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30일 화요일

교정의 요정

관리실에 앉아 이달 모금통 회계부를 적고 있다가 교정의 요정에게 끌려 나와 적잖이 놀랐다. 평소엔 마주쳐도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사이였다. 인사를 행여 해도 꼭 속삭이는 것처럼...

어디로 가는 거죠? 물어도 대답이 없다. 대답을 했는데 안 들린 것일 수도 있다. 요정의 검지와 중지에 집힌 소매가 형광 녹색으로 물들고 있다.

송편 빚은 얘기 봤어요. 나는 아무 얘기나 되는 대로 꺼낸다. 좀 두렵기도 했다.

그것이 언제적 일인가요. 거의 한 해가 지났어요.

이번엔 목소리가 분명히 들린다. 제대로 들은 것은 처음 아닌가? 교정의 요정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교정의 요정다웠다. 어디로 가는 거죠? 다시 물었는데 요정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하겠다는 듯, 앞으로 가기만 할 뿐이다. 나를 어디로? 뒷마당으로? 이대로 요정에게 끌려서 끝까지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끝이 어디라고? 단지 요정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질문하면서.

요정의 비현실적인 빛깔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아마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홀린 듯이, 나는 전부터 한번 요정을 만져 보고 싶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요정이 나를 거의 만지고 있는 지금, 요정을 조금 만져 봐도 괜찮지 않을까? 요정에겐 옷소매도 없다.

교정의... 요정님 전부터 궁금했어요. 조금 만져 봐도 되나요?

요정은 뭐라 속삭인다. 들리질 않아 대답인지 뭔지도 알 수 없다.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저장고를 끼고 돌면서, 다시 용기를 내 묻는다. 만져 봐도 되나요? 요정이 답한다.

나는 고양이가 아니에요.

그럼 나는 뭐 가죽 포대라도 된단 말인가? 소매를 잡은 교정의 요정의 손을 탁 뿌리치는데, 잠깐 닿았는데도 그것은 몹시 아린 느낌이다. 요정은 멈춰 서서 돌아본다. 나를 어디로 데려가서 뭘 하려는 거지요? 요정의 뚫린 듯한 동그란 눈에서는 언제나와 같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중이다. 관리인의 말이 생각난다. 교정의 요정은 교정을 하는 게 아니야. 교정은 교정공이 하는 것이고, 교정의 요정은 교정공이 있는 곳마다 나타나

아무도 모르게 한 글자를 바꾸고, 공백을 빼고 놓으며 방해하는 거지. 우리는 지금 동백 앞에 서 있다. 요정에게 닿은 부분이 어떻게 될까 걱정스러워져서, 나는 손등을 만지기 시작한다.

2020년 6월 28일 일요일

영화감독

투자자들이 화났다. 연일 영화사 앞에 진을 치고 있다. 성난 투자자들을 달래려면 돈을 줘야 한다. 돈이 없다. 임금 체불도 몇 개월째란 말이다! 돈이 없으니 돈을 벌어야겠다. 영화 감독이 돈을 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영화를 찍어야 한다. 물론 흥행하면 좋겠지만, 일단 거기까진 생각하지 말자. 흥행할 만한 블록버스터 영화를 만들 역량은 남아 있지 않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랜 임금 체불 탓에 직원들이 모두 퇴직한지라 사람이 남아 있지 않다. 그래도 돈을 벌려면 영화를 찍어야 한다. 물론 방법은 있다. 일단 영화 제목을 짓는다. 그리고 배급사를 찾아가 미팅을 한다. 그런 뒤 미팅을 하기 전 보도자료를 인터넷 신문사에 쫙 뿌린다. 쓰레기 같은 기사를 내서라도 기사량과 클릭 수를 조금이라도 늘리려는 곳이 바로 인터넷 신문사이므로 내가 뿌린 보도자료를 거의 그대로 복사해서 기사로 낼 것이다. 마침 나는 투자자들에게 고소당해서 이슈화된 상태이기 때문에 나와 관련된 기사라면 무엇이든 나올 확률이 높다. 이제 배급사를 찾아간다. 나는 무명이 아니기 때문에 배급사 쪽에서도 마구 내치진 못한다. 그렇다곤 해도 배급사에서 투자해줄 확률은 없다. 나도 안다. 그래도 괜찮다. 투자 여부를 확정 짓는 대화만 나누지 않으면 된다. 그냥 이런 영화를 만들려고 한다, 조금 더 구체화되면 제대로 된 시놉시스를 들고 올 테니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는 식으로 적당히 얼버무리면 된다. 그래도 조금 제대로 된 기자들은 사실 관계 확인을 위해 배급사에 전화를 걸 것이다. 배급사에서는 투자를 해줄 생각이 없더라도 영화 관련 이야기를 나눈 것은 사실이고, 아직 투자 거절을 딱 잘라 한 것도 아니니까 기자들에게는 그 정도 선에서 적당히 대답할 것이다. 그 정도면 된다. 나는 기사를 모아서 투자자들을 찾아다닐 것이다. 내가 아무리 망한 감독 소리를 들어도 한 방을 친 이력은 있고, 혼란 속에서 난 기사들이 노이즈 마케팅의 효과를 낸다고 판단될 수도 있다. 몇몇 바보 같은 투자자, 또는 도박사 근성이 있는 투자자 들이 내게 돈을 줄 것이다. 영화를 만들기엔 턱없이 부족해도 된다. 잠적하고 지내기에는 충분한 돈일 테니까. 그러면 성난 투자자들은 어쩌냐고? 그걸 나한테 왜 묻는담? 화는 스스로 풀어야지. 영화 제목은 방금 지었다. <유령 도박사>*라고.






