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28일 목요일

시인


정말로, 정말로 먼 길을 떠나온 기분이 들었다.

극심한 피로를 느끼며, 나는 광장이라 예상되는 곳에 서서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자료 속에서나 마주했던 옛 국가, 옛 도시의 풍경이었다. 첫 시간 여행인 탓에 정신이 매우 혼란스러웠지만 훈련받은 대로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차렸다. 곧 귓속에 심어둔 번역기를 통해 고대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가 들리기 시작했다. 과거에 왔으니 이 피로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과거 사람들이 자주 찾던 그것, 커피를 찾아 떠났다.

잃어버린 작품을 찾아서. 나는 젊은 문학 연구자다. 옛 사람들이 ‘그때쯤이면 문학은 사라지겠지’라고 생각하던 시대에서 나는 문학 연구를 하고 있다. 문학계에서는 나를 농담 삼아 ‘광부’라고 부른다. 저 역사의 깊고 깊은 시간을 따라 올라가, 자료를 파내고 파내어 사라진 줄 알았던 작가들의 작품을 발견해내기 때문이다. 왜 그러쥐면 한 줌밖에 안 될 학계에 발표하기 위해 이런 짓을 하는 걸까? 나는 그저 문학에 미친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는 캄푸스가 남긴 말 중 하나인 “시인은 미래에서 오는 존재다.”라는 말을 나도 모르는 새에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문학에의 미침으로 인해 나는 마침내 금단의 영역에까지 발을 들여놓고 말았다. 대문호 캄푸스가 마음에 안 든다며 불태워버렸다는 원고를 소실되기 전에 읽어보기 위해 그가 생존하던 시대로 넘어온 것이다. 캄푸스의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하나이자 당대 가장 권위 있는 평론가 중 한 명이었던 카에이로가 “캄푸스가 남긴 최고의 시는 바로 그가 불태워버린 「단두대 위에 선 생각」이라는 장시다. 그는 그 시를 불태워버림으로써 대문자 시에 가장 가까운 시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 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별이 사라진 뒤에도 우리의 하늘 위에 남아 있는 별빛처럼 그 시를 기억한다.”라고 말년의 회고록에 밝힘으로써 세상에 알려진, 그 이름만 남은 시를 찾기 위해 나는 시간을 거슬러 왔다. 이러저러한 경고, 주의 사항을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들으면서 말이다.
“절대로 타임라인을 망가뜨리는 일을 저지르지 마십시오. 시간 여행자의 행동은 그 시대에 수없이 반복되는 일상처럼 지극히 사소한 것이어야만 하며, 절대로 사건이어서는 안 됩니다. 미래 세계에 큰 변화를 줄 만한 돌발 행동을 막기 위해 시간 여행자는 ‘시간역설의 유령’으로부터 24시간 감시당할 겁니다. 당신으로 인해 ‘세계가 변화되고 있다’는 기운이 감지되는 즉시 그 나노 유령들은 당신을 추적할 겁니다.
또 한 가지. 당신의 여행 비자로는 일주일간 체류가 가능합니다. 체류 마지막 날 정해진 시각에 ‘승무원’을 만나지 못한다면 이 시대로 돌아오지 못할 수 있으니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환전을 넉넉히 해두시고, 계획된 소비 외에는 지출하지 마십시오. 방금 제가 알려드린 내용을 이해하셨습니까?”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일이었을까? 나는 캄푸스가 26세이던 시대로 왔다. 그의 전기에 따르면 그는 아직 문단에 이름을 제대로 알리지 못했고, 그로 인한 우울감에 깊이 잠긴 채 불면의 나날을 지속해왔다. 삼일 밤을 지새운 뒤 그는 내가 있는 이 카페로 올 것이었다. 그는 커피 한 잔을 주문한 채 마시지도 않다가, 불현듯 종이와 펜을 꺼내어 「어느 비틀린 날의 몽상」을 쓸 것이었다. 그는 그 시로 문단의 찬사를 받으며 데뷔함과 동시에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갈 것이었다. 그리고 후일 카에이로에 의해 밝혀진 것이지만, 이날은 그가 불태워버린 장시를 시작하는 날이기도 했다. 어쩌면 나는 그 장시의 초고를 보게 될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커피 한 잔을 주문한 채 가만히 그를 기다렸다. ‘살아 있는’ 그를 실제로 보게 되면 어떤 기분이 들까? 살아 있는 거장을 만난 것에 대한 놀라움? 훗날 최고가 되는 신예를 가장 처음 발견했다는 즐거움? 의외로 풋풋한 면모가 있었다는 것에 대한 흥미로움? 예상대로 어둡고 괴팍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의 확인으로 인한 따분함?

그는 오지 않았다. 전기에 따르면 그는 밤을 샌 뒤 정오가 조금 지났을 무렵 이 카페에 도착했어야 한다. 카페 내부를 몇 번이나 둘러봐도 그는 없었다. 대낮부터 예술과 사랑에 대해 떠드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무언가가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전기에 꾸며낸 부분이 있는 것일까? 나는 실망감과 심심함을 동시에 느끼며 주머니를 뒤적여 펜과 종이를 꺼냈다. 캄푸스를 기다리며 그의 시 「어느 비틀린 날의 몽상」을 기억나는 대로 한 줄 한 줄 적어 내려갔다. 몇몇 구절은 기억이 나지 않아 한참을 생각하고, 쓰고 나서야 틀렸다는 걸 알게 되어 단어 몇 개는 두 줄을 그어 고쳐두었다. 기억에 의존해 시를 다 쓰고 난 뒤에 나는…… 어떤 이상한 기분에 빠졌다. 시가 아니라 그 시를 적은 종이의 이미지가 너무나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잠깐만. 이것은 그의 문학관에서 보존되어 있는 초고 이미지와 똑같았다. 변색 등 자잘한 훼손만 없다 뿐이지 내용과 필체는 캄푸스의 원본과 똑같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내 머리에 문제가 생긴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나는 오늘 여기에서 어떠한 문제로 인하여 내가 있던 시대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거나, 혹은 돌아가지 않기를 ‘선택하게’ 되는 것일까? “어느 비틀린 날”이라는 것이 실은…… 내가 캄푸스였던 것일까? 내가 연구했던 캄푸스가 바로 나 자신이었던 것일까?
아니,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캄푸스를 연구하던 ‘나’란 무엇이란 말인가? (아니, 반대로 내가 연구하던 캄푸스는 무엇이었냐고 자문해야 하는 걸까?) 만약에 내가 지금부터 캄푸스가 ‘되는’ 운명이라면, 나는 이제 「단두대 위에 선 생각」이라는 장시의 초고를 써 나가야 할 텐데, 그와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캄푸스일 리가 없다. 더군다나 내가 캄푸스라면 카에이로의 존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는 스무 살 때부터 캄푸스와 알고 지낸 사이인데 말이다. 아니, 잠깐만. 설마.

정말로, 정말로 먼 길을 떠나온 기분이 들었다.





*팀 파워스, 『아누비스의 문』에서 차용.

2019년 11월 26일 화요일

오게 두어라: 부동층 (19년 11월 다섯째 주)


"Lich Queen Mei" BY VanHarmontt

PIMPS 시즌2를 마치면서, 11월 다섯째 주에는 향후 남한과 세계의 정치를 크게 좌지우지할 내년 21대 총선의 키 플레이어, 민주주의 대축제인 선거판의 영원한 숙제이자 주인공, [부동층]을 다룬다. 부동층이란 뜰 부浮 자를 써서 어느 한 편에 마음을 붙박지 않고 이리저리 떠다니는 투표층을 뜻한다. 언뜻 아니 부不 자로 혼동되어 ‘움직이지 않는 층’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실은 유동층과 그 의미가 같은 단어이고, 흔히 고정층의 반대말로 쓰인다. 선거는 고정층을 단속하면서 부동층 표심을 잡아야 이긴다고들 한다. 30.5에 20.5를 더해 51을 만든다는 얘기. 이리저리 떠다니는 부동층의 기묘한 균형감각은 ‘좌-우 사이에 중도파가 있다’는 식의 2차원적 착시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그리고 그것이 부동층 본인들의 판타지이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부동층에게도 움직이지 않는 부분이 하나 있다. 그것은 믿음의 없음이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뜻이다. 부동층에게 있어 선거란 ‘우리편 이겨라’가 아닌, ‘이기는 편이 내 편, 진 편은 너네 편’인 싸움이다. 그런 종류의 참여로 무슨 재미를, 열광과 낙담을 느낄 수는 없다. 이들은 선거로부터 단지 ‘효과’를 추구할 뿐이며, 선거에 참가하는 이들 중 이들보다 더 ‘선거를 통한 변화’의 요체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는 이들은 없다. 특정한 종류의 집단 인사권을 발동시키는 일일 뿐인 선거 제도가 민주주의의 총화로 상찬되는 데 대한 냉소적인 회의감이, 선거가 실은 정치로부터 대중을 소외시키는 수법으로 작동하고 있음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자각이, 이 부동층을 사로잡고 있다. 무엇보다 ‘저 새끼들만은 절대 안 된다’를 통해 민주주의의 가치를 규정하는 고정층과 비교하자면, 부동층은 ‘그런 건 믿지 않는’ 이들이다. 저 개새끼들과 이 개새끼들 사이의 차이를. 이들에게 있어 정치란 일어날 일(아마도 우리가 선거만으로는 절대 통제할 수 없는 어떤 힘들에 의한)의 연속적인 일어남에 불과하며, 선거란 그러한 어차피 일어날 일들을 대표할 얼굴들을 바꾸는 일일 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얼굴에 상당히 신경을 쓴다는 점에서, 아예 선거판에 끼지 않는 기권층과 이들은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이다. 이들에게 정치는 하나의 끝나지 않는 연극이고, 정치인들은 배우들이며, 선거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승리자가 되는 가장 쉬운 길은 패배자를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들보다 더 잘 이해하는 이들 역시 없을 것이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패배자는 누구인가? 당선인이다. 부동층은 자신들이 무엇보다 ‘해임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것으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이들은 어딘가에 뭘 걸어 보고 싶다기보다는, 도박판의 승부를 조정하는 진정한 주인, 균형의 수호자가 되고 싶은, 테이블 바깥에서 무조건 이기고 싶은, 진정하고도 최종적인 정신-승리를 유지시켜 보려는, 무책임을 잘 배운, 자신의 내용을 갖지 못한 채 도착적 현실주의에 붙들린 주체, PIMPS가 추구하는 종류의 위기적 인간상에 꼭 들어맞는, 그림자다. 부동층은 ‘좌도 우도 아닌 중앙값’이 아니다. 좌인 동시에 우인 존재다. 진실로 이들이 선거의 최종 결과를 결정하는 그림자라면, 선거라는 양식 위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은 부동층의 이념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즉 선거는 이 대단한 평화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이념을 실현시키기 위해 수립한 제도이며, 선거는 이들의 이념 그 자체다. 그리고... 이들은 오늘날 전 세계적인 상황 관리의 실패를 맞이하고 있다.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이제 부동층은 그게 무엇이든 뭔가를 진정으로 믿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균형의 유지를 통해 실현시켜 오던, ‘조금 더 낫게, 다만 지금 이대로!’라는 이념을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만약 한 명의 정치인으로 볼 수 있다면 부동층 씨는 명백히 큰 위기에 빠져 있는 정치인이다. 이전까지는 다들 부동층의 마음을 사기 위해 노력해 왔으나 이제는 욕을 먹을 차례다. 그를 적대하면서 회유하고, 또 살게 하는 온갖 것들, 언론과 일터와 향락과 도박이 그 귀에 대고 속삭이고 있다. ...우리는... 굶주렸다. 네? 뭐라고요? 이 미증유의 위기를 과연 극복할 수 있을까? 솔루션은 없다. 이것으로 PIMPS를 두 번째 마친다. 세 번째는 없기를 바란다. 그간 읽어 주신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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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15일 금요일

트로이의 목마: 김여정 (19년 11월 셋째 주)



시간이 왜 이리 빠른지 모르겠다. 매주 연재를 다짐했건만 이제는 거의 월 단위로 늘어져 버렸다. 남한 최고의 정치혐오 콘텐츠를 생산한다는 자부심이, 나 자신의 정치혐오에 밀려 버렸기 때문? 정치 참 어렵다... 세어 보니 시즌1에는 총 11명을 다뤘다. 시즌2는 이 편으로 11명째다. 그러면 대충 타이밍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접을 타이밍... 마침 누가 어느 자리로 입각을 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온갖 썰들이 오가며 옥신각신, 다들 예민한 총선 페이즈로 돌입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누굴 함부로 다루기(PIMPS는 그 누구도 함부로 다루지 않습니다)도 위험하다. 지금까지 엥간한 정치인들에게 다 솔루션을 줬다. 국내에서 남은 이를 꼽자면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 정도인데, 그쪽은 어차피 알아서 열심히 하는 편이고, 안 그래도 너무 화약고라 세간의 너무 큰 관심은 부담스러운 PIMPS의 입장에서는 곤란하다. 이번 주 대상으로 고려해 본 다른 사람은 하태경과 오신환. 하지만 문재인도 나온 판국에 급도 안 맞을뿐더러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정도 안 가는 녀석들... 시즌2의 종료를 앞둔 시점, PIMPS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시야를 넓게 가져가면서, 북조선의 조선로동당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 김여정(the 백두혈통)을 다룬다. 이쪽은 다른 의미에서 위험하긴 한데 문재인이 탄핵이라도 당하지 않는 이상, 뭐 별일 있겠나? 공안과의 자비를 빈다...

언제나 기적의 균형감각을 추구하는 PIMPS의 시선을 잡아끄는 차세대 정치인, 김여정은 비록 선출직은 아니지만 내 또래 중에서는 세계적으로 가장 잘나가고 있는 정치인이라 봐도 될 것이다. (두 번째는 미국의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 언제 둘이 한 번 만나도 좋겠다.) 작년, 김여정이 맵시 있는 차림새로 방한해 턱을 비스듬히 쳐들고 공항... 기차역... 서울... 청와대를 활보했던 일은 정말 신선한 충격이 아니었던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좌우와 여남, 소노 모두의 관심이 약간 저속할 정도로 폭발해서는 사진을 마구 찍어 주고... 특히 정치로부터 대체로 자신들을 소외시킨 상태인 남한의 젊은이들에게, 그 장면들이 주는 느낌이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정치인은 좌우지간 인지도가 깡패다. 깡패로 치면 김여정은 세계구에서도 악명 높은 로켓맨(세계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금발 깡패에게 나이를 갖고 패드립을 쏟아부을 수 있는 최고 crazyguy)의 오른팔이자 친동생, 이웃 나라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고 그보다 먼 나라들에서도 알아주는 그런 깡패(참모형)다. 우리가, 각기 이천만-1억2천만-13억 이웃 나라의 무수한 정치인들 중 아는 이는 도대체 몇 명인가? 아마도 10명 내외일 것이고, 김여정은 거기에 껴 있다. 내 또래 우리의 하찮은 이름들 중 몇 개가 그렇겠나? 정치인이라는 직업을 떠나면 아이돌 정도밖엔 없을 것이다. 그런 김여정을 위한 솔루션이 필요한 까닭이 있다면?

정치인에게 있어 인지도가 대단한 자원인 것은 그들이 민주주의 체제에서 선거라는 방식으로 심판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만약 김여정이 압도적인 인지도에도 불구하고 그걸 사용할 일이 딱히 없다면? 이대로 오빠의 만년 비서로 머무르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면? 과연 일각의 예측대로, 김여정은 쿠바에서와 유사하게 오빠로부터 징검다리 수평 승계를 받을 수 있을까? 김여정이 차차차..차차기 통일 반도의 대통령으로 밀어지고 있다고 하는, 어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느낌의 소문이 돌고 있는 실정은? 자, 김여정을 위한 전략은 예전에 다 짜 놓았다. 그는 장점인 동시에 단점인 세 가지 요소를 쥐고 있다. 1) 혈통, 2) 명성, 3) 젊음. 이 셋을 장점으로 구부려야 한다. 상당히 급격한 민주화를 이룬 편인 남한, 북조선보다야 낫다지만 그래도 전근대를 아직 완전히는 벗어나지 못한 이 나라 정치판에서도 혈통은 당연히 중요하며, 혈통에 대한 수요는 분명히 있다. 특정 계층에는 아직 혈통이 어필하기 마련, 좋은 혈통이면 물론 좋지만 적의 혈통이라면 곤란, 그러므로 그의 혈통을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첫째 솔루션은 탈북이다. 탈북한 김여정이 받게 될 어마어마한 세계적 관심, 악명을 명성으로 바꿀 다음 솔루션은 정치 유튜버 데뷔. 다이아 수저 내던지고 오빠한테 재떨이 집어 던지고 나왔다는 컨셉으로 이런저런 정견과 사견을 발표하며 남한 사람들과 소통하고 자금을 마련한 뒤, 젊은 피 포지셔닝을 바탕으로 정무 경험을 내세워 안철수를 누르고 ‘제3세력’의 대표 얼굴로 나선 다음 김종인을 참모로 영입하면? 80년대생 기수와 80대 러닝메이트? 청년 정치 청년 정치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는 한국 정치에 이보다 천벌 같은 청년 정치도 없을 것. 이거는 이 자체로 이미 대권 로드맵이다. 폭풍이 불어닥치는 예감? 목표는 통일? 판사님, 저는 이 문서를 작성하지 않았습니다...

※추천 아이템: 마이크 좋은 거, 멋진 글씨 전향서, 몇 가지 개인기와 유행어.

