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1일 목요일

오렌지 피플

나는 운전기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운전기사는 양복을 입은 중년으로 손목에 ○○○ 시계를 차고 있다. 머리는 한쪽으로 포마드를 발라 넘겼으며 얼굴 외곽이 넓으면서도 날카롭다. 운전기사는 나보다 나이가 많다. 나도 한쪽으로 머리에 포마드를 발라 넘겼으며, 마찬가지로 양복을 입고 있다. 내 손목에는 운전기사의 것보다 약간 상위 브랜드의 시계가 채워져 있다. 몇 년 전쯤부터 내가 좋아하는 테니스 선수가 경기 때 차고 나온 브랜드이다. 그 선수의 이름은 ○○○이다. 그 선수는 얼굴이 날렵해 보이는 선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딘가 나른해 보이는 분위기를 풍긴다. 그 선수가 지금 이 승합차의 뒷좌석에 나와 같이 앉아 있다. 그 선수 또한 양복을 입었으며, 우리와는 다른 쪽(왼->오)으로 머리에 포마드를 발라 넘겼다. 그 선수 또한 손목에 시계를 차고 있는데, 나보다 약간, 약간약간 더 상위의 브랜드이다. 나 또한 그 선수처럼 주위 사람들이 어딘가 나른해 보이는 분위기를 풍긴다고 한다. 나와 그 선수의 나이는 비슷한 정도이고, 난 자식이 없는 데 반해 그 선수는 자녀를 두고 있다. 다만 이 승합차의 조수석에 탄 어린 소년, 그레이스는 그 선수의 자식은 아니다. 건너서 알게 된 집안의 아들로, 그 선수가 운영하는 테니스 아카데미에 다니는 학생이다. 조금 놀랍게도 그 소년은 우리 중에서 가장 상위의 브랜드의 시계를 차고 있었으며 머리에는 완전히 포마드를 발라 올백으로 뒤로 넘겼으며 이 소년 또한 어딘가 나른해 보이는 분위기를 풍기는 것 같았고 마찬가지로 양복을 입고 있었으며 조수석의 창문을 열고 바람이 들어오는 그쪽을 보고 있었으므로 이쪽에서는 얼굴이 안 보였다. 그레이스, 네 얼굴을 이 분이 보고 싶으시다고 하는구나. 그러자 그레이스는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던 테니스 선수의 쪽을 쳐다보았고, 그 테니스 선수 또한 활짝 웃으며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광경을 운전석에 탄 운전기사가 백미러로 보고 있었으며, 내가 보았기로는 찡긋, 하고 잠깐 이쪽으로 눈짓을 했다. 나는 아직까지 그 테니스 선수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그레이스라는 소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고, 운전기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우리는 전날에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도 술을 마시면서 이야길 했다. 우리는 그레이스를 제외하고는(그레이스는 지나가는 옆 차에게 모욕적인 제스처를 하고 있었다. 그럼 안 되지! 그레이스.) 숙취에 절어 있는 상태였지만, 그러나 우리의 포마드는 반듯했다. 전날의 기억을 떠올려 보자면 먼저 운전기사가 테니스 선수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그러자 테니스 선수가 노래를 불렀다. 선창에 따라 나도 같이 노래를 불렀고 나도 운전기사와 어깨동무를 했다. 나는 운전기사에게 지금부터 내게 반말을 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운전기사는 나에게 모멸감을 느낀 듯했다. 그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당장 풀어! 당장 풀란 말이다! 무엇을 풀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옆에서 테니스 선수가 아앙! 하고 큰 소리를 냈다. 분명 나는 그 둘보다는 덜 취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잔에 술을 부었고, (그 전에 내가 빈 잔을 앞으로 내밀었지만 아무도 거기에 따라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걸 다시 입에다 부어 넣고 채웠다. 그랬더니 나도 술에 취하게 된 모양이었고, 그 이후로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이상한 건 내가 깨어났을 때 저 소년, 그레이스가 이쪽을 향해 우두커니 서 있었던 것이다. 집에 가야 하는데, 집에 가야 하는데! 술이 덜 깬 나는 그곳이 테니스 선수가 운영하는 아카데미인 줄도 몰랐다. 그래서 그 소년에게 자세한 사정을 물었는데 그 소년도 우리 쪽의 사정에 대해선 아는 게 없었다. 나는 집에 가야 하는 소년을 태워다 주기로 했고, 저쪽에 얹힌 짐처럼 놓여 있던 운전기사를 데려와 전날의 일이 기억나냐고 소리쳐 물었다. 그게 내가 처음에 얘기한 ‘운전기사와 했던 얘기’이고, 운전기사는 내 미심쩍은 기색을 느낀 것인지 약간의 긍정도 부정도 내보이지 않는 태연한 얼굴로(이때 운전기사는 자신의 일을 능숙하게 해낼 수 있을 정도로 술이 깬 상태였다) 나에게 양해를 구하는 고갯짓을 해 보였다. 그것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훌륭한 것이어서 나는 이번 한 번만은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그런데 그레이스는 한 손으로는 자신의 감정을 다 담을 수 없었던 것인지 이젠 두 손으로 옆 차를 향해 모욕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보니 아까 그레이스에게 모욕을 당했던 그 차였다. 젠장, 따라붙은 건가! 다들 젠장이라고 외쳐! “젠장!”(테니스 선수) “젠장!”(운전 기사) “엿이나 먹어라!”(그레이스) 그리고 이제 빨리 달려라! 저 차가 우릴 따라붙지 못하도록. 오, 그레이스! 빌어먹을 자식! 나는 급작스럽게 빨라진 자동차의 속도감을 느끼며 어딘가 나른해 보이는 얼굴로 이쪽을 따라붙는 차의 창문에 비치는 이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우릴 향해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오, 당연한 일이지! 지나가던 옆 차에게 엿을 먹었으니. 그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면 내가 가진 무언가를 내놓아야 할지도 몰라.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고 나는 내가 갖고 있는 물건들이 무엇이 있나 떠올려 보았다. 침대. 이건 안 되지, 들고 가기 어려우니까. 그러면 시계. 아니 이것도 아니지, 왜냐하면 이건 들고 가기가 너무 쉽잖아? 만일 그들이 자신이 화가 난 것을 위장하고 있는 거라면? 그들은 화가 나지 않았는데도 화난 척을 하는 거야. 지금 이 차에 따라붙는 것도 단순히 제스처일지도 몰라. 그도 그럴 것이, 젠장! 술이 안 깨서 머리 아프네! 그 순간 옆 좌석에 타고 있던 테니스 선수가 입을 열어 말했다. 모두 들리십니까? 혹시 이런 건 어떨까요? 우리 모두 같이 그레이스를 따라 하는 겁니다. 저 모욕적인 제스처를 10톤으로 만들어버리자는 겁니다. 가상으로 저 차를 때려 부숴버리죠! 하지만 모든 것은 가상 속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나는 서둘러 운전기사를 부축했다. 왜냐하면 그가 나보다 못 걷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순간 테니스 선수의 넓은 품이 세계처럼 나에게 보였고 힘을 잃은 나는 그 품으로 쓰러졌다. 우리는 아직도 술에 잔뜩 취한 채였다.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