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21일 수요일

오함마

마당에서 창고의 왼편으로 지나가면서 볼 때, 그 오함마는 곧추서 있기도 하고 창고 벽에 기대어져 있기도 하다. 어쩔 때는 오른편으로 지나가면서 본다. 지나가며 왜 저기에 있지? 생각해도 그 순간뿐이다. 왼편에서도 오른편에서도 보지 못하면 뒷마당에 있고, 뒷마당에서도 못 보면 창고 안에서, 안에서 못 보면 앞마당에서 본다. 못 본다고 하는 것은 사실 맞지 않는 말이다. 쓸 일이 없으니 애써 찾을 필요도 없는데 자꾸만 불쑥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진짜로 못 보는 것은 누군가 그걸 쓰는 모습이다. 누가 그것을 쓰는가? 관리인에게 물으면 애초에 이 창고에서 오함마가 무슨 쓸데가 있는가고 답한다. 여름날 그늘에 누운 오함마 대가리 위에 쥐잡이가 앉아 있는 것은 본 적이 있다. 그걸 쓰는 이라고는 쥐잡이뿐이라는 얘기다. 쥐잡이가 이리저리 물고 다닐 리는 없다. 누구인가? 오함마가 스스로 창고 담벼락 안을 배회하고 있다고밖에는 할 수 없다. 저 오함마가 누구냐고 물어야 맞는지도 모른다.

2018년 2월 16일 금요일

불태우기

램프가 꺼질 무렵의 일이다.

미리 추위가 몰려와 있었다. 잠들 사람은 잠들었고 죽고 싶은 사람은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러니까 우리는 남은 사람들이었다. 할 이야기가 남았나?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예브게니와 조라는 낱말 맞추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휘는 앞주머니에서 삐져나온 실밥을 잡아 뽑고 있었다. 죽 뽑아도 약간의 실밥이 남았기에 휘는 그런 수법으로 자신의 겉옷을 해체하고 있었다. 오그오헤는 서성이고 있었다. 관심을 끌기 위함은 아닌 듯했다. 어느 쪽도 재밌어 보이지는 않았다.

램프가 몇 번 깜빡이자 남은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램프 곁으로 모여들었다. 꺼지려나? 오그오헤가 말했다. 기름이 없는 것 같은데. 오그오헤가 한 번 더 말했다. 기름이야 만들면 되잖아. 누군가 말했다. 누구로?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그런데 왜 램프를 계속 켜놓아야 하지? 내가 말했지만 나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램프는 뜨거웠다. 오그오헤는 뜨거운 것을 집어 포대를 향해 던졌다. 불이 붙고 있는 건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휘의 주먹 속에 있을 실밥을 떠올렸다. 조라가 포대 쪽으로 다가가 크게 들이마신 숨을 불었다. 예브게니가 조라 곁에 있었다. 타라, 타라, 하면서. 램프에서 시작된 불은 구호와 함께 조금씩 번져가고 있었다. 잠든 사람은 화창한 꿈속이었고 우리는 밀알 타는 냄새를 마시며 빈 포대를 펄럭였다. 그럴 기운이 있었다.

2018년 2월 6일 화요일

쥐잡이 이사야

이사야가 언제부터 창고에 들어와 살았는지, 누가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 관리인조차 모른다. 당연한 이야기.

한쪽 귀가 좀 찢어진 이 회색 태비는 예쁘다고 하기엔 확실히 어려운 얼굴을 하고 있다. 어쩌다 정면으로 마주친다면 그 인상의 엉뚱한 험악함에 헛웃음이 터질 것이다. 목소리도 사람으로 치자면 걸걸한 편. 몸집이 크지는 않아도 등이 제법 단단한 것이, 나가면 꽤 강자 축에 들지 않겠나 싶다. 창고 입구에서 기웃거리는 떠돌이 개들을 깔아 보며 털을 세우는 모습은 심심찮게 본다.

나이도 출신도 베일에 싸인 채 이사야는 쥐잡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다. 관리인이 이사야를 볼 때마다 쥐잡아- 하고 부르기 때문이다. 창고 안을 후다닥 뛰어다니길래 뭔가 해서 보면 병뚜껑을 쫓고 있더라는 얘기를 매양 꺼내며, 이 창고에 쥐잡이 같은 건 필요가 없다면서도, 결국 쥐잡이의 밥을 챙기는 이는 관리인이다. 관리실 한구석에 놓인 불룩한 마대들 중 매직으로 크게 ‘쥐’라고 쓰인 것이 이사야의 밥 포대다. 아무리 봐도 고양이용 사료 같지 않지만 당사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요즘 같은 한겨울은 관리실 난로 곁을 떠나지 않는 이사야를 마음껏 만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럴 때 관리인은 ‘고양이 대해부’라는 제목의, 어디서 주워 온 듯한(곧 어디서도 살 수 없을 듯한) 해진 책 한 권을 꺼내준다. 그러면서 이사야의 꼬리는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탐스럽다는 말을 더하고, 만약 계속 자라는 것이라면 잘라서 팔아도 되겠다는 소리를 꼭 한다. 처음 들었을 때는 그게 녹용이랑은 달라서... 하고 대답했다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했다. 관리인은 이사야 말고는 무엇에 대해서도 농담을 하지 않는다.

