니라, 혐오스런 녀석들과 스스로 구분되기 위해, 혐오스러움을 양각하기 위해? 이런 상태는 작지만 고약한 불행이다. 우리에게나 그들에게나 그렇다. ‘나한테 일 시키는 사람’이 무조건 싫어질 수밖에 없는 이 구조를 좀 움직일 방도가 필요하다. 그게 내가 느끼는 사태다. 괜찮은 일터를 위해서다. 내가 여기에 몇 시간을 있는데... 괜찮은 일터라는 건 뭔가? 임금, 노동 강도, 노동 시간, 여러 가지로 얘기할 수 있겠지만, 참여가능성으로 나는 정리하고 싶다. 일이라는 총체와 나 사이의 관계가 종합적으로 수긍할 만한가? 나의 수긍 여부가 일터의 요소들 중 하나로 주요하게 다뤄질 수 있는가? 너와 내가 어떤 직무와 직급을 맡고 있더라도? 너와 내가 어떤 노동을 하고 있더라도? 관리자들의 신발 끌기는 수긍하기 어렵다. 그 이유가 그들에게 있건 우리에게 있건 그렇다. 나의 이 의견은 적어도 그들의 보행 습속의 지속보다 주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일터에 참여해야 한다... 일터는... 민주화되어야 한다... 나의 정신을 좀먹는... 일터는... (칙 칙 칙...)
그들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그들의 잘못만으로 둘 수는 없다. 그들이 잘못을 독점하게 둘 수가 없다. 관리자들도 일터의 동료다. 동료가 아니라면 동료가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어떻게? 방법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어떤... 지금 무슨 방도가 있지? 공공에 호소? 디지털대자보 같은 것을 쓴다...? 관리자... 신발끌기... 철폐? 캠페인...? 킹론화(인민머법원)는 우리의 최종심급이다. 이 사안에서 그럴 수는 없다. 그 바로 밑의 하급심은 아마 노조를 통한 협상과 쟁의, 또는 어떤 종류의 법적인 신고일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큰일이다. 신발을 그만 끌게 하는 정도라면 그 아래에 뭔가 있어야 한다. 역으로 가장 낮은 단계로 가보면? 일터에서의 잡담이나 한숨, 우정보다는 가벼운? 동료애? 같은 것들일까? 어쩌면 신발을 끄는 녀석들에 대한 뒷담화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속은 좀 시원해질지 몰라도 녀석들이 신발을 그만 끌게 하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가장 위와 가장 아래 사이가 비어 있다. 일터를 위한 규약이랄지 구조랄지 뭐라 할지... 진실로 필요한 바로 그 부분이 비어 있다고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비어 있음이 위아래로 문제를 뻗치며 위아래로도 문제를 만들고 있다. 적어도 여기서는 그렇다. 어쩌면 필요한 것은 평등한(즉 상향식) 의사 표현 구조일 것이다. 그래, 분별이 있는 대화가 필요하다. 대화 양식이. 회의 시간? 하지만 그걸로 정말 되나? 아닌데... 회의는 고통인데... 건의라는 것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평등한 의사소통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그건 말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모두 말높임/말낮춤 같은 소리는 말고, 또 개개인들의 능력으로 치환되지 않도록 하면서...
의사소통이 평등하려면 실제로 평등해야 한다. 그렇담 ‘실제로 평등’이라는 게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해야 실제로 평등해질까? 고치려면... 이걸 고치려면... 힘이 나눠져야 한다. 어떻게 힘을 나눌 수 있나? 진실로 필요한 건 대화가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임금 평탄화다... 직무 순환이다... 선출 대표다... 그거면 되나? 그 정도면? 하지만 사내에서만 그래서는 곤란에 빠진다. 그것은 전염되어야 한다. 평등은... 사내와 사외의 경계는 더 흐려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최악의 버전과 최선의 버전이 동시에 존재한다. 경계의 흐려짐도 그렇다. 발을 끈다는 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관리자들이 신발 끄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는, 외주 교정자가 되어야 하나? 고치려면... 이걸 고치려면... 우리는 이미 곤란에 빠져 있다. 진실로 고쳐지길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제도만이 아니다. 그것은 제도들의 바로 위와 아래에, 앞에, 뒤에 있다... 무릎을 들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건 더 높이 들게 만드는 힘이건 힘이 구성되는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아니면? 아니면 모든 것을 다시 처음부터 생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좀 뜬금없지만, 노인성 질환으로 발을 끌던 우리 할머니 생각이 난다. 할머니는 지금 납골당에 계시고... 명절 때가 되면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몰려든다. 칸칸이 들어찬 함들 앞에 서려고 그 수많은 사람들이. 그래... 다 관계가 있어... 나 교정공이 보기에는...
