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29일 목요일

어느 실내

화분 위에 고양이가 있다. 고양이는 반쯤 몸을 펴서 꼬리가 수직으로 서게 한 뒤 기지개를 켰다. 나는 그 앞에서 하품을 했다. 조금 즐겁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주말에, 집에 있는 소파에 누워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는 일은 즐거웠다. 그리고 졸립기도 했다. 순간적으로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 생각이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시간이 가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러나 시간은 갈 것이고, (저 고양이가 자꾸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진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듯이) 시간은 그렇게 빠르게 흘러서 나는 점점 늙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체감하고 있는 시간의 속도는 빨랐다. 나이를 먹게 되면 이렇게 된다고 하지. 나는 어느 신문 기사에서 그렇다는 사실을 훑어보기도 했었다. 점점 잠이 오는 것이 느껴졌다. 화분 위에 있는 고양이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고양이는 점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화분 위에서. 저 화분은 우리집 고양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였다. 나는 장소라는 말을 좋아했다. 기억이 나는 여러 사건들을 나는 영사되는 영화를 보듯 하나씩 떠올려 갔다. 주말의 이러한 시간에 고양이를 보면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있는 일이 좋았다. 좋으면서 왠지 좀 불안하기도 했다. 그 불안은 내가 자리 잡고 있는 근저에서 작용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앉아 있는 의자 뒤가 약간 꺼림칙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식탁으로 갔다. 토스트기를 작동시켜 식빵을 구웠고, 구워진 식빵을 먹으며 나는 다시 고양이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고양이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까 왠지 불안했던 의자 등받이에 다시 앉았다. 일하지 않는 한가한 날이었다. 나는 내가 할 만한, 집에서 할 수 있을 만한 그런 일을 떠올렸다. 하지만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이 휴일의 집 안에서 나는 게을렀다. 씻지 않아서 머리도 떡 져 있었다. 나는 머리가 그렇게 되면 쉽게 티가 나는 유형이었다. 나는 고양이가 앉아 있는 화분 위로 잠깐씩 눈길을 돌리며 TV를 봤다. TV에서는 뉴스가 나오는데, 나는 뉴스가 싫어서 채널을 돌렸다. 그러면서 나는 희미하게 내 불안에 대해 생각했다. 한 손으로는 식빵을 잡고 있었고 다른 쪽 손은 아무런 일을 하지 않고 있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점점 늙을 것이다. 이 생각이 내가 느끼고 있는 불안이 아닌지 하는 추측이 생겼다. 물론 누구나 늙지만 나는 특히 이 자리, 이 장소에서 느끼는 그러한 불안일 수도 있는 생각이 솔직히 말하자면 어느 정도 기꺼웠다. 생각해 보면 불안에도 사람을 그 근저에 묶어두는 매력이 있는 듯했다. 나는 그러한 것들을 느끼며 한 손으로 잡은 식빵을 점점 뜯어 먹고 있었다. 고양이는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했다. 저 화분 위에 자주 올라가는 고양이는 언제인지 모를 무렵 담장 위에서(아마 학창시절이었을 거다) 봤던 고양이와 닮아 있었다.

2020년 10월 23일 금요일

저 우는 거, 알았죠

노동절에 쉬는 일은 드물다. 이번 노동절도 그런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휴일이 생겼다. 최대한 체력을 아끼고 사람 없는 곳에 가고 싶었다. 강서습지생태공원에 가게 된 건 그 이유였다. 가깝고 자연을 볼 수 있으니까.

근처에는 소각장이 있었고 쇠를 태우는 냄새가 났다. 철새를 볼 수 있는 망원경은 고장이 나 있었다. 둘레길 조성이 잘 되어 있었으나 보수 중인 곳이 많아 한참을 걸어 들어갔다가 다시 크게 돌아서 되돌아 나왔다. 운 좋게 습지 근처에서 백로를 보았다. 백로는 묘한 기품이 있다.

집에는 다른 길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반대편으로 갈수록 점점 이상했다. 자전거 도로를 따라 걸었다. 육교를 올라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도로였다. 길이 없었다. 먼지에 벌어진 튤립이 엉뚱한 곳에서 보였다. 예상치 못한 하루에 누가 봐도 이상한 사람처럼 도로를 걷고 있었다. 이런 경험을 누군가에게 말할 일이 생길까?

며칠 후 장애물없는생활환경시민연대에서 요청한 배리어 프리(Barrier-free)* 강연을 하면서 다시 그때의 풍경을 그려봤다.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면 보수 중인 문턱에서 돌아갔다가 자전거를 피했다가 돌고 돌아 백로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노들야학 강연장 안에는 전동 휠체어를 탄 사람들이 있었다. 긴 책상 하나에 대부분 한 사람씩 앉았다. 오늘의 테마는 <배리어 프리, 핫플레이스를 찾아라>였다. 여행과 관련된 짧은 글쓰기 강연이라고 해서 시인, 작가들이 쓴 여행 책을 자료로 가져갔으나 제한적이었다. 내가 아는 세계는 비좁았다.

여행에서 그들에게 중요한 건 경사도다. 작은 문턱도 그들은 산의 정상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장소를 제공한 노들야학의 문은 모두 열려 있었고 턱이 없었고 문의 간격도 넓었다. 저런 문의 간격을 보는 건 익숙치 않았다. 이제 궁금해졌다. 이들이 어디를 가고 싶은지. 배리어프리 시설을 소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는 자유가 더 필요함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이 나를 쳐다봤다. 누군가는 목을 가누지 못하고, 누군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에 반응하며 마이크를 끌고 돌아다니면서 글을 읽었다. 그들은 바다에 가고 싶다고 했다. 바닷가에 그들이 있는 풍경을 그리면서, 강연을 마쳤다. 그려진 풍경마저 제약이 있었다. 끝나고 돌아서는 길에 행사를 진행했던 분이 다가와 말했다.

“작가님, 저 우는 거 알았죠?”

강연을 할 때면 사람들의 얼굴에서 감정 변화를 느끼지만, 울 수 있다는 건 언제나 예상치 못한 일이다. 가끔은 느끼고 때론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면서 사람의 감정을 듣는다. 나는 그의 질문이 오래 생각난다. 그는 어떻게 그가 울고 있었음을 내가 알고 있다고 확신했을까. 

내 옆에 있는 문은 여전히 비좁다. 어떻게 이런 문이 설계되어 있나.


*고령자나 장애인과 같이 사회적 약자들이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물리적이며 제도적인 장벽을 허물자는 운동.

2020년 10월 22일 목요일

털보네 만물상

망원에는 털보네 만물상*이 있었다. 아저씨는 중고물품에 가격을 투박하게 적어놓고 몇몇 물품은 가져가면 꽁짜!* 라고 적어두기도 했다. 구경하는 맛이 있었다. 폐업한 가게의 컵이 즐비한 날도 있고 책장이 고스란히 있는 경우에는 책을 골라 구매하기도 했다. 사람의 흔적이 보이는 물품은 오래 들여다보게 된다.

나는 장기판을 샀고 때로는 시집을 서비스로 받기도 했다. 시집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냥 주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의 후함이 느껴졌다. 시집이 있는 만물상.

그날은 애견용품이 많았다. 애견 기저귀와 약을 먹일 때 쓰는 투입용 주사기, 작은 방석, 개의 여름 옷, 겨울 옷, 오래 물고 놀아 색이 벗겨진 장남감, 유산균, 개와 함께 지낸 사람의 손길이 느껴졌다. 개를 보내고 남은 주인이 떠올랐다. 개의 흔적이 너무 많았다. 집을 꽉 채우고 있었을, 구석을 기꺼이 내주었을 법한 물건을 보다가 돌아섰다. 개의 아픔과 사람의 아픔이 같을 수 있을까.

날이 더웠다. 작업실에 돌아와 커피를 한 잔 마셨다. 할 수 없는 일 주변에서 어그적대면서, 개의 꼬리를 그렸다. 고개를 들지도 못하면서 반갑다고 꼬리를 흔들던, 우리 개가 생각났다. 그 개는 비가 오는 날 왔고 비가 오는 날 떠났다.

털보 아저씨는 비가 올 것 같으면 비닐을 덮어두었다. 비닐의 유무로 그날의 날씨도 알 수가 있었다. 때로는 맞았고 때로는 틀렸다. 그럼에도 그가 친 비닐을 보고, 비닐 안에 들어가 있는, 나는 꽁짜다!를 앞에 두고 오래 시간을 보냈었다.


