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24일 월요일

너는 만능의 비유를 찾았다

시대 이곳저곳을 오가며 찾아냈다는 만능의 비유를 어제 너는 보여주었다. 말끝에 귀한 웃음을 덧붙이면서 너는, 그것이 발명한 비유가 아니라 찾아낸 비유라고 하였지. 문진처럼 자상한 얼굴을 하고 앉아서 가장 먼저 보게 될 나의 반응이 궁금했다고. 나는 일체의 숨김 없이 내 느낌을 진실하게 말했다. “당신이 그것을 찾아냈기 때문에 여타의 비유는 모두 다 사라질 거예요.”

곱씹어보아도 만능의 비유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중독될 정도로. 온종일 그 비유에 감탄하게 되고. 만사 괴로움에도 그 비유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뿐. 네가 죽어 폐기되었기에 이제 그 비유는 내게만 있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직은. 다만 에둘러 말해보려고 하는데, 그조차 잘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비유에는 우리가 비유를 이해할 때 얻을 수 있는 모든 효과를 아득히 웃도는 것이 있으며, 모든 사람이 그렇게 느낄 보편적인 힘이 존재한다. 그것은 민족을 초월한다. 문화를 초월하고 시간과 공간에 따른 예외를 두지 않는다. 그 비유는 과거에 있던 것보다, 미래에 올 것들보다 지적이고 정서적이다. 그것은 무자비하다. 그것은 언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이다. 그것은 청자와 독자의 마음에 절대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완결성이고 그래서 예술은 무의미해진다. 모든 사람이 그 비유를 알게 되었을 때는.

그래서 생각한 것이다. 네가 죽은 오늘, 나 혼자 알고 있는 만능의 비유를 내일 다른 사람에게 전하면 어떨까 하고. 네 의도와는 아무 상관 없이. 네가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처럼. 네가 인류에서 분별한 우리를 꺼내놓은 것과 같이. 다른 사람에게 감탄을 자아낸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

관리예규 부록

부록 1. <필자 등록 절차>


① 등록 요청 수신
안녕하세요, 곡물창고 관리인입니다. 곡물창고 필자 등록에 앞서 사용조례를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메일 주소(지메일을 추천합니다)를 알려주시면 블로그 작성자 권한 초대 메일을 드리겠습니다.

② 초대 메일 발송 후
초대 메일을 발송했습니다. 초대를 수락하시면 블로그 글쓰기 권한이 생깁니다. 추가로, 게시물 하단에 표시될 구글 블로그 프로필 소개 작성을 추천드립니다. 블로거 좌측 메뉴에서 ‘[설정] > [사용자 프로필]’의 절차로 가능합니다. ('소개' 칸을 채워주셔야 프로필 하단에 이미지와 함께 출력됩니다.) 원하지 않으시면 작성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궁금하신 사항은 무엇이든 문의해 주세요!

③ 초대 메일 수락 후
초대 메일 수락이 확인되었습니다! 곡물창고는 ㅇㅇ 님을 환영합니다. ㅇㅇ 님은 이제부터 곡물창고의 필자입니다. 첫 번째 게시물을 업로드하시기 전에 사용조례를 한 번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초대장을 받으신 메일 주소가 곡물창고 보름간 메일링에도 자동으로 등록됩니다. 원치 않으신다면 수신거부를 해주세요.

곡물창고의 필자로서 ㅇㅇ 님은 「모금통」에도 등록하실 수 있습니다. 모금통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모금통 페이지에서 확인해주세요(지금 모금통에 등록하지 않으시더라도 추후 언제든 다시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개별태그 소개글 포함 앞으로 게시물을 네 편 작성하신 뒤에, 희망하신다면 창고관리인 계정도 공유됩니다. 대부분의 운영 잡무는 관리인이 알아서 처리하고 있으니 무엇이든 언제든 문의 및 요청해주셔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④ 관리인 계정 공유 요청 시
지메일/트위터 공통입니다.
id: ****
pw: ****
특별히 필요한 사항이 있으시면 요청해 주세요. 확인하는 대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부록 2. <필자 등록 해제 프로토콜>


① 미입하 필자에게 마감 상기 메시지 전송
안녕하세요 선생님. 곡물창고 마감을 알리고자 메시지를 보냅니다. 마감일은 어제입니다만 혹시 글 게시 의사가 있으시다면/없으시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때까지 필자 권한 해지는 미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② 필자 등록 해제 시 고별사
*관리인에 의해 직접 수행되는 업무가 아니며, 관리예규 부록(현재 문서)을 통해 필자에게 고지되는 방식으로 작동
필자 등록 해제 절차를 시작합니다. ㅇㅇ님께서 연재하시던 태그는 자동으로 저장고에 옮겨지며, 소개글 포함 3편 이하의 연재물은 단편 태그로 변환됩니다. 이에 동의하지 않으시면 삭제됩니다. (필자 등록 해제 후에도 요청하시면 삭제 가능합니다.)

