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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2일 금요일

마지막 더미 태우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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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자리를 우상이 대체하는 중. 그걸 다르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권위의 자리를 동의가 대체하고, 탐색의 자리를 생존이 대체하고, 고난의 자리를 적이 대체하는 중. 거꾸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적 고난에 대해, 드디어 우리는 그것과 양립할 수가 없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이제 한번 해볼 만하다고 느끼는 중. 누가 죽더라도, 내가 죽더라도. 이런 상태를 두고 억지로 좋은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의의 색채를 더하면서. 거의... 그렇게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다고도 생각한다. 어쩌면 이 모든 일들이 반쯤은, 우리 앞에 음울한 미래만 있다는 느낌에 기대어 있지 않은가? (그리고 나머지 반은 진실로 음울한 미래.) 느낌은 중요하다. 나는 전망이라는 느낌이 복원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망이 주는 오래된 느낌이, 편안한 느낌이. 우리에게는 지금 만사를 거는 도박이 아니라 전망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떻게?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연대다. 전망을 위해서는 연대가 필요한가? 생각은 그렇게 닿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연대는 고통스러운 일이고 고통이라면 사실상 한계다. 연대는 필요악이다. 내게 시급한 것은 문예다. 취미다. 연대를 그나마 견딜 만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마약 같은 것들. 우리에게는, 적어도 내게는 쿠키의 전망이 필요하다. 나는 필요한 것을 믿는다. 많은 이가 함께 믿으면 현실이 된다고들 한다. 엄청난 광량 아래 우거진 잎사귀들을 나는 손에 잡힐 듯이 믿고 있다. 하느님을 믿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 잎사귀들은 많은 이들의 손처럼 보인다. 나는 내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단 듯 만 듯 텁텁한 맛. 그러나 냄새로 그것이 그것임을 안다. 회당에 들어서면 회당의 냄새가 난다. 너무나 추운 날들도 반드시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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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한다. 적절한 작별을. 전망의 조건은 만남이 아니라 작별에 있다. 우리는 작별을 위해서 모이는 것일 수도 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먼저 손을 흔드는 편을 택하는 수가 있다. 작별이 주는 엄청난 슬픔을 우리의 바깥 방향으로 돌려놓기 위해서, 그나마 견딜 만하게. 왜 견디려는지? 저편으로 간 이들과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째선지 번번이 그런 약속을 한다. 만나지도 못할 거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아닐 수도 있다. 이것이 쪽지 태우기의 마지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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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소리 흉내를 그치고, 어째서 이사야가 그런 자세로 앉아 꼼짝도 않고 있는지 궁금히 여기며 다가갔다. 이사야는 돌아보지 않았다. 손을 뻗쳤다. 이사야는 깜짝 놀랄 만큼 차가웠다. 이사야는 딱딱했다. 나는 이사야를 떼어내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이사야는 얼음 덩어리의 소리를 냈다. 이사야가 더 이상 살아 있지 않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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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쬐고 있다가 이사야가 뭔지 모를 작은 짐승을 따라 화살처럼 밖으로 튀어 나가는 것을 본다. 나는 다시 불을 본다. 그가 이제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따라서 나온다. 저것이 쥐잡의 마지막 모습이다... 엄청난 눈이 오고 있다. 불은 타오른다. 이사야는 그날 저녁 돌아온다. 지금은 유령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내 손에 안겨 불을 보고 있다. 나의 꿈도 녹는 중.

