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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6일 금요일

오직 네 독자를 위한 여덟 성물 이야기 후일담

― 22년 8월 7일부터 24년 1월 21일까지의 플레이로 완결된,
TRPG팀 『너드트레인 1호선』 언리미티드던전 캠페인에서 미처 다뤄지지 않은 후일담


신앙을 버린 알료샤
폐허가 된 로시야로 돌아가 마을 재건에 힘씁니다. 부서진 성당을 고치고 이뤼가레의 눈을 다시 전시합니다. 로시야는 여덟 성물 이야기의 시작점이자 프리예로의 기착점으로 부흥합니다.

전대의 대마녀 미르지요
로시야에 약초상점을 개업하고 죽은 혼들을 달래줍니다. 알료샤에게 악마학 지식을 가르쳐줍니다. 가끔 대삼림에 찾아가 따부 등 요정들과 만납니다.

안내인 셰르
로시야에서 미르지요를 도와 약초꾼으로 일합니다. 테베의 세 기사의 발자취를 따르는 별의 순례객들을 위해 로시야-대삼림 가이드로도 가끔 나섭니다. 가정을 이루고 예레흐 남작의 표장을 가보로 간직합니다.

대삼림 요정 따부
미르지요가 떠난 요정 마을에서 자치위원장으로 뽑힙니다. 리더십을 발휘하여 서슬멧돼지 및 달혈족 등과 대삼림평의회를 조직, 프리예-로시야의 마법오솔길을 관리합니다.

고블린 키엘키엘
프리예에서 자라며 공용어를 배웁니다. 동서부를 두루 다니며 쓴 고블린여행기로 유명해지며 훗날 만자트의 조수가 됩니다.

천사통역 무하필
마법을 잃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인간이 아니었음을, 아니면 적어도 반은 인간이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대드루이드 수호자가 되어 수은의 오아시스를 지킵니다. ‘수호단’ 드루이드 제자들을 양성합니다.

어린이 드래곤 가나슈
혹시 있을지 모를 동족들을 찾아 북쪽으로 모험을 떠납니다.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심연지기 이그라디
오펜에게 감화되었습니다. 오펜을 따라가 마이라에서 살며 마술을 배워 새로운 마술사 길드장이 됩니다. 인-엘 우호에 힘씁니다. 오펜의 연인이 됩니다.

궁기사 탈타미쉬
가나슈와 함께 북쪽으로 떠납니다. 도중에 가나슈와 헤어져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소문이 들려옵니다.

마술사왕 만자트
운명성 마법진에서의 경험은 만자트의 지식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렸습니다. 공중섬으로 돌아가 보석내장을 연구하며 언데드 조수들과 함께 저술에 힘씁니다. 지나치게 많은 장서량으로 인해 공중섬은 그냥 섬이 됩니다. 도서관왕 만자트로 불립니다.

율리아-폴라
본스테드를 도와 전쟁고아들을 돌보고 난민구제에 힘씁니다. 테베의 성녀로 알려지며 테베 대주교를 거쳐 중심교회 추기경까지 오릅니다. ‘알료샤와의 문답’이 뭇 종교인들의 전설적인 필독서로 전해집니다. 운명성의 마법진에 의해,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성인의 눈’으로 지정됩니다.

이방도둑 쁘라쳇
얼마간 키엘키엘과 함께 여행합니다. 먼 남쪽 고향 섬으로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갑니다.

테베의 테시우스 공
율리아-폴라에게 청혼하나 거절당합니다. 끝까지 남부를 평정하지는 못합니다. 생의 마지막 즈음에는 수정구로 지옥의 공주와 대화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유능하진 않았지만 호인이었던 군주로 기억됩니다.

마술사 길드장 오펜
마법을 잃은 후 마술사 길드의 명예 고문이 됩니다. 세계는 평화롭고, 이그라디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행복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베라의 자리도 있습니다.

바드천하일 라다가마
모든 일이 끝난 뒤 얼마 가지 않아 영면에 듭니다. 죽기 전 중심교회에 마이라의 새로운 군주로 본스테드를 추천합니다.

와젠의 마담 루왈라
와젠이 순례객들로 북적거릴 때 수완을 발휘합니다. 와젠의 장로가 됩니다.

코룸의 짐꾼 마치
자신이 만들진 않았어도 ‘여덟 성물의 노래’를 가장 잘 부르는 가수로 인정받습니다. 대륙 곳곳에서 쇄도한 공연 요청에 응하며 한동안 바쁘게 산 다음 코룸으로 금의환향하여 다시 짐꾼이 됩니다. ‘역시 음유시인은 적성에 안 맞아.’

