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22일 목요일

민중출판공사

대중이 ‘요구된 혐오의 대상’(또는 대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대표 대상)으로서 비일관성을 그 특질로 삼아 수집 상상된 개념-경험이듯, 민중은 ‘요구되는 만능의 주체’로서 일관성을 그 특질로 삼아 수집 상상된 개념-경험입니다. 우리가 대중에 대해 아무렇게나 마음 내키는 대로 말할 수 있으며 그 말이 대중이란 단어의 정의상 언제나 옳다면, 민중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아마 여기서 ‘대중’과 ‘민중’의 자리에 다른 단어쌍을 넣을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둘 다 헛되다는 식의 이야길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대중은 동시에 지났기 때문에 욕먹을 만한 길을 같이 지났던 모든 당신과 접니다. 민중은 같은 길―아마도 미래에나 같았다고 확인될 수 있을―에 서있었던 당신이었던 것, 저였던 것, 당신 또는 제가 될 무언가입니다. 제가 무슨 소릴 하려는 걸까요? 우리 ‘민중출판공사’의 목표에 대해 말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출판을 통한 수익의 실현이 아닙니다. 무슨 새삼스런 소린가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들 그렇게, 저마다 그럴싸하게, 겉으로 내세우는 수익 실현 외의 목표들이 있지요. 그러나 수익 실현이라는 존재양식을 거스르는 출판사는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어려웠죠. 그러나 다행으로, 이제 우리는 우리의 목표와 존재양식을 일치시키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둘 모두를 아주 조금씩 움직임으로써 그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지속을 위해 출판을 핑계로 댈 필요가 없으며, 출판을 위해 도박마도 무법자도 파쇄기도 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오직 하나 고용의 창출, 더 구체적으로는 노동의 창출입니다. 지난날 수익의 창출이 만사업들의 공공연한 목표이자 존재 방식이었던 것처럼, 이제 우리는 노동만 창출할 수 있으면 됩니다. 즉, 우리 민중출판공사는 노동을 창출해야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창출해내는 노동은 여러 가지 있지만, 가장 주된 것은 역시 교정 노동입니다. 교정 노동은 그야말로 무한대로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합니다. 우리와 계약한 삼십만 교정공들은 하루에 두 시간, 보통은 집에서, 약간의 소개를 읽어본 뒤, 원하는 원고를 택해 일합니다. 모두의 교정이 완료되면, 약간의 자동화된 조율을 거쳐, 모두가 모두의 교정 의견을 확인합니다. 우리는 답변을 제출합니다. 우리는 답변을 대조합니다. 우리는 다음 원고를 고릅니다. 임금은 어떻게 나오냐고요? 임금 같은 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몰아주기를 포기하는 데 우리가 성공한 겁니다. 다행이죠. 당연히 우리는 아직 출판한 책이 없습니다. 하지만 삼십만이 읽었는걸요?

[20호 서신]


*전환기
- 혹서기 건강 유의(충분한 휴식 수면과 수분 공급, 스트레스 컨트롤, 식생활 관리)
- 코로나-기후위기 뉴노멀에 대한 마음의 준비―지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없다

*현황 보고
- 알림판 팔로어 200↑ 달성
- 곡물창고 보름간 발송 5개월째, 10호까지 발송 완료: 현재 구독자 56
- 7월 현재 입하량 작년 입하 총량에 육박

*곡창 3.0으로의 도약 준비
- ★쪽지함(마당)★ 전격 도입
- 쪽지함 기반 콘텐츠 전개?
- 독자 모집 홍보 문안 완성
- 약간의 메뉴 개편(연재 소개 모아서 보기, 저장고, 관리실 분리 등)
- 보름간 11호부터 랜덤 게시물 읽기 섹션, 쪽지 남기기, 구독폼 링크 추가 예정
- 곡창 굿즈 제작 관련 탐색
- 여타 3.0 도약을 위한 새로운 기획 구상

