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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6일 월요일

톱니바퀴

개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희미하고 따스하고 안온한 것처럼 나는 그 개를 안아 들었다. 그 개는 주인이 있었고 그 주인이 멀리서 천천히 조급해하지 않고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이 흥미와 애정이 헤픈 개에게 익숙한 모양인 듯했다. 개에게 떠올라 있는 것은 나에 대한 호기심이었으나 금방 그칠 것도 같았다. 내 몸에 묻은 파스타 냄새가 그 개에게 아련한 느낌과 안길 수 있는 품을 상기시킨 것일 수도 있었다. 주인이 다가와 먼저 사과의 말씀부터 꺼냈는데 미안해하지는 않기도 하는 눈치였다. 그 개가 민폐가 아니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에게도 귀여운 개였으니만큼. 그런 느낌에 주인은 익숙한 듯했다. 그 개가 몇 번이고 자신을 앞질러 나갔던 것에도. 개는 그 주인과 나 사이에서 네 발 달린 전령인 양 앞발을 들고 나에게 기대어 발자국을 찍고 있었는데, 주인이 먼저 웃고 나도 그것에 뒤따라 웃었다. 그 주인과 나는 별다른 일 없이 인사를 하고 각자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그 개는 내 옷에 흙 묻은 발을 올려 거웃을 남겨놓았는데 그 귀결은 무의미함 같은 것으로 다다를 수 있었다. 나는 이 옥상에서 그런 생각을 피하며 어렴풋한 감정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나는 이런 도회지의 밤하늘 광경이 마음에 들었다. 밤하늘에 희끄무레한 모래들이 뿌려져 있다고 상상했다. 그 모래들은 별들의 온도에 녹아내려 윤무를 만들어내었는데, 나는 그 광경이 좋았다. 별들은 거기 어슴푸레 잠겨 있으면서 자기 아래 부수된 인형 별들을 만들기도 했다. 인형 별들은 아름답고 우아했는데, 그것은 주인 별들이 오만하고 공포의 권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아름답고 우아한 별들도, 오만하고 공포의 권위를 자랑하는 인형들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이 별은 겉에서 이 모든 극을 꾸며내고 있었을지 몰랐고, 내가 오늘 그 개와 주인을 만났던 것은 그럼에도 인형극이라 할 순 없었는데, 나는 그 순간의 일을 충분히 감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이 별은 가운데에 선 지휘자였고 나는 그 수많은 사람들 중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어떤 무대에서 나른하게 톱니바퀴의 일부가 되는 것은 내가 배운 것 중 값진 것이기도 했다.

2024년 7월 25일 목요일

끝이 없는 장난

테이블 위에 모자가 놓여 있다. 누가 놓고 간 것일까? 술집에는 바텐더와 나만 있었고 모자가 바텐더의 것일 리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한번 물어봤다. 저 모자의 주인이 혹시 바텐더 당신이냐고. 바텐더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신의 것으로 할 수도 있다고. 나는 모자를 집어 들어 머리에 쓰곤 말했다. 나는 사물에 관심이 많다고. 바텐더가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들도 모두 사물일 수 있다고.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렇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사물은 입장을 가지지 않는다고. 따라서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도 않는다고. 바텐더 옆에 있는 사슬 장식이 조금 기울어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드문드문 떠들어댔고 바텐더가 내 술잔에 위스키를 조금 따랐다. 컵에는 얼음이 차 있었다. 바텐더가 내 머리 위에 있는 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건 어느 날 내가 술에 취해 여기에 두고 간 것이라고. 그게 이 모자를 나에게 돌려주려고 한 이유라고. 그렇게 개인적으로 생각한다고. 술에 조금 취한 나는 웅얼거리며 뭐라고 하며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 모자가 내 것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모자에 탐욕스러워지려면 이 모자는 내 것이 아니었어야만 했다. 나는 그런 느낌과 별 상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 나를 우스꽝스럽게 부정당하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이 말에 대한 흐릿하나 분명하고 확실한 어떤 근거가 생각이 났다. 그러고는 곧바로 잊어버렸다. 나는 술에 취해 있었던 탓이다. 나는 곧바로 어떤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입을 열어 말했다. 바텐더가 내 잃어버린 기념품이란 사실을. 한순간에 사물로 여겨진 그는 눈썹 사이를 좁히며 조금 더 얘기를 들어야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어질 내 말과 상관없이 이미 그는 빈정이 상한 듯했다. 아깐 우리 모두가 사물일 수 있다고 말했으면서. 그런 생각을 한 순간, 입구에서 한 명이 들어왔다. 바텐더는 내 눈앞에 서서 이어질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방금 들어온 사람을 입을 벌리고 봤다. 그는 놀라운 생김새를 지녔다. 그가 다가오더니 콧김을 내며 말했다. 술 한잔을 달라고. 나는 모자를 내 머리에 쓰고 술집 안을 나왔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끝이 없는 장난에서 그만두고 나온 것이라고.

