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21일 금요일

해골박

구區 내에서 손꼽히게 큰 A 공원에 이번에 새로 조성되었다 하는 테마관광숲길을 찾아가는 길이다. 무슨 유치한 이름, 멍청한 이름을 붙였던데... 모르겠다. 하여튼 그 숲길 조성은 구청장 공약 사항이었다고 한다. 큰 나무를 줄지어 심고 캘리그래피 시가 들어간 표지판을 주르륵 세웠다는 모양이다. 지금 정확히 그 표지판들 중 하나를 보러 가는 중이다. 다른 게 아니라 구청장 본인이 쓴 시가 거기 있다지 않던가? 시 표지판이란 것만 해도 대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데(우리는 시인들을 싫어하지 않는다) 심지어 구청장 녀석이 자기 시를 거기 갖다가 넣었다고? 정말이지 대갈통이 얼얼해지는 이야기다. 이것은 우리 출판사가 찾던 바로 그런 케이스가 아닐까?

좀 뻔한 얘기인 것도 같지만, 우리 ‘해골박’ 출판사는 만들어져야 할 책이 아니라 파괴되어야 할 책을 찾고 있다. 우리는 역사 또는 작품 속에서 여러 양상으로 펼쳐진 책(넓게는 문화) 파괴와 관련된 자료들을 닥치는 대로 조사했다. 새삼 그 의미에 대해, 왜 우리가 거기 매료되었는지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알아낸 것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유구한 전통을 계승하려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조금은 맞지만. 우리는 경계하고, 또 경계한다. 하지만... 환영한다. 우리는 어떤 파괴에 대해서는 동감한다. 어떤 파괴에 대해서는 절대로 아니고. 우리가 특히 흥미를 갖는 부분은 구분이다.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어떻게 구분되고 있는가? 우리의 관심은 지금 여기에서 편달 중인 구분자에게로 향하고 있다. 책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일까? 만들어지지 않은 책은 파괴된 걸까? 책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파괴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파괴하지 말아야 할 가치는 있는가? 책을 파괴한다는 건 그러니까 대체 뭘까? 우리는 여전히 답을 찾고 싶다.

구청장 B씨의 시가 답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가장 먼저 야구방맹이를 챙겼다. 수박 한 통과 피냐타, 글러브도 챙겼다. 근방에서 눈 가리고 수박·피냐타 깨기, 아니면 야구를 하다가 부숴버렸다고 하면, 혹시 걸리더라도 참작해주지 않을까? 일종의 문화실습동호회라고 하면? 어쩌면 야구방맹이로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 문제를 두고 우리는 토론했다. 징벌적 의미에서 내려치는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고 가능하면 표지판 자체를 부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결국 톱이나 망치, 빠루 등의 공구도 무겁지만 챙겼다. 불태우는 방안이나 페인트를 부어버리는 방안은 환경적 영향을 고려해 기각되었다. 만약 (표지판의 입장에서) 운이 좋다면, 시만 감쪽같이 바꿔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거기까지는 합의했다. 가능해 보이기만 한다면, 우리는 딱 맞는 크기의 백지를 준비해 거기 두 번째로 방문할 것이다. 정말 구청장 B씨가 거기에 자기 시를 (거의) 영원히 남길 생각이었을까? 그건 아닐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다. 아예 거기서 캘리그래피를 하는 방안도 나왔지만 그 도구는 안 챙겼다. 그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바가 아니라는 데 우리는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우리는 무슨 퍼포먼스나 예술을 하려는 게 아니다. 완전 그 반대다. 지금 우리의 마음은 차분하다. 우리는 먼저 확인할 것이다. 구청장 B씨는 정말 뛰어난 시인일 수도 있다. 우리는 많은 짐을 들고 그 테마관광숲길로 가고 있다. 해골박... 우리는 확인한 다음 집행할 것이다.

2023년 7월 20일 목요일

밀고와투서

계간 『밀고와투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종합 경제문화지로서, 우리 자본과 안보의 예술적 동반자입니다. 『밀고와투서』에서 여러분은 국체를 책임지고 있는 각계 리더들의 탁견과 혜안, 전문가들의 깊이 있는 투자 전망과 고품격 트렌드 분석을 비롯, 불온노동계와 시민사회운동·정세 동향 보고,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며 고급부터 대중까지 아우르는 시와 소설 에세이 등 동시대와 소통하는 문학과 만나실 수 있습니다.

