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업 전선 ] 태그의 글을 표시합니다.
레이블이 직업 전선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1년 6월 29일 화요일

저자

안녕하세요, 저는 『직업 전선』을 쓴 사람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직업들에 관해 쓰겠다는 터무니없는 기획, 기획이라기엔 망상에 가까운 이 글쓰기의 연원에는 크게 보면 두 가지의 생각이 있었다고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첫 번째로는 아우구스트 잔더(August Sander)입니다. 이 유명한 독일 사진가에 관해 누구나 알고 계시겠지만, 모르시는 분들 또한 계실 것이기에 짧게 언급하자면 그는 초상 사진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입니다. 그는 〈20세기 사람들〉이라는 초상 사진 시리즈를 통해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일례로 그의 작품 제목들은 여러 직업명으로 되어 있지요. 옛날 언젠가 그의 작품을 살펴보며 “대단히 멋진 기획이군!”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두 번째로는 직업 예술가가 되지 못한(않은) 예술가들에 관한 생각입니다. 세상에는 예술가가 있고, 그보다 많은 수의 예술가가 되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준 미달이라, 운이 없어서, 그저 열정이 식어서, 다른 취미가 생겨서, 생계 때문에, 때로는 자신에게 예술가가 될 가능성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예술가로 살아가기를 포기한, 그러나 예술가의 성정을 가진 이들이 있습니다. 몽상하고 태업하며 살아갈 그들의 노동에 관해 생각했습니다. 저 또한 몽상하고 태업하며 노동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터무니없는 기획을 시작할 당시에 수백 개의 직업을 다루고자 했습니다만, 원했던 만큼 다루지는 못했습니다. 이 ‘저자’라는 족속들의 게으름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지요…… 봄에 원고를 주겠다고 약속하고 나면 이러저러한 핑계(집필의 어려움, 일의 바쁨, 몸의 아픔, 불만족, 추가 원고, 천재지변, 소통의 불일치……)들로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 이듬해 봄으로 최종 마감을 못 박고 나서도 가을의 냄새가 날 무렵에야 그나마 꼴은 갖춘 원고를 주는 놈들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저도 예외는 아니기에 이미 수차례 미뤄왔습니다만 지금 이 자리를 빌어 이 개떡 같은 원고를 살피고 계실 편집자 선생님께 한마디만 더 청하고 싶군요. 제게 일 년만 더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면 애초에 계획하고 아직 쓰지 못한 직업들을 조금 더 추가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제게 시간을 조금만, 조금만 더 주신다면…… 

지극히 현실적인 여러 이유들로 인해 『직업 전선』은 현재의 꼴로 출간되었습니다만,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기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책이 살아 숨 쉬는 생물이라면, 저 스스로 활자를 집어삼키며 생장하고 거대해지는 것이라면 수 년에 걸쳐(어쩌면 평생에 걸쳐) 『직업 전선』이 자라날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언젠가 수십수백 개의 직업에 관한 이야기가 추가된 증보판을, 증보판의 증보판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릴 수 있다면 좋겠군요. 자, 그러면 저는 출간 이후에 제멋대로 찾아오는 우울을 뒤로 하고 그만 일하러 가야겠습니다.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