2019년 11월 6일 수요일

기괴하고 엉뚱한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 그리고 그의 탄생에 관한 노트 ― “머리 수집가” 데마노르

데마노르는 적어도 800년 이상 살아온 인간 주술사다. 그는 지적 생명체의 머리를 수집하는 자이며, 오직 그 일에만 관심이 있다. 그는 관심이 있는 지적 생명체를 발견하면 목숨이 끊어지지 않는 주술을 건 뒤, 머리를 잘라 투명한 유리병에 담아둔다. 그는 그 머리를 자신의 집에 진열한다.

바깥에서 보면 그의 집은 여러 시대를 상징하는 건축 양식으로 만든 여러 건물들을 ‘어울리지 않게’ 마구 쌓아 올린 탑처럼 생겼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제대로 된 바닥 따위는 없고, 구불구불 휘어진 기나긴 계단이 지하 밑바닥까지 이어진다. 그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 그 집의 주인이 800년 동안 수집한 머리들이 내지르는 아우성을 들을 수 있다. 머리들의 종류는 다양하다. 어떤 머리는 왕관을 쓰고 있고, 잘 다듬은 수염에서도 기품이 느껴진다. 밀짚모자를 쓴 어떤 머리는 뙤약볕에 오래 노출된 듯 새카맣게 탄 얼굴이다. 눈 감은 어떤 머리는 미사보를 쓰고 있다. 또 어떤 머리는 새의 깃털로 만든 관을 쓰고 있다. 이처럼 인종, 성별, 노소, 언어, 귀천, 그가 ‘진짜로 살았던’ 시대 등이 저마다 다른 얼굴들이 한목소리로 절규하며 방문객을 맞이한다.

이 주술사가 살아 있는 머리를 모으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는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 이야기를, 그 유일한 인생을 살아 있는 오브제로서 가지고 싶어 한다. 때문에 데마노르는 어떤 머리와의 대화가 지루해지면 다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까지 그것을 벽장에 두고, 새로운 이야기-인생을 들려줄 머리를 찾아 집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산 채로.

그는 리치가 아니지만 새 육체에 자신의 영혼을 담는 법을 알고 있어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으며,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육체를 전전해왔다. 현재 그의 육체는 말라 비틀어진 노파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는 곧 새 육체로 ‘이사해야’겠다고 생각 중이다. 그는 당대의 이름 높은 악인의 육체만을 원하는데, 이는 그런 자의 육체만이 자신의 영혼을 담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오래 살아온 탓에 여러 국가의 언어와 여러 시대의 성조, 뉘앙스 등을 사용한다. 당대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고어 혹은 사투리로 들릴 것이다.




*노트

지난 티알피지 세션에서 즉흥적으로 등장한 인물이다. 나는 그에 관해 말하며 온종일 유튜브만 보는 사람을 생각했다. 그는 순수한 개인적인 악인이다. 그의 관심을 끌지 않거나 심기를 불편하게만 하지 않으면 그와 마찰을 빚을 일은 없다.

기괴하고 엉뚱한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 그리고 그의 탄생에 관한 노트 ― 기괴하고 엉뚱한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 그리고 그의 탄생에 관한 노트에 관하여

이 연재물은 저와 제 친구들이 RPG 중에 만난 캐릭터들, 또는 제가 개인적으로 상상한 캐릭터들 중 괴이하거나 우스꽝스러운 이들에 관해 다루고 있습니다. 여러 장르의 인물이 다뤄질 수 있고, 클리셰적인 면모와 개성적인 면모가 고루 섞이는 것을 지향합니다.

이 연재물을 읽는 이들은 자신의 그룹이 즐기는 RPG나 소설 등에 이 캐릭터들의 면모를 표절할 수 있습니다.

연재 주기는 따로 없습니다. 그때그때 떠오를 때마다 올립니다.

2019년 10월 30일 수요일

사이버낚시꾼

낚시를 왜 하는가, 라는 물음에 낚시꾼들은 저마다 다른 대답을 내놓겠지만 저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낚시란 인간이 자연 앞에 정면으로 서는 일이며, 이 대립의 무게추가 바로 물고기입니다. 물고기는 소리에 예민하다는 정설에 따라, 물고기가 낚이기 전까지 고요, 또는 숨 죽인 긴장이 이어집니다. 이 인내는 상호적입니다. 인간만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또한 인내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창한 날 저수지에 개구리밥이 지천으로 널려 있고 물기슭에 이파리 무성한 나무들이 저수지 쪽으로 몸을 기울여 그늘을 만들고 있습니다. 어느 면으로 보아도 물고기가 있을 법한 풍경입니다. 이런 곳에서 물고기를 내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인간은 계속해서 캐스팅을 시도합니다. 반복되는 죽음 속에서 자연은 인간이 수면 아래로 보내는 유혹을 참아내는 일을 학습합니다. 그 긴장과 길항을 낚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략과 인내, 그리고 성취. 하지만 그 스포츠를 위해 물고기의 입이 찢어져야 하는 걸까요? 물고기의 대가리가 토막 나야 하는 걸까요? 허탕을 치는 당신의 발걸음이 무거워져야 하는 걸까요? 허구한 날 바깥으로만 나돌아야 하는 걸까요? 저는 이러한 불합리와 비윤리 등을 점진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으로 사이버 낚시를 제안합니다. 사이버 낚시에서 플레이어는 자신의 아바타를 통해 스크립트로 직조된 사이버 자연 앞에 정면으로 서게 됩니다. 플레이어는 실제 낚시와 똑같이 낚싯대와 미끼를 선택하고, 현실에 존재하는 어장을 모델로 만든 사이버 어장을 찾아 사이버 낚시를 할 수 있습니다. GPS맵을 따라 보트를 타고 포인트로 이동하면, 화창한 날 저수지에 개구리밥이 지천으로 널려 있고 물기슭에 이파리 무성한 나무들이 저수지 쪽으로 몸을 기울여 그늘을 만들고 있습니다. 물론 사이버 낚시에서도 사이버 자연과의 대립은 발생하며, 이 길항 속에서 사이버 물고기를 낚을 수도, 또는 허탕을 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디에나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감각이 혁신입니다. 나는 여기(방구석)에도 있고 저기(어장)에도 있습니다. 사이버 낚시터로 떠나면 다리가 아프지 않습니다. 기름 값도 나가지 않습니다. 물고기 또한 낚싯바늘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합니다. 플레이어는 사이버 낚시를 통해 진짜 물고기를 얻을 수는 없고 진짜 상금을 거머쥘 수도 없지만, 사이버 머니를 벌 수는 있습니다. 사이버 머니를 모아서 어디에 쓰냐고요? 사이버 장비와 사이버 의상을 구매하는 데 사용합니다. 사이버 낚시터에 접속되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현실의 자신보다 사이버의 자신이 자아와 훨씬 더 강력하게 링크되는 것은 당연하므로 방구석에 처박힌 현실의 내가 입을 옷보다는 사이버의 내가 입을 옷이 훨씬 더 중요한 것 또한 순리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저는 이렇게도 생각합니다. 사이버 낚시를 하면 현실의 물고기는 다치지 않지만 사이버 물고기는 여전히 다칠 위험이 존재한다고. 반복되는 사이버상의 고통이 사이버 물고기들을 진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이 고통은 플레이어의 시간 감각을 파괴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한번 시간 감각이 파괴된 이는 한정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일이 한없이 무의미하게만 느껴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이버 낚시터에서조차 저는 사이버 물고기를 잡은 뒤 릴리즈를 해주고, 현실의 흔들의자에 앉아 충분한 휴식을 통해 일상성을 회복하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2019년 10월 27일 일요일

모두를 행복하게: 쟁 니 (19년 10월 넷째 주)



PIMPS는 패배주의와의 정면투쟁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 정치 과몰입으로 나를 몰아세운 이 사회 덕분에 영 힘들었던 두 주를 거르고, 시월 넷째 주는 우리의 ㄷㅌㄹ 쟁니를 다룬다. 내가 예전부터 非文이어 왔지마는, 앉아서 서서 욕을 욕을 하면서도 국가 지도자의 [존함]은 피휘하는 것이 또 우리의 빛나는 전통이다. 쟁니는 지난 두어 달 조국의 일로 집권 후 최대 위기를 맞는 듯했다. 결국 조국 사퇴 뒤 지지율이 회복세를 보이고는 있는데, 진작에 그랬으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도 들고, 현대 사회에서는 정치 행위의 핵심이라고나 할 ‘관리’가 참 안 된다는 생각도 든다. 이 정권의 최대 리스크 둘; 극렬 지지층과 극렬 반대층은 이 일을 계기로 서로 명분 부족의 억지를 부려대며 자신과 주변을 동원했고, 그걸 또 편들기 위해 욕하기 위해 좌우와 보혁, 민진과 좌좌가 편편에 편편/편편, 편/편으로 갈려 피차 명분 부족의 말다툼으로 빨려 드는... 맞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구조적으로 한 사람도 있을 수 없게 되는, 누구나 조금은 억지를 쓸 수밖에 없게 되어 버린, 내가 느끼기에 지난 국면 한국의 공론장(이런 게 정말 있다면)은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적대적 공생과 기생이 마구 뒤엉킨 무능의 대향연, 엉망 개박살이었다. 정녕 이것이...? 언론, 검찰, 교육, 민주주의, 정치, 계급, 대중, 진보... 그것이 무엇에 대한 것이었든 하여튼 뭔가가, 모두의 어떤 무기력과 신경증이 폭로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난 시간 누구나 받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아니면 말고...) 우리 앞에는 다시 여러 과제들이 제출되어 있다. 그 과제들은 우리에게 옛 보수정권 때와는 차원이 다른 깊이와 입체적인 사고를 요구하고 있으며, 그것은 PIMPS에게도 그렇다. 결국 이 타이밍에 다룰 만한 사람은 쟁니밖엔 없다는 결론. (고백하자면 지난주에 엘리자베스 워런 편을 쓰다가 말았다.) 본래 ㄷㅌㄹ의 ‘그 일’을 맡은 사람은 탁 씨였는데, 돌이켜 보면 그때부터 뭔가가 예견되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인사 문제를 두고 서로 썩 넉넉치 않은 명분을 쥔 채 생즉생 사즉사의 싸움으로 내몰리는 고통스런 광경? 사람이 문제다? 흐트러진 지지율이야 어떻게든 다시 그러모을 수 있겠지만 불안 요소는 부유층의 큰 증가, 보수권이 극우화되고 중도파는 결집되지 못하는 사이 BH가 직접 핸들을 우로 틀어 위기를 넘기려 하고 있다는 신호는 어렵지 않게 감지되고 있다. 대선 국면에서와 마찬가지 양상으로, 이 또한 총선을 위한 훼이크(더블 훼이크?)일까? 아니면 결국 ‘야 실제로 해 보니까 이거 안 돼’인 걸까? 과연 이대로 참정 시즌2의 그림(여기저기서 고사 지내는)이 반복되는 것일까? 대마大馬를 다루자니 서두가 거창했다.

사실 ㄷㅌㄹ을 위해서는 깨작깨작 뭐 머리 밀고 안경 벗고 하는 그런 잔재주로는 안 된다. 이미 그 모든 일들을 거쳐서 그 자리에 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ㄷㅌㄹ이 이미지를 제고하겠다면, 천하를(좁은 천하지만) 흔드는 스케일, 한 명이 아니라 만 명을 죽였다 살렸다 하는 큰 계책이 요구된다. 최근 정치에 대한 흥미가 떨어진 거 아니냔 얘기까지 듣는 쟁니를 위해 PIMPS가 자신 있게 내놓는 특급 제안: 만났다 하면 히죽히죽, 쟁니에게 꾸준히 호감을 표시해 오던 재용과 의삼촌-의조카 맺기. 즉, 현대 의학 최전선에 누워 불멸의 꿈을 꾸고 있는 건희와 영혼의 의형제 결의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나치게 복잡해진 한국 정치를 한 방에 정리할 수 있는 특급 카드다. ‘국정 농단 연루’와 ‘탄핵 후 당선’이라는, 각기 정통성에 사소한(?) 흠결이 있는 재용과 쟁니에게 있어서, 호시탐탐 그들의 경제적-정치적 권좌를 노리고 있는 홍석현을 제끼기에 이보다 더 윈윈인 전략이 없음은 말할 것도 없고, 입으로 자유를 외치며 국가를 기업의 보조기관으로 묶어 두려는 우리 자유시장충들(정중히 사과드립니다)의,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자신들의 실패를 감추기 위해 끝나지 않을 그 규제완화 난동을 일거에 만족시킬 수도 있으며, 요즘 세계적인 국가 경영 트렌드(미·중 참조)인 ‘첨단기업의 재력-기술력과 결합한, 대중적 지지를 적정선에서 재생산해낼 능력을 갖춘 국수 포퓰리즘적 엘리트 과두정’의 수립도 물 흐르듯 가능해진다. 사회적인 힘들을 어떤 방식으로 한데 묶을 것인지를 언제나 고민하는 민주당의 공학적 정치 스타일에 딱 맞는, 이런 게 바로 모두의(대략 2/3의) 열 걸음 아니냐? 이 정도면 안철수부터 유승민은 물론이고 황교안, 홍준표 선까지도 쉽게 정리된다. 그리고 다음 스텝: 건희와 한날한시에 죽기로 맹세한 이상 쟁니도 영원히 살아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그러면 임플란트 따위 문제가 아니라, 삼성병원이 나서서 초혁신적인 초의료기술을 총동원해 쟁니를 사이보그로 만들어 줘야만 한다. (못하겠다면 만들어 줄 때까지 매주 토요일 모이면 되고.) 대외적으로 그보다 큰 산업기술력의 홍보가 없을 것은 물론이요, 포스트-쟁니 문제와 관련된 극렬 지지층의 이런저런 자해적 활동도 ‘건강하게’ 정리된다. 한편 86세대를 뒤늦게 벤치마킹할 셈인지 자기들도 무슨 반독재 투사가 되어 보고 싶은 듯한 우파들, 자기들도 탄핵이란 것을 해 보고 싶어 안달이 난 그들이 BIG BROTHER를 그토록 간절히 원하고 있으며 그게 소원이라면? 그렇게 만들어 주면 된다. 이건 마찬가지 의미에서 왼쪽 마이크들에도 좋은 일로, 모든 것을 욕하는 것으로 모든 일을 땡치고 싶은 사람들이 그냥 맘 편히 모든 것을 욕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길이기도 하다. 하여튼 모두가 인터넷 같은 데서 욕만은 맘껏 할 수 있게 해주면 되고, 그걸로 모두가 넉넉히 만족할 것이다. 좌우 전 인민의 유튜버화를 통해 영애가 못다 이룬 창조경제의 꿈이 이뤄진다면 그런 것이 바로 호혜, 차세대 먹거리 산업으로 세계 경제를 선도하는 뭐 그런 거 아닐까? 이렇듯 남쪽을 평정한 다음 이재용이 다시 김정은과 의조카를 맺도록 주선하여 반도 최고 권력의 두 가문 3대를 한데 모으기까지 한다면? 모두가 행복해진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일을 두고 하는 얘기다. 쟁니의 업적이 얼마나 길이 남을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PIMPS는 항상 최선의 길을 제시한다. 미래나 뭐 그런 건 신경 안 쓴다...

※추천 아이템: 니의 유전자를 통해 양성한 슈퍼 특전사 부대(검·경·광장의 제압), 개와 손주와 여사님이 나오는 쟁니 조연의 요리 육아 애견 리얼리티(공중파 제압), 이낙연 하차 후 새로 영입된 MC총리 박나래가 진행을 맡는 청문 서바이벌 프로듀스 국무회의(케이블 제압), 재용&정은 쌍왕자TV 개국(유튜브 제압).

2019년 10월 26일 토요일

조랑말 속달 우편 배달부

내일까지 반드시 목적지에 도달해야 한다는 편지를 맡았고. 이 편지에 어떤 중요한 글이 쓰여 있는지 나는 모르고. 선서를 위한 배달부용 성서의 겉표지에 손을 얹었고. 배달 중에는 술과 도박과 색을 금하겠다고 하나님께 맹세했고. 맹세에 따라 아흐레간 열심히 달렸고. 역사에 다다르기 전까진 쉬지도 않았고. 내일 새 조랑말을 타고 조금만 더 달리면 될 것 같았고. 오늘따라 잠이 오지 않아 뒤척였고. 그래도 잠들 수 없어 딱 한 잔만 하고 잠들기로 했고. 펍으로 가니 시끌벅적 술꾼들이 많았고. 총알로 싸구려 버번 위스키 한 잔을 사 마시는 이들이 있었고. 그 총알들을 모으면 총구에서 끝없이 불을 뿜을 수도 있을 것 같았고. 나도 바에 앉아 샷 하나 주문했고. 바로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섰고. 펍을 나가려는데 술에 절은 턱수염 하나가 나와 부딪혔고. 턱수염이 넘어지며 도박 중인 테이블 하나를 망가뜨렸는데 큰판이었고. 하필 도박판을 벌이던 이들 중 하나가 이 지역을 주름 잡는 거물이었고. 분위기가 참 험악해지고. 어떡할 거냐고 묻는데 나는 잘못한 게 없고. 턱수염은 일어날 줄을 모르고. 결국 내가 어떻게 책임을 지면 되겠냐고 되묻고. 나보고 테이블에 앉으라고 하고. 벌써 나는 카드를 받아 들고 있고. 사실은 카드놀이 제대로 하는 법도 모르고. 칩 다 털렸고. 돈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고. 그만한 돈은 없고. 분위기 아까보다 더 어두워지고. 어쩐지 숙소로 못 돌아갈 것 같고. 그 편지가 전달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나는 모르고. 지금은 편지 걱정을 할 때가 아니라 내 걱정이나 할 때이고. 나는 잠이 안 와서 딱 한 잔만 하려고 했을 뿐이고. 오던 잠도 물러가야 할 상황에 이제야 잠은 밀려오고. 총구 앞에서 쩍쩍 하품이나 하고 있고. 드넓은 초원의 꿈이 펼쳐지고. 입에 샷 하나 들어가고.