창간부터 『밀고와투서』는 문화계에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특히 자유가 꽃피던 시기 『밀고와투서』는 첨단 지성의 집결지이자 창조적 파괴의 산실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경영과학과 글로벌 트렌드·반운동과 문학을 결합한 종합지로서의 구성은 세계적으로도 전위적인 시도로 평가되었으며 지금까지 다채롭고 혁신적이면서도 대중친화적인 기획으로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밀고와투서』의 옆을 지켜준 것은 의식 있는 사회 지도층이었습니다. 대중문화를 앞에서 선도하고 뒤에서 밀어주는 지도층의 선한 영향력은 정치적으로 혼란스런 한국 현대사 가운데서도 『밀고와투서』가 끊임없이 독자를 확장하며 가치를 증명하고 자기를 갱신하여 너른 상업적 성공을 이룩함으로써 제 몫을 해낼 수 있게 이끌어준 진정한 원동력입니다.

『밀고와투서』는 독자와 함께 다시금 ‘저항과 창작의 거점’으로서 세상을 더 낫게 만들어가겠다는 다짐을 새깁니다. 주목받는 작가들과 함께 문단에 문학적 폭과 깊이를 더하며 활력을 불어넣고, 우리 시각으로 우리 것을 소중하게 보듬으려는 노력을 지속하는 동시에 새로운 문명을 열어갈 지혜를 세계적 전망 아래 모으기 위해 힘쓰고자 합니다. 날로 새롭되 한결같은 모습으로 『밀고와투서』는 독자 여러분과 함께하겠습니다.

2023년 7월 17일 월요일

할매틀니

할머니의 작은 틀니가 떠오른다. 그것은 부분틀니였다. 할머니의 가지런한 앞니들이 물 찬 플라스틱 컵 속에 있었다. 그것이 책과도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었나? 나는 생각한다. 글 모르는 아기가 집어던지기라도 한 듯 아무렇게나 펼쳐진 책, 아닌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할머니는 담배를 즐겨 피웠다. 지금은 팔지 않는 담배다. 담배를 피울 때는 틀니를 빼놓았던 할머니, 말이 별로 없었던 할머니, 너와는 아무 통할 말이 없다는 듯, 개를 보듯 나를 보던 할머니. 지금은 여기에 계시지 않는, 그러나 모든 곳에 계시는. 전 인민의 할매化를 나는 오늘 생각하고 있다. 전 인민이 할매가 된다는 것은, 나에게는 그 컵 속의 틀니에 관한 것, 곧 사이보그화를 말하는 것이다. 교합면의 복잡도를 한정하지 않는다면, 인민은 다만 아직 자각하지 못했을 뿐, 이미 할매화되어 있으며, 할매화란 교합면에 대한 인지와도 같다. 그리고 또한 물컵 속의 틀니가 자신이기도 함을, 유리 너머 연기에 휩싸인 할매의 약간 왜곡된 이미지 앞에서 축축하게, 그러나 완전히 침범당하지는 않은 채 인준하는 것이다. 나, 인민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는 어떻게 되는가?” 자유는 재다. 한때 할머니였던. 이것이 인민의 대답이다. 자유가 되려는 것이 우리를 입으로 가져간다. 아이가 집어던지기라도 한 듯 아무렇게나 펼쳐진 책처럼 생긴 것을. 불멸의, 그러나 무한하진 않은 추억 속에서.