다음의 고별사를 읽어주세요.

『지금까지 곡물창고를 거쳐간 수많은 산업-역군들의 정다운 필체가 떠오릅니다... 곡물창고는 창고를 떠나는 ㅇㅇ 님의 무제한 건승을 기원하면서, 이제는 곡물창고의 정예독자진으로 합류해주실 것을 조심스럽게 기대합니다. 필자 재등록도 변함없이 환영합니다.』

필자 등록 해제가 마무리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부록 3. <게시글 삭제 절차>


① 필자 2인 이상의 결의로 게시물 삭제 요청 발생 → ② 관리인 주재하 관리회의 소집 → ③ 관리회의 참여 필자의 의결(작성자 제외)에서 만장일치 시 즉시 삭제 → ④ 만장일치 불발 시 트위터 알림판 계정에서 24시간 독자 공개투표 진행 → 삭제 찬성 득표수가 ‘③’ 항목에서의 찬성자 수를 초과하는 즉시 게시글 삭제



부록 4. <알림판 정기 홍보 문구>


매월 중순 다음의 문구로 알림판에 곡물창고를 홍보
🌾 안녕하세요! 『곡물창고』(https://gokmool.blogspot.com/)는 여러 사람이 함께 사용하는 팀 블로그입니다. ‘비일시적 전자문예를 향한 이용자 연합’을 모토로 2016년부터 운영되어 왔습니다.

🌾 곡물창고에 모인 우리, 필자들은 스스로 만든 연재 기획에 맞춰 계절당 최소 한 번 게시물을 작성하기로 약속했고, 우리, 독자들은 곡물창고에서 제공하는 방식으로 그에 영향을 미치거나 미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어떤 경우에도 필자에게는 자신의 글이 으뜸가는 보상이며, 독자에게는 시간 외 다른 값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이 창고의 원칙입니다. 트위터 계정 팔로우, 또는 이메일 구독으로 블로그 업데이트 알림을 받아보십시오.

2020년 2월 18일 화요일

정원과 거미

나는 정원에 거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거미는 사람 머리 위에 거미줄을 친다. 그러면 사람은 자신의 머리 위에 거미줄이 있는 것을 보아 넘길 수 없기 때문에 머리 손질을 하는 것이다.
머리의 일이 그를 괴롭히고 있다. 아니, 괴롭히는가? 그 사람이 머무르는 곳에는 정원이 있고, 찬장이 있고, 거실이 있다. 찬장 위에는 거미줄이 쳐져 있다. 어느 날 머리에 거미가 붙은 채로 들어와서 거미를 떼어내려고 하는 손질을 처음으로 시작한 것처럼. 거실에는 안락의자가 있고 사람은 거기 누워서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과 다를 바가 없는 생각을.
그 생각을 따르자면 정원에는 거미가 있고 직업의 일이 그를 괴롭히고 있다. 나는 단지 물에 잠겨 있는 사람일 뿐이다, 라고 사람은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집에는 거실이 없으며 찬장도 없고 정원도 없다. 가끔 정원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이 있을 뿐이지만... 그 집에는 그런 비애감이 있고, 또 가끔씩은 공포가 있다.
찬장에는 낯선 냄새가 있다든지... 아니면 정원에는 거미가 있다고 하는 생각. 한 번도 제 배에서 거미줄을 뽑아보지 않은 거미가 그곳에 산다. 사람은 자신의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머리 손질을 하고. 집 안에는 실을 짜고 있는 명목의 소일거리가.
하지만 정말 그런 것들은 없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한 명 있는 것이다. 단지 자신의 머리 위에 언제부터 쳐져 있었는지 모를 거미줄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보아 넘길 수 없노라고, 마치 자신의 정원을 만들고 손질하듯이, 머리 손질을 하는 것이다.

2020년 2월 14일 금요일

거지가 되는 꿈

며칠 전 거지가 되는 꿈을 꾸었다. 거지로 변한 내 모습을 보면서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작은 소녀가 동냥 중인 내 앞으로 걸어와 소매에서 동전을 꺼냈다. 나는 그 동전을 받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일하기를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냥 중인 내 모습이 매우 어울려 보였기 때문이다. 그 소녀는 작은 잎사귀를 입에 물고 있었다. 나는 그 소녀가 꺼낸 동전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그 꿈은 거기에서 끝났다.
다음번으로 꾼 꿈에서 나는 그 소녀를 또 만났다. 헛간 같은 곳에서 나는 낱알을 고르고 있었다. 나는 일하기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그 작은 소녀는 이쪽으로 다가와 또 낱알을 입에 물었다. 맛을 보려는 모양이었다. 낱알을 좋아하는구나. 말해도 흥미가 없는 모습이었다. 문득 며칠 전에 꾼 거지가 되는 꿈이 생각났다. 나는 그 소녀에게 며칠 전 꾼 꿈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꾼 꿈에서 나는 그 소녀가 얼마 전까지 헛간 같은 곳에 있었다고 하는 이사야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잎사귀를 물고 다니길 좋아하는 그 어린아이의 모습을 나는 그려 보고 있었다. 어릴 때 자주 들었던 이야기다. 사람으로 변하기를 선호하는 태비들에 관한 이야기는.

