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30일 목요일

야쿠자

눈을 떠보니 얻어맞고 있었다. 기둥 같은 무엇에 두 팔과 몸뚱이가 결박된 채로. 나를 실컷 때리던 남자는 쪼그려 앉아 숨을 고르며 내게 말했다. “너 말이야, 오야붕의 말씀을 거역하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건 아니었잖아. 그런데 왜 그랬어, 앙?” 안 그래도 험악한 얼굴이 구겨져서 더 험악해 보였다. 그런데, 오야붕이라니 무슨 소리지? “이 자식, 술잔을 돌려주겠다고? 죽지도 못하게 해줄까!” 술잔? 도대체 무슨 소리야? 나는 붓고 터진 입술을 움직여 겨우 말했다. 내가 누구냐고. “네가 누구냐니, 이 새끼 지금 무슨 수작이야. 곱게 죽기 싫어? 몸에서 살을 다 발라버릴 때까지 죽지 못하게 해줄까? 너무 많이 맞아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냐, 응? 야쿠자면 야쿠자답게 곤조*라도 있어라.” 잠깐, 내가 야쿠자? 눈뜨니 야쿠자가 되어 있다?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넋을 놓고 있으니,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내 뺨을 살살, 기분 나쁘게 때렸다. 그러고는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주었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나는 거대 야쿠자 조직 내 유력 지파의 일원이었고, 한 핏줄과도 같은 의형제와 함께 라이벌 지파의 조직원 몇 명을 처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런데 수행 당일 갑자기 계획이 변경되었다며 대기하라는 지시가 새로 내려왔다. 나의 형제는 이미 현장으로 떠난 뒤였다. 형제는 혼자 현장에서 분투하다가 죽을 게 분명했다. 나는 형제를 혼자 둘 수 없어 지시를 어기고 형제가 떠난 곳으로 향했다. 그러려 했다. 얼마 가지도 못해 같은 조직원들에게 붙잡혔다. 그리고 오야붕의 지시를 어긴 대가로 이 창고에 갇히게 된 것이다. 시체가 되거나 멀쩡하지 않은 상태로만 나올 수 있는 악명 높은 창고에. 결국 숙청당할 대상은 라이벌 지파의 조직원들이 아니라 우리였고, 나는 그 숙청 대상에서 제외가 되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아까 전까지 나를 때리고 있던 형님이 나에게 말해준 나의 전말이다.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야쿠자가 되었었다니. 내가 기억하는 나는 아무도 없는 공터에 혼자 있는 소년이었는데. 공을 던져도 받아줄 친구가 없어 벽에 공을 던지고 줍고를 반복하다가 석양에 그림자가 길어지면 밥 먹으러 가던 어린 친구였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야구 방망이를 엉뚱한 곳에 사용하고 있었구나. 나는 내 운명조차 알 수가 없었구나. 인생 참 어렵다, 그렇지? 나는 울면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물었다. “제가 야쿠자인 것은 이제 알겠어요. 그러면 이제 나는 무엇이 되죠?”


*こんじょう.

일리야와 토르카추크의 계약 장면(下)