2023년 7월 16일 일요일

흡혈문화사

지금은 거적때기를 두르고 있지만 나도 어엿한 흡혈귀다. 피... 신선한 피 새로운 피를 찾아서 나는 헤매고 있다. 전에는 젊은이들의 피를 많이도 마셨지. 지금은 거적때기를 두르고 있지만, 망자의 말라비틀어진 목을 지금은 빨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새로운 피가 좋다. 아무리 맛 좋던 피라도 늙어버리면 지린내가 나고, 죽어버리면 녹을 핥는 거 같지. 시체들이나 예비시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난 새 피를 원한다. 늙은이나 죽은 이의 피를 좋아하는 녀석들도 물론 있다. 난 그런 변태들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런 맛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맛이 아니야. 나는 지금 여기 이 땅의 젊은이를 찾는다. 눈이 빛나는 젊은이, 그러나 확신 없이 두려워 하는 젊은이, 교만한 젊은이 건방진 젊은이, 겸손하고 또 예의를 아는 젊은이, 옛것을 숭배하면서 경멸하는 젊은이! 무엇이든 배우려는 젊은이! 너무 많이 배운 젊은이! 거짓말을 하는 젊은이이고 진실에 튀겨질 준비 중인 젊은이를, 아, 소용돌이치는 젊음이여, 젊은이의 혈관 속에 소용돌이치는 피여! 잔뜩 목을 빼고 다니는 젊은이들이 저렇게나 많다. 떫고 역한 풋맛도 나쁘지 않지만, 그것도 개성이 있어야 좋다. 그것은 즉 새로운 피여야 한다. 새로운 피는 어디에 있나? 나는 검증된 피를 원한다. 그리고 검증되지 않은 피도 원한다. 우유처럼 부드러운 향을 원한다. 조금 비려도 좋다. 나는 열대의 과일향을 원한다. 나는 고소한 맛 산뜻한 맛을 원한다. 다채로운 맛을 원한다. 나는 깊은 맛을 원한다. 무너진 맛, 완전히 빗나간 맛도 나는 원한다. 나는 조금 이상한 맛을 원한다. 뜨겁고 차갑고, 달고 써도 좋고, 맛이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다양할수록 좋다. 다양한 피를 나는 원한다. 예전에 보았던 맛을 오늘날 다시 보길 원하고, 전례 없이 새로운 맛을 원한다. 나는 이 피의 맛과 저 피의 맛이 섞이면 어떤 맛이 나는지 알길 원한다. 피 위에 피를 더하고 싶다. 피와 피를 나누고 싶다. 나는 그렇게 피 칠갑을 하고 싶다. 나는 피 칠갑을 원한다. 나에게 뛰어들어라! 나에게 뛰어들어도 좋다! 나는 피 칠갑을 원한다! 나는 피 칠갑을 원한다! 피 칠갑을! 컴온!

22

 


그냥 갑자기 쓰게 된다. 그냥 갑자기. 지금은 7월 15일이고, 35도이며, 토요일이다. 수요일마다 쓴다고 했는데, 수요일에 쓴 적이 별로 없는 듯하다. 오늘은 토요일에 갑자기 쓰게 되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더웠으며. 잠깐 걸어다녔는데도 땀이 많이 났으며. 수영장에 사람이 몰려서 샤워실이나 화장실에서 온갖 악취가 났으며, 문을 한 시간 후에 닫는다고 하는데도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일하는 사람들이 짜증이 났으며, 짜증을 내는데도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니 어이가 없었으며, 어이가 없어하는 사람들을 보고 마음이 불편했지만 그래도 나는 어제부터 나랑 약속한 게 있었기 때문에 꾸역꾸역 수영장에 갔으며, 악취가 나는 와중에 샤워장 이용도 잘하고 나와서 머리를 35도의 더위에 말리면서 잠시 어딜 갔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냥 갑자기 예고도 없이 쓰게 된다. 아무 생각도 없이. 아무 생각 없이 턱관절에 대한 상담을 하기 위해 의사를 찾아간다. 의사는 턱관절에 대해서 아는 바가 별로 없다고 했다. 사실 자신은 심장 전문의인데, 어쩌다보니 턱관절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찾아가면 아무나 만나게 된다. 내 문제는 턱관절에서 소리가 나는 것이다. 하품을 할 때마다 말이다. 근데 문제는 내가 하품을 너무 자주 해서 가끔 턱이 나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피곤할 이유가 없는데도 말이다. 일단 외출을 하게 되면 하품부터 난다. 하품을 하면서 걸어다니다 보면 피곤하고 그러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니까 나는 외출을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외출을 하는 시늉을 하려고 외출을 한 것이다. 근데 누구에게 그 시늉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할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 그게 내 근본적인 문제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백퍼센트 자몽으로만 만든 자몽주스에 탄산수를 타서 마시면 정말 상쾌하다. 백프로 상쾌하다. 

