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28일 목요일
시인
정말로, 정말로 먼 길을 떠나온 기분이 들었다.
극심한 피로를 느끼며, 나는 광장이라 예상되는 곳에 서서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자료 속에서나 마주했던 옛 국가, 옛 도시의 풍경이었다. 첫 시간 여행인 탓에 정신이 매우 혼란스러웠지만 훈련받은 대로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차렸다. 곧 귓속에 심어둔 번역기를 통해 고대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가 들리기 시작했다. 과거에 왔으니 이 피로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과거 사람들이 자주 찾던 그것, 커피를 찾아 떠났다.
잃어버린 작품을 찾아서. 나는 젊은 문학 연구자다. 옛 사람들이 ‘그때쯤이면 문학은 사라지겠지’라고 생각하던 시대에서 나는 문학 연구를 하고 있다. 문학계에서는 나를 농담 삼아 ‘광부’라고 부른다. 저 역사의 깊고 깊은 시간을 따라 올라가, 자료를 파내고 파내어 사라진 줄 알았던 작가들의 작품을 발견해내기 때문이다. 왜 그러쥐면 한 줌밖에 안 될 학계에 발표하기 위해 이런 짓을 하는 걸까? 나는 그저 문학에 미친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는 캄푸스가 남긴 말 중 하나인 “시인은 미래에서 오는 존재다.”라는 말을 나도 모르는 새에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문학에의 미침으로 인해 나는 마침내 금단의 영역에까지 발을 들여놓고 말았다. 대문호 캄푸스가 마음에 안 든다며 불태워버렸다는 원고를 소실되기 전에 읽어보기 위해 그가 생존하던 시대로 넘어온 것이다. 캄푸스의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하나이자 당대 가장 권위 있는 평론가 중 한 명이었던 카에이로가 “캄푸스가 남긴 최고의 시는 바로 그가 불태워버린 「단두대 위에 선 생각」이라는 장시다. 그는 그 시를 불태워버림으로써 대문자 시에 가장 가까운 시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 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별이 사라진 뒤에도 우리의 하늘 위에 남아 있는 별빛처럼 그 시를 기억한다.”라고 말년의 회고록에 밝힘으로써 세상에 알려진, 그 이름만 남은 시를 찾기 위해 나는 시간을 거슬러 왔다. 이러저러한 경고, 주의 사항을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들으면서 말이다.
“절대로 타임라인을 망가뜨리는 일을 저지르지 마십시오. 시간 여행자의 행동은 그 시대에 수없이 반복되는 일상처럼 지극히 사소한 것이어야만 하며, 절대로 사건이어서는 안 됩니다. 미래 세계에 큰 변화를 줄 만한 돌발 행동을 막기 위해 시간 여행자는 ‘시간역설의 유령’으로부터 24시간 감시당할 겁니다. 당신으로 인해 ‘세계가 변화되고 있다’는 기운이 감지되는 즉시 그 나노 유령들은 당신을 추적할 겁니다.
또 한 가지. 당신의 여행 비자로는 일주일간 체류가 가능합니다. 체류 마지막 날 정해진 시각에 ‘승무원’을 만나지 못한다면 이 시대로 돌아오지 못할 수 있으니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환전을 넉넉히 해두시고, 계획된 소비 외에는 지출하지 마십시오. 방금 제가 알려드린 내용을 이해하셨습니까?”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일이었을까? 나는 캄푸스가 26세이던 시대로 왔다. 그의 전기에 따르면 그는 아직 문단에 이름을 제대로 알리지 못했고, 그로 인한 우울감에 깊이 잠긴 채 불면의 나날을 지속해왔다. 삼일 밤을 지새운 뒤 그는 내가 있는 이 카페로 올 것이었다. 그는 커피 한 잔을 주문한 채 마시지도 않다가, 불현듯 종이와 펜을 꺼내어 「어느 비틀린 날의 몽상」을 쓸 것이었다. 그는 그 시로 문단의 찬사를 받으며 데뷔함과 동시에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갈 것이었다. 그리고 후일 카에이로에 의해 밝혀진 것이지만, 이날은 그가 불태워버린 장시를 시작하는 날이기도 했다. 어쩌면 나는 그 장시의 초고를 보게 될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커피 한 잔을 주문한 채 가만히 그를 기다렸다. ‘살아 있는’ 그를 실제로 보게 되면 어떤 기분이 들까? 살아 있는 거장을 만난 것에 대한 놀라움? 훗날 최고가 되는 신예를 가장 처음 발견했다는 즐거움? 의외로 풋풋한 면모가 있었다는 것에 대한 흥미로움? 예상대로 어둡고 괴팍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의 확인으로 인한 따분함?
그는 오지 않았다. 전기에 따르면 그는 밤을 샌 뒤 정오가 조금 지났을 무렵 이 카페에 도착했어야 한다. 카페 내부를 몇 번이나 둘러봐도 그는 없었다. 대낮부터 예술과 사랑에 대해 떠드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무언가가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전기에 꾸며낸 부분이 있는 것일까? 나는 실망감과 심심함을 동시에 느끼며 주머니를 뒤적여 펜과 종이를 꺼냈다. 캄푸스를 기다리며 그의 시 「어느 비틀린 날의 몽상」을 기억나는 대로 한 줄 한 줄 적어 내려갔다. 몇몇 구절은 기억이 나지 않아 한참을 생각하고, 쓰고 나서야 틀렸다는 걸 알게 되어 단어 몇 개는 두 줄을 그어 고쳐두었다. 기억에 의존해 시를 다 쓰고 난 뒤에 나는…… 어떤 이상한 기분에 빠졌다. 시가 아니라 그 시를 적은 종이의 이미지가 너무나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잠깐만. 이것은 그의 문학관에서 보존되어 있는 초고 이미지와 똑같았다. 변색 등 자잘한 훼손만 없다 뿐이지 내용과 필체는 캄푸스의 원본과 똑같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내 머리에 문제가 생긴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나는 오늘 여기에서 어떠한 문제로 인하여 내가 있던 시대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거나, 혹은 돌아가지 않기를 ‘선택하게’ 되는 것일까? “어느 비틀린 날”이라는 것이 실은…… 내가 캄푸스였던 것일까? 내가 연구했던 캄푸스가 바로 나 자신이었던 것일까?
아니,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캄푸스를 연구하던 ‘나’란 무엇이란 말인가? (아니, 반대로 내가 연구하던 캄푸스는 무엇이었냐고 자문해야 하는 걸까?) 만약에 내가 지금부터 캄푸스가 ‘되는’ 운명이라면, 나는 이제 「단두대 위에 선 생각」이라는 장시의 초고를 써 나가야 할 텐데, 그와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캄푸스일 리가 없다. 더군다나 내가 캄푸스라면 카에이로의 존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는 스무 살 때부터 캄푸스와 알고 지낸 사이인데 말이다. 아니, 잠깐만. 설마.
정말로, 정말로 먼 길을 떠나온 기분이 들었다.
*팀 파워스, 『아누비스의 문』에서 차용.
2019년 11월 26일 화요일
오게 두어라: 부동층 (19년 11월 다섯째 주)
"Lich Queen Mei" BY VanHarmontt |
※추천 아이템: 팝콘
2019년 11월 15일 금요일
트로이의 목마: 김여정 (19년 11월 셋째 주)
2019년 11월 6일 수요일
기괴하고 엉뚱한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 그리고 그의 탄생에 관한 노트 ― “머리 수집가” 데마노르
바깥에서 보면 그의 집은 여러 시대를 상징하는 건축 양식으로 만든 여러 건물들을 ‘어울리지 않게’ 마구 쌓아 올린 탑처럼 생겼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제대로 된 바닥 따위는 없고, 구불구불 휘어진 기나긴 계단이 지하 밑바닥까지 이어진다. 그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 그 집의 주인이 800년 동안 수집한 머리들이 내지르는 아우성을 들을 수 있다. 머리들의 종류는 다양하다. 어떤 머리는 왕관을 쓰고 있고, 잘 다듬은 수염에서도 기품이 느껴진다. 밀짚모자를 쓴 어떤 머리는 뙤약볕에 오래 노출된 듯 새카맣게 탄 얼굴이다. 눈 감은 어떤 머리는 미사보를 쓰고 있다. 또 어떤 머리는 새의 깃털로 만든 관을 쓰고 있다. 이처럼 인종, 성별, 노소, 언어, 귀천, 그가 ‘진짜로 살았던’ 시대 등이 저마다 다른 얼굴들이 한목소리로 절규하며 방문객을 맞이한다.