떨어지던 중이었기 때문에 저마다 휘청거렸다. 다시, 일행이 머물렀던 여관방이었다. 문짝은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부서져 있었다. 마법의 그림자 문은 확실하게 열렸고, 모두 무사히 돌아왔다. 방 한가운데 웅크린 채 중얼거리고 있는 뭔가는 내의 차림의 일리야였다. 린나이가 일리야 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보았다. 뭔가 잘못되고 말았어... 뭔가가... 뭐가 잘못됐는데요? 일리야의 중얼거림을 덮으며, 또다른 소리가 서서히 커지고 있었다. 바깥이었다. 말다툼(같은 것), 웃음소리(같은 것), 환호와 비명(같은 것). 갑자기 장이라도 섰나? 몬테소리가 중얼거리며 들창을 열자마자,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종류의 소란이 폭풍처럼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달빛 아래로 넘실거리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악마들, 마을의 낮은 지붕들 위로 불경하기 짝이 없는 빛깔의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뭔가 잘못된’ 탓에 무저갱의 악마들도 함께 그림자 문을 타고 이 세계에 도달해 버린 것이었다. 몬테소리는 그대로 들창을 닫았다. 유황 냄새가 진동했다. 하르포핌이 갑자기 기도를 시작했다. 도도는 웅크린 일리야를 걷어찼다. 뭐라도 해봐. 아니, 아무것도 하지 마. 도망을 치자. 어디로? 어떻게? 싸워 볼까? 여기서 죽자고? 이제 어쩔 거야. 사고 쳤잖아요. 모두가 할 말을 잃은 잠시간 끝에, 나동그라져 있던 속옷 바람의 마법사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소리를 지르면서. 왜 저래? 미쳤나봐. 그리고 여기부터가 일리야와 토르카추크의 계약 장면입니다:

 계약합시다! 저와 계약합시다!
 이 ‘바깥’으로 나와 보셨던 악마 분 계십니까? 계십니까?
 이 세계로 나오면 계약하셔야 합니다, 아시죠?
 그것은 세계가 만들어진 이래로 오랜 전통입니다.
 여러분께도 예외는 없습니다.
 에누리 없는 조건으로 모시겠습니다.
 저, 대마법사 일리야와 바로 지금 계약하십시오.

 그 말에 큰 악마 넷 중 셋, 냉정의 악마와 격노의 악마와 토르카추크가 관심을 보였다.
 네가 바라는 게 뭐지?
 편히들 계시다가 제가 부를 때 좀 도와주시는 것입죠. 저는 크게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뭘 받을 수 있지?
 제가 믿는 저의 신을 바치겠습니다.
 한낱 인간이? 우리가 그걸 어떻게 믿지?
 들어 보십시오, 역시 그러실 것 같아, 대륙을 떠도는 모험가들 중에서도 최고인, 아무래도 처음이라 잘 모르실 테니, 저희 도당을 소개 올리겠습니다.

 신앙 있는 모두가 그 이름을 우러러보는
 헬페르스의 고명한 사제
 저승에서 돌아온 돌 연구의 권위자
 만신의 램프로 길을 비추고, 교리를 되감아 죽은 이를 일으키나니?
 광물 너머로 빛을 만지고 개구리발로 물속을 걷는
 기적의 드워프 치유사
 구르는 돌, 하르포핌!

 수확제의 트로피가 빛납니다…
 혜성처럼 등장한 젊은 음유시인
 데뷔와 함께 쓰러뜨린 하플링 평단
 거친 젊음의 역동, 전 대륙에서 그 노래가 절찬 불리는, 진짜 요즘 노래
 살아 있는 전설 테너의 명실상부한 버금
 시체 수레에서 내려온 반인반요의 앙팡테리블
 ‘네 팔’, 린나이!

 이 인간을 보십시오!
 소금쟁이처럼 날랜 솜씨
 대륙 최강의 군대를 이끄는 은발굽 기사단장의 공인된 혈통
 검은 들개들의 참되고도 적법한 우두머리
 떠돌이에서 왕녀의 친우로, 기사 중의 기사로
 은빛 투구와 붉은 장식깃털의 특무기사
 차원을 찌르는 몬테소리!

 우리의 꺾이지 않는 엘프 챔피언
 대륙을 가로지를 운명을 부여받은
 철숲 장로의 예언 전달자, 모험의 소집자
 그 실력과 담력은 대설산의 빙룡이 자신의 알을 부탁할 정도였으니
 모든 날개 달린 것들의 친구
 드래곤의 부리이며 창공의 명사수
 용맹한 매 치치의 벗, 도도!

 그리고 저, 부끄럽습니다만
 삼천구백구십여섯 악마 여러분을 일거에 소환한
 이 시대 최고의 발로 뛰는 현장 마법사
 고대 영혼 어부왕이 그 후견인으로서 새겨준 이 로브의 정어리 무늬
 고성의 주인 수염군주의 계승자임을 뜻하는 이 지팡이의 수염 장식
*
 성당을 버린 성당지기, 마법의 바람을 쫓다가 사신에게 바친 손
 갈고리손의 대마법사, 일리야!


