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25일 화요일
다큐멘터리
다시, 나는 예술학교에서 영상 수업을 듣는 학생 한 명을 바라본다. 그는 나이고, 안타깝게 죽어서 사십육억 년에 나의 삶 스무 해 정도를 이어 붙였다. 우리는 포개어졌다. 그였던 나의 바람은 제 장례식을 지켜보는 것이었고 누가 오는지 않는지를 헤아려보는 것이었다. 나, 그, 시간은 장례식을 지켜본다.
영상처럼.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기도 있다. 억장이 무너진 네 부모가 세수를 하고 돌아온다. 쟤가 내 상주 노릇을 한다니 놀랍다. 장례식에 있는 다른 인간들에게 말하고 싶다. 나는 지금 여기 있으며, 뇌의 시동이 꺼졌을 때. 손 아래로 흘린 조약돌처럼 사람의 시야가 툭 떨어질 때, 이렇게 된다고. 우리는 먼 미래로 날아와서 미래의 과거의 총합이 된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니 두려울 것은 없다. 눈을 감고 아득해져서, 우주에 누적된 슬픔의 고저를 헤아릴 필요도 없다.
폼페이, 재와 먼지가 몽둥이처럼 몸을 두들기는 광경, 먼저 죽은 아이들과 공중목욕탕, 석고가 되어버린 나를 찍는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지고 있으니, 우리라고 다큐멘터리의 소재가 되지 않을 것은 없다. 느리겠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다음 인간이 죽어서 어떻게 되는지 알아낸다면. 저들은 우리를 찍어 영상으로 만들 것이다. 그것은 폼페이 다큐처럼 지구과학에 속할 것이다. 이제 저 카메라맨은 영상 교수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다. 화산이 깨어날지도 모르니까 촬영이 끝나면 서두르라고. 우스갯소리이지만 그 말대로 죽기 전까진 언제나 무서운 것이 있다.
2018년 12월 15일 토요일
2주년 기념 잔치
우리는 관리실에 앉아 있었다. 관리실은 장판도 깔고 전기요도 들이고 아주 좋아졌다. 쥐잡이는 이불 위에 올라가 있었고, 우리는 이불 속에 발을 넣고 있었다. 나 혼자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관리인과는 꽤 친해졌다. 벌써 두 해가 아닌가.
저는 이렇게 있으면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요, 말하자 관리인은 안경 너머로 내 쪽을 보며 대꾸가 없었다. 동의를 구해 본다는 뜻으로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그는 입을 씰룩이다가 다시 턱을 쳐들고 ‘고양이 대해부’를 읽기 시작할 뿐이었다. 나보다 더 마셨을 텐데 대체 저걸 어떻게 읽고 있는 건지. 사실 관리인은 그걸 읽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붙들고서 적당한 간격으로 페이지를 넘기고 있을 뿐인 게 아닌가? 이제 그 책은 아주 걸레짝이 되었다. 낡은 책을 수선해 주는 뭐 그런 사람도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런 소리는 다른 사람들도 수없이 했을 거다. 관리인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정말로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분명히 누군가 있다는 걸 안다. 아니라면 창고 안의 저것들은 다 무엇인지? 그렇잖아요? 그런 거는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어. 요즘에는 다들 그런 식으로 느낀다니까. 자네까지 그런 소리를 하다니 귀를 의심했어.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다가 병에 걸리고 마는 거야. 그거는 느낌이 아니니까... 그거는 사실이니까... 말을 왜...
나는 뻥튀기를 한 움큼 집었다. 술 좀 더 가져올까요? 가져올 수 있으면. 관리인은 책을 덮고 음악을 틀었다. 나는 엎어져 뻥튀기를 쥔 채로 음악을 듣고 있었다. 아니면 듣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윽고 찬바람과 함께 누군가 들어왔는데, 이분은 ...정이신데, 인사하게, 인사할 수 있으면, 하는 관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인사할 수 없었다. 아뇨 , 괜찮습니다. 속삭이는 듯한 소리였고, 이어서 이사야의 울음소리, 뒤이어 이사야의 작은 발 네 개가 나를 일곱 번 밟고 지나갔다. 누구? 누구라고요? 조장? 교장? 요정, 교정의 요정 말이야. 실례하겠습니다. 또 속삭이는 소리. 그리고 이불 속으로 처음 보는 녹색 발 하나가 쑥 들어왔다.
2018년 12월 3일 월요일
2018년 11월 28일 수요일
머리 수집가
-머리 수집가입니다.
머리 수집가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요?
-말 그대로 머리를 수집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머리를 어디에서 수집하나요?
-주로 길거리에서 수집합니다만, 간혹 숲이나 갈대밭, 저수지나 방파제 등등에서 수집하는 때도 있습니다.
대강 ‘어떤’ 머리입니까?
-정확히 ‘인간’의 머리입니다.
왜 머리를 수집하는 겁니까?
