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것은 우리들이 쌓아올린 젠가일지도 모르겠다고 너는 말했다. 「저것은 말이야.」 너는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 「누군가는 밤하늘이라고 하는데 내 눈에는 아래로 감긴 천사의 속눈썹 같기도 해.」 그렇다면 참 거대한 천사라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도회지의 밤하늘 밑 여기에 누워 있었다. 너는 저 속눈썹이라고 하는 것을 자세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 천사가 웃고 있는지 아니면 울고 있는지, 무표정한지를 알면 속눈썹이 어떻게 움직일지 또한 조금은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이 천문을 보는 능력이라면. 「있잖아.」 너는 조금 별개의 단락으로 나뉘는 식으로 그렇게 말을 했다. 「저것은 젠가일지 몰라. 놀이하는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건드려서 빼내는 거야. 그러려고 완성했겠지.」 마치 속눈썹이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일과 같군. 나는 생각하면서 대답했다. 「그게 우리들이라는 거야?」 「아니, 우리들이 쌓아올린 젠가라는 거지 저 젠가를 쌓아올린 우리들이라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야. 그런 걸 말하고 싶은 게 아냐.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나는 공들여서 생각한 뒤에 말했다.「아닐 수도 있겠지.」 「그렇겠지.」 저기 네가 갖다놓은 사다리가 보였다. 카시오페이아 별자리였다. 타고 올라가면 무게중심 때문에 넘어갈까봐 걱정되었다. 깊은 우주에서 굴러떨어지는 일. 나는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성좌가 되는 일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있을 수도 있지.」 「맞아. 그럴 수도 있어.」 「젠가는 무너지고 사다리는 기울지. 거기 매달려 있던 것들은 모두 다 떨어지고 말아.」 그렇다면 저 천사가 눈을 감고 있다고 했는데, 그래서 속눈썹이 강조되어 보이는 것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저 천사가 눈을 뜨는 순간이. 「젠가가 무너지는 타이밍이 아닐까?」 너의 말에 나도 그런 생각이 든다. 사다리를 갖다 놓은 이유를 알겠다. 「우리가 무심코 습관적으로 저 젠가처럼 보이는 하늘에서 배들을 하나씩 빼내고 있었단 말야.」 그 배들은 하늘을 조립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하나가 빠지면 하나를 넣어줘야 한다. 안 그럼 하늘이 무너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큰일이지. 「그런 생각을 했어.」 「하늘이 무너질 거란 생각?」 「응.」 너의 불안이 너를 눈 감게 만든다고 해도. 「저 천사가 눈을 뜨는 일은 우리가 늙을 때까지 볼 수 없을 거야.」 그렇겠지. 에필로그인 마을이 왼쪽에 보였다. 저 사람들은, 저기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다 어떤 이야기를 겪고 난 후의 사람들이라고 한다. 안온하고 또 적요롭다. 그런 일상을 사는 게 난 부럽기도 했다. 재밌는 것은 정신이 없는 것만이 아니다. 「복도에서 빛이 멀리까지 나아가는 것도.」 재밌는 것의 일부다. 「새 소리가 울려퍼지는 것도.」 재밌는 것의 하나다. 「어느 한 부분의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것도.」 재밌는 것의 일종이다. 「도둑을 염려하는 것도.」 우리 생활의 구성물이다. 그것들을 하나씩 젠가처럼 빼내면 어떨까? 저 하늘이 갑작스레 무너지듯 생활이 산산조각나면. 다시 이야기는, 이야기는 시작되고. 그 때가 저 왼쪽에 있는 에필로그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다시 나설 때인 거겠지. 이야기를 겪은 사람들은 저 천사를 지상으로 끌어낼지도 모른다. 자신이 지금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아는 감각으로 말이다. 저 아이는 신발 끈을 묶지 못해 현관 밖으로 나가지 못하지만 저 아이도 어떤 멋진 이야기의 에필로그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곧이어 확신이 없어졌다. 「대단원의 막이라는 젠가 피스는 그렇게 생겨나선.」 「응.」 「그걸 빼낸다면 말이야. 에필로그란 게 세상에서 없어지면 말이야.」 그렇게 대단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 그냥 저 물속에서 빛의 알갱이들이 원랜 있었다가 없어진 정도로. 저기에 사다리가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사다리는 조금 기울어져 있었다. 누가 건드리지 않아도 곧 쓰러질 것 같았다. 「그 정도의 영향만이 세상에 남게 되는 것일 수 있지. 별일은 아닐 수 있고, 그 작은 일이 정말 큰일일 수 있는 그런 세계에서 어떤 사람들은 살아가.」 그런 것 같다. 저 밤하늘은 그렇게 우리들을 상관하지 않는 것 같다. 「이쪽에 가담할래?」 너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세상을 젠가로 보는 집단에 말이야. 꼭 집단까진 아니어도. 안부를 묻거나 하는 대신 있잖아, 같이 놀고 싶었어. 저 천사가 저렇게 눈을 뜨고 있기 전까진 말이야.」 너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밤하늘이 무너지고 있다는 말에 양옆으로 따옴표를 쳤다. 천사의 속눈썹이 무수히 떨어지고 있다는 말에 다시 양옆으로 따옴표를 쳤다. 그런 식의 이야기가 누군가들이 쌓아올린 젠가로 무너질 때에 나는 궁금함이 생겼다. 저 속눈썹들이 지상에 닿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눈처럼 녹을까? 나는 눈 뜨고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야외에 누워 있기엔 추운 겨울이었다. 「눈 온다!」 네가 그렇게 소리쳤고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군. 나로 인해 따듯하길 바라. 「젠가를 망친 벌이야.」 필연적으로 젠가는 망쳐질 수밖에 없고 그래서 망친다고 말하는 것이 이상하다. 그러니 젠가를 한 너희들이 벌이야. 「이게 벌이야?」 웃고, 또 웃는구나. 눈이 와서? 젠가가 무너져서? 사람들이 파하고 난 뒤 나는 여기 누워 있었다. 아 아까 했던 젠가 재밌었다, 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누워 있었다. 이게 세기말의 에필로그인가보다. 「그럼 안녕.」
2025년 1월 31일 금요일
야쿠자의 딸
그녀는 야쿠자 조직원의 딸이었다. 이 시기 조직은 한창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러다 제안이라고 할 만한 것이 위에서 전달되어 왔는데, 그녀에게 있어 부담스럽거나 안 좋게 생각된다면 응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곧 있으면 다가오는 그녀의 학교 졸업식에 그녀의 아버지와 같은 위치의 조직원들 두엇이 가 거기 올 사람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에 만일 응한다 해도 아버지의 조직 내 위상에 대한 보상은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조직 내에서의 위치란 그런 식으로 정해지고 참작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건에 대한 보상은 철저히 그녀만을 위한 것, 그녀에게 빚을 지는 일로서, 아버지의 경우 당연히 그녀의 졸업식에 참가할 테지만 이 일과 관련된 어떤 일도 맡기지 않겠다는 입장이 전달되어 왔다. 가족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이런 입장은 그녀가 아닌 아버지에게로 전달되어 왔다. 이런 언급을 통해, 아버지가 조직의 일로 반쯤은 그날까지 다소 신경이 소모될 만한 입장에 놓였다는 것과, 조직이라는 데의 일처리가 어쩔 수 없이 거칠고 혹은 그런 이름의 구성체답게 당장의 화급한 어떤 일에 맞춰서만 조금 강제적으로, 정신 없이, 혹은 일사분란하게, 처리되는 것이라고 그렇게 여겨볼 수 있었다. 