2019년 10월 8일 화요일

상담사 고블린

아무 버튼도 누르지 않고 수화기를 든 채로 아주 오랫동안 그대로 있으면, 운이 좋은 날에는, 상담사 고블린이 전화를 받는다. 전혀 다정하지 않은 목소리로 묻는다.

어떻게 전화를 거셨나요?

그러면 나는 고민을 이야기한다.

상담사 고블린은 참을성 있게 사연을 들어준 다음 아무 해답을 주지 않고 전화를 끊는다. 고블린이 하는 일이 다 그렇지.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나아진다.

사실 상담사 고블린을 실제로 만난 적은 없기 때문에 그가 정말 고블린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은 없다. 그냥 내가 고블린이라고 믿고 싶기 때문에 그는 고블린이다.

기분이 나쁜 날은 고블린 떼를 상상한다. 경찰 고블린. 소방관 고블린. 발명가 고블린. 여행 칼럼니스트 고블린. 제복을 입고 뚱한 표정으로 태업에 매진중인 고블린. 상태가 나쁠수록 많은 고블린을 동원해야 한다. 길을 건너는 고블린. 줄을 서는 고블린. 잘 나오지 않는 펜을 흔들다 잉크를 뒤집어쓰는 고블린. 옷을 사 입는 고블린. 임대차 계약서에 지장을 찍는 고블린. 벽에 머리를 찧는 고블린. 순간이동하는 고블린. 커피를 내리는 고블린. 유리창에 푸르고 투명한 세정제를 뿌리는 고블린. 흙장난하는 고블린. 의자를 드르륵 소리 내며 끄는 고블린. 정원수를 파내고 뿌리 밑에 숨겼던 것을 찾아내는 고블린.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고블린. 전화를 받는...... 상담을 하는 고블린.

오늘 상담사 고블린은 ...... 아주 늦게 전화를 받았다. 나는 단 한 마디를 했다.

“제 조수가 미친 것 같아요.”

평소라면 그대로 전화를 끊었을 상담사 고블린은 전처럼 퉁명스러운, 하나도 다정하지 않은 목소리로 단 한 마디만을 말했다.

“그것 참 큰일이군요.”

2019년 10월 5일 토요일

웃으면 된다고 생각해: 박용진 (19년 10월 첫째 주)




도대체 내가 왜 이걸 쓰고 있는 거지... 시대의 명령이냐? 아닌 것 같은데... 긴가민가한 상태로, 이번 주 PIMPS는 우리 회사 부장님을 쏙 빼닮은 민주당 초선의원 박용진을 다룬다. 그간 최소 장관급 정치인들만 다뤘기 때문에 갑자기 격이 훅 떨어지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만 정권의 분수령이 될지도 모를 이 시점 박용진은 상당히 중요한 사람이다. 박용진이 누구인가? (이 뒤로 재미없는 얘기☞) 분류하자면 그는 진보적 실용주의자다. 약 20년 전 민주노동당에서 정치를 시작한 박용진, 진보신당을 탈당해 민주당에 합류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이다. 지난날 사분오열된 좌파들이 선거를 앞두고 온갖 텐트 얘기로 날을 지새던 난세에, 그는 민주당까지도 포함하는 초대형빅텐트(‘대연합’!)에 기울었다. 노·심의 뒤를 이을 만하다 여겨지던 촉망받는 젊은 진보 정치인이 민주당으로 가 버린 일은 남은 사람들을 꽤 낙심시켰고, 당연히 변절자 소리도 들었다. 괘씸한 개량 녀석... 민주당에 간 뒤에는 비주류라는 위치 덕이었는지 당내 극한 갈등 가운데서 줄기차게 대변인직을 맡다가 20대 총선을 앞두고 김종인에게 깜짝 발탁, 원내에도 진출했다. 의원이 된 뒤에는 삼성 문제를 꾸준히 팠으며, 유치원 3법으로 얼굴과 이름을 크게 알렸다. 작금의 조국 임명 국면에서는 비판적 입장을 냈다가 정권 지지자들로부터 욕을 엄청 먹었다. 관련해서 유시민과의 잠깐 논전은 그 수준이 좀 낯간지럽긴 했지만, 역사의 막중한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는 장면이었다. 리버럴 왼쪽으로서  정권에 속했다가 부침 속에 패장이 되어 좌파 근처까지 쓸려 나왔던 78학번 유시민은 文 정권과 함께 정파의 대변인으로 컴백했고, 민주당이 86세대를 추수해 간 직후의 황무지에서 좌파로 시작한 90학번 박용진은 10년을 버티다 혼자 민주당으로 들어가 또 10년이 되기 전에 초선의원이 되어 소장파 취급을 받는다. 유시민은 좌파한테 욕 먹을 게 뻔한데 당적도 없이 어용 지식인을 자처하며 정권의 입 역할을 도맡았고, 박용진은 정권 지지층에 욕을 먹으면서도 좌파적 민심(?)을 대변하며 당내 비판자 역을 자처했다. 이건 그야말로 대단들하신, 슬픔의 다크히어로들 아니신가? 한 번 꼬이고 두 번 꼬이고 세 번 꼬인 다이내믹 코리아의 정치판, 솔직히 좌파 입장에선 허탈한 웃음만 나오는 상황...

오늘날 그를 중요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비문(?)-민주당좌파(?)-실용주의자(?)라는 기묘한 포지셔닝 때문이다. 이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사람은 딱 한 명 더 있을 뿐(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건 미묘한 체크무늬 마이를 입고 벌이는 아슬아슬 줄타기다. 그게 되려면 말을 교묘하게 할 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핵심 메시지를 지켜내면서 시류를 읽는 감각도 있어야 한다. 몇 번 미끄러지긴 했어도 지금까지의 곡예는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박용진이라는 카드는 당장 보면 딱히 쓸 일이 없을 것 같지만 어쩐지 버릴 수는 없는 카드다. 위기 상황이 왔을 때 이걸로 어디? 하며 아크로바틱하게 자꾸 흔들고 싶은 것. 다가오는 선거제 개편과 연립 정권 국면까지 고려를 했을 때 그의 중량감은 여하간 더 높아질 공산이 크다. 실제로 권한이 주어졌을 때 무슨 짓을 할지 잘 모르겠을 정도로, 그 나이부터 이렇게 스케일을 크게 그리면서 정치하는 사람은 잘 없다. 그런데 그런 박용진이가 도대체 뭐가 문제냐? 좀 갑작스런 얘기지만 친구가 없다.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 김종인 옆에서 오랜만에 화색이 좀 돌았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다. 지금은 영 외로워 보이니 빨리 친구를 만들어라. 항상 미소를 머금고 있어도 우수에 찬 눈매는 감추기가 어렵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의 마니또라도 되어 보는 건 어떨까? 정 어려우면 임시로 손인형을 끼고 다녀도 괜찮을 것이다. 당연히 이름(영길이, 종인 Jr... 뭐든)도 붙여 줘라. 바쁘겠지만 시간을 짜내 취미로 복화술을 연습하는 것도 추천한다. 한 입으로 두 말 세 말 정도는 할 줄도 알아야 한다. 586이나 그 위 등등이 뭐라 할 때 욕을 해버리는 데에도 좋겠다. 그 다음은 범생이 같은 머리 모양 바꾸기. 도대체가... 지금처럼 한쪽으로 넘겨 특유의 시그니처 실루엣을 몇 십 년 유지하는 것까지는 좋은데(큰 꿈을 꾸는 정치인들은 다들 그렇게 한다), 더 이상 자신이 젊은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옛날엔 산뜻한 느낌 비슷한 게 있었지만 더는 아니라는 얘기. 그거가 정진석 머리(비열해 보인다는 뜻)다. 문재인과는 가르마를 반대로 타보겠다는 전략일까? 적당히 거리를 둬야 좋지만 너무 치우쳐서도 안 된다. 1) 모나지 않게 균형을 추구한다 2) 젊은이들과 호흡하기 위해 노력한다 3) 유일무이한 실루엣을 획득한다 의미에서 아프로 정도가 잘 어울리리라 본다. 대성공한 사례도 있으니 마땅히 본받을 필요가 있다. 거울을 볼 때마다 머리 터지게 심란했던 다사다난 진보 정치인 시절을 되새길 수도 있을 터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함께 김종인계였던 이언주, 저 끝까지 쭉 달려가 버린 그와도 좋은 대비를 이루지 않을까? 이언주 이야기까지 나오고 보니 이제는 완전히 지쳐 버린다. 박용진... 화이팅...

※추천 아이템: 좌파를 상징하는 조끼, 우파를 상징하는 나비넥타이, 나이를 감출 수 있는 화이트닝 크림. 

2019년 10월 4일 금요일

입출력의 건

“당신 앞에서 뭔갈 잔뜩 먹는 거요. 좋아하는 일이지요. 몇 번이고 봤으니까 당신도 알 거로 생각합니다. 잠시 나와서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당신이 로봇이기 때문만은 아니에요. 당신은 나의 연인이니까, 연인은 고민을 주고받을 수도 있는 관계이니까, 그리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는 비스킷 봉투의 겉면을 뜯고 비스킷을 꺼내 먹기 시작합니다.

“행성 컴퓨터는 이상한 일을 합니다.”

그는 비스킷 봉투를 아무렇게나 내버려둡니다.

“행성은 인간의 생각을 수집합니다. 인간의 생각을 데이터 조각처럼 변환시켜 끌고 온 다음 조립하지요. 어떻게 가능한지 나는 몰라요. 그보다는 언제부터 그랬는지가 더 궁금합니다. 난 그냥 기가 죽어버렸죠. 이러한 사실을 눈으로 보고 겸손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요. 무섭지 않아요? 우리의 생각이 휘발되기는커녕 어딘가에 남아 영구적으로 보존된다는 사실이. 보존만이 아니지요.”

그가 비타민 담배를 하나 가져와서 맛있게 피우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생각은 재현됩니다! 인간의 끝도 없는 온갖 생각은 저 행성에서 눈으로 볼 수 있게 재현된다니까요! 인간이 떠올리는 모든 것은 저장된 다음 행성 표면에 출현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은 신기루나 아지랑이가 아녜요. 만지려면 만질 수 있고, 가져오려면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존재해요.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과 똑같이 말입니다. 문제가 생깁니다. 누굴 죽이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고 합시다. 오, 이런 방금도 잠깐 생각하고 말았어요. 이제 어떻게 되겠습니까? 재현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굴 죽이는 일은 일어나게 되고, 그 누구는 저 행성에서 내 생각에 따라 죽습니다. 한 가족이 잠들어 있는 집에 불 지르는 장면을 그려본다고 합시다. 그 일은 그저 상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게 되어버립니다! 수도 없이 많은 이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누굴 죽이거나, 괴롭히거나 특정한 사람들을 학살하거나 역사를 뒤로 돌리고 물건을 부수고 하는. 감았다 떠지는 생각의 속성을 고려했을 때 아주 잠깐이겠지만, 폭력을 생각할 때마다 고통이 실재하게 된다는 것은 경악스러운 일입니다. 그 고통은 물론 원본인 우리에게 가해지는 것이 아니지요. 산물이며 모방인 시뮬레이션 실재자들에게 가해지는 것뿐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안 됩니까? 나의 동료들은 이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몰래 회의장을 빠져나온 것이지요. 우리는 아직 모성에 보고하지 않았어요. 화상 담당자가 나인 걸 알지요? 저 별의 존재를 아는 것은 이 우주선 여섯 명뿐입니다. 나는 저 행성의 존재가 공표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동료들을 설득할 작정이었지요. 하지만 무섭고 두렵습니다. 내가 말할 수 있을까요?”

이제 나는 넘칠 듯한 사랑을 담아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합니다.

2019년 9월 23일 월요일

격돌! 대권훈련소: 낙연/교안 (19년 9월 넷째 주)



9월 넷째 주 PIMPS는 현 시점 대권주자 지지율 1위와 2위에 빛나는 이낙연과 황교안 두 사람을 함께 다룬다. 둘을 묶는 것은 여야의 밸런스를 맞추는 공정한... 그런 뜻은 없고, 다른 뜻도 없고, 두 사람이 여러 가지로 서로 비슷한, 이대로는 별 가망이 없어 보이는 동병상련의 처지이기 때문도 아니고, 단지 서로의 이름의 자모를 뒤섞으면 서로의 이름이 되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먼저 역대 최장수 총리 등극 한 달을 앞둔 낙연. 낙연이 사실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다. 인물이 일단 호감상이고 기자-대변인 출신으로 말과 글에 능하며 정무적 능력도 검증됐다는 평가. 보통 약점이라고들 하는 이념적으로 애매하다거나 세가 없다거나 그런 것은 역으로 좋은 러닝메이트와 함께라면 큰 강점(온건함과 신선함)이 될 수 있다. 상상력이 미치는 한에서는 그가 다음 대통령이 되는 것이 가장 그럴싸한 그림이지만, 한편 그렇게 곱게 될 것 같지는 않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다이내믹 코리아 정치판에서는 모쪼록 가장 일어날 것 같은 일이 가장 있을 수 없는 일처럼 생각되기 마련으로, 아마 내 생각뿐 아니라 모두가 그럴 것이다. 분명히 낙연밖에 없는 것 같긴 한데... 도대체 누가 낙연을 진정 차기 대통령으로 믿는다는 말인가? 본인도 전혀 믿지 않는 눈치다. 자꾸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는 데서 그의 혼란스런 마음도 드러난다. 진짜 한번 해봐? 에이 주책인가... 아마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김무성도 비슷한 시기에는 지지율 1위(으스스한 사실)였다.

2위는 굳이 내가 말을 얹어야 할까 싶을 정도로 이미 잘하고(?) 있는 교안. 전 정부 마지막 총리 출신으로 동아시아 최초 스킨헤드 당의 스킨헤드 당대표라는 유례없이 역사적인 느낌으로 낙연을 바짝 추격하고 있는 상황. 현 국면 보수 주자들 중 교안의 강점은 적어도 웃기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삭발할 거란 소식을 듣고선 내심 쾌재를 불렀다. 삭발은 내가 손학규보고 하랬는데 왜 갑자기 자기가... 어쨌든 나의 내밀한 기대와 달리 막상 밀어 놓고 보니 그 두상이 아주 좋고 세간에서도 무슨 야성이 보이는 것 같다며 대체로 호평이다. 홍준표가 응원을 하다가 갑자기 겐세이를 놓은 데에도 이유가 있는 것. 김문수가 따라 밀며 뭔가 조금 우습게 되긴 했는데... (나는 김문수가 실은 전향하지 않았다고 믿는다.) 명절에 집에 갈 때마다 부모님께서 내게 머리 좀 깎고 오지 말씀하시던 그 생각도 났다. 머리는 명절이 되기 전에 깎는 게 통상적인 감각에 맞는다는 뜻. 열성 지지자들 눈물의 난입으로 도중에 중단되어 그냥 투블럭 느낌으로 위를 남겼어도 괜찮았겠다는 생각도 당연히 든다. 어쨌든 담당 선생님의 혼신이 담긴 스타일 연출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낙연으로선 교안과의 격차를 더 벌려야 한다. 교안과 격차를 벌릴수록 이 사람 저 사람으로 중구난방 흩어진 지지를 모을 수 있다. 그 첩경은 당연히 머리를 기르는 것이다. 곱슬머리이기 때문에 처치 곤란한 느낌을 주면 또 안 되기에 그 당연한 귀결은 ‘매직’이다. (안경을 딱 벗는 게 당연함은 이제 애독자 여러분이 더 잘 아실 것.) 또 지금도 약간은 먼 감이 없지 않아 있는 눈썹을 한 단계 더 정리하여 처진 끝을 올려 주고 사이를 더 넓히는 것도 좋은 방법. 양미간이 거의 이어지기 직전인 교안과 큰 대비가 될 것이다. 좋아하는 막걸리 같은 것도 좀 더 확확 호쾌하게 마시고, 끊었던 담배도 다시 피우는 모습을 매체에 노출해 전도사 교안의 바른 생활 이미지와 차별화한다. 좀 소박한 인상이기 때문에 피어스를 두엇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수첩? 수첩에 깨작깨작 뭘 적고 있는 것은 교안의 화려한 색소폰 연주와 쌍을 이루니 다른 의미로 괜찮다. 이렇듯 교안과의 대비를 가장 최우선으로 해야 함은 무슨 뜻인가? 낙연은 교안의 멱살을 콱 붙들 때에만 빛을 볼 수 있다. 다른 사람과 붙으면 아슬아슬하다. 자신의 러닝메이트로 유시민도 이재명도 다른 누구도 아닌 교안을 꽉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대한 교안과 가까이 지내라. 교안과 많은 사진을 찍어야 한다. 집무실로 교안을 불러라... 밖으로 교안을 불러내라... 교안네 집에 찾아가라... 교안의 교회에 찾아가라... 예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라... 말다툼을 해라...

