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3일 화요일

유령들을 위한 미술관

새들의 숨결이 꽃에 닿는다. 꽃은 자신을 오므렸다가 펴낸다. 어떤 사람이 본다면 움직일 수 있는 꽃이라고 오해될 것만 같이. 그러나 그것은 카메라 영상을 빨리 감기로 봤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런 식으로 보지 않으면 현실의 꽃은 움직이지 않는다고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그것은 아주 느리게, 천천히 움직인다. 물론 어떤 사람이 판단한다면 그것은 움직일 수 있는 꽃이라 할 것이다. 대부분의 꽃은 움직이는 것이다. 하루에서 며칠 동안 오므렸다가 펴지며…… 펴졌다가 오므린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어떤 사람은 꽃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답답할 테니까. 꽃이 오므렸다가 피는 것은 ‘늘 이런 식이었다.’라고 생각하는 다른 뿌리와 줄기, 잎들의 명령에 근거한 움직임이다. 꽃은 그 명령에 따르기엔 움직이지 않는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이 답답하다. 그러나 꽃은 그 움직임을 느리지만 충실히 수행해 내는데, 따라서 꽃을 찍은 영상을 빨리 감기한 엉뚱한 것도 세상엔 필요한 것이다. 뿌리와 줄기, 잎들의 명령은 그런데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온정적이며, 관대할 것이다. 어쨌든 간 해내는 것에 그것들은 만족하는 것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참을성이 없어서 남 때문에 시간 낭비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들은 그 생각을 자신의 인생에 적용시킬 수도 있으며 안 그럴 수도 있다. 답답하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남들과 비교해 빠른 속도로 뭔가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기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들은 더 많고 다양할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그것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한다. 줄기와 잎, 뿌리가 꽃에 대해 긍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런 독재적인 품성을 동경했다. 새들의 숨결이 꽃에 닿지 않더라도 그 꽃은 줄기, 잎, 뿌리들의 명령(제안)에 근거하여 움직일 터이다. 어쨌거나 꽃은 새들의 숨결을 맞은 것이다. 앞으로도 맞을 것이다. 전에도 맞았기 때문이다. 새들의 숨결은 꽃에 영양분이 되지도 햇빛을 주지도 않지만 꽃잎을 살짝 떨리게 한다. 이는 꽃의 문화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애니메이션이나 영화가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애니메이션이나 영화가 우리와 같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같은 데가 있는데 다르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데 같은 데가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렇다면 어쨌거나 문화는 그것을 보는 사람들과 같거나 다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꽃은 줄기와 잎, 뿌리와 다른가? 다르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통합체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같다고 볼 여지도 있다. 여기에 적합한 말이 [일부]인 것 같다. 나는 나의 [일부]다. 그리고 나는 나의 초과이기도 한데, 나를 초과하는 것은 나와 같거나 다른 것들이 갖고 있다는 생각을 근래에 한다. 나는 잎과 뿌리, 줄기와 잎일 뿐만 아니라 작품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그만큼 인간과 유령 사이를 오간다. 다큐멘터리들은 죽어 있어서 좋다. 나는 살아 있는 것들보다 죽은 것들이 좋았다. 그런 것들을 보면 긴장되지 않고 안온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살아 있는 것들을 봐야 할 때가 있었는데, 그것은 거의 [사랑] 때문이었거나 그랬던 것 자체가 사랑이 되었다. 살아 있는 작품들을 보는 일은 사랑 자체를 내게 느끼고 묘사하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들? 나와 같거나 다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꽃은 새들의 날갯짓과 다르지만 하나의 문화를 같이 구성한다. 자연이라는 문화다. 문화는 자연을 정의하고 또 이용하지만 그 자체가 자연에 속한다고 하는 생각. 그런 것이 다큐멘터리를 보면 하게 되는 생각이다. 죽어 있는 다큐멘터리들은 내가 위에서 말한 카메라 영상을 빨리 감기한 것을 이따금씩 보여주는데 그것은 답답함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닌 것 같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차이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다. 꽃의 움직임의 시간 진행에 따른 차이. 많은 예산이 들어간, 죽어 있는 다큐멘터리라는 그릇에 물을 채우기 위해서다. 차이를 만들기 위해서 뭔가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고 동일함을 만들기 위해서 뭔가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 두 부류와 같거나 다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 식의 오묘한 비율로 사람들은 살아간다. 문화와, 문화를 보는 사람들의 눈. 당신은 이 좌우 중 어떤 것에 속하는가? 내가 속한 문화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이 죽어 있는 것에 가까운데, 나는 죽어 있는 것과 가까이 해야 마음이 편하고 긴장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는 때때로 살아 있는 작품들을 보고 간단히 코멘트하고 있다. 물론 죽어 있는 작품들도 본다. 더 많이 본다. 살아 있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 나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하지만 죽어 있는 것들은 지루하기 때문에 어쩌면 이 문화는 재미를 위해서 살아 있으며, 그와 비슷하게 가끔씩은 살아 있는 것들을 보는 것이다. 물론 조금의 같거나 다름이 있긴 하겠지만. 살아 있는 것들 사이에는 그렇게 조금의 같거나 다름이 있는데, 그것들은 너무할 정도로 살아 있다는 결론에서만큼은 동일한 편이다. 죽어 있는 것에는 그와 비교해 무분별할 정도의 차이들이 있다. 어떤 죽어 있는 것들은 수집가의 손에 들어가 아주 기품 있게 관리되지만, 다른 어떤 죽어 있는 것들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 급속히 풍화되고 썩는다. 문화들이 자연을 이용하거나 또 [일부]로 삼는 것은 그 자체가 [사랑]의 감정이라 할 수 있다. 마치 좌와 우가 다르듯. 살아 있는 것을 정의한다는 것. 그것은 그 자체가 어떤 독자군들에겐 기사도 로맨스 소설 같은 통속적인 재미를 안겨준다. 숨결을 뱉어내는 새들에게 보이는, 꽃들이 가득한 화원처럼 말이다. 그런 그림이 미술관에 걸려 있다. 그것을 보는 유령들. 여기는 유령들을 위한 미술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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