*털보 중고 재활용센터. 
*그는 꽁짜,라고 적었다. 가끔은 이것도 꽁짜, 나는 꽁짜! 등 다양한 문구를 적기도 했다. 

2020년 10월 21일 수요일

세신사

그날은 휴가였고 목욕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었다.

대중목욕탕에는 포박*이라는 낯선 단어가 적혀 있었다. 음료수를 들고 탕에 들어가기 전에 문앞에서 얼쩡거렸다. 매점 아주머니는 속마음을 읽듯 뭘 받을 거냐고 물었고 손목을 확인한 후 30분 뒤에 오라고 말했다. 그는 나를 65번이라고 불렀다.

포박을 살 때 65번이었고 세신을 받을 때도 65번이었다. 마침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 미국 드라마에 심취해 있었다. 맨몸에 현금을 봉투에 담고 수건으로 둘둘 감싸고 있는 게 마약 밀수를 하는 착각마저 들어 헛웃음이 났다. 이런 비약은 좀 심하지 않은가.

물속에서 또렷해지는 생각이, 어째서 물 밖으로 나가면 맹탕이 되는지 골똘히 느끼면서 이벤트탕과 온수탕을 오가며 몸을 불렸다.

세신을 받는 동안 나는 온순하게 몸을 맡겼다. 옆으로 누우라면 옆으로, 다리를 움직이라면 그 자세로, 아주머니 손길에 미끄러지면서 조금은 익숙한 척 눈을 감고 있었다. 리드미컬하게 들썩이는 몸을 느꼈다. 날렵한 손길에 탄복할 뿐이었다.

“부지런한 것도 타고나는 거야.”

아주머니가 말했다.

“이름 모를 장미가 다 폈다잖아. 꽃구경도 못 가고.”

세신사들이 이름 모를 장미인지, 이름 없는 장미인지, 말하고 있었다. 귓가에 물이 들어가 먹먹했다. 그는 알이 굵은 장미 귀걸이와 원석 목걸이를 걸쳤고 업스타일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 멋쟁이네, 잠시 생각했다. 그가 미지근한 물을 온몸에 부어주었다.

“언니, 이거 가져가야지.”

그는 나를 65번 언니라고 불렀다. 몸이 매끈했다. 숙련된 솜씨로 부드러워진 몸. 밝은 물속에서 오래 떠있었다. 유연한 것처럼, 혹은 방금 영혼을 잃은 익사체처럼. 

세신을 한 번도 안 받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받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머리를 말리며 세신사들의 방에 걸린 속옷을 봤다. 작업복이어서 그런지 단단해보였다. 65번은 신발을 갈아 신고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다 진 장미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벌써 8월이었지만.



*포박
(포카리스웨트와 박카스를 합친 음료수)

2020년 10월 20일 화요일

우울하고 친절하세요

몸살이 나고 힘들 때, 엄마는 그랬다. 한 번씩 크게 아프면서 늙음에 다가간다고. 사람이 늙을 때, 크게 아프면서 한 번씩 꺾이게 되는 거라고. 바로 지금이었다. 나는 바스러지는 광물이었고 온몸이 축축한 생물이었다. 지나간 이들이 파노라마가 되어 떠다닌다.

엄마는 철야예배에 자주 참석했다. 먼 곳까지 다녔다. 엄마의 친구도 교회 사람이었다. 그는 명랑했고 친절했다. 똑똑한 아들을 두었고, 웃는 얼굴이 보기 좋았다. 엄마는 자주 아팠고 예배에 참석하지 못할 때는 미안해했다. 나는 궁금했다. 누구한테 미안할까. 엄마의 친구는 철야예배에 참석했고 교통사고로 인해 즉사했다. 나는 이런 사실을 적어도 되는지 언제나 모르겠다. 

주변에서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게 될 때, 모든 것이 이상하리만큼 건조해진다. 짧은 뉴스를 통해 찌그러진 차를 목격했다. 익숙한 교회 이름이 빠르게 지나갔다. 엄마는 그날 같이 참석한다고 했다. 그때 엄마는 내게 같이 갔어야 했다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할머니 벌초를 하러 갈 때, 엄마는 그에게도 인사한다.

“아들이 다녀갔나 보네. 깨끗하다.”

엄마가 보는 곳에 그의 무덤이 있다. 한쪽에는 할머니의 무덤과 한쪽에는 엄마 친구의 무덤이 같이 있다. 산의 빛은 여전히 좋다. 나무들도 여전하다. 나는 속으로 인사한다. 예전부터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그는 이해해줄지도 모른다. 아프면 별생각이 다 난다고 하던데, 그런 순간일 수 있다. 나는 자주 우울해지고 친절해진다. 모든 사람들이 가엾게 느껴진다.

서른이 넘어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친절하다는 말을 많이 했다. 아이들도 선생님은 친절해서 좋다고 말했다. 의아했다. 인간의 슬픔을 이해한다면, 마흔이 넘어도 나는 친절할 것이다. 우울이 천성이라면 이것은 태도에 가깝다. 나는 사람에게 늘 미안하다. 엄마가 맞는 말을 했다. 그래서 역시 어른인 건가.

꽃순이와 개똥이

소싯적에 글 안 써본 사람이 있겠는가. 한선생도 그랬다. 다 지난 일이다. 그는 연애할 때 시를 썼다. 전공을 활용해서 수학 행렬에 자음과 모음을 넣어 고백을 했다. 연인이 기발하다고 시를 쓰는 줄 몰랐다고 하면 그는 조금 으쓱했다. 그것 역시 지난 사람들의 일이었다. 그는 결국 소싯적에 끄적였다가 사라진 선생 중 하나였을 뿐이다.

전쟁 통에도 자기의 잇속만 챙긴 탐관오리를 비판하는 시를 써보시오, 라는 문제가 나왔을 때 한선생은 턱을 괸 손을 이리저리 돌리며 고심했다. 그는 탐관오리라는 단어를 설명해주고, 그 당시 백성의 심정으로 쓰면 된다고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애들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무것이나 쓰고 보는 친구들인데 그날은 유독 머뭇거렸다.  

“선생님, 저 시는 정말 못 쓰겠어요.”

차라리 분석하면 안 돼요? 아니면 제가 쓰고 나갈 테니 선생님은 제가 강의실에서 나가면 읽고 제가 들어왔을 때는 시에 대한 한 문장도 이야기하면 안 돼요. 아이들은 으악, 악, 비명을 질렀다. 보통 저학년 친구들은 동시도 곧잘 쓰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까지 부끄러워할 일인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뭐가 부끄럽지. 이들의 괴발개발로 쓴 글은 한두 번 보는 일이 아닌데 새삼스러웠다.

아이들은 양반을 욕하는 시를 <쇼미더머니>처럼 생각했다. 욕 써도 돼요? 안 돼. 그럼 강아지의 아이야, 이런 말은 돼요? 안 돼. 그 당시에도 욕이 있었어요? 저잣거리에 매달릴, 이런 말들은 있었지. 짧게 써도 돼요? 응. 한 줄 써도 돼요? 아니.

몇몇 애들은 이런 표현도 썼다.

“백성들한테 꿀 빠는 양반들아.”

한선생은 그저 마실 나오듯이 그들이 쓰는 걸 구경했다. 몇몇 친구들이 자신이 쓴 걸 확인받았다. 한선생은 와, 잘했네, 괜찮네, 라는 말을 해주면서 그들을 다독였다. 그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글은 있었다. 그 시는 <꽃순이와 개똥이>였다.


아버지는 개똥이를 버렸다
사람 먹을 게 없으니 개부터 버려야 한다고
개똥이가 서럽게 울었다

옆집 꽃순이가 죽고
마당에 묻혔다 

꽃순이 아빠는 전쟁터에 나갔다
꽃순이 아빠는 마당이 없어서 울퉁불퉁한 땅에 묻혔다
묻을 땅이 부족했다

아버지는 기다리자 했다


<꽃순이와 개똥이 부분>


열한 살짜리 아이가 이런 글을 쓰고 있었고, 한선생은 감동을 느꼈다. 감동적이네, 라고 말하자 옆 친구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는 못 쓰겠어요, 봐봐, 글씨도 예쁘잖아, 그들은 내가 뭘 읽었는지도 모르면서 말한다. 

한선생은 최근에 본 영화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고 친구와 대화를 나눴었다. 친구는 “이거 정말 찐사랑이구나, 싶더라.” 말했고 그는 “나는 다시 묻게 되더라.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뭐라고 부를 건데?” 