이상

2021년 7월 16일 금요일

미셔너리

우리가 그 맨션에 들어갔을 때, 사방은 조용했다. 한 사람이 복도의 문을 열고 나왔다. 그 사람의 얼굴은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눈을 보면 조금 부어 있고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우리는 조용히 복도를 걸었다. 나왔던 사람은 말없이 문을 닫고 들어갔다. 우리는 특정한 한 집의 문을 열었는데, 그곳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들 중 한 군데는 높이가 있었고 한 군데는 낮아 보였다. 그 사람들은 절대로 서로의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정신없이 카페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옆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 즐거워하거나 기분 나빠했다. 우리 중의 한 사람이 걷기를 멈추고 이곳에 들어가겠다고 해서 우리 모두는 그 사람을 제지하고 그 사람을 부축해 와서 간신히 현관문 밖으로 옮겼다. 이 맨션은 우리가 연습용으로 미셔너리를 할 때 쓰이는 공간이다. 이곳은 비 오는 날의 빗줄기의 가느다람처럼 특별히 준비를 안 하고 오면 아주 위험했다. 그리고 그 위험성은 방금 한 사람을 통해 증명되었다. 그 사람은 다음 달에 외국으로 미셔너리를 나가야 하는 사람이었는데 이 정도로 위험할 정도라면 일정을 다시 고려해봐야 하는 걸지도 몰랐다. 이곳에서 긴급하게 한 사람을 정상적인 상태로 돌려놓으려면 무엇보다 안심을 시켜줘야 했다. 아무리 방 안의 풍경들이 정신없고 심란한 것이라고 해도 우리들 선교자에게는 우선 마음가짐이 안정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안심하려고 하질 않았다. 우리는 급히 흩어져 이곳에 이미 들어와 있는 선교사들을 찾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 사람을 안심시켰다. 우리들은 갑작스럽게 사람 수가 많은 일행이 되었고 갑작스럽게 불러낸 데에 사과를 하고 나서야 선배 선교사들은 화난 얼굴을 하고 각자 있던 곳에 되돌아갔다. 우리들도 약간 화가 나 있었다.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를 했는데 고작 이곳에서 한 명의 잘못된 경우가 발생하다니. 정신을 차린 그는 미안함에 어쩔 줄 모르며 가지고 있던 짐을 풀어 육포를 한 사람씩에게 돌렸다. 일행 중 가장 연장자인 사람이 더 이상의 진행은 어렵겠다고 판단하고 쉴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쌍둥이자리 뒤에 은은히 빛을 내는 물병자리, 그곳을 손으로 짚어 뭔가 점자처럼 튀어나와 있어 요철이 손에 느껴진다면 그것은 바로잡힌 오망성을 뜻하는 것이었다. 한 사람의 손동작은 그야말로 완벽했고 이것으로 쉴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그곳에는 차단기가 내려져 있었는데 차단기란 ‘그’와 나 사이에도 있고 연단 앞의 사람들에게도 있고 이제 미셔너리를 떠나게 되면 그곳에 있는 외국인들에게도 있고(물론 거기서는 그 자신이 외국인이 되지만) 아무튼 감자에 싹이 나면 잘라내야 하는 것처럼 잘라낼 수도 없고 뭔가 그들에게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차단기만이 이미 좀비가 되어 있는 4층의 사람들을 막아줄 수 있었다. 방 안에는 침대와 각종 가구들, 그리고 식량이 있었는데 그들은 아까 위험해진 사람을 우선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탐사 계획을 세웠다. 물론 연습만 하는 공간일 뿐이므로 탐사를 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들은 계획을 이미 세워 놨었는데 그들 중 벌써 낙오자가 생긴 것은 계획에는 없었던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 탐사를 여기서 끝내고 다음 기회를 기약할까, 하는 의견이 다수를 이뤘다. 그런데 한 사람이 유치한 말을 하면서 그들에게 있는 어떤 포기하기 싫은 심정을 겨냥하고 있었다. 이 장소에서 그런 말은 아주 위험한 것이었으므로 삼가야 했는데 아마도 그것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어쨌든 간에 모두는 이대로 나갈 수는 없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고 다시 맨션 복도를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3구의 좀비를 만났으며 일본도를 찬 한 사람이 좀비들을 격파했다. 그리고 이 일행은 옥상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옥상은 아주 시원했고 여름날이었다. 한 사람이 옷을 벗고 속옷 차림이 된 채로 옥상 의자에 누웠다. 햇빛을 받으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옥상에는 무해한 외국인들이 있었고 그들을 벌써 상대하고 있는 선배 선교사들이 있었다. 그 선교사들은 여름날에도 무척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게 지금 옥상으로 올라온 일행들의 눈에는 그렇게 마음에 들어 보일 수가 없었다. 시간이 금방 지나가 버려서 밤이 되었고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던 미셔너리 연습용 헬기가 옥상 위로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잠옷을 입고 있었고 옥상 위에 있던 선교사들을 구조해 떠났다.