졸업식 당일 그녀는 그 조직원들 두 명을 처음 봤는데,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녀가 어릴 적에 이혼했고 그래서 친한 동생 한 명과 아버지, 그리고 그 말단 조직원들 두 명이 오늘은 이 자리에서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조직이 그들을 이 자리에 파견한 이유는 그녀의 친한 동생에게 접근하기 위해서였다. 동생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야쿠자의 딸이었고, 그녀보다 조직의 일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고, 어느 정도 사업적인 관계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 다른 점이었다. 동생의 가족이 속한 조직은 얼마 전 그녀의 아버지가 속한 조직과 대립을 했고 유혈사태를 만들었다. 그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어 두 조직은 대외 활동을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고 있는 상태였다. 이 졸업식에 찾아온 조직원들 중의 한 명은 이지적인 수려한 외모로 자연스러운 웃음을 흘렸으며 말하자면 제비 과인 듯했다. 조직에서 그런 얕은 생각으로 인선을 정했다는 티가 났으나, 그는 자연스러운 웃음을 흘리는 것 이상으로 더 뭔가를 하는 부분은 없어보였고 그 점이 다시 제비 과인 것 같았다. 또 다른 한 명은 큰 덩치의 사내였는데,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편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위압감을 주는 그런 부분에 있어 그렇게 해야 할 것으로 전에 생각을 했는지는 몰라도, 행동거지가 부드럽고 매너가 있든 배려심이 있든 그 사이에 있는 그 어떤 것이 없는 것 같지 않았다. 동생과 관련된 그 조직에서 동생의 아버지는 그녀의 아버지와 비교해 좀 더 높은 위치에 있었으나, 조직의 향방을 가르는 의사결정의 부분에서 목소리를 낼 정도로 그런 높은 위치는 아니었고, 단지 이렇게 맞은편 조직에서의 의사 타진을 하기에 적합할 정도였다. 조직 일이란 게 보편적인 그런 체계를 갖추고 있진 못한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인지 현금 봉투를 내미는 큰 덩치의 사내의 무뚝뚝한 태도는 역설적으로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또한 배려심 있고 매너 있는 어떤 행동거지를 연상케 했는데, 그러면서 제비 과의 사내가 덧붙여 말한 것이었다. 「위에서 복잡한 말 필요 없이 전달하라고 했던 부분입니다. 자리에 참석할 수 있게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그녀로서도 이것은 반쯤 애매한 일이었다. 어쩔 수 없어서 허락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예전부터 소원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한 번쯤은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어릴 적에 마주 앉아 들었던 입장으로 외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고, 따라서 친한 동생이 졸업식에 참석하겠다는 말을 들을 때의 표정도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찾아온 조직원들 두 명의 외모나 성격 이런 면이 겉으로 보기에 나쁘지 않은 것 같았고, 아버지가 이런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구나 싶어 무언가 정체 모를 호감이 일기도 했다. 그들이 건네온 현금 봉투는 그녀에게만 전달되는 것이었고, 친한 동생에게는 전달되는 것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녀에게만 돈을 전달함으로써 그들이 원래는 이 자리에 자연스럽게 올 것이 아니었는데 그녀의 동생과 이제부터 할 말이 있음을 전달하고 있는 그런 순간이었다. 그녀의 동생이 이런 기색을 알아차리곤 말했다. 「그쪽에서 나한테 할 말이 있는 건가요?」 순박한 덩치 큰 사내가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어디서 오셨는데요?」 「맞은 편의 조직에서 왔습니다.」 이지적인 인상의 남자가 그렇게 말했다. 「언니가 그쪽과 인연이 있었나요?」 「그녀의 아버지가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당분간 싸움이 없으면 좋겠다는 전언입니다. 아시다시피 상황이 좋지 않으니까요.」 「잘 전달해보죠.」 「좋군요. 일은 끝난 듯하군요.」 일이 끝난 뒤에 그들 다섯 명은 식사를 하러 갔다. 부담스럽거나 안 좋게 생각된다면 응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일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끝난 것 같았고, 그녀는 식사 자리에서 간간이 웃으며 왠지 즐거운 기분을 느꼈다. 그러다가 식사 도중 그녀의 아버지가 말했다. 「그런데 같은 데에 있었지만. 본 적이 없는 얼굴들인데. 우리가 그리 큰 조직도 아니고.」 그녀와 동생의 얼굴에 의문 부호가 떠올랐다. 조직에서 나왔다고 하는 두 명의 얼굴에는 당황스런 기색이 어리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실 저희도.」 「가족의 일로 잠시 불려 나온 것뿐입니다. 어린 딸의 졸업식을 망치면 안 된다고 해서요.」 아버지가 말했다. 「거참. 한쪽은 그렇게 보이는데. 다른 한쪽도 비슷하게 마찬가지고.」 「그렇지요. 저희가 식사는 사죠. 그렇게 하라고 전달을 받았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뒤 웃어 보이는 둘의 얼굴은 똑같이 이런 별다를 것 없는 일상 속에서 특별히 지시받은 사실 그대로 따르는 것에 짐짓 유쾌한 기색이었다. 그 말을 듣고 그녀의 동생은 조금 당황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언니인 그녀의 경우 가족의 일로 불려 나왔다고 하는 그들에게 어떠한 동질감도 느껴지질 않는 것이 조금 이상하게 여겨졌다. 오히려 조직원인 줄 알았을 때가 같이 있기 더 즐거운 것 같았다. 그녀가 아버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꼭 외부인들을 불렀어야만 했나요?」 「글쎄. 내가 결정한 건 아니라.」 「아버지가 일하는 데잖아요?」 「그 말대로란다. 하지만 난 말단인지라.」 「거기가 아니었으면 이 학교 졸업도 못했어요.」 그녀의 말에 아버지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고 그녀의 앞에 앉은 나머지 세 명의 얼굴에도 안온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두 명의 조직에 속해 있었던 줄 알았던 사내들이 차례로 말했다. 「사실 저희도 이 문제에 있어 전적으로 외부인들이 아니지요. 말씀하신 것처럼 부모님께서 번 돈으로 어릴 땐 지내기도 했고, 실제로도 이런 자리에 이렇게 불려 나오기도 했으니까요. 저한테는 처음 있었던 일이지만 말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듬직한 체구의 사내는 그녀의 동생에게 말했다. 「일이 안 좋게 흘러가는 것 같아 걱정이 되는군요.」 「그래요. 그렇지만 뭘 아신다고요?」 「흠. 사과를 하시는 게 좋겠군요.」 아버지의 그 말에 수려한 인상의 사내까지 고개를 숙여서 그녀의 동생에게 사과했다. 그 순간 그녀는 야쿠자 집단의 무모한 기색이 떠올랐다. 「너무 화내지 마. 그러면 진짜 야쿠자 같잖아.」라는 말을 할까 싶긴 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무서워서는 아니었다고 그녀는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또 달랐을 수도 있다. 동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음식을 입에 넣다가, 그녀의 그런 기색을 알아차린 것인지 배시시 웃어보였다.