그때의 장면이 지나가는 건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문득 그는 생각했다. 이 아이가 쓴 게 시가 아니라면 이걸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꽃순이를 쓴 어린 친구는 한선생의 시선을 느꼈는지 “선생님, 저 시가 아닌 것 같아요, 이래도 돼요?*” 물었다.










2020년 10월 19일 월요일

신의 마음

“선생님, 승려가 뭐예요?”

아이들은 승려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에 신화나 전설이 있음을 배웠지만 아직 승려라는 단어는 이해하지 못했다. 한선생은 스님을 본 적 있는지 물었고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교의 가르침을 수행하거나, 포교하는 종교인에 대해 설명하자 석훈은 “쌤, 저 예전에 본 적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한선생은 진도를 나가야 했다. <삼국유사>가 왜 만들어졌는지, 설명을 해야 하는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길을 지나가는데요." 

모두가 석훈의 말에 귀 기울였고, 선생은 잠시 들어주기로 했다.

“아줌마들이 스님들 앞에서 빡빡이들아! 교회나 가라! 소리치고 있었어요.”

아이들이 자지러지게 웃었다. 이건 안 된다. 빡빡이라는 단어가 나온 이상, 이 수업은 아득해진 것이다. 저 멀리 ‘대머리’라는 말이 나왔고, 스님들은 원래 대머리예요?부터 교회 욕하지마,까지 순식간에 우리의 역사는 사라지고 그들의 목소리와 해맑은 웃음소리만 가득해졌다. 

한선생은 침착하게 종교인에 대해 설명했고, 그들은 스스로 머리를 체발하여 세속과 구분 짓는다는 것, 그것과는 별개로 누구나 대머리가 될 수 있음도 보너스로 설명했다. 최대한 진지하게 말해야 아이들이 집중한다. 그때 저 멀리 “제가 신이라면 인간들이 짜증났을 거예요. 선생님은요?” 질문이 던져졌다. 둥글고 풍성한 아이들의 머리카락이 흔들거렸고 한선생은 

개미굴을 지켜보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떠올렸다. 

우리는 신이 아니므로 생각할 시간이 있었다.

“내가 신이라면 글쎄, 인간이...... 가엾지 않을까.” 한선생이 말하자 아이들은 “쌤, 쉬는 시간이요.” 라며 시계를 초롱하게 쳐다보았다. 


2020년 10월 18일 일요일

게친

그 주술사는 스피커의 어머니뻘 되는 중년의 여성이었다. 목맬 태세를 늦추지 않는 스피커와 거리를 좀 두고 서서, 주술사는 스피커에게 죽을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었다. 죽을 필요가 없다? 살 필요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주술사가 손등을 내보이며 다가왔다. 스피커는 밧줄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가 이내 힘이 풀려서 주저앉았다. 주술사의 손등은 화상과 자상과 검은 멍이 수두룩했고 손목을 지나 팔까지 이어져 있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저 온갖 상흔들이 팔에서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유추할 수도 있었다. 이내 자신을 괴롭힌 제약의 존재가 떠오르며, 저 사람도 나와 같은 어떤 것을 겪은 게 아닐까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상하게도, 스피커는 마음 한켠에 감당하기 어려운 아련한 감정이 북받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끌어올려져 이제 그와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을 처음 만나며 샘솟은 감정으로 여지껏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그것은 연민이었다. 연민을 얻게 되면서 스피커는 천천히 다가오는 저 사람 또한 지금 자신을 연민하고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충격에, 또는 눈알이 쏟아질 것 같아서, 스피커는 악 악 소리를 지르며 그를 등지고 도망치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그림자를 드리우며 참혹한 팔이 다가왔고 거기 달린 손이 스피커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주술사의 이름은 게친이었다. 게친은 스피커를 둘러싸고 있는 힘과 그 역인 주술과 제약을, 주술사들의 커뮤니티를, 그들의 강령을 말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전에 처음의 말, 죽을 필요가 없다는 말을 증명하고자 했다. 위로하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야. 게친은 입고 있던 자색 로브의 안주머니에서 이상한 물건을 하나 꺼냈다. 그것을 무어라 말할지? 스피커는 그가 꺼낸 물건을 곧잘 해석할 수 없었다. 그것은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길이에 꽃줄기처럼 몸이 가늘었다. 그것의 온몸은 검은색으로 광택이 났다. 게친이 그것의 툭 튀어나온 엉덩이를 누르자 그것의 주둥이에서 금색 창날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게친이 그 창날을 손에 찌르자 손에 새까만 피가 찍혔다. 게친은 그 새까만 피로 손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게친은 말했다. 이것은 사후세계의 물건이다. 사후세계? 게친은 자신이 사후세계의 물건을 가져올 수 있는 주술사라고 말했다. 그것이 내 주술이다. 잘 모르겠어도 사후세계라는 말을 듣자, 스피커는 죽을 의욕이 뚝 떨어졌음을 느꼈다.

스피커도 알기는 안다. 어느 민족에게나 죽은 다음의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를 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람들이 떠난 마을에서 종교서적을 주워 읽기도 했다. 쓰여있기로 사후세계는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이다. 그곳에 가려면 삯을 지불해야만 한다. 입장권을 사려면 충분한 양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 거기 가려면 아주 오래 아프고 그 아픔이 낫지 않아야 한다. 거기 가려면 허덕여야 한다. 그래야 거기서 행복한 영생을 누릴 수 있다. 스피커는 믿지 않았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상의 어떤 것들, 슬픔과 외로움 괴로움 같은 것은 겪어야만 하는 일이 되어버린다. 인간은 고통을 반겨야 한다. 반기다 반기다 더 달라고, 더 내놓으라고 죽어버릴 때까지 애걸복걸해야 한다! 그것은 나어린 스피커가 보기에도 참 역겨운 일이다. 스피커는 믿지 않았다. 

그런데 게친이 사후세계의 물건을 내보이며 사후세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게친은 말했다. 사후세계는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들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잖니. 얼른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스피커는 반문했다. 그럼 사람들이 죽는 건, 행복을 모르는 사람들, 삶의 어떤 부분에서도 좋은 점을 찾아내지 못한 사람들, 안감이 뾰족한 쇠꼬챙이로 되어 있는 옷을 입고 있는 듯 깨어있는 매 순간이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죽는 거, 제 풀에 죽고 싶은 사람들, 어쩌면 나와 당신이 그곳에 가는 거. 그거야말로 좋은 일 아닌가? 게친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곳은 이곳보다 좋지 않고,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여기보다 나쁜 곳에 가기 위해 죽을 필요는 없다. 그러니까 네가 말한 사람들 또한 죽을 필요 없다. 살란 얘기가 아니야.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죽지 말라는 얘기다. 아직은.

2020년 10월 17일 토요일

선원

나는 왜 쓰는 자가 되지 않고 선원이 됐을까. 꿈에서 깨어나며 부르튼 손으로 그물을 쥐었다. 그물을 걷어 올리며 간밤 꿈 생각. 꿈을 꿨다는 것만 기억하고 꿈은 기억하지 못했다. 눈이 찡그려져서 동녘에서 해가 천천히 솟아오르는 시간이 되었다는 걸 알고, 졸음이 쏟아져서 지금 내 입안에 뭔가가 한가득 들어찼다는 걸 알고. 나머지 것은 잘 모른다. 내가 생각하지 않아도 나는 움직이고 있는데 나는 왜 쓰는 자가 되지 않고 선원이 됐을까. 생선의 파닥임이 멎어서 작은 것들에도 영혼이 있다는 걸 알고. 선창의 비린내가 코를 찔러서 무수한 영혼이 학살당했다는 것을 알고. 땀이 차가워서 오늘치 죄업이 끝났다는 것을 아는데. 구름 몇 점에 시야가 흐려지며 나는 왜 쓰는 자가 되지 않고 선원이 됐을까.

2020년 10월 15일 목요일

베데스다의 집

전라북도 완주에 있는 <베데스다의 집>은 사회복지시설로 정신지체 노인 및 결손가정을 돌보는 곳이다. 낭독을 하러 도착했을 때 그들은 짧은 시간에도 환대해줬고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그들의 맨얼굴에 깃든 햇빛이 기억난다. 그날 나는 프린트된 시를 손에 쥐고 통유리에 비친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모두는 아니지만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 여기에 앉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사람은 뭘 해야 할까?

활자가 필요 없는 몇몇 사람들 앞에서 종이를 쥐고 낭독하는 사람. 그들이 열심히 듣고 있을 때, 지금 이 소리는 어떻게 전달되고 있는지 궁금했다. 소리라는 것이 온전하게 전달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떤 확신을 가지지 못할 때, 왜 진심이라는 단어가 떠오를까. 사람은 이런 순간에 진심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순간의 감정에 매몰되고 싶지 않아서

그들의 얼굴을 보았고 그날의 공터를 보았다.