2018년 1월 2일 화요일

12월 더미 태우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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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태울 때라면 해가 바뀐 다음이다. 그렇다면 신년회다. 새해에는 음악을, 그것도 폭력적인 음악을 듣고 싶은 법이다. 당연히 아침에 모여야 한다. 물론 산에 가면 좋겠지만, 힘드니까 강도 괜찮다. 새해 아침 강변에 붐박스를 들고 나가 엄청나게 시끄러운 뭔가를 튼다. 노이즈나 포스트 어쩌고 뭐 그런 걸. 추우니까 향긋한 술을 아주 조금만 마셔도 좋겠다. 술이 아니어도 좋다. 따뜻하고 향기로운 액체면 좋겠다. 불은 안 된다. 몸을 약간 흔들어도 괜찮을 것이다. 아침 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강 저편이 드러난다. 강물에 반사되는 눈부신 햇살... 이 신년회의 제목은 입김 2018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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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에서는 유희용 대마가 합법화됐다고 한다. 될 건가? 된 건가? 희망적으로 봐서 앞으로 10년 정도라면 한국도 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 쿠키 사업에 대해서는 일전에도 말했다. 본격 시작은 2030년이다. 30년에서 두 해 정도 전에는 굿즈를 만들어 출시, 생활 브랜드 GMCG로 자리를 잡는다... 전에 삼베 손수건 얘기를 했는데 안경닦이도 괜찮은 것 같다. 앞으로 기본 조회수가 100 정도 되면 굿즈도 못 만들 것 없다. 10년 사이에 충분히 이룰 수 있는 이야기 아닌가? 또 떠오르는 것은 구슬이다. 유리구슬. GMCG 시그널 컬러가 들어간 구슬... 그런 건 그러나 쓸모가 없다. 갑자기 무슨? 흐름상 마대가 괜찮을 것 같다. 마대로 뭘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쓸모가 없진 않을 것이다. 손바닥만 한 마대 주머니는 어떤가? 그 주머니에 삼베 손수건으로 감싼 쿠키를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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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면서 이면지가 아주 많이 쌓였다. 이면지를 갖고 뭔가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봤다. 간단히 실 제본을 해서 노트를 만들어 쓴다는 사람도 있다. 당장 떠오르는 것은 한강다리에 가지고 가서 뿌리고 사진으로 남기기 정도다. 이면지가 정말로 많으므로 제법 볼만할 것이다. 한강다리에선 뭘 해도 볼만하다. 한다면 얼굴을 가리고 해야 한다. 도망을 빨리 쳐야 하니 따릉이를 타고 가서. 따릉이면 바로 잡히나? 버스를 바로 타는 거다. 중간에 버스 정류장이 있는 다리, 양화대교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잡힐 수도 있다. CCTV 설치 현황을 파악해둬야 할 것이다. 재밌을 것 같다. 이건 농담이다. 정말이다. 하지만 종이비행기 하나 정도는 접어서 날려볼 수도 있지 않나? 그것도 불법인가? 쓰레기 무단투기로? 그 정도는 괜찮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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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금 사냥꾼은 오랜 꿈이다. 장비를 잘 갖추고 길 잃은 개나 고양이 등속을 잡으러 다니는 일이다. 현상금이 걸린 친구들로만. 뭘 잘 갖추냐, 육포 츄르 뭐 그런 것을 잘 갖추고 다니다가 저 친구가 그 친구 같다, 이러면 꾀어다가 확 붙드는 것이다. 이 경우 조수견이 있다면 좋겠다. 그의 이름은 보바펫이다. 우아한 쑥색 하네스를 차고 있는 그에게 잃어버린 집짐승의 냄새를 맡게 해서... 하지만 개를 데리고 다니면 떠돌이들은 더 접근을 피할 것이다. 그러니까 조수견과는 따로 활동을 해야 한다. 