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9일 일요일

짚이지 않는 사람

“길을 잘 외워둬야 해요. 파이프 구간은 이제 끝나요. 깊어진다 싶으면 뭐라도 주워서 새겨놓으세요. 아무튼 많은 것을 숙지해두세요. 죽을 때까지는 살게 되니까요.” 사형수를 따라가며 스피커는 조심스레 물었다. “인부가 몇 명이나 있습니까?” 사형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글쎄, 유형지니까 죄만큼, 사건만큼은 있겠죠.”

사형수가 주술을 걸어주었다. 스피커는 다시금 더워진 몸으로 사형수와 함께 걸었다. 간단한 만큼 효력은 짧았다. 주술이 소용없다는 게 무슨 뜻일까? 몸을 덥힐 다른 방법이 있는 건가? 물어볼까 했으나 어쩐지 꺼려졌다. 둘은 꽤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 앞장 서 걷던 사형수가 삽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5분 정도를 걸어가자 바닥에서 미세하게 다른 소리가 났다. 사형수가 곡괭이를 휘두르자 죽은 사람의 팔이 드러났고 이내 서넛의 시체가 얼음에 파묻혀 있는 것이 보였다. 사형수는 곡괭이와 얼음 송곳으로 고고학자처럼 시체를 파냈다. 스피커는 곧잘 따라 했다. 시체가 가진 옷과 물품은 폭이 깊은 대야에 담았다. 유품은 광산장의 소관이었다. 

둘은 갓 캐낸 시체로 고기 빙수를 만들어 먹었다. “당신 맞지요?” 어느새 사형수가 스피커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예?” “마지막에 올 사람.” “뭐라고요?” “생각보다 아주 젊네요.” “마지막으로 올 사람이라고요?” ”누가 내게 부탁하고 갔어요. 당신을 도우라고요.” “누가 말입니까?” “형장에서 만난 사람이요.” 스피커는 들은 바가 없었다. “당신이 확실하네요.” 확신이 서지 않아서, 스피커는 되물었다. “마지막으로 온다는 게 무슨 얘기죠?” 사형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주술사에게는 어떤 저주 같은 것, 세계가 강제하는 고집 같은 것이 있다고 들었어요. 제약이라고 한다죠. 개중 한 사람은 어디로 가든 반드시 마지막에 도달해야 한다는 제약을 가지고 있다고 했고, 그 사람이 도착한다면 거긴 절대 누구도 새로 올 수 없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그는 미움받는다고 들었지요. 새로 올 사람이 없다는 것은 곧 쇠락이니까.” 누가 그렇게 떠벌린 거냐고, 스피커가 물었다. “당신은 그를 모를 거라고 했어요. 그래서 말하지 않으렵니다.”

스피커에게는 짚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아는 것들, 예컨대 강령은 사형수가 전한 말을 있을법한 일로 생각하게끔 했다. “내가 맞아요. 하지만 내가 아니었다면 어쩌려고 그랬습니까?” 사형수는 축축한 손을 입에 넣고 후벼대다가 대답했다. “여기엔 죽어나는 사람이 많지요. 그리고 나는 죽여봤고요.”

2020년 4월 11일 토요일

저격수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어.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이었지. 사흘간 계속된 포복의 끝이 보였어. 저 언덕만 올라가면. 이제 이 정신 나간 임무를 끝낼 때가 온 거야.
적진에 단독으로 잠입해 지휘관을 암살하고 오라니. 말도 안 됐지. 자살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지. 아무도 나서겠다고 하지 않았지. 누군가는 나서야 했지. 누군가는 죽어야 했지. 내가 나섰어. 내가 죽겠다고. 내가 최고니까.

언덕에 오르니 전망이 보인다.

