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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15일 수요일

내세의 벌레

그건 괜찮아. 통후추야. 그렇지만 꼭 먹진 않아도 돼.

조수는 그릇의 특정한 지점을 연거푸 찌르기만 했다. 숟가락을 뜰 생각이 영 없는 듯해 조수의 눈길이 머무는 데가 어디인지 보았더니 작고 검고 동그랗고 단단한 알맹이가 있었다. 알맹이는 조수의 숟가락 놀림을 따라 맑고 되직한 국물 속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꼭 살아있는 것 같지. 우무질에 감싸인 양서류의 난황 같지. 그래서 나는 조수를 타박할 수 없었다. 그런 것을 떠올리면 먹을 수 없게 되지.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조수가 나를 빤히 보았다. 오늘의 조수는 열두 살.

조수는 내 꿈에서 나온 사람이다. 자주 있는 일이 아니기는 하지만 내가 다른 꿈을 꾸면 조수도 다른 사람이 된다. 다른 사람이 아닌가? 모양이 다를 뿐 본질은 같은 사람이라고 여겨야 하나? 때로 조수는 젊은 여자고 또 어떨 때에는 우울한 노인이며 오늘처럼 소년의 모습일 때도 있다. 어떤 모양일 때에나 조수는 자기가 조수라는 것을 안다.

만약에 이게 벌레 알이면 어떡해요?

극도로 불만스러운 한편 몹시 걱정스러운, 말하자면 과연 소년다운 표정으로 조수가 말했다. 역시 알이라고 생각하는군. 내가 떠올린 알과는 다르지만 아무튼 알이군…… 먹기에는 그쪽이 더 끔찍할지도? 나는 조수 앞에 놓인 그릇을 내 쪽으로 조금 당겼다. 밖은 춥고 너는 어려서 따뜻한 것을 내놓았는데 너는 내가 네 수프에 일부러 벌레를 넣었다고 믿는구나. 하지만 여전히 조수를 탓할 수 없었다. 식사에 불순물이 혼입되는 상황에 대한 신경증은 내게도 있다. 또한 조수에게 전염병으로서의 환생에 대해 이야기해준 것은 나다.

잘 알려져 있듯 어떤 생명체는 다시 태어난다…… 그러기를 선택하는 개체가 있고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환생하거나 환생하지 못하는 개체가 있다. 짐작 가능하다시피 의식의 동일성과 연속성이 보장되지 않는 환생은 큰 의미가 없으며 대부분의 환생 현상이 그러하다.

환생을 주관하는 어떤 사후 기관(인터뷰를 시도해볼 엄두도 나지 않는 은밀한 조직이다)의 기조와 의지에 따라 환생은 지난 생에서의 윤리적 부채를 상환하는 제도로 정의된다. 이에 개인적으로 환생을 연구하는 이들이나 종교적으로 해석된 현상으로서의 환생을 신봉하는 이들은 새로 얻은 삶에서 덕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지만, 환생 개체의 상환 점수가 발생하는 거의 유일한 행위는 사망뿐이다. 대부분의 환생이 비인간 동물, 그중에서도 극소형 무척추 동물군 방향으로 나아가는 까닭을 이 맥락에서 설명 가능하다. 쉽게 죽고 여러 번 죽고 효율적으로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앞 문장에서 사망을 의미하는 문장을 상환으로 바꾸어 읽어 보라.)

문제는 어떤 생명체가 환생 과정에 있는 다른 생명체와 밀접 접촉을 일으킬 경우 의지와 무관하게 환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전염병으로서의 환생은 바로 이 현상을 가리킨다. 지금까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상해를 입혀온, 심지어 섭취해버린 날벌레들이 당신의 환생을 촉발할 수 있다. 물론 모든 흡연자가 폐암으로 사망하지는 않듯 수천, 수만 마리의 벌레를 먹고도 환생하지 않는 경우가 있지만, 비흡연자보다 흡연자의 폐암 발병 위험성이 높듯 벌레를 적게 먹은 사람보다는 벌레를 많이 먹은 사람의 환생 가능성이 훨씬 크다.

하지만 너에게도 환생이 있으리라고는 짐작하기 어렵구나.

나는 난생 처음 보는 얼굴로 내 조수를 자칭하는 소년을 보며 생각했다. 더구나 벌레 알 하나 정도로 양팔 저울이 크게 기울지는 않을 텐데. 이런 생각은 박물학자답지 않다고 느끼면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조수는 수프 그릇을 한동안 쳐다보다가 숟가락을 담갔다. 내가 말리기도 전에 작고 검고 동그랗고 단단한 알맹이를 건져 입에 넣었다. 멀리 놓인 그릇에서 급하게 떠낸 한 숟갈이었기 때문에 탁자에 수프가 뚝뚝 떨어졌다.

선생님 말씀이 맞았어요. 그냥 후추였네요.

조수는 온몸을 들썩거리며 재채기를 두 번 했다.

2023년 5월 12일 금요일

거여와 취문

하나의 존재가 하나를 초과하는 개수의 자아를 소유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어 자극적인 이야기의 소재로 채택되곤 한다. 일명 다중인격이라 불리는 이 현상은 ―이렇듯 나는 이것을 질환의 일종이라기보다 현상으로서 취급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의료 용어로 해리성 정체감 장애(Dissociative Identify Disorder)라 한다. 개칭에 어떠한 계기가 있는지는 미처 조사해보지 못했으나 (시기상으로는 1990년대라고 한다) 영문 및 한자어 표현에서 인간성(人格, personality)을 의미하는 표현이 빠진 것은 환영할 만한 일로 본다. 오직 인간만이 자아정체감을 가지고 있다는 근대적이고 집단적인 오만으로부터 한 보 벗어나 여전한 미지의 영역에 우리가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소개하려는 사례는 그러나, 이 현상의 예외적 존재일 수 있다…… 정신적으로 독립되어 있으나 동일하고도 중첩된 위상을 지닌 두 존재는 (내가 제대로 들은 거라면) 각각의 이름을 거여와 취문으로 소개했다. 


나: 녹음기를 사용해도 괜찮을까요? 

거여: 괜찮습니다.

취문: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셋 중에 둘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 두 분의 사례가 어떤 점에서 해리성 정체감 장애와는 다르다고 생각하시죠?

취문: 저는 바깥쪽에 있죠.

거여: 제가 안쪽.

취문: 둘이 합창도 할 수 있어요.

거여: 그러지 않을 거지만. 

나: 두 분의 성격이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아요. 

거여: 그런가요.

취문: 그렇겠죠.

거여: 아무래도 오래됐으니까.

취문: 서로 참을 만해야죠.

나: 두 분의 통합적인 존재라고 할까요…… 대표적인, 혹은 대외적인 명의 같은 것이 있을까요?

거여: 그게 없어요.

취문: 우리 둘 다 필요 없어서. 

나: 필요 없다는 것은?

거여: 우리는 자기가 둘 중에 본체라거나

취문: 내 쪽이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 그게 대표 자아의 필요성과 무슨 상관이 있죠?

취문: 대표시키려면 권위를 줘야 하니까.

거여: 권위의 낙차가 발생한다는 거죠.

나: 당장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렵지만 두 분이 오래 상의한 결과가 그거라면…… 다른 질문, 조금 무례한 질문도 괜찮을까요?

취문: 하세요.

나: 말하자면 가죽을 맡은 내가 더 중요한 쪽이라든지, 내장에 깃든 내가 더 비중이 있다든지……

취문: 아까랑 똑같은 질문 같은데?

거여: 질문은 다르지. 답이 같겠지.

취문: 굳이 따지고 보면 제 쪽이 좀 더 하찮지 않을까.

나: 가죽이라서? 

취문: 그렇기도 하고.

거여: 먼저 생긴 쪽은 저라서겠죠.

취문: 저희는 몸이 붙어서 태어난 쌍둥이에 가까워요. 

거여: 바깥에서 보기에는 하나겠지만.

취문: 동시에 발생한 게 아니라서 쌍둥이 비유도 애매하지만.

나: 계속 무례한 질문을 할 수밖에 없음에 양해를 구합니다. 두 분이 느끼는…… 글쎄요…… 존재의 중첩? 이 현상에 있는 장점이나 단점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거여: 장점이 있나?

취문: 아, 나는 단점이 있나? 했는데.

거여: 단점은 없다.

취문: 없어요.

나: 장점은?

거여: 더는 혼자 있지 않아도 된다.

취문: 아, 그렇다면 단점도.

거여: 더는 혼자 있을 수 없다. 

취문: 다시는.

거여: 영원히.

나: 또 다른 자아가 생길 가능성도 있을까요?

거여: 어쩌면?

취문: 어쩌면.

거여: 혼자서 거의 영원을 보냈다고 생각했을 때 다른 게 생겼으니까.

취문: 글쎄 어쨌든 우리가 짝짓기를 해서 만들 수는 없고.

거여: 그거랑은 다르지.