-그게 내 일이니까요.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수집한 머리는 어떤 용도로 사용됩니까?
-아무런 용도로도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합법적인 일입니까?
-법전에 머리를 수집하면 안 된다는 법이 없으므로 이것은 불법적인 일이 아닙니다. 더불어 저는 머리를 수집하기 위해 다른 어떠한 불법적인 일도 저지르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당신은 살인을 저지르거나 혹은 살인을 교사하지 않나요?
-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시체에서 머리를 잘라내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그저 굴러다니고 있는 머리를 수집할 뿐입니다. 이런 머리들은 주인도 없는 머리들입니다.
머리에 주인이 없을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머리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떨어져 나갔다고 가정되는 몸통이 머리의 주인일까요? 하지만 몸통은 판단하는 주체가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몸통에는 뇌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뇌가 있는 머리가 머리의 주인일 수는 없습니다. 머리가 머리를 가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고로 굴러다니는 머리의 주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말장난처럼 느껴지는데요.
-당신도 굴러다니는 머리가 되어보면 제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당신은 더 이상 당신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것을 노동이라 할 수 있습니까?
-저는 머리를 수집하기 위해 일을 하고, 그 대가로 머리를 얻습니다.
수집한 머리는 어떻게 됩니까?
-제 코트 안에 보관됩니다.
-이렇게요.
2018년 11월 8일 목요일
광산장
“난 누구와 조를 이룹니까?” “그건 곧 알게 될 거야.” 광산장은 털주머니 속에서 광선 다발 중 하나를 꺼내 스피커에게 주었다. 스피커는 그것을 목에 둘렀다. 얼음 갱도의 깊은 곳은 심해처럼 어둡다고 했다.
2018년 11월 7일 수요일
2018년 11월 3일 토요일
기계광이 기계를 사랑하듯
대법관이 죄를 부른다.
독재자 나는 내 운명을 안다.
동요하는 기색은 커녕, 만연한 웃음을 무기처럼 내보이며
독재자 가스실로 들어가게 될 것이고, 내 법령에 따라 살아 모습 그대로 냉동될 것이다. 그러나 후대, 내 이름은 함성처럼 불거져 나올 것이고,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자손이 말라붙은 내 명예를 우물처럼 되살릴 것이다. 역사가 나의 판단 주체로되 나는 반드시 복권되며. 그때 너희와 너희 자손의 목은 새장처럼 매달려 여기 모인 사람들의 돌팔매를 맞을 것이고, 돌에 붙은 너희 살점은 인민들 논과 밭을 참새처럼 뒹굴 것이다. 나를 보아라. 기계광이 기계를 사랑하듯 나 또한 너희들을 사랑했다. 알겠느냐 알아야 한다. 역사는 언제나 정의로운 자들의 편이며, 결국 나는 빛으로 된 화살비를 맞게 될 것임을.
지지자들이 그의 이름을 삼창한다.
대법관(기계) 우체국장은 일어나시오.
대법관(기계) 선서하시오.
대법관(기계) 그대는 이 재판의 발생을 후세 역원에게 공표하고 답신을 받기로 되어 있었소.
우체국장 여기 묶인 반서 뭉치가 바로 그 답신입니다.
대법관(기계) 낭독할 준비가 되었소?
우체국장 낭독하겠습니다. 그 전에, 이곳에 계신 참관인들에게 알립니다. 이것은 아직 그 내용을 모르는 전보들입니다. 이것은 우리 과거 세대가 중력자 창문의 풍향계에 실어 후세의 우체국, 혹은 그에 준하는 기관으로 보낸 전보의 답신입니다. 이 전보는 행성 둘레의 알고리즘 기둥에 의해 절대적으로 보호되므로 결코 훼손하거나 왜곡될 수 없음을 전합니다. 또한 전보를 보내기 위해 몹시 많은 자원을 소모한바, 다음 세대의 황금기를 대신 지불해 얻은 이 전보의 중요성과 사건의 중대함을 이해하여 주시고 답신의 내용을 사고 깊숙이 각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읽겠습니다. 우리가 보낸 전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복권되었는가?” (지금 우리의 기술 능력으로는 여섯 글자가 한계였음을 말씀드립니다). 날짜의 해석은 우리 시대를 기준점으로 합니다. 처음은 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이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삼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오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백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이백이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오백오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일천이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이천오백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오천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일만 이천오백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삼만 팔천이백오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오만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십오만 이천삼백이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같은 답신이 반복되니 좀 뛰어넘도록 하겠습니다. 일억 삼천이백십만 팔천이백이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마지막 사십육억 년 뒤로부터 온 답신에는 알 수 없는 문자가 적혀 있어 해석에 애를 먹었습니다만, 우리 연구가들이 동봉된 쪽지를 통해 방금 막 그 의미를 알아냈습니다. 보이십니까? 우리의 언어로 번역하면 ‘복권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2018년 10월 31일 수요일
2018년 10월 28일 일요일
거미
실을 잣고 베를 짜는 여인들은 불행하다. 물레를 함부로 건드렸다가 백 년이나 가는 저주를 받아 불행하다. 목동과 사랑에 빠졌으나 일 년에 단 하루만 만날 수 있게 되어 불행하다. 아비의 거짓말 때문에 헛간의 지푸라기들을 황금으로 바꾸어 놓아야 할 처지가 되어 불행하고, 구혼자들을 물리치느라 낮 동안 애써 짠 베를 밤마다 풀어 헤치는 일이 불행하다.