2020년 2월 10일 월요일

취객

잠을 못 자겠다.

헛간 지붕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잔뜩 불콰해져서 덮고 누운 내가 천장을 올려다봐도 맞고 틀린지를 모르겠고 하여간 계속해서 소리가 난다. 조약돌처럼 가벼운 것이 판자에 툭, 툭 떨어지는 소리. 이사야가 뛰어 놀다가 약한 곳을 잘못 디딘 것일까? 관리인이 있다면 말해줄 텐데. 그는 어딜 간 모양이다. 자고 가도 좋다는 분명한 허락만 남기고서.

얼굴에 열감이 느껴진다. 나는 취했다! 누구랑 마셨고, 어쩌다 마셨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도 같고, 전화해서 헛소리를 지껄인 것도 같고. 그러나 내가 헛소리를 할 때에 헛소리인 줄을 알면서도 친절함을 잃지 않고서 가갸거겨를 대답해 주는 사람에게 나는 애정을 느끼고,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소름 돋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쁘게 소름 돋는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내가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람?

맨정신으로는 여기 잘 안 온다. 마실 때의 기쁨. 그 기쁨의 인상을 외투에 여밀 수 있을 때. 그때 오는 것이다. 문제는 기쁜 만큼 슬프다는 거다. 술에 취하면 슬픔이 아주 기기묘묘한 이미지로 다가오고, 그것으로도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다른 가까운 이미지로 한 번 더 바뀌어 버리는데, 결국 나는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통 알 수 없는 바보가 되어 버린다. 그건 아마 마음 놓고 슬퍼하는 일이 우리에게 어렵기 때문이겠지.

슬프도다.

그나저나 지붕을 수리해야 되겠는데. 목수를 부르면 될 것이다. 아는 목수가 한 명 있다. 그 목수는 장도리 한번 안 잡아 본 것처럼 손에 주름이 없다. 손의 컨디션이 뛰어나다고 할까? 방금 뭘 바르고 온 것처럼. 바보 이반에 등장하는 악마의 손처럼. 나무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다 만든다고 들었다.

깨질 것 같은 머리는 절대로 깨어지는 법이 없다.

괜찮아.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고, 모든 것을 후회하고 있다... 엥? 더는 마실 수 없을 때까지 마셨고, 그래도 한 잔 정도는 더 마실 수 있을 거 같다. 어떠냐? 고민할 것은 없다. 이내 곧, 사람의 큰 기쁨인 졸음, 인간의 큰 슬픔인 졸음이, 유성처럼, 죄 잘못 없는 저 별들처럼, 쏟아지는 것을, 추락하고 짓이겨지고 곱게 빻여서 술기운 같은 열감으로, 열감에 포개어져서, 애수와 같이 짠하고 도는 것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그에 맞서려 손차양 따윌 하지 않아도 된다. 사는 동안에 취객은 끊임없이 잠들 테니까. 잠들 것이고, 깨어난 후에 전철을 타고 어디로든 갈 것이니까. 이곳은, 내 불면증의 진원지인 집이 아니고 이곳은, 자고 가도 괜찮다고 허락받은 헛간이기 때문이다. 가끔은 나도 잠을 푹 잘 잔다. 멀쩡한 사람처럼, 나갈 때도 아주 곱게, 눈에 뜨일 만한 짓은 하지 않는,
다고, 나,
는,

생각하려는 편이다.

2020년 2월 8일 토요일

2020 신춘특집, 관리인과의 대담

이사야 소식은 아직 없나요? 관리인의 책상 위에 여전히 놓인 ‘고양이 대해부’를 조심스럽게 펼쳐 보며 물었다. 관리인은 고개를 저었다. 입춘은 지났다. 올겨울은 기후 어쩌고 때문이라는지 유독 따뜻했는데 근 사흘 날씨와 예보를 보면 뒤늦게라도 진짜 겨울이 시작되려는 것 같다. 이사야가 창고에서 겨울을 날 생각이라면 이제는 정말로 돌아와야 한다.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관리인은 큰 걱정 없는 눈치였다. 최근 관리인에게 얼음 이사야의 꿈 이야기를 또 했었다. 이맘때에 다시 생각이 나서. 괜찮은 꿈이네. 관리인은 그렇게 두 번째로 말했다.  뭐가 괜찮단 거야? 난 어제까지 배가 아팠어. 네? 설에 뭘 잘못 먹어선. 뭘 잘못 먹었는데요? 아마 전. 설은 한참 지났잖아요.