나: 번식에 대해서 이야기하신 게 재미있어요. 둘 이상의 존재가 할 수 있는 것, 예를 들어, 말씀하신 번식이라든지, 또 단순한 방향으로 싸움이라든지, 음, 자리 바꾸기라든지…… 시도해보신 적, 경험하신 적이 있을까요?

취문: 이제 녹음기는 꺼 주셨으면 좋겠어요. 


대화는 이후로 조금 더 이어졌다. 어느 쪽이 어떻게 답변했는지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위상이 중첩된 두 존재는 내가 예로 든 상호작용 가운데 다수를 시도해보았다고 했다. 두 존재가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 묻자 한쪽은 다른 하나가 자살하는 것, 다른 한쪽은 추가 자아가 또다시 발생하는 것을 꼽았다.

2022년 5월 6일 금요일

신의 형상

아직까지는 신을 만나볼 수 없었다. 편지, 안부 인사, 인터뷰 요청, 선물, 윽박지르기, 애원하기, 젠장 그에게는 관심이 전혀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내가 지금까지 취해온 행동의 가짓수만 열거해보아도 자명해지지 않는가 이 열렬한 관심, 최후의 수단이라 생각한 ‘한동안 무심을 가장하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연락하기’까지 포함해 나의 모든 제안과 요청이 거절당했고, 조금은 비참한 심정마저도 들려 하므로 유형별 시도의 횟수는 첨언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언제인가부터는 나도 헤아리지 않고 있다.

그가 그러는 이유도 <논리>적으로는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A가 B를 만나는 것이 A에게 아무 이득도 되지 못하는데 어째서 A가 굳이 B를 만나야 하는가, 신과 박물학자(인 나라는 일인칭)의 입장을 익명의 존재들로 치환하면 이를 수 있는 가까운 결론이다. (여기에서 이득이란 누군가를 만나고 소통함으로 얻는 최소한의 심리적 만족감까지를 포함한다.)

하지만 그는 이잖아? 즉 그의 소유들을 사랑할 의무가 있잖아? 사랑한다는 것은 응답한다는 거잖아? / 하지만 나는 박물학자잖아? 즉 존재한다 여겨지는 모든 것을 탐구하기로 했잖아? 모든 것이란 모든 것이잖아?

독자들에게는 실례가 되겠지만 이와 관련해서는 선행 연구들에 대한 재탐색 외에는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없었다. 그의 오랜 무응답을 그의 부재(애초부터의)로 해석하지 않기로 전제할 때…… 내가 그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그에게 장애가 있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문화권에 따라 신의 장애를 상상한(혹은 증언한) 사례도 이미 있다. 독자들도 잘 아는 사례를 꼽자면 눈을 가린/때로 눈이 먼 정의의 여신이 대표적이다.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은 정말로 앞을 보지 못할까? 신인데? 애초에 그에게 가릴 눈과 저울 들 팔이 필요했을까? 그가 취한 자세는 인간들이 알기 쉽게 보여주는 퍼포먼스에 가깝지 않을까?

신은 인간의 방식으로 보지 않는다. 따라서 눈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보고 있다. 신에게는 다리가 없다. 걷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그는 어디에나 누구보다도 빨리 갈 수 있다. 그에게 음성 언어가 필요치 않기 때문에 입과 귀의 기능도 장담할 수 없다. 그와 소통한 이들이 <들었다>고 믿는 것이 실제로 그의 목울대를 거쳐 발성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의사를 전달하는 그만의 독특한 방식이 있을 것이다.

목격담 또는 그림을 통해 우리가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되는 그의 형상에 이목구비와 수족은 늘 빠짐없이 있다. 아름답게 있다. 필요도 없는데 있다. 나는 그것을 그의 취미로 여기고 싶다. 인간이 TPO에 맞게 때로 기능보다 장식에 치중한 옷을 고르듯…… 그도 드물게 인간을 만날 때는 육신을 입을 것이다. 그의 옷장에 한계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아브라함계 종교에서는 우리가 그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주장을 한다. 그렇다면 그의 형상은 현재 기준으로 최소 70억 가지가 존재한다. 흑인이고 백인이며 황인이기도 한 그는 때때로 여성, 가끔은 남성이며 어린아이이기도 하지만 노인이기도 한데 대부분의 경우 신체적 결함이 있다. 유일신 신앙의 특징은 그 하나뿐인 신에게 모든 권능이 집중되는 것이고, 함정은 완벽한 신의 형상이 한 가지라 믿는 것이다. 전지전능한 신이 왜 전변하지는 못하겠는가. 그의 모습이 겨우 70억 가지에 불과하겠는가. 한편 장자 우대의 관습을 지닌 유목 문화에서 발생한 아브라함계 종교에 기반하여, 완벽한 인간의 형상을 뚜렷한 장애가 없는 남성으로 설정하는 것에는 모순이 없는 듯하지만, 그 형상의 피부색이 흴수록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비웃음 없이는 마저 쓸 수 없으므로 생략하겠다.

역사상 가장 신에 가까웠다고 기록된 이가 자기 입으로―인간의 입으로― 말했다. “너희 중 가장 낮은 이가 바로 나다.” 후대의 화가들은 대체로 그를 미형의 백인 남성으로 묘사했다. 그려진 그에게는 장애가 없다. 보통의 인간과 다른 점이라곤 후광뿐이다. 그것을 장애의 일종이라 말해도 좋을까? 남들에게는 없는 것이기에. 앞서 나는 우리가 취한 신의 형상(아브라함계 종교적 전제 안에서) 대부분에 결함이 있다고 말했다. 어떤 결함은 장애로, 어떤 결함은 장애로 분류되지 않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것을 장애라고 봐도 좋을까? 어둠 속에 몸을 숨길 수 없게 만드는, 즉 일상생활에 방해가 되었을 그 머리 뒤 빛의 다발 혹은 고리를.

일전에 신을 모독하려 했다면 먼저 그에 대해 말할 것이라 예고한 바 있다. 이 글은 그를 모독하려는 목적으로 쓰이지 않았지만 불쾌하다면 연락이 오겠지, 바라던 바라고 하겠다. 보고 계시다면 연락에 응답 좀 하십시오.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당신한테는.

결론이자 전제이고 (아브라함계 종교의) 그가 그랬듯 알파이자 오메가이며 말할 나위도 없는 사실 하나, 신에 대한 연구와 논의를 방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전제는 그가 <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신이잖아?’ (‘울트라맨이 개미에게 질 리가 없잖아?’ 같은 어조로) 그러나 혹은 그러니 반박도 같은 방식으로 가능하다. 그래, 그는 신이잖아.

그래서? 왜 그를 우리 유한한 존재의 인식 안에 가두려 하지?

2022년 2월 11일 금요일

부簿

이름 적는 문서를 뜻하는 한자 부簿에는 다스리다, 통솔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이름을 묻는다, 이 행동의 뜻이 또한 그러하다. 이름을 알겠다는 것은 그 존재를 그것이 속한 종족과 구분되는 개체로 파악하겠다는 의지. 나아가 그 특정한 존재에 일정 이상 간섭하거나 그를 일부 종속할 권리까지 요청하는 행위로 파악할 수 있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이름을 날 것 그대로 부르지 않는 문화를 놀라울 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해온 것이 이를 증명한다. 직함(부장)이나 작위(공작), 경력(선배), 연소 연로를 알 수 있는 호칭(언니) 등을 붙여 생 이름을 부르지 않는 문화, 자字나 호號를 따로 지어 태어날 때 받은 이름은 함부로 이르지 않도록 보호하는 문화. 이름을 함부로 불리는 사람은 부르는 사람보다 아래에 있다는 믿음. 

지배권이 그 이름 부른 자에게 있음을 증명한다는 믿음은 고대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과 72악마에 대한 전설에서도 나타난다. 지혜의 왕이라 불린 솔로몬은 악마들의 이름과 징표를 낱낱이 알아냈고 이름이 노출된 악마들은 그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전설. 

후세의 어느 작가가 고대와 우주의 힘 있는 존재를 묘사하며 그들에게 ‘인간의 발성기관으로는 부를 수 없는’ 이름이 있다 한 것도 그 막강한 권위를 나타내고자 한 것이리라. 

하지만 알 수 없어서 또는 발음할 수 없어서 부를 수 없는 이름이 있다면 새 이름을 지으면 된다. <난쟁이 이름 맞히기>와 관련된 농담을 소개한다. 독일 민화에 나오는 이 난쟁이 요정의 이름은 잘 알려져있듯 룸펠슈틸츠헨(또는 룸펠슈틸츠킨)이다. 허풍선이 농부의 딸로 태어났으나 지푸라기를 황금실로 자아낼 수 있다는 사기를 쳐 왕과 결혼한 여인은 난쟁이의 이름을 알아내지 못할 시 자신의 장자를 빼앗길 위기에 처해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1. 왕성 뒷산의 바위로 가득한 공터를 불법 점유하고 있는 마법생물을 관련 행정처에 신고한다. 

2. 근위병들을 동원해 난쟁이 신원 확인을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이름을 알아낼 가능성도 있으나, 높은 확률로 난쟁이는 달아날 것이다. 