*이 시점에 일리야는 자신의 로브와 지팡이를 이세계로부터 빠져 나오기 위한 그림자 문 마법 의식에 사용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토르카추크가 과연 어떤 악마였을지, 그 영혼은 다른 세계에 봉인되고 그 머리는 데마노르의 컬렉션에 들어간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일이다. 신위神威가 정말로 탐이 났든지, 손해 볼 거 없다는 생각이었든지, 단순히 흥미가 동했든지, 셋 다 아니든지, 어쨌든 나머지 큰 악마들이 멍청한 소리라며 저마다 권속들을 데리고 세상을 어지럽히러 떠나는 사이, 토르카추크는 빨간 손톱으로 일리야의 등에 계약의 인을 새겼다. 이 계약은 그리 오래지 않아 정말로 지켜졌다. 토르카추크는 부름에 응했고 일리야는 자기의 신을 바쳤다. 비록 아주 잠깐이었지만, 악마는 신이 되긴 했었고….

2020년 7월 29일 수요일

화염구 캐치볼

잘 단련된 마법사들은 화염구 쓰는 것 하나만 봐도 그 역량을 넉넉히 파악할 수 있다. 구속(pitch speed)은 물론 회전을 싣느냐 마느냐, 직선으로 묵직하게 때려 박을 것이냐 측면 혹은 위아래로 휘게 만들 것이냐 하는 모든 방면에 마법사의 재능과 경험이 반영된다. 마법을 이해하고 응용하는 일에 예민한 게임 센스가 필요하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대다수의 마법사들이 노는 날이면 오손도손 모여 화염구 캐치볼을 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화염구를 받아내는 것도 좋은 훈련이 된다. 초기에는 마력을 이용한 원격 조종 능력을 훈련할 요량으로 마법의 손을 사용했다. 마법의 손은 마력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손을 불러내는 마법으로 마법사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원하는 동작을 취할 수 있다. 마법사들은 마법의 손으로 날아오는 화염구를 움켜잡았다(그래서 캐치볼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마법사들의 실력이 상향 평준화됨에 따라 마법의 손으로는 화염구를 받아내기 어려워졌다. 화염구가 거의 무한히 강해질 수 있는 데 반해 마법의 손은 성장 한계가 명확했던 것이다. 너무 빨라서 맞아 죽고 마법의 손을 뚫고 들어오는 화염구에 불타 죽고 하면서 마법의 손을 사용하는 캐치볼은 이제 마법 노인정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다양한 실천적 실험단계가 있었다. 주문 반사나 역재생 마법으로 지근거리에서 튕겨내 상대에게 돌려주는 유형(자연스런 공수전환)이 있었고 감속 마법이나 시간 지연 마법으로 속도를 늦추는 유형도 시선을 끌었다. 몸에 보호막을 두른 다음 몸을 던져 잡아내는 유형이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마법의 손과 같은 이유로 이내 사라졌다.

오늘날에는 다양한 유형이 공존하며 취향껏 화염구를 주고 받는다. 비록 ‘잡는다’는 의미는 많이 사라져버렸지만 말이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마법의 손의 상위 마법인 타오르는 손을 사용하는 형태가 유행 조짐을 보이고 있다. 타오르는 손은 이미 불타고 있어서 화염이나 폭발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최근 많은 아카데미에서 화염구 캐치볼을 전교생의 공통필수 과목으로 지정하려고 한다. 이미 시범 교과목으로 편성된 아카데미도 있는데 학생들의 반응이 아주 좋다고 들었다. 자신과 자신의 연장을 다루는 일은 즐겁다. 즐거움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은 기쁘다. 화염구 캐치볼은 즐겁고 기쁜 행위고, 마법사들은 화염구 캐치볼을 사랑한다. 어제도 많은 마법사들이 뒤뜰이며 공터에서 화염구를 주고 받았다. 살갑고 진지한 얼굴로. 언제 타 죽더라도 괜찮다는 얼굴을 하면서 말이다.

