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31일 금요일

카페라떼

커피 맛 우유인지 우유 맛 커피인지 분간할 수 없을 카페라떼가 3/4쯤 채워진 잔을 앞에 놓고 나는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어떤 사람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의자 좀 가져가도 될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네,라고 말했다. 그 사람은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곧이어 의자를 가져갔고 그곳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도 전부 카페라떼를 시킨 듯했다. 곧 나는 거기서 눈길을 지웠다. 저쪽을 보면 노트북을 선으로 연결해 충전하고 있는 무리의 사람들이 보인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하면 유모차를 테이블 옆에 붙여 놓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다시 시선을 돌리면 환기 때문에 정문을 열어 놓은 모습이 보인다. 여기까지 추운 공기가 들어온다. 나는 펜촉을 돌리며 3/4쯤 채워진 잔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쩌면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여기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꿈을 잃고 이곳으로 걸어온 것일지도 몰랐다. 저쪽을 보면 공용 주차장이 있고 차들이 꽉꽉 차 있다. 이 카페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카페라떼를 시킨 듯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나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연한 갈색의 음료. 섞지 않으면 밑에 흰 우유 부분이 가라앉아 있다. 사실 이 카페에서는 카페라떼밖에 팔지 않는 것인지도 몰랐다. 한 장소 안에서 모두 같은 음료를 마시고 있다니. 어쩌면 거기에서 피어나는 동질감 같은 게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용무와 상념으로 바쁜 것 같았고 어쩌면 멍청해 보이는 자기만의 웃음을 짓는 사람도 건너편에 있었다. 나는 잔에 채워진 카페라떼를 조금씩 마셨다. 아껴가며 마셨다. 왜냐하면 여기 오래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까 직원에게 음료를 받던 때를 상기했다. “맛있게 드세요.”라고 했는데 나는 그만 대답을 하지 않고 말았다. 시럽을 7번 눌러서 카페라떼에 붓고 난 뒤 나는 이 자리에 앉았다. 내가 이곳을 꿈이라고 생각한 이유 중에 하나는 이곳의 정경이 평범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꿈은 아닐 것이다. 아니겠지. 왜냐하면 나는 하나의 실감과 마주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그것은 권태였다. 나는 이곳에서 어떤 종류의 권태를 느꼈고 그것이 실감 났다. 나는 달콤한 카페라떼를 좋아했다. 내가 마시고 있는 카페라떼에서는 충분한 단맛이 났다. 그것은 연유 라떼라고 하는 것들과 맛이 그리 차이가 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다 같이 카페라떼를 마시고 있는 이 광경 속에서 나와 옆 사람, 옆옆 사람, 옆 사람들과의 차이가 덜어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나나 다른 사람들이나 예전에는 꿈을 꾸곤 했는지도 몰랐다. 요즘에 나는 꿈과 거리를 유지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꿈과 가까웠던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나 다른 사람들이나 지금은 꿈을 잃은 것인지도 몰랐다. 거기에는 이전의 관성이 남아 있고 기록되어 있어서, 지금 멀어졌다고 하더라도 한번 가까웠던 것은 운명의 실이 그것을 매단 채 놓아주지 않고 있다. 내게 있어선 그런 것이 거리이다. 아무리 멀어져도 금방 닿을 수 있고, 가까이 있어도 먼 그런 귀속들. 그런데 난 여기에서 무엇이 그리운 걸지도 몰랐다. 나는 무엇이 그리운 걸까? 왠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거리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한번 가까웠다가 이제 멀어지게 된 것들의 생각이 난 듯했다. 나는 내가 아는 사람들과 일종의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었고 그것은 거미줄과 모양이 엇비슷했다. 거리가 먼 것 같아도 휴대폰과 SNS 등을 통해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 듯했다. 반면에 이곳의 카페라떼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와 거리가 가까운데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볼록 렌즈 너머로 보는 세상이 볼록하게 왜곡되어 있는 것처럼. 나는 그 느낌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러한 느낌이 나를 이 자리에 붙박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것이 내가 느낀 권태의 전말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이동할 수 있으나 이동하기 어려웠고, 꽤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카페라떼는 아직도 정확히 3/4이 잔에 남아 있었다. 어쩌면 내가 이곳에 오래 있으려고 너무 조금씩 홀짝인 것일지도 몰랐고, 나는 여기에서 잘못된 전언을 남기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것도 오목하게, 거리가 가까운데 나에게서 거리가 먼 듯했다. 어쩌면 안경을 안 닦아서인지도 몰랐고, 아니면 지금 내가 두 눈으로 흘리고 있는 눈물이 시야를 가려서인지도 몰랐다. 나는 왠지 눈물이 났다. 나는 이 모든 것이 굉장히 안타깝게 느껴져 울었다. 나는 이 카페라떼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그렇게 울었다. 하나둘씩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고 어쩌면 내가 어릴 적에 꾸던 꿈은 카페에서 이렇게 모르는 사람들과 카페라떼를 마시는 일에 가까운 것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그때의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세계의 곡물창고들 '21

 