2024년 12월 20일 금요일
후일담
K가 다 측량하고 난 뒤 사람들은 그것을 기원의 햇빛이라고 얘기했다. 저 너머의 성에서 뛰쳐나온 행렬들 이벤트는 다들 그 얘기밖에 하지 않았다. 모두 웃음 짓는 얼굴이었고 기뻐했다. 기념 리본을 매단 검은색 증기 리무진이 K에게 도착했다. K는 조수들과 함께 탔다. 그의 조수들은 경박스럽게 벌써 할로윈 복장을 입고 드문드문 이 분위기와 열기에 어울리는 흰소리들을 내뱉었다. K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 내가, 사람들을 기쁘게 했구나. 분명한 것은 전 날까지도 측량 작업이 이렇게 곧바로 끝날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아하니 조수들은 그것을 미리 안 듯했다. 그것을 모른 건 여기서 K 혼자뿐인 것 같았다. K에게 판단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저 그의 일에 깊게 몰두했었음이 이유로 여겨졌다. 나온 사람들은 K의 이름이라 생각되는 것을 연호하면서(K는 자신에게 그런 이름이 성 안에서 붙여졌구나 탄식했다) 노점을 열고 북적북적댔다. 증기 리무진은 아주 느린 속도로 천천히 나아갔다. 게다가 곧장 가지도 않고 사람들 행렬을 빙글빙글 돌기까지 했다. 성과 외부의 통신이 중단되었던 그런 단절로 말미암아 서로가 일종의 괴물들로 비친 것이라고 K는 생각했다. 내내 성 사람들이 K의 측량을 기다렸단 것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런 말을 하는 조수들의 말에선 과장의 기미가 엿보였다. 그러나 밖을 내다보면 사람들의 기쁨이 솔직하게 증명되고 있는 순간이 계속되었다. 성은 그렇듯이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지금 이 순간 해방의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K는 기원을 열었다는 말들을 수첩에다 적어놓았다. 측량이 그랬다는 것인데, 어떤 맥락인지 알기가 어렵고 단지 거기 담긴 감정만이 진실된 듯했다. 그의 작업이 이렇듯 큰 기쁨으로 변질될 줄은 몰랐으므로 어정쩡하게 한 번 웃어 보이기도 했다. 묵빛의 증기 리무진에서 내리고 K는 성의 총독을 만났다. 그는 K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음번의 총독은 그대라고 선포했다. 그 말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수들은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측량이 단순히 완료되어서라기보단 어떤 정치적 공작이 있었을 법도 했다. 이들은 단순히 후계자가 생긴 것이 기쁜 특유의 고립된 문화가 가진 폐쇄성을 보이는 것 같았으며 그 이전의 얼개에 대해선 짐작할 수 없었다. K는 그럼에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째서 후계자가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이 일들의 배후에 있는 것은 아까 만난 사람들의 기쁜 얼굴이었다. 그것을 부정하고 다시 어디론가 멀리 떠나기엔 그는 이미 이곳의 위정자가 되어 있었다. 지쳐 있었다. 물론 이 성에 오래된 정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K가 그런 얘기를 꺼내자 총독은 자신도 그러했다 일러주곤 한 손에 포도주를 들고 총독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하기 시작했다. 주의 깊게 듣지 않아도 괜찮다며, 자신처럼 한 손에 무언가를 들고 여유롭게 듣길 권했다. 어려운 일은 다 끝냈으니 말이네(그것도 자네가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측량 작업이 중요했던 이유에 대해서 그는 인식의 나무에 열린 선악과를 언급했다. 판단하는 언어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 과실에 얽힌 뱀에 대한 얘기를(그들은 그 뱀을 신앙한다고 했다) 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K의 드라마를 자신이 알았다는 것이다. K는 이 사람의 말이 왠지 낯설면서도 온유하게 자신의 과거 격정적인 시절을 품는 것 같아 마음이 빠져들었다. 왜 측량 작업이 기원후라고 말해지는 건지요? 전임 총독은 자신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운을 뗐다. 그리고선 그는 다시 인식의 나무에 달린 선악과 얘기로 되돌아갔다. 아마 그도 잘 알지 못하는 주제인 듯했다. K는 자신의 의아함을 해갈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쭉 진행해가도 괜찮을 듯싶었다. 그러면서 K는 하나의 기이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대로 괜찮다는 것이 그랬다. 하나의 궁금증이 생기긴 했다. 측량이 그들에게 있어 필요한 외부의 것이었다면, 그것으로 인해 무엇이 바뀌게 된 걸까? 그 이전의 일들은 측량이 아니었던 걸까? 총독은 아까부터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K는 듣고 있었고 마침 K가 궁금하던 내용이었다. 왜냐하면 그 측량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곳의 사람들이 마음껏 기뻐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말했다. 자신이 가진 땅이(총독으로부터 나온 것이긴 하지만) 생각하던 것보다 측량에 따르면 비싸게 매겨졌기에 그랬다는 것이다. K는 지나온 날들의 절망을 기억했다. 거기에는 기쁨도 함께 있었으나 앞으로는 그와 마찬가지로 슬픔이 함께 있을 것이었다. 평안함과 행복을 느끼면서 말이다. 총독의 제안을 애써 거부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될 것 같았고 K는 그럴 생각이었다. 어차피 거부하기도 어렵게 된 것 같았다. 총독은 그런 K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운이 좋다고, 자네나 나나 그렇다고 이야기했다. K는 해골의 눈두덩 안에 불이 켜져 있는 광경을 떠올렸다. 연말인 시기였고 그런 크리스마스가, 어릴 때 이후로 만나지 못했던 안온한 시기가 되돌아온 것 같았다. 총독은 수다스러웠고 그가 포도주를 마시는 일이 계속되었다. K는 그 사람이 술을 잘 못 마신다고 생각했다. 마셔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그런 이가 건네는 포도주 잔을 받고 그는 좀 더 능숙하게, 과거에 익숙했던 것처럼 몇 모금을 목구멍의 어둠 안으로 넘겼다. 총독은 껄껄 웃으면서 그렇게 총독의 자리를 넘겼다. K는 방금까지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아 조금 취한 채로 뒤에 시립해 있던 사람을 시켜 조수들이 오게 했다. 측량사 K는 이들의 형식적 위치로 전과 같이 염두에 두고 은근히 사유하는 일 대신 아까까지 총독이 그랬던 것처럼 사람을 시켜 포도주를 더 들고 오게 했다. 맥주도 가져오게 했다. 아직 익숙하지 않았지만 전임 총독만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K는 후일 밀레나라는 가수를 전임 총독이 그 자신에게 그러했듯 후임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것은 전임 총독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절망이 눈에 띄어서였다. 확신할 순 없었지만 말이다. 전임 총독은 당시보다 늙은 채로 두꺼운 토끼 옷을 입고 성 사람들 사이에서 할로윈이면 마시는 음료를 들고 있었다. K는 전임 총독과 후임 총독 사이에서 절망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 자신 이미 절망이 어느 한 시절의 집약된 것으로만 떠오를 만큼 무뎌진 다시 돌아온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K는 전임 총독이 그러했듯 밀레나에게 독특한 절망을 보았다. 이는 전임 총독의 생각과는 다른 것이었을지 몰랐으나 인식의 나무로 거슬러 올라가면 맞는 결의 생각일 거라 생각했다. 밀레나가 후임 총독으로 정해졌으니 곧이어 사람들이 다시 기쁜 얼굴로 거리에 나올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녀가 감동적인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어서일 것이라고, K는 그렇게 생각했다.
2024년 11월 24일 일요일
물건
K는 사고 싶은 물건이 있는데 그것을 사기엔 수중에 있는 돈이 조금 모자라다. 조금의 선호를 포기하면 딱 알맞은 돈으로 비슷한 종류의 물건을 살 수 있다. K는 그렇게 하기로 한다. 그런데 잠깐. 선호를 포기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물건을 사려는 계획은 취소다. 꼭 원래의 물건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닌데, 바뀐 그 물건을 사기엔 왠지 손해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원래의 물건이면 참 좋을 것이다. 하지만 수중에 있는 돈이 모자라다.
K가 사려고 했던 물건은 사실 다른 이에게 주고 싶었던 선물이다. 이에 따라 K의 물건에 대해 망설이는 마음이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K는 처음 사기로 했던 물건을 사기로 한다. 이럴 때를 위한 것인 듯 잊어버린 현금을 지갑에서 발견했으므로.