가끔 낭독을 할 때면, 여전히 그날의 풍광이 반복됨을 느낀다. 어디에 있든 다시 전라북도 완주가 펼쳐지고 그날의 사람들이 바닥에 앉아 종이를 쥐고 있다. 

2020년 10월 13일 화요일

못 산다 정말

강상준이 숙제를 제출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 리포트를 근사하게 썼다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펼쳐봤다가 한선생은 고개를 파묻고 말았다.




선생을 위한 자체 모자이크 처리로 예상된다. 도대체 저 반투명 테이프를 여러 겹 붙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한 걸까?

우리 시대의 문학적 상상력

나는 어린 친구들을 가르친다. 저학년일수록 종말, 핵, 총 이 세 단어를 좋아하고 언제든지 마지막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신을 부정하기도 한다. 신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 없다고 증명할 수 있는지 질문이 오고 가지만 오늘은 과학에 대한 책을 읽고 수업을 하는 것이니 결국 딴짓을 하고 싶을 때 창의력은 증폭이 된다는 하나의 장면을 보여준 셈이다. 이들은 아마겟돈이라는 단어는 모르지만 머지않아 환경으로 인해, 공장식 축산을 만든 인류로 인해 세계가 멸망할 것이라는 생각을 확고히 갖고 있다.

여기에 신이 있나요? 이 질문에는 있다면 신은 사람들을 이렇게 놔두지 않았을 것이라는 열 살짜리의 말이기도 하다. 제법 설득력 있게 들린 이유는 그날 우리가 마스크를 끼고 있었고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확진자가 속보로 올라왔고 미국 독감의 사망자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중간 숙주가 천산갑인지 아르마딜로인지, 어떤 정보를 감추고 있는지에 대해 모두 말하고 있는 날에도 우리는 앉아서 수업을 했다.

요즘 어린 친구들은 어릴 때부터 과학을 배우고 철학을 배우고 문학을 배우고, 그들은 또래들을 통해 유튜브도 배운다. 지금은 신의 증명까지 말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교재와는 상관없는 말로 떠들고 싶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는 신이 있다면 자신이 매일 아침에 일어나 엎드려 절하고 자기가 먼 길을 떠나 신선한 물을 한 잔씩 바치겠다고 과장스럽게 창문을 향해 절을 한다. 그는 어째서 물을 선택했고 굳이 창문을 향해 절을 한 걸까. 그는 신이 창문 너머에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을까? 그에게 신이 없다고 증명해볼 수 있겠냐고 물으면 그는 다시 수업에 집중할 것이다.

고대의 사람들이 개기일식을 두고 커다란 괴물이 해를 삼켰다가 토하는 과정이라고 믿었음을 알려준다. 이 내용을 들으면 그들은 비실재물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괴물의 크기나 혹은 입의 크기를 구체적으로 생각한다. 아까까지 신에 대해 논하던 애들이 맞는지 싶을 만큼 그들은 구체적으로 상상한다. 이들과 태양의 온도가 얼마나 되는지, 그 뜨거운 걸 삼킬 수 있는 식도가 있는지, 토한 것인지, 배설한 것인지 그들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이 뒤섞인 초월적인 세계를 펼쳐낸다. 상상력과 감성으로 이루어진 형태가 재잘댄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서도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친구도 있다.

옛날 사람들 참 멍청했네요.

그 당시에 사람들은 왜 믿었을까? 이들은 200세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앞으로 20배만 더 살면 비슷한 말을 본인들이 들을지도 모른다. 시대의 시선을 생각해보는 건 의외로 즐거운 일이다. 인류가 반복되고 있다는 증거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니까 그때의 우리는 왜 믿었고 지금은 다르게 생각하는 걸까?

아무리 똑똑해진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어른들이 내준다는 숙제는 엇비슷하다. 그중에서 반복 되는 주된 내용이 있다면 바로 꿈을 주제로 한 페이지의 글을 쓰라는 것이다. 보통은 직업을 꿈이라고 적어오지만, 자신이 원하는 어떤 과정이어도 괜찮다고 귀띔을 해주면 글의 결은 달라진다.

어떤 친구는 자신의 꿈이 구름이라고 적었다. 이 친구는 자신은 처음에는 물이었다가 훗날 구름이 되어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유유히 떠다니는 게 꿈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약간의 이성적 판단이 들어갔는지 전문직종을 하나 쓱 넣고 다시 그 일을 했다가도 하늘에서 쉬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이것이 문학적 상상력이라고 느끼는데 안타깝게도 이런 친구들은 자신이 이런 꿈을 적었다는 사실조차 잊을 때가 많다. 인상 깊었다고 말하면 “제가 그런 글을 썼단 말이에요?” 묻는 게 대부분이다.

이들은 시대에 맞게 속담을 바꾸는 것도 잘한다. 예를 들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는 속담을 한 친구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판타스틱하다’라고 적었다. ‘사내 대장부가 부엌에 들어가면 고추가 떨어진다'라는 속담은 ‘사내 대장부가 부엌에 들어가면 좋다'로 바뀌어 있었다. 특히 나를 웃게 했던 건 좋다, 부분인데 아직은 글씨가 정돈되지 않아서 ‘좋다’만 크게 강조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이런 친구들에게 문제를 내본다고 하자.

1950년대에 호주에 급격하게 늘어난 토끼를 제거하기 위해 사람들은 믹소마 바이러스를 살포했습니다. 토끼의 99%를 죽이고 수를 줄였다고 좋아했지만 살아남은 일부 토끼들이 바이러스에 내성이 생기면서 더 빠른 속도로 늘어납니다. 이 사건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을 적어보세요.

몇몇 친구들이 내게 좋은 답을 주었다. 한 친구는 정답으로 ‘토끼처럼 살자’라고 적어두었다.

나는 다시 생존을 앞에 두고 이야기한다. 어디에서 어떤 일로, 우리는 어떤 일을 벌인지도 모른 채 놓여 있는 생명체.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어린 친구들이 귀하게 여기는 쉬는 시간까지 미룰 수 있는 건 오로지 이야기를 생산할 때만 가능하다. "까짓껏 쉬는 시간을 미루죠. 더 말해주세요." 옛날 이야기를 해준다거나, 사연을 들려준다거나 아니면 “조금 커서 들어. 대략 십 년 후?” 내가 말을 안 하려 할 때.

그들이 눈을 떼지 못하고 더 이상의 질문도 하지 않고 집중한다. 이 친구들은 창의적이고 그들의 질문은 뛰어나지만 자신의 생각이 굉장히 아름다운 것이었음을 인지하지 못한 채 자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것을 쓸 것이다. 매우 즐겁고, 때로는 아픈 이야기를.

이런 시간을 공유한 것을 기록하면서 바이러스의 이동 경로나, 해의 움직임이나, 토끼의 생존력이나, 신의 존재 유뮤에 대한 열 살짜리를 위한 답변이나 혹은 내가 쉬는 시간에 저 멀리 화성에서 감자를 심고 있을 우주인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며칠 사이에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오스카에서 4관왕을 했다는 소식까지 접했다. 상상을 뛰어넘는 일들이 벌어지는 세계에서, 이 경험을 공유한다. 지금의 내가 쓸 수 있는 것이라서.



*여기에 등장하는 친구들은 우리가 어떤 수업을 했는지 모르고 헤어졌다. 어린 친구들과 헤어지게 되면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그들이 성인이 됐을 때, 자신의 질문을 기억할까? 나는 출근 길에 그들의 질문과 얼굴을 떠올리며 걷는다. 여전히 그렇다.