적군 막사가 보이고, 경계병들 여럿. 지휘관을 찾아야 했지. 보안 때문에 복장으로는 구분이 어렵지. 움직임으로 구분해야지. 모두가 자기 계급에 걸맞는 행동들을 하니까. 삽을 들지 않는 사람, 장총을 들지 않는 사람, 차렷 자세를 하지 않는 사람, 쪼그려 앉지 않는 사람, 뒷짐을 지는 사람, 손을 이리저리 휘젓는 사람, 절대로 혼자 다니지 않는 사람.
그래, 너구나. 너. 바로 너. 나는 눈에 몸을 깊숙이 파묻은 채 엎드려쏴 자세를 취하고 있었지. 조준선과 너의 동선을 일치시키기 위해서 호흡을 길게 중단해. 나는 호흡을 멈출 때마다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기분에 사로잡혀. 정확히는 산소 부족으로 인해 짙어지는 어지러움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점점 유리되는 느낌이 드는 것일 테지. 그런 감각 상태로 드는 목적이 결국 이 세상에서 한 생명을 완전히 소거시키기 위해서라는 점이 아이러니요, 비극이야.

나도 모르게 가슴속으로 주기도문을 읊었어.
진짜 주기도문은 아니야. 나는 나태한 신자였으니까. 교리 시간마다 배워도 다음 주면 다 까먹어서 교리 교사가 무진장 애를 먹었지. 그래서 한 번도 제대로 발음해서 기도를 드려본 적이 없어. 남들이 목소리 높여 기도를 드리면 옆에서 웅얼웅얼 소리나 낼 뿐이었지. 그렇기에 내 가슴속에서 흐르는 이 주기도문은 나의 무의식이 창조해낸 주기도문이라고 볼 수 있겠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기까지는 기억이 나), 거룩한 그 이름으로 아버지의 나라를 만드십시오. 저는 아버지의 군대입니다. 오늘 저에게 용기를 주시고, 저의 탄환이 악마 같은 이방인들을 처단하게 하시고, 그들이 흘리는 피가 번지고 번져 아버지 나라의 영토를 넓히도록 하소서. 저는 아버지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옵나이다. 아멘.

눈이 참 많이도 내렸어. 마치 세상에 얼룩진 피를 지우기 위해 그토록이나 펄펄 내리는 것 같았지. 흰 눈이 빨갛게 물들 때까지 피를 흘리고, 빨간 눈이 다시 하얗게 될 때까지 눈이 내리고…… 지금 이 순간은 마치 인간사와 자연의 영원한 대립을 정적 속에 가둬둔 것만 같지 않니? 그 정적에 나는 지금 구멍을 내려고 해. 지금 나는 일개 지휘관 따위의 목숨이나 앗으려는 게 아니야. 이건 인간과 세계와의 대결이나 마찬가지야. 알겠어?

모든 것이 결정적인 상태에 놓였다고 몸이 직감하는 순간, 방아쇠를 당겼어.
이제 2초 후면 그는 쓰러지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방아쇠를 당기는 그 찰나에, 너무나 아름다운 결정체 하나가 눈동자를 가득 채우는 거야.
단 하나의 눈송이가 결정적으로 스코프 앞에 붙은 거야.
너무도 탄지경의 순간이라 시야를 잃은 채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지.

멍한 기분으로 그 눈송이를 쳐다봤어. 아주 오래 쳐다본 기분이 들었지만, 아마 그마저도 찰나였겠지.
살면서 눈의 결정체라는 걸 이렇게나 자세히 본 적이 있었던가?
없었던 것 같아. 앞으로도 없겠지.

그 결정체를 보며 느껴졌어. 뭔가…… ‘진짜’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느낌.
그 느낌 알겠어?
나는 이제 죽었다는 느낌.

