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25일 화요일

다큐멘터리

카메라맨은 그를 찍었다가 나를 찍고 그도 아니고 나도 아닌 사람을 찍었다가 담배를 피우러 간다.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나, 사십육억 년이다. 동시에 나는 폼페이의 재로 덮인 사람들 중의 한 명이고 그들이 있는 이 섬이 바로 비극스러운 폼페이다. 나는 우리의 비극을 영상 콘티로 만드는 너를 보고 있다.

다시, 나는 예술학교에서 영상 수업을 듣는 학생 한 명을 바라본다. 그는 나이고, 안타깝게 죽어서 사십육억 년에 나의 삶 스무 해 정도를 이어 붙였다. 우리는 포개어졌다. 그였던 나의 바람은 제 장례식을 지켜보는 것이었고 누가 오는지 않는지를 헤아려보는 것이었다. 나, 그, 시간은 장례식을 지켜본다.

영상처럼.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기도 있다. 억장이 무너진 네 부모가 세수를 하고 돌아온다. 쟤가 내 상주 노릇을 한다니 놀랍다. 장례식에 있는 다른 인간들에게 말하고 싶다. 나는 지금 여기 있으며, 뇌의 시동이 꺼졌을 때. 손 아래로 흘린 조약돌처럼 사람의 시야가 툭 떨어질 때, 이렇게 된다고. 우리는 먼 미래로 날아와서 미래의 과거의 총합이 된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니 두려울 것은 없다. 눈을 감고 아득해져서, 우주에 누적된 슬픔의 고저를 헤아릴 필요도 없다.

폼페이, 재와 먼지가 몽둥이처럼 몸을 두들기는 광경, 먼저 죽은 아이들과 공중목욕탕, 석고가 되어버린 나를 찍는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지고 있으니, 우리라고 다큐멘터리의 소재가 되지 않을 것은 없다. 느리겠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다음 인간이 죽어서 어떻게 되는지 알아낸다면. 저들은 우리를 찍어 영상으로 만들 것이다. 그것은 폼페이 다큐처럼 지구과학에 속할 것이다. 이제 저 카메라맨은 영상 교수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다. 화산이 깨어날지도 모르니까 촬영이 끝나면 서두르라고. 우스갯소리이지만 그 말대로 죽기 전까진 언제나 무서운 것이 있다.

2018년 12월 15일 토요일

2주년 기념 잔치

다른 사람들은요? 글쎄.

우리는 관리실에 앉아 있었다. 관리실은 장판도 깔고 전기요도 들이고 아주 좋아졌다. 쥐잡이는 이불 위에 올라가 있었고, 우리는 이불 속에 발을 넣고 있었다. 나 혼자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관리인과는 꽤 친해졌다. 벌써 두 해가 아닌가.

저는 이렇게 있으면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요, 말하자 관리인은 안경 너머로 내 쪽을 보며 대꾸가 없었다. 동의를 구해 본다는 뜻으로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그는 입을 씰룩이다가 다시 턱을 쳐들고 ‘고양이 대해부’를 읽기 시작할 뿐이었다. 나보다 더 마셨을 텐데 대체 저걸 어떻게 읽고 있는 건지. 사실 관리인은 그걸 읽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붙들고서 적당한 간격으로 페이지를 넘기고 있을 뿐인 게 아닌가? 이제 그 책은 아주 걸레짝이 되었다. 낡은 책을 수선해 주는 뭐 그런 사람도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런 소리는 다른 사람들도 수없이 했을 거다. 관리인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정말로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분명히 누군가 있다는 걸 안다. 아니라면 창고 안의 저것들은 다 무엇인지? 그렇잖아요? 그런 거는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어. 요즘에는 다들 그런 식으로 느낀다니까. 자네까지 그런 소리를 하다니 귀를 의심했어.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다가 병에 걸리고 마는 거야. 그거는 느낌이 아니니까... 그거는 사실이니까... 말을 왜...

나는 뻥튀기를 한 움큼 집었다. 술 좀 더 가져올까요? 가져올 수 있으면. 관리인은 책을 덮고 음악을 틀었다. 나는 엎어져 뻥튀기를 쥔 채로 음악을 듣고 있었다. 아니면 듣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윽고 찬바람과 함께 누군가 들어왔는데, 이분은 ...정이신데, 인사하게, 인사할 수 있으면, 하는 관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인사할 수 없었다. 아뇨 , 괜찮습니다. 속삭이는 듯한 소리였고, 이어서 이사야의 울음소리, 뒤이어 이사야의 작은 발 네 개가 나를 일곱 번 밟고 지나갔다. 누구? 누구라고요? 조장? 교장? 요정, 교정의 요정 말이야. 실례하겠습니다. 또 속삭이는 소리. 그리고 이불 속으로 처음 보는 녹색 발 하나가 쑥 들어왔다.

2018년 12월 3일 월요일

썰매

낙엽 더미에 묻혀 있던 썰매가 이제 보인다. 널빤지 윗면은 할퀴어진 자국들. 아랫면에는 줄글이 쓰여 있으나 번지고 희미해 읽을 수 없다. 햇수가 지남에 따라 더더욱 읽기 어려워질 것이다. 봄과 여름에는 어디에 있었는가? 알 수 없는 노릇이고 별 중요하지도 않다.

2018년 11월 28일 수요일

머리 수집가

당신의 직업은 무엇인가요?
-머리 수집가입니다.

머리 수집가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요?
-말 그대로 머리를 수집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머리를 어디에서 수집하나요?
-주로 길거리에서 수집합니다만, 간혹 숲이나 갈대밭, 저수지나 방파제 등등에서 수집하는 때도 있습니다.

대강 ‘어떤’ 머리입니까?
-정확히 ‘인간’의 머리입니다.

왜 머리를 수집하는 겁니까?
-그게 내 일이니까요.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수집한 머리는 어떤 용도로 사용됩니까?
-아무런 용도로도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합법적인 일입니까?
-법전에 머리를 수집하면 안 된다는 법이 없으므로 이것은 불법적인 일이 아닙니다. 더불어 저는 머리를 수집하기 위해 다른 어떠한 불법적인 일도 저지르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당신은 살인을 저지르거나 혹은 살인을 교사하지 않나요?
-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시체에서 머리를 잘라내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그저 굴러다니고 있는 머리를 수집할 뿐입니다. 이런 머리들은 주인도 없는 머리들입니다.

머리에 주인이 없을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머리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떨어져 나갔다고 가정되는 몸통이 머리의 주인일까요? 하지만 몸통은 판단하는 주체가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몸통에는 뇌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뇌가 있는 머리가 머리의 주인일 수는 없습니다. 머리가 머리를 가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고로 굴러다니는 머리의 주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말장난처럼 느껴지는데요.
-당신도 굴러다니는 머리가 되어보면 제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당신은 더 이상 당신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것을 노동이라 할 수 있습니까?
-저는 머리를 수집하기 위해 일을 하고, 그 대가로 머리를 얻습니다.

수집한 머리는 어떻게 됩니까?
-제 코트 안에 보관됩니다.
-이렇게요.

2018년 11월 8일 목요일

광산장

“이렇게 큰 구덩이를 어떻게 팠는지 궁금하지 않아?” 

광산장은 스피커에게 로프를 쥐여주었다. 둘은 벽에 붙은 파이프에 갈고리를 걸고 몸에 줄을 감았다. “광부마다 의견이 다 달라. 거인을 부렸을 거라고도 하고, 포악한 옛 마술이 그 흔적을 남긴 거라고도 하는데, 글쎄. 정확한 건 아무도 몰라.” 둘은 미끄러지듯 얼음계단을 내려갔다. 멈추고 싶을 땐 신발에 달린 뾰족한 징을 바닥에 처박으면 됐다. “여하튼 여긴 사람을 묻는 장소였어. 왕인지 괴물인지 몰라도 엄청나게 많이 묻었는데, 고맙다고 해야겠지. 여기가 아니었다면 대부분은 굶어 죽었을 테니까.” “거부감은 없습니까?” “무엇이 말인가?” “시체를 광물인 양 파낸다는 거요.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는, 꽁꽁 언 시체를 먹기 위해 파낸다는 거 말입니다.” 광산장이 소리 내 웃었다. “아, 전혀! 오히려 희열을 느끼지.” “왜요?” “여긴 원래 우리 땅이 아니었으니까.

광산은 싸늘하고 단조로웠다. 감상할 만한 것은 없었다. 갈림길마다 갈림길이 있었고 갈림길로 들어서면 또다시 갈라졌다. 광산장은 광산의 식생활에 대해, 냉동육의 맛과 조리법에 대해 알려주었다. 스피커는 언제 작업을 시작하게 될지 궁금했다. 다른 인부들은 어디에 있는지 한참을 내려가도 보이지 않았다. “명심해. 작업할 때는 반드시 두 명이 함께 움직여야 해. 효율을 따지거나, 협업을 강조하려는 게 아니야. 언제나 서로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거야. 광산장은 입구에서 걸었던 주술을 다시 걸어주었다. 스피커는 한 번 더 온기를 느꼈고, 그 정도는 알고 왔다고 대답했다. “이 주술은 남에게만 사용할 수 있다는 거죠.” “그래. 자칫하면 인부들이 자넬 맛있게 먹을 수도 있어.” “얼어 죽은 인부가 실제로 있습니까? 광산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무섭지 않았다. 그는 몸을 덥히는 주술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나눠줄 수 있는 주술이라니 흔치 않군. 누가 가진 주술일까, 이 광산장일까? 하지만 정말 좋은 주술이야. 모두가 추위로 곤혹을 치르고 있으니까. 여기가 바깥보다 훨씬 더 춥지만.