*모티프는 <유령 도둑>. <유령 도둑>은 영구프로덕션에서 제작하기로 했다가 제작하지 못한 마지막 작품이다. 영구프로덕션은 이 작품을 제작하기 전부터 재정난과 임금 체불로 영화를 만들 수 없는 상태였던 것으로 보였으나 이 영화를 만든다고 지속적으로 기사를 냈고 투자금을 받았다가 후일 투자자들에게 고소당했고 패소했다. <유령 도둑>은 알려진 시놉시스도 캐스팅도 없다. 단 장르만은 결정되어 있었는데, 코미디였다고 한다.

2020년 6월 19일 금요일

세계 산책의 날

제목 “오늘은 세계 산책의 날입니다”
그림1
그림1 내용 “6월 19일은 세계 산책의 날”(상) “어슬렁거리기 허가됨”(하)
그림1 캡션 “6월 19일―매년 같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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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그림2 캡션 “산책: 혼자서 천천히, 목적 없이, 행복하게 걷기”
그림3
그림3 캡션 “고양이도 산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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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4
문단 “세계 산책의 날은 1979년, 세계에서 가장 긴 200미터짜리 현관을 보유한 미시간주 Mackinac 섬 그랜드 호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 W. T. Rabe는 당시의 조깅 열풍에 대응하여 조깅 대신에 주변 모든 것들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느긋한 시간을 갖자며 이 날을 만들었습니다. W. T. Rabe는 호텔의 홍보담당자였습니다.”
가로선
소제목1 “산책 입문”
문단 “옛날 참선풍의 산책을 즐기고 싶다면 <링크1>를 클릭해서 WikiHow가 제공하는 입문서를 보세요. 걷기를 만끽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목적도 없이 걸으려면 어떻게 하는지.”
그림5
그림5 캡션 “산책을 어떻게 하면 안 되는지”
가로선
소제목2 “더 많은 정보”
링크2
링크3


― 웹사이트 『Dull Men’s Club』에 게시된
「Today is World Sauntering Day」 전문(번역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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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11일 목요일

곡물창고에 필자 등록을 하면 곡물창고에 등록된 필자가 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사형수는 스피커에게 빳빳한 종이 한 장을 가져다 주었다. 만져보니 익히 아는 종이였다. 시녤펜이 만든 거야. 반가움이 살짝 일었다. 스피커는 천천히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가 알게 된 것을 자네에게 알려주어야만 해.
자네가 누구인지 앞으로도 알 수 없겠지만.

내가 알아낸 것은 우리가 찾아 헤매던 신이 이곳 광산에 있었단 거야.
불분명하지.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에 불과하니까.

신이 친절하다는 것을 미리 말할게. 신은 뭇 인간보다 잘 듣는 존재이며 뭇 인간보다 인간을 좋아해. 그래서 인간의 소원을 이루어준다.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모든 것을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이지. 그가 무시한 세계의 법칙은 우리에게로 온다. 우리 주술사들이 대속하는 것은 바로 신이 행하는 기적만큼의 불합리야. 저주라고도 하고 제약이라고도 하는 그거 있잖아, 우리를 죽고 싶게 만드는.

그리고 신은 언제나 99년 전에 있어.

신이 언제나 99년 전에 있기 때문에, 신이 언제나 우리의 뒤에 있기 때문에 그에게 소원을 빌면 99년 뒤에 이루어진다. 신이 여기 오는 데 99년이 걸리는 거야. 알겠지. 초목이 얼음으로 뒤덮이고 대지가 얼어붙어 우리 인간들이 이곳 학살지 시체 매장지에서 나오는 사람 고기로 연명하게 된 것은 언젠가의 99년 전에 누가 빌었던 소원 때문인 거야. 그것은 신의 잘못이 아니야. 따져보면 우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지. 어떤 사람이, 세계가 다 얼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대지가 땅이 인간에게 먹을 것을 쉴 곳을 제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된 것은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야. 어떤 이유에서건 그를 탓할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세계에 잘 공헌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야 돼. 수습하는 수밖에 없어. 손 놓고 있으면 안 된다는 걸 알겠어? 나도 먹었고 자네도 먹었겠지만, 학살 피해자를 식량 삼는 일을 언제까지고 계속할 수는 없어.