2020년 7월 28일 화요일

고도로 수행한 스님은 힙스터와 구별할 수 없다.

윤리의 감각

여기 모인 대원들은 그에게 자주 윽박지르고는 했지요. 그가 어리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그렇게 되는 사람이었어요. 무엇이든 적응을 어려워하고 타인과의 거리를 제대로 가늠할 수 없는 사람. 괜스레 생각만 많아져서, 그 생각이 자신의 안과 밖을 검게 물들여 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할 때면 언제나 자신이 가장 보잘것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어버리는 사람. 다가올 내일을 두려워하며 지나간 지난날에 골몰하다가 사실 그때 죽었으면 어떨까 자주 생각하는 사람.

그럴 때마다 저 별에도 우두커니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 나타났을 테지요.

그는 그러나 하려던 말을 물리치지는 않습니다. 그는 제 나름의 표정을 지어요. 이 사람은 그가 가끔 내게 보여주었던 모습, 이 사람을 좋아하게끔 만들어 주었던 그런 모습을 지금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려고 하고 있어요.

“여기서 회의를 끝낼 수는 없어요. 회의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알아요. 판단은 우리의 것이 아니죠. 우리는 일개 탐사대원에 불과하고 우리에게는 따르도록 되어 있는 명령 체계가 있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입장을 가질 수 있어요. 나는 내 입장, 내 말이 첨부될 회의록에 기록되기를 원합니다. 판단 주체가 듣거나 읽을 수 있게요.”

일단은 다들 듣고 있습니다.

“저 별과 별의 행위가 파악된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경악과 충격은 단지 그 기술력 때문만은 아닙니다. 대원들 의견을 귀담아들었습니다만, 저것을 어떻게 쓰겠다느니 하는 것은 모두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그런 논의를 하기 전에 해야 할 것이 있지 않나요? 필요한 것은 윤리의 감각입니다. ‘생각한다’는 의식적-무의식적 행위를 통해 생각 속 객체가 실재하고 또 관측된다는 것은 이 윤리의 감각을 제하고서는 논의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것이 우리와 쌍을 이루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저것을 윤리로 감각해야 합니다.”

수의 무녀 - 입출력의 건 - 화상 담당자가 유약함 - 머릿속 사과, 우리 손에 들어온 - 정비공 대원 - 갑론을박 - 양가감정 - 윤리의 감각

2020년 7월 27일 월요일

양가감정

대장이 눈쌀을 찌푸립니다. 갑작스레 짜증이 솟구쳐서 나는….

여기 모인 대원들을 죽여버리는 상상을 해봅니다. 톱으로 썬 다음 채칼로 벗겨내는 생각을 해봅니다. 거리낌이 없습니다. 인간이 아닌 까닭이지요. 로봇에게도 저 별과 같은 슬라이드가 있어서, 무언가를 생각할 때 그것이 실재하게 된다고 한들 대수롭지 않을 거예요. 나는 솜사탕 같은 연인의 머리를 바라봅니다. 재미있습니다. 그는 섬세하고 유약한 사람입니다. 그의 어깨는 매끈한 조약돌처럼 동그랗고 그것이 나는 귀엽습니다. 헛웃음이 나옵니다. 인간은 어째서 자신의 오만함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자신들이야말로 끊임없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아찰나 속 취산된 물질임을 왜 모르고 있을까요? 그것은 엄연한데요. 그 무지(無知)로부터 이런 귀여움이, 멋쩍은 웃음이 나오나요? 참나,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 수의 무녀 - 입출력의 건 - 화상 담당자가 유약함 - 머릿속 사과, 우리 손에 들어온 - 정비공 대원 - 갑론을박 - 양가감정 - 윤리의 감각

2020년 7월 23일 목요일

갑론을박

그때 누가 입을 엽니다. 정비공 대원의 오른편, 두 칸 떨어진 자리에 앉은 연구자 대원입니다. 그에 관해서는 말할 게 별로 없습니다. 그리 중요한 사람도 아니고요. 여기 내게 중요한 사람은 한 명뿐입니다.