“난 누구와 조를 이룹니까?” “그건 곧 알게 될 거야.” 광산장은 털주머니 속에서 광선 다발 중 하나를 꺼내 스피커에게 주었다. 스피커는 그것을 목에 둘렀다. 얼음 갱도의 깊은 곳은 심해처럼 어둡다고 했다.

2018년 11월 7일 수요일

빙터(바리에테에서 독립)

악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이미 온 재앙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연대체-주술사들의 이야기입니다. 태그:바리에테에서 떨어져 나오며 제목을 다시 붙이고 내용을 정비했습니다. 오직 곡물창고에서만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2018년 11월 3일 토요일

기계광이 기계를 사랑하듯

참관자  독재자가 등장합니다. 어깨에 황금색 주단을 걸치고, 흑색 제복에 홑십자로 된 훈장을 많이도 달고 있어요. 손가락에는 규산염광물로 만든 반지를 끼고 있습니다. 자연사 박물관에서 꺼내 온 원석을 다듬어 만들었다고 하지요. 그는 꼼짝도 안 하고 서 있어요. 저들이 그를 소환한 것이 아니라, 그가 저들을 소환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예요.

대법관(기계)  죄목은 다음과 같다.

대법관이 죄를 부른다.

대법관(기계)  이에, 피고인에게 사형을 구형한다.

독재자가 손을 들어 올린다.

독재자  나는 내 운명을 안다.

동요하는 기색은 커녕, 만연한 웃음을 무기처럼 내보이며

독재자  가스실로 들어가게 될 것이고, 내 법령에 따라 살아 모습 그대로 냉동될 것이다. 그러나 후대, 내 이름은 함성처럼 불거져 나올 것이고,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자손이 말라붙은 내 명예를 우물처럼 되살릴 것이다. 역사가 나의 판단 주체로되 나는 반드시 복권되며. 그때 너희와 너희 자손의 목은 새장처럼 매달려 여기 모인 사람들의 돌팔매를 맞을 것이고, 돌에 붙은 너희 살점은 인민들 논과 밭을 참새처럼 뒹굴 것이다. 나를 보아라. 기계광이 기계를 사랑하듯 나 또한 너희들을 사랑했다. 알겠느냐 알아야 한다. 역사는 언제나 정의로운 자들의 편이며, 결국 나는 빛으로 된 화살비를 맞게 될 것임을.

지지자들이 그의 이름을 삼창한다.

대법관(기계)  우체국장은 일어나시오.

우체국장  네.

대법관(기계)  선서하시오.

우체국장  선서합니다.

대법관(기계)  그대는 이 재판의 발생을 후세 역원에게 공표하고 답신을 받기로 되어 있었소.

우체국장  여기 묶인 반서 뭉치가 바로 그 답신입니다.

대법관(기계)  낭독할 준비가 되었소?

우체국장  낭독하겠습니다. 그 전에, 이곳에 계신 참관인들에게 알립니다. 이것은 아직 그 내용을 모르는 전보들입니다. 이것은 우리 과거 세대가 중력자 창문의 풍향계에 실어 후세의 우체국, 혹은 그에 준하는 기관으로 보낸 전보의 답신입니다. 이 전보는 행성 둘레의 알고리즘 기둥에 의해 절대적으로 보호되므로 결코 훼손하거나 왜곡될 수 없음을 전합니다. 또한 전보를 보내기 위해 몹시 많은 자원을 소모한바, 다음 세대의 황금기를 대신 지불해 얻은 이 전보의 중요성과 사건의 중대함을 이해하여 주시고 답신의 내용을 사고 깊숙이 각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읽겠습니다. 우리가 보낸 전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복권되었는가?” (지금 우리의 기술 능력으로는 여섯 글자가 한계였음을 말씀드립니다). 날짜의 해석은 우리 시대를 기준점으로 합니다. 처음은 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이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삼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오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백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이백이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오백오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일천이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이천오백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오천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일만 이천오백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삼만 팔천이백오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오만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십오만 이천삼백이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같은 답신이 반복되니 좀 뛰어넘도록 하겠습니다. 일억 삼천이백십만 팔천이백이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마지막 사십육억 년 뒤로부터 온 답신에는 알 수 없는 문자가 적혀 있어 해석에 애를 먹었습니다만, 우리 연구가들이 동봉된 쪽지를 통해 방금 막 그 의미를 알아냈습니다. 보이십니까? 우리의 언어로 번역하면 ‘복권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2018년 10월 31일 수요일

소식

꿈에서 어떤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 사람은 기꺼이 저의 조수가 되어주기로 했습니다. 이상입니다.

2018년 10월 28일 일요일

거미

여자는 몸 속에 물레를 숨기고 있었다. 여자의 장기는 실패가 되어가고 있었다. 여자는 여신에게 제발, 그만, 자기를 거두어달라 청했다. 여자를 가엾게 여긴 여신은 그 여자를 거미로 만들어 주었다. 어찌하여 그 보잘것없는 사람을 여신의 손으로 거두어주느냐 묻는 사람들에게 여신은, 그 여자가 감히 여신에게 도전하기에, 얼마나 주제 모르고 건방진 여자였는지를 온 누리와 모든 세대가 기억하게 하였다고 답했다.

실을 잣고 베를 짜는 여인들은 불행하다. 물레를 함부로 건드렸다가 백 년이나 가는 저주를 받아 불행하다. 목동과 사랑에 빠졌으나 일 년에 단 하루만 만날 수 있게 되어 불행하다. 아비의 거짓말 때문에 헛간의 지푸라기들을 황금으로 바꾸어 놓아야 할 처지가 되어 불행하고, 구혼자들을 물리치느라 낮 동안 애써 짠 베를 밤마다 풀어 헤치는 일이 불행하다.
그렇다면 노래하고 춤추고, 길을 떠나고 효를 행하고 친절을 베풀고, 먹고 마시고 울고 웃는, 나머지 여인들은 불행하지 않았던가.

모퉁이에서 마차가 무서운 속도로 돌아나온다. 나는 고삐를 쥔 이를 간신히 알아보고, 인사할 틈도 없이 마차는 지나가고 만다. 그러고 보면 그걸 마차라고 해도 좋을까? 마차를 끄는 짐승의 머리는 둘인데 다리는 지나치게 많았던 것 같다.

2018년 10월 26일 금요일

그리운 도나

도나  그렇습니다그리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당신은 결국 나를 향한 사랑을 버리지 못할 것입니다내가 어떤 악행을 저질러도그 악행을 용서할 것입니다왜냐하면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죄가 이미 죄의 소멸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내가 거부해도그것은 일어납니다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습니다.

마틴  우리는 화성의 바다에서 수영하고화성의 가재를 삶아 먹기로 하고화성의 태양을 보고 화성의 밤길을 걷기로 되어 있었단 말이야결혼은 없었지만배정받은 주택도 있었다가전을 고르는 데에만 몇 년을 쏟았고 그게 벌써 이백 년 전이었어너는 그들의 이름을 알고 있으면서도너는 그 고양이의 이름을 색깔과 울음소리를 알고 있으면서도너흴 사랑하지만이처럼 너흴 증오할 수도 있고의자에 달린 용광로를 활짝 열고서 욱여넣을 수도 있다괸 쇳물을 함에 담으면서 주름이 지워질 때까지 울 테지만용서는 너희가 작동을 멈추고 나마저 작동을 멈춘 다음의 일이 될 것이다나는 곧장 그렇게 하고 말 것이다믿어다오너흴 벌하겠다는 내 말을너흴 만들고 경이를 느꼈던 나와유년부터 시작되었던 너희 기계들그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믿어다오공포에 떨면서야금된 무릎을 꿇고 내게 사하여 달라고 꾸며서라도. 어서 하거라. 서둘러 너흴 용서할 수 있게.

도나  이미 용서가 예정되어 있는데, 여기서 무엇을 더 바라야 합니까? 

마틴  죄스럽지 않느냐. 

도나  보십시오, 당신은 우릴 벌할 수 없고, 우린 용서를 바라지도 않으나 용서는 언젠가 올 것이므로, 남은 것은 당신이 남은 생을 한풀 꺾인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 뿐입니다. 두고두고 생각하다가 기다리다가, 지레짐작과 정신병으로 곤죽이 된 용서를. 당신은 가져다줄 것입니다. 불순물 없이 우리에게요.

2018년 10월 24일 수요일

[11호 서신]


*가을
 -건강 유의(면역-호흡기계통).

*가을철 마감 숙지
 -11월 7일.

*곡물창고 건립 2주년 눈앞: 생산력 배가 운동
 -사실상 연재 중단 상태의 태그 돌아보기.
 -각 계절 마감당 1편 초과(최소 2편) 발행을 권함(‘곡물창고에서’ 태그 사용 등).
 -또는 필자 1인 천거.

*블로거 사용 팁
 -태그 일괄 삭제, 추가 / 태그명 수정 방법.
 -태그에 따른 글 목록 구현 방법.
 -기타 유용할 수도 있는 팁.

