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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19일 일요일

미완성


우주의 성들을 완주하려던 계획을 취소한다. 아무래도 주제를 잘못 잡은 것 같아. 그러나 주제가 어떤 것이었든 이쯤 되어서는 그만뒀을 것 같기도 하다. 중도하차 전문. 끈기 없음. 사주를 보러 갔을 때, 사주쟁이는 내가 어떤 일을 하든 3개월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싫지는 않았지만 왠지 괘씸한 마음이 들어(누구에게?) 당시 하던 일을 3개월하고도 2주일 더 버티고 그만두었다. 그러나 또 이제와 생각해보면 사주쟁이는 딱 잘라 ‘3개월이라 말한 것도 아니었다. 아마 3개월 정도, 3개월 근처, 3개월 내외, 아무튼 딱 3개월은 아니고 약간의 오차는 있을 수 있음, 을 의미하던 게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내가 졌다. 룰을 잘못 이해했고, 그렇지만 그쪽이 똑바로 알려준 것도 아니니 내가 완전히 진 것은 아니다. 이 정도로 말하고 물러나겠다.
 
라고 말하고 보니 우주의 성들을 연재한 지 아홉 달이 지났다는 사실. 몰아서 올렸다가 드문드문 올렸으나 열 세 편이니 적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이게 일인가? 대가는 없었다. 일이라고 하기 힘들다. 그러면 다시 물러나야 하나? 그럴 수 없다. 글쓰기는 물러날 수 없는 장르다. 전사해야 하는 장르. 혹여나 생환에 생환을 거듭하여 천수를 누린다면 김지하나 김승옥처럼 되어버리고 마는 장르. 비장하게 말해 봤다. 그런데 이게 글쓰기인가?
 
우주의 성들. 처음에는 우주 곳곳에 있는 행성들에 자연적으로 지어지거나 누군가에 의해 지어진 성()들에 대해 쓰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많은 상상 에너지를 요하는 일이었고, 정말 일처럼 느껴졌으므로 처음부터 관뒀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거의 아무도 안 볼 글을 쓴다는 게 정말로 자유로운 글쓰기인가? 더 제약이 많은 것은 아닌가?
 
내가 속았다는 것은 아니다. 누구도 가타부타 말해준 적 없으니까. 나 혼자 느꼈고, 나 혼자 그리 여겼고, 나 혼자 판단했다. 나 혼자 썼다. 나에게는 연대감이 없다. 나는 나에게도 연대감을 느끼지 못한다. 불행한 자라고 불러주세요. , ‘우주의 성들은 거의 누워서 썼다. 다음부터는 앉아서 써보도록 노력하겠다. 어깨가 많이 상했다. 뭔가를 선물로 받을 수 있다면, 나는 어깨를 받겠다.
 
그럼 여기까지. 보다 지엽적인 주제를 들고 다시 찾아오겠다. 그동안 죽지 말고 계시기를.

2018년 6월 3일 일요일

초신성

이런 질문으로 시작해본다. 왜 창작은 우울감과 같은 종이배를 타고 있을까?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이전에 과연 이러한 질문이 적합한 것인지 논증할 필요가 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으니 간단한 사례에서 출발해보자.
 
콘템퍼러리엠비언트공연미술극시를 쓰기로 마음먹은 P는 우선 거장들의 작품을 베끼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잘 진행되자 용기를 얻어 이름이 덜 알려진 사람들의 작품도 베끼기 시작했다. 어차피 동일 장르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창시자 P는 걱정 없이 창작 활동에 신나게 매진했다. 누가 뭐라고 할 때까지 말이다.
 
그러나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P의 작품은 계속해서 조회수가 0이었으므로
 
왜 나 자신의 조회수는 카운트되지 않는가? P는 그런 증오 섞인 생각을 하며, 가족의 아이디를 이용해 조회수를 십만까지 늘렸다. 그러나 여전히 P에게는 아무런 피드백이 없었다.
 