“정비공 대원과 비슷한 생각입니다. 예컨대 저 별을, 혹은 저런 기술을 개인이나 집단이 독점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렇게 필요에 따라 개인의 생각을 들여다본다고 가정해보자고요. 이것이 정치적 폭압의 도구로 사용되지 않는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습니까?”

그의 말을 시작으로 하나둘 의견을 꺼내기 시작합니다.

“듣자 하니 아까부터 비약이 심해요.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렇게들 두려워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분명 두 대원의 말대로 악용될 소지가 있고, 서로를 못 믿게 되고 하여튼 안 좋게 끝날 여지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근데 그게 중요하냐고요. 문제는 언제나 있어요. 그러나 미래에도 여전히 문제일지 우리는 몰라요. 나는 저 행성을 연구하여 인류 발전을 앞당길 수 있다고 믿어요. 발전의 정체를 해소할 수 있다고 믿어요.”

“동의합니다. 사실에 집중해봅시다. 누구의 작품이든 간에 저 행성에 깃든 기술은 경이로운 거예요. 그리고 저것 또한 세계의 일부입니다. 옛적부터 우리는 자연에서 배웠고 그 덕택에 발전했어요. 저 별의 기술을 배움으로써 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는 생각 못 합니까? 한번 되돌아봐요. 원하지 않아도 가지기를 멈출 수 없는 우리의 역사를요. 우리의 역사는 진보의 역사이고 언제나 그 과정 중에 있어요. 물러설지언정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는 않았어요.”

생각에 잠겨 있던 기록서기 대원이 조심스레 입을 열고 말합니다.

“의문이 계속 생깁니다. 생각이라고 일컫는 활동이 우리 몸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 우리는 단지 빌려올 뿐으로. 저 행성의 존재가 그것을 의미하고 있지는 않나? 어제의 가설이 틀린 가설이라면. 행성이 우리의 생각을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면. 생각이 이미 우주를 점유하고 있고 수집하는 것이 우리라면? 재현이 앞이고 우리가 뒤라면. 실험을 시도해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저 별에 착륙해 걷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누군가의 머릿속에 내가 떠오르고, 이내 걷기 시작할까요? 만약 저 별에 소행성이 충돌한다면. 핵탄두로 저 별을 파괴한다면. 인간은 생각할 수 없게 되는 것일까요?”

“실험 같은 건 안 합니다.”

대장이 단호하게 말합니다.

“우리 몫이 아닙니다. 보고하지 않을 이유도 없습니다. 어제와 오늘 얘기를 많이 나눈 것 같습니다. 이쯤 하고 보고 절차에 들어갈 것입니다. 늘 하던 것처럼 회의록을 첨부하겠습니다.”

그제서야 내 앞에 있는 나의 사람이 번쩍 손을 들어 올립니다. 시선이 쏠리자 호감을 주려는 듯 어색하게 헤헤 웃는 그는 오히려 한없이 어수룩해 보입니다.

“제게도 말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그의 목덜미가 축축하게 젖어 있습니다.

수의 무녀 - 입출력의 건 - 화상 담당자가 유약함 - 머릿속 사과, 우리 손에 들어온 - 정비공 대원 - 갑론을박 - 양가감정 - 윤리의 감각

2020년 7월 17일 금요일

람쥐썬더


2020년 7월 12일 일요일

정비공 대원

모두가 정비공 대원을 쳐다봅니다. 정비공 대원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지만, 생각이 조금 엉켰는지 “주목, 주목할 만한,”이라는 말을 두어 번 꺼냈다가 씹어버리고 맙니다. 숨을 고른 다음에는 자신의 말을 궤도에 올려놓았지만요.