피조물의 전당 박물관장 헬가
서부군에 억류되었다가 풀려난 이후 집념과 불굴의 의지로 전 대륙으로부터 수장고 파괴에 대한 배상금을 받아냅니다. 파괴된 수장고를 보존하여 ‘테베의 세 기사와 금강석 두개골’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순례객들의 필수 코스를 만듭니다. ‘저주받은 서슬멧돼지 어금니’는 피조물의 전당 최고의 전시품 중 하나입니다. 죽은 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박물관장으로 방부처리되어 유리관에 안치·전시됩니다.

미우-미우
북쪽에서 전설의 붉은 새 한 쌍에 대한 목격담이 전해집니다. 그냥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사당지기 베르감
아들과 화해합니다. 베라에게 에피르단 사당지기 자리를 맡깁니다. 잠시 린천에 살다가 죽기 전에는 돌아옵니다.

어부왕 바바 우르즈
크루즈 사업이 생각처럼 잘 풀리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를 린천으로 데려왔습니다. 아버지와의 크루즈 여행은 즐거웠습니다. 조선소는 협동조합이 됩니다.

묘인 낚시꾼 한지
서부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마을 사람들이 지하실에 숨겨주었습니다. 평화로운 세계에서 별일 없어도 행복하게 살며 천수를 누립니다. 안탈리아에는 한지가 낚은 최대어 실물 크기의 대리석 조각이 남았습니다. 운명성의 마법진에 의해, 그의 낚싯대들이 ‘어부왕의 왼손들’로 지정됩니다.

천재마법사 카롱
어느 날 갑자기 감옥에서 사라졌습니다. 그 행방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던전도둑 누야
오펜의 소개로 마르타의 마술사 길드 지부장이 됩니다. 본스테드로부터 받은 본스체인 지분 절반 덕에 이미 부가 차고 넘치지만 가끔 익스트림 던전 탐험을 즐깁니다. 보물은 남몰래 좋은 곳에 사용합니다.

렉상의 엉터리마술사 조른
렉상의 마술사 길드를 펍으로 개조합니다. 사업을 크게 벌릴 수도 있겠지만 만족을 압니다.

갱염의 공주 예레흐
지옥에서 여전히 지상으로의 재기를 노리며 일을 꾸밉니다. 어찌어찌 테시우스에게 수정구를 전달하는 데 성공하고 그 이야기가 예레흐전서로 남겨집니다. 지상에 약간의 숭배자들이 생깁니다.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만족스럽습니다.

유령요정 예언자 셸라
긴 세월이 지나 고향숲은 다시 살아납니다. 셸라와 유령요정들 역시 다시 몸을 얻습니다. 로프의 손가락뼈를 깎아 뼈 구두를 만들고, 셸라가 그걸 신고 추는 만남의 춤 의식은 그들 사이에 대대로 전해집니다. 운명성의 마법진에 의해, 그것은 ‘대마녀의 발목’으로 지정됩니다.

2020년 11월 19일 목요일

오직 다섯 독자를 위한 새서울의 뒷이야기

― 8월 9일부터 11월 15일까지 진행 완결된, TRPG팀 『너드트레인』의 스프롤 캠페인에서 미처 다뤄지지 않은 후일담


스티븐-김찬
골든삼성에 들어간 후 과거와의 모든 연을 끊은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어렸을 때부터의 꿈, 사이버웨어 손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바보 같게도 결혼반지를 낀 채 수술을 받아 부인에게 엄청 혼나긴 했지만... 지금은 비어 있는 특임상무 자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박상무
회사의 이익에 반하는 반접속활동의 잘못을 혼자 뒤집어쓴 채 골든삼성에서 퇴직했습니다. 퇴직금으로 은평지구에 차린 세탁소가 다행히 그럭저럭 운영됩니다. 시간이 날 때면 접속해 ‘저쪽’에서 스킨메이커로 유명해졌다고 하는 아들과 만납니다. 아들은 최근 애인(아바타가 늑대인간인)을 소개시켜 줬습니다.

운전사들
김 여백사는 운전을 그만두고 누벨 박을 졸라 배양정육점을 차렸습니다. 전국화물연합에서 은퇴한 권 잭은 트럭을 몰고 유라시아를 여행하고 있습니다. 덕수 짐머는 육해공을 아우르며 새롭게 출범하는 고련 최대의 교통산업종사자조직 총운수연맹의 첫 번째 위원장이 되었습니다. 세바스티안 홍은 재기에 실패하고 술독에 빠져 지냅니다. 쿠로사키-희재의 음원성적은 처참했지만 마니아 층이 생겼습니다. 시로가네-중권은 뉴스블로그 뉴미디어워치를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에나멜 리
더 구글에서 꽤나 고속승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엔젤1.3에게 가끔 연락해 옵니다. 옛 보스에게는 한 번도 연락하지 않습니다. 캣인테른 내부 문서를 통해 변혁엔지니어결사의 부위원장임이 확인됩니다.

