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30일 목요일

왕(무인도의)

나는 일국의 왕이니라.

나의 영토는 내가 20년 전 표류한 이 섬으로, 그 넓이는 성인 남성의 걸음으로 반나절은 걸어야 끝에서 끝으로 종단 가능한 정도이니라. 섬에서 생활한 지 8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이곳에서 무한한 자유와 함께 이 땅에서 나고 자라는 모든 것들이 나에게 복속되어 있음을 느끼고 국가의 탄생을 선포했노라.

나의 백성은 최초에는 각각 넷이었으나 지금은 저마다 수십으로 불어난 개와 고양이 들, 그리고 국가법에 따라 엄격히 다섯 마리로 제한하고 있는 염소들이니라. 염소들은 노동과 함께 평화롭고, 개와 고양이들은 서로의 영역을 나눠 분쟁 중이나, 나누어진 그 영역마저도 엄연히 짐의 것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어서 내가 행차하면 그 주인을 알아보고 충성스레 애교를 부리매 그 또한 노동임을 내 모르지 않노라.

내 섬의 많은 것들이 내게 많은 것을 선사하기에 나는 이것들이 나를 위해 존재함을 아노라. 또한 내게 필요한데 없는 많은 것들을 내가 직접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신께서 주셨기에 이 나라에서 나보다 높은 곳에 있는 이는 오로지 신뿐임을 모르는 이 없노라. 그리하여 나는 해 뜨는 시각과 해 지는 시각이 되면 언제나 나의 옥좌―평범하게로는 원두막이라 불리는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신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노라. 표류한 뒤에도 오랫동안 기도문을 기억했으나 인생에서 가장 큰 절망을 겪었던 표류 4년에서 7년 차에 잠시 신앙을 놓아 전에 알던 기도문은 이제 잊었노라. 표류 8년 차 어느 날 불현듯 내 삶과 이 세상이 새롭게 보이니, 내가 그전에 알던 종교는 거짓된 종교임을 깨닫게 되었노라. 그리하여 나는 오로지 신만을 위한 진실된 하나의 종교를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기도문부터 해서 모든 의식을 새롭게 만들었노라. 나는 일국의 왕이며, 또한 단 하나뿐인 진실된 종교의 유일한 신도요, 수장이니라.

내가 절실히 필요로 하였으나 끝내 구하지 못한 것은 말벗이었노라.
처음에는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삶에서 큰 안식을 얻었노라. 대화는 늘 나에게 피로와 메스꺼움을 느끼게 만드는 행위였으매 더는 누군가의 말을 듣지 않아도 되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뭔가를 말할 일이 없으니 인간 사이에 있을 어떠한 문제와 불편도 없고, 그리하여 나는 불행의 근원은 바로 인간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쓰는 말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았노라.
그러나 어느 여름날 장마철에 질병에 걸렸을 때, 사경을 헤맬 때, 절로 내 입에서 기도의 말이 나오더라. 그러나 기도의 말 들어줄 이가 곁에 아무도 없더라. 그때 처음으로 신을 원망하였노라. 신이 내 목소리를 듣고 계신다면 나를 이렇게 버려둘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더라. 지금 이 순간 내 옆에 앉아 나의 땀을 식혀주고 내 손을 잡아주고 내 말을 들어줄 이가 있다면 그가 누구더라도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더라.

그리하여 한때 나의 가장 충직한 신하였으며 나의 총애를 누린 회색앵무가 하나 있었으니 나는 그의 이름을 일요일이라고 지었노라. 그가 나의 성―평범하게로는 움막이라 불리는 곳으로 날아온 이후 나는 그에게 많은 단어를 가르쳤으매 그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단어의 뜻을 하나둘 이해하기 시작하니,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더라. 교육자의 기쁨이란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깨달았더라. 그가 내 앞에 나타나 나는 크나큰 안식을 얻었으니, 그 작고 영리한 존재가 내게는 바로 안식일 같더라. 내가 900일하고도 스무날쯤은 더 지난 시간 동안 그에게 가르친 단어가 일백 개는 넘었더라. 내게 오라 하면 내게 오고, 망을 보라 하면 홰 위에 올라 망을 보고, 무엇을 보았느냐, 하면 “자연!”이라 대답하였으니, 그야말로 일요일은 자연에서 온 가장 큰 선물이었으며 신께서 내게 내린 가장 큰 축복 중 하나였더라.

그런데 하루는 “오너라” 해도 앵무가 말을 안 듣더라. 재차 “오너라” 해도 들은 체도 않고 홰에서 내려오지 않기에 “일요일아, 왜 그러느냐” 물었더니 대뜸 “외롭다!”라고 소리치는 게 아닌가? 나는 너무나 놀랐노라. 첫째로 나의 말을 거역하여 놀랐으며, 둘째로 나의 말을 거역하는 까닭이 저가 외롭기 때문이라 놀랐으며, 셋째로 내가 외롭다는 단어를 가르친 적이 없는데 그 단어를 스스로 깨친 것인가 싶어 놀랐으며, 넷째로 일요일이가 온 이후로 더는 외롭지 않다고 느꼈으나 내가 잠꼬대로 외롭다고 중얼거렸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어 내가 모르쇠 했던 속마음에 놀랐노라. 그 모든 놀라움은 곧 분노로 바뀌었으니, 근처에 널브러진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네 이놈, 하며 일요일이를 마구 혼냈노라. 일요일이는 작대기질에 매우 놀라며 날개를 푸덕이더니 이윽고 떠올라 창공으로 날아올라 사라지더라. 그리고 더는 돌아오지 않더라. 나는 얼마 안 가 후회했으나, 떠난 말은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이 섬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말벗을 잃으며 알았노라. 그렇게 왕국은 다시 침묵의 왕국으로 돌아갔노라.

이 말 없는 왕국은 그래도 내게 충분히 주었고 하여 나는 충분히 행복했노라.
가끔 두렵고 외로웠으며 고통스러웠고 불행했으나,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라는 혹자들의 말이 완전히 틀렸음을 나는 내 삶을 통해 증명했으며, 본래 자연에 없었으나 인간이 새로 만들어낸 것들은 대체로 없어도 된다는 것을, 아니 없는 게 낫다는 걸 이 왕국을 운영하며 배웠노라. 그리하여 나는 이 왕국에서 내가 느낀 점들을 이렇게 남긴다. 고기를 위해 염소를 도축할 때마다 말려둔 가죽(양피지라고 부르기엔 부족하지만) 위에 얼마 안 남았던 잉크를 사용하여, 하루하루 잊어가는 단어들을 되살려가며.
‘쓰기’는 스러져가는 기억들의 부활이며 영혼의 방부제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배우노라.

만약 말을 할 줄 아는 자네가 만약 우연히 나의 섬을 방문한다면 나는 말을 않은 채 자네를 극진히 대접하리라. 자네를 위해 내 염소를 내어주고, 깨끗한 물을 내어주고, 표류 15년 차부터 만드는 법을 익힌 빵을 나눠줄 것이며, 표류 당시부터 가지고 있던―내 가장 진귀한 보물!―브랜디를 한 잔 내어줄 것이며, 개와 고양이를 한 놈씩 데려와 충분히 만질 수 있도록 할 것이며, 나 자신 또한 모닥불 앞에서 멋진 춤을 추리라. 그리고 그대를 위해 진실된 기도를 드리리라. 그 모든 일을 말없이 하리라.
그리고 자네가 나의 섬을 떠나간다면 점점 작아지는 나의 왕국을 오랫동안 말없이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

나의 삶, 나의 왕국, 복되고 복되고 복되었으며 앞으로도 일천만 세 복될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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