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17일 일요일

사건의 전말

우리가 충분히 먼 곳에 있다면,
우리가 충분히 빛날 수 있다면,
우리가 충분히 오래된다면,
우리가 시작할 수 있다면.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너는 낡은 장판을 걷어 올렸다. 드러난 시멘트 바닥에서 4년 전 거길 비췄던 백색 LED 빛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적색, 녹색, 청색 광원은 장판 밑의 콘크리트 균열에서 4년간 대기중이었다. 네가 그 빛의 말단을 붙잡을 수 있었다면, 구겨진 광선을 천천히 펼칠 수 있었다면. 넌 그 빛의 말단을 붙잡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실패했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어떤 빛은 네 등을 할퀴고 갔을 것이다. 어떤 빛은 네 정수리를 관통했을 것이다. 어떤 빛은 네 발 밑에서 무한히 진동하고 있을 것이다. 너는 어떤 빛을 오른손으로 사로잡았고, 그 빛은 왼쪽 새끼손가락으로 빠져나갔다. 어떤 빛은 네 망막에 걸려 사라졌고 어떤 빛은 아직도 네 배꼽에 고여있다. 어떤 빛은 결국 반사되어 다른 항성을 비추러 떠났을 것이다.

네가 처음 빛났던 순간을 기억한다. 수년치 새벽을 바친 뒤에야 내린 결정의 새벽을 보낸 네가 잠시 빛나던 순간을 기억한다. 인과가 어떠하든 그것이 네가 내보낸 첫 번째 빛이었다 임의로 정하기로 했다. 그것이 옳든 옳지 않든 결정한 것은 것은 언젠가 응답하니까. 어쩌면 그 응답이 이미 출발했을지도 모른다.

네 손등의 빛에 대해 상상한다. 네 정수리와 손톱 밑의 빛에 대해서 상상한다. 이 빛이 각각의 광원으로부터 왔다면, 이 빛의 첨단을 빛의 시작으로 환원할 수 있다면, 언젠가 이 빛의 말단이 결국 내게 닿을 것이라면 그걸 보증할 수 있다면 내 정수리의 시간대와 네 손톱 밑의 시간대가 다르다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최소한 그런 상상이 허용된다고 볼 수 있진 않을까. 그 빛들이 날 관통하던 순간에 내 정수리는 수억 광년 전에, 네 손톱 밑은 수백 광년 전에 있기도 했다 상상할 수 있진 않을까. 그 모든 시간들이 동시에 너와 날 관통했다고, 결국 우리가 이미 그 모든 시간들을 종단했다고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모든 일들은 매일같이 동시에 일어나기도 하고, 순차적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그 동시성이 충분히 그럴듯한 동시성이라 해도 우린 느려터졌으니까. 인과는 분명하지만 그것은 너무 자명하니까. 우린 자명한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아. 그것은 자명하니까. 입 밖으로 꺼내지는 것들은 모두 의심스러운 것들이니까. 충분한 대화와 충분한 한 해와 충분한 추돌과 널 추격하는 미래의 말단들. 난 너와의 대화를 모두 내 손톱 밑에 숨겨두었다.


창백한 푸른 점 게임

게임을 시작하기 전

  1. 이 게임을 위해선 적어도 세 명의 참가자가 필요하다.
  2. 각각 HQ, 보이저, 61억킬로미터를 맡는다.
  3. 최대 두 명의 참가자가 HQ를 맡을 수 있다.
  4. 이때 한 명은 칼 세이건을 맡는다.
  5. 최대 두 명의 참가자가 61억킬로미터를 맡을 수 있다. 이때 한 명은 지구 쪽 — 시작점 —, 나머지 한 명은 보이저 쪽 — 끝점 — 을 맡을 수 있다.
  6. 대화 중 61억킬로미터는 계속해서 늘어난다.
  7. 61억 킬로미터에 두 명이 참여할 경우 끝점이 61억킬로미터를 갱신한다. 증가량은 61억킬로미터 혹은 61억킬로미터의 끝점이 임의로 결정한다.
  8. 어차피 인간들이란 중요한 때엔 항상 느려터졌으니까, 얼마나 늘어나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게임 방법

  1. 세 팀은 창백한 푸른 점에 대해 상상한다.
  2. HQ와 보이저는 보이저로 전송된 신호에 대해 상상한다.
  3. 61억킬로미터는 보이저와 HQ 사이의 거리를 상기시킨다.
  4. HQ는 그 신호를 보내기까지 지난한 회의와 행정의 장벽에 관해 상상해본다. HQ가 두 명일 경우 둘은 토론한다. 이 신호의 비용과 시간과 의미에 대해 토론한다.
  5. 칼 세이건은 찬성 측, HQ는 반대 측에 선다.
  6. 61억킬로미터는 보이저와 HQ 사이의 거리를 상기시킨다.
  7. HQ와 보이저는 신호를 디코딩하고 처리하는 꼼꼼한 회선과 그 회선을 직조하던 손을 상상한다.
  8. 보이저는 결정한다.
  9. 보이저는 렌즈와 초기 Vidicon과 열과 우주의 냉기룰 상상한다.
  10. 일련의 장치를 작동시키는 기계 구조를 상상한다.
  11. 61억킬로미터는 보이저와 HQ의 거리를 상기시킨다.
  12. HQ는 회신을 상상한다.
  13. 61억킬로미터의 거리를 상상한다.
  14. 거리를 시간으로, 시간을 거리로 표기하는 경계에 대해 상상한다.
  15. HQ는 도취하는 영어권 국가의 백인 남성을 흉내낸다. 만약 HQ가 두 명일 경우 칼세이건이 해당 남성을 흉내낸다.
  16. 61억킬로미터는 지금까지 증가한 거리를 광년으로 환산한다.
  17. 보이저는 인간들의 게임이 끝났음을 선언한다. 인간들이란 중요한 때엔 항상 느려터졌으니까.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발 밑의 별빛과 달빛, 내 물통에서 한참 느려진 우주선. 내가 각각 다른 시간과 조우하고 있다는 것, 혹은 내게 전혀 다른 시간이 동시에, 충분히 동시에 관통했다는 것.

어떤 시간들은 단단하고 어떤 시간들은 눈앞에서 흩어진다. 어떤 시간에는 어떤 시간이 내 이마에 부딪쳐 지나가는 것을 보기도 한다. 어떤 시간들은 밀고 나아가야만 했고 어떤 시간들은 날 밀어내기도 했다. 우리의 방향이 옳은 것이라면 우리의 궤적도 옳을 것이란 믿음.

우린 어쩌면 다른 중력장에 속한 걸지도 모른다. 우린 한편 영원히 마주칠 수 없을 것이다.

올해 새벽을 지출해 나의 이름을 짓고 버렸다. 우주 어딘가에는 나와 당신을 떠난 새벽이 모인 별이 있을 것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우리의 표면을 지나친 말들은, 어떤 빛들은 우리가 알기도 전에 어딘가 부딪친다. 우리의 표면을 지나친 말들은, 어떤 빛들은 결국 어딘가 부딪친 후 온 것들이다. 애초에 우리에겐 우리가 시작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을지 모른다. 우리가 시작한 모든 것들은 이미 시작된 것들을 종단할 뿐이다.

올 한 해는 붉게 늘어지다 까맣게 얼어붙을 것이다.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