츠바키 히로요시
타코야키는 아무래도 적성에 맞지 않았습니다. 본인이 직접 두목이 되어 인천지구에서 작은 조직(동백파)을 이끌며 제과 관련 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힉스를 끌어들이려 합니다. 최근 만나고 있는 애인은 후마니타스 칼리지를 졸업한 더 구글의 엔지니어라는 소문입니다.

최필성과 고스트버스터즈
동원령에 응한 5명 중 2명은 전사, 1명은 자살, 장애를 얻은 나머지 2명 중 1명은 사이버웨어를 달고 원사까지 복무, 다른 1명은 사이버웨어를 달고 제대 후 동백파에서 일합니다. 동원령에 응하지 않은 나머지 5명 중 4명은 누벨 박과 함께 뒷골목 인생을, 다른 1명은 최필성과 함게 자수한 뒤 징역을 살고 나와 서로 화촉을 밝혔습니다.

에리즈벨 용산
가야트리 피차이의 퇴장과 함께 잠실 아콜로지 지하 직군으로 좌천됐지만 그곳에서 의외의 적성(땀 흘려 일하는 것이 좋다)을 발견했습니다. 여백사의 인공육을 아콜로지에 납품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그 외 사람들
외교관 은가누 피에르는 정계에 도전했다가 쓴맛을 봤습니다. 김가르시아 경감은 호텔 나비잠 차단 임무에서 죽을 뻔했지만 하늘이 도와 살아났습니다. 그를 집도한 페인보이 JKL은 의로운 의사로 이름을 날리다 맞상대 은가누를 박살내며 안암지구청장이 됩니다.

고동석
이래저래 돈을 꽤 만졌습니다. 여전히 이 리카 유림의 팬입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클래식 오토바이를 꾸며 유림 라이더스 클럽 회원들과 나들이를 다닙니다.

프로펫9과 에보 블레이즈
프로펫9은 해적당행성넷에 가입해 미약하게나마 접속 운동을 이어나가며 성지에 갇힌 영접자 구조에 힘씁니다. 에보 블레이즈는 접속 운동에서 완전히 돌아서서 미디어 팀장으로서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즐깁니다.

존 싱클레어
증거자 소년에 의해 접속 운동 진영에 전달된 마라 왕과 존 싱클레어의 토론 기록은 전설로 남았습니다. 감화된 존은 폴 싱클레어로 개명한 뒤 마라 왕의 비서가 되었고, 의체 생산과 사용의 사회화를 주장하는 역접속 운동을 이끕니다.

LoNe_wOlF
드디어 마지막 연인을 만난 것 같습니다. 아이디를 LoVe_wOlF로 바꿀까 싶습니다.

그 외 사람들 2
가야트리 피차이는 네 번째 의체로 옮겨 밸바이자에 스카웃되었습니다. 조인민공전자전단 출신 해커 원 썬은 마지막까지 성지에 갇힌 영접자들을 빼내다가 13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프레데트는 부평지구 구지하상가로 은소와 파라를 찾으러 갔다가 실종되었습니다.

마라 왕
외국으로 나갔다는 소문이 있지만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들뫼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캣인테른 극동에서 매우 중요한 직책까지 올라가 있었습니다. MARA 사인이 된 관광엽서와 쿠키(특별 재료가 첨가된)가 가끔 모두에게 배달됩니다.

레이 에리이
북미 전선에서 게릴라 활동을 벌이다 전사합니다. 코비드-103에 감염되어 병사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생전에 쓴 글들과 이 리카 유림에게 보낸 편지들이 갈무리되어 전자책으로 출간됩니다. 처음 보는 메일 주소로 누벨 박에게도 책이 전송됩니다.

은소와 파라
공식석상에 다시 모습을 나타낸 일이 남반구에서는 대단한 뉴스가 됐습니다. 해방남반구연합의 2대 서기장 추첨에 입후보했으나 낙첨, 칠레자치구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며 정치와 무관한 여생을 보냅니다. 언젠가 일행을 불러 포도비빔밥을 대접합니다.

중공의 19형 배양클론들
중공이 북미전선에서 손해만 보는 사이 자주관리파가 당권을 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내전에 가까운 갈등 끝에 결국 중공은 북미전선에서 물러나며 캣인테른에 가입, 흑룡강성을 비롯한 각지의 배양센터들도 해방되었습니다. 이미 생산된 클론 대다수는 노아에 인계되었으며 캣인테른의 주요 활동가 풀을 구성해 전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게 됩니다.