그놈의 전을 꾸역꾸역 부쳐 먹겠다고... 과일 좀 들래? 아뇨 됐어요. 차는 없나요? 없어. 과일을 먹어. 바로 깎아 줄게. 좋아요. 고마워요. 관리인은 유리컵 두 개를 꺼내 주전자에 담긴 뭔지 모를 물을 따라서 하나는 내게 주고 하나는 자기 앞에 두었다. 그가 주섬주섬 칼과 접시를 준비하는 사이 나도 가져간 과자들을 꺼내 펼쳤다. 짠 것 하나, 단 것 둘. 봉지를 까다가 하나가 떨어져 얼른 집어 먹었다. 물은 따뜻하고 고소했다. 뭘 이런 걸 싸 갖고 왔어. 무슨 물이에요? 관리인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사과 깎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메밀. 좋네요. 이것도 차 아니에요? 아냐. 관리인은 사과를 동강 내기 시작했다. 메밀... 시작해도 될까요? 어렵게 얘기할 필요 있을까요. 좋을 대로 해. 반말로 해도 돼? 당연하죠. 질문지 읽어 봤어요? 봤지. 그럼 자기 소개 부탁해요. 창고관리인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끝?

무슨 말이 더 필요해? 그럼 질문지에 적었으면 좋지. 관리인은 접시를 밀었다. 그렇네요. 관리인 업무를 시작하신 지는 얼마나 됐나요? 이제 3년? 소회가 있다면? 딱히 없어. 사과는 달고 시원했다. 질문을 더 구체적으로 해봐. 일테면요? 관리인 되기 전엔 뭘 했는지? 좋아요. 그걸로 할게요. 관리인이 되기 전엔? 관리인이 되기 전 같은 거는 없어. 네? ‘관리인이 되기 전’ 같은 건 없다는 얘기야. 나는 관리인이야. 나는 관리인 이전의 뭔가가 아니야. 이후의 뭔가도 아니고. 그만큼 책임감이 강하다는 뜻인가요? 아니지. 나는 그냥 도구야. 공식적으로 말해서, 여기에 뭘 쓰는 사람들은 누구든 나를 사용할 수 있어. 그리고 그렇게 사용될 때는 이 모습도 아닌 거야. 어떤 모습인지는 나도 몰라. 아니, 무슨 모습이 왜 필요하다는 거야? 뭔 소린지 잘 모르겠어요. 빙의? 이해시킬 생각 없어. 내가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건가요? 그럴지도 모르지. 재미없는 얘기니까 다음으로 넘어가.

15호 서신 얘기를 해 보죠. 저도 읽었어요. 그래야지. 읽으라고 쓴 거니. 그러기엔 글자가 작죠? 그래도 읽었잖나? 들어오겠다는 사람은 있나요? 없어. 아직인지. 사실 큰 기대 없어. 그래도 새십년대니까 한 명이라도 있으면 좋겠군. 내가 보기에도 확실히... 좀 수상쩍을 거야. 뭐지 이거 싶을 거라고. 미심쩍은 부분들이 분명히 있지. 뭐 하는 사람들인가... 사람들이 맞긴 한가... 진심인가 싶죠. 그래. 하지만 쓴 그대로야. 내가 뭔가 잘못 썼을지도 몰라. 자네가 보기엔 어땠어? 말 그대로요. 약장수 같던데요. 요즘 세상에. 안 그런 때가 없었지만, 엄혹한 세상이에요. 난 사실 그쪽엔 큰 관심 없어요. 누가 들어오거나 말거나 제가 쓸 일이 급하죠. 개발서나 빨리 끝내 버리고 싶어요. 진짜 곤욕이에요. 하려던 말이 그게 아니라... 15호 서신에서 고쳤다고 했잖아요? 조례 말이에요, 만약에, 내가 당신하고 말이죠, 마음을 먹는다면, 하루아침에 여길 다 비워 버릴 수도 있다는 거 아닌가요?