3. 신원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난쟁이의 부동산 점유 상태가 적법하지 않음을 고지한다. 난쟁이를 쫓아내기 위해서? 아니, 그 빌어먹을 요정이 그곳에 계속 그대로 살 권리를 주기 위해서. 

4. 적당히 기억에 잘 남는 이름을 지어 성내 토지 소유자 장부에 기록한다. 왕성 뒷산 바위로 가득한 공터를 점유하고 있는 난쟁이의 이름은 이제부터 그것이다.


이름은 지어지는 순간부터 일종의 유령이 되어 그 이름을 부여받은 존재와 쌍을 이룬다. 폐기되어 더 이상 짝 지을 존재가 없어진 이름은 소멸된다. 가엾은 룸펠슈틸츠헨(또는 룸펠슈틸츠킨), 물론 박물학자로서 내가 가엾다 하는 쪽은 한때 그 이름으로 불리던 난쟁이가 아니라 폐기되었을 그 이름이다. 이름이라는 개념 자체는 사실 박물학과는 크게 연이 없다. 한 존재가 속한 종목과 그 개체를 구분하는 수단으로서의 이름은 박물학적 세계관과는 오히려 대치되는 지점에 있다. 박물학은 무릇 개체를 보면서도 보편을 탐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그러나 수많은 박물학자가 유령으로서의 이름에 매혹되어 그것을 탐구하려는 의욕을 내비친 바 있다. 나를 그 무리와 구별 지을 특징은 딱히 없다. 나와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이 나를 박물학자라 부른다. 이름을 쓰지 않는 이름 매혹자 가운데에 나는 있다. 

2021년 8월 7일 토요일

산 것

안녕하세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선생님, 제 도시락이 말을 하고 있어요.

나도 그 목소리를 들었다. 조수의 말에 돌아보니 과연 도시락이 하는 말이었다. 하긴 아침부터 함께 있었는데, 뜬금없이 점심시간이나 되어서 조수가 내게 인사를 건넬 리는 없겠지. 포장을 보니 편의점에서 산 물건인 듯했는데 예의가 바르고 명랑했다.

어떤 사람들은 하루 식사 중 가장 중요한 게 아침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저녁이라고 하죠. 아침을 먹어야 기운을 내서 멋진 하루를 보낼 수 있고 저녁에는 성대한 식사를 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점심이야말로 승부수를 띄우는 때라고 생각해요. 아침을 거르는 사람도 많고 건강상 저녁을 생략하는 사람도 많잖아요. 그렇지만 오전과 오후 사이에 점심을 잊으면 하루가 온통 엉망이 되지 않겠어요?

심지어 자기 의견을 갖고 있을 만큼이나 잘 만든 도시락이었다. 이런 건 먹어버리기 아깝겠는데. 조수의 얼굴에 떠오른 당혹과 낭패를 읽을 수 있었다.

선생님, 왜 웃고 계세요?

웃고 있어?

네, 아주 즐거워 보이시네요.

대량생산의 시대에 이런 물건이 발견되는 것은 생각만큼 드문 일이 아니다. 매우 빼어나거나 독특하여 유일하기까지 한 물건을 가리키는 영숙어 표현 가운데 one of a kind 라는 것이 있고 때로 이 말은 주문제작(order made)의 유의어로 쓰이기도 하는데, 동시에 역설적으로 대량평질의 유사한 물건들 중에 가장 돋보이는 물건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 (아 2:2) 총기 공장에서 십만 정의 똑같은 권총을 만들 때 그 중 적어도 한 자루는 우연히 명기로 제작된다는 미신과 맥이 닿는다. 말했듯 이것은 상당한 미신이지만 또한 그보다 앞서 말한 바대로, 오늘날과 같은 대량생산의 시대에는 종종 일어나기도 하는 현상이다. 공정에서 수준 미달의 불량품이 나올 수 있다면 어떤 물건은 수준 초과의 우수한 물건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 그렇게 비합리적인 믿음은 아니지 않은가?

이건 일종의 골렘인 것 같다.

골렘이요, 선생님?

너무 잘 만들어진 나머지 의식이 깃들어버린 거지. 영양 균형이 완벽할 거야. 맛있게 먹도록 해.

하지만 말하고 있는데요?

먹히기 위해 만들어졌으니 먹지 않으면 원념을 품을 텐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요?

도깨비가 되겠지.

그러면 안 되나요?

생각만큼 귀엽거나 우습지는 않을 거야. 음식으로 만든 것이어서 상하기도 할 테고. 꺼림칙하겠지만 먹어서 없애는 수밖에는 없어. 나중에 상한 도시락한테 습격을 당하는 것보다야 지금 먹는 게 낫지 않을까? 뭣보다 말을 할 만큼이나 잘 만든 물건이라면 맛도 괜찮을 테고.

그럼요. 그럼요. 나는 아주 맛이 좋아요.

도시락은 노래하듯 가락을 붙여가며 나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조수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젓가락을 가르고 밥을 떠 입에 넣기 시작했다. 도시락은 계속해서 흥얼거렸다. 나는 나는 세상에서 제일 가는 도시락. 이천쌀로 만들어서 더욱 대단해.

어때?

맛있네요.

조수는 울상을 지으며 젓가락질을 계속했다. 점점 줄어드는 도시락의 목소리를 들으며 자리로 돌아와 내가 직접 싼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평범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말 같은 것은 할 줄 모르는 김치볶음밥. 아무렇지 않은 기분으로 먹을 수 있었다.

2021년 5월 6일 목요일

세네갈식 부고

선생님은 바쁘세요. 세네갈식 부고를 작성 중이시거든요.

(젊은이는 의심스러움과 자랑스러움이 반씩 깃든 얼굴 일부만을 문틈으로 빼꼼 내놓은 채 당신을 상대하고 있다.)

아 세네갈식 부고가 뭔지 궁금하시겠죠. 세네갈이라는 나라에서는 말이죠, 누군가의 죽음을 품위 있게 표현하고자 할 때 그 사람의 도서관이 불탔다는 말을 한다고 하네요.

(당신은 그쯤은 알고 있다고 말하려다 만다. 말을 많이 하느라 방심해서인지 젊은이가 문틈 공간을 아주 조금 더 베풀어 주었기 때문에.)

왜 그런 말이 생겼는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선생님 말씀으로는, 여행 중에 책으로 된 나무를 본 적이 있다고 하셨어요. 나무로 된 책이라 해야 할까요? 선생님이 쓰신 표현은 기억이 안 나네요. 그런데 이미지가 강렬해서 그건 기억이 나요. 잎사귀 하나하나에 선생님이 읽을 수 없는 문자로 된 아름다운 문장이 새겨져 있었대요.

(당신은 빙긋 웃는다. 선생은 왜 그것이 글자가 새겨진 나뭇잎이 달린 나무라 생각지 않고 책이라고 생각했을까?)

읽을 수 없었다 하셨으니 문장의 뜻이 아름다웠다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자가 조형적으로 아름다웠다는 뜻이겠지요?

생각해 보세요. 그 나무를 책이라 한다면 어떤 잎사귀를 먼저 읽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겠어요. 그렇지만 어떤 잎사귀를 먼저 만졌는지와 별개로 그 잎사귀들의 모임은 나무가 확실하잖아요. 그건 분명……

(젊은이는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당신은 박물학자가 그를 귀애하는 까닭을 알 것 같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책일 거예요.

그런 책들로만 이루어진 도서관이 있어도 좋겠지요. 그리고, 그런데, 그런 도서관이 불탄다면…… 그건 누구의 부고가 되는 걸까요?

(……)

그건 그렇고, 선생님은 역시 바쁘세요. 오늘 만나시는 건 무리일 것 같은데요. 어떤 일로 오셨다고 전해드릴까요?

(당신은 지금 박물학자가 쓰고 있는 부고가 자신의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불타오른 도서관에 대하여 열심히 쓰고 있을 박물학자와 당신은 오랜 친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신에게는 입이 없다. 손이 없다. 몸이 없다. 둥둥 유영하는 당신의 몸에서 발하는 푸르스름한 빛은 문 뒤에서 얼굴만 내놓고 있는 젊은이의 코와 눈 사이 우묵한 부분을 속절없이 훑고 있다.

……

곧 박물학자가 직접 나올 것이다.

……

기다려 볼까?)

2021년 2월 3일 수요일

부재 기름

전화가 왔었어요 선생님.

조수가 전달한 메모는 인터뷰 요청이었다. 요청이라기보다… 요청처럼 정중한 말을 쓰기에는 너무 자신만만한… 요약하면 내가 자신을 인터뷰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라는 메시지였다. 종이조각 귀퉁이에 ‘부재 기름’이라고 적혀 있었다. 조수는 거기에 동그라미를 두 번 그렸다.

1명 이하 방문이 조건으로 달려 있었기에 혼자서 갔다. 수도권 외곽 베드타운의 아주 조용한 상가 건물의… 그러나 기이하게 시끄러운 지하동의 한 켠이 그가 지정한 약속 장소였다. 여느 지하상가들이 그렇듯 성긴 빗 모양으로 서로 트여있는 구조였는데 그의 방만이 사방이 막혀 있었고 창문도 없었다. 문을 열자 문을 닮은 빛의 자국과 함께 내 그림자가 방 안으로 넘어졌다.