보바펫은 풀어놓고, 이러면 오히려 떠돌이를 더 만들 수도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바펫은 나와 약속을 어디 몇 시에서 만나자 하면 거기서 만날 수 있는 엄청난 친구여야 한다. 보바펫은 검은 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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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뀐 다음엔 좀 늦는다. 지금 새해 생각을 해둬야 한다. 내년엔 어쩔 셈인가? 생각이 닿지 않더라도 생각을 끌어내야 한다. 내년에는.. 내년부터는... 내년부터는 원고 정리를 시작할 것이다. 시집 말이다. 최대 60편 갈무리하기를 목표로 한다. 갈무리하며 50편대까지 줄인다. 제목은 정해져 있다. 내년 말에는 순서가 정해져 있을 것이고, 적어도 2019년에는 실물로 나온다. 물론 내 돈 내고. 거기에는 엘프에 대한 시가 들어간다. 산타가 엘프들을 착취하는 이야기를 갖고 쓴 시 말이다. 산타 개새끼... 이건 정말로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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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더미까지만 쓸 것이다. 거기까지만 쓴다는 것이 계획이다. 나는 바라는 것이 많지 않다. 그나마 있는 바람도 모두 소박하기 짝이 없다. 내 생각은 그렇다. 내가 바라는 건 거의 다 썼다. 나는 전부터 교회 건물을 갖고 싶었다. 교회 건물 전부를. 거기에는 내게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이 있다. 연단과 긴 의자가 있는 예배실이 있고, 계단이 있고 복도가 있고 공동 주방이 있고 공동 식당이 있다. 화장실과 천장 낮은 방과 드럼이 있고 신발장이 있다. 나는 그것들을 관리한다... 아니다! 이런 것이어선 안 된다는 이야기다. 갖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이어야 한다. 막상 적으려 할 때면 잘 떠오르지 않아 엉뚱한 소릴 늘어놓게 된다. 누구나 그렇다. 나는 합창단을 원한다. 오랜 소망이다. 내가 둘이 넘었으면, 셋이나 넷이 넘었으면 좋겠다. 여섯이나 일곱이었으면. 그 합창단은 제법 폭력적인 합창단이다. 떼로 몰려다니며 아무 데서나 기타를 마구 치고 노래를 마구 부른다. 춥든지 덥든지 안에서든 밖에서든. 돌아가면서 하기 때문에 지치지도 않는다. 뭘 부수거나 던질 수도 있다. 쿠키 같은 건 몇 봉지고 먹을 수 있고... 나는 분신술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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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불꽃도 움츠린 듯 보인다. 불이 붙은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다. 앉아 있기 어려울 정도로 추워 엉거주춤 서 있다. 불가에서 돌아서기만 해도 무릎이 시리다. 이사야는 관리실에 들어가 있다. 요즘에는 거기서 거의 나오질 않는다. 앞으로 몇 해를 더 살 것인지? 새해라서 그런가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좀 지친 것 같다. 자꾸 그런 생각이 든다. 앞으로 몇 해를 더... 아까 쥐무덤에 갔던 것도 그래선지 모른다. 쥐잡이가 나름의 방식으로 귀여워해 줬던 쥐다. 너도 네 방식대로 귀여워해 보라고 내게 주지 않았겠나. 무덤을 꾸밀까 하여 돌멩이를 몇 개 줍다가 손이 시려워 고만뒀다. 처음에 좀 수북하게 해 뒀는데도 땅이 얼었다 녹으면서 그새 흔적이 없다. 곡식이 있다면 들고 가 뿌리기라도 했을 텐데 곡식도 없다. 허망한 성묘. 허망한 성묘... 이사야가 아주 새끼라면 요즘 기웃거리는 개들 중 하나를 데리고 와 친구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쥐가 아니라. 실상은 창고로 들어오려는 개들을 이사야가 다 쫓아내고선 의기양양하게 관리실로 들어가는 것이다. 관리 조수처럼. 管理鳥獸... 장갑 낀 손이라 한자 쓰기가 어렵다. 떡라면이 다 끓은 것 같다. 관리인을 부르러 간다.