이 주술사가 살아 있는 머리를 모으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는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 이야기를, 그 유일한 인생을 살아 있는 오브제로서 가지고 싶어 한다. 때문에 데마노르는 어떤 머리와의 대화가 지루해지면 다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까지 그것을 벽장에 두고, 새로운 이야기-인생을 들려줄 머리를 찾아 집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산 채로.
그는 리치가 아니지만 새 육체에 자신의 영혼을 담는 법을 알고 있어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으며,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육체를 전전해왔다. 현재 그의 육체는 말라 비틀어진 노파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는 곧 새 육체로 ‘이사해야’겠다고 생각 중이다. 그는 당대의 이름 높은 악인의 육체만을 원하는데, 이는 그런 자의 육체만이 자신의 영혼을 담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오래 살아온 탓에 여러 국가의 언어와 여러 시대의 성조, 뉘앙스 등을 사용한다. 당대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고어 혹은 사투리로 들릴 것이다.
*노트
지난 티알피지 세션에서 즉흥적으로 등장한 인물이다. 나는 그에 관해 말하며 온종일 유튜브만 보는 사람을 생각했다. 그는 순수한 개인적인 악인이다. 그의 관심을 끌지 않거나 심기를 불편하게만 하지 않으면 그와 마찰을 빚을 일은 없다.
기괴하고 엉뚱한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 그리고 그의 탄생에 관한 노트 ― 기괴하고 엉뚱한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 그리고 그의 탄생에 관한 노트에 관하여
이 연재물을 읽는 이들은 자신의 그룹이 즐기는 RPG나 소설 등에 이 캐릭터들의 면모를 표절할 수 있습니다.
연재 주기는 따로 없습니다. 그때그때 떠오를 때마다 올립니다.
2019년 10월 30일 수요일
사이버낚시꾼
하지만 한편으로 저는 이렇게도 생각합니다. 사이버 낚시를 하면 현실의 물고기는 다치지 않지만 사이버 물고기는 여전히 다칠 위험이 존재한다고. 반복되는 사이버상의 고통이 사이버 물고기들을 진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이 고통은 플레이어의 시간 감각을 파괴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한번 시간 감각이 파괴된 이는 한정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일이 한없이 무의미하게만 느껴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이버 낚시터에서조차 저는 사이버 물고기를 잡은 뒤 릴리즈를 해주고, 현실의 흔들의자에 앉아 충분한 휴식을 통해 일상성을 회복하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2019년 10월 27일 일요일
모두를 행복하게: 쟁 니 (19년 10월 넷째 주)
사실 ㄷㅌㄹ을 위해서는 깨작깨작 뭐 머리 밀고 안경 벗고 하는 그런 잔재주로는 안 된다. 이미 그 모든 일들을 거쳐서 그 자리에 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ㄷㅌㄹ이 이미지를 제고하겠다면, 천하를(좁은 천하지만) 흔드는 스케일, 한 명이 아니라 만 명을 죽였다 살렸다 하는 큰 계책이 요구된다. 최근 정치에 대한 흥미가 떨어진 거 아니냔 얘기까지 듣는 쟁니를 위해 PIMPS가 자신 있게 내놓는 특급 제안: 만났다 하면 히죽히죽, 쟁니에게 꾸준히 호감을 표시해 오던 재용과 의삼촌-의조카 맺기. 즉, 현대 의학 최전선에 누워 불멸의 꿈을 꾸고 있는 건희와 영혼의 의형제 결의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나치게 복잡해진 한국 정치를 한 방에 정리할 수 있는 특급 카드다. ‘국정 농단 연루’와 ‘탄핵 후 당선’이라는, 각기 정통성에 사소한(?) 흠결이 있는 재용과 쟁니에게 있어서, 호시탐탐 그들의 경제적-정치적 권좌를 노리고 있는 홍석현을 제끼기에 이보다 더 윈윈인 전략이 없음은 말할 것도 없고, 입으로 자유를 외치며 국가를 기업의 보조기관으로 묶어 두려는 우리 자유시장충들(정중히 사과드립니다)의,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자신들의 실패를 감추기 위해 끝나지 않을 그 규제완화 난동을 일거에 만족시킬 수도 있으며, 요즘 세계적인 국가 경영 트렌드(미·중 참조)인 ‘첨단기업의 재력-기술력과 결합한, 대중적 지지를 적정선에서 재생산해낼 능력을 갖춘 국수 포퓰리즘적 엘리트 과두정’의 수립도 물 흐르듯 가능해진다. 사회적인 힘들을 어떤 방식으로 한데 묶을 것인지를 언제나 고민하는 민주당의 공학적 정치 스타일에 딱 맞는, 이런 게 바로 모두의(대략 2/3의) 열 걸음 아니냐? 이 정도면 안철수부터 유승민은 물론이고 황교안, 홍준표 선까지도 쉽게 정리된다. 그리고 다음 스텝: 건희와 한날한시에 죽기로 맹세한 이상 쟁니도 영원히 살아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그러면 임플란트 따위 문제가 아니라, 삼성병원이 나서서 초혁신적인 초의료기술을 총동원해 쟁니를 사이보그로 만들어 줘야만 한다. (못하겠다면 만들어 줄 때까지 매주 토요일 모이면 되고.) 대외적으로 그보다 큰 산업기술력의 홍보가 없을 것은 물론이요, 포스트-쟁니 문제와 관련된 극렬 지지층의 이런저런 자해적 활동도 ‘건강하게’ 정리된다. 한편 86세대를 뒤늦게 벤치마킹할 셈인지 자기들도 무슨 반독재 투사가 되어 보고 싶은 듯한 우파들, 자기들도 탄핵이란 것을 해 보고 싶어 안달이 난 그들이 BIG BROTHER를 그토록 간절히 원하고 있으며 그게 소원이라면? 그렇게 만들어 주면 된다. 이건 마찬가지 의미에서 왼쪽 마이크들에도 좋은 일로, 모든 것을 욕하는 것으로 모든 일을 땡치고 싶은 사람들이 그냥 맘 편히 모든 것을 욕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길이기도 하다. 하여튼 모두가 인터넷 같은 데서 욕만은 맘껏 할 수 있게 해주면 되고, 그걸로 모두가 넉넉히 만족할 것이다. 좌우 전 인민의 유튜버화를 통해 영애가 못다 이룬 창조경제의 꿈이 이뤄진다면 그런 것이 바로 호혜, 차세대 먹거리 산업으로 세계 경제를 선도하는 뭐 그런 거 아닐까? 이렇듯 남쪽을 평정한 다음 이재용이 다시 김정은과 의조카를 맺도록 주선하여 반도 최고 권력의 두 가문 3대를 한데 모으기까지 한다면? 모두가 행복해진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일을 두고 하는 얘기다. 쟁니의 업적이 얼마나 길이 남을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PIMPS는 항상 최선의 길을 제시한다. 미래나 뭐 그런 건 신경 안 쓴다...
2019년 10월 26일 토요일
조랑말 속달 우편 배달부
2019년 10월 8일 화요일
상담사 고블린
어떻게 전화를 거셨나요?
그러면 나는 고민을 이야기한다.
상담사 고블린은 참을성 있게 사연을 들어준 다음 아무 해답을 주지 않고 전화를 끊는다. 고블린이 하는 일이 다 그렇지.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나아진다.
사실 상담사 고블린을 실제로 만난 적은 없기 때문에 그가 정말 고블린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은 없다. 그냥 내가 고블린이라고 믿고 싶기 때문에 그는 고블린이다.
기분이 나쁜 날은 고블린 떼를 상상한다. 경찰 고블린. 소방관 고블린. 발명가 고블린. 여행 칼럼니스트 고블린. 제복을 입고 뚱한 표정으로 태업에 매진중인 고블린. 상태가 나쁠수록 많은 고블린을 동원해야 한다. 길을 건너는 고블린. 줄을 서는 고블린. 잘 나오지 않는 펜을 흔들다 잉크를 뒤집어쓰는 고블린. 옷을 사 입는 고블린. 임대차 계약서에 지장을 찍는 고블린. 벽에 머리를 찧는 고블린. 순간이동하는 고블린. 커피를 내리는 고블린. 유리창에 푸르고 투명한 세정제를 뿌리는 고블린. 흙장난하는 고블린. 의자를 드르륵 소리 내며 끄는 고블린. 정원수를 파내고 뿌리 밑에 숨겼던 것을 찾아내는 고블린.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고블린. 전화를 받는...... 상담을 하는 고블린.
오늘 상담사 고블린은 ...... 아주 늦게 전화를 받았다. 나는 단 한 마디를 했다.
“제 조수가 미친 것 같아요.”