2021년 12월 29일 수요일

부랑자 이야기

그의 내력을 설명하자니 길고, 용모에 관해서 눈여겨보자니 간단한 것이었다. 그는 부랑자였다. 땅 아래의 땅이라는 곳에서 올라온. 전신에는 티끌들이 묻은 붕대를 감고 있었으며 이마 아래의 눈은 형형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그는 함께하는 사람이 없이 시내를 걸었다. 혹시 아득히 멀리 닿은 운명의 실이 이 시내를 걷는 사람들 중의 하나와 그를 묶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아무와도 만나려고 하지 않았으며 단순히 걷기만 했다. 지상의 사람들과 아직 접점이 생기지 않은 채로 그는 설족 노인과 마주하게 되었다. 옆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눈빛이 형형한 쥐들이 경계하는 기색을 내보였다. 여기서 인간의 육신을 갖고 있는 것은 사방에 가득한 쥐들의 무리 중에서 그와 노인뿐이었다. 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그대는 가진 게 없군.” “이 붕대뿐이오.”라고 그가 말했다. 그의 붕대 사이사이에는 어디서 묻었는지 모를 흰 가루들이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난 뒤 그 자리에 남는 눈물 자국에서 발견되는 흰 가루들인 것 같았다. “일부러 찾아온다면 이곳에 닿을 수 없소.”라고 노인이 말했다. 그가 대답했다. “정처 없이 걷고 있던 중이었소. 머무를 곳이 마땅치 않은지라.” 그와 노인 사이에 몇 마리의 쥐들이 난입해서 끽끽 하는 울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바닥에 놓인 노인의 손을 타고 어깨 위에 올라와서 귀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았다. 노인이 말했다. “이곳에 머물길 원하시오?” 그가 대답했다. “그렇소. 만약 이곳에 삼주간만 머물게 해준다면 내 붕대를 조금 나눠주겠소.” “그대는 그대가 닿은 땅의 이름을 물어보고자 하지 않는가?” “관심 밖의 일이오.” “이곳은 설주라 하네.” 그 말을 끝으로 노인과 일련의 쥐의 무리들이 빛이 닿지 않는 저편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는 자신의 몸을 뒤덮은 붕대의 끝을 손가락으로 다시 만져보았다. 그 감촉을 확인하려는 듯했다. 그가 온 행성에서 그는 왕자였는데 그 행성의 크기가 작았다. 어느 날 정원에 핀 한 송이의 장미를 눈에 담았고 그는 먼 길을 떠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장미가 시드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해서 다른 행성들에 피어 있는 장미들을 보아왔고 영원히 흐드러지게 피어 있을 것만 같은 권세들의 장미부터 아주 평범한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이는 장미까지 그 모든 것들을(장미에 관해서라면) 눈에 담아왔다. 그러나 그가 있던 행성에서 본 것과 같은 장미는 이후로 보지 못했다. 멀어서 시야가 닿지 않는 저편 어둠으로부터 아까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의 붕대는 귀한 것이오. 우리들이 가진 자원은 값싼 것뿐이라 그대에게 붕대를 받을 수 없소.” 그 말을 끝으로 어둠 속에서는 음성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자조적으로 웃음을 지어야 하는지를 잠깐 고민했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간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부랑자가 된 이후로 그는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사회적인 웃음을 지을 수 없게 된 지가 오래였다. 쥐의 시비들이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그라고 깨끗해지지 않길 원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가는 행성마다 마땅한 교환 자원을 구하기가 어려웠던지라 그러한 일이 마음속 깊이부터 질려가게 되면서 그의 말끔한 의복은 헝겊이 되고 몸에서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으며 점점 사람들이 피했다. 그는 장미로 말미암아 사회적인 고립을 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택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미 그런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는 도중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는데, 그가 고향에서 마지막 교류를 택하길 그만두었던 그 장미가 별로 아름답거나 독특한 장미는 아니었단 것이다. 각종 고생을 하며 그가 알게 된 것은 다만 그 장미가 아주 고유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가 결말을 피했던 행동에서 어쩌면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장미가 너무도 사랑스러웠기에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옆에는 쥐의 시비들이 쥐가 좋아하는 치즈를 담은 접시를 들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단적으로 말해 여기서부터 시작된 이곳 설주라는 곳에서 그가 받은 대접은 결코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설주의 자들은 분명 그들이 가진 자원의 커다란 일부를 떼서 삼 주 동안 그를 정양토록 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가진 붕대의 내력과 이들은 상응하는 데가 있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이것은 그 설주 노인의 종족의 운영 정책과 맞닿은 데가 있어서 그런 것이었다. 얼마 후 고향별로 돌아간 그 부랑자에게서 지구에 있는 설주로 막대한 양의(그가 있는 별은 귀한 광석이 많이 묻혀 있는 별이었다) 치즈로 교환 가능한 자원들이 들어오게 되었으며 그는 샤워를 마치고 나가 시드는 모습을 보길 피했던 그 장미가 있던 자리에 다가섰다. 한결 깨끗해진 몸이었고 누구도 부랑자라 생각하지 않을 만한 정결한 모습이었다. 사람들과의 접촉이 이젠 그리 꺼려지지 않는 듯했다. 그 장미는. 

2021년 12월 26일 일요일

마포 공덕 같은 것

한쪽에는 BAR 오빠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BAR 나쁜 여자가 있다. 교차로의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건너편에 서 있으면 두 가게의 간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이에는 마포 정대포가 있고 문어 골뱅이를 파는 안줏집이 있다. 잘 보이진 않지만 상대적으로 소심해 보이는 Classic Bar 나는...도 있다. 이 간판들이 맞닿아 있는 상황이 꼭 간판들만의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이 앞으로 택시 여러 대가 지나간다. 고급 외제 승용차들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따릉이가 지나간다. 신호등에 파란불이 들어오자 사람들이 일제히 길을 건너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멀리서 구급차 소리가 다가온다. 흐름이 점점 얼어붙었다가 소리가 다 지나가자 다시 활발하게 풀린다. 이 속에서 함께 움직이다보니 드디어 나도 저쪽에 나를 놓고 오기라도 한 듯이 길을 다 건너버렸다. 다음에는 좀 더 늦은 밤에 와 봐야겠다. 안쪽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 물론 들어갔다가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고 싶다.

