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13일 수요일

정말로 나를...

이런 이야기를 들어 봤을 수도 있다. 한 단어에서 첫 자와 마지막 자를 제외한 나머지 글자의 배열을 마구 뒤섞더라도 우리가 충분히 문장으로 읽어낼 수 있다는 이야기. 인간의 정신은 글을 한 자 한 자씩 읽는 게 아니라 단어째로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Aoccdrnig to a rscheearch at Cmabrigde Uinervtisy, it deosn't mttaer in waht oredr the ltteers in a wrod are, the olny iprmoetnt tihng is taht the frist and lsat ltteer be at the rghit pclae....
영어를 줄줄 늘어놓은 것을 용서해 달라... 이 이야기는 한국에서도 ‘캠릿브지 대학의 연결구과에 따르면...’으로 번역되어 재밌고 신기한 밈 정도로 알려졌는데, 교정공의 입장에서는 꽤 의미심장한 면이 있다. 철자를 뒤바꿔도 문장을 읽을 수 있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이 가능할지라도 일어나게 두어선 안 된다. 독자이긴 독자이되 독특한 종류의 독자인 교정공은, 틀린 문자열을 재정렬해주려는 뇌의 자동 활동을 거슬러야만 한다. 기필코.

도대체 어떤 녀석들이 ‘글자들을 뒤바꿔’ 놓는가? 저자, 디자이너, 당연히 교정공 자신까지 포함하여, 글자를 건드릴 수 있는 인간들 모두... 그리고 글자를 건드릴 수 있는 컴퓨터들. (여기서 인쇄 쪽에서의 오류까지 이야기하진 않겠다.) 그런데 틀릴 수 있는 것은 철자만이 아니다. 모르는 어문 규범, 잘못 아는 어문규범, 손가락의 잘못된 입력, 교정 사항이나 의견에 대한 잘못된 읽기, 망각, 누락, 도서 형식상의 통일 사안, 사실 자체, 번호들, 선들, ‘스타일’, 그 외 온갖 종류의 부주의, 똥고집, 마치 요정처럼 왔다 가는, 인터넷과 프로그램상의 전기적 오류들... 틀릴 수 있는 것의 범위는 말 그대로 상상초월이다. 책 만들기에 참여하는 이들은 ‘무엇이 틀렸는지’에 앞서 무엇을 틀릴 수 있는지부터도 알지 못한다. 저자들? 언어에 대해서도 문외한인데 책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디자이너들? 애초에 글자라는 걸 읽기 싫어하고 실제로도 읽지 않는다. 그 외? 그 외 녀석들의 관심은 누구의 관심이건 다 훼방일 뿐이다. (재차, 이렇게 쓰는 걸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틀렸는지 맞았는지 알지 못하는 정도라면 다행이다. 맞는데 틀리다 알고, 틀렸는데 맞는다 안다. 틀린 것을 안다 해도, 고쳐 달라 말하는 방법을 모르고 무엇을 고치라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 고친다 해도, 어떻게 고쳐져야 맞는지를 모르고 맞게 고쳐졌는지를 모른다. 그리고 그 모든 영역들에서 부분적으로만 맞고 부분적으로만 틀린다. 이 엉망 사태 가운데 던져진 사람은 교정공이다. 그 모두가, 교정공이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그게 바로 교정공의 일이다. 이제 다음과 같이 정의해 보자. 교정이란, 교정공을 좆되게 하려는 모든 사람들과 사람 아닌 것들이 어디까지 틀릴 수 있는지를 시험하기 위해 합심하여 만들어내는 온갖 상상도 못할 오류들을 찾아내 고치는 싸움이다. 뜻만 통한다면 그럴싸해 보이기 마련인 글을, 교정공은 읽지 말아야/읽어야 한다. 머릿속에만 있는 ‘무오류의 책’과 대조하면서 그렇게 해야 한다. 교정공은 상상 초월의 오류들 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위로 날아가야 하고 지하로 파고들어야 한다. 모사든들람과 사아람닌것들이 합하심여 만내어들는... 앞서 말한 밈은 어떨까? ‘캠브릿지 대학의 연구’라는 것부터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이제 나, 교정공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으뜸차원의 어떤 교정공이 있다고 하자. 그 교정공은 생각한다.
‘나를 좆되게 하려는 뭔가(들)가 있어서 내가 고통을 받고 있다.’ 이런 식의 생각은 그대로 두기 어렵다. 정말로 저 교정공을 좆되게 하려는 뭔가가 있다 하더라도 그렇다. ‘저 사람(또는 무엇)이 나를 해치려 한다’는 느낌, 악의 가운데 던져졌다는 느낌은, 그가 정말로 악의 가운데 던져졌는지 아닌지와 무관하게 그를 망친다. 두 번이나 반복해서 지적할 정도로 그러하다. 그것은 위험한 도식이다. 사자의 아가리 속에... 손을 넣은 상상만으로 그는 어깨를 쓸 수 없다. 그래서는 허공에 손을 물린 꼴이고, 도탄으로 빠져드는 미끄럼틀을 즐기는(당연히 전혀 즐겁지 않겠지만) 모양새다. 그가 아니라면 꼭 누군가, 일테면 악마가 즐기는 듯이. 미끄럼틀에 스스로 다시 오르는 것은 그다. 다시 양손을 허공에 뻗고... 다시 엉덩이가 갈리고 만다. 저 교정공은 정신적 위기에, 이상한 마음에 빠져들고 있다. 그런 마음은 교정공이 품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맘에 내가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한수의 비유를 들어서라도 교정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교정공은 좆되지 않는다는 걸, 교정공은 하나의 기관차가 되어야 한다는 걸... 잉잉징징이 아니라 칙칙폭폭이 되어야 한다는 걸.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버금차원의 교정공으로선 도저히 좌시할 수 없는 것이다. 자, 무엇이 오류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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