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20일 월요일

감성 속세 에세이

삶을 동시에 두 가지 목표에 헌정할 수는 없다. 단독자인 동시에 범부대중의 일원으로 살겠다는 것은 모순이다. 애초에 이것은 선택의 문제조차 아니다. 먹고사는 문제에 허덕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분수를 깨닫는다. 직업은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먹어치운다. 무의미한 사무에 몰두할 때면 확실히 바보가 되어가는 기분이다. 이제 대충 노동이 어떤 것인지 알겠다. 끝없이 되풀이되는 노동은 점차 존재를 사라지게 만드는 테크닉이다. 희미해지고 희미해지다 보면 말 그대로 대중, 모래알, 장삼이사 따위 텅 빈 기표들만이 곁에 남는다. 우리의 진정한 이름은 바로 이런 것들뿐이다. 노동은 우리에게서 한 줌의 색채마저 앗아간다. 존재를 박탈당한 자들은 투명한 유령이 되어 속세를 배회한다.
내가 그저 생업이라고 부르는 것, 단지 먹고살기 위해 몸을 담그고 있을 뿐이라고 여기는 그것이, 그나마 세간에서는 유일하게 나를 대표해준다. 그 당연한 사실을 여지껏 모르는 척 해왔다. 하지만 이조차도 영원히 내 존재를 담보해주지는 못한다. 차라리 자기기술을 한껏 토해내고 나면, 잠시나마 희미해짐의 속도를 늦춘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그것이 순전한 기분일 뿐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글쓰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덧없는 자기환상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허탕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주기적으로 자기환상에 대한 환멸의 시간이 찾아온다. 그럴 때면 차라리 모래알 속에서 영영 사라져버리는 방법을, 비존재나 다름없게 느껴지는 저 광활함 속에 자신을 내어주고도 긍정할 수 있는 태도를 터득하고 싶어진다. 떠밀리듯 범부대중으로 태어났고, 떠밀리듯 그것을 수행해야 하지만, 어찌 되었건 이와 같이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삶의 행로다. 변변한 이름조차 없이 등 떠밀리며 여기까지 온 것은 사실이지만, 걸어온 발걸음 중 무엇도 되물리고 싶진 않다. 이곳에 남기를 자처할 것이다. 사라짐을 견디면서. 사라짐과 싸우면서. 그리고 완전한 사라짐을 반갑게 맞아들이면서.

“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
“바다에 던져지면 되느니…”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