그는 불 꺼진 방 안에 혼자 앉아 있었다(관심을 둘 사람이 있을까 하여 부연하자면 그는 평범한 접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불이 꺼져 있는 거야 별일 아니었지만 앉아 있는 위치(관심을 둘 사람은 없겠지만 내가 특별히 감정적 동요를 느꼈기 때문에 부연하자면 문을 기준으로 방을 가상의 사분면으로 나누었을 때 삼사분면 가운데였다)가 너무 신경에 거슬려서 참기 힘들었다.

박물학자인가?
그렇습니다.

그는 무릎에 양손을 얹고 단정하게 앉은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열린 문으로 새어든 빛은 그의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을 뿐이었지만 골상조차 평범한… 평범한 인간이었다.

녹음해도 되겠습니까?
기계를 쓸 만큼 긴 내용은 아니다.
‘부재 기름’ 말이지요. 부재로부터 기름을 짜낸다는 말인가요?

내가 이해한 대로라면 세계 에너지난도 해결될 텐데, 또는 놀라운 향신료의 발견일 텐데, 그런 기대 아닌 기대를 하면서 물었다.

저기부터 여기까지가 나의 부재라는 말이다.

그는 방의 북동쪽 모서리와 자신의 무릎을 차례로 가리켰다.

부재를 기른다는 말이었군요.

조수의 메모 실력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어 부재不在가 공간空間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알려주려고 나를 여기까지 부른 것인가에… 이런 단어를 쓰고 싶지는 않았지만… 짜증을 참기 힘들었다.

놀라운 발견이군요. 선생님의 말씀대로라면 이동하는 모든 존재가 부재를 기르고 있는 셈이고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또한 부재가 존재하고 있다는 말씀이고요… 실로 대단한 통찰이십니다.

그는 조용히 의자를 옮겼다. 녹음기를 켰다면 내 한숨소리가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의 부-재가 공-간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과 다르게 나의 시-간은 실제로 가치를 가지고 있는데 겨우 이따위 이야기를 하려고 (심지어 내가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는 협박 같은 말까지 하면서) 인터뷰를 ‘요청’했단 말이지.

나의 부재는 점점 더 빠르게 커져가고 있어…

그는 다시 한번 의자를 옮겼다. 그다지 큰 방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무릎은 이제 거의 남서쪽 모서리에 닿을 정도였다. 닿을 정도가 아니라 닿아 있었다. 닿아 있는 게 아니라 벽에 들어가 있었다. 무릎만이 아니라 허벅지까지, 그 위에 얹은 손과 팔꿈치까지, 한쪽 어깨와 조금 틀어 나를 향하고 있던 얼굴의 반이 차례로, 조금씩 빠르게, 벽 안으로 녹아들고 있었다. 조금 후에 그는 흔적 없이 부재하게 되었다. 완벽한 부재를 길러냈다.

역시 이런 단어를 쓰고 싶지는 않지만 짜증 나는 사실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내가 평소 싫어하던 것처럼 인터뷰이보다 말을 많이 하는 인터뷰어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말이 옳았다는 것이다. 그의 부재 기름을 목격하지 못했다면 후회했을 것이다. 부재 기름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는 제대로 후회할 수도 없었을 테지만…

2020년 11월 7일 토요일

레시피

강연장을 나서며 나를 큰소리로 비난하는 사람들을 본다. 비난은 데시벨이 높은 음성언어로 또한 가벼운 물리적 충격으로 쇄도한다.


이교도! (의미상 이것은 비난이 될 수 없을뿐더러 나는 어떤 종교의 신도가 아니다)

미친 새끼! (아직은 아니라고 분명히 해 뒀다)

악마! (실물을 본다면 어떤 사람한테도 그런 말은 할 수 없을 텐데)

신성 모독이다! (내가 신을 모독하려 했다면 먼저 신에 대해 말했을 것이다)

변태! (왜?)


내 책의 내용이 그들이 섬기는 신의 섭리를 거스른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렇지만 차라리 토마토를 던질 때는 토마토! 라고 외치고 계란을 던질 때는 계란! 이라고 외치는 게 조금이라도 앞뒤가 맞는 행동이 아닌가?

비난하는 이들이 던진 것을 뒤집어쓴 박물학자는 가열하지 않은 토마토 계란 수프로 목욕한 꼴이다. 그러고 보니 그걸 마지막으로 먹은 게 언제였지. 나는 내가 언제나 박물학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허기질 때에도 학자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보편적인 인식과 다르게 조리調理는 인간만의 일이 아니다. 상당히 많은 동물들이 자연 상태의 재료를 가공해 먹을 수 있도록 만든다. 먹이를 씻어 먹는 아메리카 라쿤이나 도로 위에 견과류를 떨어뜨려 자동차가 지나가면서 껍데기를 밟아 부수도록 하는 까마귀 등이 대표적인 예가 되겠다. 인간의 조리문화에는 불이 있다는 것 정도가 결정적인 차이가 될 것이다. (몇몇 사례에 따르면 산불에서 생존한 육식동물들이 불에 타다 남은 소동물 시신을 건드리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익힌 먹이를 선호해서가 아니라 달리 먹을 것이 남지 않아서라고 보아야 한다.) 먹이 질의 개선을 위해 도구나 향신료를 사용하는 동물은 의외로 많다.

잡식성 동물일수록 조리 과정이 복잡한 경향이 있다. 무엇이든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 가운데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고자 하는 감수성이 발달하는 것이다. 즉 특정한 먹이를 특정하게 가공한 경우를 선호하는 ‘취향’이, 잡식성 동물 중 유의미한 다수에게서 발견된다.

여기에 제례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 또한 인간만의 특징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에게만 있는 ‘불’을 섬기는 종교가 존재하는 것 또한 재미있는 일이다.) 특정한 식재료를 특정한 방법으로 가공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에게 경의를 표하는 문화가, 또는 그 흔적이 전 세계 곳곳에 퍼져있다. 번제를 바치고 성찬식을 하고 차례를 지내고…… 그런데 이 정도로 보편적인 문화이고 보니, 결국은, 이 방식으로 섬기어지거나 기려지는 대상이란, 무형의 전능한(혹은 전능성이 기대되는) 존재가 아니라 조리과정 그 자체가 아닌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그것에는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의견이다.

2020년 8월 7일 금요일

여기에 있는 동시에 거기에 있는

머리가 아프다. 그렇지만 나는 머리만은 아프지 않는다. 방금 쓴 문장은 내가 어떤 거래에서 했던 말이고 그 전 문장은 상태에 대한 진술이다.

거래에 대해 먼저 설명하는 편이 좋겠다. 내가 대가로 내세운 것은 머리를 제외한 몸뚱이의 나머지 모든 부분. 그러니까 어떤 부분이어도 괜찮으니 만약 내가 아파야 한다면, 그런 당위나 인과가 발생한다면 머리를 제외한 어디든 물어뜯으라고 나는 개에게 말했다.

만일 불시에 어떤 사고가―그러니까 내가 이 방의 이 책상 앞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라도, 갑자기 비행기가 추락해 정확히 내가 있는 이 건물에 들이꽂혀 내 전신이 산산이 흩어지더라도, 머리만은 놀랍도록 훼손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조수는 (운좋게 그가 나와 같은 건물에 있지 않았을 경우에) 눈을 감지 않은 나의 머리통을 수습하여 도서관에 기증하도록 할 수 있다. 또는 (내가 바라지 않는 바지만)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전수한 지식을 바탕으로 말하는 목의 제작을 실습할 수 있겠지. 나와 개의 거래는 그런 것이다. 나의 최후는 아마 ―나와 거래한 개의 상상력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형언하기 힘들 만큼 불길할 테지만 거래에 따라 머리만큼은 끝까지 훼손되지 않는다.

물론 이런 극단적인 보험은 들지 않는 편이 좋다.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개가 아무리 귀여워도 개하고는 계약하는 게 아니다.

그렇지만 개는 철저하게 계약을 수호하고 있다. 개는 내 머리를 해하려는 유무형의 위협들을 물어 죽이고 대신에 내 어깨를, 허리를, 발목을 직접 물어뜯는다. 내 머리에 일어나야 할 부상이나 통증을 다른 곳으로 옮겨주는 역할을 개가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계약에 만족한다. 계약 이래 내 머리가 아플 수 있는 가능성은 다음 두 가지 정도가 있다: 나의 개가 나와의 계약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먼저 죽었거나 (상상만 해도 가슴이 아프다) 그가 감지하지 못한 아주 미세한 위협이 내 머리를 침공했거나.