2024년 7월 23일 화요일

유령들을 위한 미술관

새들의 숨결이 꽃에 닿는다. 꽃은 자신을 오므렸다가 펴낸다. 어떤 사람이 본다면 움직일 수 있는 꽃이라고 오해될 것만 같이. 그러나 그것은 카메라 영상을 빨리 감기로 봤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런 식으로 보지 않으면 현실의 꽃은 움직이지 않는다고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그것은 아주 느리게, 천천히 움직인다. 물론 어떤 사람이 판단한다면 그것은 움직일 수 있는 꽃이라 할 것이다. 대부분의 꽃은 움직이는 것이다. 하루에서 며칠 동안 오므렸다가 펴지며…… 펴졌다가 오므린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어떤 사람은 꽃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답답할 테니까. 꽃이 오므렸다가 피는 것은 ‘늘 이런 식이었다.’라고 생각하는 다른 뿌리와 줄기, 잎들의 명령에 근거한 움직임이다. 꽃은 그 명령에 따르기엔 움직이지 않는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이 답답하다. 그러나 꽃은 그 움직임을 느리지만 충실히 수행해 내는데, 따라서 꽃을 찍은 영상을 빨리 감기한 엉뚱한 것도 세상엔 필요한 것이다. 뿌리와 줄기, 잎들의 명령은 그런데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온정적이며, 관대할 것이다. 어쨌든 간 해내는 것에 그것들은 만족하는 것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참을성이 없어서 남 때문에 시간 낭비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들은 그 생각을 자신의 인생에 적용시킬 수도 있으며 안 그럴 수도 있다. 답답하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남들과 비교해 빠른 속도로 뭔가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기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들은 더 많고 다양할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그것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한다. 줄기와 잎, 뿌리가 꽃에 대해 긍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런 독재적인 품성을 동경했다. 새들의 숨결이 꽃에 닿지 않더라도 그 꽃은 줄기, 잎, 뿌리들의 명령(제안)에 근거하여 움직일 터이다. 어쨌거나 꽃은 새들의 숨결을 맞은 것이다. 앞으로도 맞을 것이다. 전에도 맞았기 때문이다. 새들의 숨결은 꽃에 영양분이 되지도 햇빛을 주지도 않지만 꽃잎을 살짝 떨리게 한다. 이는 꽃의 문화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애니메이션이나 영화가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애니메이션이나 영화가 우리와 같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같은 데가 있는데 다르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데 같은 데가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렇다면 어쨌거나 문화는 그것을 보는 사람들과 같거나 다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꽃은 줄기와 잎, 뿌리와 다른가? 다르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통합체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같다고 볼 여지도 있다. 여기에 적합한 말이 [일부]인 것 같다. 나는 나의 [일부]다. 그리고 나는 나의 초과이기도 한데, 나를 초과하는 것은 나와 같거나 다른 것들이 갖고 있다는 생각을 근래에 한다. 나는 잎과 뿌리, 줄기와 잎일 뿐만 아니라 작품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그만큼 인간과 유령 사이를 오간다. 다큐멘터리들은 죽어 있어서 좋다. 나는 살아 있는 것들보다 죽은 것들이 좋았다. 그런 것들을 보면 긴장되지 않고 안온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살아 있는 것들을 봐야 할 때가 있었는데, 그것은 거의 [사랑] 때문이었거나 그랬던 것 자체가 사랑이 되었다. 살아 있는 작품들을 보는 일은 사랑 자체를 내게 느끼고 묘사하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들? 나와 같거나 다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꽃은 새들의 날갯짓과 다르지만 하나의 문화를 같이 구성한다. 자연이라는 문화다. 문화는 자연을 정의하고 또 이용하지만 그 자체가 자연에 속한다고 하는 생각. 그런 것이 다큐멘터리를 보면 하게 되는 생각이다. 죽어 있는 다큐멘터리들은 내가 위에서 말한 카메라 영상을 빨리 감기한 것을 이따금씩 보여주는데 그것은 답답함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닌 것 같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차이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다. 꽃의 움직임의 시간 진행에 따른 차이. 많은 예산이 들어간, 죽어 있는 다큐멘터리라는 그릇에 물을 채우기 위해서다. 차이를 만들기 위해서 뭔가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고 동일함을 만들기 위해서 뭔가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 두 부류와 같거나 다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 식의 오묘한 비율로 사람들은 살아간다. 문화와, 문화를 보는 사람들의 눈. 당신은 이 좌우 중 어떤 것에 속하는가? 내가 속한 문화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이 죽어 있는 것에 가까운데, 나는 죽어 있는 것과 가까이 해야 마음이 편하고 긴장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는 때때로 살아 있는 작품들을 보고 간단히 코멘트하고 있다. 물론 죽어 있는 작품들도 본다. 더 많이 본다. 살아 있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 나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하지만 죽어 있는 것들은 지루하기 때문에 어쩌면 이 문화는 재미를 위해서 살아 있으며, 그와 비슷하게 가끔씩은 살아 있는 것들을 보는 것이다. 물론 조금의 같거나 다름이 있긴 하겠지만. 살아 있는 것들 사이에는 그렇게 조금의 같거나 다름이 있는데, 그것들은 너무할 정도로 살아 있다는 결론에서만큼은 동일한 편이다. 죽어 있는 것에는 그와 비교해 무분별할 정도의 차이들이 있다. 어떤 죽어 있는 것들은 수집가의 손에 들어가 아주 기품 있게 관리되지만, 다른 어떤 죽어 있는 것들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 급속히 풍화되고 썩는다. 문화들이 자연을 이용하거나 또 [일부]로 삼는 것은 그 자체가 [사랑]의 감정이라 할 수 있다. 마치 좌와 우가 다르듯. 살아 있는 것을 정의한다는 것. 그것은 그 자체가 어떤 독자군들에겐 기사도 로맨스 소설 같은 통속적인 재미를 안겨준다. 숨결을 뱉어내는 새들에게 보이는, 꽃들이 가득한 화원처럼 말이다. 그런 그림이 미술관에 걸려 있다. 그것을 보는 유령들. 여기는 유령들을 위한 미술관이다.