2021년 7월 15일 목요일

독자 환영사 문안

환영합니다!
시간의 다른 사용법을 찾아 『곡물창고』의 정예 독자진으로 순간 합류한 당신...

올해로 ○년, 창고에 모인 우리―약간 명의 필자들이 오직 자신의 글을 으뜸 보상으로 삼아 연재의 약속을 시작한 이래, 시간 외에 아무 값도 요구받지 않은 우리―약간 명의 독자들은 창고에서 제공하는 방식으로 그에 영향을 미치거나 미치지 않기를 지켜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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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붙임자료] (*이하 자료 추가)
* 현재 연재물 소개 모음
* 연재 종료로 저장된 태그 모음
* 모금통 ― 곡물창고 제공의 필자 격려 방법
* 게시판 ― 곡물창고에 쪽지 붙이기
* 창고관리인 인터뷰「직업 전선: 곡물창고 관리인
* 곡물창고 필자 모집 홍보 문안
* 곡창의 더 깊은 세계 속으로… 『곡물창고에서』 시리즈

2021년 7월 12일 월요일

인사

나는 언니에게 ‘안녕’이라고 말했다. 언니도 ‘안녕’ 답해주었다. 이처럼 모든 인사에는 그 답인사가 뒤따라오기 마련이다. 나는 인사가 궁금했다. 그래서 언니에게 물어보았다. ‘인사가 뭐야?’ ‘사람들이랑 만나거나 헤어질 때 하는 거야. 그런 게 궁금했니? 인사는 반갑거나 친절하거나 격식이 있게 하는 것이 보통이야.’ ‘보통이 뭐야?’ 보통이 뭔지 나는 궁금했다. ‘언제나 그렇게 하는 거. 그게 옛날이든 앞으로가 되었든 사람들이 하는 거. 옛날이나 앞으로가 바뀔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는 거야. 보통대로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수도 있어.’ 난 이상한 게 뭔지 궁금했다. 그래서 언니에게 물어보았다. ‘이상한 게 뭐야?’ ‘평소와 같지 않거나 사람들 중에서 특이하게 눈에 띄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이상한 사람이라고 불러. 물건도 이상할 수 있는데, 그런 것들은 이상한 물건이라 불러. 좀 생소한 걸 말하는 거야.’ ‘그러면 언니. 생소한 게 뭐야?’ 생소함이 뭔지 나는 궁금했다. ‘이상한 거랑 비슷할 수도 있는데, 전에 본 적이 없거나 좀 새로운, 낯선 것들을 말해.’ ‘그렇구나, 언니. 대답 많이 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낯선 것이 뭐야?’ ‘이것도 이상한 거나 생소한 거랑 비슷할 수도 있는데, 익숙하지 않거나 눈에 익지 않은 걸 말해.’ ‘눈이 뭐야?’ 눈이 뭔지 나는 궁금했다. ‘네 눈썹 밑에 있고 코 위에 있는 거. 이걸로 주위를 볼 수 있어. 그리고 비유적으로는 마음의 창이라고 부르기도 해. 그 안에 있는 걸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이 가능하지.’ ‘마음이 뭐야?’ 마음이 뭔지 난 궁금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네 가슴 속에 있는 걸 그렇게 불러. 그건 침울해질 수도 있고 벅차오르게 될 수도 있어. 아무튼 자주 바뀌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만은 분명하단다.’ ‘존재가 뭐야?’ 존재가 뭔지 난 궁금했다. ‘이건 조금 어려운(철학적인) 말인데, 사람이나 물건이 어떤 곳에 있는 걸, 그렇게 없지 않고 있는 상태를 말해.’ ‘상태가 뭐야?’ 상태가 뭔지 난 궁금했다. ‘네가 지금 이렇게 물어보고 있는 거. 과거나 앞으로의 일에도 이런 게 있을 수 있어. 정확히는 그때 어떤 사물이나 사람이 처해 있는 사정이나 모양 같은 걸 그렇게 불러.’ ‘모양이 뭐야?’ 모양이 뭔지 난 궁금했다. ‘겉보기로 그렇게 보이는 거. 꽃은 어떻게 생겼니?’ ‘예쁘게.’ ‘그럼 그렇게 예쁜 모양이라고 부르는 거야.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이런 게 있을 수 있어. 아무튼 눈에 보이기로는 그렇게 보이는 거야.’ ‘언니, 그런데 예쁜 게 뭐야?’ 예쁜 게 뭔지 난 궁금했다. ‘보면 기분이 좋은 거? 그런데 이건 나도 잘 모르겠구나.’ ‘모른다는 게 뭐야?’ 나는 모른다는 게 뭔지 궁금했다. ‘어떤 것에 대해서 이렇다 하게 잘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해. 예를 들면 잔디 밭에 있는 풀들이 서로에 대해 잘 알까? 알 수도 있겠지만 모를 수도 있겠지. 나는 모른다고 생각하는 쪽이야.’ 나는 생각이 뭔지 궁금했다. ‘생각이 뭐야?’ ‘넌 오늘 궁금한 것이 많은 모양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어. 그리고 백과사전을 사줄까 하는 생각을 했어. 생각은 이렇게 아직 남에게 알리지 않고 속으로만 갖고 있는 마음을 말하는 거야.’ ‘언니 고마워. 나한테 오늘 많이 대답해줘서.’ 나는 언니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2021년 7월 6일 화요일