신은 소라게의 모습을 하고 있어. 밟아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작은 소라게. 그것은 내가 옛 나라의 어떤 노인에게서 들었던 거야. 그가 지고 다니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어. 노인은 그가 지고 다니는 소라에 희끄무레한 오각별 하나가 그려져 있노라고 말해주었지. 자네가 할 일은 그를 찾아내는 거야. 어떻게든 신과 우리 사이에 있는 시간을 좁혀서. 신을 찾아. 99년 뒤에 이루어질 소원을 빌어. 다시 되돌려. 모든 것은 자네의 역량에 달렸어. 왜냐하면 자네는 분명 마지막으로 올 사람일 테니까.

화상 담당자가 유약함

“예?”

화들짝 놀란 그가 비스킷을 떨어뜨립니다. 비스킷 가루가 휘날려요.

“당신 말대로 우리는 연인이 아닌가요? 당신의 편이 되고 싶고 당신의 고민을 부수어 놓고 싶어요. 발에 채인 민들레 머리가 부서지듯이. 나는 발이 되고 싶어요. 눈물을 글썽이지 말아요. 양심적 당신. 당신께 저 행성은 원죄 같은 모양이지만, 죄는 사랑으로 척을 질 수 있다고 익히 들어 알아요. 그러니 함께 갑시다.”

당신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입니다.

“미안해요. 나 바보 같죠. 하지만 용기가 조금 생기는 것 같기도 해요. 대원들을 생각하면 어둠이 몰려오지만서도.”

“어둠은 빛과 별개의 것이 아니에요. 빛이 빠져나간 자리에 불과하죠.”

그가 내 팔 안으로 머리를 파묻으며 말합니다.

“알겠어요.”

내가 한 말이 진심인 걸 알았나봐요. 이제 당신은 눈물을 글썽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란히 회의장으로 걸어갑니다. 자동문이 소리도 없이 열려요. 회의장 끝에는 금속성의 원탁이 하나 있고, 그것을 가운데로 다섯 명의 대원이 둘러앉아 있습니다. 작업복 차림의 대원들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행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겠지요. 대장이 우리의 도착을 알아챕니다. 그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어요. 화장실에 참 오래도 갔다온다고, 누가 비아냥거립니다. 로봇은 왜 달고 오느냐고 부대장이 퉁명스레 말합니다. 나는 다만 내 사람의 위장 상태가 좋지 않다고 말하고 자리에 앉은 그의 곁에 서 있습니다. 대장은 회의를 재개하고자 합니다.

2020년 6월 2일 화요일

수상한 목함

우편함을 만든 뒤로 매일 광고 전단을 꺼내 소각장에 버리는 게 일과가 됐다. 쥐잡이는 잔뜩 쌓인 광고지 더미를 밟고 씹고 깔아뭉개는 느낌이 좋은 모양이다. 잘못해서 쥐잡이를 태워 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한편 관은 오늘도 그놈의 통 앞에서 서성대고 있다. 모금통은 관이 어디서 무슨 소릴 듣고 온 건지, 어쩐다저쩐다 한참 부산을 떨다가 바로 어제 놓은 것이다. 종일 그 앞에서 기웃거리고, 뭘 적어서 넣고, 자꾸 여닫는다. 그렇게 지키고 있으면 무슨 맘이 들다가도 없어질 것이라 하자 뒷마당을 한바퀴 빙 돌아 다시 돌아오고 만다. 뭐 있겠어? 자네 돈이나 실컷 넣겠지. 맞아요. 그게 이걸 놓은 이유 중 하나죠. 내가 돈이 좀 넉넉히 있었으면 뭐 한 이삼십쯤 넣었을 거예요. 그보다 이거 보세요, 여기 이 메시지, ‘요옹’은 대체 뭘까요? 혹시 이사야가 넣은 거 아닐까요? 나는 머리가 이상해지기 직전인 듯한 관에게 보리차 한 잔을 따라 준다. 비 올 거 같으니까 오늘은 가서 쉬어. 이제 날도 더워지는데 뭐 맛있는 것도 챙겨 먹고. 관은 물맛이 참 좋다 하고, 알았다고 하고, 집으로 간다. 쥐잡이에 대해 말해 놓는 것을 깜빡했다. ‘요옹’은 관이 써 넣은 것인 줄 이미 알고 있다. 그러고 보면 제법 짜임새가 좋은 상자가 아닌가? 어디서 났을지, 아마도 오동나무 같은데. 멀리서 쥐잡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며, 짚이는 바가 있다.

2020년 6월 1일 월요일

20년 5월의 모금통

메시지 모음

이사야만수무강
요옹

들어온 격려금

총액: 1,504원
상세:
└ 14일 / 100원 / 입금자명 - 이사야만수무강
└ 31일 / 1,404원 / 입금자명 - 요옹

격려된 태그(격려 수) / 전달된 격려금

없음

현재 기금(+당월)

1,504원(+1,504원)

격려 누계(+당월)

곡물창고: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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