그렇다면 노래하고 춤추고, 길을 떠나고 효를 행하고 친절을 베풀고, 먹고 마시고 울고 웃는, 나머지 여인들은 불행하지 않았던가.
모퉁이에서 마차가 무서운 속도로 돌아나온다. 나는 고삐를 쥔 이를 간신히 알아보고, 인사할 틈도 없이 마차는 지나가고 만다. 그러고 보면 그걸 마차라고 해도 좋을까? 마차를 끄는 짐승의 머리는 둘인데 다리는 지나치게 많았던 것 같다.
2018년 10월 26일 금요일
그리운 도나
2018년 10월 24일 수요일
[11호 서신]
*가을
-건강 유의(면역-호흡기계통).
*가을철 마감 숙지
-11월 7일.
*곡물창고 건립 2주년 눈앞: 생산력 배가 운동
-사실상 연재 중단 상태의 태그 돌아보기.
-각 계절 마감당 1편 초과(최소 2편) 발행을 권함(‘곡물창고에서’ 태그 사용 등).
-또는 필자 1인 천거.
*블로거 사용 팁
-태그 일괄 삭제, 추가 / 태그명 수정 방법.
-태그에 따른 글 목록 구현 방법.
-기타 유용할 수도 있는 팁.
*게시물 교정
-이제 게시물 교정 ‘서비스’가 제공됨(전문 교정공에 의하며, 기본 맞춤법에 한함).
*협력 관리 요청
-태그 소개 작성 적극 권장.
-태그 완결 또는 태그 연재 중단 시 관리인에 고지 필요(또는 자력으로 저장고 이동).
*사용조례 수정
-위 두 항목 관련.
이상.
2018년 10월 2일 화요일
비밀 관리자
방금 고객 한 분이 엉덩이를 털고 밀실 밖으로 나갔다. 대단히 육중한 엉덩이였다. 그는 무려 두 시간 분량의 비밀을 털어놓고 나갔다. 얽히고설킨 그의 여자 관계에 대한 비밀들이었다. 길이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1급에 해당하는 개인 비밀이다. 이 비밀에 대한 보안은 굳게 유지될 것이다. 우리는 고객을 실망시키는 법이 없으니까.
어떤 비밀들은 지키기 어렵다. 아니 비밀이란 원래 지키기 어려운 것이다. 자신이 비밀의 형성에 기여한 1차 공모자이든, 아니면 타인을 통해 비밀을 공유하게 된 2차 공모자이든(“비밀은 2차 전파 이후에는 약 99%의 확률로 비밀로서의 효력을 잃는다”라는 세계밀어관리국 통계에 따라 3차 공모자라는 개념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비밀 관리 능력을 훈련하지 않은 일반인들에게는 그만한 언어의 압력을 감당할 만한 차폐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드시 지켜야 할 비밀이 생김으로써 받게 되는 언어의 압력에 대한 스트레스를 덜어내기 위해 그들은 비밀 관리 사무소를 찾는다.
우리 비밀 관리 사무소 직원들은 고객의 말을 성심껏 들어주고, 무의식이라는 토양 아래에서 저 스스로 의미의 잔뿌리를 뻗어나가는 언어적 특성상 발생되는, 고객 자신도 미처 몰랐던 비밀 속의 비밀을 놓치는 법이 없도록 진술되는 비밀에 대해 세심하게 반문하며 비밀의 투명함을 교차 검증한다. 불법 유출의 위험이 존재하는 비디오, 오디오, ‘대나무숲’ 등의 기록 장치는 일절 사용하지 않으며, 입사시 3개월간의 교육 과정을 통해 익히는 초월 기억법을 통해 그 내용을 뇌에 반영구 보존한다(초월 기억법은 뇌 사용에 관한 고도의 효율을 기대하고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므로 사원 선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프로그램 수행에 관계된 신체 능력이다. 특히나 입술의 무게는 최소한 21그램 이상이 되어야 한다. 때문에 채용을 위해 입술 속에 이물질을 삽입하다 적발되는 경우도 있다). 고객 관리 차원에서 그들이 다시금 비밀을 털어놓고 싶어 견디기 어려울 땐 같은 내용을 재차 들어주고, 기억 훈련이 되지 않은 고객들의 진술에 혹여나 오류가 있을 때는 이를 정정해주는 애프터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이를 비밀 강화 서비스라고 한다).
