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1일 수요일

낡은 마법사의 꿈 (2)

의자 위에는 깔개가 덮여 있다. 벽난로를 앞에 두고 나는 손으로 가위나 보의 모양을 만들며 장난을 했다. 벽난로 속에서는 장작이 불타 없어지고 있다. 나는 그 앞에서 실내의 어떤 권태를 느꼈다. 내 다리가 온기로 인해 따듯해지고 있었다. 나는 거의 더웠다. 이것은 과장된 것이고 나는 집 바깥의 추위와 유리되는 따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앉아서 졸며 꿈을 꾸고 있었다. 나는 꿈속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멀리에 있는 교실에서 한 인물이 가만히 앉아 빈 교실 안에 있는 정경들을 눈에 담았다. 나는 깨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이것이 어느 정도 꿈의 안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미망이 나는 즐거웠다. 꿈은 단순히 소비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다분히 앞날의 일을 의식하는, 그런 예언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 될 수도 있다. 꿈은 평소에 해볼 수 없는 생각들을 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권위적이다. 그것은 왕의 침소에 나란히 진열되어 있는 도자기들이나, 벽면에 걸려 있는 그림들을 보고 있는 것처럼 그 앞으로 손을 내뻗을 수는 있으나 그 손은 닿지 않는다. 벽난로에도 손을 넣어볼 수 없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이 잠시 간의 조응된 꿈에서 깨어났다. 나는 일어나서 주전자 안에 있는 물을 컵에 부었다. 김이 나고 있었다. 고양이 몇 마리들이 이쪽으로 다가와 한껏 몸을 늘리고 있길래 나는 다시 꿈에서 깼다. 나는 고양이들을 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벽난로 안에선 장작들이 불타 없어지고 있었고 나는 자기가 태어난 도시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돌아온, 사람 말을 배운 쥐에 대한 생각을 했다. 쥐 곁에는 동료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람이었다. 쥐와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만났고 서로 동료가 되었을까? 나는 의자 위에 덮여 있는 깔개를 치우고 그 위에 물컵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저쪽으로 가서 믹스 커피를 가져와 그 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런 양이 왠지 나는 기분 좋았다. 가루들이 소용돌이를 그리며 액체 안으로 섞여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컵 안에서 숟가락을 빼낸 뒤 그것을 입으로 물었다. 실내가 조금 건조한 것 같았다. 나는 방의 중앙으로 가서 가습기를 틀었다. 수증기에서는 아무런 냄새도 느껴지지 않는다. 수증기가 뿜어 나오는 정경을 보면서 나는 조용히 앞으로의 대한 일을 생각했다. 이 집에는 나 이외에도 몇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오늘은 때가 맞아 이 공용 거실에 앉아 졸고 있기까지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올라가거나 내려오는데, 나는 그때마다 이 공동 거실 안에 자리하고 있거나 않기도 하다. 나는 그들과 안면을 나누지 않은 사이였다. 대충 그들이 내려오는 시각을 잰 뒤에 나는 이 공동 거실에 나와 있곤 했던 것이다. 마치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에서 그저 마음에 들기만 한 '틀린' 쪽을 무수하게 고르며 나아가는 것처럼. 이 미궁 끝에는 괴물이 살고 있을까? 나는 틀린 쪽만 제법 골라왔으니, 그런 괴물은 없을 법도 했다. 대신에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단지 중앙이 있는 의자 외에는. 그 의자 위에 앉으면 그것으로 게임이 끝나는 것이었다. 하나의 엔딩으로서. 그러나 잘 만들어지지 못한 그런 엔딩. 손을 많이 거친 게임은 아니라 엔딩도 이렇다 할 만하게 꾸며져 있지 않다. 그저 조용할 뿐이다. 나는 생각에서 벗어나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이러한 게임에 대한 생각은 실내의 권태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아직도 은은한 온기가 한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넘어가는 일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일종의 슬픔을 느꼈다. 이 슬픔은 내가 느끼고 있기 전까진 그 존재가 위태롭고 불확실한 것이었어서 시인들이 쓴 시 중에서 중요하지 않은 문장들이 지닌 지위와 비슷한 데가 있었다. 곧 크리스마스가 올 것이다. 카페에 가 보면 계속해서 캐롤이 흘러나올 것이고. 인형들을 선반 위에 올려놓아 그 현실, 방 안의 세계를 공고히 하는 것처럼 12월의 막바지로 가다 보면 그날이 기다리고 있다. 그 이틀의 전야제는(한 날은 전야제이고, 한 날은 예수가 태어났다고 하는 날이다) 12월 23일이고, 그날의 전야제는 12월 22일이고, 이렇게 해서 계속 전야제가 길어진다. 어쩌면 12월의 전체가.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나도 그러한 사람들의 장소와 멀지 않은 곳에 혼자 우둔히 앉아 있었다. 어쩌면 고양이 몇 마리들이 이쪽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고, 고양이는 뛰어올라 내 미망이 장난감이 된 것처럼 나를 그 의자 위에 붙박혀 있게 할 것이다. 나는 혼자 앉아서 소원을 빈다. 부디 그 예수가 태어나지 말기를. 그로 인해 이쪽으로 다가오지 못하고 늘어지는 전야제들이 이쪽을 호도하지 못할 미망과 같게 해달라고. 그러나 이것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소원이다. 사람들은 12월의 이틀간을 손꼽아 기다리며 실내에 트리 나무 장식을 우두커니 서 있게 한다. 나는 실내의 어떤 조짐도 느껴지질 않았고, 내 두 다리는 끝없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더운 공기는 벽난로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었고 나는 이것의 엔딩을 보길 바랐다. 지금 나는 앉아서 일종의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었고 꿈은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이 꾸는 것이었다. 나는 그 다음 번에도 고양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고양이들은 안면이 있든 있지 않든 이쪽으로 뛰어 올라와 겹겹이 내가 꾸고 있는 꿈을 끝냈다. 소프라노의 음성으로 된 회선곡이 흘러나오며 나는 벽난로 안으로 내 발을 빠뜨리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 사이 고양이들은 나에게로 뛰어올라 온 일이 없었던 것처럼 한껏 몸을 편 채로 걷고 있었다. 저쪽에서 저쪽으로. 마치 그곳으로 걸어가면 그 두 날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고양이가 쥐 잡고 놀듯이 성탄은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야제들로 지루한 야간 기차 안에 타고 있는 것 같았다. 고향을 떠난다는 마음에 나는 왠지 즐거웠다. 그 고향은 내 생각 속에서 벽난로 안에 있는 장작들처럼 몸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한 것이 회선곡이라면, 나는 지금 아무도 내려오지 않는 이 실내 안에서 마법을 쓰고 있는 것이노라. 카드 스프레드와 별점들. 그리고 배움. 나는 이러한 것들의 꿈을 꾸고 있었다. 레버를 당겨 슬롯머신을 작동시키듯이 어떤 매력으로써 내게 그런 꿈을 강요한 이가 있었다. 그 사람이 내게 별점 보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그가 몹시 그립다. 그 기술이 그리운 건지 성탄의 전야제가 천천히 내려오는 작은 마을이 그리운 건지 혹은 내가 그 사람을 사랑했는지 알지 못하고 나는 다시 미망 속으로 잠겨 들고 있었다. 계단 위에서 다시금 누군가 이곳으로 내려왔다. 나의 낡고 오래된 꿈을 끝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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