2017년 12월 1일 금요일

11월 더미 태우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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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를 해야겠다. 뭘 쓸지는 아직 생각해내지 않았다. 사실 쓸 만한 것은 전부 다 쓰고 있기 때문에 더 쓸 것이 없는 듯도 하다. 근 몇 년 동안 보잘것없는 밑천을 거의 다 쓰기도 했다. 그리고 거지 상태로, 다음과 같은 뭔가를 쓰고 싶다. 텀은 월 2회. 연속성이 있을 것. 시의성도 조금. 읽기에 지나치게 무겁지 않고, 한 번 읽고 치워 버릴 만하지도 않게. 야구카드 정도의 아름다움이 있어야 한다. 일기와 구분된다. ~했다와 ~할 것이다와 ~야 한다와 ~하고 싶다가 뒤섞인 뭔가가 아니다. 패턴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반복적인 뭔가였으면 한다. 다른 데서 쓰고 있는 다른 것들과는 무관해야 하고, 남이 만든 뭔가와도 무관해야 한다. 이거는... 여기다 이렇게 적었다는 거는 결국 당분간 안 쓰겠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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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이 곡물창고 1년째다. 그날은 곡물창고의 날이다. 쌀, 보리, 콩, 조, 기장, 수수, 밀, 옥수수 따위 곡물로 만들어진 음식을 챙겨 먹고 밤에는 곡주를 마신다. 빼갈이 좋겠다. 보드카도 좋다. 그날은 고기를 삼간다. 굳이 먹어야 한다면 새고기만 가능하다. 글도 몇 자 쓴다. 딱 몇 자다. 문단은 안 된다. 이제는 中華時代, 이렇게. 향을 피우든가 향초를 켜고 누워서 냄새를 맡는다. 전깃불을 꺼야 한다. 누구도 만나지 않고. 그러다 잠들 것이다. 곡물창고는 긴 기획이다, 괜히 구글에 기댄 게 아니다, 앞으로 최소 5년은 기본으로 간다, 당연히 건립일도 챙겨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그리고 경작지 꿈을 꾼다. 도중에 일어나 초를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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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이나 칼을 차고 다니고 싶다는 생각은 날이 추워지면서부터 들었다. 그것은 모두가 잘 볼 수 있도록 허리에 차야 한다. 홀스터나 칼집. 무거운 신발도 신어야 한다. 그렇게 하고 걸어가는 것이다. 집까지. 어디까지든. 하지만 요즘만치 추우면 외투를 입어야 하고 외투 위에다 벨트를 찰 수는 없다. 거추장스럽겠지만 소총 메기는 대안이 될 것이다. 그러면 모두가 소총을 멨으면 좋겠다. 내가 갖고 다녀도 이상하지 않도록. 내 소총이 있다면 이래저래 꾸미고 싶다. 스티커도 붙이고 스트랩도 예쁜 것으로. SMG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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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원 딱 걸고 비밀스럽게 시험적으로 원고 모집을 해봤는데 투고는 없었다. 어느 정도 될 것 같으면 고정 코너로 삼으려고 했다. 무슨 만 원 정도로는 당연히 안 되는 것이었다. 장난으로라도 있지 않을까 했는데 장난으로도 없었다. 삼만이면 될까? 되어야 한다고 보는데, 이런 종류의 일에 대한 나 자신의 판단력을 신뢰하기 어려우므로 역시 좀 아리송하다. 아마 안 될 것 같다. 어쨌든 내가 딱 그 정도 느낌, 월 만 원어치 느낌으로 쓰고 있기에 그 넘게 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마 돈이 문제가 아닐 것이다. 공고公告를 바로? 이쪽도 안 오면 끝이고, 와도 좀 문제다. 그냥 청탁이 깔끔할 수도 있겠다. 무슨 청탁을 말하는 건가? 가상의 누군가에게 청탁을 하는 식으로 해서... 이런 건 어떤가? 악마에게 청탁을 거는 것이다. 정말 그런 식이라면 유치할 거고, 골자가 그렇다는 얘기다. 사타닉한, 최악의 적들이 있고, 그들의 옆에 서서, 차분하게 최악의 주장을 펼쳐보는 것이다. 혐오와 살인, 자살과 전쟁, 강간과 방화 등의 이런저런 죄악을 합리화하고 변호하는 것이다. 교인의 옆에서 노인의 옆에서, 군인의 옆에서 선생의 옆에서, 남자 옆에서 여자 옆에서, 사장 옆에서 회장 옆에서... 악마보다야 나은 것을 고안해야 할 것이다. 이건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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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절에는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없어진다. 