비록 훈련받았다고는 하나 비밀 관리 사무소 직원들도 한낱 인간이기에 비밀의 압력을 견뎌내는 데 상당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일반적으로 직원들은 비밀 입력 후, 그 압력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를 독방에 가둔다. 그 독방은 목소리가 벽을 통해 수차례 반사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직원은 그곳에서 입력받은 비밀을 더 이상 육성으로 말하거나 듣기 싫어질 때까지 중얼거리다 나온다. 때때로 비밀 유지에 탁월한 성분이 있는 것으로 확인된 레몬 추출물을 합성한 크림을 입술에 바르는 경우도 있다.
계약서상 명시된 비밀의 보존 기간은 특별한 언급이 없을 경우 계약자(갑)의 사망일까지이다. 때문에 갑이 사망한 후 세상에 알려진 비밀들 중 몇몇은 큰 파문을 일으킨 적도 있다. 주로 기밀 문서에도 기록되지 않았던 군의 기밀 작전, 유명 인사의 성 추문, 갑의 사후에 발생하는 예언들(생전에 공식적으로 말한 바 없는 대 예언가들의 예언이 알려지는 대부분의 경우가 이를 통해서다), 연쇄 살인 사건의 ‘진짜’ 배후와 원인, 종교 지도자의 본체가 보존된 은신처, 사라진 보물들이 보존된 장소, 베이퍼웨어인 줄 알았던 소프트의 실존에 관한 진실, 500년 이상 이어진 맛집의 육수 레시피 등이 이에 해당한다.
만약 갑의 사후에도 비밀이 지켜지길 원하는 경우 계약 사항에 특수 조항을 추가해야 한다. 대개는 “내가 죽고 나면 무슨 상관인가”라는 생각 때문에 가성비에 관한 딜레마가 따른다. 또한 이는 ‘죽음으로도 해소되지 않는 영원한 비밀’을 견딜 수 있는 직원을 필요로 한다. 오직 고도로 훈련된 엘리트만이 가능한 일로서, 업계에서는 이들을 침묵의 수호자라 부른다.
계약 기간 중 계약자의 잘못에 의한 사건 사고로 비밀이 누설되거나 갑이 비밀 유지를 포기하거나 비밀 자체가 무의미해져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되었을 경우 갑과 을 중 한쪽이 계약 해지를 요청할 수 있다. 2급 이상의 비밀이었던 경우 묶여 있던 언령을 해방시키며 위로하는 위령제를 지내기도 한다.
뇌 속에서 항상 온갖 비밀들이 들끓고 있기에 직원들은 일평생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스트레스 관리를 위해 충분한 급여와 최대한의 복지가 제공되지만 결국 미쳐버려 폐인이 되거나 사직서를 제출하는 직원들도 있다. 이러한 직원들은 내규에 따라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처리된다. 나는 갑으로서 이상의 비밀을 당신이 보관하도록 요구한다.
2018년 10월 1일 월요일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요
성직자는 단어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며칠 전의 종이를 내려다 본다. 그는 모든 걸 정확하게 기억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을 적고 있던 당시를 떠올릴수록 눈앞이 까마득해진다. 듣고 이해한 다음 온전히 전달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눌리며 알아볼 수 없는 문자를 만들어내면서, 놓친 말들이 알아서 필요한 사람에게 가닿도록 기도를 했나?
낯선 차를 타고 멀리 다녀온 밤에는 낮의 일을 그저께쯤의 일로 착각하는 것처럼. 한 문장 전 문장의 선명함에 비하면 두 문장 전은 아득하다. 기억을 쭉 당겨보자, 이번에는 한 문장 전의 문장이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온전하게 살려낼 수 있는 단 하나의 문장도 가질 수 없었기에 선택을 해야 했다.
(어떤 말이 듣고 싶으세요. 되도록 짧게, 말해주세요. 그리고 아무것도 묻지는 말아주세요. 팔을 한 번 반쯤 뻗는 거리에 사탕이 정갈하게 진열되어 있습니다. 그쪽을 참고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여름이 오고 있나요?)
이것은 몇 문장 전의 일일까. 희미해지는 두 문장 전의 문장보다 오래된 기억은 그보다 다소 선명하게, 그러나 언어를 잃어버린 채로 돌아왔다. 언어를 잃어버린 기억들의 메시지는 짐작 말고는 불가능해서 그걸 아무에게도 전달할 수 없다. 도둑이 누군지 알 것 같았지만 이름을 잊어버렸다.
2018년 8월 21일 화요일
파다한 ― 30
2018년 8월 19일 일요일
미완성
2018년 8월 6일 월요일
네이티브
그렘린, 우리말로는 무엇으로 옮겨야 할까? 파물귀(破物鬼), 망깨비 정도의 대체어를 쓸 수 있겠다. 그렘린이라는 이름은 서양에서 최초 발견된 장소에 고블린이라는 명사를 합성해 만든 것이다.
