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25일 화요일

다큐멘터리

카메라맨은 그를 찍었다가 나를 찍고 그도 아니고 나도 아닌 사람을 찍었다가 담배를 피우러 간다.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나, 사십육억 년이다. 동시에 나는 폼페이의 재로 덮인 사람들 중의 한 명이고 그들이 있는 이 섬이 바로 비극스러운 폼페이다. 나는 우리의 비극을 영상 콘티로 만드는 너를 보고 있다.

다시, 나는 예술학교에서 영상 수업을 듣는 학생 한 명을 바라본다. 그는 나이고, 안타깝게 죽어서 사십육억 년에 나의 삶 스무 해 정도를 이어 붙였다. 우리는 포개어졌다. 그였던 나의 바람은 제 장례식을 지켜보는 것이었고 누가 오는지 않는지를 헤아려보는 것이었다. 나, 그, 시간은 장례식을 지켜본다.

영상처럼.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기도 있다. 억장이 무너진 네 부모가 세수를 하고 돌아온다. 쟤가 내 상주 노릇을 한다니 놀랍다. 장례식에 있는 다른 인간들에게 말하고 싶다. 나는 지금 여기 있으며, 뇌의 시동이 꺼졌을 때. 손 아래로 흘린 조약돌처럼 사람의 시야가 툭 떨어질 때, 이렇게 된다고. 우리는 먼 미래로 날아와서 미래의 과거의 총합이 된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니 두려울 것은 없다. 눈을 감고 아득해져서, 우주에 누적된 슬픔의 고저를 헤아릴 필요도 없다.

폼페이, 재와 먼지가 몽둥이처럼 몸을 두들기는 광경, 먼저 죽은 아이들과 공중목욕탕, 석고가 되어버린 나를 찍는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지고 있으니, 우리라고 다큐멘터리의 소재가 되지 않을 것은 없다. 느리겠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다음 인간이 죽어서 어떻게 되는지 알아낸다면. 저들은 우리를 찍어 영상으로 만들 것이다. 그것은 폼페이 다큐처럼 지구과학에 속할 것이다. 이제 저 카메라맨은 영상 교수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다. 화산이 깨어날지도 모르니까 촬영이 끝나면 서두르라고. 우스갯소리이지만 그 말대로 죽기 전까진 언제나 무서운 것이 있다.

2018년 12월 15일 토요일

2주년 기념 잔치

다른 사람들은요? 글쎄.

우리는 관리실에 앉아 있었다. 관리실은 장판도 깔고 전기요도 들이고 아주 좋아졌다. 쥐잡이는 이불 위에 올라가 있었고, 우리는 이불 속에 발을 넣고 있었다. 나 혼자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관리인과는 꽤 친해졌다. 벌써 두 해가 아닌가.

저는 이렇게 있으면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요, 말하자 관리인은 안경 너머로 내 쪽을 보며 대꾸가 없었다. 동의를 구해 본다는 뜻으로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그는 입을 씰룩이다가 다시 턱을 쳐들고 ‘고양이 대해부’를 읽기 시작할 뿐이었다. 나보다 더 마셨을 텐데 대체 저걸 어떻게 읽고 있는 건지. 사실 관리인은 그걸 읽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붙들고서 적당한 간격으로 페이지를 넘기고 있을 뿐인 게 아닌가? 이제 그 책은 아주 걸레짝이 되었다. 낡은 책을 수선해 주는 뭐 그런 사람도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런 소리는 다른 사람들도 수없이 했을 거다. 관리인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정말로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분명히 누군가 있다는 걸 안다. 아니라면 창고 안의 저것들은 다 무엇인지? 그렇잖아요? 그런 거는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어. 요즘에는 다들 그런 식으로 느낀다니까. 자네까지 그런 소리를 하다니 귀를 의심했어.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다가 병에 걸리고 마는 거야. 그거는 느낌이 아니니까... 그거는 사실이니까... 말을 왜...

나는 뻥튀기를 한 움큼 집었다. 술 좀 더 가져올까요? 가져올 수 있으면. 관리인은 책을 덮고 음악을 틀었다. 나는 엎어져 뻥튀기를 쥔 채로 음악을 듣고 있었다. 아니면 듣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윽고 찬바람과 함께 누군가 들어왔는데, 이분은 ...정이신데, 인사하게, 인사할 수 있으면, 하는 관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인사할 수 없었다. 아뇨 , 괜찮습니다. 속삭이는 듯한 소리였고, 이어서 이사야의 울음소리, 뒤이어 이사야의 작은 발 네 개가 나를 일곱 번 밟고 지나갔다. 누구? 누구라고요? 조장? 교장? 요정, 교정의 요정 말이야. 실례하겠습니다. 또 속삭이는 소리. 그리고 이불 속으로 처음 보는 녹색 발 하나가 쑥 들어왔다.

2018년 12월 3일 월요일

썰매

낙엽 더미에 묻혀 있던 썰매가 이제 보인다. 널빤지 윗면은 할퀴어진 자국들. 아랫면에는 줄글이 쓰여 있으나 번지고 희미해 읽을 수 없다. 햇수가 지남에 따라 더더욱 읽기 어려워질 것이다. 봄과 여름에는 어디에 있었는가? 알 수 없는 노릇이고 별 중요하지도 않다.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