이 리카 유림
역접속 운동에 자신의 의체를 제공하여 최초의 사회화된 의체 제공자로 기록됩니다. 정확한 과거는 기억이 나지 않아도 뒤집힌 우주와 다섯 사람에 대한 꿈을 가끔 꿉니다. 자기 몫의 역접속 로테이션이 올 때마다 세계를 돌며 아이돌 활동을 펼칩니다. 공식 프로필상 200세 되는 해에 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의식의 영면을 선택했습니다. 그 후엔 거의 잊혀지지만 절대로 완전히 잊히진 않습니다.

2020년 7월 30일 목요일

일리야와 토르카추크의 계약 장면(下)



떨어지던 중이었기 때문에 저마다 휘청거렸다. 다시, 일행이 머물렀던 여관방이었다. 문짝은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부서져 있었다. 마법의 그림자 문은 확실하게 열렸고, 모두 무사히 돌아왔다. 방 한가운데 웅크린 채 중얼거리고 있는 뭔가는 내의 차림의 일리야였다. 린나이가 일리야 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보았다. 뭔가 잘못되고 말았어... 뭔가가... 뭐가 잘못됐는데요? 일리야의 중얼거림을 덮으며, 또다른 소리가 서서히 커지고 있었다. 바깥이었다. 말다툼(같은 것), 웃음소리(같은 것), 환호와 비명(같은 것). 갑자기 장이라도 섰나? 몬테소리가 중얼거리며 들창을 열자마자,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종류의 소란이 폭풍처럼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달빛 아래로 넘실거리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악마들, 마을의 낮은 지붕들 위로 불경하기 짝이 없는 빛깔의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뭔가 잘못된’ 탓에 무저갱의 악마들도 함께 그림자 문을 타고 이 세계에 도달해 버린 것이었다. 몬테소리는 그대로 들창을 닫았다. 유황 냄새가 진동했다. 하르포핌이 갑자기 기도를 시작했다. 도도는 웅크린 일리야를 걷어찼다. 뭐라도 해봐. 아니, 아무것도 하지 마. 도망을 치자. 어디로? 어떻게? 싸워 볼까? 여기서 죽자고? 이제 어쩔 거야. 사고 쳤잖아요. 모두가 할 말을 잃은 잠시간 끝에, 나동그라져 있던 속옷 바람의 마법사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소리를 지르면서. 왜 저래? 미쳤나봐. 그리고 여기부터가 일리야와 토르카추크의 계약 장면입니다:

 계약합시다! 저와 계약합시다!
 이 ‘바깥’으로 나와 보셨던 악마 분 계십니까? 계십니까?
 이 세계로 나오면 계약하셔야 합니다, 아시죠?
 그것은 세계가 만들어진 이래로 오랜 전통입니다.
 여러분께도 예외는 없습니다.
 에누리 없는 조건으로 모시겠습니다.
 저, 대마법사 일리야와 바로 지금 계약하십시오.

 그 말에 큰 악마 넷 중 셋, 냉정의 악마와 격노의 악마와 토르카추크가 관심을 보였다.
 네가 바라는 게 뭐지?
 편히들 계시다가 제가 부를 때 좀 도와주시는 것입죠. 저는 크게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뭘 받을 수 있지?
 제가 믿는 저의 신을 바치겠습니다.
 한낱 인간이? 우리가 그걸 어떻게 믿지?
 들어 보십시오, 역시 그러실 것 같아, 대륙을 떠도는 모험가들 중에서도 최고인, 아무래도 처음이라 잘 모르실 테니, 저희 도당을 소개 올리겠습니다.

 신앙 있는 모두가 그 이름을 우러러보는
 헬페르스의 고명한 사제
 저승에서 돌아온 돌 연구의 권위자
 만신의 램프로 길을 비추고, 교리를 되감아 죽은 이를 일으키나니?
 광물 너머로 빛을 만지고 개구리발로 물속을 걷는
 기적의 드워프 치유사
 구르는 돌, 하르포핌!

 수확제의 트로피가 빛납니다…
 혜성처럼 등장한 젊은 음유시인
 데뷔와 함께 쓰러뜨린 하플링 평단
 거친 젊음의 역동, 전 대륙에서 그 노래가 절찬 불리는, 진짜 요즘 노래
 살아 있는 전설 테너의 명실상부한 버금
 시체 수레에서 내려온 반인반요의 앙팡테리블
 ‘네 팔’, 린나이!

 이 인간을 보십시오!
 소금쟁이처럼 날랜 솜씨
 대륙 최강의 군대를 이끄는 은발굽 기사단장의 공인된 혈통
 검은 들개들의 참되고도 적법한 우두머리
 떠돌이에서 왕녀의 친우로, 기사 중의 기사로
 은빛 투구와 붉은 장식깃털의 특무기사
 차원을 찌르는 몬테소리!