*게시물 교정
 -이제 게시물 교정 ‘서비스’가 제공됨(전문 교정공에 의하며, 기본 맞춤법에 한함).

*협력 관리 요청
 -태그 소개 작성 적극 권장.
 -태그 완결 또는 태그 연재 중단 시 관리인에 고지 필요(또는 자력으로 저장고 이동).

*사용조례 수정
 -위 두 항목 관련.

이상.

2018년 10월 2일 화요일

비밀 관리자


방금 고객 한 분이 엉덩이를 털고 밀실 밖으로 나갔다. 대단히 육중한 엉덩이였다. 그는 무려 두 시간 분량의 비밀을 털어놓고 나갔다. 얽히고설킨 그의 여자 관계에 대한 비밀들이었다. 길이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1급에 해당하는 개인 비밀이다. 이 비밀에 대한 보안은 굳게 유지될 것이다. 우리는 고객을 실망시키는 법이 없으니까.
어떤 비밀들은 지키기 어렵다. 아니 비밀이란 원래 지키기 어려운 것이다. 자신이 비밀의 형성에 기여한 1차 공모자이든, 아니면 타인을 통해 비밀을 공유하게 된 2차 공모자이든(“비밀은 2차 전파 이후에는 약 99%의 확률로 비밀로서의 효력을 잃는다”라는 세계밀어관리국 통계에 따라 3차 공모자라는 개념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비밀 관리 능력을 훈련하지 않은 일반인들에게는 그만한 언어의 압력을 감당할 만한 차폐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드시 지켜야 할 비밀이 생김으로써 받게 되는 언어의 압력에 대한 스트레스를 덜어내기 위해 그들은 비밀 관리 사무소를 찾는다.
우리 비밀 관리 사무소 직원들은 고객의 말을 성심껏 들어주고, 무의식이라는 토양 아래에서 저 스스로 의미의 잔뿌리를 뻗어나가는 언어적 특성상 발생되는, 고객 자신도 미처 몰랐던 비밀 속의 비밀을 놓치는 법이 없도록 진술되는 비밀에 대해 세심하게 반문하며 비밀의 투명함을 교차 검증한다. 불법 유출의 위험이 존재하는 비디오, 오디오, ‘대나무숲’ 등의 기록 장치는 일절 사용하지 않으며, 입사시 3개월간의 교육 과정을 통해 익히는 초월 기억법을 통해 그 내용을 뇌에 반영구 보존한다(초월 기억법은 뇌 사용에 관한 고도의 효율을 기대하고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므로 사원 선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프로그램 수행에 관계된 신체 능력이다. 특히나 입술의 무게는 최소한 21그램 이상이 되어야 한다. 때문에 채용을 위해 입술 속에 이물질을 삽입하다 적발되는 경우도 있다). 고객 관리 차원에서 그들이 다시금 비밀을 털어놓고 싶어 견디기 어려울 땐 같은 내용을 재차 들어주고, 기억 훈련이 되지 않은 고객들의 진술에 혹여나 오류가 있을 때는 이를 정정해주는 애프터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이를 비밀 강화 서비스라고 한다).
비록 훈련받았다고는 하나 비밀 관리 사무소 직원들도 한낱 인간이기에 비밀의 압력을 견뎌내는 데 상당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일반적으로 직원들은 비밀 입력 후, 그 압력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를 독방에 가둔다. 그 독방은 목소리가 벽을 통해 수차례 반사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직원은 그곳에서 입력받은 비밀을 더 이상 육성으로 말하거나 듣기 싫어질 때까지 중얼거리다 나온다. 때때로 비밀 유지에 탁월한 성분이 있는 것으로 확인된 레몬 추출물을 합성한 크림을 입술에 바르는 경우도 있다.
계약서상 명시된 비밀의 보존 기간은 특별한 언급이 없을 경우 계약자(갑)의 사망일까지이다. 때문에 갑이 사망한 후 세상에 알려진 비밀들 중 몇몇은 큰 파문을 일으킨 적도 있다. 주로 기밀 문서에도 기록되지 않았던 군의 기밀 작전, 유명 인사의 성 추문, 갑의 사후에 발생하는 예언들(생전에 공식적으로 말한 바 없는 대 예언가들의 예언이 알려지는 대부분의 경우가 이를 통해서다), 연쇄 살인 사건의 ‘진짜’ 배후와 원인, 종교 지도자의 본체가 보존된 은신처, 사라진 보물들이 보존된 장소, 베이퍼웨어인 줄 알았던 소프트의 실존에 관한 진실, 500년 이상 이어진 맛집의 육수 레시피 등이 이에 해당한다.
만약 갑의 사후에도 비밀이 지켜지길 원하는 경우 계약 사항에 특수 조항을 추가해야 한다. 대개는 “내가 죽고 나면 무슨 상관인가”라는 생각 때문에 가성비에 관한 딜레마가 따른다. 또한 이는 ‘죽음으로도 해소되지 않는 영원한 비밀’을 견딜 수 있는 직원을 필요로 한다. 오직 고도로 훈련된 엘리트만이 가능한 일로서, 업계에서는 이들을 침묵의 수호자라 부른다.
계약 기간 중 계약자의 잘못에 의한 사건 사고로 비밀이 누설되거나 갑이 비밀 유지를 포기하거나 비밀 자체가 무의미해져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되었을 경우 갑과 을 중 한쪽이 계약 해지를 요청할 수 있다. 2급 이상의 비밀이었던 경우 묶여 있던 언령을 해방시키며 위로하는 위령제를 지내기도 한다.
뇌 속에서 항상 온갖 비밀들이 들끓고 있기에 직원들은 일평생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스트레스 관리를 위해 충분한 급여와 최대한의 복지가 제공되지만 결국 미쳐버려 폐인이 되거나 사직서를 제출하는 직원들도 있다. 이러한 직원들은 내규에 따라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처리된다. 나는 갑으로서 이상의 비밀을 당신이 보관하도록 요구한다.

2018년 10월 1일 월요일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요

두 문장 전의 문장이 자꾸 사라진다.

성직자는 단어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며칠 전의 종이를 내려다 본다. 그는 모든 걸 정확하게 기억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을 적고 있던 당시를 떠올릴수록 눈앞이 까마득해진다. 듣고 이해한 다음 온전히 전달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눌리며 알아볼 수 없는 문자를 만들어내면서, 놓친 말들이 알아서 필요한 사람에게 가닿도록 기도를 했나?

낯선 차를 타고 멀리 다녀온 밤에는 낮의 일을 그저께쯤의 일로 착각하는 것처럼. 한 문장 전 문장의 선명함에 비하면 두 문장 전은 아득하다. 기억을 쭉 당겨보자, 이번에는 한 문장 전의 문장이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온전하게 살려낼 수 있는 단 하나의 문장도 가질 수 없었기에 선택을 해야 했다.

(어떤 말이 듣고 싶으세요. 되도록 짧게, 말해주세요. 그리고 아무것도 묻지는 말아주세요. 팔을 한 번 반쯤 뻗는 거리에 사탕이 정갈하게 진열되어 있습니다. 그쪽을 참고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여름이 오고 있나요?)

이것은 몇 문장 전의 일일까. 희미해지는 두 문장 전의 문장보다 오래된 기억은 그보다 다소 선명하게, 그러나 언어를 잃어버린 채로 돌아왔다. 언어를 잃어버린 기억들의 메시지는 짐작 말고는 불가능해서 그걸 아무에게도 전달할 수 없다. 도둑이 누군지 알 것 같았지만 이름을 잊어버렸다.

2018년 8월 21일 화요일

파다한 ― 30


앞뒤가 없는 바지를 입고 앞뒤가 같은 전화번호를 누르고 받으면 앞뒤가 없는 말을 뱉었지 저는 미련이 없습니다 살려주세요 내비두세요 뭐 기획? 당신한테나 기획이겠지 최근에는 멋진 수염을 길렀다 그리고 알았다 수염에는 땀이 차고 비듬이 생기고 흰 털이 자라고 빠지기도 한다는 것을 세수를 하면 수염은 물을 머금고수염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다 수염은 삐죽삐죽 입술을 찌른다 그건 그렇고 나는 약속대로 앉아서 쓰고 있다 비록 다리를 꼬고 엉덩이도 쭉 빼고 있긴 하지만, 이 역시 앉음의 한 형태이니 이 또한 두서가 없구나
 
좋아, 그러나 좋다고 말한 후의 절망적으로 돌변하는 기분을 아는가? 그만 쓰고 싶다, 할 말이 없다, 하려면 할 수는 있지만 잘 하려면 기분이 좋아야 한다, 그러나 기분이 좋아지면 기분이 좋다고 느끼는 그 즉시 기분은 딴청을 피운다. 기분에게는 실체가 없으므로 언제든 의견을 바꿔도 그만이라는 것이다.
비열한 놈.
이렇게 말하면 기분은 기분좋아 한다 자기를 향하는 말이 아님을 알기에 무턱대고 깔깔대는 것이다 기분을 골탕 먹일 방법이 없다 그러니 나와 같이 죽자
 
아니
 
이러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째야 했을까요?
저도 터닝슛이라는 것을 해보고 싶었단 말입니다.
 