P는 과연 우울했다. 이렇게 살다가는 사례로 삶을 끝마치게 될 것이다. P가 자신의 작법을 바꾸었다면, 다른 미래가 펼쳐졌을 수도 있다. 혹은 제목을 더 잘 지었더라면. 인디자인에 약간의 조예가 있어 어떻게든 클릭을 유도할 수만 있었다면. 그렇지만 P는 곤조 있는 예술가였다. 그는 우회로를 택하지 않았고, 우직하게 자신의 장르를 밀어붙였다. 그러자 누가 뭐라고 했다. P에게, 누가 뭐라뭐라 뭐라고 했고 뭐라고 한 사람은 자신이 한 말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것이 P가 창시자 P로 남게 되는 콘템퍼러리엠비언트공연미술극시사의 서막이었다.
 
우울감은 장르의 탄생을 수반한다. 그러나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우울의 장르가 예술의 장르를 결정한다고. 물론 이렇게 말하면 기분이 안 좋다. 우울감은 당하는 것이지 먼저 다가설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우울에게는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한다. 앞서 언급한 P의 어마어마한 예술활동에서 P가 기여한 바는 미미하다. 그는 우울감에게 겨우 몸을 빌려줬을 뿐이다.
 
이것이 예술가들의 말로가 비참한 이유다. 처음에 산뜻했던 우울감은 이용할수록 괴물같이 커져 우울증으로 진화한다. 그렇기에 겁이 많은 나는 이제 이 사실을 말해야겠다. 이것은 창작이 아니며 예술과는 무관한 중얼거림이다.

2018년 2월 4일 일요일

육망성

이리 들어와, 말하고 너는 선을 폴짝 뛰어 넘었다. 두 발이 동시에 넘어와야 해. 그러나 선을 넘은 너의 표정은 우리가 손을 잡고 있을 때와 달라 보였다. 어서. 너의 얼굴 속 모든 도형이 갈라지고 있다. 환희와 광기가 서로를 침범하며 번지고 있는 것일까? 이윽고 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네가 별장, 이라 부른 곳으로 너는 가버린 듯했다.
 
그러면 나는 너에 대한 생각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 네가 없는 자리에서 나는 너에 대한 생각을 시도한다. 우리는 꼭 붙어 다녔으므로, 이 시도는 나에게 낯설다. 그러나 언젠가 꼭 해야 할 작업이었다. 나는 너에 대한 생각을 재시도한다. 그것은 몇 가지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너의 모습이 브로마이드처럼 펼쳐진다. 나는 생각의 크기를 좁히려 노력한다. 나는 너를 클로즈업한다. 너의 눈주름과 입가를 본다. 재생시켜 보기도 한다. 그것들은 미세하게 움직이고 미세하게 깊어지다가 한순간에 탄성을 잃는다. 일순 다른 곳으로 가버린 것일까? 그런 것까지는 나의 생각만으로 알 수 없다. 네가 필요해. 우리는 언제 만났지? 언제 서로를 알아봤지? 그런데 왜?
 
선 안쪽으로 발 하나를 넣는다. 그러자 선 안의 나와 선 밖의 내가 있다. 저쪽의 나는 이쪽의 나를 끌어당기고 있다. 나는 두 번째 발을 넣고 세 번째 발을 넣는다. 네 번째 발을 넣는다. 이쪽의 발은 아무리 넣어도 하나가 남는다. 이것은 너에 대한 생각이 결론에 이르는 것을 명백히 방해한다. 발은 계속해서 하나씩 넘어가고 나는잠식당하고 있었다. 네가 예상했던 바대로.
 
너는 내가 좋은 재료가 될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것을 성스러운 사랑의 비유로 이해했다. 그럴 리 없잖아. 저쪽에 떠 있는 나의 입이 말한다. 두 번째 입이 말하고 세 번째 입이 말한다. 그럴 리 없잖아. 그럴 리 없다고 나는 생각하고야 만다. 입들이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말씀하고 있다. 가장 선명한 기억 속에서 너는 별의 커비를 노래하고 있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지? 그러나 나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 흔들리면서 너의 잔영을 더듬고 있다. 어딘가의 네가 지켜보고 있다는 확신과 함께 그랬다.