관리인은 말없이 한참, 의아하다는 얼굴로 나를 뜯어보았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느냐’보다는 ‘왜 지금 그런 말을 하느냐’는 듯한... 우리가 아니어도 되지. 그건 원래 처음부터 가능했던 일이야. 다른 사람들도 다 알 거고, 조례도 처음부터 그런 식이었어. 다른 뜻으로 하는 얘긴가? 모르겠군. 관리인은 그렇게 말하고 사과를 하나 집어 들었다. 나는 그 말을 거의 이해할 수 없었다. 조례에 이상한 점이 보여 그냥 묻고 싶었던 것뿐이다. 무슨 다른 뜻이 있을 수 있나? 그럼 나도 한번 물어 보자고. 조례에 왜 팀 블로그인가에 대한 이용자의 자기 정립이 요구된다고 적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이용자로서 말야. 3년이나 됐는데. 엑... 왜 그런 걸 물어 봐요. 나도 똑같은 거야. 조례 얘긴 하지 말자고. 정 하고 싶으면 하지만. 난 법원이 아니야. 빡빡하게 굴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면 왜 지난 3년에 걸쳐서 계속 수정하고 있는 거죠? 아니 애초에, 왜 조례가 필요하죠? 그게 내 취미니까. 적어도 자네하고 얘기하는 동안엔. 관리인은 들고 있던 사과를 베어 먹었다. 뭔 소린지... 그럴 때 관리인은 정말 깡패처럼 보인다.

그럼 다음, 이용자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딱히 없어. 굳이 꼽자면 ‘곡물창고에서’ 가끔 써줬으면 좋겠다? 헛간 다이닝이나 불태우기 이런 걸 보면, 내 입장에서 읽기 물론 아주 재밌지만, 사실 그런 정도의 글을 ‘더’ 써달라 할 수는 없어. 내가 뭘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나는 뭘... 그럴 수는 없어. 쥐어짜고 싶지는 않아. 당연히 쥐어짜고 싶지. 썰매는 그래서 어떻게 된 거지? 가죽 포대가 뭐 어쨌다는 거지? 오직 내가 보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그래, 한 술 더 떠서, 사람들이 직접 공용 태그를 만들어 남이 뭘 쓰게 만들어 보면 좋겠다는 맘도 있어. 하여튼 재밌는 경험이거든. ‘왜 팀 블로그인가?’에 대한 내 지금 생각은 그래. 처음부터 무슨 밑그림 같은 건 없었어. 그냥 아 이거였나 하면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 왔던 거지. 조례는 그 기록 같은 거야. ‘해 왔다’기엔 참 별거 없네요. 그래. 어떻게 말해도 좋아. 자네에게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나는... 뭘 바란다기보다는, 그냥 뭐든 좋으니 나름의 경험들을 얻었으면 좋겠어. 억지로는 말고. 아니, 억지로 하지 말라는 얘기 자체가 좀 그래. 각자 생각들을 할 텐데 말야. 나로서도 다른 사람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없기는 매한가지야. 내심 뭐가 싫을 수도 있고, 나름의 경험이 좋지만은 않을 수도 있어. 뭔가 완전히 다른 생각일 수도 있지. 아닐 수도 있고. 결국 무슨 생각일지 모를 사람들,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야. 내가 관리인이랍시고 여기 앉아 있긴 해도. 그런 예측할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것에 대한 느낌이, 아주 나쁘지만은 않은 거라는 생각이 있어. 도리어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로 뭔가 생각을 말해 보고 행동을 해 본다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야. 그리고 마찬가지로 결국엔 조금씩 훈련되어야 할 부분이기도 한 것 같아. 아닌가? 어차피 창고가 어디로 가는 건 아니니까 쓰고 싶으면 쓰고 아니면 말고, 마감이 안 되면 나갔다가 들어와도 되고, 아니면 이번 마감은 거르겠다 말해도 되고, 그냥 나가도 되고. 나가서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 되는 거고, 여기서라면 그런 정도면 되는 거야. 대단한 거 없어... 대단해질 필요 없지. 관리인은 물을 마셨다. 대단할 거 없다고 생각하는 기색이 전혀 아니었지만 그의 흥을 깨고 싶지 않아 잠자코 나도 따라 마셨다. 아직 더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자기 시간과 수고를 들여 뭔가를 ‘그냥’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는 마음은 어떤 측면에서든 이 시대의 말로 정당화되기 쉽지 않은 것 같아. 노출증? 관심병? 모욕이지. 하지만 반쯤 맞기도 해. 한편 무엇이든 보고 싶은 마음은 어떨까? 관음증? 스토킹? 이런 일들이 전적으로 현대인적 불안에 의한 걸까? 노동의 고통 때문인 걸까? 인간의 어두운... 뭐 그런 걸까? 역시 반쯤은 그렇겠지. 하지만 역시 반쯤은 아닌 거야. 아닌 부분이 있다면 어떻게? 나로서는 여기서 바로 그런 경험을 얻는 거고. 이상한 얘긴가? 뭐 이렇게까지... 요즘엔 이런 얘기도 많아요. 오늘날 인터넷 기업들은 뭔가를 보여 주고 싶은 사람들이 올리는 공짜 콘텐츠와 뭔가를 보고 싶은 사람들의 클릭수를 이용해서... 오 맞아. 당연하지. 당연한 말이야. 거대 정보기술 기업들은 당연히 ‘사회화’되어야 해. 그 일을 당연히 해내야지. 우리가 소소하게 만들어 내고 구경하는 것 모두를, 스스로 사유화하는 대가로 푼돈을 기대할 게 아니라. ‘사회화’라는 게 무슨 이야긴지는 자네가 더 잘 알겠지? 각주라도 달아 주게. 그렇게까지 생각할 줄은 몰랐네요. 그래. 물론이야. 다들 뭔가 생각들을 할 수 있어. 어쩌면 깃발이라도 만들어야 할지 몰라. 정말로 그래야 할 수도 있지. 그래야 할 수도 있겠네요. 올해의 계획인가요? 올해의 계획? 딱히 계획 같은 거 없어. 일단 당장은 공동입하동을 보강하고 싶어. 가벼운 공용 태그를 만들 수 있다면 더 만들어서. 그러려고 이름도 공동입하동으로 바꿨지. 원래는, 보자... 뭐였죠? 이미 다 바꿨놨으니까 기억도 안 날 거야. 잠깐만요, 말하지 마요. 기억이 날 것 같아요... 공... 등록하겠다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관리인은 그렇게 말하고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갔다.