물론 나는 두 번째 경우에 대해 먼저 확인해보기로 했다. 개가 나보다 먼저 죽을 리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거니와, 통증의 원인을 밝혀내면 그것을 개가 해결해줄 수 있는지 아닌지도 알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 쓰는 물건이 영안경影眼鏡umbrascope이다. 오페라 글래스 두 개를 맞대 붙인 듯한 그 모양이 지시하듯 두 인간이 서로 눈을 대고 마주보아야 쓸 수 있는 물건이다. 어떤 시대에 누구에 의하여 개발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인간에 의한 발명인 것만은 확실하다. 양쪽 끝에 댈 수 있는 눈의 자리를 각각 한 쌍만 만든 것이 그 증거.

다음은 거울에 영안경을 대고 직접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려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 (나에게도 영안경은 하나뿐이기 때문에 분해해서 구조를 파악해 볼 엄두는 나지 않지만, 이 물건 안에도 작은 거울이 여러 개 들어있는 모양이라, 거울에 대고 보니 눈을 멀게 할 듯한 난반사가 일어났다) 조수에게 이 물건의 기능과 사용법을 설명한 다음 내 눈 안을 들여다볼 것을 주문한 이후의 대화를 재구성한 것이다.


나: 뭐가 보이지?
조수: 눈동자요.
나: 눈동자 속에서 뭐가 보이지?
조수: 너무 어두워서 모르겠어요.
나: 눈을 떼지 말고 천천히 감았다가 다시 천천히 떠 봐.
조수: 아, 보여요. 마치… 회관 같아요. 대단히 넓고… 조용하고… 처음 보는 물건이 많아요.
나: 또 이상한 점은?
조수: 벽에 곰팡이가 있어요.
나: 그걸 닦아줄 수 있겠어?
조수: 저는 거기 없는데요.
나: 지금은?
조수: 이제 있어요. 마침 마른 헝겊도 들고 있네요.
나: 내가 그걸 떠올렸으니까.
조수: 닦아볼게요. 조금 오래 걸릴지도 몰라요. (…) 선생님도 제 눈 뒤에 있는 걸 볼 수 있나요?
나: 보고 있어.
조수: 거기에 뭐가 있나요?
나: 내가 있어.
조수: 선생님이요?
나: 아주 거대한 내가 있네.
조수: 선생님 말고는요?
나: 그게 다야.
조수: 왜 그게 선생님한테 없고 저한테 있을까요?
나: 그러게 말이야.


조수가 곰팡이를 다 닦아내자 두통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머리가 맑아지자 기분도 좋아졌다. 이번만큼은 머리 대신 다른 부위가 아플 필요도 없으니까. 영안경을 내려놓은 다음 우리는 알콜솜으로 얼굴을 닦고 세수를 했다. 너무 가까이에서 대화를 나눴기 때문에.

개에게는 이번 일을 말하지 않을 생각이다. 조수에게도 개에 대해 알리지 않으려 한다.

가까운 미래에 나의 개는 내 머리의 통증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해 조수를 물어뜯게 될 것이다. 그가 나의 어깨나 허리나 발목과 같은 존재라 여겨서가 아니라 조수를 물면 내가 가슴 아파할 것이라고 믿어서. 나는 그 통증을 긍정하게 될까? 나의 긍정을 조수는 기뻐할까?

확실한 것은 이런 고민이 박물학자의 몫은 아니라는 점뿐이다.

2020년 5월 4일 월요일

면피

선생님, 버섯이 자라기 시작했어요.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원인을 짐작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원흉은 우리가 함께 만든 테라리움이었다. 테라리움 만들기는 조수에게 한 지역의 식생을 이해시키기 위한 실습 활동이었고, 재료로는 물론 한 지역에서 구한 흙과 물과 이끼만을 썼다. 우리가 사용한 이끼가 버섯 균으로 ‘오염’되어 있었고, 거기에 끼어 있던 버섯 균이 다른 화분에 옮겨붙은 것이었다. 정작 우리의 테라리움 안에서는 버섯이 자라지 않았다. 문제의 이끼를 그대로 넣어두었음에도. 외부 대기를 거의 차단하여 자체적인 기후 체계를 갖게 된 테라리움 내부에서는 자라기에 충분한 습도나 영양분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라리움 내부에서 버섯이 자라기 시작하면 그 안의 작은 식생이 틀어지고 말 것이다.

각설하고 실제로 자라난 버섯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첫째 날, 버섯은 희고 둥근 형태로 화분 테두리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조수는 바로 그날 버섯을 발견했다. 테라리움을 만든 이후부터 조수는 그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는데, 테라리움 바로 곁에 있는 커다란 화분에 변화가 일어난 것을 모르고 넘어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어떻게 할까요?

며칠은 그대로 두고 보자고 했다. 조수는 동의했다. 둘째 날 화분 위로 조금 더 솟아난 버섯은 한쪽 모서리가 특이하게 긴 삼각뿔 모양이 되었다. 한쪽 단면에서 작고 둥근 흠집 같은 것이 한 쌍 발견되었다. 강낭콩 모양에 대칭을 이루고 있는 흠집이었다. 그래서…… 이건 마치 사람의 코 같네요. 조수가 말했다.

그러므로 셋째 날과 넷째 날, 그 이후에 일어났을 일을 이제 당신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광대와 눈썹뼈, 입술과 턱이 천천히 화분 밖으로 밀려 올라왔다. 버섯이 자람에 따라 화분의 원래 주인이었던 식물은 (박물학과는 별개로 그저 재미로 기르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파내 다른 화분으로 옮겨 주어야 했다. 버섯은 다섯째 날쯤에 완전히 사람의 얼굴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형태로 자라났는데, 특유의 창백한 빛깔 때문에 밀랍으로 만든 데스마스크처럼 보였다.

여섯째 날에 버섯은 눈을 떴다. 눈동자도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밀랍 색이어서 눈 뜸과 감음의 차이는 크지 않았으나, 어쨌든 눈꺼풀이 운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움직인 것이 눈꺼풀만은 아니었다. 버섯의 입술이 열렸다. 마침내, 라고 해야 할까.

종말이다.

버섯은 그렇게 말했다.
이러한 생물군이 있다. 그것이 지니고 있는 실질적인 지혜나 신성력 같은 것과는 별 상관 없이, 인간-또는 숙주에게 부정적인 암시를 주어 파괴적인 행동을 하도록 만드는 생물들이. 그중 몇몇은 영향받은 인간이 벌이는 행위를 통해 먹이를 얻거나 번식을 하거나 더 나은 환경으로 이동하는 등의 이로움을 꾀하지만, 그 나머지 대부분은 자기의 생존과 아무 상관 없는 이유에서 인간에게 그런 암시를 준다. 그렇다면 그것은 유희인가? 오락인가?

버섯이 인간의 얼굴 모양으로 자라는 것은 기이한 일인 한편 그다지 의미부여를 할 만한 일은 못 된다. 우리가 테라리움을 만들기로 한 것, 우리가 박물학자와 조수인 것, 우리가 각각 박물학자와 조수가 되기까지의 시간, 총체적으로, 우리가 우리인 것과 버섯이 사람 얼굴 모양인 것은 서로 개연되지 않는 무작위의 사실이다. 물론 버섯이 하는 말도 그러하다.

버섯을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몇 가지 떠오르는데, 그중 내가 가장 선호하는 방법은 버섯이 귀까지 자라도록 내버려둔 다음 (아마 여덟째 날 정도면 귓바퀴가 완전히 흙 밖으로 빠져나올 것이다) 귓구멍에 대고 엿이나 처먹으라고 말한 다음 화분째로 불사르는 것이다. 조수는 이 버섯을 보존하기 위한 새로운 테라리움을 마련하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했는데, 화분에서 솟아난 사람 얼굴을 찢어지지 않게 뜯어낼 수 있다면 그러라고 했다. 아마도 여덟째 날에 조수는 내 판단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2020년 2월 4일 화요일

도서관

이번엔 뭘 쓰면 좋을지를 생각중이라고 하니 조수가 다음과 같은 메모를 건네주었다.


안녕하세요 조수입니다. 지난번엔 번제가 있었습니다. 번제는 가죽을 제외한 모든 것을 거룩한 불에 완전히 태워 그 연기로 박물학자에게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그것은 박물학자 조수 시험이었는데 저는 용 일곱 마리와 공주 일곱 명하고도 조수 후보 일곱 친구를 제물로 바쳐서 조수가 되었습니다. 여하간 박물학자는 아주 멋진 선생님입니다. 조금 미친 것 같지만 그와 다닌다면 이 모든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영원히 알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은 것 같지만 후략하겠습니다. 후략 이후에 우리는 다시 등장하겠습니다.


조수는 자신의 메모가 박물지에 수록될 수도 있다는 기대가 충만해 보였지만 못본 척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아는 한은 그 어떤 박물학자도 번제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설명하는 대신에 조수와 도서관에 갔다.

도서관의 제본 과정을 직접 견학하는 일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사서에게 물어보면 대강 이야기해주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제본 과정을 담고 있는 책을 보는 편이 낫다. 그대로는 여기에 기록할 수 없으므로 사서의 말을 간추려 옮기면 이렇다: 사후 훼손의 흔적이 없는 시신을 구한다. 소독과 방부처리를 마친 뒤 축성한 날붙이로 전신에 기록을 남긴다. 그 위에 향유를 덧바르고 서늘한 곳에서 건조한다.