2018년 1월 28일 일요일

신성 2

신은 자신에 대한 저주를 양분으로 권능을 키워간다. 그러나 자신을 지속적으로 증오하게끔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초기의 신은 성질이 급해 무지막지한 자연재해를 일으켰다. 그 결과, 모든 생물체는 사라졌다. 죽어 있는 것은 어떠한 감정도 품을 수 없었으므로 신의 권능은 일거에 사라졌다. 자기 몸 하나 지킬 정도의 초라한 권능만 남았다. 그로부터 오랫동안 빙하기였다.
 
신은 아주 작은 것부터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단세포동물을 만들고 그것을 어렵사리 조합하기도 했다. 도대체 그 시간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그러나 신은 견뎠다. 공허의 상태란 신에게 있어 일상과 같은 것이었으므로, 신은 한 땀씩 정성스레 아메바를 빚었다. 아무 생각도 할 줄 모르는 그들을. 생각을 불어넣는 것은 신의 권능 바깥의 일이었고 신다운 일이 아니었다. 신은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지, 게임을 만들려는 게 아니었다.
 
신은 자신을 향한 찬양의 말이 부담스러웠다.
자신을 숭배하는 행위가 역겨웠다.
 
그것을 겨우 견뎌내면서
 
신이 오랫동안 공들여 빚은 것은 아주 작은 형태의, 거의 최소한의 형태의 불행이었다. 그것은 질병이기도 하고 시기심이기도 했다. 신은 모든 피조물을 동등하게 대하지 않았다. 유토피아란 오로지 피조물만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신은 몇몇 인간을 랜덤으로 택해 자신의 환영을 아주 약간 보여주었다. 그것이 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신은 이 게임을 진심으로 플레이하고 있다. 신은 아름다운 게임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지지 않는 게임, 어떻게든 승리하는 게임을 신은 원한다. 그러니까 신에게 저주를 퍼붓는 자들이여, 세계의 모습은 신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당신이 하느님 개새끼라고 외칠수록 이 세계는 경이롭게 풍요로워질 것이다.

2018년 1월 24일 수요일

신성 1

오 하느님, 이 자리에서 죽여주세요 우리들을
- _, 유월
 

공의회장을 빠져나온 미카엘라 대주교는 참았던 욕지거리를 쏟아냈다. 그는 오늘 명문화된 것들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불경해서?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불경함으로 치면 그가 지금 내뱉고 있는 욕지거리를 능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미카엘라 대주교는 잠시 욕을 삼키고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한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았다. 초임 사제처럼 말이다.
 
미카엘라 대주교는 더없이 불안했다.
 
그는 합의된 신이, 자신이 생각하는 신과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옳은 신은 언제나 합의된 신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 신은 내 신이 아닌 것 같지?
 
그 신, 이라고 조심스레 발음해본 미카엘라 대주교는 황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수사의 눈치를 살폈다. 수사의 표정에는 변동이 없었지만 그 부동을 믿을 수 없었다. 누구보다 내 말을 경청해온 자가 아니었는가?
 
그리고 얼마나 걸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은 부두에 도착했다. 배는 아직이었다. 보행 중 침묵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다다랐으니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터
 
미카엘라 대주교가 대주교답게 먼저 입을 열었다. 신은 몇 분이 적당한가?
 
이에 대해서는 오늘의 공의회에서 합의된 바가 없었으므로, 수사는 혼돈에 접어들었다. 수사는 대주교가 염두에 둔 대답이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는 정답 대신 묘안을 떠올렸다. 대주교께선 몇 분이 적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대주교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질문을 이어갔다.
그분들은 생식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
그분들은 직접 만들지 않고 왜 우리로 하여금 그 일을 수행케 하시는가?
 