이사야가 회색 태비라기에

몇 주째 창고 근처를 서성이고 있다. 인적이 드문 곳이다. 대신 조용해서 종종 노트북을 들고 온다. 여기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고 봐야 맞는다. 하릴없이 여기서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검색창에 ‘회색 태비’를 입력해봤다. 쥐잡이 이사야가 회색 태비라고 했었나? 치즈 태비는 많이 들어봤는데 회색 태비는 낯설다. 그러고보니 검은 태비도 흰색 태비도 낯설게 느껴진다. 고등어 태비는 어디서 들어보았다. 온순하고 침착한 캣. 살집 두툼한 무늬 고양이들.

연관 검색어로는 마눌고양이가 있다. 어디에서는 ‘마눌’이 ‘못생긴 귀’라는 뜻이라고 설명하고 또 어디에서는 ‘마눌’이 ‘작은’이라는 뜻의 몽골어라고 설명한다. 이 중 무엇이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설명들을 기계적으로 합하면 마눌고양이는 못생긴 귀를 가진 작은 고양이다. 마눌고양이의 사진을 보면 이 설명이 적절한 것 같다. 또 얼굴이 둥글고 털북숭이다. 그러나 이 외양이 고양이의 남모르는 사연과 생활양식까지 말해주진 않는다.

마눌고양이는 몽골 등 중앙아시아에 점점이 분포해 서식하는 멸종위기종이다. 보통 혼자서 생활하며 어둑해지는 저녁에 가장 활발히 활동한다. 아주 한밤중을 선호하진 않는 모양이다. 야생에서 살다보니 전염병 등 위험에 수시로 노출되어 수명은 5~6년 정도로 짧다. 단명하는 고양이.

이것의 연관 검색어로는 ‘manul cat price’ ‘마눌고양이 분양’ 등이 있다. 마눌고양이의 다른 이름으로는 ‘마눌들고양이’가 있다. 즉 들에 사는 고양이다. 그런데 또 다른 연관 검색어로는 ‘마눌고양이 길들이는 법’ ‘마눌고양이 기르는 법’ 등이 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블로그에 올렸다. 평소 한두 명 정도 드나드는 한적한 블로그인데 요며칠 조회수가 늘었다. 유입 통계를 확인해보니 83% 정도가 ‘마눌고양이 분양’을 검색해 들어오고 있다. 이런 의도로 쓴 글이 아니기에 비공개로 돌릴까 했지만 오히려 그냥 두었다. 이 글은 쥐잡이 이사야가 회색 태비라기에 쓰기 시작했다.

이후로 며칠째 여전히 창고 근처를 서성이는데 아직도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꼭 누군가 만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일이 벌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아무렇지 않다. 분명 처음 와본 곳인데 자꾸 오다보니 언젠가 와봤던 곳 같기도 하다. 요옹요옹. 이사야의 울음소리는 이곳에서 들리는 다른 소리들과 구분하기 쉽다. 다른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2021년 12월 23일 목요일

왜냐하면 나도 이유가 있기에


준짱: 어느 날은 해남으로 출장을 갔어. 거기가 바닷가 마을이거든요? 식당에 갔는데 모든 게 해산물인 거예요. 게다가 이제 그 식당 주인분이, 나 의원님 지지자잖아~ 이러시면서 내 옆자리에 딱 앉으셨어. 그리고 어머, 언니는 너무 말랐다, 하면서 내 숟가락 위에 게장이랑 생선을 다 얹어주시는 거야. 이거 다 비울 때까지 나 안 일어날 거라면서ㅋㅋㅋㅋㅋㅋ

유리: 그게 또 사랑해서 주는 거잖아요ㅋㅋㅋㅋ

담: 그러니까요. 안 먹으면 상처를 받으실 수 있어요.

준짱: 그리고 이, 지지자분에게 비건을 설명하기가… 굉장히 어려워.

담: 그쵸.

유리: 한 사람이 자신이 속한 사회의 조건 속에서 일궈온 생업을 뭔가 납작한 방식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오해될 위험에 처해 있는 이런 상황에서는 특히 길고 구구절절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요. (이 문장부터가 벌써 길고 구구절절해짐)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준짱 : 그래서 처음에는 제가 채식을 해서요, 이렇게 말씀드렸더니, 해산물도 안 먹어? 이거 먹어 봐. 하면서 문어나 낙지가 섞여 있는 해초 무침, 그런 음식을 권하시고.

담: 친구들이랑 주로 소주 마실 때 가는 식당이 있는데요. 저랑 한 친구랑 비건이 된 후에, 오랜만에 거기 가서 두부김치를 시켰어요. 원래는 김치를 돼지고기랑 같이 볶아주시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이모한테 고기 빼고 볶아달라고 그랬죠. 그랬더니 이모가ㅋㅋㅋㅋㅋㅋㅋ접시를 가져오시면서 “소시지로 넣었어~많이 넣었어~”ㅋㅋㅋㅋㅋㅋㅋㅋ

유리 : 맞아요. 우리 이모님들이 햄이 고기라는 생각을 전혀 안 하시죠.

담 : 너무 자랑스러워하셨어.

유리 : 잘해주려고 한 거니까. 인간 사회에서는 서로에게 고기를 먹이고 밥을 먹이는 게 애정의 표현인 거, 감사한 일이라는 걸 우리도 다 아니까요.