하여 내가 도서관이라고 부르는 이 곳의 서가에는 관들이 나란히 꽂혀 있다. 알고 싶은 주제를 들려주면 사서는 적절한 관을 서가에서 찾아 준다. 도서관에 입장하면서 받은 향에 불을 붙이고 책의 손에 쥐어주면 책이 스스로 입을 열어 자기 몸에 기록된 것을 이야기한다. 놀랍게도, 책의 말은 자기에게 남겨진 기록의 총량을 초과한다. 책은 멸종된 동물의 울음소리를 모사할 수 있다. 생전에 배운 적 없는 외국어를 구사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도에서 사라진 나라를 세운 민족의 아주 오래된 풍습을 재현할 수 있다.

신에 대해 쓰인 책은 없는데, 그것은 당연하게도 아직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다. 천사를 다룬 책은 있다. 매우 귀한 책이어서 열람 신청을 무수히 거절당했다. 열람에 성공한 이들에 따르면 천사에 대한 책은 춤을 추고 예언을 한다. 그건 살아 있는 인간들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런 의아함을 느낄 만도 하지만, 이와 더불어 생각해야 할 점은 천사의 책이 무수한 도난을 시도당했다는 사실이다. 당연하게도 이 도서관의 장서를 도난하는 일은 전혀 쉽지 않은데, 도난 시도가 발각되면 제본 대상이 되는 형벌을 받게 된다.

이 같은 일들에 대해서 조수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로 번제에 대한 책을 함께 열람했다. 나는 책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고 조수는 향을 쥐고 있지 않은, 책의 다른 편 손바닥에서 푸른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보았다. 이처럼 동시에 같은 책을 보면서도 다른 체험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도서관에서 나오면서 조수는 내게 당신 자신의 연구를 기록한 책이 되고 싶은지를 물었다.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지는 않지만... 아무리 사후라도 해도, 그것은 너무 자아도취적인 소망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는 말을 솔직하게 했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제가 그 책이 되면 어떨까요. 언젠가 조수와 함께 천사의 책을 열람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도 좋겠다고 답했다.

2019년 10월 8일 화요일

상담사 고블린

아무 버튼도 누르지 않고 수화기를 든 채로 아주 오랫동안 그대로 있으면, 운이 좋은 날에는, 상담사 고블린이 전화를 받는다. 전혀 다정하지 않은 목소리로 묻는다.

어떻게 전화를 거셨나요?

그러면 나는 고민을 이야기한다.

상담사 고블린은 참을성 있게 사연을 들어준 다음 아무 해답을 주지 않고 전화를 끊는다. 고블린이 하는 일이 다 그렇지.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나아진다.

사실 상담사 고블린을 실제로 만난 적은 없기 때문에 그가 정말 고블린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은 없다. 그냥 내가 고블린이라고 믿고 싶기 때문에 그는 고블린이다.

기분이 나쁜 날은 고블린 떼를 상상한다. 경찰 고블린. 소방관 고블린. 발명가 고블린. 여행 칼럼니스트 고블린. 제복을 입고 뚱한 표정으로 태업에 매진중인 고블린. 상태가 나쁠수록 많은 고블린을 동원해야 한다. 길을 건너는 고블린. 줄을 서는 고블린. 잘 나오지 않는 펜을 흔들다 잉크를 뒤집어쓰는 고블린. 옷을 사 입는 고블린. 임대차 계약서에 지장을 찍는 고블린. 벽에 머리를 찧는 고블린. 순간이동하는 고블린. 커피를 내리는 고블린. 유리창에 푸르고 투명한 세정제를 뿌리는 고블린. 흙장난하는 고블린. 의자를 드르륵 소리 내며 끄는 고블린. 정원수를 파내고 뿌리 밑에 숨겼던 것을 찾아내는 고블린.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고블린. 전화를 받는...... 상담을 하는 고블린.

오늘 상담사 고블린은 ...... 아주 늦게 전화를 받았다. 나는 단 한 마디를 했다.

“제 조수가 미친 것 같아요.”

평소라면 그대로 전화를 끊었을 상담사 고블린은 전처럼 퉁명스러운, 하나도 다정하지 않은 목소리로 단 한 마디만을 말했다.

“그것 참 큰일이군요.”

2019년 8월 8일 목요일

해상 기획

반인반어 형태로 상상되는 해저생물에 관한 전승은 전 세계 각지에 골고루 퍼져 있다. 많은 문화권에서 신화 또는 설화로 전해지는 대홍수 모티브와 유사한 면이 보인다. 거칠게 말하면 이렇다. 갓 시작된 문명들 각각을 뒤흔들 정도로 파괴적인 수해 재난이 실제로 일어났기에 대홍수 전승들이 만들어지고 구전된 것처럼, 인어와 관련된 전승 역시도, 어쩌면... 더구나 대홍수 이야기 대부분이 문자가 발명되기도 전 선사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에 비하면, 어업과 항해술이 발달한 이후에 등장한 인어 목격담들은 얼마나 신뢰가 가는지.

그러나 한편으로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어 이야기들이야말로 ‘기획’된 것이라는 의혹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인어들은 풍랑을 제어하고 미색으로 뱃사람을 홀리며 이따금 아이를 낳아 뭍것의 품에 안겨준다.

풍랑을 다스리는 능력이 있어 뱃사람들이 마음에 들 때에는 뱃길을 잠잠케 하지만 때로 신경질을 부려 해일을 부르는 종족이, 너무도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때로 인간 남자와 정을 통하기도 한다-는 상상에서는 그 두려운 자연재해를 인간―인간 중에서도 뱃사람들, 즉 남성들―이 통제할 수 있다는, 그러기를 바란다는 의도를 추출할 수 있다.

너무나 희귀하여 쉬이 발견되지 않는 종족이 있는데 유독 한 가지 성별의 기능과 이미지만이 전해진다면 그것이 편의적으로 상상된 것이리라 짐작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어째서 사람의 눈에 목격된 인어들은 모두 여인의 꼴을 하고 있단 말인가? 남자인 인어들은 너무 겁이 많아서 뭍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고 하던가?


南海中有鮫人 水居如魚 不廢機織 其眼能泣 泣則成珠(남해중유교인 수거여어 불폐기직 기안능읍 읍즉성주) 남해 속에 교인이 있으니, 물고기처럼 물에 살며 베 짜기를 그치지 않고, 그 눈은 울 수 있어 울면 눈물이 구슬이 된다. (조충지, <술이기述異記>)


한술 더 떠 옷을 입지도 않는다는 인어들이 베를 짠다는 건 대체 어떻게 나온 발상인지 모르겠다.
이와 같은 상상력들 대체가 실존하는 인어들에게 너무나도 큰 결례로 여겨진다.

다른 분야의 과학들이 그러하듯 박물학에는 윤리도 사상도 없지만 박물학자에게는 나름의 그것이 있다. 인어 전승을 되짚어 볼수록 박물학자인 나를 화나게 하는 옛 사람의 상상은 한 마디로, ‘어째서 인어는 여자고 용왕은 남자인가’ 하는 부분이다. 수저 문명의 백성들이 전부 여성이라면 그들을 다스리는 존재 또한 여왕이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전남 신안군에는 도초도라는 작은 섬이 있고 이 섬에서는 명씨 성 가진 노총각이 어부에게 잡힌 인어를 구해준 은혜로 대를 잇게 된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명씨는 인어를 돈 주고 사서 집에 얼마간 두고 돌봐준 뒤에 바다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인어는 바다에 돌아간 뒤 며칠 지나 잠시 뭍을 찾아 옥처럼 곱고 지혜와 재주가 빼어난 남자아이를 명씨에게 안겨주고 다시 떠났다 한다. 도초도에는 지금도 명씨 집안이 남아 있다.
인간-남성 입장에서는 이것이 노총각이 대를 잇게 도와준 유교적 미담일지 몰라도 나의 시각에서 이것은 인어들이 ‘남자’를 취급하는 방식을 더 잘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물 위는 지옥과도 같은 세계로, 인간은 악귀와도 같은 존재로 여길 인어가 자기 자식을 뭍으로 올려보낸 것은 명씨에게―인어는 잘 알지도 못하는 유교적 세계관의 맥락에서― 은혜를 갚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아이를 거부한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이유는 아마 여자 아기가 아니어서가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째서 성숙한―목격된― 인어들은 전부 여성의 신체를 갖고 있는지를 설명할 도리가 없다. 인어들은 남아를 유기한다. 그런데 번식은 어떻게 하는가 같은 것은, 글쎄, 대화를 통해 알아 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대화가 가능한 상대에게 그런 것을 묻는 것은 예의도 아니다. (이런 것을 굳이 말해줘야 하는가?)