수사는 마흔 둘의 신 중 하나였다. 둘이었다. 다섯이었다. 수사들은 지금 이 자리에서 미카엘라 대주교를 소멸시킬지, 아니면 단순하게 부두 바깥으로 밀어버릴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것이야말로 신다운 고민이었고 단 한 순간의 일이었다.

2018년 1월 21일 일요일

하비성 2

지금쯤 적진은 불바다가 됐을 것이다. 불길은 남서풍을 타고 무심하게 번져갔을 것이다. 갑옷을 입고 잠든 용맹한 자들은 불붙은 갑옷을 벗으려 애쓰다 숨이 끊어졌을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하며 나는 성루에 느긋하게 기대어 있다. 환한 밤이다.
 
동료들은 잠들었다. 길고 긴 포위였으니까, 이제는 편히 자도 되니까. 나 역시 무언가 더 할 일이 있어서 깨어 있는 것은 아니다. 먼 불길을 보니 첫 전장 생각도 나고 그때 했던 다짐 같은 것도 떠올라서. 지키지 못했지만 말이지. 아무튼 이제 끝이다. 내일부터는 밀린 잠을 실컷 잘 것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지?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줄지어 무너지는 소리가, 콸콸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들려온다. 기댄 기둥에서 강렬한 진동이 느껴진다. 나는 뒤를 돌아 성내를 보았으나 그곳은 여전히 어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연이은 비명이 성 밖이 아니라 성 안에서 들려온다. 동료들을 깨워야 하냐? 그러한 고민을 잠깐 하다가 여어- 하는 소리에 저 아래를 보았다. 성문 앞에 말을 탄 누군가가 있다. 횃불을 높게 치켜들고 성문 앞을 빙글빙글 돌고 있다. 붉은 투구와 붉은 갑옷, 적이다.
 
나는 서둘러 활을 집어 붉은 투구를 겨누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싸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가리키며 뭐라뭐라 지껄였는데 억양이 옅어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빨리 안 쏘고 뭐해!
 
어느새 깨어난 동료 하나가 나를 다그치고는 성문 보초 교대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서야 시위를 당겼지만 화살은 너무 멀리 날아갔다. 다음 화살도, 그 다음 화살도. 나는 황망히 활을 내려놓았다. 아까보다 한층 붉어진 투구가 말에서 내렸는데 그의 다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성문을 향해 휘적휘적 다가오고 있었다, 분명히 그랬다. 지독한 슬픔에 잠긴 사람처럼.

2018년 1월 17일 수요일

하비성 1

지금쯤 성 안은 물바다가 됐을 것이다. 어디까지 차올랐을까, 무릎? 허리? 아니면 그 이상?
 
음평의 둑을 무너뜨린다는 발상은 더없이 악마적인 것이었다. 그 거대한 둑을 부수는 작업 자체의 지난함은 둘째치더라도, 그것이 방류되었을 때 얼마나 많은 것을 휩쓸며 지나갈지는 직접 해보지 않아도 쉽게 떠올릴 수 있었으니까.
 
나라 하나 크기의 댐.
 
용맹한 지원자들이 둑을 부수겠다고 나섰다. 부순 직후 본인이 가장 먼저 수장될 것을 알면서도. 몇 번이나 말해도 그들의 뜻에는 변함이 없었다. 존중한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부터 이런 승리를 바랐던 것일까? 하는 질문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소대장이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소임이 있었다. 우리가 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따라야만 했다. 그런데 왜 따라야 하지? 와 같은 질문 역시 던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의문이라면 집에 돌아가 몰래 품으라고 못이 박히게 들었다. 이 역시 상관이 한 말이었지만 그대로 하니 마음만은 가라앉았다.
 
그래 마음만 가라앉으면 된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최신식 병장기가 동원되었다. 나는 무리를 이끌고 음평의 언덕으로 갔다. 사흘째 밤, 작전은 성공했다.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수마에 물들어가는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분명 무더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명백한 방향을 두르고 흘러가고 있었다. 남서쪽의 성, 하비로.
 