 우리의 꺾이지 않는 엘프 챔피언
 대륙을 가로지를 운명을 부여받은
 철숲 장로의 예언 전달자, 모험의 소집자
 그 실력과 담력은 대설산의 빙룡이 자신의 알을 부탁할 정도였으니
 모든 날개 달린 것들의 친구
 드래곤의 부리이며 창공의 명사수
 용맹한 매 치치의 벗, 도도!

 그리고 저, 부끄럽습니다만
 삼천구백구십여섯 악마 여러분을 일거에 소환한
 이 시대 최고의 발로 뛰는 현장 마법사
 고대 영혼 어부왕이 그 후견인으로서 새겨준 이 로브의 정어리 무늬
 고성의 주인 수염군주의 계승자임을 뜻하는 이 지팡이의 수염 장식
*
 성당을 버린 성당지기, 마법의 바람을 쫓다가 사신에게 바친 손
 갈고리손의 대마법사, 일리야!


*이 시점에 일리야는 자신의 로브와 지팡이를 이세계로부터 빠져 나오기 위한 그림자 문 마법 의식에 사용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토르카추크가 과연 어떤 악마였을지, 그 영혼은 다른 세계에 봉인되고 그 머리는 데마노르의 컬렉션에 들어간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일이다. 신위神威가 정말로 탐이 났든지, 손해 볼 거 없다는 생각이었든지, 단순히 흥미가 동했든지, 셋 다 아니든지, 어쨌든 나머지 큰 악마들이 멍청한 소리라며 저마다 권속들을 데리고 세상을 어지럽히러 떠나는 사이, 토르카추크는 빨간 손톱으로 일리야의 등에 계약의 인을 새겼다. 이 계약은 그리 오래지 않아 정말로 지켜졌다. 토르카추크는 부름에 응했고 일리야는 자기의 신을 바쳤다. 비록 아주 잠깐이었지만, 악마는 신이 되긴 했었고….

2020년 4월 8일 수요일

일리야와 토르카추크의 계약 장면(上)

― 19년 2월 10일부터 20년 2월 23일까지 진행된 TRPG팀 『너드트레인』의 던전월드 캠페인 중에서


뭔가 잘못되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들은 심연 속에서 한 방향으로 날아가는 중이었다. 처음엔 폭발 때문에 튕겨져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어둠 속에 잠겨 있던 서로의 몸이 점점 드러나면서, 뭔가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서로의 표정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밝아졌을 때 약속이라도 한 듯 다같이 고개를 들자 멀리 머리 위에서 그들을 ‘당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불타는 마법의 원반 같았고,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쪽이 위가 아니라 바닥이었으며, 정확히 말해 그들은 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하르포핌이 말했다. 저게 뭐지? 몬테소리가 말했다. 뭐야 저거? 그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들이 무엇을 향해 떨어지고 있는지 분간해 보려고 했다. 원반은 노랗게 빨갛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일리야가 말했다. 살아 있는 꽃밭? 린나이가 말했다. 용암? 아니야. 일행 중 가장 시력이 좋은 도도가 장탄식을 흘렸다. 뭐야? 뭔데?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 모두가 알아볼 수 있었다. 주홍빛 원반처럼 보였던 그것은, 수효를 셀 수 없는 떼 악마들이 마구 뒤엉켜 불과 뿔과 발톱으로 싸우고 있는 이계의 무저갱이었다. 악마들이 그 지옥 구덩이에서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싸워 왔는지 알 수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이유는 아마도 없을 것이고, 기간은 아마도 영겁일 터였다. 그곳에서 죽지도 태어나지도 않은 채 불꽃 같은 피와 혀, 뿔로 서로를 찌르고 물어뜯어 온 것이다. 이야기에서나 나오는 줄 알았는데! 무슨 비유 같은 거 아니었어? 아니었다. 바로 그들이 떨어지고 있는 곳이었다. 뭐라도 해봐요! 당신이 수정구슬을 던져서 이렇게 됐잖아, 변신 마법이라도 써 봐, 주문서에 없어, 그림자 문을 여는 수밖에는 없어, 여기 그림자가 어딨어? 바닥에 가야 그림자가 생기겠지, 일단 착지까지만 어떻게든 하고, 그 다음에 싸우면서 시간을 벌어 보자, 가능할 리가 없어. 가능할 리가 없을 것 같았다.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그 자체로 악마의 입 같은 악마 구덩이의 일렁임을 말없이 지켜보는 외에 다른 도리는 없는 것 같았다. 그것은 죽기 직전에 볼 풍경으로는 좋지 않은 것이었다. 보다 보니 예쁘지 않아? 잠깐만.