2024년 11월 20일 수요일
셋, 정원
광대가 가지를 끊고 나를 본다. 웃는 얼굴. 광대가 깎은 나무들은 테마파크인 것처럼 모양이 이상했다. 그래서 나는 마주 웃었다. 저 광대의 눈에 내가 이상하게 보였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광대가 이상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광대는 이상했다. 나는 웃음이 일그러졌고 광대는 나를 보며 웃지 않았다. 아까까진 웃었는데. 지금은 웃지 않는다. 무표정한 광대 얼굴. 그 뒤로 테마파크 같은 나뭇가지들. 광대가 내 뒤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아직 깎고 다듬지 않은 정원의 나머지 장소를. 여기는 광대의 정원이었다. 광대의 안부를 묻기보단 특별한 정원의 모양새에 관심이 있어 오는 사람들이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으나, 나는 광대 앞에서 생각이 저해되었다. 나의 리듬이 느려지고 있었다. 비 올 만하던 날씨에 빗방울이 하나 떨어졌고 나를 바라보던 광대가 다시 환한 웃음을 떠올린다. 그리고는 검지 손가락을 자기 입 위에 올렸다. 무엇으로부터? 조용하란 뜻인 걸까?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닌 걸까? 광대가 웃음을 떠올린 것은 안도되는 일이었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 앞에선 여기 있기가 난감했었으니까. 난 여기에 왜 있었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자, 김광석의 노래가 한쪽에 있는 공원 스피커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광대가 공손하게 눈웃음 지으며 왜 여기 있었는지 모를 나에게 뒤늦은 인사를 한다. 나는 광대의 시간을 빼앗고 있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광대도 마찬가지로 나의 시간을 뺏은 것과 다름없었으나, 나는 왠지 나에게 동정적인 구석이 있다고 느껴졌다. 저 광대에게는 선의가 대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무엇을? 광대는 다시 쉿, 하는 제스처를 했고 검지 손가락이 그의 입에서 다시 떨어질 때 그의 턱 주변에 걸려 있던 마스크도 함께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가 마스크를 걸고 있었던 걸 몰랐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김광석의 노래가 끝났다. 다른 김광석의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다. 광대가 손에 그러쥔 마스크를 놓는다. 김광석의 노래는 이렇다 할 감정을 담고 있었는데 와닿지 않았다. 여기로 오기 전까지 나는 좋아했었는데 말이다. 김광석의 노래를. 여기로 오기 전에 나는 어디에 있었지? 그것을 광대가 보며 눈웃음 짓는 것 같았다. 새로 꺼낸 마스크를 다시 걸고. 올라가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려오려는 듯 말을 마쳤다. 그 사이에 있던 말은 왜, 왜…… 뒷말은 잘 들려오지 않았다. 여기저기 과장된 나뭇가지 모양들을 둘러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광대가 뒤돌았고 보이지 않는 그의 입에서 나직이 아까 했던 말이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아니, 들려오기보단 다가왔다. 나에게 닿아 왔던 것 같다. 아, 생각났다. 나는 검은 고양이를 좇아 여기에 왔다. 그날은 지금처럼 공기가 습하고 빗방울이 조금씩 내려오고 있었다. 광대가 한 말처럼 그날은 오늘로 닿아 왔다.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은 그날이, 앞두었던 그날이 미루고 있었던 오늘로 왔었다는 것이다. 광대는 이렇다 할 의미를 갖고 있지 않았으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서 무엇을. 그 검은 고양이는. 나는 평범한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곧바로 그것이 후회되었다. 나는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무엇에 대한 준비를?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다 기억나지 않았어도 나는 그동안 준비할 것이 너무 많았다. 광대는 내 앞에서 웃었다. 여기서 정원 만들기를. 하고 있죠. 그 검은 고양이는. 나도 잘 모르겠군요. 광대의 말은 사실인 것 같았으나 오직 표면적인 부분만 건드릴 뿐이었고 그는 나보다 준비가 된 것이었음이 분명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어떻게 되는 건가요. 모두 노는 시간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광대 당신이. 이들을 여기로 불러 모은 건가요. 아니요. 스스로들 온 것입니다. 여기는 뭐 하는 곳이죠. 광대는 세 번째로 검지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나는 그에게서 의미를 가져오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좇았던 검은 고양이에게 가고 싶었다. 광대는 잠시 기다려보라는 듯 자기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광대의 품에는 검은 고양이가 안겨 있었다. 그렇게 광대가 나타낸 것은 광대 자신보다 더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것이. 검은 고양이가 뛰어내려 야옹, 소리를 냈다. 그리고 나에게로 다가와 발바닥을 꾹꾹 눌렀다. 나는 검은 고양이를 안아 들고 광대에게 말했다. 이것이 내 기다림의 결과입니까. 광대가 고개를 저었다. 그와 어떤 말을 나누어야 할지 몰랐다. 나는 광대나 고양이에게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고양이가 내 손등을 핥았다. 부드럽고 까끌까끌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나는 광대나 고양이를 제외하고도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나도 마스크를 쓰고 싶었다. 말할 때는 마스크를 내리고 그것을 손안에 쥐고 있다가 내려놓고 싶었다. 광대처럼. 나는 광대가 되고 싶었다. 내가 좇은 검은 고양이를 감쪽같이. 불러내는 일을 할 수 있는 광대. 허공의 만족을 위하여. 자연스럽게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에겐 이성이 있었다. 나는 광대가 아니었다. 그러자 광대가 잠시 나를 무표정하게 쳐다봤다. 나는 그 존재와 더 이상 교분 나눌 것이 없었다. 독특한 이성이랄 수 있는 광대가 그런 날 보며 마주 웃었다. 그런 뒤 그는 내 뒤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무들을, 곧 테마파크처럼 가꾸려고 가늠하려고. 나는 광대에게서 사선으로 나란히 걸으며 긴장을 버리지 않았다 고양이가 내 뒤를 따라오는지를 살폈다. 따라왔다. 나는 광대를 방해하고 서 있지 않았다. 그런 도중 가운데쯤의 허공에 누군가의 웃음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 눈에 보이는 웃음은 나타나기만 했을 뿐 자기가 누구의 것인지는 표시되지 않았다. 광대가 그 웃음을 만지려는 듯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내 품에 있던 고양이가 그곳으로 천천히 뛰어내려 걸어갔다. 거기에는 웃음이 이미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의 [흔적]이 남았는데, 나는 그것을 보고 따라 웃지 못했다. 그건 내가 모르는 것이었으며 이미 지난 웃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것을 안다는 생각이 곧이어 들었다. 지금 서로 가까워져 가고 있는 저 광대와 고양이보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왜인지 익숙한 것 같았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분위기란 것과 비슷했다. 그것에게로 광대와 고양이가 다가가 셋이 50cm 정도의 원 안에 있게 되었고 광대가 재밌는 것이 생각났다는 듯 원 안에서 할 수 있는 놀이를 하자고, 아무도 안 듣는 권유를 했다. 내가 심판이라고. 고양이는 그것을 묵살했고 둘 사이에 엷어져 가는 그 웃음의 흔적은 이제 [증거]로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더 기다리고 있으면 [쓰레기]가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된 웃음이었던 것은 밖으로 내던져졌다. 광대의 손에 의해. 그것은 탄력이 있는 것처럼 부드럽게 던져진 곳으로 내려앉았다. 기체인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것을 잡고 싶었다. 그것은 내 바람이자 한계이기도 했다. 그것은 흔적이자 증거이며 늘 쓰레기가 될 테지만 나는 그럼에도 그것이 웃음의 장막 저편의 다른 무언가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생각했다. 이 무대는 아까 나타난 웃음으로 이미 끝이 난 극이었고(아무도 웃지 않았으나) 남겨진 이들에겐 아무런 유열도 없었다. 나는 이들이 그런 배우들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떤 배우들이 광대가 되고 고양이가 되는지 알고 있다. 그건 재미있는 생각이었다. 나는 그 생각이 부끄럽기도 했고, 이들이 배우로서의 과거를 가졌다면 존중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슬레이트를 내린다는 표시를 했다. 그러자 [가능성]이 뚱뚱한 고양이의 엉덩이로 쿵 떨어졌으며 광대와 고양이는 훤칠한 인상의 남녀가 되어 고양이였던 배우가 광대였던 배우의 뺨을 한 대 때리고 뒤돌아서는 것이 보였다. [고양이]가 광대 남자 배우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원래 고양이였던 여자 배우는 휴대폰으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나는 이 정원에서 나갔고 정원 안은 금세 어두워졌다. 지금 누군가가 서 있는 이 가지 숲 아래엔 무언가 작은 새가 있었는데 그것은 웃음과는 달랐다. 말로만 듣던 슬픔인 것 같기도 했다. 지각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정원 안의 선생님에게 혼날 것이었다. 정원은 그런 생각을 하곤 웃었다. 김광석의 노래를 다시 틀며.