이사야는 ‘요옹’하고 운다.

이 계절 이사야의 취미는 눈 구경이다. 이어서 올 짧은 봄 동안엔 밖으로 종일 돌아다니다 들어올 테고, 여름에는 마당 그늘에 시체처럼 널브러져 들어온 사람을 놀래킬 것이다. 장마가 끝나야만 창고 들보에서 내려오며, 가을볕을 따라 다시 담으로 지붕으로 올라갈 것이다. 조건만 맞는다면 영원히라도 살 것 같다. 이사야는 평범한 도메스틱 캣이다.

2018년 2월 4일 일요일

곡물창고에서는

‘곡물창고에서’는 모든 필자가 함께 쓰는 공용 태그로 기획되었습니다. 따로 마감은 없으며, 공동입하동에 위치합니다. 이 태그에는 세 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1) 곡물창고를 배경으로 할 것.
2) 한 필자가 일주일에 한 편까지만 쓸 수 있음.
3) 한 필자가 연속으로 2회 이상 쓸 수 없음.

일단은 일종의 이야기 게임으로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형식은 자유입니다. 곡물창고에 있는 사물에 대해 써도 좋고, 곡물창고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써도 좋습니다. 우리는 대체로는 가상의 뭔가를 다루겠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곡물창고의 지붕에 대해서 말할 수도 있고, 곡물창고의 지붕 아래서 하는 생각을 쓸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든 좋습니다. 그것은 일기, 일지일 수도, 감상일 수도 사전일 수도, 회고일 수도 편지일 수도 있습니다. 소설이거나 시, 희곡일 수도 있습니다. 연속성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습니다. 분량도 좋을 대로입니다. 다만 곡물창고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됩니다. 다른 필자가 쓴 곡물창고를 어느 선까지 인정하고 그와 관계할 것이냐 또한 자유입니다. 그 창고가 그 창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 모든 곡물창고는 하나이고 모두 ‘공식적’입니다. 이것을 게임으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좋습니다. 이것은 훈련이나 시험일 수도 있습니다. 이 태그를 통해 곡물창고의 필자들은 (원한다면) 곡물창고라는 공간을 직접 구성하는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곡물창고에서. 그것이 전부입니다.

육망성

이리 들어와, 말하고 너는 선을 폴짝 뛰어 넘었다. 두 발이 동시에 넘어와야 해. 그러나 선을 넘은 너의 표정은 우리가 손을 잡고 있을 때와 달라 보였다. 어서. 너의 얼굴 속 모든 도형이 갈라지고 있다. 환희와 광기가 서로를 침범하며 번지고 있는 것일까? 이윽고 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네가 별장, 이라 부른 곳으로 너는 가버린 듯했다.
 
그러면 나는 너에 대한 생각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 네가 없는 자리에서 나는 너에 대한 생각을 시도한다. 우리는 꼭 붙어 다녔으므로, 이 시도는 나에게 낯설다. 그러나 언젠가 꼭 해야 할 작업이었다. 나는 너에 대한 생각을 재시도한다. 그것은 몇 가지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너의 모습이 브로마이드처럼 펼쳐진다. 나는 생각의 크기를 좁히려 노력한다. 나는 너를 클로즈업한다. 너의 눈주름과 입가를 본다. 재생시켜 보기도 한다. 그것들은 미세하게 움직이고 미세하게 깊어지다가 한순간에 탄성을 잃는다. 일순 다른 곳으로 가버린 것일까? 그런 것까지는 나의 생각만으로 알 수 없다. 네가 필요해. 우리는 언제 만났지? 언제 서로를 알아봤지? 그런데 왜?
 
선 안쪽으로 발 하나를 넣는다. 그러자 선 안의 나와 선 밖의 내가 있다. 저쪽의 나는 이쪽의 나를 끌어당기고 있다. 나는 두 번째 발을 넣고 세 번째 발을 넣는다. 네 번째 발을 넣는다. 이쪽의 발은 아무리 넣어도 하나가 남는다. 이것은 너에 대한 생각이 결론에 이르는 것을 명백히 방해한다. 발은 계속해서 하나씩 넘어가고 나는잠식당하고 있었다. 네가 예상했던 바대로.
 
너는 내가 좋은 재료가 될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것을 성스러운 사랑의 비유로 이해했다. 그럴 리 없잖아. 저쪽에 떠 있는 나의 입이 말한다. 두 번째 입이 말하고 세 번째 입이 말한다. 그럴 리 없잖아. 그럴 리 없다고 나는 생각하고야 만다. 입들이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말씀하고 있다. 가장 선명한 기억 속에서 너는 별의 커비를 노래하고 있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지? 그러나 나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 흔들리면서 너의 잔영을 더듬고 있다. 어딘가의 네가 지켜보고 있다는 확신과 함께 그랬다.