즉 좋은 소식이란 박물학자인 내가 마침 머무르던 곳 인근에서 저 유명한 괴동물을 직접 발견했다는 것. 물론 나쁜 소식은 지금 이 소식을 전하는 도구를 비롯해 많은 기계들이 더이상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파물귀가 기계를 파괴하는 이유와 그들의 생태에는 전혀 관계가 없다. 쉽게 말해 그들이 기계를 먹고 산다는 세간의 믿음은 오해라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개인적으로 파물귀를 좋아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오로지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서, 그들은 기계의 고장을 유발한다.
러다이트 운동의 발화점을 누구로 알고 있는가? 질문을 조금 바꿔야겠다. 러다이트 운동을 시작한 것이 인간일까?
고장난 기계가 그들에게 어떤 기쁨을 주는지는 알 수 없다. 적어도 인간이 불편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 아님은 확실하다. 이런 생각은 너무도 인간중심적이어서 낯이 뜨거워질 정도다. 일반적으로 파물귀들은 인간에게 우호적이다. 고장낼 기계를 만들어주는 존재를 미워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다만 기계고장을 직접 막으려 할 경우에는 적대적으로 돌변할 수도 있다. 매우 위험한 상황이므로 최대한 피하기를 권하고 싶다. 비행기 엔진을 물어뜯을 수 있는 턱힘을 지닌 존재와 대치하는 것은 조금도 용감한 행동이 아니다.
추정컨대 파물귀들은 기계의 멈춤 자체에서 크나큰 쾌감을 느끼는 듯하다. 크고 구식일수록 좋아하며, 무릇 ‘스마트’라는 수식어를 지닌 현대의 기계들을 미워한다. 인간 입장에서는 큰 차이가 없는 듯 느껴질 수 있다. 너무 좋아서 고장내기도 하고 너무 싫어서 망가뜨리기도 한다. 예방 삼아 개인용 기기 주변에 초콜릿이나 사탕을 한두 개 놓아두면 좋다. 안타깝지만 윤전기나 사다리차의 고장은 그따위로는 막을 수 없다.
현재 내가 체류중인 곳은 대학 캠퍼스를 중심으로 상권이 조성된 소도시로 파물귀를 흔히 볼 수 있을 만한 환경이 아닌데, 현지인의 안내에 따르면 인근에 공장 지대가 있다는 모양이다.
2018년 6월 25일 월요일
콩 이야기
2018년 6월 3일 일요일
초신성
2018년 6월 2일 토요일
뜻밖의 마술
어디까지 가능한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꿈 내용을 통제할 수 있다면 읽지도 않은 책의 한 페이지를 꿈에서 읽는 일은 가능하냔 거다. 시간과 공간을 손볼 수 있을까? 지금부터 잠에서 깰 때까지의 시간을 무한히 늘린다거나 하는 일.
그러나 읽지도 않은 책을 읽을 수는 없었고 무한한 시간을 손에 넣을 수도 없었다. 생각을 바꿨다. 나는 신 같은 것을 그려내려고 애썼다. 온갖 우상과 세계의 비밀, 오파츠와 전도서 성경 삽화 따위를 떠올렸다. 교황님, 몰몬, 사이키델릭.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는 신이 존재할 터이고 내게도 신의 속성이 깃들어 있을 터이다. 꿈속 세계에서는 내 안에 있는 것만을 불러들일 수 있다. 있다면 소환할 수 있을 터. 순간, 하나의 점을 중심으로 본 적 없는 불꽃들이 퍼졌다. 전신을 드러낸 것은 외곽선 없는 형상이었다.
나는 그 형상을 통제할 수 없었다. 꿈 밖에 있기 때문이라고 그가 말했다. 그는 자신이 인간과 다르다고, 이것은 기원 후 파놓은 함정이라고 말했다. 내가 막연히 신 같은 것을 상상하며 자각몽 속에서 부르려 했기 때문에 그를 바탕으로, 꿈은 주파수가 채널을 찾듯 매개가 되었으며, 그래서 이것은 꿈이 아니라 문명에 가깝고, 사건의 지평선은 늘어났으며 너로서는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다고, 이제 우리가 너희 행성으로 간다고,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말했다.
나는 벌벌 떨며 깨어났고, 자각몽에 대해 알아보다가 내가 겪은 것이 자각몽이 아니라는 것을, 그저 내가 자각몽을 꾸는 것 같은 꿈을 꾸었을 뿐임을 알게 되었다. 자각몽을 꾸는 꿈에서 그나마의 내 학교를 고친 것. 그 정도가 확신을 담아 말할 수 있는 뜻밖의 마술이었다.
2018년 6월 1일 금요일
2018년 5월 14일 월요일
침묵을 위한 시간
2018년 5월 1일 화요일
2018년 4월 26일 목요일
헛간 다이닝
자네 할머니가 처음으로 초콜릿을 먹은 게 몇살 때 일이게?