2024년 6월 26일 수요일

그림자놀이

불빛은 딱 하나의 공간에서 시작되고 그 앞을 비추는 데 반해 벽에 생긴 그림자는 더 커다랗다. 결말이 정해진, 예상되는 말들인 것처럼 그곳에는 손전등이 있었다. 그것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나는 빛에다가 손바닥을 가져다 댄다. 손으로 빛을 가린다. 손전등에서 집약되었던 빛이 내 손바닥에 막혀 벽면에서 내 손바닥 모양을 볼 수 있게 된다. 손전등이 벽까지 향하는 그 중간에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으면 그림자 또한 움직인다. 나는 아예 벽을 보면서 날갯짓하는 새를 손으로 만들었다. 빛은 있는 부분과 없는 부분으로 구별되고, 다시 다르게 말할 수 있다. 빛은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으로 구분된다. 내 손이 만든 빛이 가려진 부분으로 이루어진 새는 빛이 없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어두운 것에 가까웠던 것 같다. 생김새는 어떠한지. 동화책에 나오던 파랑새와 닮게 하느라고 파랑새의 모습을 앞서 상기해야 했다. 어린 시절 해보기도 했던 이 그림자놀이는 딱히 의미가 없는 행동을 추구하는 면이 있다. 어떤 신은 그림자를 회수한 뒤 그것을 향신료처럼 쓴다고 그랬다. 그것은 새로운 그림자일수록 더 값비싸다고. 그림자의 표현 범위는 빛의 표현 범위를 역으로 가진다. 그런데 그림자의 표현은 잘 안 보이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언젠가 신발에 풀잎이 묻은 걸 보고서 잊어버렸듯이. 빛의 표현들의 느낌은 기억된다.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림자로도 그림을 그릴 수 있으나 어차피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런 부재의 흔적으로 빈 데를 그림자들은 갖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세상에 족적을 남기지 않는 것일까? 어떤 차원에선 족적이 있을 것이다. 그림자는 태양 아래에서 만들어지고 생겼는데 그걸 보면 닫혀 있는 옷장에 그림자가 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옷장 안에 알아볼 수 있는 그 그림자가 문을 열자 사라진다. 나머지 열지 않은 부분에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다시 옷장을 연다. 그림자로 된 담비가 뛰쳐나간다. 그걸 본다. 그 형상의 구분은 오로지 명도에 의한 것으로,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다. 자음 문제를 맞췄다고 생각이 되듯 말이다. 손전등이 비추는 빛이 깜빡거리기 시작한다. 너무 오래 그림자놀이를 한 것이다. 손전등은 으레 잘 망가진다. 고장이라고 하기엔 손전등은 다시 사는 일이 흔하다. 그림자를 소유한다는 일은 드물다. 쇼윈도 너머로 그림자들이 보관되어 있는 것을 본다. 그것은 액체라고 쓰여 있다. 바닥에 쏟으면 원래 가졌던 형상으로 된다고. 그러나 그것은 그림자의 대체품일 뿐. 나는 모양을 보지 않고 그중에서 하나 샀다. ‘그림자의 모양’이라 생각하고서 잊어버렸다. 집에 가서 그것을 쏟아보니 새, 파랑새처럼 보이는 것이 그려졌다. 그것을 담을 새장을 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런 새의 형상을 벽면에 그리고 있었다. 그 쇼윈도가 비치는 가게는 그림자였다. 형상으로 만들어보진 않았으나 그림자들 중에 있었다. 그렇다면 그림자는 아직 하지 않은 말들이다. 그 새는 그림자로 울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림자로 된) 새가 한 말이다.

밀밭의 낱알들

넓게 펼쳐진 밀밭에 수많은 낱알들이 맺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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