준짱 : 그걸 안 먹고 그 마음을 거절하는 게… 만약 거기 있던 게 나 혼자면, 혼자 그 식당에 간 거면 그냥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죄송해요. 제가 정말 못 먹어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죠. 하지만 그날은 내가 보좌진으로 있는 자리였잖아요. 그래서 먹었어요.

담: 비건 실천이 제일 어려울 때가 지역 출장 갈 때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준짱: 집에서는 그렇게 안 힘들어요. 낫또 먹으면 돼서. 근데 출장 가면 주로 도시락이 나오거든요. 당연히 비건 아니고. 그럼 도시락에 담긴 닭알말이를 두고 고민을 하는 거죠. 차 안에서 이동 중에 식사할 때가 잦은데 맨밥만 먹어서는 힘이 안 날 거 같을 때가 있어요. 바쁨에 쫓기고, 효율에 치여서 나의 가치를 배반할 때가 슬퍼요.

유리: 공감. 출장 가면 내가 비건지향인 줄 모르는 스태프분이 제육볶음 도시락 이런 걸 주세요. 고기가 이미 있잖아. 거기서 내가 김이랑 밥만 먹으면 고기가 버려지잖아요.

준짱: 맞아.

담: 그거 잘 생각해봐야 돼.

예인: 저는 언니랑 같이 사는데, 언니가 논비건이거든요. 언니가 식사하고 남은 음식을 보면 ‘저걸 저대로 버려도 되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잔반 처리하듯이 먹게 되는 거예요.

준짱: 그쵸. 다 나름의 딜레마가 있어요.
얼마 전에는 출장을 갔어요. 일정표를 봤는데 점심 먹을 시간이 따로 없더라고요? 알고 보니까 달리는 차 안에서 준비해 둔 도시락을 먹기로 예정되어 있었어요. 내가 주문을 했으면 고기를 빼주시라 이런 설명을 했을 텐데. 그 도시락은 다른 활동가분이 직접 시켜주신 도시락인 거야. 또 달리는 자동차에서 도시락 먹을 때는 남기면 안 되거든요. 국물을 처리할 방법이 없어요. 그냥 다 먹는 거죠.
그럴 때 드는 어떤.... 어렵죠. 왜냐하면 나도…….

유리: 왜냐하면 나도 이유가 있어서 이러는 거잖아요.

담: 어느 날 기분이 괜히 그래져서 비건한 건 아니죠 ㅋㅋㅋㅋㅋㅋ

유리: <이유>를 모르는 분들이 이 이야기를 읽으면 뭐가 문제지? 이렇게 생각하실 것 같은데 다 이유가 있어서 하는 채식이기 때문에. 각주 꼭 읽어주세요.


“한 달에 한 번
한 분의 손님을 엄살원에 모십니다.
비건 실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을 초대해
비건 만찬을 차려드려요.
대신 손님께선 제게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식탁을 사이에 두고 당신과 나눈 대화를 기록하고 싶습니다.”

― 월간 비건 레시피&인터뷰 웹진 『엄살원』 3화,
준짱의 참지 않는 국회생활 下편」 중

2021년 12월 20일 월요일

감성 속세 에세이

삶을 동시에 두 가지 목표에 헌정할 수는 없다. 단독자인 동시에 범부대중의 일원으로 살겠다는 것은 모순이다. 애초에 이것은 선택의 문제조차 아니다. 먹고사는 문제에 허덕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분수를 깨닫는다. 직업은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먹어치운다. 무의미한 사무에 몰두할 때면 확실히 바보가 되어가는 기분이다. 이제 대충 노동이 어떤 것인지 알겠다. 끝없이 되풀이되는 노동은 점차 존재를 사라지게 만드는 테크닉이다. 희미해지고 희미해지다 보면 말 그대로 대중, 모래알, 장삼이사 따위 텅 빈 기표들만이 곁에 남는다. 우리의 진정한 이름은 바로 이런 것들뿐이다. 노동은 우리에게서 한 줌의 색채마저 앗아간다. 존재를 박탈당한 자들은 투명한 유령이 되어 속세를 배회한다.
내가 그저 생업이라고 부르는 것, 단지 먹고살기 위해 몸을 담그고 있을 뿐이라고 여기는 그것이, 그나마 세간에서는 유일하게 나를 대표해준다. 그 당연한 사실을 여지껏 모르는 척 해왔다. 하지만 이조차도 영원히 내 존재를 담보해주지는 못한다. 차라리 자기기술을 한껏 토해내고 나면, 잠시나마 희미해짐의 속도를 늦춘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그것이 순전한 기분일 뿐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글쓰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덧없는 자기환상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허탕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주기적으로 자기환상에 대한 환멸의 시간이 찾아온다. 그럴 때면 차라리 모래알 속에서 영영 사라져버리는 방법을, 비존재나 다름없게 느껴지는 저 광활함 속에 자신을 내어주고도 긍정할 수 있는 태도를 터득하고 싶어진다. 떠밀리듯 범부대중으로 태어났고, 떠밀리듯 그것을 수행해야 하지만, 어찌 되었건 이와 같이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삶의 행로다. 변변한 이름조차 없이 등 떠밀리며 여기까지 온 것은 사실이지만, 걸어온 발걸음 중 무엇도 되물리고 싶진 않다. 이곳에 남기를 자처할 것이다. 사라짐을 견디면서. 사라짐과 싸우면서. 그리고 완전한 사라짐을 반갑게 맞아들이면서.