2024년 11월 4일 월요일
겨울 게스트하우스
타버린 나뭇가지에 대고 숨을 들이마신다. 사향이랄까. 잘 모르지만 그런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겨울날이었다. 왜냐하면 계속 겨울이었으니까. 내 언 손을 붙잡아주길. 다른 사람들은 이 장소처럼 계속 겨울이 아니다. 겨울이 되어버린 건 마주 잡을 수 있는 손들을 뿌리쳐버린 것에도 있었다. 불길로 캠프파이어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외로움을 감당하기 어려웠어서였을지도 모른다. 은근히 불길 안에 감자를 구우면서 군침을 삼키는 사람들이 내가 피운 불길을 보고 있었다. 이런 대화는 내가 숨기고 싶은 것이 그 사람들 눈앞에 드러나 있고 사람들은 모른 척을 하는 것인지 관심이 없는 건지 그저 감자들을 베어 물 뿐. 다들 제한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 얼게 하는 추위 때문에 그렇다. 누군가가 내게 건넨 화관이 풀려 봄의 꽃잎들이 잠시 동안 내 머리 위로 흩날려 떨어진다. 콧물이 나온 사람들. 불길 안에 손을 가까이한 사람들. 불길 안에 붙들리는 듯이 있는 사람들이 마주 보며 제 자신에 대한 소개라기보단 서로에게 평상시에 쓰이는 익숙한 말씨로 알게 하고 있다. 저들끼리를. 무언가 추운 것이 있는 사람들이 털레털레 웃으며 추위와 관련된 기억을 얘기한다. 여기 말고 다른 데는 무섭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면서 점점 더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없게 되어가는 불길 앞에 나는 가만히 앉아 있다. 이곳을 오래 지키고 있으면, 불길의 주인인 것처럼 굴 수 있고 또 나뭇가지도 구울 수 있다. 나뭇가지 숯을 만들기란 몸통을 베어 그렇게 만드는 것보다 더 까다롭고, 불길을 오래 주의 깊게 들여다봐야만 했다. 사향이라고 한 그 냄새를 또 맡고 싶었다. 불길 안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아까 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제한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나나 혹은 불길이. 아니면 그 감미로운 느낌들이. 이곳의 모두는 제한되어 있다. 추위 탓에. 눈송이를 돋보기로 보더라도 과학 시간에 배운 결정 모양이 안 보인다. 하지만 이 추위는 진짜였다. 대부분의 일이 그런 것 같은데, 진짜와 가짜가 뒤섞여 있고 타버린 나뭇가지를 바닥에 던지면 그 둘 중에 하나가 된다. 곧 있으면 저녁이 된다. 그렇다면 곧 밤이 될 것이며, 캠프파이어로는 이 한데서 버틸 수 없었다. 숙소로 돌아가야 한다. 자리에 눕는다. 방 안에는 온기가 감돌고 사람들은 피곤했는지 금방 잠든다. 이 밤의 밖은 정말 춥고, 난 잠이 안 온다. 불길 안에 손을 가까이한 사람들. 왜 시간을 버려가며 이곳에 온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사람들. 나도 그랬으니까. 점점 더 나이를 먹어가면서. 딱 그 부분만은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불길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그 불길이 나의 것이 되겠노라 하며 펄럭이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이곳이 된 나처럼 계속 겨울이 아니었다.
2024년 10월 14일 월요일
관람차
거구인 라울 미돈은 얼마간 기다린 뒤 관람차에 올라 2인용 의자에 양다리를 걸쳤다. 관람차가 어느 정도 상승한 뒤(지금은 계속 더 올라가고 있다) 저 멀리 아파트 단지가 만들어낸 야경이 보였다. 같이 관람차 타기를 거부했던 스테이블리가 저 아래서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생각했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관람차가 가장 드높았을 때 라울 미돈은 졸다가 가벼운 잠에 들기 직전이었다. 스테이블리는 라울 미돈이 관람차에 타고 난 뒤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굳이 위를 올려다보진 않았으나 라울 미돈이 타고 있는 관람차가 어느 정도까지 올라갔고 이제 어느 정도까지 내려갈 것인지는 곁눈으로 보고 있었다. 스테이블리는 그 남자가 안에서 잠들 거라 확신했다. 스테이블리와 라울 미돈은 각각 밤을 이 잠시 동안 느꼈다. 라울 미돈이 독백했다. 혼자군. 스테이블리도 마찬가지로 독백했다. 혼자군. 그 다음 라울 미돈이 독백했다. 우린 서로 외롭지. 그 다음 스테이블리가 독백했다. 우린 서로 외롭지. 아니, 외롭지 않아. 그런가? 그렇다면 왜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내 관람차가 어디 있는지를 보고 있지? 눈에 보이니까. 넌 보이지 않는 것도 의심하잖아. 글쎄, 곁눈을 뜨고 보면 보이던걸. 라울 미돈은 다시 독백했다. 사랑해. 스테이블리가 독백했다. 나도, 자기. 아파트 야경이 멋지더군. 자기도 봐야 해. 그 관람차에 혼자 타란 소리야? 같이 탈 수도 있겠지. 혼자 타거나. 나도 다시 그 야경을 보고 싶으니까. 그게 뭐 별거라고. 별거라니. 비좁을 텐데 괜찮겠어? 같이 타도. 그건 알아. 당신의 그 점을 난 충분히 알지. 우리가 그만큼 오래되었던가? 라울 미돈은 오래된 연인에게 보내는 독백을 시작했다. 지금은 야경이지만, 이런 것 말고 그때 우리가 봤던 일몰 기억해? 스테이블리가 지상에서 라울 미돈이 탄 관람차를 올려다보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주위에서 관람차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스테이블리를 쳐다봤다. 기억해! 라울 미돈이 안에서 혼잣말을 했다. 그는 휴대폰으로 스테이블리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스테이블리는 한껏 고조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사랑해, 기억해! 관람차 안에서 라울 미돈이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그 안에서 외쳤다. 자기, 이제 내려가! 그 일몰을 기억해둬! 스테이블리가 전화를 받고 말했다. 자기, 그 일출은 기억해? 라울 미돈이 다시 가슴을 탕탕, 주먹으로 두드리며 럭비 선수처럼 말했다. 속지 않아! 그건 다른 여자랑 봤던 일출이라고! 스테이블리가 휴대폰을 귀에 대고 말했다. 자기는 좋은 남편이 될 거야. 다른 누구도 아닌 내게. 라울 미돈이 관람차 안에서 환호성을 질렀다. 이 프러포즈는 성공적이었다. 저 멀리 아파트에 켜진 모든 불들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아파트에 켜진 불들이 켜졌다 꺼졌다 하고 있는 것은 정전의 조짐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조금 멀리 떨어진 이 놀이공원은 최악의 경우라 할지라도 비상 전력 공급망이 있을 터였다. 관람차는 멀쩡히 잘 내려갈 예정이고 라울 미돈은 곧 내려가서 스테이블리에게 뛰어들어 포옹할 수 있을 것이다. 저 멀리 보이던 아파트 단지의 불이 까맣게 꺼졌다. 정전이었고, 이 밤의 마지막 퍼즐 피스였다.