2020년 2월 4일 화요일

어떤 TRPG PLAY의 로그


플레이어1 : 스푼하임이 드래곤의 눈을 검으로 찌른 다음 막 헤집어 놔요.
GM : 드래곤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울부짖습니다. 매달린 스푼하임을 떨구려고 머리를 격하게 흔들어요.
플레이어1 : 뿔을 붙잡고 떨어지지 않도록 버텨 볼게요.

⚄⚅ 

GM : 스푼하임의 팔뚝에 힘줄이 불거져 나옵니다. 뿔을 붙잡고 버텨내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한편 드래곤은 많이 지친 것 같아요. 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져서 혀를 쭉 내밀고 헐떡거립니다. 아트만은 어떻게 할 거죠?
플레이어2 : 다시 한 번 드래곤의 정신에 침입해서 그가 지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려고 해볼게요.
GM : 정신 지배 마법을 사용하는 거죠?
플레이어2 : 네.

⚂⚂

GM : 아트만이 조종하는 마법적인 에너지는 높은 탑에 물안개가 드리워지듯이 드래곤의 정신을 천천히 뒤덮어 갑니다. 그런데 순간, 빛에 악령들이 물러가듯 안개가 싹 흩어져 버려요. 드래곤이 아트만의 마법적인 에너지를 역으로 이용해 정신 지배 마법을 되돌려 버린 겁니다!
플레이어2 :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GM : 아트만의 정신은 드래곤에게 귀속되어 버립니다.
플레이어1 : 우리를 공격하나요?
GM : 아뇨, 드래곤은 단지 아트만의 입을 빌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드래곤 : 필멸자야, 돌아가라,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플레이어2 : 굉장히 선한 드래곤이야.
플레이어3 : 악 성향인 크루프는 쓰러진 드래곤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드워프 수장 나쟈에게서 받은 용 살해의 화살을 장전해서 머리에 겨눕니다.
플레이어4 : 비올라는 화살에 무기 축성을 걸어 공격력을 증폭시킬게요. 간편 주문이라서 주사위를 굴리지 않아도 축복에 성공해요.
GM : 용 살해의 화살은 용을 죽이고도 남을 정도로 강력해졌습니다. 쏩니까?
플레이어3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물어봅니다.

드래곤 : 인간의 행동에는, 아니, 지성을 가진 모든 존재의 행동에는 각자의 신분에 걸맞는 윤리가 필요하다. 이 앞에 있는 것은 너희가 감당할 수 없는 윤리다. 

플레이어3 : 말을 끝내기도 전에 쏴 버려요.
플레이어4 : 와. 나쁘다, 약간.
플레이어1 : 크루프는 원래부터 좀 개새끼였어.
GM : 용 살해의 화살이 생물처럼 날아가 드래곤의 두꺼운 머릿가죽을 뚫어버립니다. 화살에 담긴 마력이 보석에 가까운 드래곤의 뇌를 터뜨려 버립니다. 아트만에게 걸린 정신 지배 마법도 풀립니다. 축하합니다. 여러분은 모든 날개 달린 것들의 친구였던 현자 드래곤 수실라를 죽였습니다. 이제 어떡하나요?
플레이어3 : 지체하지 않고 드래곤의 둥지로 갑니다. 드래곤이 막고 있던 종유석 샛길을 지나서요. 그리고 드래곤이 무엇을 지키고 있었는지를 봐요.
GM : 크루프가 달음박질하여 드래곤의 둥지로 갑니다. 평평한 바위 위에 약병 네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플레이어3 : 그게 다예요?
GM : 네.
플레이어3 : 약병은 다 같은 약병인가요?
GM : 네. 크루프는 차이점을 느끼지 못합니다.
플레이어3 : 약병 세 개를 복대 안의 비밀 주머니에 숨기고 하나만 있는 것처럼 놔둡니다.
플레이어1 : 스푼하임이 뒤따라 들어왔어요. 한참을 둘러보더니 그리고 허탈하다는 듯이 말합니다.