내가 검지 손가락을 하나 들어 보이자 악마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나도 고개를 저었지요. 나는 한살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질문을 하려던 거였으니까요. 악마는 질문 하나를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물었습니다.
할머니가 벌써 태어났나요?
악마는 짜증을 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별로인가요? 먹을 것과 관계된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는데요. 거기다 이 얘기엔 악마도 나오고 시간여행도 나오잖아요. 부족한 게 없을 텐데.
일단 들어오세요. 어두워서 미안해요. 나한테 불이 없다는 뜻이 아니니까 그건 다시 주머니에 넣어두세요. 여기서 불이 났었답니다. 창고가 불을 무서워하게 되었을까봐 무서워요. 물론 불을 피우는 일을 끝까지 미룰 수는 없겠지요, 근사한 식사를 하려면 불을 쓰는 편이 아무래도 좋으니까. 그래도 당장은 아니에요. 지금은 괜찮은 식탁보도 없고.
여기에 여섯 명쯤 앉히려고 해요. 이 끝이 내 자리가 될 거예요. 집주인은, 엄밀히 말해서 창고 주인은 아니지만, 식사를 대접하는 동안은 그렇다 치고, 어쨌든 주인은 북쪽에 앉는 거라고... 반대인가?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미나리 한 단을 모아 쥔 채로 기도를... 딱히 종교가 있는 건 아니지만. 최근에 근성의 근 자가 미나리를 뜻하는 글자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진짜일까요?
테이블을 완전히 덮을 만큼 큰 식탁보는 필요 없어요. 가운데에 포인트를 줄 수 있는 정도면 좋겠어요. 주요리 바로 아래에 깔게. 하다못해 쇠여물을 쒀서 올려놓더라도 그런 식으로 식탁보를 깔면 뭔가 있어보인다 이거예요. 기왕이면 체크무늬. 더 욕심을 부린다면 빨간색이 좋겠지요.
왜냐하면 빨간색 체크무늬는 내가 한 번도 안 먹어봤지만 왠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 맛의 꼴을 하고 있으니까. 도로시 아줌마가 빨간 체크무늬 앞치마를 입고 만든 크림 스튜. 테오도르 씨가 빨간 체크무늬 오븐장갑을 끼고 사과파이를 꺼내는 광경. 미스 손이 들고 다니는 마호병을 감싼 빨간 체크무늬 스카프.
그건 여기가 식사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가려줄 예쁜 눈속임이기도 한 거예요. 손바닥만한 천조각 가지고 이 넓은 공간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구요. 일전에 여기서 일한다는 사람이 두유에 시리얼을 말아먹고 있는 광경을 본 적이 있어요. 그건... 말하자면... 과거에서 온 악마가 나한테 카카오톡을 보내왔을 때 느낄 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이었어요. 현대적이고 울적하고 기계적인 식사. 물론 거기에 식탁보 같은 것은 없었고. 시리얼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콘플레이크에 성욕을 감퇴시키는 성분이 들어있었다는 얘기를 아세요? 그냥 생각나서 한 말인데요. 지금도 들어 있는지를 내가 어떻게 알아요, 들어 있었다고 들었다고요.
짜증내지 마세요. 과거에서 온 악마처럼 보여요.
그건 그렇고 옷이 예쁘네요.
2018년 4월 25일 수요일
루돌프 슈타이너
2018년 4월 18일 수요일
2018년 4월 13일 금요일
동백
2018년 4월 2일 월요일
가죽 포대
산역꾼
삽을 들기 전에 산신께 공물을 바친다. 날이 밝으면 손이 올 것이니 그 손을 잘 보살펴달라고. 준비해온 술, 과일, 포 등을 차리고서 우리는 절을 한다. 이를 핑계로 술 한 잔 걸친다.
술잔을 내려놓은 뒤엔 명태를 묶은 삽을 광중(壙中)이 될 자리에 꽂아두고 그 주변에 술을 뿌린다. 광중의 네 귀퉁이에 흙을 한 삽씩 떠내고 공물을 올린 뒤 다시 절한다. 이를 핑계로 술 한 잔 걸친다.
술잔을 내려놓은 뒤엔 주변의 나무들을 벤다. 특히 광중 부근의 나무들은 뿌리까지 캐낸다. 그 뿌리가 자라 광중으로 뻗도록 하지 않기 위함이다. 너무 고되기 때문에 땀을 식히기 위해 술 한 잔 걸친다.
술잔을 내려놓은 뒤엔 삽 댈 부분에 술을 붓고, 지관의 지휘에 따라 삽질을 시작한다. ‘천광(穿壙) 낸다’고 한다. 지관은 패철을 살피며 폭과 길이와 깊이를 알려준다. 역시나 너무 고되기 때문에 이때 삽차가 동원되는 일도 있으나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땅을 판다. 구덩이를 판 뒤에는 그 구덩이가 적당하게 깊은지 보며 한숨을 돌린다. 휴식하며 술 한 잔 걸친다.