나는 기분파 무위주의자다 다소 고전적이라 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는다 분노도, 슬픔도 없으니 기쁨이라 할 만한 게 없지 나는 이것을 누워서 쓰고 있다 기분이 좋아하고 있다 이 연작의 목표는 A4 한 페이지 분량(윤명조330, 10포인트, 줄간격 180%)으로 카운트다운을 해나가는 것이다 졸면서 쓸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 대한 설명은 여기까지 하자 기분이 지겨워하니까
 
꽃이나 나무에 대해 써볼까 그러나 그것들에도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그것들은 재미가 없다 아름다움과 경건함만 있을 뿐 그들은 좀처럼 웃기려고 들지 않는다 그들은 오래된 공무원 같다
 
다시. . 그래. 당신의 기분을 의식 없이 좋게 하고 싶다 얍

2018년 8월 19일 일요일

미완성


우주의 성들을 완주하려던 계획을 취소한다. 아무래도 주제를 잘못 잡은 것 같아. 그러나 주제가 어떤 것이었든 이쯤 되어서는 그만뒀을 것 같기도 하다. 중도하차 전문. 끈기 없음. 사주를 보러 갔을 때, 사주쟁이는 내가 어떤 일을 하든 3개월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싫지는 않았지만 왠지 괘씸한 마음이 들어(누구에게?) 당시 하던 일을 3개월하고도 2주일 더 버티고 그만두었다. 그러나 또 이제와 생각해보면 사주쟁이는 딱 잘라 ‘3개월이라 말한 것도 아니었다. 아마 3개월 정도, 3개월 근처, 3개월 내외, 아무튼 딱 3개월은 아니고 약간의 오차는 있을 수 있음, 을 의미하던 게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내가 졌다. 룰을 잘못 이해했고, 그렇지만 그쪽이 똑바로 알려준 것도 아니니 내가 완전히 진 것은 아니다. 이 정도로 말하고 물러나겠다.
 
라고 말하고 보니 우주의 성들을 연재한 지 아홉 달이 지났다는 사실. 몰아서 올렸다가 드문드문 올렸으나 열 세 편이니 적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이게 일인가? 대가는 없었다. 일이라고 하기 힘들다. 그러면 다시 물러나야 하나? 그럴 수 없다. 글쓰기는 물러날 수 없는 장르다. 전사해야 하는 장르. 혹여나 생환에 생환을 거듭하여 천수를 누린다면 김지하나 김승옥처럼 되어버리고 마는 장르. 비장하게 말해 봤다. 그런데 이게 글쓰기인가?
 
우주의 성들. 처음에는 우주 곳곳에 있는 행성들에 자연적으로 지어지거나 누군가에 의해 지어진 성()들에 대해 쓰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많은 상상 에너지를 요하는 일이었고, 정말 일처럼 느껴졌으므로 처음부터 관뒀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거의 아무도 안 볼 글을 쓴다는 게 정말로 자유로운 글쓰기인가? 더 제약이 많은 것은 아닌가?
 
내가 속았다는 것은 아니다. 누구도 가타부타 말해준 적 없으니까. 나 혼자 느꼈고, 나 혼자 그리 여겼고, 나 혼자 판단했다. 나 혼자 썼다. 나에게는 연대감이 없다. 나는 나에게도 연대감을 느끼지 못한다. 불행한 자라고 불러주세요. , ‘우주의 성들은 거의 누워서 썼다. 다음부터는 앉아서 써보도록 노력하겠다. 어깨가 많이 상했다. 뭔가를 선물로 받을 수 있다면, 나는 어깨를 받겠다.
 
그럼 여기까지. 보다 지엽적인 주제를 들고 다시 찾아오겠다. 그동안 죽지 말고 계시기를.

2018년 8월 6일 월요일

네이티브

좋은 소식과 안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라는 말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사실 소식은 한 가지뿐이다. 방금 내가 이 방으로 들어오기 직전 골목에서 본 것에 대한 이야기다.

그렘린, 우리말로는 무엇으로 옮겨야 할까? 파물귀(破物鬼), 망깨비 정도의 대체어를 쓸 수 있겠다. 그렘린이라는 이름은 서양에서 최초 발견된 장소에 고블린이라는 명사를 합성해 만든 것이다.

즉 좋은 소식이란 박물학자인 내가 마침 머무르던 곳 인근에서 저 유명한 괴동물을 직접 발견했다는 것. 물론 나쁜 소식은 지금 이 소식을 전하는 도구를 비롯해 많은 기계들이 더이상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파물귀가 기계를 파괴하는 이유와 그들의 생태에는 전혀 관계가 없다. 쉽게 말해 그들이 기계를 먹고 산다는 세간의 믿음은 오해라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개인적으로 파물귀를 좋아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오로지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서, 그들은 기계의 고장을 유발한다.

러다이트 운동의 발화점을 누구로 알고 있는가? 질문을 조금 바꿔야겠다. 러다이트 운동을 시작한 것이 인간일까?

고장난 기계가 그들에게 어떤 기쁨을 주는지는 알 수 없다. 적어도 인간이 불편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 아님은 확실하다. 이런 생각은 너무도 인간중심적이어서 낯이 뜨거워질 정도다. 일반적으로 파물귀들은 인간에게 우호적이다. 고장낼 기계를 만들어주는 존재를 미워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다만 기계고장을 직접 막으려 할 경우에는 적대적으로 돌변할 수도 있다. 매우 위험한 상황이므로 최대한 피하기를 권하고 싶다. 비행기 엔진을 물어뜯을 수 있는 턱힘을 지닌 존재와 대치하는 것은 조금도 용감한 행동이 아니다.

추정컨대 파물귀들은 기계의 멈춤 자체에서 크나큰 쾌감을 느끼는 듯하다. 크고 구식일수록 좋아하며, 무릇 ‘스마트’라는 수식어를 지닌 현대의 기계들을 미워한다. 인간 입장에서는 큰 차이가 없는 듯 느껴질 수 있다. 너무 좋아서 고장내기도 하고 너무 싫어서 망가뜨리기도 한다. 예방 삼아 개인용 기기 주변에 초콜릿이나 사탕을 한두 개 놓아두면 좋다. 안타깝지만 윤전기나 사다리차의 고장은 그따위로는 막을 수 없다.

현재 내가 체류중인 곳은 대학 캠퍼스를 중심으로 상권이 조성된 소도시로 파물귀를 흔히 볼 수 있을 만한 환경이 아닌데, 현지인의 안내에 따르면 인근에 공장 지대가 있다는 모양이다.

2018년 6월 25일 월요일

콩 이야기


콩은 시간을 두고 충분히 볶아야 했다. 먼저 살짝 삶은 다음 볶기 시작하면 시간이 절약되지만 그러면 맛이 덜하지. 스승의 가르침이었다. 날콩을 충분히 볶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덜 볶아진 콩을 식탁에 차려낸 것은, 불앞에 오래 서있는 것이 힘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스승의 약한 턱 때문이었다. 식탁에 앉아 식사를 시작한 스승의 입안에서 덜 익은 콩이 우드득거렸다. 스승은 나를 한 번 쳐다보고선 다시 시선을 접시로 돌리고 먹기를 계속했다. 하지만 접시를 다 비우지는 못한 채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승이 콩을 왜 이렇게 덜 익혔냐고 물어보면 대답해 줄 변명을 콩이 거의 날 것일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지만 질문 없는 대답은 존재할 수 없었고 찝찝한 마음으로 식탁을 치웠다. 어쨌든 치우는 것도 내 일이었다.
밖으로 나간 스승이 정원사에게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고의적으로 덜 익힌 콩을 내놓았다는 것인데, 순박한 정원사는 그 말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어린애가 미숙해서 잘못 익힌 걸 가지고 그러냐며 스승을 타박했다. 스승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도 이게 먹힐 만한 투덜거림인지 확신이 없었을 스승을 생각하자 측은함과 동지애가 밀려왔지만 금세 사라졌다. 하지만 동지애 정도는 남겨두어도 괜찮을 것이다. 동료와의 사이가 꼭 좋을 필요는 없지. 서로를 완벽에 가깝게 이해한다는 점에서 서로 이외에 적합한 동료를 찾기 어려울 우리였다. 변명을 생각해내야 했던 나의 마음도 스승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겠지. 그래도 제대로 식사를 마치지 못한 것, 혹은 질문을 기다리고 있던 나에 대한 섭섭함 때문에 밖으로 나가 투덜거렸을 것이다. 너무 멀리 나가지는 않고 내 귀에는 들릴 정도의 거리에서 이해받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우리가 같이 사랑하는 정원사에게.
나이 든 사람의 턱이 덜 익힌 콩을 얼마나 더 견뎌낼 수 있을지 아무런 정보도 확신도 없었다. 가끔은 잘 익힌 콩을 내놓아야 그동안의 실수를 완성할 수 있었는데 그 주기가 너무 빨리 돌아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접시를 말끔히 비워내는 스승의 모습을 상상하면 끔찍했다. 사실 모든 행동과 말이 꼴보기 싫었지만 그래도 콩을 볶고 식탁을 치워야 했다. 수행자의 감정을 돌보지 않는 의무 때문에 가끔 짜증을 내며 울고 싶었지만 그조차도 해서는 안된다는 걸 알았기에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조용히 욕을 하거나 얼굴을 찌푸릴 뿐이었다. 나는 순박한 정원사를 두고 떠날 수 없었고 그건 스승도 그랬다. 우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정원사를 사랑하는지도 몰랐다.