평소라면 그대로 전화를 끊었을 상담사 고블린은 전처럼 퉁명스러운, 하나도 다정하지 않은 목소리로 단 한 마디만을 말했다.
“그것 참 큰일이군요.”
2019년 10월 5일 토요일
웃으면 된다고 생각해: 박용진 (19년 10월 첫째 주)
2019년 10월 4일 금요일
입출력의 건
2019년 9월 23일 월요일
격돌! 대권훈련소: 낙연/교안 (19년 9월 넷째 주)
2019년 9월 16일 월요일
명절 지나
2019년 9월 7일 토요일
포병은 전쟁의 신이다: 심상정 (19년 9월 첫째 주)
답답한데 심상정 얘기나 하자. 이미 주요 정당 대표급들을 다 다뤘기 때문에, 균형 잡힌 시각을 추구하는 PIMPS에서는 정의당 대표 심상정을 다루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심상정이가 누구인가? 심상정이 좌파 생활을 갓 스물 무렵에 시작했다. 그 나이 때 좌파 시작한 녀석들이 백 명이라 치면은, 지금 심상정이만큼 잘나가는 좌파는 심상정 혼자뿐이다. 어떻게 거기까지 갔느냐, 잘난 놈 제끼고, 못난 놈 보내고, 배신하는 새끼들 다... 죽인 건 아니고 하여튼 그것이 심상정이다. 만약에 좌파 그만뒀으면? 예전에 김종인(aka KINGMAKER)이 심상정더러 거기서 그러지 말고 그냥 진작 민주당 가서 어쩌고 저쩌고 했으면... 그랬던 적도 있는데, 더 나갔으면 더 나갔지 덜 나가진 않았을 것이다. 여하간 심상정은 좌파라는 이야기, 그 뭐 무슨 참좌파까진 모르더라도, 어떻게 그가 좌파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심상정은 그냥 좌파도 아닌, 육분칠열된 이 나라의 한 줌 좌파 중 다수를 그나마 중재하고 대표 비슷하게라도 나설 수 있는 좌파다. 그것은 그가 여기와 저기 사이를 잇는 소통의 연결고리가 되는 그런 식이라기보다는, 그의 (좌파에게는 매우 드문 종류의 덕성인) 강력한 카리스마로 밀어붙이는 일에 더 가깝다. 야 너 그렇게 하지 마라고! 서로를 욕하며 말싸움만 하지 결과적으로 아무런 정치 행위도 이뤄지지 않는 상황, 앞으로 쑥 나와서는 어 그러면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할게! 하는 것이 심상정식 ‘중재’다. 양쪽 얘기를 들어보니까 결국 이렇게 해야 돼, 내가 하란 대로 해, 책임은 당연히 내가 진다. 내가 하자는 대로 하기 싫어? 그럼 빠져. 못 빠져? 그럼 내가 빠질게, 불만 없지? 있으면 빨리 말하고, 없어? 땅땅땅. 그렇게 어? 어어? 하면서 심상정이 하자는 대로 하거나, 아니면 심상정이 거길 나오는 결과로 마무리된다. 그렇게 구는데도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계속 모여 있다는 것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가 어떤 핵심적인 명분을 수호해 내고(또는 이어지는 사건과 정세의 결과가 그로부터 명분을 거둬가지 않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되는 일을 한다, 그런 걸 권력의지라고 불러도 좋을까?
개인적으로는 심상정이 나를 위해 뭘 해줄 수 있는지 따져야 하는 입장이지만, PIMPS에서는 내가 심상정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만 한다. 마침 조국 청문회 국면(이 얘길 아직까지 하고 있다니!)을 맞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심상정의 입을 주목하고 있기도 하다. 그 건에 대해선 장고를 거쳐 드디어 내일 발표라는 걸 한다는데, 뭔 소리를 해도 욕먹는 게 분명(이 글이 읽힐 즈음에는 아마 욕을 먹고 있는 중이겠다)하니, 어차피 먹을 욕 그냥 하고 싶은 아무 얘기나 해라! 지금은 그런 시시한 일보다는 심상정을 위한 이미지메이킹 솔루션이 필요한 때다. 도대체 어떻게? 심상정을 어찌해야!??! ...침착해야 한다. 문제는 무엇인가? 정치인은 웃기면 안 된다고 누차 내가 말했는데, 일테면 심상정은 완전히 반대로 하고 있는 케이스다. 아예 보좌진이 나서서 그를 밈meme화하고 있다. 심블리, 내루미, 1초 김고은... 전부 보좌진들이 여러 채널을 통해 열심히 흘리는 얘기들이다. (아니면 도대체 누가 그러한 관심과 애정으로 그를 돌보겠나?) 물론 그러는 데에도 수긍할 만한 까닭은 있다. 만약 그냥 둔다면? 심상정의 위엄이 도를 넘어서 버릴 것이다! 경험치와 연륜과 슬픔이 쌓이며, 눈빛도 날카로워지고 속머리도 희끗희끗해지면서, 지금 그에게선 말이 안 되는 중후함이 나와 버리고 있는 실정. 오늘에 이르러선 어디 가서 굽실대는 심상정을 상상할 수가 없어져 버렸다. 이건 건방지다거나 안하무인이라거나 그런 차원이 아니다. 말하자면 심상정에겐 이제 윗사람이란 개념이 없다. 자세나 낯빛, 거동, 말하는 모습을 보면 그 풍격이 이미 대통령을 넘어섰다. 보통 정치인이 되어 보겠다면서 떠밀리듯 어찌저찌 나선 좌파들이 나이를 먹음에 따라 후배들이 어쩌고 젊은 세대가 어쩌고 하면서 약간 무책임하게 그냥 스리슬금 퇴장해 버리곤 하는데, 심상정의 권력의지는 그가 내외적으로 좌우적으로 받는 비판들에 비례하여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강렬하게 타오르는 듯 보인다. 차라리 그의 뜨거운 위엄을 부하들(미안합니다)의 조롱으로 겨우 억누르고 있다고나 할... 이건 유사한 다른 예를 찾기 어려운 기묘한 이미지다. 대처? 메르켈? 한심한 우파 녀석들! 심상정은 ‘그것’을 ‘해방’시켜야 한다. 이 경우는 시기의 선정만이 진정한 문제다. 즉, 그의 주변에서 펼쳐지고 있는, 그를 위한 모든 이미지메이킹이 중단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심상정은 날아오른다. 염색을 중단하는 것으로 카운트다운을 시작해라. 머리가 완전히 백발이 되는 때부터 이미지메이킹은 끝난다. ‘데스 노트’요? 노트 같은 건 필요 없다. DEATH뿐... 지금까지 역사에서 그 어떤 좌파 여성 정치인도 ‘대통령 너머’의 자리에 올라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김여정이 아마도 최초가 되리란 전망도 있지만은, 이웃 나라에서의 일을 기다릴 이유가 있을까?
※추천 아이템: 통이 넓은 바지, 품이 넉넉하고 4개의 주머니와 5개의 단추(반드시 목 끝까지 채울 것)가 달린 윗옷(색은 노란색만 아니면 된다). 대포.
2019년 8월 23일 금요일
직업소개사
나는 미래직업소개소*에서 무직자에게 노동의 기쁨을 알리고 그들이 할 수 있는 노동을 소개시켜주는 일을 하고 있다… 있었다.
옛 사람들은 행복한 미래 하나와 불행한 미래 하나를 상상했다. 사람이 하던 노동을 기계가 도맡고 사람은 더 이상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행복한 세상과, 사람이 하던 노동을 기계가 도맡고 사람은 노동 현장에서 쫓겨나는 불행한 세상.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거나 하지 못하게 된 이 세상이 행복한 세상인지 불행한 세상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내가 지금 인생 최대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더 이상 직업을 소개받으러 오지 않는다. 일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인지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내가 언젠가부터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미래직업소개소에서 9시에 출근해 8시에 퇴근할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는 삶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나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 방문객이 드물어진 초기에는 라디오를 듣거나 영상물을 보거나, 나중에는 막 나가자는 의미에서 게임도 했으나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 커다란 고민 속에서 시계만 쳐다보다가 시계가 멈추면 약을 갈아 넣을 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채로 텅 빈 사무실에 앉아 있노라면 텅 빈 사무실이 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자신과 장소가 동화되는 게 아니라, 장소에 자신이 편입되는 감각을 느껴본 이라면 어떤 느낌인지 알 것이다.
방문객이 오지 않는 것도 고민이지만, 노동하는 삶이 과연 행복한 것인지 불행한 것인지도 (여전히) 고민이지만, 당장에 내가 나에게 새로운 직업을 소개시켜줘야 할지, 아니면 일을 그만둬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 최대의 고민이다.