교안의 경우 담당 헤어 선생님의 수익뿐 아니라 본인 지지율도 올라가게 하려면 그가 총리였다는 사실을 떠오르게 하는 모든 것을, 특히 낙연을 피해야 한다. 낙연과의 격차를 따라잡기 위해 수염을 기른다거나 하면 총리 대 총리의 프레임에 말려들고 만다. 절대로 낙연의 눈을 보지 마라. 만나자고 해도 거절해라. 교안은 자신을 자꾸 쫓아다니는 낙연을 뿌리치고 독자적인 이미지를 구축해야만 한다. 이때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할 한 가지는 절대 깡패처럼 보이면 안 된다는 점이다. 지금처럼 당 사람들이 다같이 밀면 특히 위험하다. 국민들이 우파의 순정을 몰라 주면 그때는 깡패가 되는 수밖에 없다는 건가? 본인만 현재 스타일을 유지하는 것으로 하고 나머지는 삭발 엄금, 이미 한 사람은 가발을 씌우도록 하자. 사람들은 깡패가 깡패일 때나 (구경을) 좋아하지 정치인이 된 깡패나 깡패가 된 정치인 같은 건 인기가 없다. 예전에 홍준표의 가죽점퍼가 모든 것을 망쳐 버렸던 일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본인도 이 정도는 아는지 최근 스티브 잡스 흉내를 냈던데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만 잘못하면 병자나 수도사, 그 비슷한 뭔가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우미관을 피하려다 요양병원이나 도심사찰, 스타트업처럼 되면 그것대로 곤란하다. 기왕에 머리를 민 황교안에게 내가 권하고 싶은 것은 대권보다 더 큰 그림이다. 머리를 밀고 안경을 썼던 초중량급 정치인을 꼽자면 가까이로 김구, 멀리 간디가 있다. 둘 다 실권은 못 잡았어도 역사에 남아 ‘민족 지도자’가 되었는데 저승에서 무엇이 부러우랴! 물레를 돌리거나 일기를 꾸준히 써도 좋다. 색소폰은 왜 요즘 안 불지? 그거도 좀 불자. 산이나 강에서 불면서 대중과의 접촉면을 늘릴 수 있는 좋은 아이템인데 썩히면 아깝다. 낙연을 꼭 피해 다닌다는 것만 유념하면...

2019년 9월 16일 월요일

명절 지나

이제 얼마나 됐지? 마당을 쓴 뒤 관리대장을 쓰다가 오랜만에 맨 앞장을 펼쳐 봤다. 창고가 열린 지는 3년이 되어 가고 있다. 쥐잡이가 보이지 않은 지는 6개월이나 7개월. 겨울 전엔 돌아올 것이다. 그끄저께 아침엔 개다리소반에 사과와 배, 밤, 송편을 올리고 향을 피웠다. 저번에 누가 내다 놓은 제기 더미를 뒤져 깨끗한 걸 추렸기 때문에. 없었으면 그렇게 차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송편은 그 전날 교정의 요정과 함께 빚었다. 반죽을 맡겼는데 형광 녹색이 되어 놓았다. 자기가 그렇게 여기저기 묻어나도 별 상관없다는 기색. 특별히 무슨 맛이 나는 것도 아니니 나도 별 상관없었다. 소는 콩. 요정이 한 개 먹어 보더니 자기는 앞으로 콩 송편 같은 건 안 먹을 거라 했다. 나도 한 개만 먹었다. 우리가 두 개를 만들었기 때문에. 송편의 송 자는 소나무 송 자다. 솔잎은 태풍에 쓰러진 담장 밖 소나무에서 따 온 것이었다. 그것은 이제부터 톱을 갖고 가서 치울 것이다.

2019년 9월 7일 토요일

포병은 전쟁의 신이다: 심상정 (19년 9월 첫째 주)



답답한데 심상정 얘기나 하자. 이미 주요 정당 대표급들을 다 다뤘기 때문에, 균형 잡힌 시각을 추구하는 PIMPS에서는 정의당 대표 심상정을 다루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심상정이가 누구인가? 심상정이 좌파 생활을 갓 스물 무렵에 시작했다. 그 나이 때 좌파 시작한 녀석들이 백 명이라 치면은, 지금 심상정이만큼 잘나가는 좌파는 심상정 혼자뿐이다. 어떻게 거기까지 갔느냐, 잘난 놈 제끼고, 못난 놈 보내고, 배신하는 새끼들 다... 죽인 건 아니고 하여튼 그것이 심상정이다. 만약에 좌파 그만뒀으면? 예전에 김종인(aka KINGMAKER)이 심상정더러 거기서 그러지 말고 그냥 진작 민주당 가서 어쩌고 저쩌고 했으면... 그랬던 적도 있는데, 더 나갔으면 더 나갔지 덜 나가진 않았을 것이다. 여하간 심상정은 좌파라는 이야기, 그 뭐 무슨 참좌파까진 모르더라도, 어떻게 그가 좌파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심상정은 그냥 좌파도 아닌, 육분칠열된 이 나라의 한 줌 좌파 중 다수를 그나마 중재하고 대표 비슷하게라도 나설 수 있는 좌파다. 그것은 그가 여기와 저기 사이를 잇는 소통의 연결고리가 되는 그런 식이라기보다는, 그의 (좌파에게는 매우 드문 종류의 덕성인) 강력한 카리스마로 밀어붙이는 일에 더 가깝다. 야 너 그렇게 하지 마라고! 서로를 욕하며 말싸움만 하지 결과적으로 아무런 정치 행위도 이뤄지지 않는 상황, 앞으로 쑥 나와서는 어 그러면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할게! 하는 것이 심상정식 ‘중재’다. 양쪽 얘기를 들어보니까 결국 이렇게 해야 돼, 내가 하란 대로 해, 책임은 당연히 내가 진다. 내가 하자는 대로 하기 싫어? 그럼 빠져. 못 빠져? 그럼 내가 빠질게, 불만 없지? 있으면 빨리 말하고, 없어? 땅땅땅. 그렇게 어? 어어? 하면서 심상정이 하자는 대로 하거나, 아니면 심상정이 거길 나오는 결과로 마무리된다. 그렇게 구는데도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계속 모여 있다는 것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가 어떤 핵심적인 명분을 수호해 내고(또는 이어지는 사건과 정세의 결과가 그로부터 명분을 거둬가지 않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되는 일을 한다, 그런 걸 권력의지라고 불러도 좋을까?

개인적으로는 심상정이 나를 위해 뭘 해줄 수 있는지 따져야 하는 입장이지만, PIMPS에서는 내가 심상정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만 한다. 마침 조국 청문회 국면(이 얘길 아직까지 하고 있다니!)을 맞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심상정의 입을 주목하고 있기도 하다. 그 건에 대해선 장고를 거쳐 드디어 내일 발표라는 걸 한다는데, 뭔 소리를 해도 욕먹는 게 분명(이 글이 읽힐 즈음에는 아마 욕을 먹고 있는 중이겠다)하니, 어차피 먹을 욕 그냥 하고 싶은 아무 얘기나 해라! 지금은 그런 시시한 일보다는 심상정을 위한 이미지메이킹 솔루션이 필요한 때다. 도대체 어떻게? 심상정을 어찌해야!??! ...침착해야 한다. 문제는 무엇인가? 정치인은 웃기면 안 된다고 누차 내가 말했는데, 일테면 심상정은 완전히 반대로 하고 있는 케이스다. 아예 보좌진이 나서서 그를 밈meme화하고 있다. 심블리, 내루미, 1초 김고은... 전부 보좌진들이 여러 채널을 통해 열심히 흘리는 얘기들이다. (아니면 도대체 누가 그러한 관심과 애정으로 그를 돌보겠나?) 물론 그러는 데에도 수긍할 만한 까닭은 있다. 만약 그냥 둔다면? 심상정의 위엄이 도를 넘어서 버릴 것이다! 경험치와 연륜과 슬픔이 쌓이며, 눈빛도 날카로워지고 속머리도 희끗희끗해지면서, 지금 그에게선 말이 안 되는 중후함이 나와 버리고 있는 실정. 오늘에 이르러선 어디 가서 굽실대는 심상정을 상상할 수가 없어져 버렸다. 이건 건방지다거나 안하무인이라거나 그런 차원이 아니다. 말하자면 심상정에겐 이제 윗사람이란 개념이 없다. 자세나 낯빛, 거동, 말하는 모습을 보면 그 풍격이 이미 대통령을 넘어섰다. 보통 정치인이 되어 보겠다면서 떠밀리듯 어찌저찌 나선 좌파들이 나이를 먹음에 따라 후배들이 어쩌고 젊은 세대가 어쩌고 하면서 약간 무책임하게 그냥 스리슬금 퇴장해 버리곤 하는데, 심상정의 권력의지는 그가 내외적으로 좌우적으로 받는 비판들에 비례하여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강렬하게 타오르는 듯 보인다. 차라리 그의 뜨거운 위엄을 부하들(미안합니다)의 조롱으로 겨우 억누르고 있다고나 할... 이건 유사한 다른 예를 찾기 어려운 기묘한 이미지다. 대처? 메르켈? 한심한 우파 녀석들! 심상정은 ‘그것’을 ‘해방’시켜야 한다. 이 경우는 시기의 선정만이 진정한 문제다. 즉, 그의 주변에서 펼쳐지고 있는, 그를 위한 모든 이미지메이킹이 중단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심상정은 날아오른다. 염색을 중단하는 것으로 카운트다운을 시작해라. 머리가 완전히 백발이 되는 때부터 이미지메이킹은 끝난다. ‘데스 노트’요? 노트 같은 건 필요 없다. DEATH뿐... 지금까지 역사에서 그 어떤 좌파 여성 정치인도 ‘대통령 너머’의 자리에 올라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김여정이 아마도 최초가 되리란 전망도 있지만은, 이웃 나라에서의 일을 기다릴 이유가 있을까?

※추천 아이템: 통이 넓은 바지, 품이 넉넉하고 4개의 주머니와 5개의 단추(반드시 목 끝까지 채울 것)가 달린 윗옷(색은 노란색만 아니면 된다). 대포.

2019년 8월 23일 금요일

직업소개사

나는 지금 인생 최대의 위기에 처해 있다.
나는 미래직업소개소*에서 무직자에게 노동의 기쁨을 알리고 그들이 할 수 있는 노동을 소개시켜주는 일을 하고 있다… 있었다.

옛 사람들은 행복한 미래 하나와 불행한 미래 하나를 상상했다. 사람이 하던 노동을 기계가 도맡고 사람은 더 이상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행복한 세상과, 사람이 하던 노동을 기계가 도맡고 사람은 노동 현장에서 쫓겨나는 불행한 세상.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거나 하지 못하게 된 이 세상이 행복한 세상인지 불행한 세상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내가 지금 인생 최대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더 이상 직업을 소개받으러 오지 않는다. 일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인지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내가 언젠가부터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미래직업소개소에서 9시에 출근해 8시에 퇴근할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는 삶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나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 방문객이 드물어진 초기에는 라디오를 듣거나 영상물을 보거나, 나중에는 막 나가자는 의미에서 게임도 했으나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 커다란 고민 속에서 시계만 쳐다보다가 시계가 멈추면 약을 갈아 넣을 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채로 텅 빈 사무실에 앉아 있노라면 텅 빈 사무실이 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자신과 장소가 동화되는 게 아니라, 장소에 자신이 편입되는 감각을 느껴본 이라면 어떤 느낌인지 알 것이다.

방문객이 오지 않는 것도 고민이지만, 노동하는 삶이 과연 행복한 것인지 불행한 것인지도 (여전히) 고민이지만, 당장에 내가 나에게 새로운 직업을 소개시켜줘야 할지, 아니면 일을 그만둬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 최대의 고민이다.

고민 끝에 사무소 한편에 비치되어 있던 월간 <직업 전선>이라는 책을 읽어본다. 여러 직업군에 속한 이들이 자신의 노동에 관해 기술한 체험기……인 것 같다. 확실하지는 않다. 헛소리를 적어놓은 이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고민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고 고민의 골만 더 깊어진다. (이딴 걸 왜 책으로 엮었지?)

‘미래에는 현재의 직업이 사라지고 줄어드는 한편 새로운 직업도 생길 것이므로 오래오래 일할 수 있는 미래의 직업을 소개받으러 오십시오’라는 기원을 담아 미래직업소개소라는 이름으로 직업소개소를 열었으나 대략 창업 20년을 맞은 지금 나는 정말로 대 위기다. 직업을 소개시켜주는 사람인 나 자신이 이 직업을 유지해야 할지, 다른 직업을 가져야 할지, 그냥 일을 그만해야 할지 결정하고 있지 못하니 말이다.

사람들은 왜 여전히 일하기 싫어하고 일하고 싶어 할까?
궁극적으로는 일하지 않아도 되지만 일하고 싶은 마음인 채로 일하지 않는 걸 바라는 걸까?
(혹자들이 더는 책을 읽지 않아도 되지만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인 채로 책을 읽지 않듯이?)

에라 모르겠다. 이 고민을 <직업 전선>에 투고해보고 나서 생각해야겠다.



*대한민국 서울시 영등포구에 소재한 곳과는 무관함을 밝힙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조국 (19년 8월 넷째 주)



이렇게 피로감이 쌓이는 때일수록 청량감 있는 콘텐츠를 내놓아야 좋지만 한국에서 정치에 조금이라도 관련된 뭘 쓰면서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안이기 때문에, PIMPS는 오로지 정론을 추구하기 때문에, 8월 넷째 주는 법무부장관 후보자 조국을 위한 묘책이 든 긴급 비단주머니로 간다. 조국의 일은 (정치공학적 관점에서만 봤을 때) 오랫동안 죽만 쑤던 우파들이 드디어 잡은 껀수다. 보수언론은 일제히 엄숙한 표정으로 n번째 떨쳐 일어나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간 억압받고 있다며 스스로를 가엾게 여겨온 샤이보수 및 보리적 합수 친구들 얼굴에도 비로소 화색이 돌며 한편에선 무슨 촛불집회를 한다 어쩐다 설레발들을 치고... (PIMPS는 공식적으로 모든 종류의 정치 결사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신이 나더라도 사실상 게닌사무소와 다름없는 상태인 보수야당이 내로남불 운운하며 국정 농단이니 뭐니 탄핵 정국 때의 일을 계속 상기시키는 건 정말 웃기는 일이니 좀 자제하기를 빈다. 탄핵의 ㄱ도 떠오르게 하면 안 되는데 야당 되고 나서부터 아주 줄기차게... 정치하면서 웃기면 안 된다고 일전에 내가 쓰지 않았나? 여하간 이 땅의 우파들 모두가 이걸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정치의 내용은 최대한 뒤로 미루고 인물과 썰은 최대한 증폭시키는, 이 미욱한 PIMPS가 아무리 열심히 해 보려 해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아주 대단들 한 보수정치다. 자유당은 이 기회를 살려 청문회 일정을 질질 끌면서 현재 국면을 최대한 길게 가져가려는 중, 너나없이 플레이어 되기를 숨기지 않는 작금의 언론 지형에서 누구 가족들이 어떻고 저떻고 그런 얘길 8월 끝날 때까지 계속 봐야 한다는 건 정말 짜증스럽고 진절머리 나는 일이다. 일단 나의 개인적인 견해는, 조국의 정치 성향이 어떻든 그가 본래 강남 사는 교수 가족의 구성원임을 참작해 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피는 속여도 계급은 못 속인다. 교수라는 족속은 원래 태반이 개새끼들(죄송합니다)이라 인성 점수에서 기본 +를 해줘야 보통 사람과 수준이 맞는다. 지역 얘긴... 해서 뭣하겠나.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그냥 하던 대로 살(누가 와서 죽창으로 찔러 주길 기다리기)거나 칵 죽어 버리면 되나? 그게 아니라 본인들 책임을 따라서 해야만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조국은 그래도 나름대로 책임 비슷한 걸 져 보려던 사람으로 평가한다. 나는 박근혜도 2016년에 이미 용서했다. 양승태도 아직 오체분시를 당하지 않았는데, 조국 같은 사람이야 피래미에 불과(그러니까, 한 일이 뭐냐?)한 것이다.