“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
“바다에 던져지면 되느니…”

2021년 12월 9일 목요일

체념의 좌파

소위 ‘오피스 하이퍼리얼리즘’이 흥행하는 양상을 보고 있으면 대충 이런 물음이 떠오른다. <화이트칼라는 어떻게 리얼리즘을 탈취했는가?> 이제 그런 식의 리얼리티야말로 우리의 흥미를 끌고 몰입시킨다. 우리가 보통 그렇게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블루칼라는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비국민화되고 있다(외국인 노동자와 기계 따위). 외국인은 국가가 그 권리를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시민이 아니다. 그렇다면 로보트는 더더욱 아니겠지요?(아이로봇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들이 우리의 공론장에서 갖는 목소리는 거의 없는 수준이나 다름없다. 글로벌/자동화된 자본주의는 프롤레타리아라는 위험을 그런 식으로 축출한다. 그들의 존재에 대한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언어부터 축출한다. 그리고 리얼리즘이라는 남겨진 어떤 전리품...
대충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라는 소시민적 존재를 떠올린다. 나는 관료제적인 것의 실효성을 믿지 않는다. 누가 믿고 싶겠습니까. 본격 관료들조차도 그런 거 안 삽니다. 행정주의가 유발하는 너무 많은 불필요한 과잉들에 다들 치이며 산다. 그러나 일터에서라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보통의 관료가 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요즘은 관료로서의 적성을 발굴하는 재미가 쏠쏠하기까지 하다. 사람이 해까닥하는 메커니즘이 바로 이런 거구나. 니가 선택한 관료제다. 그야말로 악으로 깡으로 버텼습니다. 매너리즘 한 봉다리에 관료정신을 배웠고. 피어오르는 무사안일주의와 더불어 그만 꼴까닥... 흐흐흐. 큭큭큭.
마크 피셔가 말한다. “쾌활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모종의 비판적 성찰성을 거의 완전히 결여하고 이 관리자가 그랬듯 관료 기관의 모든 지침에 냉소적으로 순응할 수 있을 때 뿐이다. 물론 순응할 때 보이는 그 냉소주의가 핵심이다. 가령 그는 감사 절차를 아주 성실하게 이행하지만 자신이 그것을 ‘실제로는 믿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댐으로써 60년대 스타일의 자유주의적 자기 이미지를 보존한다.” 그런 식으로 냉소하면서 나는 이 현실 저 현실을 옮겨다니는 중이다. 그러나 그 모든 심적 반란에도 불구하고, 외적으로 나는 마치 그러한 절차들을 믿는다는 듯이 행동(해야)한다. 그 대가로 나는 최소 소시민적 생활수준을 보장받는다. 그러한 수준에 미달하는 경제적 생존을 상상하는 것은 확실히 공포스럽다...
그야말로 공포에 길들여진 똥개가 되어버렸구나. 뭐요. 기만적이라구예? 똥개로 안 살아도 되는 니들이야말로 기만적이다(똥개 동지분이셨다면 죄송ㅎㅎ). 이렇듯 좌파의 병리 현상을 온몸으로 증빙하고 있지만. 섣부른 낙관엔딩 같은 것은 절대로 구사하고 싶지 않다. 응애 아기좌파 혁명줘. 그런 식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안 줍니다. 일전에 돗자리 말고 본진에다가 체념으로부터 출발하는 철학이 좋다고 썼다. 체념이야말로 우리 똥개들이고 고통받는 중생이며 범박한 민중 그 자체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나는 체념의 좌파 같은 것을 자처하고 싶다. 체념하는 좌파 아니구요. 체념으로부터 출발하는 좌파입니다. 뭐요. 악질 반동이라구예? 니맘만 있고 내맘은 없냐???

꽈배기책방

처음엔 그냥 평범한 출판사였다. 출판 사업이 잘 풀리지 않자 그럼 서점도 같이 하면 괜찮지 않겠느냐 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 출판사는 몇 %인데 서점은 몇 %를 떼 가고 어쩌고... 그릇된 해결 방안에 알맞게 상황은 두 배로 안 좋아졌다. 그러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동료 한 명이 알바 경험을 살려 커피를 팔기 시작했는데 거기서 반응이 왔다. 그런데 기왕 시작한 거 커피만 팔기는 아쉽지 않냐, 그러면 뭐가 좋냐, 꽈배기 어떠냐, 그러다 된 것이 ‘꽈배기책방’이다. 원래 출판사 이름이 뭐였는지는 기억도 안 난다. 그걸로 운이 트였는지 그 동네 흐름이 그랬는지 나름 지역 15대 이색 명물 축에 끼게 되었다. 이걸 읽고 행여나 커피나 꽈배기를 만만하게 생각하지는 않길 바란다. 여기엔 다 쓸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있었고... 결정적으로는 건물이 대표 거였다. 개새끼... 여하간 그때까지 우린 여전히 책을 만들었고, 그걸 매대에 놓기도 했고, 커피와 꽈배기를 함께 팔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냐 싶겠지만 세상엔 그런 일도 있다(마법 같은 문장). 손님들이 꽈배기 먹던 손으로 들춰 본 책들은 당연히 팔 수 없었다. 그래도 뭐 어떤가? 어쨌건 들춰는 봤다는 게 기적이었다. 우리는 즐겁게, 책을 찢어 꽈배기 봉투를 만들었다. 결론적으로 ‘꽈배기 판 돈으로 책 만드는’ 구조가 겨우 정착됐는데, 몇 달 전부터 대표 녀석이 이제 출판은 접겠다고 말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것도 이해하지 못할 거 없지. 우리는 집에서 가까워 좋은 이곳에, 최소한 지금 월급 그대로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붙어 있고자, 대표에게 다양한 방안을 내놓았다. 계간으로 꽈배기 전문지를 만들면 어떻겠느냐부터 해서...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이제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대표는 항상 그랬듯 『계간 꽈배기』에도 관심을 보였다. 계간 꽈배기라는 백지 위에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신이 나서 마구 펼쳐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이렇게 또 한 번의 위기를 넘겼다. 대표가 즈란꽈배기를 팔자고 했을 땐 정말 쉽지 않았다... 우리가 이 다음 위기도 헤쳐낼 수 있길 바란다. 사실 지금도 꿈같고 믿을 수가 없다. 이것이 정말 우리가 겪고 있는 일이 맞는가? 아니면 꼬여버린 시간선 속에서 과거나 미래의 일을 당겨 겪는 건가?