신이 있다면 창문에 물을 뜨고 절을 하겠다던 K
구름이 되어서 지구 멸망을 기다리겠다던 J
토끼처럼 살자, 적고는 토끼 출판사를 차리겠다며 벌써 두 명의 친구 직원을 두었던 Y
사내 대장부가 부엌에 들어가면 좋다, 글씨가 유독 돋보이던 B
태양을 삼킬 수 있으려면 괴물의 식도가 남아나지 않을 거라는 N

2020년 10월 9일 금요일

굴속으로: 이나테

나는 굴속으로 가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떨어지고 있는 중이다. 이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와 관계없이, 나는 굴속으로 떨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를 떠올려 보면, 나는 아마도 길에 떨어진 바나나를 밟고 넘어졌던 모양이었다. 길에서 넘어진 게 어떻게 굴속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이어졌는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다 떨어지고 나면 나도 그녀*처럼 키가 작아지는 약, 키가 커지는 약을 먹고 작은 문, 큰 문으로 들어가서 여왕의 명령으로 경황이 없는 토끼를 만날 수 있을 법했다. 구덩이로 떨어지는 시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에 ㅡ약 2분 30초 이상ㅡ 떨어지고 나서도 왠지 내 몸이 멀쩡하게 남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점점 더 들게 되었다. ㅡ이건 이야기 속의 일이야!ㅡ 이제 어느 정도 ㅡ2분 40초 정도 밖에 안 되었지만ㅡ 구덩이 속 환상 세계에 적응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점점 더 들게 되었다. 그런데 정말, 언제 다 떨어지는 거람. 나는 나를 관조하는 듯한 자세로 떨어지고 있는 부분을 뒤틀어서 다른 쪽으로 떨어져 보거나, 아니면 또 다른 쪽으로 떨어져 보거나 하는 일을 계속했다. 이제 겨우 3분 20초 정도 경과했을 무렵이었지만 나는 내 추락이 사실은 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성층권에서 떨어져도 이 이상은 시간이 경과하지 않을 텐데. 떨어지는 속도가 빠르고 저 밑에는 불빛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지금 스쳐 지나가고 있는 ㅡ굴속의 내벽 등ㅡ 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 구멍의 크기는 반지름이 약 3~5미터 정도 되어 보였다. 나는 떨어지고 있으면서 한쪽 벽으로 몸을 돌려가며 도달하고자 했다. 공중에서 떨어지고 있는 느낌이 무력해서 무슨 짓이라도 해야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당황한 채로 시간을 세지 않고 넘겨버렸던 초반의 1분대 정도를 제외하고, 나는 계속 머릿속으로 시간 초를 세고 있었다. 그러는 것이 이 점점 더 떨어지고 있기만 하는 상황에 적응을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적응이라기보다는 남들에게 자랑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봐, 난 아주 끝나지 않는 구덩이에 떨어져 봤다구! 꼭 그녀처럼 말이야. 나는 숫자를 세고 있으면서 이 추락이 10분 정도를 넘기면 그야말로 끝나지 않는 추락이 아닌지를 걱정해야만 하는 처지라고 생각했다. 끝나지 않는 추락에서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더군다나 평소와 같이 지상에 두 다리를 내린 것도 아니라서 몸을 움직이는 데에도 제약이 있는데. 나는 마음속으로 저 지하에 환상세계가 있기를 간절히 빌었다. 떨어지고 있는 일은 잠시 적응이 된 것 같으나, 떨어지고 난 후에 몸이 다치는 일을 제해놓고 있더라도 지하에 아무 것도 없으면 그건 그것대로 공포였다. 그래서 나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무엇이 있는지 손가락으로 건드려봤다. ㅡ핸드폰이 있었다ㅡ 나는 핸드폰을 꺼내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신호가 터지는지 보았다. 신호가 터지지 않았다. 만일 신호가 터졌다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나 지금 떨어지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 없이 말할 수도 있었을 텐데! 떨어지고 있는 일이 점점 더 ㅡ6분대에 가까워졌다ㅡ 길어지기만 하면서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가령 핸드폰이 안 터지는 일은 ㅡ이때 난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어둔 채였다ㅡ 이러한 떨어지고 있다는 이상 사태에 현실성을 부여하고 있지 않은가, 하고. 게다가 바람이 으슬으슬하게 느껴졌다. 떨어지고 있으니까 나는 물론 강한 맞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런데 떨어지고 있는 초반에는 이 바람이 그렇게 의식이 되지는 않는 듯했다. 그런데 점점 더 시간이 지나며 몸이 춥게 느껴진 것이다. 이대로 계속 있다간 나는 떨어져 죽기 전에 동사를 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마냥 떨어지고 있는 일이 계속되면서 ㅡ약 7분 40초 정도가 지났다ㅡ 내 안의 두려움도 점점 더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냥 떨어지고 있는 시간이 긴 것 같아서 적응이 ㅡ추락 후에도 몸이 멀쩡할 거란ㅡ 되었던 것 같은데 아니, 이건 아니었다. 게다가 몸도 너무 춥고. 나는 한 손을 들어 핸드폰이 있는 주머니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몸의 자세를 바꿔 핸드폰이 안 떨어지도록 하는 쪽으로 몸을 돌려갔다. 이젠 정말 춥기만 하고, 이게 다 무슨 일인 건지에 대한 걱정만 들었다. 그 후로도 나는 ㅡ이리저리 떨어지는 자세를 바꾸거나 할 뿐이었지만ㅡ 마음을 달래려고 별짓을 다 했다. 떨어지고 있으면서 나는 점점 더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점점 더 무서워졌다. 아, 그건 그렇고 내 이름은 이나테이다. 수다하길 좋아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그렇게 나는 듣는 사람이 없는 와중에 자기 소개를 했다.



*앨리스

읽기모임


‘[읽기모임]을 모집합니다. 한 달에 한 번 여성들의 책을 읽습니다. 열일곱 번째 책은 <헤어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입니다. 대화를 나누거나 의견을 밝히지 않아도 됩니다. 읽고 메모지에 기록합니다.’


물론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

읽기모임은 여성들의 책을 읽는 모임으로 2017년 12월에 시작해 2년 정도를 유지했다. 총 16권의 책을 읽었으며 한 번의 모임에 4명부터 12명까지 참여하여 꽤 많은 이들이 오고 갔다. 처음 포스터를 만들어준 건 뮤지션 아를이었다. 운영을 할 때는 이소호 시인이 도와주었고 유희경 시인의 도움으로 혜화에 있는 위트앤시니컬에서 두 시간가량 조용히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교류가 없는 모임이지만 같은 공간에서 하나의 책을 두고 “있다”를 느끼기 위해 공을 들인 느슨한 연대 공동체였다. 참여자들이 읽고 포스트잇에 메모를 하면 사진을 찍어 그날 기록을 읽기모임 트위터 계정에 남겨두는 게 내가 하는 일이었다. (@Poststickbook)

여성들의 책을 읽었지만, 골라서 읽었던 적은 없었던지라 책을 고르는 것도 일이긴 했다. 기꺼이 읽혀야 할 여성들이 많았다. 당시 나는 출퇴근만 4시간을 하며 길거리에서 시간을 보냈고 퇴근 후에 일정을 잡았기 때문에 ‘운영자가 빠져도 되나?’ 고심하며 이를 악물었다. 직장인의 마음이 더 커져버린 탓이다. 막상 가면 책이라는 물성이 주는 안도와 사람들이 모여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가 그 모든 것을 잊게 했다. 

돌이켜 보면 그 시간을 버티게 해준 부분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동안 <인간의 조건 / 한나 아렌트>, <제2의 성: 상, 하 / 시몬 드 보부아르>, <페미닌 엔딩 / 수잔 맥클러리>, <사진에 관하여 / 수전 손택>, <브레이크-에이지 / 바토 치메이>*, <호텔 / 조애나 월시>, <어둠의 왼손 / 어슐러 K. 르 귄>, <마거릿 미드와 루스 베네딕트 / 로이스 W. 배너>, <무정한 빛 / 수지 린필드 >, <오늘 너무 슬픔 / 멀리사 브로더>, <캣콜링 / 이소호>, <거부당한 몸 / 수전 웬델>, <공감연습 / 레슬리 제이미슨>, <연대기 / 한유주>, <달걀과 닭 /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를 읽었다.

책을 나열한 이유는 그들의 이름을 한 번 불러보는 것이 필요하고, 이 모임의 성격은 결국 어떤 책을 읽었느냐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책을 선정하면 사람들이 모임에 참여하고 싶은 이유를 간단하게 적어서 신청했다. 책에 따라 사람들이 바뀌었다. 낯선 사람들을 자주 만났다. 자주 만나니까 낯설지 않게 되었다. 그들의 필체도 확인이 가능했다. 하지만 곧 잊어버렸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읽은 16권과 포스트잇들은 도대체 어떤 걸 남겼을까?

나는 이소호 시인에게 다음 읽기모임을 하게 된다면 그땐 일 년치의 책을 미리 선정하고 시작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의견이나 이야기를 성실하게 들어주었다. 어떤 이야기를 했어도 응원해줬을 것이다. 이제는 시대가 변했으니 각자의 자리에서 비대면으로 책을 읽을 수도 있겠다. 우리는 줌(zoom)에 접속하여 각자의 책을 읽고, 포스트잇을 보여주면 캡처해도 될지 모른다. 그럼에도 모여야만 여무는 마음이 있어 나는 미래의 책을 기다리기로 한다. 언젠가, 다시 만나야 하니까.