고민 끝에 사무소 한편에 비치되어 있던 월간 <직업 전선>이라는 책을 읽어본다. 여러 직업군에 속한 이들이 자신의 노동에 관해 기술한 체험기……인 것 같다. 확실하지는 않다. 헛소리를 적어놓은 이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고민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고 고민의 골만 더 깊어진다. (이딴 걸 왜 책으로 엮었지?)
‘미래에는 현재의 직업이 사라지고 줄어드는 한편 새로운 직업도 생길 것이므로 오래오래 일할 수 있는 미래의 직업을 소개받으러 오십시오’라는 기원을 담아 미래직업소개소라는 이름으로 직업소개소를 열었으나 대략 창업 20년을 맞은 지금 나는 정말로 대 위기다. 직업을 소개시켜주는 사람인 나 자신이 이 직업을 유지해야 할지, 다른 직업을 가져야 할지, 그냥 일을 그만해야 할지 결정하고 있지 못하니 말이다.
사람들은 왜 여전히 일하기 싫어하고 일하고 싶어 할까?
궁극적으로는 일하지 않아도 되지만 일하고 싶은 마음인 채로 일하지 않는 걸 바라는 걸까?
(혹자들이 더는 책을 읽지 않아도 되지만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인 채로 책을 읽지 않듯이?)
에라 모르겠다. 이 고민을 <직업 전선>에 투고해보고 나서 생각해야겠다.
*대한민국 서울시 영등포구에 소재한 곳과는 무관함을 밝힙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조국 (19년 8월 넷째 주)
2019년 8월 16일 금요일
미친놈만 살아남는다: 손학규 (19년 8월 셋째 주)
2019년 8월 13일 화요일
[14호 서신]
*비연재 게시물을 위한 공용 태그 도입
-비연재물을 위한 공용 태그 ‘단편’ 신설.
-해당 태그로 한 편, 두 편(1-2, 상-하, 본문-후기, 서문-본문 등), 또는 세 편(123, 상중하, 서본결 등)만으로 완결되는 게시물을 올릴 수 있음.
-주제와 형식상의 제약 X.
*저장고 글 일부의 태그 수정
-필자가 권한 해제된 상태이면서 소개글 포함 3편 이내로 연재 중단된 게시글들의 태그가 ‘단편’으로 변경됨.
*‘공동입하동’ 태그 묶음 신설
-공용 태그를 위한 묶음(저장고 및 개인 태그와 구분되는)을 새로 만듦.
-‘곡물창고에서’ 태그가 해당 묶음으로 복귀됨.
-‘곡물창고에서’ 게시글 작성 시 뜨거운 박수와 함성...
*새로운 연재 기획, 새로운 필자, 새로운 공용 태그, 새로운 단편 업로드, 기연재 생산 배가 등 환영
-멀티미디어 시대에 발맞춰 웹 환경에 맞는 다양한 기획(이미지, 영상, 음성 등) 추천.
-심심한 지인에게 필자 등록 권유.
-각 필자들은 개인 연재 외에도 새로운 공용 태그를 기획하고 만들 수 있음.
*페이지 수정
-위 사항들에 맞게 인별표목 및 사용조례 수정.
이상.
2019년 8월 9일 금요일
수수께끼의 복수자: 정동영 (19년 8월 둘째 주)
2019년 8월 8일 목요일
해상 기획
그러나 한편으로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어 이야기들이야말로 ‘기획’된 것이라는 의혹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인어들은 풍랑을 제어하고 미색으로 뱃사람을 홀리며 이따금 아이를 낳아 뭍것의 품에 안겨준다.
풍랑을 다스리는 능력이 있어 뱃사람들이 마음에 들 때에는 뱃길을 잠잠케 하지만 때로 신경질을 부려 해일을 부르는 종족이, 너무도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때로 인간 남자와 정을 통하기도 한다-는 상상에서는 그 두려운 자연재해를 인간―인간 중에서도 뱃사람들, 즉 남성들―이 통제할 수 있다는, 그러기를 바란다는 의도를 추출할 수 있다.
너무나 희귀하여 쉬이 발견되지 않는 종족이 있는데 유독 한 가지 성별의 기능과 이미지만이 전해진다면 그것이 편의적으로 상상된 것이리라 짐작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어째서 사람의 눈에 목격된 인어들은 모두 여인의 꼴을 하고 있단 말인가? 남자인 인어들은 너무 겁이 많아서 뭍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고 하던가?
南海中有鮫人 水居如魚 不廢機織 其眼能泣 泣則成珠(남해중유교인 수거여어 불폐기직 기안능읍 읍즉성주) 남해 속에 교인이 있으니, 물고기처럼 물에 살며 베 짜기를 그치지 않고, 그 눈은 울 수 있어 울면 눈물이 구슬이 된다. (조충지, <술이기述異記>)
한술 더 떠 옷을 입지도 않는다는 인어들이 베를 짠다는 건 대체 어떻게 나온 발상인지 모르겠다.
이와 같은 상상력들 대체가 실존하는 인어들에게 너무나도 큰 결례로 여겨진다.
다른 분야의 과학들이 그러하듯 박물학에는 윤리도 사상도 없지만 박물학자에게는 나름의 그것이 있다. 인어 전승을 되짚어 볼수록 박물학자인 나를 화나게 하는 옛 사람의 상상은 한 마디로, ‘어째서 인어는 여자고 용왕은 남자인가’ 하는 부분이다. 수저 문명의 백성들이 전부 여성이라면 그들을 다스리는 존재 또한 여왕이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전남 신안군에는 도초도라는 작은 섬이 있고 이 섬에서는 명씨 성 가진 노총각이 어부에게 잡힌 인어를 구해준 은혜로 대를 잇게 된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명씨는 인어를 돈 주고 사서 집에 얼마간 두고 돌봐준 뒤에 바다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인어는 바다에 돌아간 뒤 며칠 지나 잠시 뭍을 찾아 옥처럼 곱고 지혜와 재주가 빼어난 남자아이를 명씨에게 안겨주고 다시 떠났다 한다. 도초도에는 지금도 명씨 집안이 남아 있다.
인간-남성 입장에서는 이것이 노총각이 대를 잇게 도와준 유교적 미담일지 몰라도 나의 시각에서 이것은 인어들이 ‘남자’를 취급하는 방식을 더 잘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물 위는 지옥과도 같은 세계로, 인간은 악귀와도 같은 존재로 여길 인어가 자기 자식을 뭍으로 올려보낸 것은 명씨에게―인어는 잘 알지도 못하는 유교적 세계관의 맥락에서― 은혜를 갚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아이를 거부한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이유는 아마 여자 아기가 아니어서가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째서 성숙한―목격된― 인어들은 전부 여성의 신체를 갖고 있는지를 설명할 도리가 없다. 인어들은 남아를 유기한다. 그런데 번식은 어떻게 하는가 같은 것은, 글쎄, 대화를 통해 알아 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대화가 가능한 상대에게 그런 것을 묻는 것은 예의도 아니다. (이런 것을 굳이 말해줘야 하는가?)
2019년 8월 7일 수요일
노점상(인형을 파는)
2019년 8월 4일 일요일
장난감 공장 노동자
2019년 8월 2일 금요일
빛을 받아들여라!: 이해찬 (19년 8월 첫째 주)
2019년 7월 26일 금요일
정점으로 올라서기: 나경원 (19년 7월 넷째 주)
이 순간 나경원은 새로운 이미지로 거듭나야만 한다. 이리저리 휘둘리는 중간간부 포지션으로는 더 이상 안 된다. 첫 번째 솔루션은 눈 감기다. 평소에는 눈을 아주 감고 다니다가 심기를 거스르는 얘기가 들릴 때만 살짝 뜨는... 이런 느낌으로 간다. 과연 눈 감은 사진들(1, 2)을 찾아보면 느낌이 괜찮다. 눈 감고 돌아다니기가 좀 그러면 앞머리를 만들어 가려도 좋고, 한쪽만 가리는 것도 좋다. 누구 뭐 해찬이 인영이 교안이, 이런 친구들이 앞에서 뭐라뭐라 깔짝거려도 그냥 척 눈 감고 있으면서 귓속말을 통해 따로 내용 전달을 받는다. 옆에서 귓속말을 해줄 친구가 필요하겠다. 똘똘한 녀석으로, 본인 옷이랑 조합이 맞게 깔끔하게 입혀서 세워 놓으면 된다. 그의 귓속말을 다 들은 다음에야 딱 눈을 치켜뜨고 한 30초 좌중을 노려본다, 아무런 말도 없이, 이게 바로 나경원이어야 한다! 두 번째는 육성 아끼기다. 육성이 어디로 새 나가는 것을 최대한 피하자. 나경원 목소리가 어땠는지 사람들이 잊어 버릴 정도로, 평상시 말을 할 때는 귓속말로만 하자. 아까 그 친구한테. 니가 알아서 적당히 말해, 이렇게 해도 된다. 그 친구가 말을 전파하는 식으로 말하면 그만이다. 반드시 무슨 말을 해야 하는 때에는 아주 천천히, 짤막하게만(‘마이크 꺼주세요’ 등) 말한다. 말을 하면서는 누구도 쳐다보지 않는 게 중요하다. 카메라도 좌중도 안 된다. 그냥 눈을 감아 버린 채 말하는 것도 괜찮다. 뭐를 설명하려고 하면 안 된다, 설명하지 않는다, 설명하지 않는 나경원! 만약 누가 중간에 말을 끊으면 잠시 바라보다가 눈짓을 해서 끌어내도록 하자. 좌석을 함정식으로 만들어 버튼을 누르면 파캉, 하고 열리면서 어디로 떨어뜨려 버리는 것도 좋겠다. 그럴 수 없는 자리에는 아예 나가지도 않는다. 이 정도는 해야 야심에 걸맞는 격이 생기고, 일도 자연스럽게 쭉쭉 풀릴 것이다. 이로 인해 역사가 거꾸로 돌아가지나 않을까 두렵다... 나 의원의 건투를 빈다.