2023년 12월 13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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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공기
정말로 나를...
이런 이야기를 들어 봤을 수도 있다. 한 단어에서 첫 자와 마지막 자를 제외한 나머지 글자의 배열을 마구 뒤섞더라도 우리가 충분히 문장으로 읽어낼 수 있다는 이야기. 인간의 정신은 글을 한 자 한 자씩 읽는 게 아니라 단어째로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도대체 어떤 녀석들이 ‘글자들을 뒤바꿔’ 놓는가? 저자, 디자이너, 당연히 교정공 자신까지 포함하여, 글자를 건드릴 수 있는 인간들 모두... 그리고 글자를 건드릴 수 있는 컴퓨터들. (여기서 인쇄 쪽에서의 오류까지 이야기하진 않겠다.) 그런데 틀릴 수 있는 것은 철자만이 아니다. 모르는 어문 규범, 잘못 아는 어문규범, 손가락의 잘못된 입력, 교정 사항이나 의견에 대한 잘못된 읽기, 망각, 누락, 도서 형식상의 통일 사안, 사실 자체, 번호들, 선들, ‘스타일’, 그 외 온갖 종류의 부주의, 똥고집, 마치 요정처럼 왔다 가는, 인터넷과 프로그램상의 전기적 오류들... 틀릴 수 있는 것의 범위는 말 그대로 상상초월이다. 책 만들기에 참여하는 이들은 ‘무엇이 틀렸는지’에 앞서 무엇을 틀릴 수 있는지부터도 알지 못한다. 저자들? 언어에 대해서도 문외한인데 책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디자이너들? 애초에 글자라는 걸 읽기 싫어하고 실제로도 읽지 않는다. 그 외? 그 외 녀석들의 관심은 누구의 관심이건 다 훼방일 뿐이다. (재차, 이렇게 쓰는 걸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틀렸는지 맞았는지 알지 못하는 정도라면 다행이다. 맞는데 틀리다 알고, 틀렸는데 맞는다 안다. 틀린 것을 안다 해도, 고쳐 달라 말하는 방법을 모르고 무엇을 고치라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 고친다 해도, 어떻게 고쳐져야 맞는지를 모르고 맞게 고쳐졌는지를 모른다. 그리고 그 모든 영역들에서 부분적으로만 맞고 부분적으로만 틀린다. 이 엉망 사태 가운데 던져진 사람은 교정공이다. 그 모두가, 교정공이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그게 바로 교정공의 일이다. 이제 다음과 같이 정의해 보자. 교정이란, 교정공을 좆되게 하려는 모든 사람들과 사람 아닌 것들이 어디까지 틀릴 수 있는지를 시험하기 위해 합심하여 만들어내는 온갖 상상도 못할 오류들을 찾아내 고치는 싸움이다. 뜻만 통한다면 그럴싸해 보이기 마련인 글을, 교정공은 읽지 말아야/읽어야 한다. 머릿속에만 있는 ‘무오류의 책’과 대조하면서 그렇게 해야 한다. 교정공은 상상 초월의 오류들 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위로 날아가야 하고 지하로 파고들어야 한다. 모사든들람과 사아람닌것들이 합하심여 만내어들는... 앞서 말한 밈은 어떨까? ‘캠브릿지 대학의 연구’라는 것부터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이제 나, 교정공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으뜸차원의 어떤 교정공이 있다고 하자. 그 교정공은 생각한다.