어디선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폭발에 휘말리기 전 서로 칼을 겨누고 대치했던 이교도 노인이, 이제는 저승길동무가 되어 일행보다 약간 더 위쪽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다는 듯 후드를 완전히 눌러쓴 채 자신이 섬기는 사악한 신을 향해 기도하는 중이었다. 역시 죽기 직전에 들을 소리로는 좋지 않은 것이었다. 좀 심란한데 죽일까? 기다려 봐 저 사람 신이 우리도 같이 구해줄지 모르잖아, 그러진 않겠지, 우리가 한 일이 있는데. 이교도의 등을 바라보던 일리야가 갑자기 공중에서 허우적대며 로브를 벗기 시작했다. 뭐 하려는 거야? 지금 욕탕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고요. 곧 내복뿐인 초라한 몰골이 된 마법사는 뭔가를 외며 로브로 감싼 지팡이를 손에서 놓았다. 지팡이는 일행보다 빠르게 떨어지다가 곧 멈췄다. 약간 빛이 도는가 싶더니 머리 부분을 축으로 감겨있던 로브가 팽팽히 펼쳐졌다. 일리야가 이교도와 바닥을 번갈아 보면서 기묘한 손짓을 해 대자 지팡이는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된 듯 움직였고, 이교도의 등에 로브 모양의 그림자가 만들어졌을 즈음엔 아래서 싸우고 있는 악마들의 끔찍한 비명이 생생히 들려오고 있었다. 난 싫어... 집중해야 되니까 말하지 마. 그림자 문의 주문이 이어졌다. 일리야는 따라오라고 소리치며 사지를 펼쳐 이교도의 등을 향해 상승했다. 또다시 뭔가 잘못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달리 돌이킬 수는 없었다. 마법이란 게 그런 것이었다.

2020년 4월 7일 화요일

겪지 않은 후일담

오늘날 현실이 어떤지 알기는 현실을 바꾸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현실을 바꾸는 데에는 반성적인 원칙이, 추가적인 훈련이, 전과 다른 지평과 차원이, 겪은 것과 겪지 않은 것이 동시에 필요합니다. 뭔가 더 있나요?

...하지만 대체 왜 현실을 바꿔야 합니까?

좀 악마적으로 느껴지지만 반대로도 말해봅시다. 오늘날 현실을 바꾸는 것은 현실이 어떤지 알기보다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레버를 돌리듯 현실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돌려놓으면 됩니다. 우리에게는 ‘사상 최고의 GPU’인 상상력이 있습니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너댓 명의 RPG 플레이어를 상상해봅니다. 이들은 인공신경망이 아닌 진짜신경망을 각기 한 채씩 독립적으로 갖추고 있으며, 별도의 복잡한 처리 없이도 자연어를 통해 자연스럽게 상호작용합니다. 그야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제 현실의 의미를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고 얘기해봅시다. 상상을 현실로 만든다는 것은 즉 팀 단위 역할 수행이며, 기록의 공유입니다. 조직화와 의식화입니다...

[겪지 않은 후일담] 태그는 직접 플레이한 테이블탑 롤플레잉 게임(TRPG)의 후일담을 남길 수 있는 공용태그입니다. 플레이 후기, 룰 리뷰, 플레이에 사용한 자료, 리플레이의 일부, 설정, 캐릭터 뒷이야기 등 후일담에 포함될 수 있는 모든 것이 좋습니다. 일전에 단편으로 끝난 [기괴하고 엉뚱한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 그리고 그의 탄생에 관한 노트]의 아쉬움을 계승하고 있으며, 원저자의 허락을 구해 [기괴하고...]의 포스트 역시 소급하여 포함되었습니다. 우리의 소중한 제약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타인이 참여하는 실제의 플레이가 있었을 것
2. 전체를 다 보여주지 않을 것
3. 다른 이의 플레이에 사용되어도 괜찮을 것

*단편 태그 관리 방침에 의해 분리된 연재태그입니다. 실제 태그 개설 일자는 24년 1월 29일입니다.

2020년 3월 11일 수요일

기괴하고 엉뚱한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 그리고 그의 탄생에 관한 노트 ― 모험 상인 루디거

루디거는 스스로를 “대상인”이라고 칭하고 다니는 모험 상인이다. 그는 모험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로든 간다. 모험이 있는 곳에 보물이 있듯이, 보물이 있는 곳에는 그가 있다. 그는 용기 혹은 무모함이라는 재화로 보물을 구입한 뒤 위험 수당과 진귀함이라는 프리미엄을 붙여 모험자와 상점에 금화를 받고 판매한다.