※추천 아이템: 서너 개의 커다란 반지, 생화 코르사주, 크고 시커먼 선글라스(외출 시), 말 안 듣는 놈들을 바로바로 패버릴 수 있는 튼튼한 세공 지팡이.
2019년 7월 19일 금요일
두 번째 소개: PIMPS (19년 7월 셋째 주)
이전 시즌이 약간 아쉬운 맛이 있는 분량으로 다소 갑작스럽게 마무리되었던 것은 이래저래 연재 의욕이 꺾였기 때문이다. 그때 나를 가장 크게 무릎 꿇렸던 콘텐츠는 한국 3대 민족찌라시의 하나인 중앙찌라시에서 연재되던 「백재권의 관상·풍수」였다(참고자료). 정치인 포함 유명인들의 관상을 동물의 얼굴에 빗대어 보면서 뭐슨뭐슨 막걸리 썰을 푼다고 하는, 동물과 관상과 평론을 결합시킨 기절초풍의 기획력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코너는 올 연초 99회째에 성폭행범과 그 피해자의 관상을 다루는 초현실적인 누를 범한 뒤 민중의 단합된 힘에 호되게 털리고 글 내리며 연재 중단되었다가 어느 순간 연재분이 책으로 엮여 나오더니 아마도 명예회복 차원으로 지난 유월 윤석열을 다룬 새로운 99회차가 올라오며 마무리되었다. 100회를 딱 실수 없이 깔끔하게 채우고 마무리했다면 백 박사가 김세연을 밀어내며 여의도연구원장으로 영입되어 자유당 의원단 단체 성형과 혁신적 관상 공천, 풍수에 입각한 철저한 정책 설계에 기여하며 21대 총선을 큰 승리로 이끌었을 텐데... 기회를 놓친 것은 백 박사 자신의 업보이고 하늘의 뜻이다.
지난 2년간 참 많은 일들이 있었고, 정치는 여전히 끝나지 않는다. 19년 7월 19일 오늘, 남한 민주주의 대제전 프로듀스X101(참고자료) 방영이 종료되면서 PIMPS의 운신 공간은 다시금 열리고 있다. 총선 레이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빨랑 써서 해치워 버리고 마무리를 해야만 험한 일(고소·고발·협박 등)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판단 또한 섰다. 연재 재개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고민: 뭔가 새로운 기획을 추가해 혁신적인 면모를 보여야 하지 않을까? 장고 끝에 나는 초심으로 돌아가 진정성과 핍진성의 투트랙 정면돌파를 결정했다. 무엇이든 강력하게 촉구를 하고, 다양한 채널과의 공조 같은 거를 강화하고, 정·재계 및 노동계와의 접촉면을 늘리고, 또 뭐 어쩌고를 저쩌고하고... 그런 홀가분한 마음으로 PIMPS의 두 번째 연재를 시작한다. 각급 비서실 여러분, 각 당 내외부 싱크탱크 관계자 여러분, 정치 애호가와 정치 혐오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을 부탁드린다.
2019년 7월 6일 토요일
수의 무녀
그는 주머니를 뒤져 진공포장된 비스킷 하나를 꺼냅니다.
* 수의 무녀 - 입출력의 건 - 화상 담당자가 유약함 - 머릿속 사과, 우리 손에 들어온 - 정비공 대원 - 갑론을박 - 양가감정 - 윤리의 감각
2019년 7월 5일 금요일
[13호 서신]
*한여름
-건강 유의(일사병, 탈수증, 열사병 등의 온열질환 및 냉방병).
-호우 대비 배수관계 점검.
-해충 창궐에 유의.
-수면의 질 확보 체크리스트 운영.
*곡물창고에서
-사실상 연재 중단 상태이므로 저장고로 이동.
-새 글이 올라오면 입하 중으로 복귀.
*트위터 계정
-팔로어 100 달성(5월).
-운영 방침 개선: 필자 개인 활동 관련 선전 사항이 있는 경우 리트윗할 수 있음(조례 수정됨).
*필자 모집
-기 필자에게 추천 요청 통해 비밀스럽게 도전.
-무료로 필자 등록하고 계절 마감의 노예 되기(단타성 게시도 환영).
-확정 읽어 주기 품앗이 최소 5인.
-개인 블로그 운영이나 매체 기고/게재와는 다른 야릇한 기분 제공.
-반도 유수의 문예인들이 독자인 것 같은 기분 제공.
-내가 제일 못 쓰는 것 같은 기분 제공.
-내가 대체 뭘 쓰고 있는지 모를 기분 제공.
*창고발전위원회
-운영상의 향상점에 대한 의견 항시 청취 중.
-창고 양식의 호혜적 이용 대책 수립.
-현행 조례의 틀을 넘어서는 새로운 기획 환영(실현 가능하다면 실현시켜 보는 경향).
이상.
2019년 7월 3일 수요일
펀드 매니저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여기는 빌딩 옥상입니다. 고객님의 소중한 자산은 고객님의 전부입니다. 저는 한 사람의 전부를 파괴시킬 수 있는 가능성의 열매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여기는 사무실입니다. 증시판에서 수직 하강 중인 화살표가 가리키는 것은 갈 곳 잃은 자신에 관한 존재론적 출구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여기는 뉴욕의 한 호텔입니다. 부는 행복과 상관이 없다는 증명에 의해 또한 부가 행복임이 증거됩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여기는 강을 건너는 철교입니다.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공포와 교차합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여기는 뜨거운 맥주 통 안입니다. 망가진 것들을 복구하려는 노력과 회생에 대한 의지가 최고조에 다다르는 순간에 번개처럼 내려치는 판결의 두 이름은 불가능과 무의미입니다. 이 지울 수 없는 이름들이 죽음의 혁명적 속성을 나타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여기는 지중해의 휴양지입니다. 인생은 고통입니다. 인생은 죽음을 향해 전진하는 공포의 행군입니다. 그러한 여정길에서 돈은 진통제입니다. 그러나 자살하면 고통도 없습니다. 진통제도 더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2019년 6월 29일 토요일
헌병 수사관
헌병 수사관이 된 이후로 가장 나의 관심을 끄는 것, 바로 유서다. 논리적인 이유는 모르겠다. 나는 어려서부터 죽음에 관심이 많았다. 어릴 적 애거서 크리스티가 쓴 살인에 관한 소설들을 읽었을 때부터일까, 아니면 영정(할아버지의)을 처음 봤을 때부터일까. 나는 죽음에 일찍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고 그것에 관해 생각해왔다. 정확히는 타인의 죽음에 대해. (내 죽음? 알 게 뭔가. 나는 죽지 않을 텐데.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사람이 죽기 직전에 이 세상에 문자로 된 뭔가를 남기고 싶어 한다는 점은―그것이 시일지라도―인간이란 존재가 최후까지 생각을 놓지 않는 존재라는 사실을 늘 나에게 재확인시켜준다. 죽기 전의 유서 쓰기, 그것은 세상에 영혼의 잔량을 새기는 일인 것이다. 영혼이란 개념을 믿는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할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대부분의 경우 인생은 안에서 볼 때엔 더없는 비극이지만 바깥에서 보면 우스운 희극이다. 지난 이 주 동안 발생한 두 건의 자살 사고는 그 점을 더 분명하게 알려준다. 이 주 전 A중령이 죽기 전에 남긴 유서는 다음과 같다.