Aoccdrnig to a rscheearch at Cmabrigde Uinervtisy, it deosn't mttaer in waht oredr the ltteers in a wrod are, the olny iprmoetnt tihng is taht the frist and lsat ltteer be at the rghit pclae....영어를 줄줄 늘어놓은 것을 용서해 달라... 이 이야기는 한국에서도 ‘캠릿브지 대학의 연결구과에 따르면...’으로 번역되어 재밌고 신기한 밈 정도로 알려졌는데, 교정공의 입장에서는 꽤 의미심장한 면이 있다. 철자를 뒤바꿔도 문장을 읽을 수 있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이 가능할지라도 일어나게 두어선 안 된다. 독자이긴 독자이되 독특한 종류의 독자인 교정공은, 틀린 문자열을 재정렬해주려는 뇌의 자동 활동을 거슬러야만 한다. 기필코.
도대체 어떤 녀석들이 ‘글자들을 뒤바꿔’ 놓는가? 저자, 디자이너, 당연히 교정공 자신까지 포함하여, 글자를 건드릴 수 있는 인간들 모두... 그리고 글자를 건드릴 수 있는 컴퓨터들. (여기서 인쇄 쪽에서의 오류까지 이야기하진 않겠다.) 그런데 틀릴 수 있는 것은 철자만이 아니다. 모르는 어문 규범, 잘못 아는 어문규범, 손가락의 잘못된 입력, 교정 사항이나 의견에 대한 잘못된 읽기, 망각, 누락, 도서 형식상의 통일 사안, 사실 자체, 번호들, 선들, ‘스타일’, 그 외 온갖 종류의 부주의, 똥고집, 마치 요정처럼 왔다 가는, 인터넷과 프로그램상의 전기적 오류들... 틀릴 수 있는 것의 범위는 말 그대로 상상초월이다. 책 만들기에 참여하는 이들은 ‘무엇이 틀렸는지’에 앞서 무엇을 틀릴 수 있는지부터도 알지 못한다. 저자들? 언어에 대해서도 문외한인데 책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디자이너들? 애초에 글자라는 걸 읽기 싫어하고 실제로도 읽지 않는다. 그 외? 그 외 녀석들의 관심은 누구의 관심이건 다 훼방일 뿐이다. (재차, 이렇게 쓰는 걸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틀렸는지 맞았는지 알지 못하는 정도라면 다행이다. 맞는데 틀리다 알고, 틀렸는데 맞는다 안다. 틀린 것을 안다 해도, 고쳐 달라 말하는 방법을 모르고 무엇을 고치라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 고친다 해도, 어떻게 고쳐져야 맞는지를 모르고 맞게 고쳐졌는지를 모른다. 그리고 그 모든 영역들에서 부분적으로만 맞고 부분적으로만 틀린다. 이 엉망 사태 가운데 던져진 사람은 교정공이다. 그 모두가, 교정공이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그게 바로 교정공의 일이다. 이제 다음과 같이 정의해 보자. 교정이란, 교정공을 좆되게 하려는 모든 사람들과 사람 아닌 것들이 어디까지 틀릴 수 있는지를 시험하기 위해 합심하여 만들어내는 온갖 상상도 못할 오류들을 찾아내 고치는 싸움이다. 뜻만 통한다면 그럴싸해 보이기 마련인 글을, 교정공은 읽지 말아야/읽어야 한다. 머릿속에만 있는 ‘무오류의 책’과 대조하면서 그렇게 해야 한다. 교정공은 상상 초월의 오류들 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위로 날아가야 하고 지하로 파고들어야 한다. 모사든들람과 사아람닌것들이 합하심여 만내어들는... 앞서 말한 밈은 어떨까? ‘캠브릿지 대학의 연구’라는 것부터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이제 나, 교정공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으뜸차원의 어떤 교정공이 있다고 하자. 그 교정공은 생각한다.