2018년 6월 3일 일요일

초신성

이런 질문으로 시작해본다. 왜 창작은 우울감과 같은 종이배를 타고 있을까?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이전에 과연 이러한 질문이 적합한 것인지 논증할 필요가 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으니 간단한 사례에서 출발해보자.
 
콘템퍼러리엠비언트공연미술극시를 쓰기로 마음먹은 P는 우선 거장들의 작품을 베끼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잘 진행되자 용기를 얻어 이름이 덜 알려진 사람들의 작품도 베끼기 시작했다. 어차피 동일 장르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창시자 P는 걱정 없이 창작 활동에 신나게 매진했다. 누가 뭐라고 할 때까지 말이다.
 
그러나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P의 작품은 계속해서 조회수가 0이었으므로
 
왜 나 자신의 조회수는 카운트되지 않는가? P는 그런 증오 섞인 생각을 하며, 가족의 아이디를 이용해 조회수를 십만까지 늘렸다. 그러나 여전히 P에게는 아무런 피드백이 없었다.
 
P는 과연 우울했다. 이렇게 살다가는 사례로 삶을 끝마치게 될 것이다. P가 자신의 작법을 바꾸었다면, 다른 미래가 펼쳐졌을 수도 있다. 혹은 제목을 더 잘 지었더라면. 인디자인에 약간의 조예가 있어 어떻게든 클릭을 유도할 수만 있었다면. 그렇지만 P는 곤조 있는 예술가였다. 그는 우회로를 택하지 않았고, 우직하게 자신의 장르를 밀어붙였다. 그러자 누가 뭐라고 했다. P에게, 누가 뭐라뭐라 뭐라고 했고 뭐라고 한 사람은 자신이 한 말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것이 P가 창시자 P로 남게 되는 콘템퍼러리엠비언트공연미술극시사의 서막이었다.
 
우울감은 장르의 탄생을 수반한다. 그러나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우울의 장르가 예술의 장르를 결정한다고. 물론 이렇게 말하면 기분이 안 좋다. 우울감은 당하는 것이지 먼저 다가설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우울에게는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한다. 앞서 언급한 P의 어마어마한 예술활동에서 P가 기여한 바는 미미하다. 그는 우울감에게 겨우 몸을 빌려줬을 뿐이다.
 
이것이 예술가들의 말로가 비참한 이유다. 처음에 산뜻했던 우울감은 이용할수록 괴물같이 커져 우울증으로 진화한다. 그렇기에 겁이 많은 나는 이제 이 사실을 말해야겠다. 이것은 창작이 아니며 예술과는 무관한 중얼거림이다.

[10호 서신]


*6월
 -여름철 음식물 위생 관리, 소화기 건강에 유의.

*창고마당 제거됨
 -해당 서비스 업체의 운영 종료로 인함.

*사이드 메뉴 추가
 -완결되지 않을 예정인 연재태그 둘(경비서신, 곡물창고에서)을 사이드 메뉴에 추가.
 -인별입하표목 페이지를 통해 작성자별 연재물 확인 가능. 관리자가 수동 관리.

*총페이지뷰 카운터 추가
 -대단한 의미는 없지만.

*필자 자격 유지 다음 마감
 -8월 7일 입추.

이상.

2018년 6월 2일 토요일

뜻밖의 마술

설명을 위해 꿈을 말해야 한다. 꿈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오늘 자각몽이 있었다. 학교가 무너지는 꿈을 꿨는데, 학교가 사실은 십수 년전에 무너졌다는 것을 깨닫고 꿈인지 생시인지 꿈속에서 생각해 보니 진짜 꿈이었던 것이다. 깨닫고 나니 학교 정도는 고칠 수도 있을 것 같아 마음먹으니 멀쩡해졌다. 자각몽에는 조건과 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들었는데 연습한 적도 없고 취미 삼지도 않았으니 어쩐 일인지를 모르겠다. 여튼 재건된 학교를 보며,

어디까지 가능한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꿈 내용을 통제할 수 있다면 읽지도 않은 책의 한 페이지를 꿈에서 읽는 일은 가능하냔 거다. 시간과 공간을 손볼 수 있을까? 지금부터 잠에서 깰 때까지의 시간을 무한히 늘린다거나 하는 일.

그러나 읽지도 않은 책을 읽을 수는 없었고 무한한 시간을 손에 넣을 수도 없었다. 생각을 바꿨다. 나는 신 같은 것을 그려내려고 애썼다. 온갖 우상과 세계의 비밀, 오파츠와 전도서 성경 삽화 따위를 떠올렸다. 교황님, 몰몬, 사이키델릭.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는 신이 존재할 터이고 내게도 신의 속성이 깃들어 있을 터이다. 꿈속 세계에서는 내 안에 있는 것만을 불러들일 수 있다. 있다면 소환할 수 있을 터. 순간, 하나의 점을 중심으로 본 적 없는 불꽃들이 퍼졌다. 전신을 드러낸 것은 외곽선 없는 형상이었다.

나는 그 형상을 통제할 수 없었다. 꿈 밖에 있기 때문이라고 그가 말했다. 그는 자신이 인간과 다르다고, 이것은 기원 후 파놓은 함정이라고 말했다. 내가 막연히 신 같은 것을 상상하며 자각몽 속에서 부르려 했기 때문에 그를 바탕으로, 꿈은 주파수가 채널을 찾듯 매개가 되었으며, 그래서 이것은 꿈이 아니라 문명에 가깝고, 사건의 지평선은 늘어났으며 너로서는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다고, 이제 우리가 너희 행성으로 간다고,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말했다.

나는 벌벌 떨며 깨어났고, 자각몽에 대해 알아보다가 내가 겪은 것이 자각몽이 아니라는 것을, 그저 내가 자각몽을 꾸는 것 같은 꿈을 꾸었을 뿐임을 알게 되었다. 자각몽을 꾸는 꿈에서 그나마의 내 학교를 고친 것. 그 정도가 확신을 담아 말할 수 있는 뜻밖의 마술이었다.

2018년 6월 1일 금요일

바리에테는?

바리에테는 묘기와 춤, 음악과 연기가 혼합된 총체적 흥행물을 말하는 것인데, 폴 발레리가 그의 평론집 제목으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글문학의 다양한 형식을 혼합해 SF, 환상문학, 동화, 신화 등을 즉흥적으로 씁니다. 게시글은 필자의 판단에 따라 언제든지 수정될 수 있습니다.

2018년 5월 14일 월요일

침묵을 위한 시간


과거의 일기 중, 남아있는 인상에 비해 정확히 떠오르지 않는 문장이 있었다. 두 달 전에 공연을 하고 돌아와 쓴 일기의 일부였고, 무대 위에서의 어떤 순간을 ‘기쁨도 슬픔도 아닌 제로가 최대치로 확장된 감각’이라고 적어두었다. 하지만 기쁨이나 슬픔은 감정에 속하며 감각과는 다르지 않나. ‘기쁨도 슬픔도’, ‘확장된 감각’ 둘 중 하나는 나오는 대로 적다 보니 실수한 것이 아닐까 싶었는데, 실수했다는 생각은 크게 들지 않았다.
다시 잘 생각해보자. 당시에 약간의 기쁨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아니, 기쁨은 나중에 왔던 것 같다. 제로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쁨과 슬픔을 대조되는 단어로 적었다는 건 감각에 감정이 딸려온다는 것을, 혹은 반대의 경우도 의심 없이 전제했다는 말이다. 이 경우엔 어떠한 감각 후에 그로 인한 감정이 왔다고 생각하며 적은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건 어떤 감각이었나.
소리를 담은 공기가 머리의 중앙으로부터 외부를 향해 먼지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그것은 감각에서도 감정에서도 평행에서도 뷸균형에서도 제로에 가까웠다. 형체 없는 것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그 중 한 가닥이 목소리가 되어 흘러나왔고, 그것은 또한 전부가 빠져나가는 소리와도 동일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소리. 나는 일전의 일기에 이렇게 적은 적이 있다.
‘나만이 진입할 수 있는 가청의 영역에서 그 안에서만 허용되는 기준으로 노래를 고칠 때의 외로움이 있다 그걸 사랑함’
이 문장에 사용된 모든 단어들의 오차율은 제로에 가깝다. 당시 무대에서의 감각은 이 문장과 가장 가깝게 닿아 있다고 느낀다. 그걸 감정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까? 불안함에 대해 생각해보자. 정적의 정중앙에서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고개를 숙일 때, 온 몸은 물론이고 피부가 공기를 긁어내는 감각 또한 최고치에 오른다. 쌓인 감각들의 무게 때문에 꼼짝할 수 없겠다는 확신이 들 때, 온 힘을 다해서 손가락을 움직인다. 숨을 들이쉰다. 이 과정에서 감각을 일으켜 낸 것, 그리고 감각의 이후 내내 머물러 있는 것은 불안함이다. 불안함이 있었다. 모든 걸 딛고 제로에 닿았을 때, 그 순간에 닿았을 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시공에서 기쁨과 슬픔과 불안함과, 온 몸의 감각, 고개를 움직일 때 밀려오던 공기의 저항까지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소리가 있었다.
여전히 제로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제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제로가 아닌 모든 세상을 끌고 와야만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제로를 위해서 나머지 모든 것들이 왔고, 여기에 있었고, 제로를 위해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왔다. 그 순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이 세상의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걸 바라는 것도 같다. 그러나 동시에, 단 하나의 소리는 그 순간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이기도 했다.