2019년 5월 6일 월요일

불안한 뿌리

이런 불안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천변에서 피어오른 날벌레 떼에 둘러싸여 팔다리를 휘젓다 간신히 그곳을 빠져나왔을 때, 불현듯 귓속 깊은 곳이 가려워 정말이지 무심코,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거칠게 헤집었더니 손끝에 피가 묻어나왔다. 묻어나온 피는 나의 것일까, 귓속에 들어간 벌레의 것일까? 미량의 맑은 피가 묻어 있을 뿐, 손끝이 그리 지저분하지 않은 것을 보면 나의 피일 것 같다. 그렇지만 이렇게 깨끗한 귓속이 벌레 떼의 습격을 받은 직후에 갑작스럽게 가려워졌던 것을 생각하면 날벌레 한 마리가 어찌어찌 귓속으로 들어갔을 가능성도 적지 않을 듯하다. 그렇다면 이 피가 차라리 벌레의 것이기를 바라야 한다. 살아 있는 아주 작은 벌레가, 귓속의 솜털 때문에, 나오지는 못하고 그냥 거기에 남아 있다면? 내 귓속의 뭔가를 양분 삼아 아주 오래 살아남는다면? 심지어 그것이 암컷이고, 알을 낳을 준비가 되어 있는 개체였다면?
누구나 이 같은 불안 하나로 중이염에 걸릴 수 있다.
이때 실제로 중이염을 유발하는 것은 오염된 물에서 나온 병균 덩어리 날벌레가 아니라 불안에 못 이겨 미친 듯이 귀를 파기 시작하는 습관이다.

최근에 나는 어떤 양치기의 불안에 대한 글을 읽었다.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다.
국경 가까이에서 양치기 노릇을 하던 한 남자가 이웃나라에서 돌아오는 선교사를 보았다. 양치기는 신앙이 있었지만 한철 내내 산등성이 목장에서 보내야 하는 처지라 제례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선교사는 양치기의 청으로 그의 거처에 하룻밤 머물며 신의 뜻에 대해 들려주기로 했다.
양치기는 신앙이 있었지만 여가시간에 경전을 읽기보다 수음하기를 좋아했다. 이와 같은 흠을 선교사가 알아차리지 못하기를 바랐다. 선교사는 양치기에게 경전에 실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중에는 땅을 향해 사정한 남자가 신벌을 받아 죽은 이야기도 있었다. 선교사는 그에 더하여 땅에 떨어진 정액에서 인간을 닮은 극독초가 자란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날 밤에 양치기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선교사가 자신의 비밀, 즉 양떼를 돌보기보다 멀찍한 곳에서 사타구니 만지기에나 더 열중하는 습성을 꿰뚫어보고 저를 책망한 것 같아서 부끄럽고 분했다. 또한 선교사의 말대로 아무 곳에나 털어놓은 자신의 분비물에서 극독초가 자라면, 양들이 그것을 먹고 잘못되기라도 하면... 양치기는 그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머리에서 떨쳐버리려 애썼지만, 그보다는 선교사가 거짓말을 했을 리 없다는 생각을 하는 편이 훨씬 쉬웠다.
양치기는 생각했다. 양 몇 마리가 죽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저 수다쟁이가 그게 내 잘못이라는 사실을 누구에게 말하지만 않으면 된다. 그렇지만 저 수다쟁이가 마을로 내려가서 내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지? 불안감을 이길 수 없었던 양치기는 동틀녘에 선교사를 죽였다. 양치기가 수다쟁이라고 생각한 선교사는 끅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었다.
선교사의 말대로 양치기가 땅에 뿌린 씨에서 정말로 극독초가 자랐을까?
결국 그의 분비물에서 맨드레이크가 자라기는 했다. 선교사가 속했던 수도회에서 돌아올 때가 지난 선교사의 행방을 추적한 끝에 양치기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양치기는 신앙이 있었지만 교수형을 당했다. 광장에서 수치에 떨며 자기의 죄를 고하고 뛰어내렸다. 축 늘어진 하반신에서 갖가지 분비물이 섞이어 뚝뚝 떨어졌다.
이처럼 맨드레이크는 목매달아 죽은 사람에게서 떨어진 분비물로 말미암아 생겨난다. 숨이 붙어 있는 동안의 분비물은 아무 의미가 없다. 따라서 맨드레이크 싹을 틔우려면 씨주머니로 쓸 남자가 숨을 완전히 거둘 때까지, 분비물이 다 떨어지고 마를 때까지 매달아두는 것이 유익하다. 모 마녀회에서는 이를 땅을 저주로 수태하는 것으로 풀이하는데, ‘관점’으로서 소개할 뿐, 탁월하거나 적절한 시각은 아니라고 본다.

2019년 2월 1일 금요일

샌드박스

회관의 한 구석을 독점한 노인은 유독 성격이 고약하다. 언제 와 보아도 그는 있다. 스물다섯 쌍의 눈 가운데 절반이 붉고 절반이 푸르다. 예의상 묘사는 생략하겠지만 어떻게 보아도 누더기인 복색을 그들 문화권에서는 가장 현명한 존재만이 몸에 걸칠 수 있다고 한다. 거기에서 온 이를 그밖에 모르는 나로서는 그것이 거짓말인지 아닌지를 알 길이 없지만 굳이 검증할 마음이 들지도 않는다. 그는 양질의 정보 제공원이다.

회관은 내가 조수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어야 할 공간이지만 동시에, 끝까지 그를 데리고 오고 싶지 않은 공간이기도 했다. 회관은 [사거리]의 어느 이사분면에 있다. 유한차원 문화권 출신인 내가 유한차원 문화권 출신 청중에게 [사거리]의 개념을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층층이 겹친 차원들의 차원. 정확하게 상상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지만 이렇게 말한다고 상상하지 않을 리가 없으므로 오히려 마음껏 상상해 보기를 권하곤 한다. [사거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거리]를 경유해야 한다.

노인은 늘 하듯 상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상자 속은 막 여름을 맞이한 것처럼 보였다. 인사를 건네기 직전 노인은 작은 물조리개로 상자 귀퉁이에 홍수를 일으켰다.

내가 노인과 대화-노인에게 거래를 제안하는 동안 조수는 노인이 하던 것처럼 상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노인은 대화 중간 조수를 돌아보며 그걸 건드리면 너를 천 번 하고도 일곱 번 무로 돌려보낼 것이다 라고 했는데 조수에게 그 말은 염소 울음소리와 아주 흡사하게 들렸을 것이다. 나는 조수에게 노인의 의사를 전해주었다. 조수는 거래가 끝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노인은 실망한 눈치였다. 회관에 처음 발을 들인 이에게 상자를 보여주고 만지도록 유도해 놓고 길길이 뛰며 화를 내는 것이 그의 취미였다. 트집을 못 잡은 것이 분했는지 노인은 거래가 끝난 직후 상자 속을 손으로 마구 헤집었다.

상자는 대략 반 뼘가량의 깊이에 가로세로 각각 두 뼘 너비이며, 투명한 재질로 된 뚜껑은 원기둥을 반으로 잘라 붙인 형태로 되어 있다. 상자 속의 지적 생명체들은 단일한 문화권을 이루고 있어 지도자 겸 제사장의 위세가 대단하다. 상자 가운데에는 그들이 천 년 하고도 칠 년간 쌓아올린 반의 반 뼘 높이 제단이 있는데 거기에 가을마다 새로 빚은 술이 올라온다. 술동이는 인공눈물용기보다도 작지만 (물론 상자 속의 지적 생명체들에게 그것은 대략 한 해 동안 땀 흘려 빚은 거대한 제기일 것이다) 다른 잔에 술을 따라보면 밤새도록 흘러나온다.

노인은 정말 보기 드물 만큼 (박물학자가 이렇게 말할 때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성질이 고약하지만 이따금 상자에서 거둔 술을 병째 건네주기도 한다. 보기보다 마음 씀씀이가 넉넉해서가 아니라 제단에 올라온 술을 제때 거두지 않으면 상자 속의 지적 생명체들이 슬퍼하기 때문이다. 제수품이 겨울까지 사라지지 않으면 그들은 신이 노하셨다고 믿으며 술동이를 깨뜨리고 신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제단을 피로 물들인다. 상자 속의 사계절이 한 번 도는 데에는 우리 기준으로 3시간 40분이 걸린다.

2018년 10월 31일 수요일

소식

꿈에서 어떤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 사람은 기꺼이 저의 조수가 되어주기로 했습니다. 이상입니다.

2018년 10월 28일 일요일

거미

여자는 몸 속에 물레를 숨기고 있었다. 여자의 장기는 실패가 되어가고 있었다. 여자는 여신에게 제발, 그만, 자기를 거두어달라 청했다. 여자를 가엾게 여긴 여신은 그 여자를 거미로 만들어 주었다. 어찌하여 그 보잘것없는 사람을 여신의 손으로 거두어주느냐 묻는 사람들에게 여신은, 그 여자가 감히 여신에게 도전하기에, 얼마나 주제 모르고 건방진 여자였는지를 온 누리와 모든 세대가 기억하게 하였다고 답했다.