‘나를 좆되게 하려는 뭔가(들)가 있어서 내가 고통을 받고 있다.’ 이런 식의 생각은 그대로 두기 어렵다. 정말로 저 교정공을 좆되게 하려는 뭔가가 있다 하더라도 그렇다. ‘저 사람(또는 무엇)이 나를 해치려 한다’는 느낌, 악의 가운데 던져졌다는 느낌은, 그가 정말로 악의 가운데 던져졌는지 아닌지와 무관하게 그를 망친다. 두 번이나 반복해서 지적할 정도로 그러하다. 그것은 위험한 도식이다. 사자의 아가리 속에... 손을 넣은 상상만으로 그는 어깨를 쓸 수 없다. 그래서는 허공에 손을 물린 꼴이고, 도탄으로 빠져드는 미끄럼틀을 즐기는(당연히 전혀 즐겁지 않겠지만) 모양새다. 그가 아니라면 꼭 누군가, 일테면 악마가 즐기는 듯이. 미끄럼틀에 스스로 다시 오르는 것은 그다. 다시 양손을 허공에 뻗고... 다시 엉덩이가 갈리고 만다. 저 교정공은 정신적 위기에, 이상한 마음에 빠져들고 있다. 그런 마음은 교정공이 품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맘에 내가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한수의 비유를 들어서라도 교정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교정공은 좆되지 않는다는 걸, 교정공은 하나의 기관차가 되어야 한다는 걸... 잉잉징징이 아니라 칙칙폭폭이 되어야 한다는 걸.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그러나 이런 생각은 버금차원의 교정공으로선 도저히 좌시할 수 없는 것이다. 자, 무엇이 오류냐면...
2023년 11월 23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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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공기
개꿈
그냥 지들 어디로 가고 어디서 오는 스케줄 맞춰서 지랄 좀 하면 교정이 알아서 끝나서 나와야 되는 줄 아는 끼새수교들... 내가 보기에 우리 사호이 지도층분들은, 만약 지금 그대로의 사회를, 일이 돌아가는 와꾸를 유지하고 싶으시다면, 그러지 않는 게 좋다고 보지만, 주기적으로 매라도 좀 맞으셨으면 좋겠다. 그것만 하면 나도 그냥저냥 큰 불만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나는 타협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분들이 한 달에 한 번 동사무소 가서 카드 찍고 태형을 받으면 된다. 그러면 다른 건 어떻게 하든 좋다. 도구와 대수는 직종별 수입별로 단체교섭을 해서 정하면 된다. 교수 정도 되면 뭘로, 몇 대가 좋을까? 어쨌든 나는 바로 그 태형담당자가 되고 싶다. 뒤늦게 찾아온 꿈... 나, 70세의 은퇴한 교정공은 정부 지원 노인일자리를 알아보다 발견한다. 아, 드디어... 나는 곧장 지원한다. 진심이 담긴 지원서를 쓴다. 면접과 신체검사를 거친다. 나는 내게 다른 종류의 어두운 목적이 없다는 점을, 내게는 ‘오로지 원한뿐’이라는 점을 증명해야 하고 증명해낸다. 기준이 제대로 되어 있기만 하다면 나는 뽑힐 것이다. 문명 사회에서 태형은 좀 그렇지 않은가 싶기도 하지만, 그분들은 또 얼마나 문명인들인가? 꿈은 모두가 꾸는 꿈이다. 나는 주민센터에 도착해 곧장 ‘교정실’로 향한다.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가며 나는 생각한다. 이런 종류의 벌로 그들이 교정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한 일이다... 어쩌겠는가? 교정실 문은 잠겨 있다. 왜지? 안내문도 붙어 있지 않다. 주민센터 사이트에 접속해 본다. 반평생에 걸친 교정 업무로 인해 한없이 어두워진 눈으로 나는 동네소식 게시판의 깨알 같은 글자들을 한참 들여다본다. 태형... 자동화로 인해... 교정직 노인 일자리 지원... 중단...? 나는 주민센터를 나오며 존경하는 공무원분들께 모자를 벗어 인사한다.