2024년 10월 13일 일요일
안개
창밖이 흐렸다. 농담처럼 안개가 끼어 있었다. 그 점으로 누구도 입 열어 화제 삼진 않았다. 침묵이 답답하기도 했다. 안개는 웃었다. 리어왕의 광대처럼. 그 광대는 틈날 때마다 규칙을 비웃고 특히 왕에게 버릇없이 굴었다. 하지만 왕은 눈감아주었다. 특히 광대에게만큼은. 그에겐 권위가 없었으므로. 그 권위를 신하들은 두려워했고 저마다 머리를 써댔기에 광대에게만 관대해진 건 그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다시 왕의 권위가 없어졌다. 특히 신하들에게만큼은. 우스워졌다. 잘 만들어진 농담처럼. 이 텁텁한 공기 안에서. 밖에 끼어 있는 안개가 넘실거리는 것이 보였다. 여차하면 이들을 뒤로하고 박차고 나갈 수도 있겠다. 몇 사람이 낄낄댔다. 그 웃음의 의미가 뭔지 이해가 되었다. 답답했던 모양인지 한 사람은 좀 전에 나갔다. 여기 모두는 그렇게 남겨진 사람들이었다. 그런 일에 신경쓰는 사람들은 그다지 없는 듯했다. 이후로는 그런 사람이 더 나오지 않았다. 옆의 창문에 안개가 끼어 흐렸다. 뭐라도 하면 좋을 것 같았다. 점점 더 후텁지근하게 되고 있었으니. 지루한 눈들. 밖에 있는 광대가 놀렸다. 안개는 광대가 하는 마임이었다. 왕은 그 사실을 알았다. 광대가 창밖에 안개를 불러낸 것을. 광대가 심각하지 않은 표정으로 짐을 싸고 있다. 떠날 생각이었다. 왕은 광대 대신 안개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래서 한참 동안이나 보고 있었다. 안개는 광대가 마지막으로 왕에게 준 선물. 우정의 증거. 안개가 하는 농담을 가까이서 들으시길. 광대가 어딘가로 저 멀리 떠나간다. 먼저 뛰쳐나간 이가 우리들의 상상을 들고 나간 듯했다. 그가 광대였다. 왕에게서 떠나간 사람, 여기가 답답해서 나가버린 사람! 멀어져 따져 물을 수도 없는 일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 자기만 손해지. 그러니까 그는 돈키호테야. 말 안장에 타고 안개에게 싸움을 걸려고 칼을 허리께에 걸고 박차고 나가는!
2024년 10월 11일 금요일
다락, 꿈
꿈. 모이. 허락받지 않은 다락으로 들어가기. 아이는 커다란 새를 껴안고 있다. 포근해. 깁슨은 법정 서기였다. 아이의 꿈은 왼쪽으로 가는 것. 깁슨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경사진. 내려가거나 올라갈 수 있는 것 중에서 분별되지 않은 그 경사를 걷고 있다. 공기는 텁텁하고 어떤 이들은 신경 쇠약. 어떤 이들은 졸리다. 피곤하고 또 피곤해. 항상의 체험. 깁슨은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그 자리에 앉아 자신의 일을 시작한다. 권위 있게. 자신의 일로 능숙을 저한테 붙여가는 사람들은 교훈적이다. 미덕이다. 여름처럼. 존재한다. 지나간 여름. 새가 뒤쫓고 있다. 아이가 뿌려주는 모이들을 향해 고개를 낮추고 뚜벅뚜벅. 돌아온 여름은 지나간 여름의 어깨 위에 얹혀 민들레 동산이 되었고. 또 어정쩡하게 다락으로 들어가기. 넌 괴상하군. 괴상한 사람들은 그런 말을 자주 들었다. 왜냐하면 괴상하기 때문이었다. 깁슨은 법정 서기로 일했다. 그는 서류에 아이의 괴상한 점들을 적었다. 처벌을 위해서는 아니었고 부모에게 조언을 주기 위해서. 가을이 와 있었고 좋게 이야기하라고 타일렀다. 호의적인 이미지가 인간에게 지닌 중요성은 컸다. 큰가? 가을은 커다랗다. 겨울은 작은 소품 상자 안에 담겨 있고. 그것을 열면 안 되노라. 꿈이 거기 담겨 있으니. 손가락에 낀 반지로 그것을 열 수 있다. 아버지가 남긴 물건. 아이는 이해받고자 했다. 이미 열었으므로 이젠 어른들의 책임. 깁슨이 빠르게 속기했다. 아이의 꿈을 보전해 줘야 해. 왜냐하면. 나에게도 아버지가 물건을 남겼으니까. 아버지가 내 등 뒤에 매달려 있네. 피곤하군. 봄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이곳이 좋아요. 날 사모한 이들을 무죄 방면할 수 있으니깐요. 아이는 봄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친구인 것처럼. 그 일은 다락으로 들어가기. 거위 깃털 침대에 누워 한잠 자고 싶어라. 사람들은 앞다투어 평안에 대한 좌석을 꿰어 찼다. 밀리고 밀리기. 그것은 예전엔 욕망이었고 지금은 이룬 것. 잡동사니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쉴 수 없고 고달픈데.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군. 길가의 쓰레기를 보고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래서 쓰레기를 대신 주워 올바른 곳에 버리는 사람들. 용서인가? 아이는 더 어릴 때 까르르 웃었던 아기. 아버지가 남긴 그림이다. 그는 화가였다. 왜냐하면. 허락받지 않은 다락을 그렸다. 잘 그리진 못했다. 아이의 눈으로 보기에 길가에 가끔 보이는 쓰레기들이 더 나았다. 왠지 모르게. 귀부인들이 걸어 다니는 거리. 법정은 어설프고 어정쩡했다. 그것이 주된 기억. 망치로 세 번 두드릴 때 아이는 실소를 지었다. 아니면 끼루룩 웃었다. 법정 창밖으로 새들이 날아와 머릴 부딪쳤다. 아이는 안쓰러웠다. 그래서 아버지가 남긴 그림이 담긴 소품 상자에 대해 위증했다. 법정 사람들은 옥신각신 다투었다. 아무도 아이의 증언을 귀담아듣지 않고. 어떤 사람은 그들의 행태가 한심하다고 욕했다. 왠지 그랬다. 역할 놀이 같은. 그 점을 말해봤자 어른들은 긴 잠에서 깨우지는 못한다고 깁슨은 판단했다. 깁슨은 아이를 양자로 받아들이는 일을 떠올렸다. 오히려 부인이 좋아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지금은 피곤했다. 권위 있게. 서기로서. 그는 잠시 쉬었다. 그 순간 법정은 멈춤. 기록되고 싶었으므로. 누구도 깁슨의 트랙 밖으로 나가길 꺼렸다. 서기의 처지는 건드려지지 않았다. 잠시의 거위 깃털 낮잠. 일어나자 아이는 어른이 되었다. 시간이 빨리 지났군. 아니, 시기를 놓쳤군. 어른이 된 아이가 말했다. 고려해 봐야 할 테죠. 이젠 그럴 마음이 없구나. 그때 겨울이 증언자의 품속 브로치 안에 들어 있었다. 판사가 정숙하라고 그랬다. 아이의 심리와 희망은 지나갔다. 그건 보는 이들의 몫. 그래서 어떤 절망이 넘실거린다. 그렇지만 이미 해결된 일이었다. 증언자는 단지 자신의 말에 신뢰를 더하기 위해 겨울을 모사했고 사람들은 그 말보다 겨울을 더 믿었다. 법정 안은 차가워졌다. 모두가 그렇게 믿었으므로. 나른한 하품을 하던 이들이 오들오들. 증언자는 아이의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아이를 좋아하는 것 같았거든. 책임감 때문에 좋아하는 것 같았어. 저런 어른 말고 아이를. 왼쪽에 계류 중인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속기해놔야 한다. 법정 안의 사람들은 고개를 바로 했다. 권위 있게. 꿈. 모이. 사건. 커다란 새가 창문을 깼다. 아이를 처음에 데리고 온 황새의 시조 격이었다. 진정한 아버지인 황새. 여기선 알바트로스. 우아하다. 이번에는 그 새가 아이를 껴안았다. 보호해 주려는 듯이. 날개로 뒤덮었다. 용서하노라. 그건 모든 사람들의 눈이 아이의 몸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용서였다. 그래서. 아이는 갑자기 편안해졌다. 이게 울음이군. 엉엉. 거위 깃털 잠을 아이는 졸면서 설명했다. 선생님 앞으로. 계류 중인 사람들은 그런 학교에 신경 쓰지 않는다. 민감하고 저촉되거나 위배됨. 오른쪽에 있는 검사들의 얼굴. 볼에 뾰루지가 난 이. 그 잠이 부러워. 아이에 대한 재판은 모조였다. 검사들은 최선을 다해 공격했다. 장난일 수밖에 없다는 것에 화냈다. 어떤 모조이든 감쪽같음을 갖고 있으므로 깁슨은 객관적으로 써야만 했다. 이야기를. 그것이 결국 모조라는 사실을. 검사들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적어도 여기 모인 사람들이라면. 그런 것을 서사시같이 올바르게 쓰는 게 그의 욕심이었다. 깁슨은 자신에 대한 호의적인 이미지가 없었다. 퇴행. 법정이 끝나고 암전이 된 뒤 그는 집에 가서 잠을 잤다. 아이의 거위 깃털 잠은 아니었다. 용서받는 잠. 괴상한 아이였어. 그는 꿈을 꿨다. 그 아이가 천사로 나왔다. 용서받은 것이 진짜인지 잘 모르겠다. 그 아이는 밖에서도 천사였다. 하지만 그 새는 창문을 깨고 들어왔지. 벌금을 매겨야 했는데. 엑스 마키나에게 매기는 벌금. 그런데. 실은 용서를 해주지 않고. 새를 통해, 특히 알바트로스를 통해. 내가 지어낸 이야기겠군. 난 그 나이 때 용서받은 적 없으니. 자야겠다. 봄 속에 있었다. 몇 달 전에 법정에 갔었지. 음악이 들려왔지. 커다란 새를 표현한 그런 음악. 그 새가 날 데려갔어. 봄 안으로. 이 봄. 신경질적인 시선들을 막아준다. 그 사람들은 왜 신경질적이었을까? 내가 거짓을 말했는데 그걸 제재할 방법이 없어서였을까? 난 누구의 눈에 보이지 않았거든. 잠시뿐이었지만. 나이가 어렸어. 모든 부분이 깃털에 덮여 있었어. 그건 기억나. 기억이라니. 이게 어른들의 일인가? 새 안에 감싸여 있을 때 나는 천사. 케루빔. 친구들이 되지 않아도 좋아. 같은 신만 섬긴다면.