2021년 12월 4일 토요일

성골 프롤레타리아를 찾아서

여러분과 나 자신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면 기분이 급격히 악화된다. 그러면 또다시 뭔가 쓰는 것 말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재차 이러고 있다. 이건 뭐 내가 일간 이슬아도 아니고. 국수 뽑아내듯이 뭘 자꾸 뽑아내요? 에휴 하여튼. 곡물창고에 돗자리 깔면서 특정한 주제를 생각해둔 것은 아니지만. 어째서인지 노동 에세이를 써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것도 근무시간 내에서라는 말도 안 되는 제약 하에서. 오늘은 주말이다. 출근 안 하는 날이라고 해서 노동자가 노동자 말고 다른 것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쓴다.
하지만 쁘띠 부르주아로 추정되는 작자가 징징거리는 이야기 같은 것을 누가 읽고 싶겠는가. 나조차도 별로 내키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배부른 소리 따위의 꼬리표를 모면하기 어렵다. 그러나 작금의 상황에서는 누가 무슨 말을 하건 그렇게 되기 십상이다. 말할 자격을 갖춘 자 도대체 어디에 계신가. 그러니까 말하자면... 성골 프롤레타리아를 찾아서. 아니 사실 별로 찾고 싶지 않다. 나야말로 출신성분 좋은 혁명집안 출신이다. 가까운 가계도를 뒤져봐도 아주 그냥 농부랑 노동자 말고는 뭐가 안 나와요. 우리 세대에 오면서 일부 대학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나를 비롯한 일부 사촌들 때문에 우리 집안의 순수성이 망가졌구나. 언제 한번 날 잡고 자아비판 씨게 때리겄습니다.
프롤레타리아 얘기 나온 김에 말 좀만 더 얹어보자. <프롤레타리아의 밤>에서 랑시에르는 소위 ‘평민 철학자’라고 불리는 루이 가브리엘 고니(Louis Gabriel Gauny)에게 관심을 갖는다. 노동자는 무엇에 그토록 분노하고 절망하는가. 고니에 따르면 그것은 다름아닌 시간의 박탈이다. “시간은 나에게 속하지 않는다.” 그에겐 노동 이외의 다른 무언가에 몰두할, 달리 말해 빈둥거릴 시간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 종류의 시간은 오로지 부르지아지에게 속한다. (그렇다면 고니는 도대체 어떻게 글을 쓰고 남겼는가. 밤잠을 유예시켜 시간을 마련하는 방법이 유일하게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느 정도 빈둥댈 수 있는 시간을 가지고 살아간다. 확실히 과거에 비하자면 나은 처지인 것이다. 심지어는 정통 노동계급인줄 알았던 내 부모 및 일가친척들도 맨날 텔레비전 보면서 빈둥거린다. 그렇다면 이제 다함께 (최소한) 쁘띠 부르주아라는 정체성을 확인받고 만족하면 되는 문제인가. 나는 별로 그러고 싶지 않다. 쁘띠 부르주아 그렇게 하고 싶으면 니들끼리 해라. 이를테면 이러한 상황들이야말로 나를 당혹스럽게 하고 불유쾌하게 만든다. 끝없는 자격 확인 절차라는 머저리 같은 장난질. 그럼 뭐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아주 그냥 옛날 운동하시던 분들처럼 공장으로 침투합니까? 아니면 이럴 바에 차라리 룸펜 인텔리겐치아로 눌러앉아서 돈 없다고 맨날 징징거려요? 말하자면 나는 여러분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 싶은 것이다. 성골 프롤레타리아 따위는 찾아다니지 맙시다. 차라리 히로빈 찾아다니는 마크 초딩이 더 영양가 있을 듯. 달리 말해, 이제 우리는 모두 배가 불러서 배부른 소리밖에 못한다고 인정을 해야 뭐라도 한다. 하층민의 걱정거리가 배고픔이 아닌 비만이 될 수 있다는 당연한 이야기를 굳이 덧붙여야 하겠습니까?