“주목할 만한 발견이란 것에는 토를 달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보고도 못 본 척하고 싶다는 것이 솔직한 내 마음입니다. 나는 정비공입니다. 기계의 작동 구조에 관해서는 여기 누구보다 더 잘 알아요. 저 행성은 지적 설계물입니다. 설계자는 신이거나 신적인 어떤 존재겠죠. 아닐 수가 없습니다. 청원합니다. 저거 건드리지 맙시다. 라디오를 맞닥뜨린 개가 한 번 빙 돌아 그것을 지나치듯이. 내 종교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목울대를 걸걸하게 울린 다음 입을 엽니다.

“여기 여섯 명의 인간이 있습니다. 팔짱을 끼고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만 속으로는 어떤 것이든 떠올리고 있을 테고, 무언가를 말해왔을 거고 개중에는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은밀한 것이 숨어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누가 그걸 알아내길 원합니까? 그런 어린애 욕망이 있어요? 은근히 발각되기를 바라는? 집어치워요. 생각은 무조건적, 무제한적인 자유여야만 해요. 언제나 어디서나 그러한 속성을 잃어버려선 안 돼요. 틀려요? 대규모의 재탐사대를 꾸려 저 행성을 연구한다고 칩시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역설계하고 터득한 기술을 응용할 것 아닙니까? 그 결과에서 낙천적인 미래를 볼 수 있습니까? 따져봐요. 얻을 것은 무엇이죠. 잃을 것은 또 무엇이고 그것은 영영 잃게 됩니까? 내게는 오직 사악하고, 탐욕스런 미래만이 보여요. 알잖습니까 다들? 생각이란 어디까지나 인간 안에 있어야지 유익하다는 것 말입니다. 그래야만 생각이고, 생각이란 그래야 합니다. 희박한 확률일지언정 누가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당연히 여겨지는 세상에서는 아무도 신뢰할 수 없고 누굴 완전히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후회할 겁니다. 별은 불신의 씨앗이 될 것이고 인류 쇠퇴의 밑거름이 될 겁니다.”

정비공 대원은 대원들을 향해 시선을 옮기며 뜸을 들여요.

“솎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입니다. 보고는 올립니다. 다만 다른 보통의 별과 다를 바 없다고 합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저 행성을 묻어두고, 인간이 역시 아주 작은 존재라는 것을 인식한 다음, 해왔던 것을 지속하는 일입니다.”

정비공 대원이 비타민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서 말합니다.

“내 얘긴 이걸로 끝입니다.”

회의실 안에 연기가 퍼져나가지만 다들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연기 속에는 인간의 몸에 좋은 물질이 잔뜩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정비공 대원은 담배를 피우면서도 말했다기 애매한 말들을 중얼거립니다. ‘하여간, 아무튼….’처럼 큰 의미 없이 자기 자신을 향하는 말들 말입니다. 다른 대원들은 금 막대기를 앙다문 것처럼 입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대장은 손으로 턱을 받치고서 뭔가 깊게 생각하는 듯 합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대장이 정비공 대원의 말에 크게 감명받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쩔까요? 나의 그이가 지금 말을 꺼내면 좋겠습니까? 정비공 대원의 말을 지지하고 있을 그이는 잔뜩 긴장해 있습니다. 사선으로 고개를 움찔대며 살금살금 내 눈치를 보고 있어요. 더 말할 사람이 없다면 그이는 힘을 실어주게 될 겁니다. 정비공 대원이 내 사람에게 친절을 베푼 적은 없지만요.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죠.

