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9일 목요일

체념의 좌파

소위 ‘오피스 하이퍼리얼리즘’이 흥행하는 양상을 보고 있으면 대충 이런 물음이 떠오른다. <화이트칼라는 어떻게 리얼리즘을 탈취했는가?> 이제 그런 식의 리얼리티야말로 우리의 흥미를 끌고 몰입시킨다. 우리가 보통 그렇게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블루칼라는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비국민화되고 있다(외국인 노동자와 기계 따위). 외국인은 국가가 그 권리를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시민이 아니다. 그렇다면 로보트는 더더욱 아니겠지요?(아이로봇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들이 우리의 공론장에서 갖는 목소리는 거의 없는 수준이나 다름없다. 글로벌/자동화된 자본주의는 프롤레타리아라는 위험을 그런 식으로 축출한다. 그들의 존재에 대한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언어부터 축출한다. 그리고 리얼리즘이라는 남겨진 어떤 전리품...
대충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라는 소시민적 존재를 떠올린다. 나는 관료제적인 것의 실효성을 믿지 않는다. 누가 믿고 싶겠습니까. 본격 관료들조차도 그런 거 안 삽니다. 행정주의가 유발하는 너무 많은 불필요한 과잉들에 다들 치이며 산다. 그러나 일터에서라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보통의 관료가 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요즘은 관료로서의 적성을 발굴하는 재미가 쏠쏠하기까지 하다. 사람이 해까닥하는 메커니즘이 바로 이런 거구나. 니가 선택한 관료제다. 그야말로 악으로 깡으로 버텼습니다. 매너리즘 한 봉다리에 관료정신을 배웠고. 피어오르는 무사안일주의와 더불어 그만 꼴까닥... 흐흐흐. 큭큭큭.
마크 피셔가 말한다. “쾌활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모종의 비판적 성찰성을 거의 완전히 결여하고 이 관리자가 그랬듯 관료 기관의 모든 지침에 냉소적으로 순응할 수 있을 때 뿐이다. 물론 순응할 때 보이는 그 냉소주의가 핵심이다. 가령 그는 감사 절차를 아주 성실하게 이행하지만 자신이 그것을 ‘실제로는 믿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댐으로써 60년대 스타일의 자유주의적 자기 이미지를 보존한다.” 그런 식으로 냉소하면서 나는 이 현실 저 현실을 옮겨다니는 중이다. 그러나 그 모든 심적 반란에도 불구하고, 외적으로 나는 마치 그러한 절차들을 믿는다는 듯이 행동(해야)한다. 그 대가로 나는 최소 소시민적 생활수준을 보장받는다. 그러한 수준에 미달하는 경제적 생존을 상상하는 것은 확실히 공포스럽다...
그야말로 공포에 길들여진 똥개가 되어버렸구나. 뭐요. 기만적이라구예? 똥개로 안 살아도 되는 니들이야말로 기만적이다(똥개 동지분이셨다면 죄송ㅎㅎ). 이렇듯 좌파의 병리 현상을 온몸으로 증빙하고 있지만. 섣부른 낙관엔딩 같은 것은 절대로 구사하고 싶지 않다. 응애 아기좌파 혁명줘. 그런 식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안 줍니다. 일전에 돗자리 말고 본진에다가 체념으로부터 출발하는 철학이 좋다고 썼다. 체념이야말로 우리 똥개들이고 고통받는 중생이며 범박한 민중 그 자체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나는 체념의 좌파 같은 것을 자처하고 싶다. 체념하는 좌파 아니구요. 체념으로부터 출발하는 좌파입니다. 뭐요. 악질 반동이라구예? 니맘만 있고 내맘은 없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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