2021년 12월 3일 금요일

사골 끓이기 왜케 힘듦

작성해야 하는 문서가 있는데 글이 안 풀려서 뻘글이나 쓴다. 문서 작성에 할당하는 시간이 10이라면 보통 9는 고통받으면서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이다. 님은 로동을 통해 무엇을 생산하시는지? 에 저는 말하자면 창작의 고통을 생산하는디요 하여튼 그러고 있으면 사업주가 저한테 돈을 줍니다. 벌써부터 말문이 막혀가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구나. 이래서 글을 위한 글은 쓰면 안 된다. 님들 저가 뻘글만 쓰면서 헛소리만 주구장창 하는 것 같아도 실상은 그 뭐시기냐... 아디다스 뱅크입니다. 뻘글 하나 제작하기 위해서 불철주야 아이템 구상하고 농담 궁리하고. 님들은 아무것도 몰라!!!(흑흑) 예 뭐 그렇습니다... 나는 레퍼런스 딱딱하게 읊어대는 거 진짜 싫어하긴 하는데. 그럼에도 손에 아무것도 쥐지 않은 채로는 역시 잘 말하기 어렵다. 사무실에 쥘 만한 것이 뭐가 있겠는가. 일단 마우스가 있고요. 볼펜이 있고요. 업무수첩이 있습니다... 아이고 삭막해서 사람 못산다. 돌잡이 때부터 어른들이 뭐든 쥐어보라고 난리부르스를 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구나.
그런데 사실 레퍼런스 없이 제일 힘든 것이 바로 업무다. 선례 없는 업무가 떨어졌을 때 그 더러운 느낌 아시는 분들은 아실 텐데. 작년꺼 재작년꺼 찾아보고 아 다르고 어 다르고 하여튼 어?!! 해서 갖다바치는 게 정석이다. 그런데 레거시가 하나도 없고 님한테 주어진 게 그저 hwp의 영롱한 <빈 문서 1>뿐이라고 생각해봅시다. 그야말로 사람 미치는 거예요. 그만큼 페이퍼워크에 있어서 레퍼런스의 위상은 절대적이다. 저가 전문용어로도 하나 만들어봤는데요. 네 글자로 컴팩트하게 절대참조...(절대적으로 참조하라는 깊은 뜻) 레거시라는 게 무슨 먼지 쌓인 구석탱이의 골동품이 아니라. 회계연도를 기점으로 자기갱신을 되풀이하는 영구 기관이나 마찬가지다. 사람은 그 과정에 끼어들어서 아 다르고 어 다르게만 손봐줍니다. 비유하자면 보고서님 네일아트 해주시는 분 정도밖에 안 돼요(네일아트 종사자분들 사랑합니다). 그런데 큰 틀에서는 동일하되 디테일만 살짝씩 바꿔주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몇십 년째 똑같은 사골을 쓰고 있는데 매번 새로운 포인트를 주래요. 그래서 포인트 주면 예전 같은 맛이 안 난다고 화냅니다. 저보고 뭐 어쩌라는 건지???

2021년 12월 2일 목요일

~같은 것

아름다운 문장을 보면 사람들은 시 같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는 시를 잘 모른다고 한다. 

나는 이 말을 여러 번 들었고 매번 무방비 상태에서 들었다. 아마 사람들에게 시 같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물어본다면 잘 모르겠다고 답할 것 같다. 아니면 그냥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여기에 어떤 긴장이 숨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 

나는 사진을 찍을 줄 알지만 이상하게도 내가 찍은 거의 모든 사진의 초점은 미묘하게 빗나가 있다. 자동 흔들림 방지 기능을 켜 놓아도 마찬가지다. 흔들린 사진은 흔들린 대로 좋다. 이미지가 흔들리면 앉아 있던 사람이 점프를 하고 걷고 있던 사람이 날아간다. 흔들린 사진 속에서 사람들은 잘 고정되지 않는다. 액체 비슷한 것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거나 기체 비슷한 것이 되어 떠다니고 있다. 더구나 배경 속에 그대로 있을 것만 같은 화분조차 깨지지 않은 채로 일그러져 있다. 한줌의 흙도 흘리지 않은 채 변형되어 있다. 그 안에서 모양이 달라진 식물이 살아 있을 뿐이다. 
이런 일과 비슷할까? 

자주 사람들은 시를 잘 모르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기는 시를 찾아 읽지 않는다고 한다. 대신 소설이나 만화나 그 밖의 것을 읽는다고 한다. 영화나 드라마를 본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름다운 문장을 보면 시 같다고 한다. 사람들은 정말 그렇다.

2021년 12월 1일 수요일

낡은 마법사의 꿈 (2)