2023년 11월 13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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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공기
온라인가나다라는 전쟁터
교정공으로서는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애증의 장소, ‘온라인가나다’는 국립국어원 누리집에 딸린 게시판이다. 어문 규범, 어법, 표준국어대사전의 내용 등에 대해 국립국어원에 직접 문의하고 답을 받을 수 있는 곳. 대화라는 양식의 설명이 필요한 어문 규범이 반드시 있고, 그 대화라는 건 대체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인간의 말이 아니라 개 짖는 소리만으로 개의 짖는 소리를 묘사하려 한다면 어떨지 상상해 보자. 멍멍! 한 다음 월월! 하는 것이다. 온라인가나다의 매일매일은 전쟁터다. 언어는(한국어는?) 수천만 마리의 개다. 그 속성상 각축할 자리가 끝없이 있어 왔고 또 생겨난다. 최전선의 양상은 아비규환일 수밖에 없다. 검색하면 나올 질문을 또 하고 또 하며 무한히 반복할 것만 같은, 무한한 것만 같은 수의 사람들, 자신이 무엇을 묻는지 모른 채 뭔가를 묻는 사람들, 이건 왜 이렇고 저건 왜 저렇냐고 한국어 그 자신이 와도 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왜 우리는 우리인가!), 그리고 언어라는 미로 속에서 눈떠 버린, 인터넷을 떠돌다 ‘국립’이라는 이름의 빛에 이끌려 온라인가나다를 찾아와 자신만의 특색 있는 언어 이론을 전개하는 괴인들... 마지막으로 그 모든 질문에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답을 해야만 하는, 국어의 지난날과 앞날의 진창 속에서 되든 안 되든 뭔가를 어떻게든 해야만 하는, 모니터 너머의 누군가(들?), 그들의 초인적인 인내력, 또는 한번 들여다보고 싶은 답변 양식 목록...
최근 ‘유모차(乳母車)’라는 단어를 ‘유아차(乳兒車)’ 또는 ‘아기차’로 순화하여 쓰자는 캠페인에 대하여, 일군의 반페미니즘 성향자들이 이 온라인가나다에 찾아가 단체로 따지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이를 두고 ‘이 정도면 정신병 아니냐’라든가, ‘정신병을 욕으로 쓰지 마라’거나, ‘쟤들은 나쁜 거지 아픈 게 아니다’라든가 하는 이야기들도 보았는데... 나 교정공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멍청, 무능, 무력, 무지, 저능... 이런 단어들은 뭔가를 욕할 때, 특히 우리의 적들을 욕할 때 동원되는 단어들 중 특히 맘이 아픈 것이다(맘이 아프지 않은 이와 대체 어떻게 이야기할까!). 어쩌면 바로 그래서 악이란 것이 고안되지는 않았을까? 악은 우리와 저들의 저능을 달리 보지 않으려는 상냥한 마음 때문에 필요했던 건지도 모른다. 마음이 아프니까, 차라리 악한 편이 좋다는 거다. 그들, 아마도 인생에서 처음으로 온라인가나다를 방문해 봤을 일군의 반페미니즘 성향자들은 내게 환상소설 속 악역을 맡은 사교도들처럼 보인다. 특정한 종류의 집단적 망상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속삭인 끝에 드디어 전면에 나서서 뭔가를 소환하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그 소환은 현실에 뭔가를 가져오는 식이 아니라 변화하는 현실을 가로막으려는 식이다. 즉 환상과 달리 이 현실에서 현실은 이미 소환된 것이다. 그래서 환상을 환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니 당연하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뒤집혀 묘사된 환상을 다시 뒤집어, 변화하려는 현실을 사교도적인 것의 자리에 놓고 있다. 바로 이 구조가 그들을 사교도로 만든다... 이런 광경은 화도 나지만 슬프기도 하다. 그들은 마치 빨려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얼굴은 과거를 향해 잡아당겨지고 늘려진다... 쭈욱...