수의 무녀 - 입출력의 건 - 화상 담당자가 유약함 - 머릿속 사과, 우리 손에 들어온 - 정비공 대원 - 갑론을박 - 양가감정 - 윤리의 감각

2020년 7월 8일 수요일

인력 관리자


인간을 만드는 중이다. 일터에 보내려고. 신생 SNS 스타트업에서 인력 요청을 해왔다. 사람이 바글바글한 것처럼 보여야 사람이 바글바글해지는데, 초기 가입자가 부족하단다. 일단 3천 명가량 만들어서 가입시켰다. 이 가짜 인간들은 이제 웹을 떠돌아다니며 다른 사람들이 올려놓은 데이터를 무단으로 수집한 뒤에 자신의 글과 사진인 양 올릴 것이다.
내가 일하는 곳은 말하자면 인력 사무소에 가깝다. 사람이 필요한 곳에 사람을 보내는 게 우리의 일이다. 일반적인 인력 사무소는 진짜 인간을 파견하지만 우리는 가짜 인간을 파견한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다. 우리는 가짜 인간이 필요한 사이버 장소, 단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보낸다. 포털 정치 기사에 댓글을 다는데 화력이 부족하다? 우리를 부르면 된다. SNS에서 다른 성향이랑 싸우는데 화력이 부족하다? 우리를 부르면 된다. 성인 불륜 사이트에 여성 회원의 수가 부족하다? 우리를 부르면 된다. 온갖 데이터를 도용하고 변형하고 재생성하여 대충 봐선 진짜 인간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힘든 가짜 인간을 만들고 관리하는 게 우리의 일이다. 정치적으로 좌파든 우파든, 대의적으로 옳은 일이든 옳지 않은 일이든 그야말로 좌우지간에 돈만 주면 얼마든지 인간을 보내줄 수 있다. 그래봐야 가짜 인간일 뿐 아니냐고? 이미 가짜 인간과 가짜 사회에서 숱한 시간을 보낸 당신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
곧 다가올 사회는 점점 더 가짜 사람을 기반으로 형성될 것이 분명하니, 가짜 사람이 되는 법을 배워두는 게 좋을 것이다*. 불쌍한 진짜 인간을 위해 진짜 정보를 주고 말았다, 으흠!








*“요즘에는 위조 인간들을 파는 산업까지 생겼다. <뉴욕 타임스>의 보도에 따르면, 2018년 초 트위터에서 최초 2만5000명의 가짜 팔로워를 모으는 데 225달러가 들었다. 그 가짜 계정들은 실존하는 사람들의 자료를 조금씩 가져다가 만든 것이어서 얼핏 보기에는 진짜 같다. 연예인, 사업체, 정치인, 그리고 사이버 세계의 몹쓸 놈들처럼 현대적인 고객층 모두 ‘가짜 사람’ 공장을 이용한다. 가짜 사람들을 만드는 회사들 역시 가짜인 경우가 많다. (…) 만일 사회가 가짜 사람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면, 자기 자신이 가짜 사람이 되는 법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재런 러니어

2020년 7월 6일 월요일

세계의 곡물창고들 '18

2020년 7월 1일 수요일

머릿속 사과, 우리 손에 들어온

“회의를 재개합니다. 화상 담당자는 스크린을 띄우고 Jasper-33a에 좌표축을 맞추어 주세요.”

그이가 조정간으로 가 단추 몇 개를 누릅니다. 허공으로부터 홀로그램 스크린이 쥐어뜯기듯 벌어져 나옵니다. 불쾌한 푸른색의 스크린 속에 그가 말했던 쥐색 행성이 대문짝만한 크기로 나타납니다. 사진으로 보았을 때는 잘 몰랐습니다. 행성은 아름답기를 포기한 것처럼 우두커니 칙칙한 색빛입니다. 사람 눈에는 다르게 보일까요? 순식간에 나는 저것을 불신합니다.

대장이 말을 이어나갑니다.

“Jasper-33a는 지금도 작동하고 있습니다. 활화산처럼 왕성하게요. 알다시피 저것은 지구와 관계 맺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인간과 관계 맺고 있는 것인데, 요는 인류의 생각을 저장한 다음 행성 표면에 투사한다는 것입니다. 일등 탐험 대원, 가져온 것을 이리로.”

일등 탐험 대원은 표본봉투 하나를 가져와 테이블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 안에는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사과 한 알이 들어 있습니다.