평생 나라에 충성하고 전우를 믿으며 살아왔는데 돌아오는 건 배신뿐이구나. 허망하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럽다.
그는 주어진 진급 기회를 모두 놓쳐 중령 계급으로 퇴역을 준비 중인 군인이었다. 와중에 평소 의지하던 B중령이 솔깃한 투자를 제안했다. A중령은 퇴직금을 몽땅 B중령에게 맡겼고, B중령은 사라졌다. 다른 여러 군인들의 목돈과 함께.
그리고 한 주 전에 B중령이 남긴 유서는 다음과 같다.
멍청한 군인들.
개 같은 내 인생.
B중령은 A중령을 포함한 여러 동료들에게 사기를 쳐 10억을 모았고, 그 돈을 100억으로 만들어준다는 외국 투자자에게 맡겼다. 투자자는 사라졌다.
나이 많은 군인의 자살 사례는 대부분 돈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군 생활만 해서 세상의 이치에 밝지 않으니(나 역시 예외는 아니리라) 사기를 쉽게 당하는 것이다. 반면 젊은 간부의 자살은 크게 두 가지가 주된 자살 사유로 조사된다.
주희(가명)야.
네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니 나도 더는 갈 곳이 없구나.
부모님 죄송합니다.
처럼 연애 문제이거나,
내가 죽는 이유는 다음 달 있을 전군재물조사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다. 초급 장교로서 심적인 부담이 너무 크다. 매일 스트레스를 받아 제대로 잠을 잘 수도 없다. 이 정도로 나약한 내가 한심하다. 나의 죽음으로 인해 사단장님이나 대대장님 등 다른 간부, 병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기를 바란다. 나의 죽음은 오로지 나의 모자람 탓이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처럼 업무상 스트레스 문제 등이 있다. 장교일수록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 비중이 높고, 부사관일수록 연애 문제로 인한 자살 비중이 높다.
병사의 자살 사유는 여러 가지인데, 가정 환경으로 인한 비관 자살이 가장 빈번하다. 대개 집안에 돈이 없고, 부모 사이가 좋지 않거나 이혼했으며, 자신이 가장 노릇을 해야 하는 이들이다. 최근 자신이 살던 시골집의 비닐하우스에서 나일론 줄로 목을 졸라 자살한 병사의 유언은 이랬다.
군에서 남은 2년을 보내려니 막막하다. 나와서도 뭘 하며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잘하는 것도 없고…
미래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떠납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선규(가명)야, 짐을 얹고 가서 미안하다.
많은 자살자의 유서엔 공통적으로 죄의식이 나타난다. 혼자 죽는 게 인간이지만, 혼자 사는 건 아니기 때문일까?
오늘도 우리 부대에서 병사 하나가 죽었고, 나는 현장과 가까운 곳에 있다. 죽은 병사 가족의 집이다. 자살자는 두 시간 전에 아파트 15층 자신의 집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 병사는 신병 휴가 중이었고, 오늘은 복귀 예정일이었다.
사고자 부친의 진술에 따르면(모친은 충격으로 입원해 있다), 사고자는 휴가 내내 자신의 방 안에서 지내다가, 두 시간 전 자기 방에서 나와 큰방에서 티브이를 시청 중이던 부모에게 “어머니 아버지,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소리친 후 그대로 베란다까지 달려간 뒤 뛰어내렸다고 한다.
부대로 돌아가 같이 생활하던 병사들의 진술을 들어 종합적으로 수사를 진행해야 하겠지만, 사고자 아버지의 진술과 유서를 살펴볼 때 단순 비관 자살일 가능성이 높다. 사고자는 학창 시절 간에 질병이 있어 입 냄새가 심하게 나는 사람이었고 이때 받았던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입 냄새가 치료된 이후에도 자신에게 끔찍한 입 냄새가 난다고 믿어왔다.
사고자의 유서를 읽고 나니 기분이 이상하다. 물론 사고 현장, 죽은 사람, 유서 등을 보는 건 언제나 좀 찝찝하고 씁쓸한 일이지만, 이 유서는 뭐랄까, 조금 평범한 언어로 쓰인 것 같지는 않다. 유서 쓰기가 세상에 영혼의 잔량을 새기는 일이라고 내가 말했던가? 그렇다면 이 병사의 영혼은 매우 불쾌한 것이었음이 틀림없다. 이 괴퍅한 문투와 지독한 악필은 뭔가에 오염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준다.
오늘도 계속되는 세상과의 불화.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운동을 해야 한다. 맨손체조. 윗몸 일으키기. 운동을 하면 잠이 온다. 이 위치가 가진 에너지를 설명할 수 없음. 중력이 내 몸을 처박기 전까지. 땀을 흘리면 기분이 낫다. 메들로 풍비의 지각의 현상학은 학수에게 주겠다. 정신의 테니스. 공은 내가 치려는 순간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다. 오늘도 행인들이 비웃었음.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운동을 해야 한다. 운동을 하면 잠이 온다.
메들로 풍비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사고자에게 강한 영향을 미친 작가인 것은 명백해 보인다. 친구에게 저작을 유증으로 남길 정도이니 말이다. 전혀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저자와 책의 이름은 사악한 자력이 있는 것처럼 나의 영혼을 끌어당긴다. 매우 불쾌하다. 그가 최후까지 놓지 않은 망상, 피해의식을 읽노라니 구토가 일 것만 같다. 뭔가를 써두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다. 펜, 당장 펜이 필요하다. 지금 써두어야 한다. 나는 지금 당신의 시체가 아니라 당신이 쓴 글을 보고서 극렬한 구토감을 느꼈다고. 나를 그렇게 만든 건 죽은 당신이 처음이라고.
2019년 5월 30일 목요일
왕(무인도의)
나의 영토는 내가 20년 전 표류한 이 섬으로, 그 넓이는 성인 남성의 걸음으로 반나절은 걸어야 끝에서 끝으로 종단 가능한 정도이니라. 섬에서 생활한 지 8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이곳에서 무한한 자유와 함께 이 땅에서 나고 자라는 모든 것들이 나에게 복속되어 있음을 느끼고 국가의 탄생을 선포했노라.
나의 백성은 최초에는 각각 넷이었으나 지금은 저마다 수십으로 불어난 개와 고양이 들, 그리고 국가법에 따라 엄격히 다섯 마리로 제한하고 있는 염소들이니라. 염소들은 노동과 함께 평화롭고, 개와 고양이들은 서로의 영역을 나눠 분쟁 중이나, 나누어진 그 영역마저도 엄연히 짐의 것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어서 내가 행차하면 그 주인을 알아보고 충성스레 애교를 부리매 그 또한 노동임을 내 모르지 않노라.
내 섬의 많은 것들이 내게 많은 것을 선사하기에 나는 이것들이 나를 위해 존재함을 아노라. 또한 내게 필요한데 없는 많은 것들을 내가 직접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신께서 주셨기에 이 나라에서 나보다 높은 곳에 있는 이는 오로지 신뿐임을 모르는 이 없노라. 그리하여 나는 해 뜨는 시각과 해 지는 시각이 되면 언제나 나의 옥좌―평범하게로는 원두막이라 불리는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신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노라. 표류한 뒤에도 오랫동안 기도문을 기억했으나 인생에서 가장 큰 절망을 겪었던 표류 4년에서 7년 차에 잠시 신앙을 놓아 전에 알던 기도문은 이제 잊었노라. 표류 8년 차 어느 날 불현듯 내 삶과 이 세상이 새롭게 보이니, 내가 그전에 알던 종교는 거짓된 종교임을 깨닫게 되었노라. 그리하여 나는 오로지 신만을 위한 진실된 하나의 종교를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기도문부터 해서 모든 의식을 새롭게 만들었노라. 나는 일국의 왕이며, 또한 단 하나뿐인 진실된 종교의 유일한 신도요, 수장이니라.
내가 절실히 필요로 하였으나 끝내 구하지 못한 것은 말벗이었노라.
처음에는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삶에서 큰 안식을 얻었노라. 대화는 늘 나에게 피로와 메스꺼움을 느끼게 만드는 행위였으매 더는 누군가의 말을 듣지 않아도 되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뭔가를 말할 일이 없으니 인간 사이에 있을 어떠한 문제와 불편도 없고, 그리하여 나는 불행의 근원은 바로 인간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쓰는 말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았노라.