까놓고 말해 조국이 정치인이냐 하면 별로 그렇지도 않다고 보는데, 그를 무슨 정치인처럼 만든 것은 결국 여야와 언론, 본인까지도 합심한 일이다. (뭐의 아이콘이라고?) 이미 정치인으로 취급받고 있고 정치를 하고 있는데, 어디 교수니 강남 어쩌구니 하는 한국 대표 치외법권 타이틀도 같이 잡고 있는 거는 사실 말이 안 된다. 넷이 있으면 최소한 하나는 내려놓아지 다 붙들고 앙가주망이 어쩌고 해봤자 지랄은... 소리가 절로 나오는 것이며, 그래서는 공정함이 어쩌고저쩌고 하던 얘기를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이 다같이 돌려받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뭐 억울할 일이 있는가? 자, 그래서 모쪼록 사견을 접어 놓고 솔루션에 임하자면, 조국에게는 두 가지 길, 자진사퇴의 길과 정면돌파의 길이 있다. 상수上數는 자진사퇴다. 본인 명예도 있고 하니 일단 청문회는 치른 뒤가 좋지만 보수야당이 끝내 청문회 보이콧을 한다면 어쩔 수 없다. 사퇴 기자회견의 모양새를 잘 잡는 게 중요하다. 먼저 사회지도층의 윤리와 책무에 대한 이야기로 운을 떼고, 이어 기득권으로서 본인이 알게 모르게 누려 온 특권들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고백 참회의 시간을 갖는다. 그러면서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쩌고 하는 얘길 슬쩍... 이때 내용은 진실해야 하고 표정은 의연해야 하며 눈에는 눈물이 딱딱 맺혀야 한다. 그리고 장관이 됐을 때 하려고 했던 여러 일들, 사법 개혁의 방향과 이런저런 정책 등을 A4 1장으로 요약해 와 직접 기자들에게 주섬주섬 비틀비틀 나눠준 뒤 쭉 읽는다. 저는 물러가지만 개혁은 후퇴할 수 없다, 요런 얘기, 이 프로그램, 인물은 뒤로 보내고 콘텐츠는 남기는 마무리 연출을 하면 그나마 명예로운 후퇴로 정권과 여당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판에서는 이렇게 퇴장해도 교수질은 계속할 수 있을 것이고... 책도 내고... 한편 악수이긴 하지만 정면돌파를 시도하는 방법도 있다. 자고로 우리 교수님들 버르장머리 고쳐 놓는 솔루션은 6, 70년대 중국에서 이미 명쾌히 나왔다. 1) 얼굴 먹칠, 2) 죄목이 적힌 명패, 3) 종이 고깔. 장관을 꼭 해야만 하겠다면 답은 그것뿐이다. 먼저 빨리 이사부터 하고 교수직도 내려놓는다. 얼굴에 먹칠하고 자승으로 자박하고 목에 명패를 걸고 종이로 만든 고깔을 쓴 채 대중(일테면 광화문) 앞으로 가라. 태극기 부대의 앞으로 가라! 자리를 깔고 무릎을 꿇고 진짜로 맞으면서 간다. 맞으면서 가다가 골로 가면 가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로. 모 아니면 도, 죽으면 죽으리이다 정신이다. 선제적으로 인민의 재판을 청하는 것이다. 아예 재판콘서트 식으로다가 해서 여러 집회 결사체들이 조인트하는 자리를 만들면 더 좋겠다. 초대가수는 심수봉, 레드벨벳... 이러면 진정한 국민 통합, 궐기한 민중부터 깨어 있는 시민, 애국 보수부터 자유 우파까지 총 대중 의식의 성숙함을 확인해 볼 자리도 될 것이다. 조국이 아직 진정한 정치인이 아닌 것은 우리 인민의 심판을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총선까지 기다릴 것도 없다. 위와 같은 식으로 심판을 받아 살아남는다면 장관이 문젠가? ㄷㅌㄹ 자리도 따 놓은 당상...

※추천 아이템: 품이 넉넉한 수형복, 그 아래 받쳐 입을 방검복 또는 복대, 진행을 맡을 MC 송해

2019년 8월 16일 금요일

미친놈만 살아남는다: 손학규 (19년 8월 셋째 주)



어쩌다 보니 대표급 인사들을 계속 다루고 있어 다가오는 정계개편 국면의 키 플레이어인 제2야당 대표 손학규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손학규, 하면 우리 세대에겐 손학규 징크스 같은 얘기로 유명한데 사실 그건 별거 아니고(손학규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묻어 버리려는 적대 세력의 이미지 공작?), 나의 뇌리에 가장 강렬히 박혀 있는 손학규는 그의 파란만장 정치 역정 중에서도 최고의 장면으로 꼽을 만한 순간인 민심대장정 당시 왕사마귀를 잡아먹는 손학규이다. 손학규는 정동영과 퇴물 대결을 해서 이겼으면 이겼지 절대로 지지는 않을 사람이다. 장관도 해 보고 경기도지사도 해 봤다. 당대표는 기본. 당내 대선 경선에 3회나 참여하여 3회 모두 패했으며, 그에게 패배를 안겨 준 사람들(정동영, 문재인, 안철수) 또한 대선에서 3회 모두 패했다고 하는 기이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야말로 톱급(TOP級)의 자버(jobber, 프로레슬링에서 지는 역할을 맡는 선수)로서, 여야와 보혁 어디에 있든 쓰고 버리기 딱 좋은 카드로 각광받아 온 사람. 손학규의 이런 특징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났던 것은 지난 탄핵 정국 당시 탄핵만은 어떻게든 피해 보려는 여러 정치 세력들에 의해 거국 내각의 총리가 될 뻔했던 일이다. 그렇게 됐어도 참 볼만했을 텐데 아쉽게도 그렇게 되진 않았다. 지금 당에서도 마치 당연하다는 듯, 임기가 1년 넘게 남은 대표직을 계속 시키느냐 마느냐 양옆에서 위아래로 흔드는 중이다. 애초에 버리는 카드로 그를 당대표에 앉혔다는 뜻. 본래 이번 주 향후 정치 구상을 담은 문제의 ‘손학규 선언’을 발표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평화당 의원들의 단체 탈당 발표에 광복절도 끼어 있고 뭐 이래저래서 일요일이나 월요일쯤으로 미뤘다고 한다. 이 다이내믹 코리아에서 다음 주라 해서 무슨 일이 없을까?

1인자는 아니지만 사천왕 중 최강, 그러나 2인자나 3인자는 또 아닌, 우리의 영원한 4-1인자 손학규를 위한 이미지 메이킹 솔루션은 무엇일까? ‘물러서지 않는 자세’인 것은 본인이 아마 가장 잘 알 것이다. 그렇잖아도 머나먼 강진 땅으로 물러섰다가 돌아올 타이밍을 너무 오래 놓쳤잖은가? 이번에는 정말 마지막이란 생각에선지 이정미와 함께 단식도 하고 이것저것 밀어붙이는 모습, 누가 앞에 와서 욕하면 허허 웃으며 등을 두드려 준 다음에 자기 하고 싶은 얘기만 계속 하는 모습, 그런 것은 참 좋다. 하지만 말과 행동만으로는 부족한 것, 말과 행동만으로 사람들이 알아주고 귀기울이고 그런 정치가 되는 가능한 판국이었으면 내가 도대체 왜 이런 걸 쓰고 앉았겠으며 손학규는 왜 거기서 그러고 있겠는가? 말년의 손학규에게 아직도 뭔 뜻이 있다면 역시 ‘이미지 변신’이 필요한 것이다. 먼저 어느덧 일흔이 넘어 버린 그의 눈가의 주름, 사뭇 작아진 눈, 언제 저렇게 폭이 좁아졌지? 저러다 없어지는 거 아냐? 싶은 생각이 자연스레 들고 마는 눈, 최전방에서 매일매일 개기고 있는 원내대표 오신환 녀석의 엄청난 부리부리함과 비교해 봐도 기세 면에서 눌리고 만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일단 첫째로는 아이라인 문신이다. 강렬한 눈매로 부족한 카리스마를 보충한다. 여전히 안경을 고집하고 있는 샌님 유승민과도 좋은 대비가 될 것이다. 누가 뭐래도 아이라인 문신을 한 정치인은 이길 수 없는 법이다. 다음은 당연히 삭발. 손학규 선언을 딱 하고 2부 순서로 삭발을 한다. 이것이 저의 「진심」입니다, 눈썹 같은 것도 필요 없으니 이때 같이 밀어도 좋다. 다 끝나면 징 박힌 재킷을 받아서 척 걸치고, 달라붙는 바지는 커트보를 걷었을 때 이미 입고 있다. 나이에 비해 풍채와 자세가 좋기 때문에 테가 잘 난다. 어 제법? 이러면 적어도 20년은 줄일 수 있는 거 아닌가? 이것이 답이다. 젊게 살아야죠!

※추천 아이템: 목이 높은 부츠, 전용 바이크 ‘제7공화국’, 최고위에서 자꾸 개기는 놈들 보라고 꺼내 놓을 크롬 너클 한 쌍, 옥색 반다나(바른미래당 굿즈샵에서도 판매), 팔뚝 레터링 ‘저녁이 있는 삶’.

2019년 8월 13일 화요일

[14호 서신]


*비연재 게시물을 위한 공용 태그 도입
 -비연재물을 위한 공용 태그 ‘단편’ 신설.
 -해당 태그로 한 편, 두 편(1-2, 상-하, 본문-후기, 서문-본문 등), 또는 세 편(123, 상중하, 서본결 등)만으로 완결되는 게시물을 올릴 수 있음.
 -주제와 형식상의 제약 X.

*저장고 글 일부의 태그 수정
 -필자가 권한 해제된 상태이면서 소개글 포함 3편 이내로 연재 중단된 게시글들의 태그가 ‘단편’으로 변경됨.

*‘공동입하동’ 태그 묶음 신설

 -공용 태그를 위한 묶음(저장고 및 개인 태그와 구분되는)을 새로 만듦.
 -‘곡물창고에서’ 태그가 해당 묶음으로 복귀됨.
 -‘곡물창고에서’ 게시글 작성 시 뜨거운 박수와 함성...

*새로운 연재 기획, 새로운 필자, 새로운 공용 태그, 새로운 단편 업로드, 기연재 생산 배가 등 환영
 -멀티미디어 시대에 발맞춰 웹 환경에 맞는 다양한 기획(이미지, 영상, 음성 등) 추천.
 -심심한 지인에게 필자 등록 권유.
 -각 필자들은 개인 연재 외에도 새로운 공용 태그를 기획하고 만들 수 있음.

*페이지 수정
 -위 사항들에 맞게 인별표목 및 사용조례 수정.

이상.

2019년 8월 9일 금요일

수수께끼의 복수자: 정동영 (19년 8월 둘째 주)



8월 둘째 주, 평화당 대표 정동영을 다룬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정동영은 퇴물이다. 어느 정도로 퇴물 느낌인가 하면 이것을 쓰고 있는 나 자신까지도 묘한 실망감을 느낄 정도다. ‘퇴물’이란 그저 신선한 느낌이 없는 정도만을 말하지 않는다. 엄밀히 나이로만 따지면 정동영은 53년생, 아직 한창때라고나 할 것이다. (정치는 모름지기 70부터 아닌가?) 퇴물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역사적으로 그의 사명이 완전히 끝장났다는 것을 그를 지켜보던 모두가 인정할 때 비로소 퇴물이라고 불릴 자격을 얻는다. 퇴물이 되고 싶어도 못 되고, 총선을 또 준비하는 박지원을 보라! 사명 같은 것과는 무관하게 오로지 자기 자신과 주변 두엇만의 삶을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대부분의 정치인들까지 포함하여)과 달리, 고꾸라지든가 날아가 버리든가 끝까지 버티든가 하여튼 공동-운명의 거센 태풍(개인적인 행불행과는 구분되는)을 가장 앞에서 맞아본 사람들 중에서만 퇴물이 나온다. 정동영은 그런 의미에서 퇴물이다. 한때 그에게도 신선한 이미지가 충만했던 시절이 있었다. 젊을 적 뉴스 앵커로 살다가 김대중에 의해 정치권에 영입되었고, 개혁 기수로서 정풍운동, 16대 대선 후보 경선에 참가해 노무현에 패했지만 통일부 장관 역임, 열린우리당 의장도 했다. 그때 노인 폄하 발언(‘어르신들은 집에서 쉬셔라’)으로 한바탕 설화를 겪었는데, 모두들 사실 속으로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런 류의 얘기는 지금까지 꾸준하게 보인다. 다만 오늘날엔 본인이 명실상부한 어르신(경로우대증 소지)이 된 것이 문제라면 문제... 여하간 17대 대선 민주당 후보가 되었고 MB에게 아주 크게 패한 뒤부터 정동영의 정치 역정은 완전히 꺾여 버렸다. 본인도 뭔가 느낀 바가 있었는지 왼쪽으로 왼쪽으로 열심히 오더니 결국 관악구의 좌파들에게 4.29 재보궐선거의 악몽을 남겼고 땡땡당에 들어가네마네 옥신각신... 다 안 되고 한참 칩거하다가 결국 국민당으로 합류, 당대표 당선... 그리고 바로 어제 의원들의 대거 탈당 예고로 지금은 완전히 오리알 신세가 되어 버릴 위기를 맞았다. 맞았는데... 앞서 말했듯 워낙 퇴물이라 지금 그의 운명이 어떻게 되든 사실 아무도 별 관심이 없다.

일전에 내가 평화당의 유일한 길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이 시점에서 정동영은 그것을 어렴풋하게라도 이해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에게 어떤 역사적 과업이 남아 있다면, 그가 아직 스스로를 퇴물로 인정할 수 없는 까닭이 있다면, 오직 그것뿐이다. 자신의 유산(?)을 좌파들한테 들어다 바치기! 그것은 내가 이렇듯 그를 다루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직 그에게는 할 일이 남았다는 얘기. 아직 할 일이 남은 정동영을 위한 솔루션은 ‘상판을 버려 대의를 이루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오늘날 그 누구도 정동영을 유력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진정한 까닭, 그 누구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가 뭘 하고 다니는지 궁금해 하지 않는 까닭, 그가 어디 나가서 무슨 말을 해도 그대로 허공으로 흩어져 버리는, 사실상 투명인간 상태인 까닭은 역설적이게도 얼굴이 너무 알려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검하수 수술이 방향만큼은 옳았다. 수술 후 잠시 컬트적인 관심(4년 새 최고 수준)을 받았던 것을 그도 기억할 것이다. 바로 그거다. 같은 발상을 더 밀어붙여라. 얼굴을 아주 가려 버린다면 그것이 말이 된다. 정동영은 가면을 써야 한다. 이름은 그냥 그대로 가도 된다. 일단 가면을 써라 동영! 하여튼 가면만 쓰면 만사 형통이다. 밑에서 치받는 위치일 때는 강한데 중요한 순간에는 힘을 못 쓰고 주저앉아 버리는 패턴? 어쩐지 정동영이라면 뭔가 보여 줄거라 기대하지만 막상 시켜 보면 별거 없다? 그게 다 얼굴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강자는 진정한 쇼타임이 오기 전까지는 얼굴과 힘을 함께 감추는 법이다. 과업을 이루기 전까지는 가면을 벗지 말자. 가면을 쓰면 지금처럼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안정적인 2인자 위치를 유지할 수 있다. 2인자는 맘에 안 든다? 그러면 아예 탈당을 하고 무소속으로 다니자. 지역구, 정동영 지역구가 대체 어디냐, 개성이냐? 어차피 여기저기 다 찔러 보고 버려 버린 지역구, 어디 아무 데로나 나가도 된다. 거기 나가는 다음 총선 포스터 사진도 가면을 쓴 채 찍어라. 슬로건은 ‘나에게 돌아갈 곳은 없다’ 그러다 운명의 그날이 되면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나?’ 하면서 가면을 딱 벗고, 가면을 벗으면 나오는 눈가리개천, 눈가리개천을 풀면 페이스페인팅, 페이스페인팅을 지우면 미간에서 교차하는 커다란 X자 흉터. 정동영...? 이러한 전개다.

※추천 아이템: 특별히 공들여 제작된 정동영 전용 가면 세트. 깃이 높은 망토, 격식 있는 자리를 위한 연미복. 장미꽃, 트럼프 카드, 성냥갑 등 지나간 곳마다 슬쩍 흘리고 다닐 수 있는 작은 트레이드마크 소품들.

2019년 8월 8일 목요일

해상 기획

반인반어 형태로 상상되는 해저생물에 관한 전승은 전 세계 각지에 골고루 퍼져 있다. 많은 문화권에서 신화 또는 설화로 전해지는 대홍수 모티브와 유사한 면이 보인다. 거칠게 말하면 이렇다. 갓 시작된 문명들 각각을 뒤흔들 정도로 파괴적인 수해 재난이 실제로 일어났기에 대홍수 전승들이 만들어지고 구전된 것처럼, 인어와 관련된 전승 역시도, 어쩌면... 더구나 대홍수 이야기 대부분이 문자가 발명되기도 전 선사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에 비하면, 어업과 항해술이 발달한 이후에 등장한 인어 목격담들은 얼마나 신뢰가 가는지.

그러나 한편으로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어 이야기들이야말로 ‘기획’된 것이라는 의혹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인어들은 풍랑을 제어하고 미색으로 뱃사람을 홀리며 이따금 아이를 낳아 뭍것의 품에 안겨준다.

풍랑을 다스리는 능력이 있어 뱃사람들이 마음에 들 때에는 뱃길을 잠잠케 하지만 때로 신경질을 부려 해일을 부르는 종족이, 너무도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때로 인간 남자와 정을 통하기도 한다-는 상상에서는 그 두려운 자연재해를 인간―인간 중에서도 뱃사람들, 즉 남성들―이 통제할 수 있다는, 그러기를 바란다는 의도를 추출할 수 있다.

너무나 희귀하여 쉬이 발견되지 않는 종족이 있는데 유독 한 가지 성별의 기능과 이미지만이 전해진다면 그것이 편의적으로 상상된 것이리라 짐작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어째서 사람의 눈에 목격된 인어들은 모두 여인의 꼴을 하고 있단 말인가? 남자인 인어들은 너무 겁이 많아서 뭍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고 하던가?


南海中有鮫人 水居如魚 不廢機織 其眼能泣 泣則成珠(남해중유교인 수거여어 불폐기직 기안능읍 읍즉성주) 남해 속에 교인이 있으니, 물고기처럼 물에 살며 베 짜기를 그치지 않고, 그 눈은 울 수 있어 울면 눈물이 구슬이 된다. (조충지, <술이기述異記>)


한술 더 떠 옷을 입지도 않는다는 인어들이 베를 짠다는 건 대체 어떻게 나온 발상인지 모르겠다.
이와 같은 상상력들 대체가 실존하는 인어들에게 너무나도 큰 결례로 여겨진다.

