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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2일 금요일

마지막 더미 태우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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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자리를 우상이 대체하는 중. 그걸 다르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권위의 자리를 동의가 대체하고, 탐색의 자리를 생존이 대체하고, 고난의 자리를 적이 대체하는 중. 거꾸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적 고난에 대해, 드디어 우리는 그것과 양립할 수가 없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이제 한번 해볼 만하다고 느끼는 중. 누가 죽더라도, 내가 죽더라도. 이런 상태를 두고 억지로 좋은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의의 색채를 더하면서. 거의... 그렇게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다고도 생각한다. 어쩌면 이 모든 일들이 반쯤은, 우리 앞에 음울한 미래만 있다는 느낌에 기대어 있지 않은가? (그리고 나머지 반은 진실로 음울한 미래.) 느낌은 중요하다. 나는 전망이라는 느낌이 복원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망이 주는 오래된 느낌이, 편안한 느낌이. 우리에게는 지금 만사를 거는 도박이 아니라 전망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떻게?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연대다. 전망을 위해서는 연대가 필요한가? 생각은 그렇게 닿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연대는 고통스러운 일이고 고통이라면 사실상 한계다. 연대는 필요악이다. 내게 시급한 것은 문예다. 취미다. 연대를 그나마 견딜 만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마약 같은 것들. 우리에게는, 적어도 내게는 쿠키의 전망이 필요하다. 나는 필요한 것을 믿는다. 많은 이가 함께 믿으면 현실이 된다고들 한다. 엄청난 광량 아래 우거진 잎사귀들을 나는 손에 잡힐 듯이 믿고 있다. 하느님을 믿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 잎사귀들은 많은 이들의 손처럼 보인다. 나는 내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단 듯 만 듯 텁텁한 맛. 그러나 냄새로 그것이 그것임을 안다. 회당에 들어서면 회당의 냄새가 난다. 너무나 추운 날들도 반드시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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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한다. 적절한 작별을. 전망의 조건은 만남이 아니라 작별에 있다. 우리는 작별을 위해서 모이는 것일 수도 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먼저 손을 흔드는 편을 택하는 수가 있다. 작별이 주는 엄청난 슬픔을 우리의 바깥 방향으로 돌려놓기 위해서, 그나마 견딜 만하게. 왜 견디려는지? 저편으로 간 이들과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째선지 번번이 그런 약속을 한다. 만나지도 못할 거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아닐 수도 있다. 이것이 쪽지 태우기의 마지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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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소리 흉내를 그치고, 어째서 이사야가 그런 자세로 앉아 꼼짝도 않고 있는지 궁금히 여기며 다가갔다. 이사야는 돌아보지 않았다. 손을 뻗쳤다. 이사야는 깜짝 놀랄 만큼 차가웠다. 이사야는 딱딱했다. 나는 이사야를 떼어내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이사야는 얼음 덩어리의 소리를 냈다. 이사야가 더 이상 살아 있지 않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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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쬐고 있다가 이사야가 뭔지 모를 작은 짐승을 따라 화살처럼 밖으로 튀어 나가는 것을 본다. 나는 다시 불을 본다. 그가 이제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따라서 나온다. 저것이 쥐잡의 마지막 모습이다... 엄청난 눈이 오고 있다. 불은 타오른다. 이사야는 그날 저녁 돌아온다. 지금은 유령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내 손에 안겨 불을 보고 있다. 나의 꿈도 녹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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