술잔을 내려놓은 뒤엔 당신이 오기를 기다린다. 당신은 정해진 시간에 오기로 되어 있다. 당신은 세신(洗身)을 하고, 정갈하게 차려입고서 여기로 올 것이다. 후대의 손에 들린 채, 편안하게.
아직 세상은 어둡다. 당신은 당신의 초상과 함께 마침내 여기에 다다를 것이다. 당신은 노래를 들으며 올 것이고 노래를 들으며 떠날 것이다. 당신의 머리는 산봉우리를 향하고 당신의 발은 산기슭을 향한다. 지관은 당신이 좋은지 살필 것이다. 당신은 좋을 것이다.
당신은 흙을 덮을 것이다. 우리는 남은 술을 마저 걸칠 것이다. 어미 아비도 못 알아볼 만큼 취하고 오늘을 잊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산에서 하는 일[山役]이다.
2018년 2월 21일 수요일
오함마
2018년 2월 16일 금요일
불태우기
미리 추위가 몰려와 있었다. 잠들 사람은 잠들었고 죽고 싶은 사람은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러니까 우리는 남은 사람들이었다. 할 이야기가 남았나?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예브게니와 조라는 낱말 맞추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휘는 앞주머니에서 삐져나온 실밥을 잡아 뽑고 있었다. 죽 뽑아도 약간의 실밥이 남았기에 휘는 그런 수법으로 자신의 겉옷을 해체하고 있었다. 오그오헤는 서성이고 있었다. 관심을 끌기 위함은 아닌 듯했다. 어느 쪽도 재밌어 보이지는 않았다.
램프가 몇 번 깜빡이자 남은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램프 곁으로 모여들었다. 꺼지려나? 오그오헤가 말했다. 기름이 없는 것 같은데. 오그오헤가 한 번 더 말했다. 기름이야 만들면 되잖아. 누군가 말했다. 누구로?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그런데 왜 램프를 계속 켜놓아야 하지? 내가 말했지만 나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램프는 뜨거웠다. 오그오헤는 뜨거운 것을 집어 포대를 향해 던졌다. 불이 붙고 있는 건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휘의 주먹 속에 있을 실밥을 떠올렸다. 조라가 포대 쪽으로 다가가 크게 들이마신 숨을 불었다. 예브게니가 조라 곁에 있었다. 타라, 타라, 하면서. 램프에서 시작된 불은 구호와 함께 조금씩 번져가고 있었다. 잠든 사람은 화창한 꿈속이었고 우리는 밀알 타는 냄새를 마시며 빈 포대를 펄럭였다. 그럴 기운이 있었다.
2018년 2월 6일 화요일
쥐잡이 이사야
한쪽 귀가 좀 찢어진 이 회색 태비는 예쁘다고 하기엔 확실히 어려운 얼굴을 하고 있다. 어쩌다 정면으로 마주친다면 그 인상의 엉뚱한 험악함에 헛웃음이 터질 것이다. 목소리도 사람으로 치자면 걸걸한 편. 몸집이 크지는 않아도 등이 제법 단단한 것이, 나가면 꽤 강자 축에 들지 않겠나 싶다. 창고 입구에서 기웃거리는 떠돌이 개들을 깔아 보며 털을 세우는 모습은 심심찮게 본다.
나이도 출신도 베일에 싸인 채 이사야는 쥐잡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다. 관리인이 이사야를 볼 때마다 쥐잡아- 하고 부르기 때문이다. 창고 안을 후다닥 뛰어다니길래 뭔가 해서 보면 병뚜껑을 쫓고 있더라는 얘기를 매양 꺼내며, 이 창고에 쥐잡이 같은 건 필요가 없다면서도, 결국 쥐잡이의 밥을 챙기는 이는 관리인이다. 관리실 한구석에 놓인 불룩한 마대들 중 매직으로 크게 ‘쥐’라고 쓰인 것이 이사야의 밥 포대다. 아무리 봐도 고양이용 사료 같지 않지만 당사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요즘 같은 한겨울은 관리실 난로 곁을 떠나지 않는 이사야를 마음껏 만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럴 때 관리인은 ‘고양이 대해부’라는 제목의, 어디서 주워 온 듯한(곧 어디서도 살 수 없을 듯한) 해진 책 한 권을 꺼내준다. 그러면서 이사야의 꼬리는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탐스럽다는 말을 더하고, 만약 계속 자라는 것이라면 잘라서 팔아도 되겠다는 소리를 꼭 한다. 처음 들었을 때는 그게 녹용이랑은 달라서... 하고 대답했다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했다. 관리인은 이사야 말고는 무엇에 대해서도 농담을 하지 않는다.
이사야는 ‘요옹’하고 운다.