그는 걸어다니는 창고와도 같다. 그의 몸보다 거대해 보이는 배낭은 온갖 물건들을 꾹꾹 눌러 담은 것으로도 모자라, 배낭 바깥으로도 짐을 마구 쌓아 올린 뒤 로프로 꽁꽁 묶어두었다. 때문에 그는 온갖 재료를 뒤섞어 만든 탑 하나를 짊어지고 다니는 듯이 보인다. 그의 가슴패기에 달린 주머니에도 상품이 있고, 허리춤에 두른 혁대에도 주렁주렁 온갖 상품이 매달려 있음은 말할 것도 없으며, 바지 뒷주머니에도, 장딴지에 두른 주머니에도 온갖 자잘한 상품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 짐들을 감내하고 움직이는 그의 몸이 얼마나 탄탄할지는 그의 옷을 벗겨 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모험에 필요한 수많은 것들을 취급하고 있는데, 특히 진귀한 마법 물품을 전문으로 취급한다. 그 물품 중에는 도굴이나 절도 및 약탈(이는 일반 모험가들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로 얻은 것도 있고, 정당한 금전 또는 물물 거래를 통해 얻은 것도 있다.

이 땅의 전설적인 모험가들과 수도 없이 거래를 했다고 그는 주장하지만(가령 전설의 검객 ○○이 사용하는 마법검이 자신이 판 물건이라는 식이다) 사실로 확인된 것은 없다. 어쩌면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말에 상당 부분 진실이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모험가들은 그가 상인이라는 이유로 그의 말을 절반 이상 거짓이나 과장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덤터기를 쓸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그렇다.

모험이 있는 곳에는 위험도 있다. 그는 늘 위험 속에 있다. 가끔 정말로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물건들을 사용해 위험을 벗어난다. 발을 크게 구르면 뒤꿈치에서 불을 뿜어내며 도약을 돕는 장화, 갈고리 달린 로프를 쏘는 발사기, 공중에 던지기만 하면 곧장 펼쳐지는 열기구, 정말로 위급할 경우 사용하는 차원을 접고 여는 병풍까지......

아래는 그가 취급하는 물품의 일부를 담은 리스트이다. 관심 있는 물건이 있는지 살펴본 뒤 그를 만나길 바란다. 앞서 말했듯이, 그는 모험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든 있다.


*마법 물품 탐지기(비매품!)
*각종 모험 도구 일체
*고급 약초(하플링™ 집단 농장제)
*단순히 +3 마법검
*마법 텐트(잠만 자도 정말로 회복됩니다!)
*수면용 책(마법 아이템입니다. 정말로요.)
*드래곤 알 부화기
*드래곤 알을 조리할 수 있는 사이즈의 후라이팬, 전투 중엔 강철 방패
*1회용 얼음 갑옷 스크롤(마법 문외한도 사용 가능. 한여름에 특히 유용합니다.)
*꿈 기억 돌
*긴고아
*영웅심의 망토(영웅심이 차오르게 하는 마법적 효과만 있습니다. 오직 심리적으로만 강화됨을 명심하십시오.)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한 세트이며 둘 중 하나를 사용할 경우 하나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명령 주문이 걸린 빈 명령서
*웃음 폭탄
*유증용 화수분(어떤 것이든 100년에 걸쳐 세 배로 불려줍니다.)
*골드 스프레이™ (효과가 지속되는 동안 더는 조무래기를 만나지 않습니다.)
*성 정체성을 랜덤하게 바꾸는 무지갯빛 약물
*에고 하프
*휴대용 단두대
*로켓 장화
*갈고리 로프 발사기
*원터치 열기구
*차원 병풍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미래를 보여주는 삼릉경(자신의 미래에 일어나야 했을 일을 보여준 뒤 그 일을 절대로 일어나지 않게 합니다.)
*지극히 사소한 소원만 들어주는 요정이 봉인된 반지
*하루에 한 번, 만 보 이내의 거리라면 빛보다 빠르게 가도록 도와주는 장화(이후에는 벗을 수 없는 천 근 무게의 장화로 변합니다.)
*한계의 갑옷(무엇이든 절대적으로 세 번 막아주지만, 무엇이든 세 번만 막으면 가루가 됩니다.)
*괴력의 차꼬
*불사의 물약(효과가 지속되는 동안 죽지 않습니다. 단 죽을 만큼 피해를 입었다면 효과가 끝난 후 죽습니다.)
*휴대용 병기고(무한의 가방과 유사하나 장비류만 수납할 수 있습니다.)
*어쩐지 보고 있으면 마음이 어두워지는 피규어
*큐피트의 화살(화살을 맞은 상대는 화살을 쏜 상대를 사랑하게 됩니다. 단 화살을 맞은 상대는 부상 위치에 따라 죽을 수도 있습니다.)
*맞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채찍(부상은 진짜입니다.)
*유령 말이 끄는 마차(유령 말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네거티브 글라스
*야바위꾼의 의족
*가치를 측정하는 양팔 저울
*부활용 모슬린 수의(부패된 지 3일이 지나지 않은 시체가 입고 있으면 3일 뒤 부활합니다.)
*친화력의 장갑
*강철 틀니
등등…...


