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5일 목요일

가장 중요한 것

과장을 잘하던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받은 고통을 과장해서 희화화하는 광대였고, 실제로 고통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몸의 한 군데를 못 쓰는 병자이기도 했고, 단순히 그냥 고통스러운 처지에 놓이게 된, 그래서 아무리 과장을 하더라도 과장이 아니게 된, 가련한 여인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이 죽어서 슬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거기에 깃들게 된, 그 사람은 나의 유년 시절의 엄마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이 죽어서 슬펐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병원에 가서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되었고, 치료를 거부한 채 자택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작용했을까요. 그 이유를 난 잘 알 수가 없지만 죽음이 가까워져 오면서 그가 느꼈을 고통이 짐작이 됩니다. 난 묘를 관리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인지 타인의 많은 죽음들을 겪었습니다. 그중에서 슬프지 않은 죽음이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두 누군가가 죽었거나 죽는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리기 바빴죠. 나는 그러한 죽음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오늘, 이 슬픈 날에 나는 또 한 가지 슬픈 일을 겪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내 기억입니다. 학창 시절, 나를 가르쳐 주셨던 은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어느 날, 슬픔을 겪게 됩니다. 그것은 그분을 가르쳐 주셨던 은사님의 죽음입니다. 그 죽음은 은사님의 은사님을 죽음으로 인도했으며, 꼭 지금의 저처럼 그 은사님을 잠시간의 슬픔으로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그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잠시 말이 없던 그 순간을 기억합니다. 나는 그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고통스럽고 또한 슬픕니다. 둘 중에 어느 것이 우위인가 하면, 슬픔의 쪽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고통 또한 쉽게 지워 없애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고통 또한 나의 소중한 감정이니까요. 과장을 잘하던 나의 엄마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자기가 받는 고통을 다른 것으로 비유하지 말라던 분. 그런 솔직함이 오늘은 떠올라서 더 괴롭습니다.

얼마 전 그런 이의 죽음을 알게 되었고, 나는 그 이후로 슬픔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처음으로 생각이 났던 건, ‘나는 그의 선택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였습니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을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다음으로 생각이 들었던 건, 그분이 한 인간의 엄마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자식과의 거리가 그리 가깝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그와 나 사이의 거리를 애써 먼 것으로 조장해야만 했습니다. 사실대로라면, 죽기 전에도 그분은 이지를 약간 상실한 분이었으니까요. 나는 그 생각으로 내가 느끼는 그의 죽음에 대한 고통과 슬픔, 분노 등을 덜었습니다. 얼마 전 나는 그의 죽음을 접하고, 울었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그리고 그 눈물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제 이야기는 여기서 끝입니다. 네, 곧 단막극이 시작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이름의 단막극이요.


*니콜라이 예브레이노프, <가장 중요한 것>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