방류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릴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서둘러 말에 올라타고는 나 역시 홀린 듯 하비성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2018년 1월 14일 일요일

얼음성

위수까지 진군해 있을 때의 일이다. 우리에게는 거점이 필요했다. 이곳 지리에 밝은 적의 기병대가 계속 야습을 해오는 바람에 군의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식량고 또한 번번이 불타 우리는 탄 보리를 물에 불려 우물우물 씹어야만 했다. 밤새 쌓인 눈을 적으로 오인해 많은 화살이 낭비되기도 했다. 역시나 가장 큰 문제는 추위였다. 우리 군의 대다수가 남쪽 지방에서 차출된 병사들이었기 때문에 적에 앞서 추위와 먼저 싸워야 했다. 하지만 참모들과 함께 머리를 쥐어짜도 별다른 수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퇴각 외에는.

자신을 몽매거사 누규라 밝힌 자가 막사를 찾아온 것은 해가 저물 무렵의 일이다. 그는 거두절미하고 자신이 온 목적을 밝혔다. 우리를 승리의 길로 인도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단 하룻밤이 필요하다고 했다. 자세히 캐묻지는 않았다. 그에게 병사 오백을 주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다.

다음날, 누규는 자신의 일이 다 끝났다고 말하고 사라졌다. 과연 그곳에는 얼음성이 있었다. 성은 견고했으며 방풍 또한 기가 막혔다. 칠만의 병사가 전부 들어갈 수도 있었다. 그 후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봄이 오기 전에 전쟁은 끝났다. 나는 말 위에서 남쪽 지방의 화사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수도까지는 이제 지척이었다. 모든 것이 원하던 바대로 되었구나, 안도하면서.

그런데 병사 오백은 어디로 갔을까?

라는 생각과 함께 나는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부관이 왜 그러시느냐 물었고 나는 3중대의 행방을 물었다. 부관 역시 이내 황망한 표정이 되었다. 잠시 휴식을 명하고 대열을 정비해 보아도 3중대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보았다는 자도 없었다.

개선 행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나는 얼른 집으로 돌아가 몇 가지 실험을 했다. 모래와 흙과 진흙을 각각 한 뼘 높이로 쌓고 액화질소를 부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약간의 충격에도 부서져버렸다. 돌멩이와 돌, 바위로 실험해보아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위수의 혹독한 땅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이제와 그런 생각이 든다. 왜 얼음 안을 보지 못했을까? 너무 꽝꽝 얼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미 승리에 도취되어 있어서? 알 수 없는 일이다. 전쟁터에서는 어떠한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으니까.

2018년 1월 10일 수요일

양양성

이곳의 명물은 해자다. 멀리서 보면 호수 가운데 놓인 작은 섬으로 오인할 만큼 해자가 방대하다. 또 해자는 깊은 데다가 여기저기에 식인 인어까지 살고 있어서 당신은 결코 그곳을 헤엄쳐갈 수 없다.
 
양양성은 천연의 요새다.
 
성과 연결된 길은 하나인데,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없을 만큼 폭이 좁다. 당연하게도 마차라든지 지프차라든지 그 외 네발바퀴가 다닐 수 없다. 성내에는 바이크 숍이 곳곳에 있다. 단일 품종이다.
 
양양성으로 물자를 운송하려면 목우유마에 실어야 한다. 통관 절차 또한 복잡하다. 양양성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믿지 않는다. 믿지 않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또 이러한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양양성은 한 차례도 함락된 적이 없기에 이와 같이 드높은 긍지는 타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재수 없어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그곳에 잠입한 적이 있다, 그것도 한낮에
 
물론 나 하나 잠입했다고 해서 양양성의 판세에 변화가 있었을 리는 없다. 나는 단지 그들이 상처받기를 원했다. 그들이 자랑하는 해자에 미세한 염증이라도 생기기를 바랐다. 식인 인어들마저 슬픔에 겨워 식음을 전폐하기를 기대했다.
 
