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23일 금요일
직업소개사
나는 미래직업소개소*에서 무직자에게 노동의 기쁨을 알리고 그들이 할 수 있는 노동을 소개시켜주는 일을 하고 있다… 있었다.
옛 사람들은 행복한 미래 하나와 불행한 미래 하나를 상상했다. 사람이 하던 노동을 기계가 도맡고 사람은 더 이상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행복한 세상과, 사람이 하던 노동을 기계가 도맡고 사람은 노동 현장에서 쫓겨나는 불행한 세상.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거나 하지 못하게 된 이 세상이 행복한 세상인지 불행한 세상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내가 지금 인생 최대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더 이상 직업을 소개받으러 오지 않는다. 일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인지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내가 언젠가부터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미래직업소개소에서 9시에 출근해 8시에 퇴근할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는 삶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나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 방문객이 드물어진 초기에는 라디오를 듣거나 영상물을 보거나, 나중에는 막 나가자는 의미에서 게임도 했으나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 커다란 고민 속에서 시계만 쳐다보다가 시계가 멈추면 약을 갈아 넣을 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채로 텅 빈 사무실에 앉아 있노라면 텅 빈 사무실이 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자신과 장소가 동화되는 게 아니라, 장소에 자신이 편입되는 감각을 느껴본 이라면 어떤 느낌인지 알 것이다.
방문객이 오지 않는 것도 고민이지만, 노동하는 삶이 과연 행복한 것인지 불행한 것인지도 (여전히) 고민이지만, 당장에 내가 나에게 새로운 직업을 소개시켜줘야 할지, 아니면 일을 그만둬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 최대의 고민이다.
고민 끝에 사무소 한편에 비치되어 있던 월간 <직업 전선>이라는 책을 읽어본다. 여러 직업군에 속한 이들이 자신의 노동에 관해 기술한 체험기……인 것 같다. 확실하지는 않다. 헛소리를 적어놓은 이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고민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고 고민의 골만 더 깊어진다. (이딴 걸 왜 책으로 엮었지?)
‘미래에는 현재의 직업이 사라지고 줄어드는 한편 새로운 직업도 생길 것이므로 오래오래 일할 수 있는 미래의 직업을 소개받으러 오십시오’라는 기원을 담아 미래직업소개소라는 이름으로 직업소개소를 열었으나 대략 창업 20년을 맞은 지금 나는 정말로 대 위기다. 직업을 소개시켜주는 사람인 나 자신이 이 직업을 유지해야 할지, 다른 직업을 가져야 할지, 그냥 일을 그만해야 할지 결정하고 있지 못하니 말이다.
사람들은 왜 여전히 일하기 싫어하고 일하고 싶어 할까?
궁극적으로는 일하지 않아도 되지만 일하고 싶은 마음인 채로 일하지 않는 걸 바라는 걸까?
(혹자들이 더는 책을 읽지 않아도 되지만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인 채로 책을 읽지 않듯이?)
에라 모르겠다. 이 고민을 <직업 전선>에 투고해보고 나서 생각해야겠다.
*대한민국 서울시 영등포구에 소재한 곳과는 무관함을 밝힙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조국 (19년 8월 넷째 주)
2019년 8월 16일 금요일
미친놈만 살아남는다: 손학규 (19년 8월 셋째 주)
2019년 8월 13일 화요일
[14호 서신]
*비연재 게시물을 위한 공용 태그 도입
-비연재물을 위한 공용 태그 ‘단편’ 신설.
-해당 태그로 한 편, 두 편(1-2, 상-하, 본문-후기, 서문-본문 등), 또는 세 편(123, 상중하, 서본결 등)만으로 완결되는 게시물을 올릴 수 있음.
-주제와 형식상의 제약 X.
*저장고 글 일부의 태그 수정
-필자가 권한 해제된 상태이면서 소개글 포함 3편 이내로 연재 중단된 게시글들의 태그가 ‘단편’으로 변경됨.
*‘공동입하동’ 태그 묶음 신설
-공용 태그를 위한 묶음(저장고 및 개인 태그와 구분되는)을 새로 만듦.
-‘곡물창고에서’ 태그가 해당 묶음으로 복귀됨.
-‘곡물창고에서’ 게시글 작성 시 뜨거운 박수와 함성...