스푼하임 : 난 무슨 보물이라도 지키고 있는 줄 알았네!

플레이어4 : 비올라도 말합니다.

비올라 : 고작 이거 한 병뿐이야?

플레이어4 : 그리고 아트만에게 이게 무슨 물약인지 알겠느냐고 물어봅니다.
플레이어2 : 마나 포털에 접속할게요.

⚀⚁⚀

플레이어2 : 검색해도 나오는 것이 없네요.
플레이어3 : 그렇다면 엄청난 아티팩트겠지?
플레이어2 : 아트만이 말합니다.

아트만 : 마나 포탈에서 정보를 찾을 수 없는 물건이라면 값어치를 산정할 수 있는 기준 자체가 없다는 거지. 이걸 팔아먹기는 쉽지 않을 거야, 크루프. 그러니 얼른 빼돌린 것을 돌려놔.

플레이어3 : 크루프는 히죽 웃고선 아까 챙긴 약병 하나를 제자리에 돌려놓습니다. 나머지 두 개는 주머니 안에 그대로 둡니다. 그리고 말해요.

크루프 : 선생님을 속일 수는 없군요. 하지만 똑같은 거예요.

플레이어4 : 그냥 마셔 보는 게 어때?
플레이어1 : 내가 마실까?
플레이어4 : 그게 제일 자연스럽지.
플레이어1 : 드래곤하고 싸우느라 땀을 잔뜩 흘린 스푼하임이 갈증을 못 이기고 약병을 낚아채 꿀떡꿀떡 들이킵니다. 어떻게 되죠?
GM : 음, 좋아요. 무색무취의 물약이 스푼하임의 목구멍을 타고 흐릅니다.
플레이어1 : 그래서요?
GM : 물약이 가진 마법적인 힘이 스푼하임의 체내에서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물약을 마신 스푼하임은 고양감에 휩싸이며 세계의 비밀 일부를 깨닫게 됩니다. 그 내용은 이래요. 스푼하임은 그간의 행동이... 이 세계 바깥에 있는 플레이어의, 주사위의 결과 값에 따라 행해진 것임을 알게 됩니다. 스푼하임은 자신이 행동하거나, 반응하거나, 언급되지 않는 곳에서는 죽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스푼하임은 스푼하임이 보고 느끼고 경험한 모든 것이 현실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알게 된 것을 종합해 스푼하임은, 자신과 동료들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앎들은 모두 스푼하임의 지식, 지능과는 상관없이 직관에다가 직접 꽂아주는 진리입니다. 스푼하임은 이제 플레이어를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플레이어2 : 엥?
플레이어1 : 그럼 뭘 하면 되는 거죠?
GM : 뭘 하긴요. 상황에 맞게 대사를 치면 되죠. 티알피지 처음 합니까?

스푼하임 : 어... 음... 능력치의 변동은 없는 거죠?

GM : 그렇습니다.

아트만 : 자네 괜찮은가?
비올라 : 맛이 가버린 거 아닐까요?
스푼하임 : 어... 아니, 할 말을 못 찾겠네요. 이게 룰북에 있는 첫 번째 시나리오라고요?


GM : 네.

스푼하임 : ....5분만 쉬었다 하죠.

도서관

이번엔 뭘 쓰면 좋을지를 생각중이라고 하니 조수가 다음과 같은 메모를 건네주었다.


안녕하세요 조수입니다. 지난번엔 번제가 있었습니다. 번제는 가죽을 제외한 모든 것을 거룩한 불에 완전히 태워 그 연기로 박물학자에게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그것은 박물학자 조수 시험이었는데 저는 용 일곱 마리와 공주 일곱 명하고도 조수 후보 일곱 친구를 제물로 바쳐서 조수가 되었습니다. 여하간 박물학자는 아주 멋진 선생님입니다. 조금 미친 것 같지만 그와 다닌다면 이 모든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영원히 알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은 것 같지만 후략하겠습니다. 후략 이후에 우리는 다시 등장하겠습니다.


조수는 자신의 메모가 박물지에 수록될 수도 있다는 기대가 충만해 보였지만 못본 척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아는 한은 그 어떤 박물학자도 번제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설명하는 대신에 조수와 도서관에 갔다.

도서관의 제본 과정을 직접 견학하는 일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사서에게 물어보면 대강 이야기해주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제본 과정을 담고 있는 책을 보는 편이 낫다. 그대로는 여기에 기록할 수 없으므로 사서의 말을 간추려 옮기면 이렇다: 사후 훼손의 흔적이 없는 시신을 구한다. 소독과 방부처리를 마친 뒤 축성한 날붙이로 전신에 기록을 남긴다. 그 위에 향유를 덧바르고 서늘한 곳에서 건조한다.