다른 분야의 과학들이 그러하듯 박물학에는 윤리도 사상도 없지만 박물학자에게는 나름의 그것이 있다. 인어 전승을 되짚어 볼수록 박물학자인 나를 화나게 하는 옛 사람의 상상은 한 마디로, ‘어째서 인어는 여자고 용왕은 남자인가’ 하는 부분이다. 수저 문명의 백성들이 전부 여성이라면 그들을 다스리는 존재 또한 여왕이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전남 신안군에는 도초도라는 작은 섬이 있고 이 섬에서는 명씨 성 가진 노총각이 어부에게 잡힌 인어를 구해준 은혜로 대를 잇게 된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명씨는 인어를 돈 주고 사서 집에 얼마간 두고 돌봐준 뒤에 바다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인어는 바다에 돌아간 뒤 며칠 지나 잠시 뭍을 찾아 옥처럼 곱고 지혜와 재주가 빼어난 남자아이를 명씨에게 안겨주고 다시 떠났다 한다. 도초도에는 지금도 명씨 집안이 남아 있다.
인간-남성 입장에서는 이것이 노총각이 대를 잇게 도와준 유교적 미담일지 몰라도 나의 시각에서 이것은 인어들이 ‘남자’를 취급하는 방식을 더 잘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물 위는 지옥과도 같은 세계로, 인간은 악귀와도 같은 존재로 여길 인어가 자기 자식을 뭍으로 올려보낸 것은 명씨에게―인어는 잘 알지도 못하는 유교적 세계관의 맥락에서― 은혜를 갚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아이를 거부한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이유는 아마 여자 아기가 아니어서가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째서 성숙한―목격된― 인어들은 전부 여성의 신체를 갖고 있는지를 설명할 도리가 없다. 인어들은 남아를 유기한다. 그런데 번식은 어떻게 하는가 같은 것은, 글쎄, 대화를 통해 알아 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대화가 가능한 상대에게 그런 것을 묻는 것은 예의도 아니다. (이런 것을 굳이 말해줘야 하는가?)

2019년 8월 7일 수요일

노점상(인형을 파는)

해역을 건너온 아이들을 좌판에 벌여두고 난롯불에 두 손을 쬐고 있는 일요일, 겨울. 동묘는 16세기 말 선조가 명나라 황제의 명에 따라 지은 관우의 사당.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 성인 가요. 가짜 브랜드, 가짜 시계. 권력도 약속도 없는 반지들. 이미 유물 같은 전자 제품들. 한창 허기질 때 길거리 음식 냄새. 옷 무덤이 군데군데. 그야말로 옷의 무덤. 이 모든 죽어가는 것들이 여기서도 구원받지 못한다면…… 유독 추운 날이라 그런지 썩 밝아 보이지 않는 아이들의 표정. 눈이 올 것만 같은, 오지 않는 하늘. 울 것만 같은, 울지 않는. 그러나 내가 너희들 부모도 아니고, 언제까지 너희들을 돌볼 수는 없단다……

2019년 8월 4일 일요일

장난감 공장 노동자

벨트를 따라 오는 저것들. 모두가 같은 것들. 아직 존재가 아닌 것들. 형상 없던 것들에게 형상 있게 하고, 혼 없는 것들에 혼 불어 넣어주는 자를 무어라 부를까. 신? 네 대답이 그렇다면 나는 신인 것 같아. 세상의 신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금발 인형들의 신이긴 하겠지. 인간의 혼은 어디에 깃들까. 심장? 뇌? 인형의 혼은 어디에 깃들까. 눈? 눈이 없는 장난감은 인형이 아니야. 눈이 있는 장난감만 인형이야. 사람 모양으로 만들어도, 동물 모양으로 만들어도, 자동차 모양으로 만들어도, 눈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가 인형(人形)이야. 눈에 혼이 깃들기 때문이지. 벨트를 따라 오는 저것들. 나는 저것들에 눈을 붙이는 사람이야. 혼 없던 것들에 혼 불어 넣어주는 사람이야. 날마다 수천의 영혼을 만드는 사람이야. 내 혼은 어디다 빼둔 채로 인형에 사랑과 슬픔과 공포를 눌러 담는 사람이야. 내가 만든 많은 인형들은 곧 친구를 만날 거고, 가족이 될 거고, 가족에게서 버려질 거야. 가족의 손에 의해 망가지고 더럽혀질 거야. 인형들은 그 역사적인 순간들을 영영 감지 못하는 눈으로 모두 지켜볼 거야. 망가진 인형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죄책감을 아는 사람이야. 망가진 인형을 고쳐보려는 사람은 두려움을 아는 사람이야. 망가진 인형을 좋아하는 사람은 사랑을 아는 사람이야. 사랑해서 인형을 망가뜨리는 사람은 사랑에 미친 사람이야. 벨트가 멈췄으니 자러 갈 시간이야. 너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사랑? 그래. 사랑. 자면서 생각해보자. 안녕. 머리만 남은 나의 아이, 나의 신도.

2019년 8월 2일 금요일

빛을 받아들여라!: 이해찬 (19년 8월 첫째 주)



이번 주 PIMPS는 일찌감치 총선 불출마 선언으로 관짝 짜놓고 본인 정치 역정의 마지막을 불태우고 있는 이해찬을 다룬다. 아주 젊은 층은 이해찬이 뭐 하는 녀석인데, 하고 잘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해찬은 교육부장관 및 총리로 유명하며, 20대 국회 여당 의원 중 최다선인 7선 의원(나왔다 하면 전승), 그리고 현 여당 당대표다. 그는 정치를 시작한 이후로 민주당권에서는 꾸준하게 권력의 핵심부 근처에 있던 사람이다. 또한 정치에서 이미지 메이킹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온몸으로 주장하고 있는 사람, 작금의 추세를 정면으로 역행하고 있는 사람이다. 흡사 해골 같은 인상에 표정이랄 것도 거의 없다. 말을 별로 안 고른다는 이미지, 깐깐하고 고지식한 이미지, 호통 잘 치고 화를 잘 내는 이미지도 있다. 젊을 적엔 컵을 던졌다느니 뭐 뺨을 때렸느니... 여하간 ‘인간적’인 호감이라고는 전혀 가지 않는 사람, 즉 이해찬과 관련해서는, 아름다운 미담 뭐 그런 것이라고는 아주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런 점에서 그는 기묘한 종류의 신뢰감을 주기도 한다. 일테면 정치-머신 같은... 그는 권한이 생기면 그걸 정말로 사용하는 종류의 사람인데, 도대체가 그 누구도 대의하는 것 같지 않고, 사익이나 권력 같은 것에도 그리 관심이 없어 보인다. (같은 맥락에서 골프를 좋아했었다는 점도 정말 기묘하게 느껴진다. 과연 그가 뭔가를 ‘좋아할’ 수 있는가? 혹시 골프공을 다른 무엇으로 여기면서, 골프채를 힘껏 휘두르며 자신의 어떤 어두운 면모를 해소했던 것은 아닌가?) 그에 대한 세간의 대체적인 평가는 ‘무능한 놈 같지는 않지는 않지만, 성질머리가 너무 더럽고, (나 자신을 포함해) 누구도 그를 좋아하지 않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들 뒷부분을 강조하는데 사실 진정한 평가는 앞부분에 있다. 얘한테 호감이 가지 않는 만큼, 얘는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원리다. 누구한테 호감 주는 놈도 아닌데 대체 왜 저기 있는 거야?

그것이 그의 권력 유지 비결의 전부일까? 이해찬의 파워는 그보다 좀 더 심오한 데서 나온다. 그는 대의 정치의 중핵을 알고 있다. 내가 보기에 그가 정치 인생에서 철통처럼 지켜온 철칙 단 하나를 꼽는다면, 무슨 ‘돈 관리를 철저히’ 그런 것보다도, 바로 ‘절대로 웃겨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절대로 웃기면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 정치인이다. 웃기면 끝이다. 모름지기 우리 민심이란 정치인으로서 나쁜 놈 무능한 놈까진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웃긴 놈은 절대 안 된다(천기누설). 어쩌다 웃음거리가 될 수는 있어도, 그렇지만 절대로 웃겨서는 안 된다. 지난 20대 총선에서 정치적으로 최고 상한가를 치며 활동 중이던 비대위원장 김종인에게 기습적으로 가발을 씌워서 제껴 버렸던 일. 그것은 당시 공천 배제에 대한 복수로, 이해찬이 정치 자객을 보내 해치워 버린 일이 아니었던가? (아님 말고...) 이제 시간은 흘러 다시 총선을 앞둔 엄중한 상황. 어차피 지금 관을 지고 당대표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해찬은 본인의 운명을 더 이상 관리할 필요가 없다. 나를 불태워 당을 살리고 국가를 살리고 인류를 위했던 김종인의 자세, 기꺼이 가발 쓴 채 주먹 꽉 쥐었던 그 자세를 본받아야 한다. 이해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빛이다. 요즘 그의 얼굴을 보면 세계, 민족, 국가, 당의 앞날에 각기 드리운 암운이 자연스레 떠오르고 만다. 그래선 안 된다. 이 순간 그는 누구보다 밝은 사람이 되어, 그야말로 등대와 같은 이미지로 주변을 안심시켜야 한다. 가장 먼저 미소. 어디에 있든 무슨 소릴 듣든 항상 방긋방긋 웃어라. 누굴 욕할 때라도 방실방실. 그 다음은 태닝. 골프를 안 쳐서 그런가 너무 하얘져서는, 암실에서 끌려나온 사람(뱀파이어) 같고 좀 그렇다. 안 되겠으면 게이트볼이라도 치면서 이번 여름이 끝나기 전에 혈색을 좋게 하자. 다음으로 종교. 마음의 어둠을 밝히고 거듭나는 데엔 종교가 최고다. 김진표의 손을 잡고 가든 문재인의 손을 잡고 가든 하여튼 어느 성전으로든 다녀서 눈빛을 바꿔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콤비. 안 웃기는 이해찬에서 벗어나야 한다. 원내대표 이인영과 함께 정통파 충청계 콤비를 이루자. 콤비명은 전해철한테 정해 달라고 하고. 이해찬이 뭔가 모자란 소릴 하면 이인영이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돌돌 만 신문지 등으로 후려쳐 버리는 느낌이면 좋겠다(최양락-김학래 콤비 참조). 물론 그때도 웃고 있어야 한다. 이 정도만 해줘도 다음 총선 대승, 정권재창출, 20년 집권, 모두 꿈이 아닐 것...

※추천 아이템: 스타일리시한 썬캡, 요일별로 돌아가며 입을 수 있는 하와이안 셔츠 7종, 음이온 밴드(야구용품점에서 구매 가능), 십자가 목걸이, 유광 클러치백.

2019년 7월 26일 금요일

정점으로 올라서기: 나경원 (19년 7월 넷째 주)



잊고 있었는데, 이런 걸 쓰고 있으면 내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이지 싶은 생각이 든다. 정말로 대상자를 위하는 마음, 그의 이미지를 한껏 끌어올릴 진실된 솔루션을 내놓겠다는 마음 없이 이런 것은 쓰고 있을 수가 없다. 연재 재개와 함께 진실하게 다뤄 볼 정치인은 나경원이다. 극우 정당 인사에게는 솔루션을 주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건만 김무성이 모든 걸 포기한 채 복당하면서부터는 나도 이젠 아무래도 좋다는 느낌이다. 전부터도 그러기야 했지만, 특히 원내대표를 맡으면서부터 나경원은 일부 사람들로부터 도를 넘어서는 모욕을 받고 있다. 아무리 정치인이 미워도 최소한의 선은 지켜야 하지 않을까? 나베라는 혐칭에 달창으로 응답한 데에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수긍할 만한 구석이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내가 요즘 그를 보면서 드는 생각; 나경원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안드로이드로 대체된 게 아닌가? 그러지 않고서야 도저히, 그대로는 믿고 싶지 않은 행보와 언행을 보여주고 있음은 또한 사실이다. (노동자유계약 어쩌고 했을 때는 정말로, 정말로 깜짝 놀라 귀를 의심했다.) 정녕 이것이 그의 ‘본모습’이었던가? 몇 가지 장면들이 있다. 탄핵 즈음 새누리 분당 국면에서 탈당한다고 했는데요, 안 하겠습니다 해서 모두의 스텝을 꼬이게 만들었던, 장탄식이 절로 나왔던 그 순간. 선거제 합의문에 본인이 한 싸인이 마르기도 전, 패스트트랙 충돌 와중 대체 어쩌려고 저러지 걱정스러울 정도로 장군의 표정을 하고 동번서번 다니며 독려를 하던 그런 순간... 그는 이런 줏대 없는 기회주의자 이미지에서 좀 벗어나야 한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그러면 안 되고, 모든 사안마다 일일이 말을 다 걸쳐서도 안 된다.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고 만들어내야 하는 대변인 방식에 본인이 익숙하기 때문일까? 한마디로 후달려 보인다. 지금도 원내대표인지 원내대변인인지... 내용 없이 공허한 말장난, 이해되지 않는 악수의 연속, 통제되지 않는 의원들... 잡설이 길었다.

이 순간 나경원은 새로운 이미지로 거듭나야만 한다. 이리저리 휘둘리는 중간간부 포지션으로는 더 이상 안 된다. 첫 번째 솔루션은 눈 감기다. 평소에는 눈을 아주 감고 다니다가 심기를 거스르는 얘기가 들릴 때만 살짝 뜨는... 이런 느낌으로 간다. 과연 눈 감은 사진들(1, 2)을 찾아보면 느낌이 괜찮다. 눈 감고 돌아다니기가 좀 그러면 앞머리를 만들어 가려도 좋고, 한쪽만 가리는 것도 좋다. 누구 뭐 해찬이 인영이 교안이, 이런 친구들이 앞에서 뭐라뭐라 깔짝거려도 그냥 척 눈 감고 있으면서 귓속말을 통해 따로 내용 전달을 받는다. 옆에서 귓속말을 해줄 친구가 필요하겠다. 똘똘한 녀석으로, 본인 옷이랑 조합이 맞게 깔끔하게 입혀서 세워 놓으면 된다. 그의 귓속말을 다 들은 다음에야 딱 눈을 치켜뜨고 한 30초 좌중을 노려본다, 아무런 말도 없이, 이게 바로 나경원이어야 한다! 두 번째는 육성 아끼기다. 육성이 어디로 새 나가는 것을 최대한 피하자. 나경원 목소리가 어땠는지 사람들이 잊어 버릴 정도로, 평상시 말을 할 때는 귓속말로만 하자. 아까 그 친구한테. 니가 알아서 적당히 말해, 이렇게 해도 된다. 그 친구가 말을 전파하는 식으로 말하면 그만이다. 반드시 무슨 말을 해야 하는 때에는 아주 천천히, 짤막하게만(‘마이크 꺼주세요’ 등) 말한다. 말을 하면서는 누구도 쳐다보지 않는 게 중요하다. 카메라도 좌중도 안 된다. 그냥 눈을 감아 버린 채 말하는 것도 괜찮다. 뭐를 설명하려고 하면 안 된다, 설명하지 않는다, 설명하지 않는 나경원! 만약 누가 중간에 말을 끊으면 잠시 바라보다가 눈짓을 해서 끌어내도록 하자. 좌석을 함정식으로 만들어 버튼을 누르면 파캉, 하고 열리면서 어디로 떨어뜨려 버리는 것도 좋겠다. 그럴 수 없는 자리에는 아예 나가지도 않는다. 이 정도는 해야 야심에 걸맞는 격이 생기고, 일도 자연스럽게 쭉쭉 풀릴 것이다. 이로 인해 역사가 거꾸로 돌아가지나 않을까 두렵다... 나 의원의 건투를 빈다.

※추천 아이템: 서너 개의 커다란 반지, 생화 코르사주, 크고 시커먼 선글라스(외출 시), 말 안 듣는 놈들을 바로바로 패버릴 수 있는 튼튼한 세공 지팡이.

2019년 7월 19일 금요일

두 번째 소개: PIMPS (19년 7월 셋째 주)

돌아온 폴리티션 이미지 메이킹 파워 솔루션. 매주 금요일, 정치인 한 명을 선정하여 그 위상 제고를 위한 파워 솔루션을 조심스럽게 제시해 보는 회심의 코너이다. 철저히 인물만을 중심으로, 외형과 이미지에만 집중해서, 최악의 저속한 방식으로 정치를 다뤄 볼 것이다. PIMPS는 농담도 패러디도 아니다. 아무것도 비하하거나 비아냥거리지 않는다. PIMPS는 언제나 진지하게 주제에 임하고, 역지사지 속에서 길을 발견하며, 허심탄회하게 사안을 밝힌다. PIMPS는 인류와 민족의 앞날에 이바지하려는 모든 정치인들을 위한 정론正論 지향의 코너이며, 이는 지난 시즌 다뤘던 정치인들 중 김정은 씨와 민주노총 씨가 나름껏 솔루션을 받아들여(추정) 각기 북미 관계 개선, 조합원 증대 등 일정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던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전 시즌이 약간 아쉬운 맛이 있는 분량으로 다소 갑작스럽게 마무리되었던 것은 이래저래 연재 의욕이 꺾였기 때문이다. 그때 나를 가장 크게 무릎 꿇렸던 콘텐츠는 한국 3대 민족찌라시의 하나인 중앙찌라시에서 연재되던 「백재권의 관상·풍수」였다(참고자료). 정치인 포함 유명인들의 관상을 동물의 얼굴에 빗대어 보면서 뭐슨뭐슨 막걸리 썰을 푼다고 하는, 동물과 관상과 평론을 결합시킨 기절초풍의 기획력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코너는 올 연초 99회째에 성폭행범과 그 피해자의 관상을 다루는 초현실적인 누를 범한 뒤 민중의 단합된 힘에 호되게 털리고 글 내리며 연재 중단되었다가 어느 순간 연재분이 책으로 엮여 나오더니 아마도 명예회복 차원으로 지난 유월 윤석열을 다룬 새로운 99회차가 올라오며 마무리되었다. 100회를 딱 실수 없이 깔끔하게 채우고 마무리했다면 백 박사가 김세연을 밀어내며 여의도연구원장으로 영입되어 자유당 의원단 단체 성형과 혁신적 관상 공천, 풍수에 입각한 철저한 정책 설계에 기여하며 21대 총선을 큰 승리로 이끌었을 텐데... 기회를 놓친 것은 백 박사 자신의 업보이고 하늘의 뜻이다.