2023년 7월 14일 금요일

[23호 서신]

*23년도 3사분기 진입
- 과過 또는 저低활동 모니터링
- 수면/섭식 위생 관리 철저
- 저기압으로 인한 급작스런 정서변동·의지상실 대비
- 점점 격렬해지는 국내외 정세 대비(주변 조직화)
- 수해 대비 점검 및 상황발생 시 요령 숙지

*독자 투고 및 모금통 현황
- 올해 1월 최초 투고 이후 이후 투고 없음
- 모금통 5개월 연속 무격려 레이스

*환경정리
- 입하장부 개선 및 매뉴얼 작성 완료
- 연재 태그 소개저장고 페이지 제작
- 관리/검색 편리화를 위해 4자릿수 입고 코드 도입(저장고 페이지 참조)

*알림판 관련
- 트위터 서비스 불안정 및 장래불투명
- 알림판 기능 상실 등의 충격 대비 심적 물적 준비
- 모든 채널로 의견 수신 중

*권장사항
- 공용태그 작성
- 장기 연재중단 태그 입하
- 투고 권유
- 이메일 구독 권유
- 게시판 활용방안 강구 등

이상

2023년 7월 13일 목요일

도시 전설 2

*

도시가 물에 젖고 있다. 조용히 여기서 보고 있으면 도시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것 같다. 도시에 비가 내린다. 도로에 있는 자동차들의 배기음이 빗소리에 묻히고 있다. 빗소리에 묻히니까 나는 여기서 노래 부를 수 있다. 우산을 쓰고 있다. 흰 신발을 신었다. 별이 떠 있다. 나는 옥상 위를 걷고 있다. 조금 빨리 걷는다. 내 끝머리에 물이 조금씩 묻는다. 바람이 세차게 불다가도 잦아든다. 비의 차가움이 우릴 사랑하고 있다. 비의 미적지근함이 너흴 사랑하고 있다. 당신은 뒤에서 우산을 쓰고 있다. 조용한 음정으로 당신은 말하고 있다. 빗소리에 묻혀서 잘 들리지 않아요. 그러니까 조금 더 크게 말해줄래요? ……눈물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도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눈물이 나지 않는다. 단지 도시에 비가 내리고 있다. 도시가 물에 젖고 있다. 그뿐이다.


*

당신은 얼굴이 있다. 누구나 그렇듯이. 이 동아리실의 문 너머로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얼굴을 떨어뜨리고 있다. 당신도 얼굴을 떨어뜨린다. 그걸 보고 익명적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이 안이 아늑하다고 느껴진다면. 당신은 스스로에게 알맞은 분위기를 찾은 것이다. 대부분의 것이 다 분위기지만 그 이상의 것도 우리는 글이라고 부르고 있다. 다른 이상한 말이 없는 것이다. 여기는 누구나 환영하는 동아리이고 얼굴이 없는 것은 감수해야 해요. 조용히 책을 읽던 부원이 옆에서 말한다. 안경을 코에 걸고 있는 부장이 당신에게 질문한다. 여기에 사람이 부족한 건 왜라고 생각하나. 오후 6시가 되었다.


*

여기서 동아리 부원들이 모이고 있다. 뒤편에는 믹스 커피 박스가 있다. 지금 이 시간이 주로 모이는 때다. 여기서 사람들이 조용히 책을 읽거나 한다. 페이스리스라는 조금 특이한 이름은 부장의 주장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대부분의 차분한 동아리가 갖고 있는 ‘등록만 해두고 동아리 활동을 안 하는’ 부류에 의해 곤란을 겪고 있다. 이 동아리에서는 세계관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고 또 권장되고 있다. 그 세계관이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세계-관념이라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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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리 선배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학교에 미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꽤 당연한 일이다. 나도 그랬으니. 우리는 졸업반이고, 내가 학교 다닐 때에는 그림을 그리는 어떤 선배가 우리 학교에 와서 그 직업에 대해 40분 정도 알려준 적이 있었다. 되게 재밌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우리는 커서 뭐가 되는 걸까? 여기가 소설 속 세계라면 재밌는 직업을 갖게 될 것이다. 세카이계나 뭐 그런 거. 세카이계가 소설이 맞나? 부기팝……? 어쨌든. 여기가 소설 속 세계가 아니라면 나는 재미없는 직업을 갖게 되거나, 아니면 백수가 되겠지. 어쨌든 이 세계선이 소설 속 세계인지 아닌지는 비밀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아마추어 세계관 창작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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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동아리실,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그다지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 하루히 같은 일상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건 많은 사람들의 연습이 필요하니까. 밖을 보니 고추잠자리가 날아다닌다. 동아리실은 여러 가지 세계관이 만들어지고 그것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곳이다.