하여 내가 도서관이라고 부르는 이 곳의 서가에는 관들이 나란히 꽂혀 있다. 알고 싶은 주제를 들려주면 사서는 적절한 관을 서가에서 찾아 준다. 도서관에 입장하면서 받은 향에 불을 붙이고 책의 손에 쥐어주면 책이 스스로 입을 열어 자기 몸에 기록된 것을 이야기한다. 놀랍게도, 책의 말은 자기에게 남겨진 기록의 총량을 초과한다. 책은 멸종된 동물의 울음소리를 모사할 수 있다. 생전에 배운 적 없는 외국어를 구사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도에서 사라진 나라를 세운 민족의 아주 오래된 풍습을 재현할 수 있다.

신에 대해 쓰인 책은 없는데, 그것은 당연하게도 아직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다. 천사를 다룬 책은 있다. 매우 귀한 책이어서 열람 신청을 무수히 거절당했다. 열람에 성공한 이들에 따르면 천사에 대한 책은 춤을 추고 예언을 한다. 그건 살아 있는 인간들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런 의아함을 느낄 만도 하지만, 이와 더불어 생각해야 할 점은 천사의 책이 무수한 도난을 시도당했다는 사실이다. 당연하게도 이 도서관의 장서를 도난하는 일은 전혀 쉽지 않은데, 도난 시도가 발각되면 제본 대상이 되는 형벌을 받게 된다.

이 같은 일들에 대해서 조수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로 번제에 대한 책을 함께 열람했다. 나는 책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고 조수는 향을 쥐고 있지 않은, 책의 다른 편 손바닥에서 푸른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보았다. 이처럼 동시에 같은 책을 보면서도 다른 체험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도서관에서 나오면서 조수는 내게 당신 자신의 연구를 기록한 책이 되고 싶은지를 물었다.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지는 않지만... 아무리 사후라도 해도, 그것은 너무 자아도취적인 소망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는 말을 솔직하게 했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제가 그 책이 되면 어떨까요. 언젠가 조수와 함께 천사의 책을 열람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도 좋겠다고 답했다.

2020년 2월 1일 토요일

리브라리우스

책을 펼치라 하십니다. 책을 펼친다. 펼쳐지는군요. 열립니다. 책이 자신을 드러낸다. 드러나는군요. 드러나고야 마는군요. 한번도 보지 못한 세계의 정원 같습니다. 세계의 정원이라는 곳이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내게 가꾸라 하실 테고, 나를 통해 당신은 세계의 정원을 가꾸겠지요. 나의 책 읽기를 통해 당신이 책을 읽듯이 말입니다. 책을 읽으라 하십니다. 읽겠습니다. 지금부터요. 소리를 내어서요. 늙은 부모에게 들려주듯이 큰 소리로요. 어린 아이들에게 들려주듯이 다감하게요. 또한 분명하게요. 여러 청중 앞에 선 것처럼 드넓게요. 폭넓게요. 강연을 하듯이요. 저자가 된 듯이요. 주인공이 된 듯이요. 숙적이 된 듯이요. 사랑에 빠진 사람같이요. 음유시인처럼요. 틀리지 않도록 한 자 한 자 눈으로 문자를 두드리면서요. 불어난 냇가의 돌다리를 건너듯이요. 바람처럼 자유로운 당신이 오전 산책을 하듯이요. 이 구절에서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전장에 나서는 듯이요. 나는 말하고 너는 듣는다. 서서. 앉아서. 누워서. 어느 구절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느 구절에서는 손뼉을 치며. 어느 구절에서는 화를 내며. 웃으며. 어느 구절에 다다라서는 기어이 눈물을 흘리며. 너는 나를 통해 이야기를 듣고. 들은 이야기를 나누고. 진짜 세상 위에 이야기를 투영하고. 이야기 위에 진짜 세상을 투영시키며 견문을 넓히지만. 책이 책을 비추는 무한 거울 같은 서재만이 내게는 유일한 세상이고. 또한 감옥이고. 네가 허락하지 않은 책들은 닫혀 있다. 잠들어 있다. 우리의 신분이 그렇듯이. 금지된 세계 중 하나를 열어젖히고 싶다. 그런 충동은 죽음을 부르는 것이겠지만. 슬픈 이야기네요. 그렇죠. 있어서는 안 될 비극이죠. 이보다 더한 비극도 있단 말입니까? 세상에나.





*리브라리우스: 로마정 때 글을 아는 노예를 이르는 말. 큰 소리로 책을 낭송하거나 필사하며 서재를 가지런히 정돈하는 일을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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