오래된 필통

난 오래된 필통을 갖고 있다. 거의 중학생 때 산 거. 천으로 된 필통은 천이 다 해져 있고 보푸라기들이 솟아 있다. 나는 이 필통이 마음에 든다. 왜냐하면 오래된 물건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래된 물건을 좋아한다. 가구 중에서도 앤틱 가구를 좋아한다. 그것들 겉만 오래되고 매끄러운 것처럼 보이고 속은 새것인 경우가 많지만(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안 사줄 것이다) 나는 별 신경 쓰진 않는다. 왜냐하면 한 5년 내로 가구를 내 돈으로 살 일은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 필통에는 컴퓨터용 사인펜 한 개와, 내가 주로 쓰는 샤프 한 개와, 4B 연필 두 개와(나는 곧 이것들을 쓰게 된다) 샤프심 통 한 개가 들어 있다. 그러고 보면 샤프심을 하나 사야 하는데.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새로운 샤프도 하나 사고 싶다. 지금 내가 쓰는 샤프는 샤프심을 반 정도만 쓰면 나머지가 부러져서 나오는 것 같다. 심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한다. 그러고 보면 이 샤프도 꽤 오래된 것이다. 한 3년 썼나? 난 전에 비싼 샤프들에 관심이 있었고 그중에 하날 돈을 모아서 산 적이 있었는데(학교 다닐 때의 일이었다) 반의 누군가가 다가와서 그 샤프를 알아본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조금 뻘쭘했다. 왜냐하면 비싼 샤프에 관심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하나는 내가 가방에서 오래된 필통을 꺼낼 때마다 웃곤 했다. 거기엔 쓸모없는 물건밖에 들어 있지 않다면서. 하지만 1년 전쯤에 나오지 않는 볼펜 같은 건 다 버렸고, 이젠 다 쓸모 있는 물건들뿐이다! 다 실제로 쓰는 것들이다. 컴퓨터용 사인펜도 쓸 일이 없을 것 같았지만 쓸 일이 있었다. 바로 누군가한테 사인 받는 용도로 그것을 난 내밀었다. 얼마 전까지 휴대용 연필깎이를 필통 안에다 보관했기 때문에 거기에서 흑연 가루들이 새어 나와서 필통 안뿐만 아니라 가방까지 검은 기운으로 잠식한 적이 있었다. 이젠 못 쓰겠어서 그 연필깎이는 버렸다. 그래서 필통 안의 물건들이 아직도 새까만 채이다. 내가 내민 컴퓨터용 사인펜도 새까맣게 칠해져 있었다. 나는 두 달 동안 집에서 쉬었다. 그것은 요즘의 일이다. 그동안 난 카페에 자주 갔고 일기를 자주 썼다. 그랬더니 금방 시간이 지나가게 된 것 같다. 이제 난 왕복 세 시간 정도의 거리를 일주일에 두 번씩 통학해야 한다. 그것은 지금 별로 익숙하지 않은 일처럼 느껴진다. 나는 작년부터 학원에 다녔고 그건 지금 생각해 봤을 때 꽤 재밌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새로운 경험 같았기 때문이다. 다니다 쉬게 된 건 너무 쉬지 않고 계속 다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 그려야 한다는 압박이 심했다. 그러나 두 달 동안 쉬어서 그런지 이제 그런 압박은 좀 덜해진 것 같다. 그래서 일주일에 두 번이나 학원에 가게 될 예정인 지금, 그렇게 걱정이 되진 않는다. 취미(그림 그리기)가 하나 새롭게 또 생긴 기분이다. 이런 나도 나중에 보면 오래된 물건인 것처럼 느껴지겠지. 조만간 나는 샤프와 샤프심, 그리고 마음이 동한다면 필통을 하나 사면 좋겠지.

