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21일 일요일

하비성 2

지금쯤 적진은 불바다가 됐을 것이다. 불길은 남서풍을 타고 무심하게 번져갔을 것이다. 갑옷을 입고 잠든 용맹한 자들은 불붙은 갑옷을 벗으려 애쓰다 숨이 끊어졌을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하며 나는 성루에 느긋하게 기대어 있다. 환한 밤이다.
 
동료들은 잠들었다. 길고 긴 포위였으니까, 이제는 편히 자도 되니까. 나 역시 무언가 더 할 일이 있어서 깨어 있는 것은 아니다. 먼 불길을 보니 첫 전장 생각도 나고 그때 했던 다짐 같은 것도 떠올라서. 지키지 못했지만 말이지. 아무튼 이제 끝이다. 내일부터는 밀린 잠을 실컷 잘 것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지?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줄지어 무너지는 소리가, 콸콸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들려온다. 기댄 기둥에서 강렬한 진동이 느껴진다. 나는 뒤를 돌아 성내를 보았으나 그곳은 여전히 어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연이은 비명이 성 밖이 아니라 성 안에서 들려온다. 동료들을 깨워야 하냐? 그러한 고민을 잠깐 하다가 여어- 하는 소리에 저 아래를 보았다. 성문 앞에 말을 탄 누군가가 있다. 횃불을 높게 치켜들고 성문 앞을 빙글빙글 돌고 있다. 붉은 투구와 붉은 갑옷, 적이다.
 
나는 서둘러 활을 집어 붉은 투구를 겨누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싸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가리키며 뭐라뭐라 지껄였는데 억양이 옅어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빨리 안 쏘고 뭐해!
 
어느새 깨어난 동료 하나가 나를 다그치고는 성문 보초 교대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서야 시위를 당겼지만 화살은 너무 멀리 날아갔다. 다음 화살도, 그 다음 화살도. 나는 황망히 활을 내려놓았다. 아까보다 한층 붉어진 투구가 말에서 내렸는데 그의 다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성문을 향해 휘적휘적 다가오고 있었다, 분명히 그랬다. 지독한 슬픔에 잠긴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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