그러나 어느 여름날 장마철에 질병에 걸렸을 때, 사경을 헤맬 때, 절로 내 입에서 기도의 말이 나오더라. 그러나 기도의 말 들어줄 이가 곁에 아무도 없더라. 그때 처음으로 신을 원망하였노라. 신이 내 목소리를 듣고 계신다면 나를 이렇게 버려둘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더라. 지금 이 순간 내 옆에 앉아 나의 땀을 식혀주고 내 손을 잡아주고 내 말을 들어줄 이가 있다면 그가 누구더라도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더라.
그리하여 한때 나의 가장 충직한 신하였으며 나의 총애를 누린 회색앵무가 하나 있었으니 나는 그의 이름을 일요일이라고 지었노라. 그가 나의 성―평범하게로는 움막이라 불리는 곳으로 날아온 이후 나는 그에게 많은 단어를 가르쳤으매 그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단어의 뜻을 하나둘 이해하기 시작하니,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더라. 교육자의 기쁨이란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깨달았더라. 그가 내 앞에 나타나 나는 크나큰 안식을 얻었으니, 그 작고 영리한 존재가 내게는 바로 안식일 같더라. 내가 900일하고도 스무날쯤은 더 지난 시간 동안 그에게 가르친 단어가 일백 개는 넘었더라. 내게 오라 하면 내게 오고, 망을 보라 하면 홰 위에 올라 망을 보고, 무엇을 보았느냐, 하면 “자연!”이라 대답하였으니, 그야말로 일요일은 자연에서 온 가장 큰 선물이었으며 신께서 내게 내린 가장 큰 축복 중 하나였더라.
그런데 하루는 “오너라” 해도 앵무가 말을 안 듣더라. 재차 “오너라” 해도 들은 체도 않고 홰에서 내려오지 않기에 “일요일아, 왜 그러느냐” 물었더니 대뜸 “외롭다!”라고 소리치는 게 아닌가? 나는 너무나 놀랐노라. 첫째로 나의 말을 거역하여 놀랐으며, 둘째로 나의 말을 거역하는 까닭이 저가 외롭기 때문이라 놀랐으며, 셋째로 내가 외롭다는 단어를 가르친 적이 없는데 그 단어를 스스로 깨친 것인가 싶어 놀랐으며, 넷째로 일요일이가 온 이후로 더는 외롭지 않다고 느꼈으나 내가 잠꼬대로 외롭다고 중얼거렸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어 내가 모르쇠 했던 속마음에 놀랐노라. 그 모든 놀라움은 곧 분노로 바뀌었으니, 근처에 널브러진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네 이놈, 하며 일요일이를 마구 혼냈노라. 일요일이는 작대기질에 매우 놀라며 날개를 푸덕이더니 이윽고 떠올라 창공으로 날아올라 사라지더라. 그리고 더는 돌아오지 않더라. 나는 얼마 안 가 후회했으나, 떠난 말은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이 섬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말벗을 잃으며 알았노라. 그렇게 왕국은 다시 침묵의 왕국으로 돌아갔노라.
이 말 없는 왕국은 그래도 내게 충분히 주었고 하여 나는 충분히 행복했노라.
가끔 두렵고 외로웠으며 고통스러웠고 불행했으나,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라는 혹자들의 말이 완전히 틀렸음을 나는 내 삶을 통해 증명했으며, 본래 자연에 없었으나 인간이 새로 만들어낸 것들은 대체로 없어도 된다는 것을, 아니 없는 게 낫다는 걸 이 왕국을 운영하며 배웠노라. 그리하여 나는 이 왕국에서 내가 느낀 점들을 이렇게 남긴다. 고기를 위해 염소를 도축할 때마다 말려둔 가죽(양피지라고 부르기엔 부족하지만) 위에 얼마 안 남았던 잉크를 사용하여, 하루하루 잊어가는 단어들을 되살려가며.
‘쓰기’는 스러져가는 기억들의 부활이며 영혼의 방부제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배우노라.
만약 말을 할 줄 아는 자네가 만약 우연히 나의 섬을 방문한다면 나는 말을 않은 채 자네를 극진히 대접하리라. 자네를 위해 내 염소를 내어주고, 깨끗한 물을 내어주고, 표류 15년 차부터 만드는 법을 익힌 빵을 나눠줄 것이며, 표류 당시부터 가지고 있던―내 가장 진귀한 보물!―브랜디를 한 잔 내어줄 것이며, 개와 고양이를 한 놈씩 데려와 충분히 만질 수 있도록 할 것이며, 나 자신 또한 모닥불 앞에서 멋진 춤을 추리라. 그리고 그대를 위해 진실된 기도를 드리리라. 그 모든 일을 말없이 하리라.
그리고 자네가 나의 섬을 떠나간다면 점점 작아지는 나의 왕국을 오랫동안 말없이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
나의 삶, 나의 왕국, 복되고 복되고 복되었으며 앞으로도 일천만 세 복될 것이라.
2019년 5월 22일 수요일
바리스타
네? 얼마 전까지는 제인이 아니었냐고요? 네, 그랬죠. 카페 매니저와 상담 후에 바꿨어요. 제인은 너무 올드하고 무뚝뚝한 느낌인 것 같다는 말을 들어서 좀 더 사랑스러운 느낌의 에밀리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강요나 압박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내린 결정이에요.
일하기 전에 탈의실에서, 혹은 일하다 잠깐 짬이 나서 한숨 돌릴 때, 저는 배지로 가득 찬* 저의 앞치마를 두 손으로 잡고 펼쳐봅니다. 아기자기한 배지로 빼곡하지요. 우리 카페는 직원이 손님들에게 자신의 개성을 어필할 수 있는 배지를 약 일곱여 종 정도 앞치마에 부착할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네, 강요는 아니에요. 강요는 아니지만 카페의 얼굴인 바리스타로서 손님들에게 개성적인 인상을 심어주면 좋을 듯하여 아끼던 배지 중에 일곱 개를 골라 달았어요. 새를 좋아해서 새 모양의 금속 배지를 몇 개 달았고요-흰머리오목눈이, 뱁새, 퍼핀, 오리, 홍학 등-, 좋아하는 아이돌의 배지도 달았습니다.
네? 일곱 개를 골라 달았다더니 왜 앞치마에 달린 배지가 서른일곱 개나 되냐는 말씀이시죠? 카페 매니저와 상담 후에 추가했어요. 매니저가 그러더군요. 왜 배지를 일곱 개만 달았냐고요. 손님들에게 자신의 개성을 어필할 수 있는 배지를 약 일곱여 종 정도 앞치마에 부착하는 것이 규정상 권장 사항 아니냐고 말씀드렸더니, 그건 말 그대로 권장 사항일 뿐이라고 하더라고요. 스스로를 표현하고 싶지 않으세요? 돌아보니 조이, 리나, 헤일리 모두 앞치마에 배지를 수십 개씩 달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제야 저는 현실을 깨닫고 퇴근한 뒤 곧장 후원 사이트에 접속했답니다. 여러 곳에 후원하고 배지 받으려고요.
제가 근무하는 시간은 점심 무렵부터 저녁 전까지입니다. 주변에 회사들이 많은 곳이라 점심에는 몰아치는 폭풍을 맞은 듯 정신 없다가, 폭풍이 지나가면 급격히 한산해지며 고요를 되찾습니다. 서너 시쯤이면 여느 여유로운 분위기의 카페로 돌아가죠.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피곤한 때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저기 구석에 앉아 언제나 제 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중년의 넥타이맨 때문이지요. 결코 알고 싶지 않았지만 그가 제게 말해줘서 알게 된 바로, 그는 백수가 된 기러기 아빠였어요. 아내와 아이는 몇 년간 국외 생활 중이고, 자신은 그사이 다니던 회사에서 해고됐는데 차마 밝힐 수는 없었대요. 집에 혼자 있는 게 외롭고 힘들어 남들처럼 출근하는 척하며 이 카페에 오게 됐고, 덕분에 저를 만나게 되었다고 말하더군요. 그러고는 저 때문에 계속 이 카페만 찾게 된다며, 정말 좋은 사람 같아 보여서 그런데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 라고 묻는 거 있죠. 당연히 알려주지 않았죠. 엄청 난감했고, 화도 좀 많이 나고 그래서 울 뻔했는데 마스카라 번지는 거 엄청 싫으니까 참았고요. 그냥 어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죄송합니다 고객님 했어요. 그러니까 이해한다라고 말하며 그래도 카페에는 계속 와도 되는 거냐고 묻는 거 있죠? 아니, 그런 걸 왜 물어요? 자기가 언제 나랑 만났다가 헤어지기라도 했나? 저 같은 말단 직원이 솔직히 안 왔으면 좋겠네요,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혼자 머릿속으로 이상한 중년 로맨스나 찍고 한심하네요! 마음속으로만 백만 번 외쳐주고, 셀카 찍으며 화 풀었어요. 필터 한 방 먹이고 증강된 내 얼굴을 보면 마음도 더 단단해지는 기분.