최근 ‘유모차(乳母車)’라는 단어를 ‘유아차(乳兒車)’ 또는 ‘아기차’로 순화하여 쓰자는 캠페인에 대하여, 일군의 반페미니즘 성향자들이 이 온라인가나다에 찾아가 단체로 따지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이를 두고 ‘이 정도면 정신병 아니냐’라든가, ‘정신병을 욕으로 쓰지 마라’거나, ‘쟤들은 나쁜 거지 아픈 게 아니다’라든가 하는 이야기들도 보았는데... 나 교정공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멍청, 무능, 무력, 무지, 저능... 이런 단어들은 뭔가를 욕할 때, 특히 우리의 적들을 욕할 때 동원되는 단어들 중 특히 맘이 아픈 것이다(맘이 아프지 않은 이와 대체 어떻게 이야기할까!). 어쩌면 바로 그래서 악이란 것이 고안되지는 않았을까? 악은 우리와 저들의 저능을 달리 보지 않으려는 상냥한 마음 때문에 필요했던 건지도 모른다. 마음이 아프니까, 차라리 악한 편이 좋다는 거다. 그들, 아마도 인생에서 처음으로 온라인가나다를 방문해 봤을 일군의 반페미니즘 성향자들은 내게 환상소설 속 악역을 맡은 사교도들처럼 보인다. 특정한 종류의 집단적 망상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속삭인 끝에 드디어 전면에 나서서 뭔가를 소환하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그 소환은 현실에 뭔가를 가져오는 식이 아니라 변화하는 현실을 가로막으려는 식이다. 즉 환상과 달리 이 현실에서 현실은 이미 소환된 것이다. 그래서 환상을 환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니 당연하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뒤집혀 묘사된 환상을 다시 뒤집어, 변화하려는 현실을 사교도적인 것의 자리에 놓고 있다. 바로 이 구조가 그들을 사교도로 만든다... 이런 광경은 화도 나지만 슬프기도 하다. 그들은 마치 빨려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얼굴은 과거를 향해 잡아당겨지고 늘려진다... 쭈욱...
2023년 10월 17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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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교정공기
교정공기는...
내가 도대체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이제는 희미해졌습니다. 교정공이라는 직업도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습니다. 바늘방석의 바늘들처럼 꽂힌 채 일터로 집으로 실려 가는 출퇴근길 나는 생각합니다. 바로 지금이 인류 역사상 상대적으로든 절대적으로든 최대의 읽고 씀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기 아닐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또는 바로 그래서일지, 나는, 나의 일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뭔가로 교정공을 곧 대체할 수 있으리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쓴 사람 자신의 조심성으로, 아니면 무슨 검사기로, 발달한 AI로...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사실을 교정공들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지금은요. 여러 의미에서요. 굳이 대체할 필요도 없이 어차피 헐값이고... 그래도 감사한 말씀입니다. 교정이란 게 필요하지 않다고 하지나 않으면 다행인 판국입니다. 실제로 교정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고 소리 높여 외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여러 이유를 대면서요. 그런 얘기를 들으면 꼭 인종이나 민족에 대한 욕을 들은 것처럼 흠칫 놀랍니다. 나는 청소당하는 걸까요? 그러나 내가 놀라는 진짜 이유는, 견디기 어려운 모욕감을 느끼면서도, 실은 마음 한편에서는, 그에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굳이 외치지 않아도 이 세계가 내 귀에 대고 그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필요하지 않다고요. 맞습니다. 나는 비밀스럽게 공공연하게 분명하게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래, 너희 맘대로들 해... 그겁니다. 맘대로들... 그러나 이 직업에는 내버리기 어려운 특유의 병과 벌도 있습니다. 그 어떤 잘나고 목소리 높으신 분들의 그 어떤 글에서든 고칠 곳이 보인다는 겁니다. 이 말글을 쓰는 이 나라에서 손발로 의전서열이 꼽히는 분들은 물론이거니와, 지성의 첨단에 계시다 하는 박사 교수님들, 심지어는 저 훌륭 대단한 여러 작가 문호님들까지... 그 누구도 관심이 없는 일에 오직 내가, 폭포 아래서 폭포를 멈추려 하고 있다는 그 느낌, 오직 나만이, 혼자서만 유령들을 보는 듯한, 그 위험천만한 느낌에 붙들릴 때마다 나는 눈을 감아 봅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의 기로 앞에서 맘속에서 눈물을 쏟고 분을 토했을, 이제 교정의 전당에 들어가 표정 없이 늘어선 선배 교정공들의 모르는 얼굴(데스마스크)들을 나는 떠올립니다. 선배들의 단단한 이마 너머에 무른 것의 고통이,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한없는 고통과 노고가 있었음을 나는 느낍니다. 이 고통은 도대체 언제쯤 끝날까요? 이 고통이 끝나는 것이 온당할까요? 나의 선생님은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이들을 가장 존경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그런 이들을요. 다른 누구보다도요. 교정공기는 당신으로 나를 대체하려는, 나 교정공의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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