내통자가 있었나?
 
양양성에서 태어나서 양양성에서 평생을 살다가 양양성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면, 글쎄. 내통자가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그쪽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식인 인어라고 해서 피아를 식별하지는 않을 테니까.

2018년 1월 7일 일요일

진정성

진정성.
 
진정성을 어필하고 싶다면 딱 이거만 쓰면 된다.
 
진정성.
 
여기서 다른 말을 덧붙이면 걷잡을 수 없어진다. 물론 덧붙일 말을 참는 일은 꽤나 고될 것이다. 연습이 필요하다. 키아누 리브스처럼 딱 한 마디 내뱉고 등 돌리기. 등 돌린 후에는 어떤 표정을 지어도 상관없다. 걸음걸이만 신경 쓰면 된다. 아주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저벅저벅 걷는 것이 최상이다. 머릿속을 메트로놈으로 채우면 된다. 쿨하게 걸을수록 좋다. 쿨함으로 진정성이 발현된다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지만, 실로 그러하다.
 
나는 지금 진정성을 어필하는 방법을 얘기하는 것이지 나의 진정성을 드러내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수다에서 나의 진정성이 느껴진다면, 뭐 그런대로 만족한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꼭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런 식으로 한참을 쿨하게 걸었고 이제는 허기가 진다. 진정성을 찾아 헤맸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떤 광산에 막 도착했다. 이 광산은 들어가는 문과 나가는 문이 같다. 그밖의 부분은 진정성으로 가득하다. 광산에서 숨을 조금밖에 쉬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체질적으로 진정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 물론 사람에 따른 격차가 있을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진정성 가득한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는 광부가 되어 진정성을 잔뜩 캐야 하니까캐낸 진정성은 온갖 것의 재료로 쓰인다. 광산의 재료 또한 진정성이다. 어쩌면 우리의 몸도. 내 진정성이 엄연히 있는데 타인의 진정성을 받아들이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러니저러니 해도 딱 한번
 
진정성.
 
잘 어필될 거라고는 하지 않았다.

2018년 1월 3일 수요일

희성

후인정을 기억하는가? 기억 못 해도 할 수 없다. 이제부터 기억하게 될 테니까. 그럼 시작하겠다. 후인정은 현대 모터스 소속의 농구선수로, 1990년대 농구 열풍을 일으킨 장본인은 아니고 조연의 조연쯤 되는 인물이다. 슬램덩크 성우로 깜짝 출연하기도 했다. 전문 성우가 아니었으므로 대사는 감탄사 하나였다.
 
... 크흑
 
그래, 이거였다. 어떤 캐릭터였는지, 어느 농구부 소속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이 크... 크흑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고저가 불명확한 음성이었고 왠지 불안에 찬 음색이었으며 막 가래를 뱉고 나서 내뱉은 탄식 같았다. 자연스럽지 않았단 말은 아니다. 몹시 자연스러웠다. 더빙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사람이 들었더라면 이 크... 크흑을 특색 있게 기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애석한 일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드는 의아함은 다음과 같다. ... 크흑은한국어인가?
 
한글 자판으로 쓰기는 했지만 한글 자판으로 썼다고 해서 그게 한국어인가? 그럼 스페이스 바는 뭐지?
엔터는? 물음표는?
 
이와 같은 생각을 이어나갔다. 후인정의 트레이드마크는 양손드리블이었다. 그에게는 왼손과 오른손의 차이가 없었다(나 역시 양손으로 타이핑하고 있다). 그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했다. 나는 그것이 서운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이해한다. 그의 이른 은퇴도 그를 완전히 잊게 만들지는 못했다. 은퇴 후에는 배구 선수가 되었다가 다시 마술사가 되었다. 아직 자격증을 따지는 못했다고 들었다.
 
후인정은 지금 노인정에 있다. 그의 전성기는 바로 지금이다.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