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부재 기름

전화가 왔었어요 선생님.

조수가 전달한 메모는 인터뷰 요청이었다. 요청이라기보다… 요청처럼 정중한 말을 쓰기에는 너무 자신만만한… 요약하면 내가 자신을 인터뷰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라는 메시지였다. 종이조각 귀퉁이에 ‘부재 기름’이라고 적혀 있었다. 조수는 거기에 동그라미를 두 번 그렸다.

1명 이하 방문이 조건으로 달려 있었기에 혼자서 갔다. 수도권 외곽 베드타운의 아주 조용한 상가 건물의… 그러나 기이하게 시끄러운 지하동의 한 켠이 그가 지정한 약속 장소였다. 여느 지하상가들이 그렇듯 성긴 빗 모양으로 서로 트여있는 구조였는데 그의 방만이 사방이 막혀 있었고 창문도 없었다. 문을 열자 문을 닮은 빛의 자국과 함께 내 그림자가 방 안으로 넘어졌다.

그는 불 꺼진 방 안에 혼자 앉아 있었다(관심을 둘 사람이 있을까 하여 부연하자면 그는 평범한 접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불이 꺼져 있는 거야 별일 아니었지만 앉아 있는 위치(관심을 둘 사람은 없겠지만 내가 특별히 감정적 동요를 느꼈기 때문에 부연하자면 문을 기준으로 방을 가상의 사분면으로 나누었을 때 삼사분면 가운데였다)가 너무 신경에 거슬려서 참기 힘들었다.

박물학자인가?
그렇습니다.

그는 무릎에 양손을 얹고 단정하게 앉은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열린 문으로 새어든 빛은 그의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을 뿐이었지만 골상조차 평범한… 평범한 인간이었다.

녹음해도 되겠습니까?
기계를 쓸 만큼 긴 내용은 아니다.
‘부재 기름’ 말이지요. 부재로부터 기름을 짜낸다는 말인가요?

내가 이해한 대로라면 세계 에너지난도 해결될 텐데, 또는 놀라운 향신료의 발견일 텐데, 그런 기대 아닌 기대를 하면서 물었다.

저기부터 여기까지가 나의 부재라는 말이다.

그는 방의 북동쪽 모서리와 자신의 무릎을 차례로 가리켰다.

부재를 기른다는 말이었군요.

조수의 메모 실력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어 부재不在가 공간空間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알려주려고 나를 여기까지 부른 것인가에… 이런 단어를 쓰고 싶지는 않았지만… 짜증을 참기 힘들었다.

놀라운 발견이군요. 선생님의 말씀대로라면 이동하는 모든 존재가 부재를 기르고 있는 셈이고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또한 부재가 존재하고 있다는 말씀이고요… 실로 대단한 통찰이십니다.

그는 조용히 의자를 옮겼다. 녹음기를 켰다면 내 한숨소리가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의 부-재가 공-간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과 다르게 나의 시-간은 실제로 가치를 가지고 있는데 겨우 이따위 이야기를 하려고 (심지어 내가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는 협박 같은 말까지 하면서) 인터뷰를 ‘요청’했단 말이지.

나의 부재는 점점 더 빠르게 커져가고 있어…

그는 다시 한번 의자를 옮겼다. 그다지 큰 방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무릎은 이제 거의 남서쪽 모서리에 닿을 정도였다. 닿을 정도가 아니라 닿아 있었다. 닿아 있는 게 아니라 벽에 들어가 있었다. 무릎만이 아니라 허벅지까지, 그 위에 얹은 손과 팔꿈치까지, 한쪽 어깨와 조금 틀어 나를 향하고 있던 얼굴의 반이 차례로, 조금씩 빠르게, 벽 안으로 녹아들고 있었다. 조금 후에 그는 흔적 없이 부재하게 되었다. 완벽한 부재를 길러냈다.

역시 이런 단어를 쓰고 싶지는 않지만 짜증 나는 사실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내가 평소 싫어하던 것처럼 인터뷰이보다 말을 많이 하는 인터뷰어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말이 옳았다는 것이다. 그의 부재 기름을 목격하지 못했다면 후회했을 것이다. 부재 기름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는 제대로 후회할 수도 없었을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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