의자 위에는 깔개가 덮여 있다. 벽난로를 앞에 두고 나는 손으로 가위나 보의 모양을 만들며 장난을 했다. 벽난로 속에서는 장작이 불타 없어지고 있다. 나는 그 앞에서 실내의 어떤 권태를 느꼈다. 내 다리가 온기로 인해 따듯해지고 있었다. 나는 거의 더웠다. 이것은 과장된 것이고 나는 집 바깥의 추위와 유리되는 따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앉아서 졸며 꿈을 꾸고 있었다. 나는 꿈속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멀리에 있는 교실에서 한 인물이 가만히 앉아 빈 교실 안에 있는 정경들을 눈에 담았다. 나는 깨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이것이 어느 정도 꿈의 안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미망이 나는 즐거웠다. 꿈은 단순히 소비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다분히 앞날의 일을 의식하는, 그런 예언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 될 수도 있다. 꿈은 평소에 해볼 수 없는 생각들을 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권위적이다. 그것은 왕의 침소에 나란히 진열되어 있는 도자기들이나, 벽면에 걸려 있는 그림들을 보고 있는 것처럼 그 앞으로 손을 내뻗을 수는 있으나 그 손은 닿지 않는다. 벽난로에도 손을 넣어볼 수 없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이 잠시 간의 조응된 꿈에서 깨어났다. 나는 일어나서 주전자 안에 있는 물을 컵에 부었다. 김이 나고 있었다. 고양이 몇 마리들이 이쪽으로 다가와 한껏 몸을 늘리고 있길래 나는 다시 꿈에서 깼다. 나는 고양이들을 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벽난로 안에선 장작들이 불타 없어지고 있었고 나는 자기가 태어난 도시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돌아온, 사람 말을 배운 쥐에 대한 생각을 했다. 쥐 곁에는 동료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람이었다. 쥐와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만났고 서로 동료가 되었을까? 나는 의자 위에 덮여 있는 깔개를 치우고 그 위에 물컵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저쪽으로 가서 믹스 커피를 가져와 그 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런 양이 왠지 나는 기분 좋았다. 가루들이 소용돌이를 그리며 액체 안으로 섞여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컵 안에서 숟가락을 빼낸 뒤 그것을 입으로 물었다. 실내가 조금 건조한 것 같았다. 나는 방의 중앙으로 가서 가습기를 틀었다. 수증기에서는 아무런 냄새도 느껴지지 않는다. 수증기가 뿜어 나오는 정경을 보면서 나는 조용히 앞으로의 대한 일을 생각했다. 이 집에는 나 이외에도 몇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오늘은 때가 맞아 이 공용 거실에 앉아 졸고 있기까지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올라가거나 내려오는데, 나는 그때마다 이 공동 거실 안에 자리하고 있거나 않기도 하다. 나는 그들과 안면을 나누지 않은 사이였다. 대충 그들이 내려오는 시각을 잰 뒤에 나는 이 공동 거실에 나와 있곤 했던 것이다. 마치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에서 그저 마음에 들기만 한 '틀린' 쪽을 무수하게 고르며 나아가는 것처럼. 이 미궁 끝에는 괴물이 살고 있을까? 나는 틀린 쪽만 제법 골라왔으니, 그런 괴물은 없을 법도 했다. 대신에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단지 중앙이 있는 의자 외에는. 그 의자 위에 앉으면 그것으로 게임이 끝나는 것이었다. 하나의 엔딩으로서. 그러나 잘 만들어지지 못한 그런 엔딩. 손을 많이 거친 게임은 아니라 엔딩도 이렇다 할 만하게 꾸며져 있지 않다. 그저 조용할 뿐이다. 나는 생각에서 벗어나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이러한 게임에 대한 생각은 실내의 권태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아직도 은은한 온기가 한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넘어가는 일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일종의 슬픔을 느꼈다. 이 슬픔은 내가 느끼고 있기 전까진 그 존재가 위태롭고 불확실한 것이었어서 시인들이 쓴 시 중에서 중요하지 않은 문장들이 지닌 지위와 비슷한 데가 있었다. 곧 크리스마스가 올 것이다. 카페에 가 보면 계속해서 캐롤이 흘러나올 것이고. 인형들을 선반 위에 올려놓아 그 현실, 방 안의 세계를 공고히 하는 것처럼 12월의 막바지로 가다 보면 그날이 기다리고 있다. 그 이틀의 전야제는(한 날은 전야제이고, 한 날은 예수가 태어났다고 하는 날이다) 12월 23일이고, 그날의 전야제는 12월 22일이고, 이렇게 해서 계속 전야제가 길어진다. 어쩌면 12월의 전체가.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나도 그러한 사람들의 장소와 멀지 않은 곳에 혼자 우둔히 앉아 있었다. 어쩌면 고양이 몇 마리들이 이쪽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고, 고양이는 뛰어올라 내 미망이 장난감이 된 것처럼 나를 그 의자 위에 붙박혀 있게 할 것이다. 나는 혼자 앉아서 소원을 빈다. 부디 그 예수가 태어나지 말기를. 그로 인해 이쪽으로 다가오지 못하고 늘어지는 전야제들이 이쪽을 호도하지 못할 미망과 같게 해달라고. 그러나 이것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소원이다. 사람들은 12월의 이틀간을 손꼽아 기다리며 실내에 트리 나무 장식을 우두커니 서 있게 한다. 나는 실내의 어떤 조짐도 느껴지질 않았고, 내 두 다리는 끝없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더운 공기는 벽난로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었고 나는 이것의 엔딩을 보길 바랐다. 지금 나는 앉아서 일종의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었고 꿈은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이 꾸는 것이었다. 나는 그 다음 번에도 고양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고양이들은 안면이 있든 있지 않든 이쪽으로 뛰어 올라와 겹겹이 내가 꾸고 있는 꿈을 끝냈다. 소프라노의 음성으로 된 회선곡이 흘러나오며 나는 벽난로 안으로 내 발을 빠뜨리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 사이 고양이들은 나에게로 뛰어올라 온 일이 없었던 것처럼 한껏 몸을 편 채로 걷고 있었다. 저쪽에서 저쪽으로. 마치 그곳으로 걸어가면 그 두 날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고양이가 쥐 잡고 놀듯이 성탄은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야제들로 지루한 야간 기차 안에 타고 있는 것 같았다. 고향을 떠난다는 마음에 나는 왠지 즐거웠다. 그 고향은 내 생각 속에서 벽난로 안에 있는 장작들처럼 몸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한 것이 회선곡이라면, 나는 지금 아무도 내려오지 않는 이 실내 안에서 마법을 쓰고 있는 것이노라. 카드 스프레드와 별점들. 그리고 배움. 나는 이러한 것들의 꿈을 꾸고 있었다. 레버를 당겨 슬롯머신을 작동시키듯이 어떤 매력으로써 내게 그런 꿈을 강요한 이가 있었다. 그 사람이 내게 별점 보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그가 몹시 그립다. 그 기술이 그리운 건지 성탄의 전야제가 천천히 내려오는 작은 마을이 그리운 건지 혹은 내가 그 사람을 사랑했는지 알지 못하고 나는 다시 미망 속으로 잠겨 들고 있었다. 계단 위에서 다시금 누군가 이곳으로 내려왔다. 나의 낡고 오래된 꿈을 끝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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