실을 잣고 베를 짜는 여인들은 불행하다. 물레를 함부로 건드렸다가 백 년이나 가는 저주를 받아 불행하다. 목동과 사랑에 빠졌으나 일 년에 단 하루만 만날 수 있게 되어 불행하다. 아비의 거짓말 때문에 헛간의 지푸라기들을 황금으로 바꾸어 놓아야 할 처지가 되어 불행하고, 구혼자들을 물리치느라 낮 동안 애써 짠 베를 밤마다 풀어 헤치는 일이 불행하다.
그렇다면 노래하고 춤추고, 길을 떠나고 효를 행하고 친절을 베풀고, 먹고 마시고 울고 웃는, 나머지 여인들은 불행하지 않았던가.

모퉁이에서 마차가 무서운 속도로 돌아나온다. 나는 고삐를 쥔 이를 간신히 알아보고, 인사할 틈도 없이 마차는 지나가고 만다. 그러고 보면 그걸 마차라고 해도 좋을까? 마차를 끄는 짐승의 머리는 둘인데 다리는 지나치게 많았던 것 같다.

2018년 8월 6일 월요일

네이티브

좋은 소식과 안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라는 말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사실 소식은 한 가지뿐이다. 방금 내가 이 방으로 들어오기 직전 골목에서 본 것에 대한 이야기다.

그렘린, 우리말로는 무엇으로 옮겨야 할까? 파물귀(破物鬼), 망깨비 정도의 대체어를 쓸 수 있겠다. 그렘린이라는 이름은 서양에서 최초 발견된 장소에 고블린이라는 명사를 합성해 만든 것이다.

즉 좋은 소식이란 박물학자인 내가 마침 머무르던 곳 인근에서 저 유명한 괴동물을 직접 발견했다는 것. 물론 나쁜 소식은 지금 이 소식을 전하는 도구를 비롯해 많은 기계들이 더이상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파물귀가 기계를 파괴하는 이유와 그들의 생태에는 전혀 관계가 없다. 쉽게 말해 그들이 기계를 먹고 산다는 세간의 믿음은 오해라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개인적으로 파물귀를 좋아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오로지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서, 그들은 기계의 고장을 유발한다.

러다이트 운동의 발화점을 누구로 알고 있는가? 질문을 조금 바꿔야겠다. 러다이트 운동을 시작한 것이 인간일까?

고장난 기계가 그들에게 어떤 기쁨을 주는지는 알 수 없다. 적어도 인간이 불편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 아님은 확실하다. 이런 생각은 너무도 인간중심적이어서 낯이 뜨거워질 정도다. 일반적으로 파물귀들은 인간에게 우호적이다. 고장낼 기계를 만들어주는 존재를 미워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다만 기계고장을 직접 막으려 할 경우에는 적대적으로 돌변할 수도 있다. 매우 위험한 상황이므로 최대한 피하기를 권하고 싶다. 비행기 엔진을 물어뜯을 수 있는 턱힘을 지닌 존재와 대치하는 것은 조금도 용감한 행동이 아니다.

추정컨대 파물귀들은 기계의 멈춤 자체에서 크나큰 쾌감을 느끼는 듯하다. 크고 구식일수록 좋아하며, 무릇 ‘스마트’라는 수식어를 지닌 현대의 기계들을 미워한다. 인간 입장에서는 큰 차이가 없는 듯 느껴질 수 있다. 너무 좋아서 고장내기도 하고 너무 싫어서 망가뜨리기도 한다. 예방 삼아 개인용 기기 주변에 초콜릿이나 사탕을 한두 개 놓아두면 좋다. 안타깝지만 윤전기나 사다리차의 고장은 그따위로는 막을 수 없다.

현재 내가 체류중인 곳은 대학 캠퍼스를 중심으로 상권이 조성된 소도시로 파물귀를 흔히 볼 수 있을 만한 환경이 아닌데, 현지인의 안내에 따르면 인근에 공장 지대가 있다는 모양이다.

2018년 1월 31일 수요일

격몽

그것을 [깨임]이라고 부른다. 깸이 아니라 깨임이다. 죽비질이나 침례와 같은. 영성 또는 신성이 배제된.

그것은 그것이 하는 일이다. 그것은 목격되거나 구전되지 않는다. 오로지 체험되고 침묵 속에서 공포로 남는다.

다음과 같은 목소리가 끝없이 따라오는 회랑이다.

어리석은 자!

어리석은 자!

어리석은 자!

회랑은 살아있다. 지나온 부분은 무너지고 걸어나가는 방향으로 건조된다. 뼈처럼 보인다. 거대한 포유동물의 가슴우리같은 형태로. 어두워진다. 밝아진다. 그 가슴의 주인이 숨을 쉬는 듯한 박자로.

질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의 안에 있는가.

(어리석은 자!)

나는 회랑의 뼈들이 희미해질 때까지 걸었다. 한번 회랑에 발을 들이면 어디에 누구와 있든 동시에 회랑에도 있는 것이 된다. 희미해지되 사라지지 않는 뼈들 사이에서 요사이 내 귀에는 불규칙적인 맥동소리가 들려온다. 어리석은, 어리석은, 어리석은 심장소리로부터, 불가능한 도주 상태가 영원히 지속된다.

2017년 12월 30일 토요일

요정

인간 외 지적생명체를 가리키는 용어로서 유인종(類人種, The humanlikes)이라는 명칭은 적절치 않다. 존재양식이 다양한 만큼 외양상 인간과의 유사성이 적은 종도 많고, 종목간 차이는 있으나 대부분 기능면에서 인간보다 우세하기 때문이다. 유의미한 지적이지만 여기에서는 대체어로 추천되는 대화종(對話種, The Conversables)보다 유인종이라는 옛말을 쓰기로 한다. 다소 고정된 <관점>이 있다는 것은 편리한 일이다.

유인종의 대강을 점하고 있는 존재군은 단연 요정이다. 곤충이 종 다양성에 기여하는 바와 같다. 몇 쌍의 다리와 날개, 삼부로 나누어 파악 가능한 몸통 구조 등의 조건 안에서 곤충들의 생김이 각양각색인 것처럼 요정들도 몇 가지 구성요건을 가지고 있다. 모든 벌레를 곤충이라고 하지는 않듯이 모든 유인종을 요정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날개를 가졌는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지 같은 것은 (비록 많은 요정들이 그런 특징을 보이고 있으나) 그 존재가 요정이라는 사실을 담보하지 않는다. 요정을 요정이게 하는 요건들은 시점에 얽혀있다. 다음의 질문들에 긍정으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1. 현재 인간이 아닌가?
2. 과거 인간이었던 이력이 없는가?

(이처럼 분류법이 완전히 인간을 기준으로 하고 있음에도 유인종이라는 명칭이 부적절하다는 지적은 기만적이지 않은가? 개인적인 불만이다.)

장래에 인간이 될 가능성의 유무는 요정과 비-요정(임시로 조어된 개념이기 때문에 하이픈을 넣는다)을 가르는 기준이 아니다. 어떤 요정들은 인간이 된다. 그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적은 까닭은 그들 중 일부가 인간으로 변태할 수 있다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특징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인간과 부분-혹은 전체적으로 유사한 외양을 지녔고, 인간과 소통 가능하면서-’라는 숨은 전제가 있다. 서두에서 말한 유인종/대화종 명칭의 근거가 되는 기준이기도 하다. 다만 요정 연구사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이 부분이 명문화된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아무리 인간에게 우호적일지라도 인간과 비교당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 요정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 추측 가능하다. 그럼에도 이 숨은 전제를 모르고 요정을 대하는 사람은 없다.

이 같은 분류기준이 체계적이고 정확하지는 못하다고 불만을 표하는 사람들에게 폴 버니언이 계통상 구두수선공 요정들의 친척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을 수 없다. 한 쪽은 성냥갑 안에 한 다스가 들어가지만 다른 한 쪽은 새끼발톱 위에 성냥갑 한 다스를 올리고도 남는다. 그런 그들을 달리 무엇으로 나눌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요정들의 외양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은 특징들은 요정과 비-요정을 가를 때보다 요정들을 한층 더 세분하고자 할 때 중요성이 부각된다. 이같은 분류법은 상당히 재미있다. 가령 어떻게 생겼는지보다 먼저 고려되어야 할 육안식별가능성을 두고도 보통 인간의 눈에 보이는지 그렇지 않은지, 그렇지 않은 경우 전문가의 눈으로는 인식 가능한지 그렇지 않은지, 육안식별이 전혀 불가능한 경우 요정들끼리는 볼 수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크기를 기준으로 요정들을 재분류할 때는 자연히 공룡들을 떠올리게 된다. 아무리 크거나 작아봤자 미터 단위 안팎을 오가는 인간들과 달리 요정들은 밀리미터 단위에서 킬로미터 단위까지 다양한 스케일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현 상황에서 최다개체가 분포되어 있는, 달리 말해 양적으로 요정의 대표군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크기는 6:1 스케일이다. 인형 시장에서 가장 인기있는, 가장 다양한 종류의 피규어 생산이 이루어지는 사이즈와 같다. 우연이 아니라면 상상력을 발휘해 볼 만한 공통점이다.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