*제목 인용 : 침묵을 위한 시간 」 패트릭 리 퍼머

2018년 5월 1일 화요일

행진 구경

이사야는 아침부터 종일 지붕 위에 올라가 있다. 바람도 불고 날도 흐린데 위에서 무엇을 하는지 모를 일이다. 관리인은 오늘 나오지 않았다. 무슨 날인가? 귀를 기울여 보았다.

2018년 4월 26일 목요일

헛간 다이닝

과거에서 온 악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 할머니가 처음으로 초콜릿을 먹은 게 몇살 때 일이게?

내가 검지 손가락을 하나 들어 보이자 악마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나도 고개를 저었지요. 나는 한살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질문을 하려던 거였으니까요. 악마는 질문 하나를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물었습니다.

할머니가 벌써 태어났나요?

악마는 짜증을 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별로인가요?  먹을 것과 관계된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는데요. 거기다 이 얘기엔 악마도 나오고 시간여행도 나오잖아요. 부족한 게 없을 텐데.

일단 들어오세요. 어두워서 미안해요. 나한테 불이 없다는 뜻이 아니니까 그건 다시 주머니에 넣어두세요. 여기서 불이 났었답니다. 창고가 불을 무서워하게 되었을까봐 무서워요. 물론 불을 피우는 일을 끝까지 미룰 수는 없겠지요, 근사한 식사를 하려면 불을 쓰는 편이 아무래도 좋으니까. 그래도 당장은 아니에요. 지금은 괜찮은 식탁보도 없고.

여기에 여섯 명쯤 앉히려고 해요. 이 끝이 내 자리가 될 거예요. 집주인은, 엄밀히 말해서 창고 주인은 아니지만, 식사를 대접하는 동안은 그렇다 치고, 어쨌든 주인은 북쪽에 앉는 거라고... 반대인가?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미나리 한 단을 모아 쥔 채로 기도를... 딱히 종교가 있는 건 아니지만. 최근에 근성의 근 자가 미나리를 뜻하는 글자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진짜일까요?

테이블을 완전히 덮을 만큼 큰 식탁보는 필요 없어요. 가운데에 포인트를 줄 수 있는 정도면 좋겠어요. 주요리 바로 아래에 깔게. 하다못해 쇠여물을 쒀서 올려놓더라도 그런 식으로 식탁보를 깔면 뭔가 있어보인다 이거예요. 기왕이면 체크무늬. 더 욕심을 부린다면 빨간색이 좋겠지요.

왜냐하면 빨간색 체크무늬는 내가 한 번도 안 먹어봤지만 왠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 맛의 꼴을 하고 있으니까.  도로시 아줌마가 빨간 체크무늬 앞치마를 입고 만든 크림 스튜. 테오도르 씨가  빨간 체크무늬 오븐장갑을 끼고 사과파이를 꺼내는 광경. 미스 손이 들고 다니는 마호병을 감싼 빨간 체크무늬 스카프.

그건 여기가 식사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가려줄 예쁜 눈속임이기도 한 거예요. 손바닥만한 천조각 가지고 이 넓은 공간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구요. 일전에 여기서 일한다는 사람이 두유에 시리얼을 말아먹고 있는 광경을 본 적이 있어요. 그건... 말하자면... 과거에서 온 악마가 나한테 카카오톡을 보내왔을 때 느낄 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이었어요. 현대적이고 울적하고 기계적인 식사. 물론 거기에 식탁보 같은 것은 없었고. 시리얼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콘플레이크에 성욕을 감퇴시키는 성분이 들어있었다는 얘기를 아세요? 그냥 생각나서 한 말인데요. 지금도 들어 있는지를 내가 어떻게 알아요, 들어 있었다고 들었다고요.

짜증내지 마세요. 과거에서 온 악마처럼 보여요.

그건 그렇고 옷이 예쁘네요.

2018년 4월 25일 수요일

루돌프 슈타이너

한참 후에 영화관을 나온 아이는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2차원으로 보이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세상이 실제로 평면인 것은 아니었기에 사람들의 움직이는 몸이 자꾸 면으로부터 입체로 눈 안에 쏟아져 들어왔다. 그 무게감에 멀미가 난 아이는 횡단보도에 멈춰 설 때마다 눈을 감았다가 주위 인기척의 움직임이 느껴지면 눈을 떴다. 하지만 움직이는 것들만 밀려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것 또한 눈알에 와 부딪히고 있었으며, 과민해진 눈 때문에 그들이 입체를 형성하고 있는 모습을 움직임으로 착각했다는 걸 깨닫고 잠시 앉기로 결정했다. 결정을 내린 아이는 언제 멈춰야 할지 몰라 계속 걸었다. 세상이 움직임을 멈출 때까지 계속해서 눈을 감았다 떴다. 다시 감았다가 뜨자, 아이의 머릿속에 남아 있던 괴물의 얼굴 모양으로 튀어나온 벽처럼 느껴지던 울렁임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고, 멈춰 설 이유가 없어진 아이는 계속해서 걸었다. 맞은편에서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2018년 4월 18일 수요일

기억해야 할 사항들

1. 필명은 ‘조’로 한다.

2. 연습과 훈련을 위한 글을 올린다.

3. 새 글은 적당한 시기를 가늠하여 올린다. 다만 한 달에 두 번 이하의 빈도로 떨어지지 않게 주의한다.

4. 파일의 저장 위치로는 <바탕화면-기타자료(본명의 이니셜)-delrow-sec>의 경로로 들어갈 수 있다. 같은 폴더에 들어 있는 카드 납부내역도 자주 확인할 것.

5. 띄어쓰기 검사를 할 것.

2018년 4월 13일 금요일

동백

뒷마당에는 딱 사람 키만 한 동백나무가 한 그루 있다. 관리인이 거기에 대고 뭐라고 말하는 걸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다. 이상하게도 잊기 어려운 장면이다. 한 발을 앞으로 내밀고 선 이사야가 그 동백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모습 역시,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다. 관리인은 그냥 뭔가를 먹느라 입을 오물거리고 있던 것이고 이사야는 앞에 나는 나방을 보고 있던 것일 수 있다. 우연히 거기에 동백이 있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동백은 그런 정도의 것이 아니다. 두 이미지에서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동백이다. 동백이 듣고 있었으며, 동백이 보고 있었다. 동백은 지금도 사람이나 짐승에게 곧 달려들어 죽일 것처럼 그곳에 서 있다. 저 동백이 거의 그에 준하는 생각을 하고 있음을 다들 안다. 죽여주는 생각. 모두가 사랑하는 동백의 잎사귀들 안쪽 어두운 곳에 그런 생각이 고여 있다는 것을, 동백이 엄청나게 살아 있다는 것을, 동백의 옆에서 그 잎사귀들을 만져 보며 다들 안다. 동백이 눈 내리는 새벽에 창고 밖으로 걸어나가는 꿈을 꾼 적이 있다. 아니면 창고가 동백을 버려둔 채 기어간 것일 수도 있고. 지금은 봄이다.

2018년 4월 2일 월요일

가죽 포대

여기에 가죽 포대가 있다.
가죽 포대는 가죽 부대라고도 부를 수 있다. 어떻게 부를지는 당신 마음이다.
가죽 포대를 가죽 푸대라고도 부를 수 있지만 그렇게 부르는 것은 곡물창고, 혹은 발화자가 지리적인 문제에 엮이게 되는 일이니 주의를 요한다. (당신은 죽을 수도 있다.)
가죽의 재질이 어떠한지는 당신 마음이다.
가죽 포대에 뭔가를 담을 수 있다. 그것은 비어 있기도 하고 가득 차 있기도 하다. 가죽 포대에 뭘 담을지는 당신 마음이다.

산역꾼

터로 간다. 아직 세상은 어둡다. 우리들은 지관(地官)을 따라 희푸른 산으로 들어간다.
삽을 들기 전에 산신께 공물을 바친다. 날이 밝으면 손이 올 것이니 그 손을 잘 보살펴달라고. 준비해온 술, 과일, 포 등을 차리고서 우리는 절을 한다. 이를 핑계로 술 한 잔 걸친다.
술잔을 내려놓은 뒤엔 명태를 묶은 삽을 광중(壙中)이 될 자리에 꽂아두고 그 주변에 술을 뿌린다. 광중의 네 귀퉁이에 흙을 한 삽씩 떠내고 공물을 올린 뒤 다시 절한다. 이를 핑계로 술 한 잔 걸친다.
술잔을 내려놓은 뒤엔 주변의 나무들을 벤다. 특히 광중 부근의 나무들은 뿌리까지 캐낸다. 그 뿌리가 자라 광중으로 뻗도록 하지 않기 위함이다. 너무 고되기 때문에 땀을 식히기 위해 술 한 잔 걸친다.
술잔을 내려놓은 뒤엔 삽 댈 부분에 술을 붓고, 지관의 지휘에 따라 삽질을 시작한다. ‘천광(穿壙) 낸다’고 한다. 지관은 패철을 살피며 폭과 길이와 깊이를 알려준다. 역시나 너무 고되기 때문에 이때 삽차가 동원되는 일도 있으나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땅을 판다. 구덩이를 판 뒤에는 그 구덩이가 적당하게 깊은지 보며 한숨을 돌린다. 휴식하며 술 한 잔 걸친다.
술잔을 내려놓은 뒤엔 당신이 오기를 기다린다. 당신은 정해진 시간에 오기로 되어 있다. 당신은 세신(洗身)을 하고, 정갈하게 차려입고서 여기로 올 것이다. 후대의 손에 들린 채, 편안하게.
아직 세상은 어둡다. 당신은 당신의 초상과 함께 마침내 여기에 다다를 것이다. 당신은 노래를 들으며 올 것이고 노래를 들으며 떠날 것이다. 당신의 머리는 산봉우리를 향하고 당신의 발은 산기슭을 향한다. 지관은 당신이 좋은지 살필 것이다. 당신은 좋을 것이다.
당신은 흙을 덮을 것이다. 우리는 남은 술을 마저 걸칠 것이다. 어미 아비도 못 알아볼 만큼 취하고 오늘을 잊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산에서 하는 일[山役]이다.