“일등 탐험 대원이 저 행성에서 노획한 사과입니다. 누가 머릿속으로 생각한 사과겠죠. 우리들의 장비로 조사해본 결과, 유기분자구조는 물론 무기성분 조성 칼륨(K) 57%, 인(P) 17%, 칼슘(Ca) 10%, 이하 구성 원소까지 지구의 사과와 완전히 일치합니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과입니다. 사과가 그렇듯 맛도 좋을 것입니다.”

“아삭아삭하겠죠.”

일등 탐험 대원이 중얼거립니다. 대장은 그저 입술을 한번 오므리고 맙니다. 그것이 일등 탐험 대원의 말에 대한 반응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생각이라는 것이 현실의 어떤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물리적 실체라는 것입니다. 은하와 행성을 막론하고 처음 발견한 경이입니다. 천문사, 아니 과학사에 길이 남을 발견입니다. 우리들, 우주선의 이름이 영속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는 이 행성의 존재를 조기에 보고하고 조기에 귀환하여 대규모의 공학자와 과학자를 동원해 연구 및 재탐사를 요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들 생각합니까? 빠르고 간략하게 부탁합니다.”

대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걸걸한 목소리 하나가 튀어나옵니다.

“께름칙합니다.”

망부석처럼 단단해 뵈는 그의 팔뚝이 테이블 위를 바쁘게 움직입니다. 팔뚝이 움직일 때마다 그의 목에 걸린 조그마한 나무 십자가가 흔들립니다.

“흉측하다 이겁니다.”

내가 알기로 그는 정비공 대원입니다.

수의 무녀 - 입출력의 건 - 화상 담당자가 유약함 - 머릿속 사과, 우리 손에 들어온 - 정비공 대원 - 갑론을박 - 양가감정 - 윤리의 감각

20년 6월의 모금통

메시지 모음

사탄
호랑이기운이솟
5분만쉬
굿즈창작독려6월
이거나드셔
666상쇄
나는농부할거야
다과회열어주세요6월
조수팬
세계산책의날
사탄2
한번해보자는건가
자가격려
이사야의금


이달의 격려 수 (누계)

모든 격려: 16 (18)
―――
곡물창고: 8 (10)
곡물창고에서: 1 (1)
바리에테: 2 (2)
기괴하고 엉뚱한…노트: 1 (1)
직업전선: 1 (1)
박물지: 1 (1)
클로짓 오프닝: 1 (1)
사자를 만나고 있을 때 사자가: 1 (1)


이달의 총격려금

123,970원


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1일 / 666원 ― 사탄
1일 / 10,000원 ― 곡물_호랑이기운이솟
3일 / 2,000원 ― 바리/5분만쉬
9일 / 5,000원 ― 굿즈창작독려6월
9일 / 10,000원 ― 이거나드셔
10일 / 2,000원 ― 기괴하고엉뚱한
11일 / 44,444원 ― 666상쇄
12일 / 5,000원 ― 직업-나는농부할거야
15일 / 10,000원 ― 다과회열어주세요6월
16일 / 2,000원 ― 박물지 조수팬
18일 / 3,000원 ― 클로짓오프닝
19일 / 4,190원 ― 세계산책의날
29일 / 6,666원 ― 사탄2
29일 / 1,004원 ― 한번해보자는건가
30일 / 10,000원 ― 사자를 자가격려
30일 / 8,000원 ― 바리에테 이사야의금


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곡물창고에서 [入] ☞ 2인 각 5,000원 (미등록 필자 몫 5,000원 기금화)
바리에테 [入] ☞ 10,000원
기괴하고 엉뚱한…노트 [未] ☞ 없음 (2,000원 기금화)
직업 전선 [入] ☞ 없음 (5,000원 기금기부)
박물지 [未] ☞ 없음 (2,000원 기금화)
클로짓 오프닝 [完] ☞ 3,000원
사자를 만나고 있을 때 사자가 [入] ☞ 10,000원


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97,478원 (95,970원 + 1,504원 + 4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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