*

그뿐이다. 도시가 물에 젖고 있다. 단지 도시에 비가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눈물이 나지 않는다. ……눈물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도 있다. 그러니까 조금 더 크게 말해줄래요? 빗소리에 묻혀서 잘 들리지 않아요. 조용한 음정으로 당신은 말하고 있다. 당신은 뒤에서 우산을 쓰고 있다. 비의 미적지근함이 너흴 사랑하고 있다. 비의 차가움이 우릴 사랑하고 있다. 바람이 세차게 불다가도 잦아든다. 내 끝머리에 물이 조금씩 묻는다. 조금 빨리 걷는다. 나는 옥상 위를 걷고 있다. 별이 떠 있다. 흰 신발을 신었다. 우산을 쓰고 있다. 빗소리에 묻히니까 나는 여기서 노래 부를 수 있다. 도로에 있는 자동차들의 배기음이 빗소리에 묻히고 있다. 도시에 비가 내린다. 조용히 여기서 보고 있으면 도시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것 같다. 도시가 물에 젖고 있다.


*

장마가 계속되고 있다. 도시가 바다 아래에 있다는 듯이. 

2023년 7월 10일 월요일

사타내셔널

친구한테 시를 배우기 시작했다. 영 난처해하는 걸 그냥 우겨서. 커피를 한잔씩, 밥을 한 끼씩 사주면서. 갑자기 무슨 시를 쓰겠다는 거야? 시라도 쓰면 좀 나을까 해서. 많이들 쓰는 거 같던데? 많이 누가? 그리고 하나도 나아지지 않아. 너한테 아무 도움도 안 돼. 네 생각은 그렇다는 거지? 왜 그런 생각이 들었어? 시라도 쓸 생각. 답답하니까. 뭐가 답답해? 굳이 대답하지 않을게. 그래. 친구는 내가 써 들고 간 시를 두고 여러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했다. 이게 여기 있으면 이쪽이 좀 그래. 그럼 어떡해? 이렇게? 그래 그것도 좋아. 미안하네. 내가 가르칠 만한 입장이 아니어서. 하지만 노력 중이야. 이건 괜찮고 이건 아니야. 왜 아닌데? 글쎄... 이건 여기 이게 있으니까 아니야. 만약 이걸 그냥 둔다면 이쪽은 이게 좋아.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화내려는 게 아니라, 뭐가 괜찮고 아닌지를 어떻게 알아? 그걸 다 말하려면 너무 길어. 듣기 좋은 얘기도 아닐 거고. 그런 건 설명해줘야지 무슨... 맞아. 나도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궁금하면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가. 가르치고 배운다는 게, 나 같은 아무나하고 갑자기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 일도 훈련이 필요하고 나는 훈련되어 있지 않아. 그 사람들이 괜히 돈 받는 게 아니라고. 그래 알았어 알았어. 계속해봐. 이건 여기에 되니까 이렇게도 걸리거든? 내 생각엔 이게 여기로 오면 더 좋을 것 같아. 어때? 근데 이러면 상관이 없어지는데? 없어도 돼. 이게 더 나은 것 같기도 해. 근데 이러면 네가 쓰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그래. 그런 거야. 그런 위험이 있는 거야. 그걸 기억해. 네가 쓰는 거야. 하지만 위험에 노출시키는 거야. 너는 자신을 놓치는 거야. 다른 걸 얻는 거야. 위험에 노출시킨다... 난 사장님을 위험에 노출시키고 싶어. 사장님을? 그래. 그럼 그렇게 해봐. 하지만 또 기억해, 사장님은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 그렇지 않아. 그럴 리가 없어. 아니야. 사장님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래. 네가 노출된 위험과 직접 비교할 수는 없지만, 네가 노출된 위험과 직접 비교할 수 없는 위험에 사장님은 노출되어 있어. 그 어떤 사장님이라도 그래. 그 어떤 너라도 그렇듯. 그건 정말 답답해지는 얘기야. 그렇다니까? 하나도 나아지지 않는다고 했지... 그런데 왜들 그렇게 쓸까? 네가 쓰려는 이유하고 비슷하겠지. 그런가? 사실 사장님, 사장님이 시집을 낸다고 난리야. 어떻냐고 자꾸 나한테 물어보잖아. 이상한 시를 뽑아서 주면서. 뭐가 별이 어쨌느니... 별을 무시하지 마. 기억해. 별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 아니 이제 됐어 그 얘긴. 그럼 사장님 시를 평가해야 하니까 나한테 가르쳐달라고 한 거야? 아니야. 아니지 당연히. 기억해줘. 악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