지난 2년간 참 많은 일들이 있었고, 정치는 여전히 끝나지 않는다. 19년 7월 19일 오늘, 남한 민주주의 대제전 프로듀스X101(참고자료) 방영이 종료되면서 PIMPS의 운신 공간은 다시금 열리고 있다. 총선 레이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빨랑 써서 해치워 버리고 마무리를 해야만 험한 일(고소·고발·협박 등)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판단 또한 섰다. 연재 재개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고민: 뭔가 새로운 기획을 추가해 혁신적인 면모를 보여야 하지 않을까? 장고 끝에 나는 초심으로 돌아가 진정성핍진성의 투트랙 정면돌파를 결정했다. 무엇이든 강력하게 촉구를 하고, 다양한 채널과의 공조 같은 거를 강화하고, 정·재계 및 노동계와의 접촉면을 늘리고, 또 뭐 어쩌고를 저쩌고하고... 그런 홀가분한 마음으로 PIMPS의 두 번째 연재를 시작한다. 각급 비서실 여러분, 각 당 내외부 싱크탱크 관계자 여러분, 정치 애호가와 정치 혐오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을 부탁드린다.

2019년 7월 6일 토요일

수의 무녀

“1611년.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희곡 템페스트에서 스테파노의 입을 빌어 ‘생각은 자유다’라고 말했지요. 그것은 사실 인간사의 등줄기를 타고 내려온 통념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지요. 그 전엔 그렇게 적은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극작가에게는 좋은 일이었지요. 오, 인간이 생각을 의식하게 되었을 때부터의 일이지요. 인간은 생각을 은밀하고도 신성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간섭할 수 없었지요. 추궁할 수 없었지요. 독심술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내가 당신 생각을 읽을 수 있다면 당신 또한 내 생각을 읽을 수 있겠지요. (저는 지금 당신을 창피 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내 생각을 읽을 수 없어서 다행입니다.) 끔찍하고 무서운 일. 장막 뒤서 인간은 온갖 것을 다 생각했지요. 정말로 온갖⋯ 지금도 다들 그렇겠지요. 맞습니다. 어제는 참 우울하고 무력했더랬죠. 기분 나쁜 얘길 하려던 게 아니었습니다. 헤헤. 저는 제가 우울한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있어요. 괴로운 순간들이 있을 뿐이고, 그런 순간은 저의 연장이 아니므로 결코 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특히 당신은 마음을 좀 편히 가지세요. 아시겠어요? 일단 물을 좀 마시고 오겠습니다.”

그가 물을 마시고 옵니다.

“가끔은 내가 환전소에 죽치고 앉아 있는 환전원 같다고 느낍니다. 글말과 생각의 교환비, 오늘 환율 다르고, 어제 환율 다르듯 고정된 값을 기대할 수 없는 거 아닌가. 같은 단어와 문장이라도, 어제 죽으면 천국 가고 오늘 죽으면 지옥을 가는 인간과 같이. 모든 것이 내 의지와 무관하다는 것도⋯. 그리고요. 포착되기 이전의 생각이라는 것은, 끝없는 변질과 말랑말랑함 속에서 건져지기, 혹은 채굴되기를 기다리는 그 무언가, 그게 과연 뭘까요? 우리 안의 전기 신호에 불과한 것일까요. 그런데 언어 없이도 가능할까요? 이미지? 장면도 이미지도 언어가 아닙니까. 금 간 보석 같은 것을 상상하며 당신 마음을 생각했다고 우겨본다고 한들.”


“우리는 행성 하나를 찾아냈습니다. 그 행성은 시궁쥐처럼 잿빛입니다. 위성이 보이죠? 마찬가지로 쥐색입니다. 그들은 별이지만, 별인 것만은 아니래요. 아이슬란드어로 컴퓨터는 ‘수數의 무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요." 

그는 초조한 듯 헛박수를 칩니다. 엇갈린 손은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저 별은 행성 크기의 컴퓨터이지요. 이해할 수 없는 기술로 되어 있습니다. 맞습니다. ‘수의 무녀’가 비유인 것처럼 컴퓨터라는 말도 비유이지요. 그냥 다 비유인 거, 알지요 당신은. 하여간 별의 맨틀은 스크린입니다. 우리도 꽤 잘나가고 있었지요 그쵸. 이메일로 보낸 닭강정을 다운받아 먹을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진짜 미쳤구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행성 크기의 컴퓨터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얼마만큼의 미래를 내다보아야 좋을지 감이 오지 않아요. 그리고 저 컴퓨터가 하는 일이란 것은 도저히⋯ 우리 수준에선 기획할 수 없는 거지요.  우주적 단위, 못해도 계界 단위의 작업일 겁니다. 그게 무슨 작업인지를 알아내는 것만 해도 풀기 어려운 매듭이었지요.”

그는 주머니를 뒤져 진공포장된 비스킷 하나를 꺼냅니다.

수의 무녀 - 입출력의 건 - 화상 담당자가 유약함 - 머릿속 사과, 우리 손에 들어온 - 정비공 대원 - 갑론을박 - 양가감정 - 윤리의 감각

2019년 7월 5일 금요일

[13호 서신]


*한여름
 -건강 유의(일사병, 탈수증, 열사병 등의 온열질환 및 냉방병).
 -호우 대비 배수관계 점검.
 -해충 창궐에 유의.
 -수면의 질 확보 체크리스트 운영.

*곡물창고에서
 -사실상 연재 중단 상태이므로 저장고로 이동.
 -새 글이 올라오면 입하 중으로 복귀.

*트위터 계정
 -팔로어 100 달성(5월).
 -운영 방침 개선: 필자 개인 활동 관련 선전 사항이 있는 경우 리트윗할 수 있음(조례 수정됨).

*필자 모집
 -기 필자에게 추천 요청 통해 비밀스럽게 도전.
 -무료로 필자 등록하고 계절 마감의 노예 되기(단타성 게시도 환영).
 -확정 읽어 주기 품앗이 최소 5인.
 -개인 블로그 운영이나 매체 기고/게재와는 다른 야릇한 기분 제공.
 -반도 유수의 문예인들이 독자인 것 같은 기분 제공.
 -내가 제일 못 쓰는 것 같은 기분 제공.
 -내가 대체 뭘 쓰고 있는지 모를 기분 제공.

*창고발전위원회
 -운영상의 향상점에 대한 의견 항시 청취 중.
 -창고 양식의 호혜적 이용 대책 수립.
 -현행 조례의 틀을 넘어서는 새로운 기획 환영(실현 가능하다면 실현시켜 보는 경향).

이상.

2019년 7월 3일 수요일

펀드 매니저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여기는 빌딩 옥상입니다. 고객님의 소중한 자산은 고객님의 전부입니다. 저는 한 사람의 전부를 파괴시킬 수 있는 가능성의 열매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여기는 사무실입니다. 증시판에서 수직 하강 중인 화살표가 가리키는 것은 갈 곳 잃은 자신에 관한 존재론적 출구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여기는 뉴욕의 한 호텔입니다. 부는 행복과 상관이 없다는 증명에 의해 또한 부가 행복임이 증거됩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여기는 강을 건너는 철교입니다.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공포와 교차합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여기는 뜨거운 맥주 통 안입니다. 망가진 것들을 복구하려는 노력과 회생에 대한 의지가 최고조에 다다르는 순간에 번개처럼 내려치는 판결의 두 이름은 불가능과 무의미입니다. 이 지울 수 없는 이름들이 죽음의 혁명적 속성을 나타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여기는 지중해의 휴양지입니다. 인생은 고통입니다. 인생은 죽음을 향해 전진하는 공포의 행군입니다. 그러한 여정길에서 돈은 진통제입니다. 그러나 자살하면 고통도 없습니다. 진통제도 더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2019년 6월 29일 토요일

헌병 수사관


헌병 수사관이 된 이후로 가장 나의 관심을 끄는 것, 바로 유서다. 논리적인 이유는 모르겠다. 나는 어려서부터 죽음에 관심이 많았다. 어릴 적 애거서 크리스티가 쓴 살인에 관한 소설들을 읽었을 때부터일까, 아니면 영정(할아버지의)을 처음 봤을 때부터일까. 나는 죽음에 일찍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고 그것에 관해 생각해왔다. 정확히는 타인의 죽음에 대해. (내 죽음? 알 게 뭔가. 나는 죽지 않을 텐데.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사람이 죽기 직전에 이 세상에 문자로 된 뭔가를 남기고 싶어 한다는 점은―그것이 시일지라도―인간이란 존재가 최후까지 생각을 놓지 않는 존재라는 사실을 늘 나에게 재확인시켜준다. 죽기 전의 유서 쓰기, 그것은 세상에 영혼의 잔량을 새기는 일인 것이다. 영혼이란 개념을 믿는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할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대부분의 경우 인생은 안에서 볼 때엔 더없는 비극이지만 바깥에서 보면 우스운 희극이다. 지난 이 주 동안 발생한 두 건의 자살 사고는 그 점을 더 분명하게 알려준다. 이 주 전 A중령이 죽기 전에 남긴 유서는 다음과 같다.

평생 나라에 충성하고 전우를 믿으며 살아왔는데 돌아오는 건 배신뿐이구나. 허망하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럽다.

그는 주어진 진급 기회를 모두 놓쳐 중령 계급으로 퇴역을 준비 중인 군인이었다. 와중에 평소 의지하던 B중령이 솔깃한 투자를 제안했다. A중령은 퇴직금을 몽땅 B중령에게 맡겼고, B중령은 사라졌다. 다른 여러 군인들의 목돈과 함께.
그리고 한 주 전에 B중령이 남긴 유서는 다음과 같다.

멍청한 군인들.
개 같은 내 인생.

B중령은 A중령을 포함한 여러 동료들에게 사기를 쳐 10억을 모았고, 그 돈을 100억으로 만들어준다는 외국 투자자에게 맡겼다. 투자자는 사라졌다.
나이 많은 군인의 자살 사례는 대부분 돈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군 생활만 해서 세상의 이치에 밝지 않으니(나 역시 예외는 아니리라) 사기를 쉽게 당하는 것이다. 반면 젊은 간부의 자살은 크게 두 가지가 주된 자살 사유로 조사된다.

주희(가명)야.
네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니 나도 더는 갈 곳이 없구나.
부모님 죄송합니다.

처럼 연애 문제이거나,

내가 죽는 이유는 다음 달 있을 전군재물조사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다. 초급 장교로서 심적인 부담이 너무 크다. 매일 스트레스를 받아 제대로 잠을 잘 수도 없다. 이 정도로 나약한 내가 한심하다. 나의 죽음으로 인해 사단장님이나 대대장님 등 다른 간부, 병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기를 바란다. 나의 죽음은 오로지 나의 모자람 탓이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처럼 업무상 스트레스 문제 등이 있다. 장교일수록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 비중이 높고, 부사관일수록 연애 문제로 인한 자살 비중이 높다.
병사의 자살 사유는 여러 가지인데, 가정 환경으로 인한 비관 자살이 가장 빈번하다. 대개 집안에 돈이 없고, 부모 사이가 좋지 않거나 이혼했으며, 자신이 가장 노릇을 해야 하는 이들이다. 최근 자신이 살던 시골집의 비닐하우스에서 나일론 줄로 목을 졸라 자살한 병사의 유언은 이랬다.

군에서 남은 2년을 보내려니 막막하다. 나와서도 뭘 하며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잘하는 것도 없고…
미래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떠납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선규(가명)야, 짐을 얹고 가서 미안하다.

많은 자살자의 유서엔 공통적으로 죄의식이 나타난다. 혼자 죽는 게 인간이지만, 혼자 사는 건 아니기 때문일까?
오늘도 우리 부대에서 병사 하나가 죽었고, 나는 현장과 가까운 곳에 있다. 죽은 병사 가족의 집이다. 자살자는 두 시간 전에 아파트 15층 자신의 집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 병사는 신병 휴가 중이었고, 오늘은 복귀 예정일이었다.
사고자 부친의 진술에 따르면(모친은 충격으로 입원해 있다), 사고자는 휴가 내내 자신의 방 안에서 지내다가, 두 시간 전 자기 방에서 나와 큰방에서 티브이를 시청 중이던 부모에게 “어머니 아버지,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소리친 후 그대로 베란다까지 달려간 뒤 뛰어내렸다고 한다.
부대로 돌아가 같이 생활하던 병사들의 진술을 들어 종합적으로 수사를 진행해야 하겠지만, 사고자 아버지의 진술과 유서를 살펴볼 때 단순 비관 자살일 가능성이 높다. 사고자는 학창 시절 간에 질병이 있어 입 냄새가 심하게 나는 사람이었고 이때 받았던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입 냄새가 치료된 이후에도 자신에게 끔찍한 입 냄새가 난다고 믿어왔다.
사고자의 유서를 읽고 나니 기분이 이상하다. 물론 사고 현장, 죽은 사람, 유서 등을 보는 건 언제나 좀 찝찝하고 씁쓸한 일이지만, 이 유서는 뭐랄까, 조금 평범한 언어로 쓰인 것 같지는 않다. 유서 쓰기가 세상에 영혼의 잔량을 새기는 일이라고 내가 말했던가? 그렇다면 이 병사의 영혼은 매우 불쾌한 것이었음이 틀림없다. 이 괴퍅한 문투와 지독한 악필은 뭔가에 오염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준다.

오늘도 계속되는 세상과의 불화.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운동을 해야 한다. 맨손체조. 윗몸 일으키기. 운동을 하면 잠이 온다. 이 위치가 가진 에너지를 설명할 수 없음. 중력이 내 몸을 처박기 전까지. 땀을 흘리면 기분이 낫다. 메들로 풍비의 지각의 현상학은 학수에게 주겠다. 정신의 테니스. 공은 내가 치려는 순간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다. 오늘도 행인들이 비웃었음.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운동을 해야 한다. 운동을 하면 잠이 온다.

메들로 풍비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사고자에게 강한 영향을 미친 작가인 것은 명백해 보인다. 친구에게 저작을 유증으로 남길 정도이니 말이다. 전혀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저자와 책의 이름은 사악한 자력이 있는 것처럼 나의 영혼을 끌어당긴다. 매우 불쾌하다. 그가 최후까지 놓지 않은 망상, 피해의식을 읽노라니 구토가 일 것만 같다. 뭔가를 써두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다. 펜, 당장 펜이 필요하다. 지금 써두어야 한다. 나는 지금 당신의 시체가 아니라 당신이 쓴 글을 보고서 극렬한 구토감을 느꼈다고. 나를 그렇게 만든 건 죽은 당신이 처음이라고.

2019년 5월 30일 목요일

왕(무인도의)

나는 일국의 왕이니라.

나의 영토는 내가 20년 전 표류한 이 섬으로, 그 넓이는 성인 남성의 걸음으로 반나절은 걸어야 끝에서 끝으로 종단 가능한 정도이니라. 섬에서 생활한 지 8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이곳에서 무한한 자유와 함께 이 땅에서 나고 자라는 모든 것들이 나에게 복속되어 있음을 느끼고 국가의 탄생을 선포했노라.

나의 백성은 최초에는 각각 넷이었으나 지금은 저마다 수십으로 불어난 개와 고양이 들, 그리고 국가법에 따라 엄격히 다섯 마리로 제한하고 있는 염소들이니라. 염소들은 노동과 함께 평화롭고, 개와 고양이들은 서로의 영역을 나눠 분쟁 중이나, 나누어진 그 영역마저도 엄연히 짐의 것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어서 내가 행차하면 그 주인을 알아보고 충성스레 애교를 부리매 그 또한 노동임을 내 모르지 않노라.

내 섬의 많은 것들이 내게 많은 것을 선사하기에 나는 이것들이 나를 위해 존재함을 아노라. 또한 내게 필요한데 없는 많은 것들을 내가 직접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신께서 주셨기에 이 나라에서 나보다 높은 곳에 있는 이는 오로지 신뿐임을 모르는 이 없노라. 그리하여 나는 해 뜨는 시각과 해 지는 시각이 되면 언제나 나의 옥좌―평범하게로는 원두막이라 불리는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신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노라. 표류한 뒤에도 오랫동안 기도문을 기억했으나 인생에서 가장 큰 절망을 겪었던 표류 4년에서 7년 차에 잠시 신앙을 놓아 전에 알던 기도문은 이제 잊었노라. 표류 8년 차 어느 날 불현듯 내 삶과 이 세상이 새롭게 보이니, 내가 그전에 알던 종교는 거짓된 종교임을 깨닫게 되었노라. 그리하여 나는 오로지 신만을 위한 진실된 하나의 종교를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기도문부터 해서 모든 의식을 새롭게 만들었노라. 나는 일국의 왕이며, 또한 단 하나뿐인 진실된 종교의 유일한 신도요, 수장이니라.