*1992년 첫 연재를 시작으로 1999년 완결된 코믹스. 바토 치메이(馬頭ちーめい). 여성 작가. 현재 작품은 이게 유일하다고 한다. 만화책을 읽었던 시간도 있어서 이 책은 나만 가져가서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2020년 10월 8일 목요일

맹인 안마사


그는 서른여섯 살에 시력을 잃었다.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온전히 앞을 볼 수 없었을 때 맹인 안마사를 뒤늦게 준비했다고 한다. 그는 다른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다른 일이 없어서 의아했다. 그는 습관처럼 사람들과 시선을 맞추고 대화한다. 여전히 안경을 낀다. 많은 이들이 너 사실 보고 있는 거 아니야? 붙들고 시비를 건다.

자신이 시력을 잃었음을 증명하면서 그는 일을 한다.

“손을 내밀어 주면 되는데 자꾸 끌고 가요. 그러면 모든 균형을 잃어요.”

그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며 엉덩이를 내빼고 조명 아래 끌려가는 흉내를 냈다. 라디오에서는 휴가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고 그는 내게 어떤 일을 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를 일 년 정도 만났지만 여전히 처음인 사람이다. 최근의 그는 머리를 깔끔하게 자른 것처럼 보인다.

그는 안경이 없으면 불안하다고 했다. 사람들이 의심해서 맨얼굴로 다니다가 부딪혀 수십 바늘을 꿰맨 이후로는 더욱.

“이 직업도 보람이 있어요. 아픈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죠. 하지만 노래를 하고 싶네요.”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최근에 오디오북을 들었다고 했고 제목은 모른다고 했다. 아무리 많은 책을 들어도 제목을 읽을 수는 없다고 했다. 몇 달 뒤에는 유튜브를 보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게 완전 다른 세계예요.”

나는 그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고 똑같이 질문한다. 그가 운동하냐고 물으면, 나도 어떤 운동을 하냐고 묻는 방식이다. 그는 주로 계단을 올라가는 운동을 한다고 했다. 고층 건물을 오를 때면 계단을 이용하게 된 것도 그 덕분이다. 그는 찜질을 가져왔고 언제나처럼 나는 천장을 보며 누웠다.

그를 보면서 심재휘 시인의 <중국인 맹인 안마사>를 떠올렸다. ‘손으로 더듬어도 잘 만져지지 않는 것들아 / 눈을 감아도 자꾸만 가늘어지는 것들아 // 숨을 쉬면 결리는 나의 늑골 어디쯤에 / 그의 가게가 있다’*

최근에는 캐치볼을 하고 종종 찾아간다. 그는 캐치볼을 모른다고 했다. 나는 침착하게 공을 던지고 받는 간단한 놀이라고 말했다. 다치지 않게 주로 연식구를 던지고 글러브로 잡고 대부분은 공을 잡으러 뛰는 시간을 보낸다고. 그는 야구 같은 거네요? 말했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내게 어떤 일을 하냐고 물었고, 다시 그가 지압해줬던 유명한 강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처음 방문한 사람처럼 지압을 받았다.

*그의 지압 솜씨는 좋다. 눈을 감아도 자꾸만 가늘어지는 것이 있을 때, 나는 그를 찾아간다. 


아이들

“그리고 몇 가지 제합시다. 누가 저것을 만들었느니 하는 얘기를요. 우리 아닌 문명, 우리 아닌 존재, 신? 그런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할까요? 중요하지요. 중요하지만 필수적인 것은 아닙니다. 물론 다른 대원들 얘기도 중요하고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말할 것은 여러분을 다소 불쾌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의 동료들은 각자의 태도가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어요. 그는 그런 시선이 어려운지 원탁을 내려다봅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쳐들어요.

“저 별에 대해 알고 난 이후로 난 생각을 검열하기 시작했습니다. 옳지 않은 생각, 악한 꿈을 꾸게 될까 두려웠던 겁니다. 생각을 자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전에는 사실 생각을 많이 했지요. 반사회적이고 반인륜적인 거요. 사람을 죽여보기도 했습니다. 물론 머릿속에서요. 이 안에는 제가 죽여버린 대원도 몇 명 있습니다. 머릿속에서. 살인은 실시간으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리고 코로 맡을 수 있고, 아까 꺼낸 사과와 같이 만져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내 머릿속에는 애걸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이 가엽고 눈물겨울수록 그들을 해치는 내 상상은 더 즐거워져요. 그들은 말하지요. 멈춰달라고, 괴롭다고, 미안하다고 말입니다. 이보다 더한 생각도 얼마든지 있을 겁니다. 이를테면 누군가의 머릿속에는 아이들이 등장합니다.”

안 좋습니다. 대원들은 험악한 상을 하고서 당장이라도 그의 입을 틀어막을 것 같아요.

“여러분이 했던 것 중에 가장 추악하고도 정당하지 않은 생각은 무엇이었죠? 기억하고 있습니까? 기억에서 사라졌어도, 그것은 생각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생각은 이뤄졌어요. 박해자가 등장하면 다행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무고한 희생양들이 서식합니다. 저 별에서 피와 살을 가지고 만들어졌습니다. 내겐 그것이 영화 속의 일처럼, 연출된 일처럼 여겨지지 않아요. 내가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일과 같이. 그리고 이제 모르게 되었어요. 나와 여러분이 누군가의 상상 속에서 그려진 그림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게 되었어요. 그러므로 난 같다고 느껴요. 알면서도 생각할 수 있습니까? 묻어 넘길 자신이 있어요? 난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과 저들은 구별되지 않으니까요. 이제 나는 인간이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별을 다림대로 하여 우리의 영혼을 고르게 펴야 한다고요. 삶이 곧 수양일 수 있도록. 그를 위해서 우리는 윤리를 다시 얻어야 합니다.”


수의 무녀 - 입출력의 건 - 화상 담당자가 유약함 - 머릿속 사과, 우리 손에 들어온 - 정비공 대원 - 갑론을박 - 양가감정 - 윤리의 감각 - 아이들

스피커

스피커는 종이를 한참 들고 여러 번 읽었다. 그는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스피커는 어떤 위대한 목적 때문에 광산에 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확실히 주술사 공동체에 몸담고 있었고, 그들이 하려는 일에 대해 아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벌써 그 일의 실행원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가진 제약이 너무나 괴롭고 피곤한 것이어서 의지를 가지고 어떤 목적을 위해 실천하는 일 같은 것은 평생 불가능하리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제약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자신은 언제나 마지막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그의 삶꼴에 비추어 보았을 때, 제약에서 뜻하는 장소라 함은 예컨대 고유한 이름을 가진 곳이었다.

가려고 하면 어떻게 되는지 그는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제약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어린 시절의 스피커는 아무 생각 없이 잡화점에 들어갔다가 다음 날 주인 내외가 모두 죽어버렸음을 알게 되었다. 주인의 안부를 살피러 들어간 이웃도 다음 날 죽어버렸다. 그런 식으로 마을 사람 다섯 명이 죽었다. 그가 태어난 이래 나가는 사람만 있고 들어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에 주민들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마을에서 가장 유식한 사람, 주술과 제약의 존재를 알고 있던 사람에 의해 스피커는 지목됐다. 주민들이 그를 두려워하며 내쫓으려고 하였으나 내쫓긴 곳에서 사람이 죽어 나올 것이므로 내쫓을 수가 없었다. 스피커는 고립되었다. 한편 주민들은 스피커가 가진 주술에 기대를 걸었다. 유식한 사람은 말했다. 제약이 강력할수록 주술의 힘도 강력하다고. 주민들은 스피커의 손에서 토실토실한 암망아지가 히힝 하고 나타나기를 바랐다.

그러나 스피커가 제약의 대가로 얻은 주술은 역시 위험한 것이어서, 주민들은 이제 그를 진짜 악마로 여기기 시작했다. 마을 주민들은 하나둘씩 다른 마을로 떠났고 그가 여덟 살이 되었을 때는 부모도 그를 떠났다. 스피커가 머무는 장소에는 방문자도 재방문자도 영원히 없고 억지로 가려고 하면 그다음 오는 사람들이 죽는다는 것. 그것이 그의 제약이었다. 그는 주민들이 남기고 간 것들로 연명했다. 몇 년이 지나자 남은 것이 없었다.