*새로운 연재 기획, 새로운 필자, 새로운 공용 태그, 새로운 단편 업로드, 기연재 생산 배가 등 환영
-멀티미디어 시대에 발맞춰 웹 환경에 맞는 다양한 기획(이미지, 영상, 음성 등) 추천.
-심심한 지인에게 필자 등록 권유.
-각 필자들은 개인 연재 외에도 새로운 공용 태그를 기획하고 만들 수 있음.
*페이지 수정
-위 사항들에 맞게 인별표목 및 사용조례 수정.
이상.
2019년 8월 9일 금요일
수수께끼의 복수자: 정동영 (19년 8월 둘째 주)
2019년 8월 8일 목요일
해상 기획
그러나 한편으로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어 이야기들이야말로 ‘기획’된 것이라는 의혹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인어들은 풍랑을 제어하고 미색으로 뱃사람을 홀리며 이따금 아이를 낳아 뭍것의 품에 안겨준다.
풍랑을 다스리는 능력이 있어 뱃사람들이 마음에 들 때에는 뱃길을 잠잠케 하지만 때로 신경질을 부려 해일을 부르는 종족이, 너무도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때로 인간 남자와 정을 통하기도 한다-는 상상에서는 그 두려운 자연재해를 인간―인간 중에서도 뱃사람들, 즉 남성들―이 통제할 수 있다는, 그러기를 바란다는 의도를 추출할 수 있다.
너무나 희귀하여 쉬이 발견되지 않는 종족이 있는데 유독 한 가지 성별의 기능과 이미지만이 전해진다면 그것이 편의적으로 상상된 것이리라 짐작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어째서 사람의 눈에 목격된 인어들은 모두 여인의 꼴을 하고 있단 말인가? 남자인 인어들은 너무 겁이 많아서 뭍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고 하던가?
南海中有鮫人 水居如魚 不廢機織 其眼能泣 泣則成珠(남해중유교인 수거여어 불폐기직 기안능읍 읍즉성주) 남해 속에 교인이 있으니, 물고기처럼 물에 살며 베 짜기를 그치지 않고, 그 눈은 울 수 있어 울면 눈물이 구슬이 된다. (조충지, <술이기述異記>)
한술 더 떠 옷을 입지도 않는다는 인어들이 베를 짠다는 건 대체 어떻게 나온 발상인지 모르겠다.
이와 같은 상상력들 대체가 실존하는 인어들에게 너무나도 큰 결례로 여겨진다.
다른 분야의 과학들이 그러하듯 박물학에는 윤리도 사상도 없지만 박물학자에게는 나름의 그것이 있다. 인어 전승을 되짚어 볼수록 박물학자인 나를 화나게 하는 옛 사람의 상상은 한 마디로, ‘어째서 인어는 여자고 용왕은 남자인가’ 하는 부분이다. 수저 문명의 백성들이 전부 여성이라면 그들을 다스리는 존재 또한 여왕이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전남 신안군에는 도초도라는 작은 섬이 있고 이 섬에서는 명씨 성 가진 노총각이 어부에게 잡힌 인어를 구해준 은혜로 대를 잇게 된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명씨는 인어를 돈 주고 사서 집에 얼마간 두고 돌봐준 뒤에 바다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인어는 바다에 돌아간 뒤 며칠 지나 잠시 뭍을 찾아 옥처럼 곱고 지혜와 재주가 빼어난 남자아이를 명씨에게 안겨주고 다시 떠났다 한다. 도초도에는 지금도 명씨 집안이 남아 있다.
인간-남성 입장에서는 이것이 노총각이 대를 잇게 도와준 유교적 미담일지 몰라도 나의 시각에서 이것은 인어들이 ‘남자’를 취급하는 방식을 더 잘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물 위는 지옥과도 같은 세계로, 인간은 악귀와도 같은 존재로 여길 인어가 자기 자식을 뭍으로 올려보낸 것은 명씨에게―인어는 잘 알지도 못하는 유교적 세계관의 맥락에서― 은혜를 갚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아이를 거부한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이유는 아마 여자 아기가 아니어서가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째서 성숙한―목격된― 인어들은 전부 여성의 신체를 갖고 있는지를 설명할 도리가 없다. 인어들은 남아를 유기한다. 그런데 번식은 어떻게 하는가 같은 것은, 글쎄, 대화를 통해 알아 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대화가 가능한 상대에게 그런 것을 묻는 것은 예의도 아니다. (이런 것을 굳이 말해줘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