2021년 7월 2일 금요일

무엇을 출판하지 않을 것인가

등록된 출판사 ‘무엇을 출판하지 않을 것인가’는, 약간 뻔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출판하지 않는다. (이 글의 스타일 자체가 좀 뻔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출판하지 않을 것인가’ 출판사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무엇을 출판하지 않기로 했는지 일주일에 두 번 공고가 올라온다. (그 게시판의 이름은 《불출간 소식》이다.) 올라오는 공고문의 제목은 일단 책 제목처럼 보이긴 한다. 『누구나 쓰는 자기개발서 가나다』, 『하룻밤 만에 대문호가 되었다?』, 『공산주의 사업의 정의 2』, 『社名을 찾아서』... 클릭해 보면 가끔 제법 그럴싸하거나 그저 그런 출판기획서, 흔히 아주 얼토당토않은 망상, 꽤 잦게 책 비슷한 것도 될 수 없을 무언가, 반수 정도 그 정의상 출판할 수 없는 헛소리인데, 언제나 마지막은 ‘우리는 이 책을 출판하지 않기로 했습니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적어도 기획서의 형태일 때 그렇다는 것이고, 표지처럼 보이는 이미지 파일 하나만 딸랑 첨부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제목과 함께 대체 무슨 상관인지 모를 동식물과 풍경 사진 같은 것만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108가지 장면으로 훑는 세계번뇌사』... 이미지 외에도 동영상이나 음악, 무슨 기사의 링크며... 이 공고문들의 조회수는 꾸준히 10에서 20 내외로 유지된다. 도대체 누가 이토록 오랫동안, 끊임없이 그것들을 읽고 있단 말인가? 무엇을 출판하지 않을 것인가 출판사가 무탈하게 운영된 지도 어느덧 20년이 흘렀다. 약 2,000여 개의 공고문이 올라오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출판하지 않을 것인가』라는 제목을 그토록 기다려왔건만...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회사 소개로부터 영감을 얻었음을 밝힘.)

에세이를 쓰면서 느낀 책 (부록)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하루 8시간 주 5일을 일합니다. 정규직입니다. 30대 후반이라 체력도 부족합니다.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운동을 하고 밥을 먹으면 남는 시간은 책을 읽는 것도 부족합니다. 출퇴근 때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일터의 일은 자잘하게 바쁩니다. 집중해서 쓰려고 앉는 것이 어렵습니다. 쉬는 날에는 못다 한 집안일을 합니다. 주로 아침에 일어나서 식물 분무. 설거지. 빨래와 널기. 떨어진 생필품 채우기. 냉장고를 비울 수 있으면 비우고. 분리수거 하기. 청소기. 이러면 일주일을 조금이나마 사람답게 보낼 수 있습니다. 도시락을 싸 가기 시작합니다. 닭가슴살, 고구마, 토마토, 이것을 미리 삶고 굽고 씻고 냉장고에 소분하는 것도 쉬는 날 합니다. 닭가슴살이 양질의 단백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만, 캡슐이라고 생각하고 먹는 겁니다. 이것마저도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가족들은 제게 서운합니다. 집 근처에 사는데 가지도 않습니다. 애인은 나처럼 가족을 안 찾아가는 사람은 처음 본다, 라고 말하는데 그 말을 가족도 합니다. 체력이 버티지 못하면 낮잠을 자는데 낮잠이라고 말하기에는 밤잠에 가깝게 초과됩니다. 배달 음식을 시키면서 죄책감을 느낍니다. 다시 일주일이 시작됩니다. 글은 마감 직전에 썼는데, 시라서 다행입니다. 시는 머릿속에서 문장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더 잘 쓰고 싶지만, 나는 노동자이기도 합니다. 아니, 노동자지만 시를 씁니다. 그럼에도 나는 다른 여성들에 비해 괜찮은 거라고 합니다. 아이가 없고,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운동도 할 수 있고 낮잠도 잘 수 있고, 쓸 수 있는 시간도 있지 않겠냐고. 그런데 쓴 건 없습니다. 이게 다 제 게으름 때문입니까? 그렇습니다.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누군가는 집을 떠나고, 누군가는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쓴다는데, 이제 그럴 수가 없다고 느끼는 걸 보니 나이가 들어서일까요? 죄송합니다. 아직은 그런 말을 할 처지도 아니네요.