잡화점에서 조악한 지도 몇 장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제약을 이해하고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근방의 지명을 샅샅이 외웠다. 스피커는 이름 없는 길이나 절벽, 숲만을 골라 돌아다녔다. 마을 근방을 서성이기도 했지만 들어갈 수는 없었다. 다만 스피커는 멀찍이에서 마을이 내뿜고 있을 활기를, 그들이 누리고 있을 웃음이나 마음 같은 것들을 상상으로 헤아려 볼 따름이었다. 

스피커는 그가 걷는 길들에 이름이 붙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스피커는 거지처럼 길과 길을 떠돌아다니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구했다. 마을을 떠난 주민들에 의해 스피커의 이야기가 퍼졌다. 스피커는 돌팔매를 맞거나 기껏 얻은 것을 빼앗기기도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주술사 하나가 그를 만나러 왔을 때 그는 열세 살이었다. 스피커가 목을 매달기 직전이었고 세상이 얼음으로 뒤덮이기 전이었다.

2020년 10월 7일 수요일

시인의 방법

에무시네마에서 기획한 짐 자무시 영화 <패터슨> GV ‘시인의 방법’에 참여했다. 무슨 내용의 영화냐고 묻는다면 미국 뉴저지 주에 사는 버스 운전사 패터슨이 일상을 보내며 시를 쓰는 이야기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극 중 패터슨이 쓴 글 중에서 펌킨이라는 시가 인상 깊었는데 “나의 작은 호박, 난 이따금 다른 여자들을 떠올리는 걸 좋아해, 하지만 사실은 말이야 당신이 날 떠난다면 나는 심장을 뜯어내고 다시 되돌려 놓지 않겠어, 쑥스럽군” 하며 적는 부분마다 달콤한 여린 속을 사각 파내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패터슨에게 호박이 있다면, 내게는 뭐가 있을까 싶어서 최근에 발표한 시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이번 기획은 시인들은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시가 하루를 어떻게 나아가게 하는지 이야기를 나누면 된다고 했으니까.


땡초는 우스운 발음
너는 땡초김밥을 집어 먹으며 먼 미래를 생각한다

땡초의 속도를 짐작하기 어려운 우리는
단단한 과육의 알싸한 고추를 곱게 짓이겨 삼킨다

태양에 잘 말린 고추를 밥에 감아서
다시 혀끝으로 땡땡한 우리의 영혼 속으로

집어 넣는다

웃겨 하지만 눈물 나

우리는 눈물이 나는지 웃긴지도 구분 못하는 사람들

너는 일터에서 뒤집힌 속을 달래지 못한 채 일을 하고 차마 땡초 때문에 아파서요 이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사각지대를 찾는다

식은땀이 흐르는 미래가 작은 것에 있었고 뜨거운 고독이 고추에 있는데 영혼이 이런 보잘것없음에 무너진다면 어떻게 하지 싶어서

고추도 더 깊게 사각지대를 찾는다

제가요 땡초김밥을 먹다가 죽을 뻔했는데요

이 말을 차마 하지 못한
노동자의 웃김과 슬픔의 스코빌 지수를

땡초는 조금 알고 있을 것이다


「땡초」 전문


일터에서는 아프다고 말하기 애매한 지점이 있다. 적어도 다들 날이 서 있을 때, 땡초라는 발음을 하고 울어버릴 수는 없다. 내게 품위라는 게 있다면 이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날 나는 숨어서 일을 마저 끝냈지만 조금 억울한 표정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패터슨 영화를 보고 말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시인의 일상은 어떻게 꾸려지는가.
시인들에게 고요함과 시간은 언제 찾아오는가.

이런 질문을 들으며 나는 객석에 앉은 사람들의 발을 관찰하고 있었다. 다리가 길어서 제대로 구부리지 못하는 사람, 발과 발을 어긋나게 걸친 사람, 한 발은 쫙 펼치고 고개를 비스듬히 한 채 듣는 사람. 사람들이 낭독을 듣고 있을 때, 나도 보기 마련인 것이다. 그때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발의 얼굴로 시를 쓰면 좋겠다 싶었다.

“제가 여기서 발의 자세를 계속 보았는데요. 언젠가 남기려 해요. 누구의 발인지 알아볼 수 있을까요.”

행사가 끝나고 사인을 요청한 분이 내게 말했다.

“땡초 시집 꼭 살게요”

땡초는 우스운 발음이지만 들으면 속이 얼얼하다. 가장 최근에 쓴 거라 시집에는 없지만,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땡초 시집이 나왔어요, 하고 말할지도 모를 일이다.

2020년 10월 6일 화요일

어떤 이야기예요?



산문을 쓴다고 했을 때 그는 어떤 이야기냐고 물었다. “만났다가 헤어지는 이야기예요.” 그가 “재밌겠다.” 말했다. 나는 유자 맥주를 마시면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사랑하고 헤어지는 이야기를 수집하고 기록하는 줄 안 모양이었다. 나는 헤어지는 법을 잘 모르는 사람인지라 고개를 갸웃대다가 “본인 경험 말해주면 적을게요.” 말했다. 뒤에서는 감바스를 끝내주게 하는 법에 대해서 논쟁이 붙어 있었다. 통마늘이 끓기 시작할 때! 나는 말이야, 간식처럼 먹는다고. 남자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는 목검을 쥐고 어둠 속에 서 있던 사람의 이야기를 꺼냈다. 집에 돌아갈 때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며 잘 가, 라고 말해준 게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도 생각하기로 했다. 인사 없이 헤어진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기간도 정해보기로 했다. 등단을 한 지 꼬박 십 년이 됐으니까 그때부터 지금까지를 기준으로 삼으면 좋겠다 싶었다.

전화로 하염없이 울기만 하던 동기가 생각났다. “언니, 나 어떡해.” 사랑이 깨지고 그가 소리 내어 울었을 때 듣고만 있었다. 곰 세 마리 노래를 부르며 덩실덩실 엉덩이 춤을 추던 아이들도 생각났다. 어린 친구들을 가르치면서 자잘하게 헤어지는 것에 익숙한데 괜찮은 줄 알았다가도 불쑥 떠오르고 마는 것이다. 이런 글을 쓰는 줄 모를 텐데 무한한 신뢰를 보여준 편집자님도 생각났다.

시인으로, 가끔은 아이들을 만나는 강사로 매주 백여 명 정도의 사람을 만난다. 매일 8시간의 업무를 보는 사람이 되었을 때, 그제야 이들이 사라지기 전에 기록해야겠다고 결심이 섰다. 

어디선가 통마늘 끓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소개: 미아와 접시

미아

너는 모자를 쓰고 있다. 너는 장난을 한다. 너는 뭔가를 이룩하고자 한다. 너는 추동된다. 너는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이다. 너는 쫓아간다. 너는 가는 길에 장난을 한다. 나처럼. 너는 길게 이어지는 장난을 한다. 너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는다. 너는 쫓아가는 사람이 아니게 된다. 너는 비 오는 하늘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쓴다. 너는 미아다. 너는 길을 잃은 사람이다. 너는 더 이상 힘도 없을 때까지 달린다. 너는 바보 같은 난쟁이이며 드높임이다. 너는 말을 한다. 너는 기다림이다. 너는 언제나 웃고 있는 사람이다. 너는 길에서 물건을 줍는다. 너는 그것을 잠시 바라본다. 너는 야구공을 갖고 있다. 너는 그것을 던진다. 너는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일 뿐이다. 너는 벗어 놓았던 모자를 다시 쓴다. 너는 기다림이 끝났다고 말한다. 너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다. 너는 손가락으로 빈 공중에 글씨를 쓴다. 너는 비가 오는 거리를 걷는다. 너는 다 끝났다고 말한다.

접시

그때 너는 접시를 떨어뜨리곤 곤란한 얼굴로 이쪽을 봤어. 그것이 네 접시였는지 혹은 내 접시였는지 구별은 필요치 않았어. 단지 접시를 떨어뜨리는 소리가 있었다는 사실. 착각하지 말라던 네 말이 떠올랐어. 그때 너는 접시를 하나 더ㅡ일부러라는 것 같아ㅡ 떨어뜨렸지.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인물이 된 것처럼 너는 접시를 떨어뜨릴 때 거실의 커튼에 휩싸여 있었단다. 그렇게 일부러 떨어뜨려 놓고서도 너는 이쪽을 봤지.
할 말이 없었어. 그저 네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사실. 그것이 네 접시였는지 내 접시였는지 몰라.


*<미아와 접시>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글이 올라오는 태그입니다.

