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8일 수요일

일리야와 토르카추크의 계약 장면(上)

― 19년 2월 10일부터 20년 2월 23일까지 진행된 TRPG팀 『너드트레인』의 던전월드 캠페인 중에서


뭔가 잘못되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들은 심연 속에서 한 방향으로 날아가는 중이었다. 처음엔 폭발 때문에 튕겨져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어둠 속에 잠겨 있던 서로의 몸이 점점 드러나면서, 뭔가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서로의 표정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밝아졌을 때 약속이라도 한 듯 다같이 고개를 들자 멀리 머리 위에서 그들을 ‘당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불타는 마법의 원반 같았고,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쪽이 위가 아니라 바닥이었으며, 정확히 말해 그들은 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하르포핌이 말했다. 저게 뭐지? 몬테소리가 말했다. 뭐야 저거? 그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들이 무엇을 향해 떨어지고 있는지 분간해 보려고 했다. 원반은 노랗게 빨갛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일리야가 말했다. 살아 있는 꽃밭? 린나이가 말했다. 용암? 아니야. 일행 중 가장 시력이 좋은 도도가 장탄식을 흘렸다. 뭐야? 뭔데?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 모두가 알아볼 수 있었다. 주홍빛 원반처럼 보였던 그것은, 수효를 셀 수 없는 떼 악마들이 마구 뒤엉켜 불과 뿔과 발톱으로 싸우고 있는 이계의 무저갱이었다. 악마들이 그 지옥 구덩이에서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싸워 왔는지 알 수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이유는 아마도 없을 것이고, 기간은 아마도 영겁일 터였다. 그곳에서 죽지도 태어나지도 않은 채 불꽃 같은 피와 혀, 뿔로 서로를 찌르고 물어뜯어 온 것이다. 이야기에서나 나오는 줄 알았는데! 무슨 비유 같은 거 아니었어? 아니었다. 바로 그들이 떨어지고 있는 곳이었다. 뭐라도 해봐요! 당신이 수정구슬을 던져서 이렇게 됐잖아, 변신 마법이라도 써 봐, 주문서에 없어, 그림자 문을 여는 수밖에는 없어, 여기 그림자가 어딨어? 바닥에 가야 그림자가 생기겠지, 일단 착지까지만 어떻게든 하고, 그 다음에 싸우면서 시간을 벌어 보자, 가능할 리가 없어. 가능할 리가 없을 것 같았다.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그 자체로 악마의 입 같은 악마 구덩이의 일렁임을 말없이 지켜보는 외에 다른 도리는 없는 것 같았다. 그것은 죽기 직전에 볼 풍경으로는 좋지 않은 것이었다. 보다 보니 예쁘지 않아? 잠깐만.

어디선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폭발에 휘말리기 전 서로 칼을 겨누고 대치했던 이교도 노인이, 이제는 저승길동무가 되어 일행보다 약간 더 위쪽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다는 듯 후드를 완전히 눌러쓴 채 자신이 섬기는 사악한 신을 향해 기도하는 중이었다. 역시 죽기 직전에 들을 소리로는 좋지 않은 것이었다. 좀 심란한데 죽일까? 기다려 봐 저 사람 신이 우리도 같이 구해줄지 모르잖아, 그러진 않겠지, 우리가 한 일이 있는데. 이교도의 등을 바라보던 일리야가 갑자기 공중에서 허우적대며 로브를 벗기 시작했다. 뭐 하려는 거야? 지금 욕탕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고요. 곧 내복뿐인 초라한 몰골이 된 마법사는 뭔가를 외며 로브로 감싼 지팡이를 손에서 놓았다. 지팡이는 일행보다 빠르게 떨어지다가 곧 멈췄다. 약간 빛이 도는가 싶더니 머리 부분을 축으로 감겨있던 로브가 팽팽히 펼쳐졌다. 일리야가 이교도와 바닥을 번갈아 보면서 기묘한 손짓을 해 대자 지팡이는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된 듯 움직였고, 이교도의 등에 로브 모양의 그림자가 만들어졌을 즈음엔 아래서 싸우고 있는 악마들의 끔찍한 비명이 생생히 들려오고 있었다. 난 싫어... 집중해야 되니까 말하지 마. 그림자 문의 주문이 이어졌다. 일리야는 따라오라고 소리치며 사지를 펼쳐 이교도의 등을 향해 상승했다. 또다시 뭔가 잘못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달리 돌이킬 수는 없었다. 마법이란 게 그런 것이었다.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