2018년 2월 3일 토요일

[9호 서신]


*2월
 -한겨울 낙상 및 동파 유의.
 -설 연휴간 배앓이 조심.

*창고 마당 설치됨
 -http://gokmool.blogspot.kr로 접속하면 우하단에 아이콘 등장.
 -https://gokmool.blogspot.kr로 접속하면 입장 불가.
 -누구나 들어가 아무 이야기나 가능.
 -일단 챗박스 계정을 만들면 정보(이메일 및 홈페이지) 변경이 불가. 변경을 원하면 계정 삭제 후 다시 만들기.
 -필자에게는 moderator 권한을 부여.
 -관리인 계정/비번은 기존과 동일.

*알림판 운영의 추가사항
 -팔로잉 시작. 알림판 로그인 권한을 지닌 필자라면 누구나 자신의 기준에 따라 타 계정 팔로잉 가능. 단, 인격 계정은 제외를 권함.

*권한 해제 조건
 -필자 권한 해제 조건을 1개월에 게시글 1개에서 계절별 1개로 완화.
 -계절은 24절기를 기준으로 함.
 -18년도; 입춘 2/4, 입하 5/5, 입추 8/7, 입동 11/7

*필진 모집
 - 추천제로 항시 진행.

이상.

2018년 2월 2일 금요일

마지막 더미 태우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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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자리를 우상이 대체하는 중. 그걸 다르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권위의 자리를 동의가 대체하고, 탐색의 자리를 생존이 대체하고, 고난의 자리를 적이 대체하는 중. 거꾸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적 고난에 대해, 드디어 우리는 그것과 양립할 수가 없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이제 한번 해볼 만하다고 느끼는 중. 누가 죽더라도, 내가 죽더라도. 이런 상태를 두고 억지로 좋은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의의 색채를 더하면서. 거의... 그렇게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다고도 생각한다. 어쩌면 이 모든 일들이 반쯤은, 우리 앞에 음울한 미래만 있다는 느낌에 기대어 있지 않은가? (그리고 나머지 반은 진실로 음울한 미래.) 느낌은 중요하다. 나는 전망이라는 느낌이 복원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망이 주는 오래된 느낌이, 편안한 느낌이. 우리에게는 지금 만사를 거는 도박이 아니라 전망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떻게?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연대다. 전망을 위해서는 연대가 필요한가? 생각은 그렇게 닿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연대는 고통스러운 일이고 고통이라면 사실상 한계다. 연대는 필요악이다. 내게 시급한 것은 문예다. 취미다. 연대를 그나마 견딜 만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마약 같은 것들. 우리에게는, 적어도 내게는 쿠키의 전망이 필요하다. 나는 필요한 것을 믿는다. 많은 이가 함께 믿으면 현실이 된다고들 한다. 엄청난 광량 아래 우거진 잎사귀들을 나는 손에 잡힐 듯이 믿고 있다. 하느님을 믿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 잎사귀들은 많은 이들의 손처럼 보인다. 나는 내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단 듯 만 듯 텁텁한 맛. 그러나 냄새로 그것이 그것임을 안다. 회당에 들어서면 회당의 냄새가 난다. 너무나 추운 날들도 반드시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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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한다. 적절한 작별을. 전망의 조건은 만남이 아니라 작별에 있다. 우리는 작별을 위해서 모이는 것일 수도 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먼저 손을 흔드는 편을 택하는 수가 있다. 작별이 주는 엄청난 슬픔을 우리의 바깥 방향으로 돌려놓기 위해서, 그나마 견딜 만하게. 왜 견디려는지? 저편으로 간 이들과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째선지 번번이 그런 약속을 한다. 만나지도 못할 거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아닐 수도 있다. 이것이 쪽지 태우기의 마지막이다.

*
고양이 소리 흉내를 그치고, 어째서 이사야가 그런 자세로 앉아 꼼짝도 않고 있는지 궁금히 여기며 다가갔다. 이사야는 돌아보지 않았다. 손을 뻗쳤다. 이사야는 깜짝 놀랄 만큼 차가웠다. 이사야는 딱딱했다. 나는 이사야를 떼어내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이사야는 얼음 덩어리의 소리를 냈다. 이사야가 더 이상 살아 있지 않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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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쬐고 있다가 이사야가 뭔지 모를 작은 짐승을 따라 화살처럼 밖으로 튀어 나가는 것을 본다. 나는 다시 불을 본다. 그가 이제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따라서 나온다. 저것이 쥐잡의 마지막 모습이다... 엄청난 눈이 오고 있다. 불은 타오른다. 이사야는 그날 저녁 돌아온다. 지금은 유령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내 손에 안겨 불을 보고 있다. 나의 꿈도 녹는 중.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