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3일 토요일

기계광이 기계를 사랑하듯

참관자  독재자가 등장합니다. 어깨에 황금색 주단을 걸치고, 흑색 제복에 홑십자로 된 훈장을 많이도 달고 있어요. 손가락에는 규산염광물로 만든 반지를 끼고 있습니다. 자연사 박물관에서 꺼내 온 원석을 다듬어 만들었다고 하지요. 그는 꼼짝도 안 하고 서 있어요. 저들이 그를 소환한 것이 아니라, 그가 저들을 소환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예요.

대법관(기계)  죄목은 다음과 같다.

대법관이 죄를 부른다.

대법관(기계)  이에, 피고인에게 사형을 구형한다.

독재자가 손을 들어 올린다.

독재자  나는 내 운명을 안다.

동요하는 기색은 커녕, 만연한 웃음을 무기처럼 내보이며

독재자  가스실로 들어가게 될 것이고, 내 법령에 따라 살아 모습 그대로 냉동될 것이다. 그러나 후대, 내 이름은 함성처럼 불거져 나올 것이고,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자손이 말라붙은 내 명예를 우물처럼 되살릴 것이다. 역사가 나의 판단 주체로되 나는 반드시 복권되며. 그때 너희와 너희 자손의 목은 새장처럼 매달려 여기 모인 사람들의 돌팔매를 맞을 것이고, 돌에 붙은 너희 살점은 인민들 논과 밭을 참새처럼 뒹굴 것이다. 나를 보아라. 기계광이 기계를 사랑하듯 나 또한 너희들을 사랑했다. 알겠느냐 알아야 한다. 역사는 언제나 정의로운 자들의 편이며, 결국 나는 빛으로 된 화살비를 맞게 될 것임을.

지지자들이 그의 이름을 삼창한다.

대법관(기계)  우체국장은 일어나시오.

우체국장  네.

대법관(기계)  선서하시오.

우체국장  선서합니다.

대법관(기계)  그대는 이 재판의 발생을 후세 역원에게 공표하고 답신을 받기로 되어 있었소.

우체국장  여기 묶인 반서 뭉치가 바로 그 답신입니다.

대법관(기계)  낭독할 준비가 되었소?

우체국장  낭독하겠습니다. 그 전에, 이곳에 계신 참관인들에게 알립니다. 이것은 아직 그 내용을 모르는 전보들입니다. 이것은 우리 과거 세대가 중력자 창문의 풍향계에 실어 후세의 우체국, 혹은 그에 준하는 기관으로 보낸 전보의 답신입니다. 이 전보는 행성 둘레의 알고리즘 기둥에 의해 절대적으로 보호되므로 결코 훼손하거나 왜곡될 수 없음을 전합니다. 또한 전보를 보내기 위해 몹시 많은 자원을 소모한바, 다음 세대의 황금기를 대신 지불해 얻은 이 전보의 중요성과 사건의 중대함을 이해하여 주시고 답신의 내용을 사고 깊숙이 각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읽겠습니다. 우리가 보낸 전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복권되었는가?” (지금 우리의 기술 능력으로는 여섯 글자가 한계였음을 말씀드립니다). 날짜의 해석은 우리 시대를 기준점으로 합니다. 처음은 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이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삼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오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백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이백이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오백오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일천이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이천오백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오천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일만 이천오백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삼만 팔천이백오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오만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십오만 이천삼백이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같은 답신이 반복되니 좀 뛰어넘도록 하겠습니다. 일억 삼천이백십만 팔천이백이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마지막 사십육억 년 뒤로부터 온 답신에는 알 수 없는 문자가 적혀 있어 해석에 애를 먹었습니다만, 우리 연구가들이 동봉된 쪽지를 통해 방금 막 그 의미를 알아냈습니다. 보이십니까? 우리의 언어로 번역하면 ‘복권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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