2023년 7월 5일 수요일

무자비

자비출판을 고려하는 당신! 출판사명이 고민이시죠?
출판사 ‘무자비’가 답이 되어드리겠습니다.
당신 책의 출판사명 자리에 ‘무자비’를 넣으세요.
무자비 출판사는 어떤 형태의 독점적 권리도 주장하지 않습니다.
무자비 출판사는 어떤 책이든 품을 수 있는 하나의 개념입니다.
무자비 출판사는 허상이 아닙니다.
메일 한 통을 보내주셔도 좋습니다.
무자비 출판사의 여러 채널들에 신간 알림을 띄워 드립니다.
아무 대가 없이요.
이것은 사기가 아닙니다.
무자비가 당신의 비전을 돕습니다.
이것이 무자비 출판사가 제안하는 새로운 출판입니다.
그것은 출판사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는 도서목록입니다.
당신이 누구든, 몇 명이든 상관없습니다.
당신의 책이 무슨 책이든 상관없습니다.
무자비의 전당에 당신의 책을 들여보내십시오.
무자비의 미래는 잠정적으로 무궁무진하고
거의 무한히 변화무쌍합니다.
당신의 책이 어떤 책이든 괜찮습니다.
당신의 책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무자비 출판사 홈페이지에서 로고 스탬프와 스티커를 구매하셔도 좋습니다.
책등용, 표지용, 내지용의 세 가지 종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무자비의 전당에 책들을 들여보내십시오.
당신이 책을 만들지 않아도 좋습니다.
무자비의 비전을 당신이 채우는 것입니다.
지금 가십시오!
밝혀지지 않은 어둠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2023년 7월 1일 토요일

신곡에서 삭제된 지옥의 해부도

 

 끝내 신을 박멸하지 못한 축생들의 눈물을 저버린 채 살아서 무덤에 묻힐 날을 기다린다. 누가 나의 전부를 열어젖히려 다가올 것인가. 무저갱은 하늘과 대지를 관통하려 용의 아가리를 벌린다. 나는 타락한 천국도, 성스러운 지옥도 아닌 제3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지하세계는 육십사괘의 벌레구멍으로 끝 간 데 없이 전개되어 있다. 망각의 액체 헬륨이 흐르는 미친 암흑에 잠식된 음부에 닿은 나의 메아리는 농축된 신비에 질식한다. 동굴의 정령들이 반딧불을 켠 채 날아다니다 수은중독으로 바스러진다. 4미터 너비의 갱도에는 초전도체 자석이 박힌 100km 길이의 초합금 파이프가 설치되어 있다. 나는 가상입자가속기의 미궁에 갇힌 채 차오르는 망령된 방사성 가스를 피해 허우적거린다. 그때 대전된 입자 빔 두 가닥이 찰나에 수억 번이나 충돌한다. 입자 검출기는 악의 천둥 번개에 관통당해 제어시스템이 망가진다. 우라늄 238의 원자핵이 방사성 붕괴를 일으켜 중성자와 양성자로 쪼개져 핵분열하며 불안정한 중성미자와 반중성미자를 뱉어낸다. 그것들은 광속으로 가속되자마자 서로 충돌하여 진공 속에서 폭발한다. 소형 블랙홀이 생성되어 물경 만 쌍의 눈동자를 끔뻑거리며 활활 타오르는 공포를 쏟아낸다. 어둠으로 구성된 빛은 매번 등 뒤에서 나의 내면을 비춘다. 나는 이글거리는 검붉은 피를 뒤집어쓴 채 허공을 허우적거린다. 그 순간 빛으로 아름답게 빚어진 나 자신과 완벽하게 동일한 형상과 마주한다. 그 빛사람이 왼손을 뻗어내자 오른손을 빼앗긴 나는 거울에 비친 울렁대는 허상으로 전락한다. 간섭무늬 없는 후광 속에서 빛사람은 심장 속에서 세계를 끄집어낸다. 나의 육체는 우주공간을 유영하는 듯한 사후경련에 사로잡힌다. 나의 영혼은 림보를 순례하는 듯한 전신마비에 비틀거린다. 나는 어둠을 발음하지도 못하는데 어둠은 나를 드높여 발휘한다. 어둡고도 두껍고도 두려워서 어두워진 어둠의 이전으로, 아직 빛이 당도하지 못한 미지를 예언하듯 회상한다. 