2024년 9월 16일 월요일
톱니바퀴
개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희미하고 따스하고 안온한 것처럼 나는 그 개를 안아 들었다. 그 개는 주인이 있었고 그 주인이 멀리서 천천히 조급해하지 않고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이 흥미와 애정이 헤픈 개에게 익숙한 모양인 듯했다. 개에게 떠올라 있는 것은 나에 대한 호기심이었으나 금방 그칠 것도 같았다. 내 몸에 묻은 파스타 냄새가 그 개에게 아련한 느낌과 안길 수 있는 품을 상기시킨 것일 수도 있었다. 주인이 다가와 먼저 사과의 말씀부터 꺼냈는데 미안해하지는 않기도 하는 눈치였다. 그 개가 민폐가 아니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에게도 귀여운 개였으니만큼. 그런 느낌에 주인은 익숙한 듯했다. 그 개가 몇 번이고 자신을 앞질러 나갔던 것에도. 개는 그 주인과 나 사이에서 네 발 달린 전령인 양 앞발을 들고 나에게 기대어 발자국을 찍고 있었는데, 주인이 먼저 웃고 나도 그것에 뒤따라 웃었다. 그 주인과 나는 별다른 일 없이 인사를 하고 각자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그 개는 내 옷에 흙 묻은 발을 올려 거웃을 남겨놓았는데 그 귀결은 무의미함 같은 것으로 다다를 수 있었다. 나는 이 옥상에서 그런 생각을 피하며 어렴풋한 감정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나는 이런 도회지의 밤하늘 광경이 마음에 들었다. 밤하늘에 희끄무레한 모래들이 뿌려져 있다고 상상했다. 그 모래들은 별들의 온도에 녹아내려 윤무를 만들어내었는데, 나는 그 광경이 좋았다. 별들은 거기 어슴푸레 잠겨 있으면서 자기 아래 부수된 인형 별들을 만들기도 했다. 인형 별들은 아름답고 우아했는데, 그것은 주인 별들이 오만하고 공포의 권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아름답고 우아한 별들도, 오만하고 공포의 권위를 자랑하는 인형들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이 별은 겉에서 이 모든 극을 꾸며내고 있었을지 몰랐고, 내가 오늘 그 개와 주인을 만났던 것은 그럼에도 인형극이라 할 순 없었는데, 나는 그 순간의 일을 충분히 감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이 별은 가운데에 선 지휘자였고 나는 그 수많은 사람들 중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어떤 무대에서 나른하게 톱니바퀴의 일부가 되는 것은 내가 배운 것 중 값진 것이기도 했다.
2024년 7월 25일 목요일
끝이 없는 장난
테이블 위에 모자가 놓여 있다. 누가 놓고 간 것일까? 술집에는 바텐더와 나만 있었고 모자가 바텐더의 것일 리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한번 물어봤다. 저 모자의 주인이 혹시 바텐더 당신이냐고. 바텐더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신의 것으로 할 수도 있다고. 나는 모자를 집어 들어 머리에 쓰곤 말했다. 나는 사물에 관심이 많다고. 바텐더가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들도 모두 사물일 수 있다고.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렇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사물은 입장을 가지지 않는다고. 따라서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도 않는다고. 바텐더 옆에 있는 사슬 장식이 조금 기울어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드문드문 떠들어댔고 바텐더가 내 술잔에 위스키를 조금 따랐다. 컵에는 얼음이 차 있었다. 바텐더가 내 머리 위에 있는 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건 어느 날 내가 술에 취해 여기에 두고 간 것이라고. 그게 이 모자를 나에게 돌려주려고 한 이유라고. 그렇게 개인적으로 생각한다고. 술에 조금 취한 나는 웅얼거리며 뭐라고 하며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 모자가 내 것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모자에 탐욕스러워지려면 이 모자는 내 것이 아니었어야만 했다. 나는 그런 느낌과 별 상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 나를 우스꽝스럽게 부정당하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이 말에 대한 흐릿하나 분명하고 확실한 어떤 근거가 생각이 났다. 그러고는 곧바로 잊어버렸다. 나는 술에 취해 있었던 탓이다. 나는 곧바로 어떤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입을 열어 말했다. 바텐더가 내 잃어버린 기념품이란 사실을. 한순간에 사물로 여겨진 그는 눈썹 사이를 좁히며 조금 더 얘기를 들어야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어질 내 말과 상관없이 이미 그는 빈정이 상한 듯했다. 아깐 우리 모두가 사물일 수 있다고 말했으면서. 그런 생각을 한 순간, 입구에서 한 명이 들어왔다. 바텐더는 내 눈앞에 서서 이어질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방금 들어온 사람을 입을 벌리고 봤다. 그는 놀라운 생김새를 지녔다. 그가 다가오더니 콧김을 내며 말했다. 술 한잔을 달라고. 나는 모자를 내 머리에 쓰고 술집 안을 나왔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끝이 없는 장난에서 그만두고 나온 것이라고.