내가 절실히 필요로 하였으나 끝내 구하지 못한 것은 말벗이었노라.
처음에는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삶에서 큰 안식을 얻었노라. 대화는 늘 나에게 피로와 메스꺼움을 느끼게 만드는 행위였으매 더는 누군가의 말을 듣지 않아도 되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뭔가를 말할 일이 없으니 인간 사이에 있을 어떠한 문제와 불편도 없고, 그리하여 나는 불행의 근원은 바로 인간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쓰는 말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았노라.
그러나 어느 여름날 장마철에 질병에 걸렸을 때, 사경을 헤맬 때, 절로 내 입에서 기도의 말이 나오더라. 그러나 기도의 말 들어줄 이가 곁에 아무도 없더라. 그때 처음으로 신을 원망하였노라. 신이 내 목소리를 듣고 계신다면 나를 이렇게 버려둘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더라. 지금 이 순간 내 옆에 앉아 나의 땀을 식혀주고 내 손을 잡아주고 내 말을 들어줄 이가 있다면 그가 누구더라도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더라.

그리하여 한때 나의 가장 충직한 신하였으며 나의 총애를 누린 회색앵무가 하나 있었으니 나는 그의 이름을 일요일이라고 지었노라. 그가 나의 성―평범하게로는 움막이라 불리는 곳으로 날아온 이후 나는 그에게 많은 단어를 가르쳤으매 그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단어의 뜻을 하나둘 이해하기 시작하니,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더라. 교육자의 기쁨이란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깨달았더라. 그가 내 앞에 나타나 나는 크나큰 안식을 얻었으니, 그 작고 영리한 존재가 내게는 바로 안식일 같더라. 내가 900일하고도 스무날쯤은 더 지난 시간 동안 그에게 가르친 단어가 일백 개는 넘었더라. 내게 오라 하면 내게 오고, 망을 보라 하면 홰 위에 올라 망을 보고, 무엇을 보았느냐, 하면 “자연!”이라 대답하였으니, 그야말로 일요일은 자연에서 온 가장 큰 선물이었으며 신께서 내게 내린 가장 큰 축복 중 하나였더라.

그런데 하루는 “오너라” 해도 앵무가 말을 안 듣더라. 재차 “오너라” 해도 들은 체도 않고 홰에서 내려오지 않기에 “일요일아, 왜 그러느냐” 물었더니 대뜸 “외롭다!”라고 소리치는 게 아닌가? 나는 너무나 놀랐노라. 첫째로 나의 말을 거역하여 놀랐으며, 둘째로 나의 말을 거역하는 까닭이 저가 외롭기 때문이라 놀랐으며, 셋째로 내가 외롭다는 단어를 가르친 적이 없는데 그 단어를 스스로 깨친 것인가 싶어 놀랐으며, 넷째로 일요일이가 온 이후로 더는 외롭지 않다고 느꼈으나 내가 잠꼬대로 외롭다고 중얼거렸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어 내가 모르쇠 했던 속마음에 놀랐노라. 그 모든 놀라움은 곧 분노로 바뀌었으니, 근처에 널브러진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네 이놈, 하며 일요일이를 마구 혼냈노라. 일요일이는 작대기질에 매우 놀라며 날개를 푸덕이더니 이윽고 떠올라 창공으로 날아올라 사라지더라. 그리고 더는 돌아오지 않더라. 나는 얼마 안 가 후회했으나, 떠난 말은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이 섬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말벗을 잃으며 알았노라. 그렇게 왕국은 다시 침묵의 왕국으로 돌아갔노라.

이 말 없는 왕국은 그래도 내게 충분히 주었고 하여 나는 충분히 행복했노라.
가끔 두렵고 외로웠으며 고통스러웠고 불행했으나,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라는 혹자들의 말이 완전히 틀렸음을 나는 내 삶을 통해 증명했으며, 본래 자연에 없었으나 인간이 새로 만들어낸 것들은 대체로 없어도 된다는 것을, 아니 없는 게 낫다는 걸 이 왕국을 운영하며 배웠노라. 그리하여 나는 이 왕국에서 내가 느낀 점들을 이렇게 남긴다. 고기를 위해 염소를 도축할 때마다 말려둔 가죽(양피지라고 부르기엔 부족하지만) 위에 얼마 안 남았던 잉크를 사용하여, 하루하루 잊어가는 단어들을 되살려가며.
‘쓰기’는 스러져가는 기억들의 부활이며 영혼의 방부제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배우노라.

만약 말을 할 줄 아는 자네가 만약 우연히 나의 섬을 방문한다면 나는 말을 않은 채 자네를 극진히 대접하리라. 자네를 위해 내 염소를 내어주고, 깨끗한 물을 내어주고, 표류 15년 차부터 만드는 법을 익힌 빵을 나눠줄 것이며, 표류 당시부터 가지고 있던―내 가장 진귀한 보물!―브랜디를 한 잔 내어줄 것이며, 개와 고양이를 한 놈씩 데려와 충분히 만질 수 있도록 할 것이며, 나 자신 또한 모닥불 앞에서 멋진 춤을 추리라. 그리고 그대를 위해 진실된 기도를 드리리라. 그 모든 일을 말없이 하리라.
그리고 자네가 나의 섬을 떠나간다면 점점 작아지는 나의 왕국을 오랫동안 말없이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

나의 삶, 나의 왕국, 복되고 복되고 복되었으며 앞으로도 일천만 세 복될 것이라.

2019년 5월 22일 수요일

바리스타

안녕하세요 고객님. 저는 에밀리입니다.

네? 얼마 전까지는 제인이 아니었냐고요? 네, 그랬죠. 카페 매니저와 상담 후에 바꿨어요. 제인은 너무 올드하고 무뚝뚝한 느낌인 것 같다는 말을 들어서 좀 더 사랑스러운 느낌의 에밀리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강요나 압박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내린 결정이에요.
일하기 전에 탈의실에서, 혹은 일하다 잠깐 짬이 나서 한숨 돌릴 때, 저는 배지로 가득 찬* 저의 앞치마를 두 손으로 잡고 펼쳐봅니다. 아기자기한 배지로 빼곡하지요. 우리 카페는 직원이 손님들에게 자신의 개성을 어필할 수 있는 배지를 약 일곱여 종 정도 앞치마에 부착할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네, 강요는 아니에요. 강요는 아니지만 카페의 얼굴인 바리스타로서 손님들에게 개성적인 인상을 심어주면 좋을 듯하여 아끼던 배지 중에 일곱 개를 골라 달았어요. 새를 좋아해서 새 모양의 금속 배지를 몇 개 달았고요-흰머리오목눈이, 뱁새, 퍼핀, 오리, 홍학 등-, 좋아하는 아이돌의 배지도 달았습니다.
네? 일곱 개를 골라 달았다더니 왜 앞치마에 달린 배지가 서른일곱 개나 되냐는 말씀이시죠? 카페 매니저와 상담 후에 추가했어요. 매니저가 그러더군요. 왜 배지를 일곱 개만 달았냐고요. 손님들에게 자신의 개성을 어필할 수 있는 배지를 약 일곱여 종 정도 앞치마에 부착하는 것이 규정상 권장 사항 아니냐고 말씀드렸더니, 그건 말 그대로 권장 사항일 뿐이라고 하더라고요. 스스로를 표현하고 싶지 않으세요? 돌아보니 조이, 리나, 헤일리 모두 앞치마에 배지를 수십 개씩 달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제야 저는 현실을 깨닫고 퇴근한 뒤 곧장 후원 사이트에 접속했답니다. 여러 곳에 후원하고 배지 받으려고요.

제가 근무하는 시간은 점심 무렵부터 저녁 전까지입니다. 주변에 회사들이 많은 곳이라 점심에는 몰아치는 폭풍을 맞은 듯 정신 없다가, 폭풍이 지나가면 급격히 한산해지며 고요를 되찾습니다. 서너 시쯤이면 여느 여유로운 분위기의 카페로 돌아가죠.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피곤한 때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저기 구석에 앉아 언제나 제 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중년의 넥타이맨 때문이지요. 결코 알고 싶지 않았지만 그가 제게 말해줘서 알게 된 바로, 그는 백수가 된 기러기 아빠였어요. 아내와 아이는 몇 년간 국외 생활 중이고, 자신은 그사이 다니던 회사에서 해고됐는데 차마 밝힐 수는 없었대요. 집에 혼자 있는 게 외롭고 힘들어 남들처럼 출근하는 척하며 이 카페에 오게 됐고, 덕분에 저를 만나게 되었다고 말하더군요. 그러고는 저 때문에 계속 이 카페만 찾게 된다며, 정말 좋은 사람 같아 보여서 그런데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 라고 묻는 거 있죠. 당연히 알려주지 않았죠. 엄청 난감했고, 화도 좀 많이 나고 그래서 울 뻔했는데 마스카라 번지는 거 엄청 싫으니까 참았고요. 그냥 어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죄송합니다 고객님 했어요. 그러니까 이해한다라고 말하며 그래도 카페에는 계속 와도 되는 거냐고 묻는 거 있죠? 아니, 그런 걸 왜 물어요? 자기가 언제 나랑 만났다가 헤어지기라도 했나? 저 같은 말단 직원이 솔직히 안 왔으면 좋겠네요,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혼자 머릿속으로 이상한 중년 로맨스나 찍고 한심하네요! 마음속으로만 백만 번 외쳐주고, 셀카 찍으며 화 풀었어요. 필터 한 방 먹이고 증강된 내 얼굴을 보면 마음도 더 단단해지는 기분.
이 카페에서 6개월 일하는 동안 각각 다른 남자 손님들로부터 열다섯 번이나 고백 받았어요. 정말로 저를 좋아해서 그런 건지, 고백해서 혼내주자**는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저는 딱히 손님들에게 쌀쌀맞게 굴지도 않았다고요), 정말 그런 일 있을 때마다 피곤해요. 개새끼들!

저는 그저 ‘취준생’ 신분으로서 생활고 때문에 카페에서 일하는 게 아니에요. 저는 커피를 사랑하고, 커피가 필요해요. 검은 그것은 영혼의 연료예요. 언젠가부터 하루 한 잔이라도 들이붓지 않으면 생활이 어렵고, 돈과 인간에 시달려 지쳤을 때 시럽 듬뿍 넣은 커피를 한 잔 마시면 그래도 조금 살 만한 기분이 들어요. 그래도 다음에는 절대로 카페에서 일하진 않을래요. 물론 내 카페를 차리지도 않을 거고요. 영혼의 연료를 파느라 제 영혼이 점점 빠져나가고 있어요. 계속 이러다간 더는 인간이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구요.

그리고 여기, 주문하신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네?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는데 왜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나왔냐고요? 야, 이 개새끼야.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리시올, 2018. 72쪽을 참조함.

**김태훈, “왜 알바에게 고백해서 혼내주려 하나요ㅠㅠ”, 경향신문, 2019년5월11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5111235011&code=940100

2019년 5월 7일 화요일

파다한 ― 28

“지다오 시거마?”

영경은 수확 없이 몇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명동. 명동은 전도하기 좋은 거리는 아니다. 외국인 여행객이 많기 때문에? 아니다. 영경에게는 몇 가지의 레파토리가 있었다. 시를 아십니까? 두 유 노 포에트리? 지다오 시거마? 시오 시테이마스카? 그러나 영경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냥 지나갔다. 알아 들은 것이 분명하다.

“시를 아십니까?”

별다른 복식을 갖추지도 않았다. 평범한 시장 양말. 스니커즈. 찢어지지 않은 청바지. 흰 티셔츠. 체크무늬 남방. 거리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패션이 아닌가? 다른 게 있다면 하이바, 하이바를 썼을 뿐이다. 그러나 뭐 무더운 날도 아니고. 하이바를 쓴 게 잘못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영경은 명동 거리를 헤쳐나가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보호할 최소한의 장치가 필요했을 뿐이다.

“지다오 시거마?”

침이 튀었는지 노점상인이 짜증스럽게 영경을 쳐다본다. 그는 회오리감자를 파는데, 언제부터인지 매상이 뚝뚝 떨어졌다. 계산해보니 시점이 비슷했다. 바로 저 전도쟁이 놈이 출현한 날부터지. 물론 이 구불구불하고 긴, 인간의 대장과도 같은 명동 거리에 전도쟁이 자체가 특이한 건 아니다. 잘못된 것도 없다. 상인이 물건을 팔듯 전도쟁이는 도를 판다. 하지만. 저놈은 아무것도 팔지 않으면서 이 거리를 더럽히고 있잖아? 지치지도 않으면서.

“지다오 시거마?”

어깨빵을 쓱 쓱 피하며, 영경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돌아오지 않는 질문이란. 혹여나 대답을 하는 이가 있다면 영경은 그 즉시 하이바를 내리고 뒷걸음질칠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런 사람은 없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영경은 아무런 기대 없이 한 사람 한 사람 붙잡고 시를 아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시를 알지도 모르지도 못했다.

명동의 유령. 영경은 그런 이름으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명동 밖에서.

시를 읽거나 쓰는, 그리하여 결국 시를 알게 되거나 여전히 모르는 사람들은 명동에 찾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명동이 과거가 되어버렸다며 슬퍼했다. 영경은 아니었다. 영경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마침내 명동 거리를 사랑하게 되었다.

2019년 5월 6일 월요일

불안한 뿌리

이런 불안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천변에서 피어오른 날벌레 떼에 둘러싸여 팔다리를 휘젓다 간신히 그곳을 빠져나왔을 때, 불현듯 귓속 깊은 곳이 가려워 정말이지 무심코,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거칠게 헤집었더니 손끝에 피가 묻어나왔다. 묻어나온 피는 나의 것일까, 귓속에 들어간 벌레의 것일까? 미량의 맑은 피가 묻어 있을 뿐, 손끝이 그리 지저분하지 않은 것을 보면 나의 피일 것 같다. 그렇지만 이렇게 깨끗한 귓속이 벌레 떼의 습격을 받은 직후에 갑작스럽게 가려워졌던 것을 생각하면 날벌레 한 마리가 어찌어찌 귓속으로 들어갔을 가능성도 적지 않을 듯하다. 그렇다면 이 피가 차라리 벌레의 것이기를 바라야 한다. 살아 있는 아주 작은 벌레가, 귓속의 솜털 때문에, 나오지는 못하고 그냥 거기에 남아 있다면? 내 귓속의 뭔가를 양분 삼아 아주 오래 살아남는다면? 심지어 그것이 암컷이고, 알을 낳을 준비가 되어 있는 개체였다면?
누구나 이 같은 불안 하나로 중이염에 걸릴 수 있다.
이때 실제로 중이염을 유발하는 것은 오염된 물에서 나온 병균 덩어리 날벌레가 아니라 불안에 못 이겨 미친 듯이 귀를 파기 시작하는 습관이다.

최근에 나는 어떤 양치기의 불안에 대한 글을 읽었다.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다.
국경 가까이에서 양치기 노릇을 하던 한 남자가 이웃나라에서 돌아오는 선교사를 보았다. 양치기는 신앙이 있었지만 한철 내내 산등성이 목장에서 보내야 하는 처지라 제례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선교사는 양치기의 청으로 그의 거처에 하룻밤 머물며 신의 뜻에 대해 들려주기로 했다.
양치기는 신앙이 있었지만 여가시간에 경전을 읽기보다 수음하기를 좋아했다. 이와 같은 흠을 선교사가 알아차리지 못하기를 바랐다. 선교사는 양치기에게 경전에 실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중에는 땅을 향해 사정한 남자가 신벌을 받아 죽은 이야기도 있었다. 선교사는 그에 더하여 땅에 떨어진 정액에서 인간을 닮은 극독초가 자란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날 밤에 양치기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선교사가 자신의 비밀, 즉 양떼를 돌보기보다 멀찍한 곳에서 사타구니 만지기에나 더 열중하는 습성을 꿰뚫어보고 저를 책망한 것 같아서 부끄럽고 분했다. 또한 선교사의 말대로 아무 곳에나 털어놓은 자신의 분비물에서 극독초가 자라면, 양들이 그것을 먹고 잘못되기라도 하면... 양치기는 그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머리에서 떨쳐버리려 애썼지만, 그보다는 선교사가 거짓말을 했을 리 없다는 생각을 하는 편이 훨씬 쉬웠다.
양치기는 생각했다. 양 몇 마리가 죽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저 수다쟁이가 그게 내 잘못이라는 사실을 누구에게 말하지만 않으면 된다. 그렇지만 저 수다쟁이가 마을로 내려가서 내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지? 불안감을 이길 수 없었던 양치기는 동틀녘에 선교사를 죽였다. 양치기가 수다쟁이라고 생각한 선교사는 끅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었다.
선교사의 말대로 양치기가 땅에 뿌린 씨에서 정말로 극독초가 자랐을까?
결국 그의 분비물에서 맨드레이크가 자라기는 했다. 선교사가 속했던 수도회에서 돌아올 때가 지난 선교사의 행방을 추적한 끝에 양치기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양치기는 신앙이 있었지만 교수형을 당했다. 광장에서 수치에 떨며 자기의 죄를 고하고 뛰어내렸다. 축 늘어진 하반신에서 갖가지 분비물이 섞이어 뚝뚝 떨어졌다.
이처럼 맨드레이크는 목매달아 죽은 사람에게서 떨어진 분비물로 말미암아 생겨난다. 숨이 붙어 있는 동안의 분비물은 아무 의미가 없다. 따라서 맨드레이크 싹을 틔우려면 씨주머니로 쓸 남자가 숨을 완전히 거둘 때까지, 분비물이 다 떨어지고 마를 때까지 매달아두는 것이 유익하다. 모 마녀회에서는 이를 땅을 저주로 수태하는 것으로 풀이하는데, ‘관점’으로서 소개할 뿐, 탁월하거나 적절한 시각은 아니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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