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3일 금요일

줄어드는 욥

사금파리로 얼굴을 긋던 욥은 자신이 어떤 언어와 어떤 음성으로 자신의 신을 찬양하였는가를 생각했다. 욥은 곧 하나님을 저주하는 행위 자체가 사탄과의 내기 때문에 그토록 충성하였던 그의 자식을 죽이고 패가를 행한 하나님을 더욱 이롭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욥의 분노와 절망은 욥의 것이지만 욥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육성과 마음을 통해 세상에 더해지는 분노와 절규는 그가 저주하는 하나님의 총량을 더욱 더 늘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이 생산하는 것은 뭐든 음한 것과 양한 것을 따지지 않고 하나님의 총량에 더해질 것이므로.

하나님의 총량의 증가- 이것이 과연 하나님에게 이로운 일인가? 그것을 차치하더라도 욥은 억울하고 원통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여 그 광대함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욥은 그렇게 생각했다. 욥은 미쳐 버렸던 것이다. 허나 저주를 하고 뭘 한들 욥은 종복이었고 평생을 몸담은 양 목장의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것은 욥이 나기 전부터 정해진 일이었고 그가 살아온 삶에 의해 증명되는 것이었고 현 상태의 행과 불행에 관계없이 절대로 유실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예컨대 저 배신감은 그가 <하나님의 존재함>을 믿어 의심치 않는 한에서만 생겨나는 것이었다. 욥은 여전히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지 되는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들고 있는 기와 조각을 내려놓는 것이다. 울분과 절규를 그만 토하는 것이다. 욥은 이제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총량을 줄이고자 하였다. 그의 자식들의 죽음은 어처구니없는 것이고, 먼 훗날 그가 다시 부귀하며 새 자식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그 자식은 있던 자식이 아니라 없던 자식이며 있던 자식은 천국에서 부활하든 하나님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든 하여튼 어쨌든 뭐든 간에 지금 지상에 그의 곁에 없고 없을 것이며 없던 것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줄어들면 될 일이다. 그게 무엇이든, 어떤 것을 세계에서 빼버리면 될 일이다. 하나님의 것인 자신과 자신의 것이 줄어들면 하나님의 총량도 줄어들 것이므로. 그러려면 먼저 아무것도 생산해서는 안 된다.

물론 하나님은 무한한 자원을 가지고 계신다. 때문에 욥이 모든 것을 멈추고 오히려 제 부피를 줄인다고 하여도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손실이 없을 거였다. 그러나 미쳐 버린 욥에게 있어 <무한함>이란 것은 순 모순덩어리였다. 이를테면 욥이 무한대의 공깃돌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아내에게 줄 때, 무한한 공깃돌 전체를 주면 자신에게 공깃돌이 전혀 남아 있지 않게 되고 네 번째 공깃돌부터 주면 자신에게 세 개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공깃돌을 전부 건네 준 첫 번째의 경우 무한대 빼기 무한대는 0이 되고 네 번째 이후의 공깃돌을 다 준 두 번째 경우에서는 무한대 빼기 무한대는 3이 된다.

그러니 당최 그 <무한함>이라는 것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욥은 저 무한의 전제를 없는 것으로 해 버렸다. 이제 어떻게 하여 줄어들지를 생각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재산을 내버리는 일과는 정반대의 성질일 거였다. 더불어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일과도 아무런 연관이 없을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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