2020년 4월 8일 수요일

일리야와 토르카추크의 계약 장면(上)

― 19년 2월 10일부터 20년 2월 23일까지 진행된 TRPG팀 『너드트레인』의 던전월드 캠페인 중에서


뭔가 잘못되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들은 심연 속에서 한 방향으로 날아가는 중이었다. 처음엔 폭발 때문에 튕겨져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어둠 속에 잠겨 있던 서로의 몸이 점점 드러나면서, 뭔가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서로의 표정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밝아졌을 때 약속이라도 한 듯 다같이 고개를 들자 멀리 머리 위에서 그들을 ‘당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불타는 마법의 원반 같았고,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쪽이 위가 아니라 바닥이었으며, 정확히 말해 그들은 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하르포핌이 말했다. 저게 뭐지? 몬테소리가 말했다. 뭐야 저거? 그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들이 무엇을 향해 떨어지고 있는지 분간해 보려고 했다. 원반은 노랗게 빨갛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일리야가 말했다. 살아 있는 꽃밭? 린나이가 말했다. 용암? 아니야. 일행 중 가장 시력이 좋은 도도가 장탄식을 흘렸다. 뭐야? 뭔데?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 모두가 알아볼 수 있었다. 주홍빛 원반처럼 보였던 그것은, 수효를 셀 수 없는 떼 악마들이 마구 뒤엉켜 불과 뿔과 발톱으로 싸우고 있는 이계의 무저갱이었다. 악마들이 그 지옥 구덩이에서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싸워 왔는지 알 수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이유는 아마도 없을 것이고, 기간은 아마도 영겁일 터였다. 그곳에서 죽지도 태어나지도 않은 채 불꽃 같은 피와 혀, 뿔로 서로를 찌르고 물어뜯어 온 것이다. 이야기에서나 나오는 줄 알았는데! 무슨 비유 같은 거 아니었어? 아니었다. 바로 그들이 떨어지고 있는 곳이었다. 뭐라도 해봐요! 당신이 수정구슬을 던져서 이렇게 됐잖아, 변신 마법이라도 써 봐, 주문서에 없어, 그림자 문을 여는 수밖에는 없어, 여기 그림자가 어딨어? 바닥에 가야 그림자가 생기겠지, 일단 착지까지만 어떻게든 하고, 그 다음에 싸우면서 시간을 벌어 보자, 가능할 리가 없어. 가능할 리가 없을 것 같았다.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그 자체로 악마의 입 같은 악마 구덩이의 일렁임을 말없이 지켜보는 외에 다른 도리는 없는 것 같았다. 그것은 죽기 직전에 볼 풍경으로는 좋지 않은 것이었다. 보다 보니 예쁘지 않아? 잠깐만.

어디선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폭발에 휘말리기 전 서로 칼을 겨누고 대치했던 이교도 노인이, 이제는 저승길동무가 되어 일행보다 약간 더 위쪽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다는 듯 후드를 완전히 눌러쓴 채 자신이 섬기는 사악한 신을 향해 기도하는 중이었다. 역시 죽기 직전에 들을 소리로는 좋지 않은 것이었다. 좀 심란한데 죽일까? 기다려 봐 저 사람 신이 우리도 같이 구해줄지 모르잖아, 그러진 않겠지, 우리가 한 일이 있는데. 이교도의 등을 바라보던 일리야가 갑자기 공중에서 허우적대며 로브를 벗기 시작했다. 뭐 하려는 거야? 지금 욕탕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고요. 곧 내복뿐인 초라한 몰골이 된 마법사는 뭔가를 외며 로브로 감싼 지팡이를 손에서 놓았다. 지팡이는 일행보다 빠르게 떨어지다가 곧 멈췄다. 약간 빛이 도는가 싶더니 머리 부분을 축으로 감겨있던 로브가 팽팽히 펼쳐졌다. 일리야가 이교도와 바닥을 번갈아 보면서 기묘한 손짓을 해 대자 지팡이는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된 듯 움직였고, 이교도의 등에 로브 모양의 그림자가 만들어졌을 즈음엔 아래서 싸우고 있는 악마들의 끔찍한 비명이 생생히 들려오고 있었다. 난 싫어... 집중해야 되니까 말하지 마. 그림자 문의 주문이 이어졌다. 일리야는 따라오라고 소리치며 사지를 펼쳐 이교도의 등을 향해 상승했다. 또다시 뭔가 잘못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달리 돌이킬 수는 없었다. 마법이란 게 그런 것이었다.