이 계절 이사야의 취미는 눈 구경이다. 이어서 올 짧은 봄 동안엔 밖으로 종일 돌아다니다 들어올 테고, 여름에는 마당 그늘에 시체처럼 널브러져 들어온 사람을 놀래킬 것이다. 장마가 끝나야만 창고 들보에서 내려오며, 가을볕을 따라 다시 담으로 지붕으로 올라갈 것이다. 조건만 맞는다면 영원히라도 살 것 같다. 이사야는 평범한 도메스틱 캣이다.
2018년 2월 4일 일요일
곡물창고에서는
1) 곡물창고를 배경으로 할 것.
2) 한 필자가 일주일에 한 편까지만 쓸 수 있음.
3) 한 필자가 연속으로 2회 이상 쓸 수 없음.
일단은 일종의 이야기 게임으로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형식은 자유입니다. 곡물창고에 있는 사물에 대해 써도 좋고, 곡물창고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써도 좋습니다. 우리는 대체로는 가상의 뭔가를 다루겠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곡물창고의 지붕에 대해서 말할 수도 있고, 곡물창고의 지붕 아래서 하는 생각을 쓸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든 좋습니다. 그것은 일기, 일지일 수도, 감상일 수도 사전일 수도, 회고일 수도 편지일 수도 있습니다. 소설이거나 시, 희곡일 수도 있습니다. 연속성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습니다. 분량도 좋을 대로입니다. 다만 곡물창고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됩니다. 다른 필자가 쓴 곡물창고를 어느 선까지 인정하고 그와 관계할 것이냐 또한 자유입니다. 그 창고가 그 창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 모든 곡물창고는 하나이고 모두 ‘공식적’입니다. 이것을 게임으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좋습니다. 이것은 훈련이나 시험일 수도 있습니다. 이 태그를 통해 곡물창고의 필자들은 (원한다면) 곡물창고라는 공간을 직접 구성하는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곡물창고에서. 그것이 전부입니다.
육망성
2018년 2월 3일 토요일
[9호 서신]
*2월
-한겨울 낙상 및 동파 유의.
-설 연휴간 배앓이 조심.
*창고 마당 설치됨
-http://gokmool.blogspot.kr로 접속하면 우하단에 아이콘 등장.
-https://gokmool.blogspot.kr로 접속하면 입장 불가.
-누구나 들어가 아무 이야기나 가능.
-일단 챗박스 계정을 만들면 정보(이메일 및 홈페이지) 변경이 불가. 변경을 원하면 계정 삭제 후 다시 만들기.
-필자에게는 moderator 권한을 부여.
-관리인 계정/비번은 기존과 동일.
*알림판 운영의 추가사항
-팔로잉 시작. 알림판 로그인 권한을 지닌 필자라면 누구나 자신의 기준에 따라 타 계정 팔로잉 가능. 단, 인격 계정은 제외를 권함.
*권한 해제 조건
-필자 권한 해제 조건을 1개월에 게시글 1개에서 계절별 1개로 완화.
-계절은 24절기를 기준으로 함.
-18년도; 입춘 2/4, 입하 5/5, 입추 8/7, 입동 11/7
*필진 모집
- 추천제로 항시 진행.
이상.
2018년 2월 2일 금요일
마지막 더미 태우는 날
-
나는 원한다. 적절한 작별을. 전망의 조건은 만남이 아니라 작별에 있다. 우리는 작별을 위해서 모이는 것일 수도 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먼저 손을 흔드는 편을 택하는 수가 있다. 작별이 주는 엄청난 슬픔을 우리의 바깥 방향으로 돌려놓기 위해서, 그나마 견딜 만하게. 왜 견디려는지? 저편으로 간 이들과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째선지 번번이 그런 약속을 한다. 만나지도 못할 거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아닐 수도 있다. 이것이 쪽지 태우기의 마지막이다.
2018년 1월 31일 수요일
격몽
그것은 그것이 하는 일이다. 그것은 목격되거나 구전되지 않는다. 오로지 체험되고 침묵 속에서 공포로 남는다.
다음과 같은 목소리가 끝없이 따라오는 회랑이다.
어리석은 자!
어리석은 자!
어리석은 자!
회랑은 살아있다. 지나온 부분은 무너지고 걸어나가는 방향으로 건조된다. 뼈처럼 보인다. 거대한 포유동물의 가슴우리같은 형태로. 어두워진다. 밝아진다. 그 가슴의 주인이 숨을 쉬는 듯한 박자로.
질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의 안에 있는가.
(어리석은 자!)
나는 회랑의 뼈들이 희미해질 때까지 걸었다. 한번 회랑에 발을 들이면 어디에 누구와 있든 동시에 회랑에도 있는 것이 된다. 희미해지되 사라지지 않는 뼈들 사이에서 요사이 내 귀에는 불규칙적인 맥동소리가 들려온다. 어리석은, 어리석은, 어리석은 심장소리로부터, 불가능한 도주 상태가 영원히 지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