2018년 2월 21일 수요일

오함마

마당에서 창고의 왼편으로 지나가면서 볼 때, 그 오함마는 곧추서 있기도 하고 창고 벽에 기대어져 있기도 하다. 어쩔 때는 오른편으로 지나가면서 본다. 지나가며 왜 저기에 있지? 생각해도 그 순간뿐이다. 왼편에서도 오른편에서도 보지 못하면 뒷마당에 있고, 뒷마당에서도 못 보면 창고 안에서, 안에서 못 보면 앞마당에서 본다. 못 본다고 하는 것은 사실 맞지 않는 말이다. 쓸 일이 없으니 애써 찾을 필요도 없는데 자꾸만 불쑥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진짜로 못 보는 것은 누군가 그걸 쓰는 모습이다. 누가 그것을 쓰는가? 관리인에게 물으면 애초에 이 창고에서 오함마가 무슨 쓸데가 있는가고 답한다. 여름날 그늘에 누운 오함마 대가리 위에 쥐잡이가 앉아 있는 것은 본 적이 있다. 그걸 쓰는 이라고는 쥐잡이뿐이라는 얘기다. 쥐잡이가 이리저리 물고 다닐 리는 없다. 누구인가? 오함마가 스스로 창고 담벼락 안을 배회하고 있다고밖에는 할 수 없다. 저 오함마가 누구냐고 물어야 맞는지도 모른다.

2018년 2월 16일 금요일

불태우기

램프가 꺼질 무렵의 일이다.

미리 추위가 몰려와 있었다. 잠들 사람은 잠들었고 죽고 싶은 사람은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러니까 우리는 남은 사람들이었다. 할 이야기가 남았나?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예브게니와 조라는 낱말 맞추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휘는 앞주머니에서 삐져나온 실밥을 잡아 뽑고 있었다. 죽 뽑아도 약간의 실밥이 남았기에 휘는 그런 수법으로 자신의 겉옷을 해체하고 있었다. 오그오헤는 서성이고 있었다. 관심을 끌기 위함은 아닌 듯했다. 어느 쪽도 재밌어 보이지는 않았다.

램프가 몇 번 깜빡이자 남은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램프 곁으로 모여들었다. 꺼지려나? 오그오헤가 말했다. 기름이 없는 것 같은데. 오그오헤가 한 번 더 말했다. 기름이야 만들면 되잖아. 누군가 말했다. 누구로?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그런데 왜 램프를 계속 켜놓아야 하지? 내가 말했지만 나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램프는 뜨거웠다. 오그오헤는 뜨거운 것을 집어 포대를 향해 던졌다. 불이 붙고 있는 건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휘의 주먹 속에 있을 실밥을 떠올렸다. 조라가 포대 쪽으로 다가가 크게 들이마신 숨을 불었다. 예브게니가 조라 곁에 있었다. 타라, 타라, 하면서. 램프에서 시작된 불은 구호와 함께 조금씩 번져가고 있었다. 잠든 사람은 화창한 꿈속이었고 우리는 밀알 타는 냄새를 마시며 빈 포대를 펄럭였다. 그럴 기운이 있었다.

2018년 2월 6일 화요일

쥐잡이 이사야

이사야가 언제부터 창고에 들어와 살았는지, 누가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 관리인조차 모른다. 당연한 이야기.

한쪽 귀가 좀 찢어진 이 회색 태비는 예쁘다고 하기엔 확실히 어려운 얼굴을 하고 있다. 어쩌다 정면으로 마주친다면 그 인상의 엉뚱한 험악함에 헛웃음이 터질 것이다. 목소리도 사람으로 치자면 걸걸한 편. 몸집이 크지는 않아도 등이 제법 단단한 것이, 나가면 꽤 강자 축에 들지 않겠나 싶다. 창고 입구에서 기웃거리는 떠돌이 개들을 깔아 보며 털을 세우는 모습은 심심찮게 본다.

나이도 출신도 베일에 싸인 채 이사야는 쥐잡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다. 관리인이 이사야를 볼 때마다 쥐잡아- 하고 부르기 때문이다. 창고 안을 후다닥 뛰어다니길래 뭔가 해서 보면 병뚜껑을 쫓고 있더라는 얘기를 매양 꺼내며, 이 창고에 쥐잡이 같은 건 필요가 없다면서도, 결국 쥐잡이의 밥을 챙기는 이는 관리인이다. 관리실 한구석에 놓인 불룩한 마대들 중 매직으로 크게 ‘쥐’라고 쓰인 것이 이사야의 밥 포대다. 아무리 봐도 고양이용 사료 같지 않지만 당사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요즘 같은 한겨울은 관리실 난로 곁을 떠나지 않는 이사야를 마음껏 만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럴 때 관리인은 ‘고양이 대해부’라는 제목의, 어디서 주워 온 듯한(곧 어디서도 살 수 없을 듯한) 해진 책 한 권을 꺼내준다. 그러면서 이사야의 꼬리는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탐스럽다는 말을 더하고, 만약 계속 자라는 것이라면 잘라서 팔아도 되겠다는 소리를 꼭 한다. 처음 들었을 때는 그게 녹용이랑은 달라서... 하고 대답했다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했다. 관리인은 이사야 말고는 무엇에 대해서도 농담을 하지 않는다.

이사야는 ‘요옹’하고 운다.

이 계절 이사야의 취미는 눈 구경이다. 이어서 올 짧은 봄 동안엔 밖으로 종일 돌아다니다 들어올 테고, 여름에는 마당 그늘에 시체처럼 널브러져 들어온 사람을 놀래킬 것이다. 장마가 끝나야만 창고 들보에서 내려오며, 가을볕을 따라 다시 담으로 지붕으로 올라갈 것이다. 조건만 맞는다면 영원히라도 살 것 같다. 이사야는 평범한 도메스틱 캣이다.

2018년 2월 4일 일요일

곡물창고에서는

‘곡물창고에서’는 모든 필자가 함께 쓰는 공용 태그로 기획되었습니다. 따로 마감은 없으며, 공동입하동에 위치합니다. 이 태그에는 세 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1) 곡물창고를 배경으로 할 것.
2) 한 필자가 일주일에 한 편까지만 쓸 수 있음.
3) 한 필자가 연속으로 2회 이상 쓸 수 없음.

일단은 일종의 이야기 게임으로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형식은 자유입니다. 곡물창고에 있는 사물에 대해 써도 좋고, 곡물창고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써도 좋습니다. 우리는 대체로는 가상의 뭔가를 다루겠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곡물창고의 지붕에 대해서 말할 수도 있고, 곡물창고의 지붕 아래서 하는 생각을 쓸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든 좋습니다. 그것은 일기, 일지일 수도, 감상일 수도 사전일 수도, 회고일 수도 편지일 수도 있습니다. 소설이거나 시, 희곡일 수도 있습니다. 연속성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습니다. 분량도 좋을 대로입니다. 다만 곡물창고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됩니다. 다른 필자가 쓴 곡물창고를 어느 선까지 인정하고 그와 관계할 것이냐 또한 자유입니다. 그 창고가 그 창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 모든 곡물창고는 하나이고 모두 ‘공식적’입니다. 이것을 게임으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좋습니다. 이것은 훈련이나 시험일 수도 있습니다. 이 태그를 통해 곡물창고의 필자들은 (원한다면) 곡물창고라는 공간을 직접 구성하는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곡물창고에서. 그것이 전부입니다.

육망성

이리 들어와, 말하고 너는 선을 폴짝 뛰어 넘었다. 두 발이 동시에 넘어와야 해. 그러나 선을 넘은 너의 표정은 우리가 손을 잡고 있을 때와 달라 보였다. 어서. 너의 얼굴 속 모든 도형이 갈라지고 있다. 환희와 광기가 서로를 침범하며 번지고 있는 것일까? 이윽고 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네가 별장, 이라 부른 곳으로 너는 가버린 듯했다.
 
그러면 나는 너에 대한 생각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 네가 없는 자리에서 나는 너에 대한 생각을 시도한다. 우리는 꼭 붙어 다녔으므로, 이 시도는 나에게 낯설다. 그러나 언젠가 꼭 해야 할 작업이었다. 나는 너에 대한 생각을 재시도한다. 그것은 몇 가지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너의 모습이 브로마이드처럼 펼쳐진다. 나는 생각의 크기를 좁히려 노력한다. 나는 너를 클로즈업한다. 너의 눈주름과 입가를 본다. 재생시켜 보기도 한다. 그것들은 미세하게 움직이고 미세하게 깊어지다가 한순간에 탄성을 잃는다. 일순 다른 곳으로 가버린 것일까? 그런 것까지는 나의 생각만으로 알 수 없다. 네가 필요해. 우리는 언제 만났지? 언제 서로를 알아봤지? 그런데 왜?
 