*노트

지난 티알피지 세션들에 몇 차례 등장해 플레이어들을 귀찮게 한 인물이다. 대표적으로 드래곤의 알을 훔쳐 드래곤을 분노하게 만든 사건이 있다. 그가 벌인 짓에 악의는 절대로 없었고, 지질함은 조금 있었지만, 그도 다 먹고살자고 한 짓이었음을……. 모티프는 물론 토르네코, 그리고 <다크 세라핌>, <퍼스트 퀸> 등에 출현하는 전투 상인.

2019년 11월 6일 수요일

기괴하고 엉뚱한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 그리고 그의 탄생에 관한 노트 ― “머리 수집가” 데마노르

데마노르는 적어도 800년 이상 살아온 인간 주술사다. 그는 지적 생명체의 머리를 수집하는 자이며, 오직 그 일에만 관심이 있다. 그는 관심이 있는 지적 생명체를 발견하면 목숨이 끊어지지 않는 주술을 건 뒤, 머리를 잘라 투명한 유리병에 담아둔다. 그는 그 머리를 자신의 집에 진열한다.

바깥에서 보면 그의 집은 여러 시대를 상징하는 건축 양식으로 만든 여러 건물들을 ‘어울리지 않게’ 마구 쌓아 올린 탑처럼 생겼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제대로 된 바닥 따위는 없고, 구불구불 휘어진 기나긴 계단이 지하 밑바닥까지 이어진다. 그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 그 집의 주인이 800년 동안 수집한 머리들이 내지르는 아우성을 들을 수 있다. 머리들의 종류는 다양하다. 어떤 머리는 왕관을 쓰고 있고, 잘 다듬은 수염에서도 기품이 느껴진다. 밀짚모자를 쓴 어떤 머리는 뙤약볕에 오래 노출된 듯 새카맣게 탄 얼굴이다. 눈 감은 어떤 머리는 미사보를 쓰고 있다. 또 어떤 머리는 새의 깃털로 만든 관을 쓰고 있다. 이처럼 인종, 성별, 노소, 언어, 귀천, 그가 ‘진짜로 살았던’ 시대 등이 저마다 다른 얼굴들이 한목소리로 절규하며 방문객을 맞이한다.

이 주술사가 살아 있는 머리를 모으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는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 이야기를, 그 유일한 인생을 살아 있는 오브제로서 가지고 싶어 한다. 때문에 데마노르는 어떤 머리와의 대화가 지루해지면 다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까지 그것을 벽장에 두고, 새로운 이야기-인생을 들려줄 머리를 찾아 집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산 채로.

그는 리치가 아니지만 새 육체에 자신의 영혼을 담는 법을 알고 있어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으며,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육체를 전전해왔다. 현재 그의 육체는 말라 비틀어진 노파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는 곧 새 육체로 ‘이사해야’겠다고 생각 중이다. 그는 당대의 이름 높은 악인의 육체만을 원하는데, 이는 그런 자의 육체만이 자신의 영혼을 담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오래 살아온 탓에 여러 국가의 언어와 여러 시대의 성조, 뉘앙스 등을 사용한다. 당대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고어 혹은 사투리로 들릴 것이다.




*노트

지난 티알피지 세션에서 즉흥적으로 등장한 인물이다. 나는 그에 관해 말하며 온종일 유튜브만 보는 사람을 생각했다. 그는 순수한 개인적인 악인이다. 그의 관심을 끌지 않거나 심기를 불편하게만 하지 않으면 그와 마찰을 빚을 일은 없다.

기괴하고 엉뚱한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 그리고 그의 탄생에 관한 노트 ― 기괴하고 엉뚱한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 그리고 그의 탄생에 관한 노트에 관하여

이 연재물은 저와 제 친구들이 RPG 중에 만난 캐릭터들, 또는 제가 개인적으로 상상한 캐릭터들 중 괴이하거나 우스꽝스러운 이들에 관해 다루고 있습니다. 여러 장르의 인물이 다뤄질 수 있고, 클리셰적인 면모와 개성적인 면모가 고루 섞이는 것을 지향합니다.

이 연재물을 읽는 이들은 자신의 그룹이 즐기는 RPG나 소설 등에 이 캐릭터들의 면모를 표절할 수 있습니다.

연재 주기는 따로 없습니다. 그때그때 떠오를 때마다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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