2020년 10월 4일 일요일

탄천



하고 싶은 것을 생각한다. 예를 들면 언어를 알아가는 것. 새의 이름을 소리내어 암기하는 것. 높고 깊은 휘파람 소리를 듣고 새의 시선을 떠올리는 것. 지금 그의 목덜미에 달라붙은 벌레의 딱딱한 등갑을 건드려보는 것.

지렁이가 기네요. 뻔한 말을 물수제비 뜨듯 상대방에게 던져보는 것. 청둥오리의 물장구 사이에 있는 붕어의 입을 오래 바라보는 것. 저 붕어는 오리를 삼킬 수도 있겠어요. 트랙을 떠도는 말과 말 사이를 밟아보는 것. 귀와 어깨를 멀리 하고 턱을 당겨 힘주어 걸어보는 것.

탄천을 산책하며 생각했다. 개미, 지렁이, 볕, 자전거, 개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구나. 살아있는 것도 조금은 그럴싸하다고. 동방삭도 이런 마음으로 삼천갑자를 살았던 거 아닐까. 그러다가 실없이 숯을 씻었던 이들을 지나치지 못하고 끝내 건드려본 거 아닐까.* 

점심시간, 벤치에 앉아 새의 기척을 찾는 것. 이건 호랑지빠귀 같아요. 광공해에 부딪힌 새를 보다가 “새들이 토마토였다면 사람들은 바뀌었을까요?” 끝끝내 질문하고 마는 것. 

만나자마자 이별한 여름새, 그게 우리의 목소리 같았다. 





*삼천갑자 동방삭. 대략 18만 년을 살았다. 동방삭을 잡기 위해 저승사자들이 숯을 얻어 시냇물에 빨았고 그 모습을 본 노인이 삼천갑자를 살아도 이런 꼴은 처음 봤다고 말을 걸었다가 덜미를 잡혀 끌려갔다고 한다. 그 장소가 탄천이다.



2020년 10월 3일 토요일

헤어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어느 날, 작은 병원에서 한 인터뷰를 보았다.

“여기처럼 조그만 도시에선 한 사람의 죽음도 꽤 큰일이에요.”*

가끔은 익숙한 사실이 나를 의아하게 만든다. 서울에서 오래 살았다는 것, 지금 마시는 커피에서 정직하게 커피 맛이 나는 것, 결국에는 모두가 너무 사람 같아서 아무도 사람의 이야기에 귀기울일 수 없는 것.

산다는 건 만난다는 말이고 결국에 헤어진다는 말이다.
이제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조그만 도시에서 벌어진 큰일처럼 느껴진다.

미래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당신을 만나고는 그런 결심을 하고 적었다.


*넷플릭스 <판데믹:인플루엔자와의 전쟁> 인터뷰.
*이 산문집은 3년 전에 계약한 것이다. 일일 연재를 목표로 삼고 있다.

2020년 10월 2일 금요일

인어의 뼈

이 아이들은 마르크스를 안다. 경제학자 마셜을 안다. 가끔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공자나 순자에 대해 떠들기도 한다. 그런데 왜 고전 동화를 모를까? 
대부분 외국에서 살다 와서 그런 거 아닐까요? 이선생이 말했고 그런 아이들을 두고 고전을 패러디한 작품을 논하자니 영 껄끄러웠다. 영유*를 다녔든 외국 학교를 다녔든 뭔지는 알아야 뭐가 바뀐 건지 찾아낼 수 있지 않나.

분명 아이는 <심청전>을 안다고 했다. 한선생은 들었다.

“옛날 옛적에 심청이가 살았는데, 효녀라서요. 아버지가 앞을 못보니까 눈 뜨게 하겠다고 쌀 삼백석이랑 목숨을 바꿔서 바다에 빠져요.”

“그래. 계속 말해볼래?”

“바다에 빠져서 용왕을 만나는데요. 용왕이 병이 있어 간을 구해오면 아버지 눈을 뜨게 해준다는 거예요.”

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토끼를 만나러 다시 육지로 가는데요.”

“진원아. 혹시 자라 등장하니?”

“네? 맞아요.”

한선생은 <별주부전>의 결말과 이본에 실린 몇몇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얼굴이 붉어졌다. <심청전>의 간과 <별주부전>의 간을 엮어 새로운 서사를 만들다니 ‘아주 창의력이 뛰어나구나.’ 넘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는 패러디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렇다면 심청이는 몰라도 인어공주는 알지 않을까?

“선생님, 저 정말 인어공주 내용을 모르는데요.”

이 한 마디에 애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그를 머저리 취급했다. 애들은 저마다 쫑알대며 “책을 읽어.” “너 금붕어냐?” 무해하면서도 순수하게 공격적인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한선생은 다른 친구들에게도 물어보았다. “인어공주는 보기드문 새드엔딩인데, 알고 있니?”

그러자 그들은 일제히 외쳤다.


“죽어요?”


도대체 뭔 내용을 알고 있는지 예상이 가능하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월트 디즈니를 본 세대인 거다. 인어공주가 물거품이 된다는 것도 모르겠지. 한선생은 다시 줄거리를 이야기해줬다.

“옛날 아주 옛날에, 그래. 너희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래야 동화겠지? 인어공주가 살고 있었어. 그는 우연히 물가 근처에서 왕자를 발견해. 근데 하필 왕자가 멋있었던 거지.”

“선생님. 옆에 하인한테 반하면 어떻게 돼요?”

“왕자 머리 좀 치워 봐. 이런 마음으로 쳐다보고 있었겠지? 그러나 이런 동화들이 그렇듯 다행히도 왕자는 근사했고 그가 탄 배가 난파되어 인어공주가 구해주게 된 거야”

“근데 좀 이상한 게 왕자들은 물에 빠지면 허우적대지도 않고 왜 바로 기절해서 둥둥 떠요?”

이 말에 몇몇은 한심하다는듯 “생존 수영을 못 배웠나보지.” 떠들었다.

“암튼 그를 구한 뒤 얼굴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기척이 들리지 뭐야. 그래서 숨어서 봐. 낯선 공주가 왕자를 발견한 거야. 왕자는 그 공주가 자신을 구했다고 생각하지.”

“와. 공주 에바*다. 속인 거 아니에요? 왕자 조금 모자란가봐.”

“이웃나라 공주도 그리 생각했을 수 있지. 속이려던 게 아니라 조금 어벙하지만 원래 이런 왕자인가 보다 하고.”

한선생이 한 마디씩 할 때마다 아이들은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인어공주는 글을 못 써요? 말을 못하면 읍, 읍, 하면서 몸을 쓰면 되지. 답답해.” “아니, 언니들이 칼을 구해다 줬잖아요. 머리카락과 바꿔서 기껏 구해왔는데 왜 못 찔러요.”

“많이 좋아했나보지.”

“선생님. 저는요. 그 칼로 왕자를 백 번도 더 찌를 거예요.”

“아. 지온아. 백 번은 좀.”

아이들의 질문은 끝이 없었다. 한선생은 자신이 알고 있는 인어공주의 이야기가 맞긴 한지 의심스러웠다. 너무 오래전에 읽고 본 내용이다. 그들은 상온에서 물거품이 되는지, 아니면 물속에서 공기방울의 형태가 되는지 멈추지 않았고 그때 한 아이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며 마지막 질문을 했다.

“인어의 뼈는 어떻게 생겼어요?”

“아마 우리가 알고 있는 인어공주라면 상체는 사람의 뼈와 비슷하고 하체는 물고기 같지 않을까.”

‘예를 들면 고등어 같은?’ 말은 속으로 생각했다.

“정 궁금하면 생선 먹을 때 가시를 잘 살펴보렴”

아이들은 저마다 인어공주에 대해 떠들었고 한선생은 그날 고등어조림을 먹으면서 인어의 뼈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영유: 영어 유치원
*에바: 오버하다를 달리 쓰는 말




20년 9월의 모금통

메시지 모음

예쓰잼
직업입하기다리는중


이달의 격려 수 (누계)

모든 격려: +3 (28)
―――
예쓰 예쓰 티쳐: +2 (2)
직업 전선: +1 (3)


이달의 총격려금

11,000원


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17일 / 5,000원 ― 예쓰 예쓰잼
28일 / 3,000원 ― 예쓰예쓰
28일 / 3,000원 ― 직업입하기다리는중


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예쓰 예쓰 티쳐 [入] ☞ 8,000원
직업 전선 [入] ☞ 3,000원 (기금 기부)


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121,637원 (3,000원 + 118,592원 + 45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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