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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1일 토요일

신곡에서 삭제된 지옥의 해부도

 

 끝내 신을 박멸하지 못한 축생들의 눈물을 저버린 채 살아서 무덤에 묻힐 날을 기다린다. 누가 나의 전부를 열어젖히려 다가올 것인가. 무저갱은 하늘과 대지를 관통하려 용의 아가리를 벌린다. 나는 타락한 천국도, 성스러운 지옥도 아닌 제3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지하세계는 육십사괘의 벌레구멍으로 끝 간 데 없이 전개되어 있다. 망각의 액체 헬륨이 흐르는 미친 암흑에 잠식된 음부에 닿은 나의 메아리는 농축된 신비에 질식한다. 동굴의 정령들이 반딧불을 켠 채 날아다니다 수은중독으로 바스러진다. 4미터 너비의 갱도에는 초전도체 자석이 박힌 100km 길이의 초합금 파이프가 설치되어 있다. 나는 가상입자가속기의 미궁에 갇힌 채 차오르는 망령된 방사성 가스를 피해 허우적거린다. 그때 대전된 입자 빔 두 가닥이 찰나에 수억 번이나 충돌한다. 입자 검출기는 악의 천둥 번개에 관통당해 제어시스템이 망가진다. 우라늄 238의 원자핵이 방사성 붕괴를 일으켜 중성자와 양성자로 쪼개져 핵분열하며 불안정한 중성미자와 반중성미자를 뱉어낸다. 그것들은 광속으로 가속되자마자 서로 충돌하여 진공 속에서 폭발한다. 소형 블랙홀이 생성되어 물경 만 쌍의 눈동자를 끔뻑거리며 활활 타오르는 공포를 쏟아낸다. 어둠으로 구성된 빛은 매번 등 뒤에서 나의 내면을 비춘다. 나는 이글거리는 검붉은 피를 뒤집어쓴 채 허공을 허우적거린다. 그 순간 빛으로 아름답게 빚어진 나 자신과 완벽하게 동일한 형상과 마주한다. 그 빛사람이 왼손을 뻗어내자 오른손을 빼앗긴 나는 거울에 비친 울렁대는 허상으로 전락한다. 간섭무늬 없는 후광 속에서 빛사람은 심장 속에서 세계를 끄집어낸다. 나의 육체는 우주공간을 유영하는 듯한 사후경련에 사로잡힌다. 나의 영혼은 림보를 순례하는 듯한 전신마비에 비틀거린다. 나는 어둠을 발음하지도 못하는데 어둠은 나를 드높여 발휘한다. 어둡고도 두껍고도 두려워서 어두워진 어둠의 이전으로, 아직 빛이 당도하지 못한 미지를 예언하듯 회상한다. 


 ……없다. 사지를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려보지만 아무것도 감각되지 않는다. 없다. 있는 힘껏 악을 쓰고 고함을 쳐도 들리지도 울리지도 않는다. 없다. 거대한 행성이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듯 나는 나의 무력함에 압도당한다. 없다. 끝없이 작아지며 멀어지는 나를 멀리서 내가 지켜본다. 없다. 우주는 순환하며 빛을 발하기도 거둬가기도 하며 나의 죽음을 축복하는 듯하다. 없다. 진공 속에서 온몸의 생기가 증발하자 내면의 부정성이 개방된다. 없다. 나는 정신을 잃고 되찾기를 반복한다. 없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으니 기억과 정체성마저 희미해져 간다. 없다. 계속해서 추락하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없다. 위치와 속도를 잃어버리자 자유의지의 나침반이 얼어붙는다. 없다. 진공은 강력한 자기장을 발하며 티끌과 연기를 뿜어낸다. 없다. 허공조차 희박한 공간 속에서 감압된 시간은 바람소리도 없이 가라앉는다. 없다. 전류의 꽃들은 불규칙적으로 부풀어 올라 거품을 방사한다. 없다. 나의 육체는 흐린 무지갯빛으로 얼룩진다. 없다. 나는 먹구름의 장막을 뚫고 계속해서 추락한다. 없다. 대지의 풍광이 보이는 듯하다. 없다. 지표면에 충돌하기 직전 나는 혼절한다. 없다 나는.


 폐허의 찢어진 4차원 오감도. 지구의 어딘가. 어디에도 없는 영역. 망각된 영토. 수목한계선. 불살라진 지도. 버려진 계획도시. 지하의 비밀연구소. 나는 무저갱된 나. 흩날리는 피의 눈 결정체. 크고 작은 싱크홀들. 금 간 바닥과 천장. 산산조각 난 유리창. 관측 불가능한 이상현상. 거리엔 흩날리는 서류더미. 터져버린 소화전과 솟구치는 시궁창. 느려지는 사이렌. 백지를 찢는 지진계. 폭주하는 시뻘건 가이거계수기. 낡은 모루와 없는 망치. 피 흘리는 석고상. 찢어진 풍경화. 장인의 아뜰리에. 용도가 없는 소품과 희귀한 진품. 함몰된 가정집들. 끝없이 가라앉는 나로부터의 탈출. 실험실과 고문실. 기계를 고치는 기계. 인간을 기계하는 기계. 생체실험부터 핵실험까지. 금지된 만물이론. 가동되는 입자가속기. 발사 직전 우주선을 비추는 과거의 영상. 동시다발 박살 나는 화면들. 역전된 임계점. 위험수위. 천지사방 들끓는 빛에너지. 순간 휘어버리는 철근과 구조. 순간 바스러지는 벽면과 내면. 풍경을 벗어난 폴리스라인. 녹슨 장대비 내리는 거리. 접근금지구역의 찌그러진 철책. 텅 빈 아파트 단지를 배회하는 비명. 회칠 벗겨진 건물들. 공원을 점령한 오물의 늪. 까만 피 솟구치는 분수. 재가 내려앉은 광장. 경악의 얼굴이 새겨진 파사드들. 악령의 무인지대. 원시와 야만. 무력한 문명. 과거가 박제된 골방들. 나뒹구는 살림살이와 잡동사니. 뒤섞여 방치된 골동품과 유품. 낡은 검은색 업라이트 피아노. 조율을 벗어난 음계 속 감춰진 보물상자. 상자 속 앨범과 종이책들. 몇 개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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