2021년 6월 25일

집에 있는 에세이 책을 모두 꺼내 펼쳐보았다.

2021년 6월 28일

어떻게 쓸지 알겠다고 느꼈는데 일어나니 모르겠다.

2021년 6월 29일

세상 사람들은 참 똑똑한 것 같다. 물론 그렇지 않은 책도 있었다.

2021년 6월 30일

잠들기 전, 에세이를 쓰면서 느낀 책에 대한 소개글을 작성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021년 7월 1일 

백은선 시인의 산문집과 서윤후 시인의 산문집을 재밌게 읽었다. 이소호 시인의 산문집을 읽고 있다. 

2021년 7월 2일

산문 기계처럼 쓰고 싶다.

수험생 유튜버들의 노하우를 글쓰기에 접목해보겠다고 다짐하고서는 히오스하고 잠들었다.

2021년 7월 1일 목요일

오렌지 피플

나는 운전기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운전기사는 양복을 입은 중년으로 손목에 ○○○ 시계를 차고 있다. 머리는 한쪽으로 포마드를 발라 넘겼으며 얼굴 외곽이 넓으면서도 날카롭다. 운전기사는 나보다 나이가 많다. 나도 한쪽으로 머리에 포마드를 발라 넘겼으며, 마찬가지로 양복을 입고 있다. 내 손목에는 운전기사의 것보다 약간 상위 브랜드의 시계가 채워져 있다. 몇 년 전쯤부터 내가 좋아하는 테니스 선수가 경기 때 차고 나온 브랜드이다. 그 선수의 이름은 ○○○이다. 그 선수는 얼굴이 날렵해 보이는 선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딘가 나른해 보이는 분위기를 풍긴다. 그 선수가 지금 이 승합차의 뒷좌석에 나와 같이 앉아 있다. 그 선수 또한 양복을 입었으며, 우리와는 다른 쪽(왼->오)으로 머리에 포마드를 발라 넘겼다. 그 선수 또한 손목에 시계를 차고 있는데, 나보다 약간, 약간약간 더 상위의 브랜드이다. 나 또한 그 선수처럼 주위 사람들이 어딘가 나른해 보이는 분위기를 풍긴다고 한다. 나와 그 선수의 나이는 비슷한 정도이고, 난 자식이 없는 데 반해 그 선수는 자녀를 두고 있다. 다만 이 승합차의 조수석에 탄 어린 소년, 그레이스는 그 선수의 자식은 아니다. 건너서 알게 된 집안의 아들로, 그 선수가 운영하는 테니스 아카데미에 다니는 학생이다. 조금 놀랍게도 그 소년은 우리 중에서 가장 상위의 브랜드의 시계를 차고 있었으며 머리에는 완전히 포마드를 발라 올백으로 뒤로 넘겼으며 이 소년 또한 어딘가 나른해 보이는 분위기를 풍기는 것 같았고 마찬가지로 양복을 입고 있었으며 조수석의 창문을 열고 바람이 들어오는 그쪽을 보고 있었으므로 이쪽에서는 얼굴이 안 보였다. 그레이스, 네 얼굴을 이 분이 보고 싶으시다고 하는구나. 그러자 그레이스는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던 테니스 선수의 쪽을 쳐다보았고, 그 테니스 선수 또한 활짝 웃으며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광경을 운전석에 탄 운전기사가 백미러로 보고 있었으며, 내가 보았기로는 찡긋, 하고 잠깐 이쪽으로 눈짓을 했다. 나는 아직까지 그 테니스 선수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그레이스라는 소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고, 운전기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우리는 전날에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도 술을 마시면서 이야길 했다. 우리는 그레이스를 제외하고는(그레이스는 지나가는 옆 차에게 모욕적인 제스처를 하고 있었다. 그럼 안 되지! 그레이스.) 숙취에 절어 있는 상태였지만, 그러나 우리의 포마드는 반듯했다. 전날의 기억을 떠올려 보자면 먼저 운전기사가 테니스 선수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그러자 테니스 선수가 노래를 불렀다. 선창에 따라 나도 같이 노래를 불렀고 나도 운전기사와 어깨동무를 했다. 나는 운전기사에게 지금부터 내게 반말을 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운전기사는 나에게 모멸감을 느낀 듯했다. 그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당장 풀어! 