이 카페에서 6개월 일하는 동안 각각 다른 남자 손님들로부터 열다섯 번이나 고백 받았어요. 정말로 저를 좋아해서 그런 건지, 고백해서 혼내주자**는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저는 딱히 손님들에게 쌀쌀맞게 굴지도 않았다고요), 정말 그런 일 있을 때마다 피곤해요. 개새끼들!
저는 그저 ‘취준생’ 신분으로서 생활고 때문에 카페에서 일하는 게 아니에요. 저는 커피를 사랑하고, 커피가 필요해요. 검은 그것은 영혼의 연료예요. 언젠가부터 하루 한 잔이라도 들이붓지 않으면 생활이 어렵고, 돈과 인간에 시달려 지쳤을 때 시럽 듬뿍 넣은 커피를 한 잔 마시면 그래도 조금 살 만한 기분이 들어요. 그래도 다음에는 절대로 카페에서 일하진 않을래요. 물론 내 카페를 차리지도 않을 거고요. 영혼의 연료를 파느라 제 영혼이 점점 빠져나가고 있어요. 계속 이러다간 더는 인간이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구요.
그리고 여기, 주문하신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네?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는데 왜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나왔냐고요? 야, 이 개새끼야.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리시올, 2018. 72쪽을 참조함.
**김태훈, “왜 알바에게 고백해서 혼내주려 하나요ㅠㅠ”, 경향신문, 2019년5월11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5111235011&code=940100
2019년 5월 7일 화요일
파다한 ― 28
영경은 수확 없이 몇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명동. 명동은 전도하기 좋은 거리는 아니다. 외국인 여행객이 많기 때문에? 아니다. 영경에게는 몇 가지의 레파토리가 있었다. 시를 아십니까? 두 유 노 포에트리? 지다오 시거마? 시오 시테이마스카? 그러나 영경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냥 지나갔다. 알아 들은 것이 분명하다.
“시를 아십니까?”
별다른 복식을 갖추지도 않았다. 평범한 시장 양말. 스니커즈. 찢어지지 않은 청바지. 흰 티셔츠. 체크무늬 남방. 거리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패션이 아닌가? 다른 게 있다면 하이바, 하이바를 썼을 뿐이다. 그러나 뭐 무더운 날도 아니고. 하이바를 쓴 게 잘못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영경은 명동 거리를 헤쳐나가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보호할 최소한의 장치가 필요했을 뿐이다.
“지다오 시거마?”
침이 튀었는지 노점상인이 짜증스럽게 영경을 쳐다본다. 그는 회오리감자를 파는데, 언제부터인지 매상이 뚝뚝 떨어졌다. 계산해보니 시점이 비슷했다. 바로 저 전도쟁이 놈이 출현한 날부터지. 물론 이 구불구불하고 긴, 인간의 대장과도 같은 명동 거리에 전도쟁이 자체가 특이한 건 아니다. 잘못된 것도 없다. 상인이 물건을 팔듯 전도쟁이는 도를 판다. 하지만. 저놈은 아무것도 팔지 않으면서 이 거리를 더럽히고 있잖아? 지치지도 않으면서.
“지다오 시거마?”
어깨빵을 쓱 쓱 피하며, 영경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돌아오지 않는 질문이란. 혹여나 대답을 하는 이가 있다면 영경은 그 즉시 하이바를 내리고 뒷걸음질칠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런 사람은 없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영경은 아무런 기대 없이 한 사람 한 사람 붙잡고 시를 아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시를 알지도 모르지도 못했다.
명동의 유령. 영경은 그런 이름으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명동 밖에서.
시를 읽거나 쓰는, 그리하여 결국 시를 알게 되거나 여전히 모르는 사람들은 명동에 찾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명동이 과거가 되어버렸다며 슬퍼했다. 영경은 아니었다. 영경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마침내 명동 거리를 사랑하게 되었다.
2019년 5월 6일 월요일
불안한 뿌리
천변에서 피어오른 날벌레 떼에 둘러싸여 팔다리를 휘젓다 간신히 그곳을 빠져나왔을 때, 불현듯 귓속 깊은 곳이 가려워 정말이지 무심코,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거칠게 헤집었더니 손끝에 피가 묻어나왔다. 묻어나온 피는 나의 것일까, 귓속에 들어간 벌레의 것일까? 미량의 맑은 피가 묻어 있을 뿐, 손끝이 그리 지저분하지 않은 것을 보면 나의 피일 것 같다. 그렇지만 이렇게 깨끗한 귓속이 벌레 떼의 습격을 받은 직후에 갑작스럽게 가려워졌던 것을 생각하면 날벌레 한 마리가 어찌어찌 귓속으로 들어갔을 가능성도 적지 않을 듯하다. 그렇다면 이 피가 차라리 벌레의 것이기를 바라야 한다. 살아 있는 아주 작은 벌레가, 귓속의 솜털 때문에, 나오지는 못하고 그냥 거기에 남아 있다면? 내 귓속의 뭔가를 양분 삼아 아주 오래 살아남는다면? 심지어 그것이 암컷이고, 알을 낳을 준비가 되어 있는 개체였다면?
누구나 이 같은 불안 하나로 중이염에 걸릴 수 있다.
이때 실제로 중이염을 유발하는 것은 오염된 물에서 나온 병균 덩어리 날벌레가 아니라 불안에 못 이겨 미친 듯이 귀를 파기 시작하는 습관이다.
최근에 나는 어떤 양치기의 불안에 대한 글을 읽었다.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다.
국경 가까이에서 양치기 노릇을 하던 한 남자가 이웃나라에서 돌아오는 선교사를 보았다. 양치기는 신앙이 있었지만 한철 내내 산등성이 목장에서 보내야 하는 처지라 제례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선교사는 양치기의 청으로 그의 거처에 하룻밤 머물며 신의 뜻에 대해 들려주기로 했다.
양치기는 신앙이 있었지만 여가시간에 경전을 읽기보다 수음하기를 좋아했다. 이와 같은 흠을 선교사가 알아차리지 못하기를 바랐다. 선교사는 양치기에게 경전에 실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중에는 땅을 향해 사정한 남자가 신벌을 받아 죽은 이야기도 있었다. 선교사는 그에 더하여 땅에 떨어진 정액에서 인간을 닮은 극독초가 자란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날 밤에 양치기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선교사가 자신의 비밀, 즉 양떼를 돌보기보다 멀찍한 곳에서 사타구니 만지기에나 더 열중하는 습성을 꿰뚫어보고 저를 책망한 것 같아서 부끄럽고 분했다. 또한 선교사의 말대로 아무 곳에나 털어놓은 자신의 분비물에서 극독초가 자라면, 양들이 그것을 먹고 잘못되기라도 하면... 양치기는 그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머리에서 떨쳐버리려 애썼지만, 그보다는 선교사가 거짓말을 했을 리 없다는 생각을 하는 편이 훨씬 쉬웠다.
양치기는 생각했다. 양 몇 마리가 죽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저 수다쟁이가 그게 내 잘못이라는 사실을 누구에게 말하지만 않으면 된다. 그렇지만 저 수다쟁이가 마을로 내려가서 내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지? 불안감을 이길 수 없었던 양치기는 동틀녘에 선교사를 죽였다. 양치기가 수다쟁이라고 생각한 선교사는 끅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었다.
선교사의 말대로 양치기가 땅에 뿌린 씨에서 정말로 극독초가 자랐을까?
결국 그의 분비물에서 맨드레이크가 자라기는 했다. 선교사가 속했던 수도회에서 돌아올 때가 지난 선교사의 행방을 추적한 끝에 양치기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양치기는 신앙이 있었지만 교수형을 당했다. 광장에서 수치에 떨며 자기의 죄를 고하고 뛰어내렸다. 축 늘어진 하반신에서 갖가지 분비물이 섞이어 뚝뚝 떨어졌다.
이처럼 맨드레이크는 목매달아 죽은 사람에게서 떨어진 분비물로 말미암아 생겨난다. 숨이 붙어 있는 동안의 분비물은 아무 의미가 없다. 따라서 맨드레이크 싹을 틔우려면 씨주머니로 쓸 남자가 숨을 완전히 거둘 때까지, 분비물이 다 떨어지고 마를 때까지 매달아두는 것이 유익하다. 모 마녀회에서는 이를 땅을 저주로 수태하는 것으로 풀이하는데, ‘관점’으로서 소개할 뿐, 탁월하거나 적절한 시각은 아니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