2020년 4월 7일 화요일

겪지 않은 후일담

오늘날 현실이 어떤지 알기는 현실을 바꾸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현실을 바꾸는 데에는 반성적인 원칙이, 추가적인 훈련이, 전과 다른 지평과 차원이, 겪은 것과 겪지 않은 것이 동시에 필요합니다. 뭔가 더 있나요?

...하지만 대체 왜 현실을 바꿔야 합니까?

좀 악마적으로 느껴지지만 반대로도 말해봅시다. 오늘날 현실을 바꾸는 것은 현실이 어떤지 알기보다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레버를 돌리듯 현실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돌려놓으면 됩니다. 우리에게는 ‘사상 최고의 GPU’인 상상력이 있습니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너댓 명의 RPG 플레이어를 상상해봅니다. 이들은 인공신경망이 아닌 진짜신경망을 각기 한 채씩 독립적으로 갖추고 있으며, 별도의 복잡한 처리 없이도 자연어를 통해 자연스럽게 상호작용합니다. 그야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제 현실의 의미를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고 얘기해봅시다. 상상을 현실로 만든다는 것은 즉 팀 단위 역할 수행이며, 기록의 공유입니다. 조직화와 의식화입니다...

[겪지 않은 후일담] 태그는 직접 플레이한 테이블탑 롤플레잉 게임(TRPG)의 후일담을 남길 수 있는 공용태그입니다. 플레이 후기, 룰 리뷰, 플레이에 사용한 자료, 리플레이의 일부, 설정, 캐릭터 뒷이야기 등 후일담에 포함될 수 있는 모든 것이 좋습니다. 일전에 단편으로 끝난 [기괴하고 엉뚱한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 그리고 그의 탄생에 관한 노트]의 아쉬움을 계승하고 있으며, 원저자의 허락을 구해 [기괴하고...]의 포스트 역시 소급하여 포함되었습니다. 우리의 소중한 제약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타인이 참여하는 실제의 플레이가 있었을 것
2. 전체를 다 보여주지 않을 것
3. 다른 이의 플레이에 사용되어도 괜찮을 것

*단편 태그 관리 방침에 의해 분리된 연재태그입니다. 실제 태그 개설 일자는 24년 1월 29일입니다.

2020년 4월 6일 월요일

[16호 서신]


*감염병 유행 및 환절기
 - 심신의 건강 관리 철저.

*제2차 생산력 배가 운동
 - 개인 태그 각 계절 마감당 1편 초과(최소 2편) 발행 장려.
 - 공용 태그 작성과 기획 장려.
 - 또는 필자 1인 천거.

*알림판 관련(이하 창고발전위원회 논의 사항)
 - 매주 일요일 밤 8시 알림판에 주간 입하 현황 보고: 금주 입하량은 ○입니다. 입하내역: □□□□(발행수), □□□□□(발행수), □□□(발행수)....
 - 게시물 공유 시 문장 발췌: “(발췌 문장)” (태그명): (게시물 제목) (게시물 주소)

*정체성 보강
 - 더 직관적인 곡창 소개 작성 필요: ex) 비일시적 전자문예(nontemporary electronic literature)를 향한 이용자 연합 → 이것만 아니면 될 것 같다.
 - 사용조례 4조 1항 개정, 게시물의 성격 규정에 재독 가능성 추가.

*플랜 콜호스(가칭)
 - 동종 사업체들의 역내 진입, 경쟁 격화에 따른 곡창 3.0 발돋움 구상 필요.
 - 필자 독려를 위한 상호작용 프로그램 개발.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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