2024년 7월 23일 화요일
유령들을 위한 미술관
새들의 숨결이 꽃에 닿는다. 꽃은 자신을 오므렸다가 펴낸다. 어떤 사람이 본다면 움직일 수 있는 꽃이라고 오해될 것만 같이. 그러나 그것은 카메라 영상을 빨리 감기로 봤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런 식으로 보지 않으면 현실의 꽃은 움직이지 않는다고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그것은 아주 느리게, 천천히 움직인다. 물론 어떤 사람이 판단한다면 그것은 움직일 수 있는 꽃이라 할 것이다. 대부분의 꽃은 움직이는 것이다. 하루에서 며칠 동안 오므렸다가 펴지며…… 펴졌다가 오므린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어떤 사람은 꽃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답답할 테니까. 꽃이 오므렸다가 피는 것은 ‘늘 이런 식이었다.’라고 생각하는 다른 뿌리와 줄기, 잎들의 명령에 근거한 움직임이다. 꽃은 그 명령에 따르기엔 움직이지 않는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이 답답하다. 그러나 꽃은 그 움직임을 느리지만 충실히 수행해 내는데, 따라서 꽃을 찍은 영상을 빨리 감기한 엉뚱한 것도 세상엔 필요한 것이다. 뿌리와 줄기, 잎들의 명령은 그런데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온정적이며, 관대할 것이다. 어쨌든 간 해내는 것에 그것들은 만족하는 것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참을성이 없어서 남 때문에 시간 낭비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들은 그 생각을 자신의 인생에 적용시킬 수도 있으며 안 그럴 수도 있다. 답답하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남들과 비교해 빠른 속도로 뭔가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기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들은 더 많고 다양할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그것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한다. 줄기와 잎, 뿌리가 꽃에 대해 긍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런 독재적인 품성을 동경했다. 새들의 숨결이 꽃에 닿지 않더라도 그 꽃은 줄기, 잎, 뿌리들의 명령(제안)에 근거하여 움직일 터이다. 어쨌거나 꽃은 새들의 숨결을 맞은 것이다. 앞으로도 맞을 것이다. 전에도 맞았기 때문이다. 새들의 숨결은 꽃에 영양분이 되지도 햇빛을 주지도 않지만 꽃잎을 살짝 떨리게 한다. 이는 꽃의 문화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애니메이션이나 영화가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애니메이션이나 영화가 우리와 같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같은 데가 있는데 다르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데 같은 데가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렇다면 어쨌거나 문화는 그것을 보는 사람들과 같거나 다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꽃은 줄기와 잎, 뿌리와 다른가? 다르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통합체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같다고 볼 여지도 있다. 여기에 적합한 말이 [일부]인 것 같다. 나는 나의 [일부]다. 그리고 나는 나의 초과이기도 한데, 나를 초과하는 것은 나와 같거나 다른 것들이 갖고 있다는 생각을 근래에 한다. 나는 잎과 뿌리, 줄기와 잎일 뿐만 아니라 작품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그만큼 인간과 유령 사이를 오간다. 다큐멘터리들은 죽어 있어서 좋다. 나는 살아 있는 것들보다 죽은 것들이 좋았다. 그런 것들을 보면 긴장되지 않고 안온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살아 있는 것들을 봐야 할 때가 있었는데, 그것은 거의 [사랑] 때문이었거나 그랬던 것 자체가 사랑이 되었다. 살아 있는 작품들을 보는 일은 사랑 자체를 내게 느끼고 묘사하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들? 나와 같거나 다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꽃은 새들의 날갯짓과 다르지만 하나의 문화를 같이 구성한다. 자연이라는 문화다. 문화는 자연을 정의하고 또 이용하지만 그 자체가 자연에 속한다고 하는 생각. 그런 것이 다큐멘터리를 보면 하게 되는 생각이다. 죽어 있는 다큐멘터리들은 내가 위에서 말한 카메라 영상을 빨리 감기한 것을 이따금씩 보여주는데 그것은 답답함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닌 것 같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차이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다. 꽃의 움직임의 시간 진행에 따른 차이. 많은 예산이 들어간, 죽어 있는 다큐멘터리라는 그릇에 물을 채우기 위해서다. 차이를 만들기 위해서 뭔가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고 동일함을 만들기 위해서 뭔가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 두 부류와 같거나 다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 식의 오묘한 비율로 사람들은 살아간다. 문화와, 문화를 보는 사람들의 눈. 당신은 이 좌우 중 어떤 것에 속하는가? 내가 속한 문화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이 죽어 있는 것에 가까운데, 나는 죽어 있는 것과 가까이 해야 마음이 편하고 긴장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는 때때로 살아 있는 작품들을 보고 간단히 코멘트하고 있다. 물론 죽어 있는 작품들도 본다. 더 많이 본다. 살아 있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 나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하지만 죽어 있는 것들은 지루하기 때문에 어쩌면 이 문화는 재미를 위해서 살아 있으며, 그와 비슷하게 가끔씩은 살아 있는 것들을 보는 것이다. 물론 조금의 같거나 다름이 있긴 하겠지만. 살아 있는 것들 사이에는 그렇게 조금의 같거나 다름이 있는데, 그것들은 너무할 정도로 살아 있다는 결론에서만큼은 동일한 편이다. 죽어 있는 것에는 그와 비교해 무분별할 정도의 차이들이 있다. 어떤 죽어 있는 것들은 수집가의 손에 들어가 아주 기품 있게 관리되지만, 다른 어떤 죽어 있는 것들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 급속히 풍화되고 썩는다. 문화들이 자연을 이용하거나 또 [일부]로 삼는 것은 그 자체가 [사랑]의 감정이라 할 수 있다. 마치 좌와 우가 다르듯. 살아 있는 것을 정의한다는 것. 그것은 그 자체가 어떤 독자군들에겐 기사도 로맨스 소설 같은 통속적인 재미를 안겨준다. 숨결을 뱉어내는 새들에게 보이는, 꽃들이 가득한 화원처럼 말이다. 그런 그림이 미술관에 걸려 있다. 그것을 보는 유령들. 여기는 유령들을 위한 미술관이다.
2024년 6월 26일 수요일
그림자놀이
불빛은 딱 하나의 공간에서 시작되고 그 앞을 비추는 데 반해 벽에 생긴 그림자는 더 커다랗다. 결말이 정해진, 예상되는 말들인 것처럼 그곳에는 손전등이 있었다. 그것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나는 빛에다가 손바닥을 가져다 댄다. 손으로 빛을 가린다. 손전등에서 집약되었던 빛이 내 손바닥에 막혀 벽면에서 내 손바닥 모양을 볼 수 있게 된다. 손전등이 벽까지 향하는 그 중간에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으면 그림자 또한 움직인다. 나는 아예 벽을 보면서 날갯짓하는 새를 손으로 만들었다. 빛은 있는 부분과 없는 부분으로 구별되고, 다시 다르게 말할 수 있다. 빛은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으로 구분된다. 내 손이 만든 빛이 가려진 부분으로 이루어진 새는 빛이 없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어두운 것에 가까웠던 것 같다. 생김새는 어떠한지. 동화책에 나오던 파랑새와 닮게 하느라고 파랑새의 모습을 앞서 상기해야 했다. 어린 시절 해보기도 했던 이 그림자놀이는 딱히 의미가 없는 행동을 추구하는 면이 있다. 어떤 신은 그림자를 회수한 뒤 그것을 향신료처럼 쓴다고 그랬다. 그것은 새로운 그림자일수록 더 값비싸다고. 그림자의 표현 범위는 빛의 표현 범위를 역으로 가진다. 그런데 그림자의 표현은 잘 안 보이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언젠가 신발에 풀잎이 묻은 걸 보고서 잊어버렸듯이. 빛의 표현들의 느낌은 기억된다.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림자로도 그림을 그릴 수 있으나 어차피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런 부재의 흔적으로 빈 데를 그림자들은 갖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세상에 족적을 남기지 않는 것일까? 어떤 차원에선 족적이 있을 것이다. 그림자는 태양 아래에서 만들어지고 생겼는데 그걸 보면 닫혀 있는 옷장에 그림자가 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옷장 안에 알아볼 수 있는 그 그림자가 문을 열자 사라진다. 나머지 열지 않은 부분에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다시 옷장을 연다. 그림자로 된 담비가 뛰쳐나간다. 그걸 본다. 그 형상의 구분은 오로지 명도에 의한 것으로,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다. 자음 문제를 맞췄다고 생각이 되듯 말이다. 손전등이 비추는 빛이 깜빡거리기 시작한다. 너무 오래 그림자놀이를 한 것이다. 손전등은 으레 잘 망가진다. 고장이라고 하기엔 손전등은 다시 사는 일이 흔하다. 그림자를 소유한다는 일은 드물다. 쇼윈도 너머로 그림자들이 보관되어 있는 것을 본다. 그것은 액체라고 쓰여 있다. 바닥에 쏟으면 원래 가졌던 형상으로 된다고. 그러나 그것은 그림자의 대체품일 뿐. 나는 모양을 보지 않고 그중에서 하나 샀다. ‘그림자의 모양’이라 생각하고서 잊어버렸다. 집에 가서 그것을 쏟아보니 새, 파랑새처럼 보이는 것이 그려졌다. 그것을 담을 새장을 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런 새의 형상을 벽면에 그리고 있었다. 그 쇼윈도가 비치는 가게는 그림자였다. 형상으로 만들어보진 않았으나 그림자들 중에 있었다. 그렇다면 그림자는 아직 하지 않은 말들이다. 그 새는 그림자로 울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림자로 된) 새가 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