선 안쪽으로 발 하나를 넣는다. 그러자 선 안의 나와 선 밖의 내가 있다. 저쪽의 나는 이쪽의 나를 끌어당기고 있다. 나는 두 번째 발을 넣고 세 번째 발을 넣는다. 네 번째 발을 넣는다. 이쪽의 발은 아무리 넣어도 하나가 남는다. 이것은 너에 대한 생각이 결론에 이르는 것을 명백히 방해한다. 발은 계속해서 하나씩 넘어가고 나는잠식당하고 있었다. 네가 예상했던 바대로.
 
너는 내가 좋은 재료가 될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것을 성스러운 사랑의 비유로 이해했다. 그럴 리 없잖아. 저쪽에 떠 있는 나의 입이 말한다. 두 번째 입이 말하고 세 번째 입이 말한다. 그럴 리 없잖아. 그럴 리 없다고 나는 생각하고야 만다. 입들이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말씀하고 있다. 가장 선명한 기억 속에서 너는 별의 커비를 노래하고 있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지? 그러나 나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 흔들리면서 너의 잔영을 더듬고 있다. 어딘가의 네가 지켜보고 있다는 확신과 함께 그랬다.

2018년 2월 3일 토요일

[9호 서신]


*2월
 -한겨울 낙상 및 동파 유의.
 -설 연휴간 배앓이 조심.

*창고 마당 설치됨
 -http://gokmool.blogspot.kr로 접속하면 우하단에 아이콘 등장.
 -https://gokmool.blogspot.kr로 접속하면 입장 불가.
 -누구나 들어가 아무 이야기나 가능.
 -일단 챗박스 계정을 만들면 정보(이메일 및 홈페이지) 변경이 불가. 변경을 원하면 계정 삭제 후 다시 만들기.
 -필자에게는 moderator 권한을 부여.
 -관리인 계정/비번은 기존과 동일.

*알림판 운영의 추가사항
 -팔로잉 시작. 알림판 로그인 권한을 지닌 필자라면 누구나 자신의 기준에 따라 타 계정 팔로잉 가능. 단, 인격 계정은 제외를 권함.

*권한 해제 조건
 -필자 권한 해제 조건을 1개월에 게시글 1개에서 계절별 1개로 완화.
 -계절은 24절기를 기준으로 함.
 -18년도; 입춘 2/4, 입하 5/5, 입추 8/7, 입동 11/7

*필진 모집
 - 추천제로 항시 진행.

이상.

2018년 2월 2일 금요일

마지막 더미 태우는 날

-
선생의 자리를 우상이 대체하는 중. 그걸 다르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권위의 자리를 동의가 대체하고, 탐색의 자리를 생존이 대체하고, 고난의 자리를 적이 대체하는 중. 거꾸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적 고난에 대해, 드디어 우리는 그것과 양립할 수가 없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이제 한번 해볼 만하다고 느끼는 중. 누가 죽더라도, 내가 죽더라도. 이런 상태를 두고 억지로 좋은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의의 색채를 더하면서. 거의... 그렇게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다고도 생각한다. 어쩌면 이 모든 일들이 반쯤은, 우리 앞에 음울한 미래만 있다는 느낌에 기대어 있지 않은가? (그리고 나머지 반은 진실로 음울한 미래.) 느낌은 중요하다. 나는 전망이라는 느낌이 복원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망이 주는 오래된 느낌이, 편안한 느낌이. 우리에게는 지금 만사를 거는 도박이 아니라 전망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떻게?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연대다. 전망을 위해서는 연대가 필요한가? 생각은 그렇게 닿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연대는 고통스러운 일이고 고통이라면 사실상 한계다. 연대는 필요악이다. 내게 시급한 것은 문예다. 취미다. 연대를 그나마 견딜 만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마약 같은 것들. 우리에게는, 적어도 내게는 쿠키의 전망이 필요하다. 나는 필요한 것을 믿는다. 많은 이가 함께 믿으면 현실이 된다고들 한다. 엄청난 광량 아래 우거진 잎사귀들을 나는 손에 잡힐 듯이 믿고 있다. 하느님을 믿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 잎사귀들은 많은 이들의 손처럼 보인다. 나는 내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단 듯 만 듯 텁텁한 맛. 그러나 냄새로 그것이 그것임을 안다. 회당에 들어서면 회당의 냄새가 난다. 너무나 추운 날들도 반드시 끝이 난다.

-

나는 원한다. 적절한 작별을. 전망의 조건은 만남이 아니라 작별에 있다. 우리는 작별을 위해서 모이는 것일 수도 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먼저 손을 흔드는 편을 택하는 수가 있다. 작별이 주는 엄청난 슬픔을 우리의 바깥 방향으로 돌려놓기 위해서, 그나마 견딜 만하게. 왜 견디려는지? 저편으로 간 이들과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째선지 번번이 그런 약속을 한다. 만나지도 못할 거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아닐 수도 있다. 이것이 쪽지 태우기의 마지막이다.

*
고양이 소리 흉내를 그치고, 어째서 이사야가 그런 자세로 앉아 꼼짝도 않고 있는지 궁금히 여기며 다가갔다. 이사야는 돌아보지 않았다. 손을 뻗쳤다. 이사야는 깜짝 놀랄 만큼 차가웠다. 이사야는 딱딱했다. 나는 이사야를 떼어내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이사야는 얼음 덩어리의 소리를 냈다. 이사야가 더 이상 살아 있지 않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
불을 쬐고 있다가 이사야가 뭔지 모를 작은 짐승을 따라 화살처럼 밖으로 튀어 나가는 것을 본다. 나는 다시 불을 본다. 그가 이제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따라서 나온다. 저것이 쥐잡의 마지막 모습이다... 엄청난 눈이 오고 있다. 불은 타오른다. 이사야는 그날 저녁 돌아온다. 지금은 유령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내 손에 안겨 불을 보고 있다. 나의 꿈도 녹는 중.

2018년 1월 31일 수요일

격몽

그것을 [깨임]이라고 부른다. 깸이 아니라 깨임이다. 죽비질이나 침례와 같은. 영성 또는 신성이 배제된.

그것은 그것이 하는 일이다. 그것은 목격되거나 구전되지 않는다. 오로지 체험되고 침묵 속에서 공포로 남는다.

다음과 같은 목소리가 끝없이 따라오는 회랑이다.

어리석은 자!

어리석은 자!

어리석은 자!

회랑은 살아있다. 지나온 부분은 무너지고 걸어나가는 방향으로 건조된다. 뼈처럼 보인다. 거대한 포유동물의 가슴우리같은 형태로. 어두워진다. 밝아진다. 그 가슴의 주인이 숨을 쉬는 듯한 박자로.

질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의 안에 있는가.

(어리석은 자!)

나는 회랑의 뼈들이 희미해질 때까지 걸었다. 한번 회랑에 발을 들이면 어디에 누구와 있든 동시에 회랑에도 있는 것이 된다. 희미해지되 사라지지 않는 뼈들 사이에서 요사이 내 귀에는 불규칙적인 맥동소리가 들려온다. 어리석은, 어리석은, 어리석은 심장소리로부터, 불가능한 도주 상태가 영원히 지속된다.

2018년 1월 28일 일요일

신성 2

신은 자신에 대한 저주를 양분으로 권능을 키워간다. 그러나 자신을 지속적으로 증오하게끔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초기의 신은 성질이 급해 무지막지한 자연재해를 일으켰다. 그 결과, 모든 생물체는 사라졌다. 죽어 있는 것은 어떠한 감정도 품을 수 없었으므로 신의 권능은 일거에 사라졌다. 자기 몸 하나 지킬 정도의 초라한 권능만 남았다. 그로부터 오랫동안 빙하기였다.
 
신은 아주 작은 것부터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단세포동물을 만들고 그것을 어렵사리 조합하기도 했다. 도대체 그 시간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그러나 신은 견뎠다. 공허의 상태란 신에게 있어 일상과 같은 것이었으므로, 신은 한 땀씩 정성스레 아메바를 빚었다. 아무 생각도 할 줄 모르는 그들을. 생각을 불어넣는 것은 신의 권능 바깥의 일이었고 신다운 일이 아니었다. 신은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지, 게임을 만들려는 게 아니었다.
 
신은 자신을 향한 찬양의 말이 부담스러웠다.
자신을 숭배하는 행위가 역겨웠다.
 
그것을 겨우 견뎌내면서
 
신이 오랫동안 공들여 빚은 것은 아주 작은 형태의, 거의 최소한의 형태의 불행이었다. 그것은 질병이기도 하고 시기심이기도 했다. 신은 모든 피조물을 동등하게 대하지 않았다. 유토피아란 오로지 피조물만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신은 몇몇 인간을 랜덤으로 택해 자신의 환영을 아주 약간 보여주었다. 그것이 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신은 이 게임을 진심으로 플레이하고 있다. 신은 아름다운 게임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지지 않는 게임, 어떻게든 승리하는 게임을 신은 원한다. 그러니까 신에게 저주를 퍼붓는 자들이여, 세계의 모습은 신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당신이 하느님 개새끼라고 외칠수록 이 세계는 경이롭게 풍요로워질 것이다.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