당장 풀란 말이다! 무엇을 풀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옆에서 테니스 선수가 아앙! 하고 큰 소리를 냈다. 분명 나는 그 둘보다는 덜 취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잔에 술을 부었고, (그 전에 내가 빈 잔을 앞으로 내밀었지만 아무도 거기에 따라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걸 다시 입에다 부어 넣고 채웠다. 그랬더니 나도 술에 취하게 된 모양이었고, 그 이후로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이상한 건 내가 깨어났을 때 저 소년, 그레이스가 이쪽을 향해 우두커니 서 있었던 것이다. 집에 가야 하는데, 집에 가야 하는데! 술이 덜 깬 나는 그곳이 테니스 선수가 운영하는 아카데미인 줄도 몰랐다. 그래서 그 소년에게 자세한 사정을 물었는데 그 소년도 우리 쪽의 사정에 대해선 아는 게 없었다. 나는 집에 가야 하는 소년을 태워다 주기로 했고, 저쪽에 얹힌 짐처럼 놓여 있던 운전기사를 데려와 전날의 일이 기억나냐고 소리쳐 물었다. 그게 내가 처음에 얘기한 ‘운전기사와 했던 얘기’이고, 운전기사는 내 미심쩍은 기색을 느낀 것인지 약간의 긍정도 부정도 내보이지 않는 태연한 얼굴로(이때 운전기사는 자신의 일을 능숙하게 해낼 수 있을 정도로 술이 깬 상태였다) 나에게 양해를 구하는 고갯짓을 해 보였다. 그것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훌륭한 것이어서 나는 이번 한 번만은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그런데 그레이스는 한 손으로는 자신의 감정을 다 담을 수 없었던 것인지 이젠 두 손으로 옆 차를 향해 모욕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보니 아까 그레이스에게 모욕을 당했던 그 차였다. 젠장, 따라붙은 건가! 다들 젠장이라고 외쳐! “젠장!”(테니스 선수) “젠장!”(운전 기사) “엿이나 먹어라!”(그레이스) 그리고 이제 빨리 달려라! 저 차가 우릴 따라붙지 못하도록. 오, 그레이스! 빌어먹을 자식! 나는 급작스럽게 빨라진 자동차의 속도감을 느끼며 어딘가 나른해 보이는 얼굴로 이쪽을 따라붙는 차의 창문에 비치는 이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우릴 향해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오, 당연한 일이지! 지나가던 옆 차에게 엿을 먹었으니. 그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면 내가 가진 무언가를 내놓아야 할지도 몰라.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고 나는 내가 갖고 있는 물건들이 무엇이 있나 떠올려 보았다. 침대. 이건 안 되지, 들고 가기 어려우니까. 그러면 시계. 아니 이것도 아니지, 왜냐하면 이건 들고 가기가 너무 쉽잖아? 만일 그들이 자신이 화가 난 것을 위장하고 있는 거라면? 그들은 화가 나지 않았는데도 화난 척을 하는 거야. 지금 이 차에 따라붙는 것도 단순히 제스처일지도 몰라. 그도 그럴 것이, 젠장! 술이 안 깨서 머리 아프네! 그 순간 옆 좌석에 타고 있던 테니스 선수가 입을 열어 말했다. 모두 들리십니까? 혹시 이런 건 어떨까요? 우리 모두 같이 그레이스를 따라 하는 겁니다. 저 모욕적인 제스처를 10톤으로 만들어버리자는 겁니다. 가상으로 저 차를 때려 부숴버리죠! 하지만 모든 것은 가상 속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나는 서둘러 운전기사를 부축했다. 왜냐하면 그가 나보다 못 걷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순간 테니스 선수의 넓은 품이 세계처럼 나에게 보였고 힘을 잃은 나는 그 품으로 쓰러졌다. 우리는 아직도 술에 잔뜩 취한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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