 ……없다. 사지를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려보지만 아무것도 감각되지 않는다. 없다. 있는 힘껏 악을 쓰고 고함을 쳐도 들리지도 울리지도 않는다. 없다. 거대한 행성이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듯 나는 나의 무력함에 압도당한다. 없다. 끝없이 작아지며 멀어지는 나를 멀리서 내가 지켜본다. 없다. 우주는 순환하며 빛을 발하기도 거둬가기도 하며 나의 죽음을 축복하는 듯하다. 없다. 진공 속에서 온몸의 생기가 증발하자 내면의 부정성이 개방된다. 없다. 나는 정신을 잃고 되찾기를 반복한다. 없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으니 기억과 정체성마저 희미해져 간다. 없다. 계속해서 추락하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없다. 위치와 속도를 잃어버리자 자유의지의 나침반이 얼어붙는다. 없다. 진공은 강력한 자기장을 발하며 티끌과 연기를 뿜어낸다. 없다. 허공조차 희박한 공간 속에서 감압된 시간은 바람소리도 없이 가라앉는다. 없다. 전류의 꽃들은 불규칙적으로 부풀어 올라 거품을 방사한다. 없다. 나의 육체는 흐린 무지갯빛으로 얼룩진다. 없다. 나는 먹구름의 장막을 뚫고 계속해서 추락한다. 없다. 대지의 풍광이 보이는 듯하다. 없다. 지표면에 충돌하기 직전 나는 혼절한다. 없다 나는.


 폐허의 찢어진 4차원 오감도. 지구의 어딘가. 어디에도 없는 영역. 망각된 영토. 수목한계선. 불살라진 지도. 버려진 계획도시. 지하의 비밀연구소. 나는 무저갱된 나. 흩날리는 피의 눈 결정체. 크고 작은 싱크홀들. 금 간 바닥과 천장. 산산조각 난 유리창. 관측 불가능한 이상현상. 거리엔 흩날리는 서류더미. 터져버린 소화전과 솟구치는 시궁창. 느려지는 사이렌. 백지를 찢는 지진계. 폭주하는 시뻘건 가이거계수기. 낡은 모루와 없는 망치. 피 흘리는 석고상. 찢어진 풍경화. 장인의 아뜰리에. 용도가 없는 소품과 희귀한 진품. 함몰된 가정집들. 끝없이 가라앉는 나로부터의 탈출. 실험실과 고문실. 기계를 고치는 기계. 인간을 기계하는 기계. 생체실험부터 핵실험까지. 금지된 만물이론. 가동되는 입자가속기. 발사 직전 우주선을 비추는 과거의 영상. 동시다발 박살 나는 화면들. 역전된 임계점. 위험수위. 천지사방 들끓는 빛에너지. 순간 휘어버리는 철근과 구조. 순간 바스러지는 벽면과 내면. 풍경을 벗어난 폴리스라인. 녹슨 장대비 내리는 거리. 접근금지구역의 찌그러진 철책. 텅 빈 아파트 단지를 배회하는 비명. 회칠 벗겨진 건물들. 공원을 점령한 오물의 늪. 까만 피 솟구치는 분수. 재가 내려앉은 광장. 경악의 얼굴이 새겨진 파사드들. 악령의 무인지대. 원시와 야만. 무력한 문명. 과거가 박제된 골방들. 나뒹구는 살림살이와 잡동사니. 뒤섞여 방치된 골동품과 유품. 낡은 검은색 업라이트 피아노. 조율을 벗어난 음계 속 감춰진 보물상자. 상자 속 앨범과 종이책들. 몇 개의 추억. 


23년 6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누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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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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