취미마저 쉬고 싶다. 그러고 보면 연말이 아닌가? 연말이라면 역시 송년회다. 토탈브레이크 송년회를 하고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눕거나 앉아서 하고 싶은 걸 하다가 알아서 밥 먹고 스스로 잠들며... 모이지도 않는다. 이건 곡물창고의 날과 함께 진행하면 될 것 같다. 다른 기획도 있다. 하나는 불의 송년회다. 원탁에 그냥 둘러 앉아 각자 가지고 온 초를 꺼내놓는 것이다. 다같이 켜도 좋고 두어 개만 켜도 좋다. 앞에 물, 좋은 술, 좋은 차, 그리고 컵과 잔을 두는 물의 송년회도 있다. 마음껏 마셔도 좋다. 뱃지와 돌멩이, 장신구, 주사위 따위를 늘어놓고 이야기하는 광물의 송년회, 말린 고기와 과일, 과자를 두고 영상물을 보는 생물-번개의 송년회, 향을 피우고 담배를 피우고 음악을 트는 공기의 송년회, 이 다섯 송년회를 다 함께 해서 지구별 송년회, 그리고 거기에 몇몇 외계 문물을 가져와 교류하는 것까지 더하면 코스모 송년회다. 곡물창고의 날로 시작해 월화수목금토 매일 저녁 60분씩 해 가지고 마지막 토탈브레이크까지 굿바이 코스모 송년주간으로 해도 되겠다. 쓰고 나니 벌써 이미 한 기분, 충만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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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아주 춥고, 나는 오두막을 갖고 싶다. 바깥의 일이 다 고통스런 나날들이다. 내 바람은 일단 오두막에 들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순 없다. 바구니 짜기 같은 소일을 하면 좋겠다. 손이 시렵지 않겠나? 발로 할 수 있는 일이면 좋겠다. 발도 그러나 시려울 것이다. 발을 집어넣을 수 있는 담요가 있어야 한다. 손도 집어넣고. 머리도 집어넣어야 한다. 외풍에 대한 방비가 철저히 이뤄진 오두막이고 그 방비는 내가 한 것이다. 무지개천 같은 것으로. 오두막 안에는 난로가 있고 연통이 있다. 난로는 켜지 않았다. 땔나무가 없기 때문에. 그래도 바깥보단 따뜻한 편이다. 웅크리고 있자니 바람 소리가 들린다. 어디서 통하는 바람인가? 바깥은 보이지 않는다. 다 가려놓았기 때문에. 오두막 어딘가에 쥐가 있는 것 같고 문간에는 총이 기대어져 있다. 그런 식이다. 당연히 그곳에서 송년회를 하고, 그 오두막을 떠나며, 그 오두막이 송년회만을 위한 오두막, 송년장이었음이 밝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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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반 위의 쥐잡이는 그사이 살을 더 찌운 것 같다. 딱 차게 들어가 앉은 택배박스는 역시 주운 것이다. 받는 이 칸에 유명한 가수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 가수가 근방에 산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혹시 하는 생각에 처분하지 못하고 뒀던 것이다. 혹시... 이사야는 그 속에서 눈을 감고 고개를 세운 채 미동도 없이, 뭔가를 깊고 그윽하게 생각하고 있는 눈치다. 그가 꾸고 있을, 반쯤은 추억이고 반쯤은 예언인 폭풍 같은 꿈을 상상해 본다. 최근 그가 창고 안에서 번개처럼 뛰어다니는 걸 자주 봤다. 쫓았던 것이 쥐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날이 추워지면서 하여튼 뭔가가 들어온 것이다. 매양 그러는 걸 보면 잡기에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젖은 깃발처럼 흔들리던 누런 꼬리가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다. 어린 시절 들었던, 고양이의 꼬리를 붙잡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 척추가 빠진다는 이야기. 그건 관리인의 손도끼를 만지다가 떠오른 것이다. 손때를 탄 자루가 딱 겨울 이사야의 꼬리만큼 도톰하다. 관리인은 뭐 한 십 몇 년 됐다고 했다. 이것으로 어제 나무를 해 왔다. 나무를 했다기엔 민망한 정도지만. 오늘 돌려주러 갔는데 관리인은 자리에 없었고, 대신 못 보던 포대가 있었다. 이사야를 위한 사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이제야 퍼뜩 든다. 떠들어 보진 않았다. 그 사료를 먹고 힘이 나서 그렇게 뭘 쫓아다닌 것이 아닌가? 그런 것은 이사야의 일이다. 마구 뛰어다닌 끝에 배불리 먹고, 불가에서 꿈꾸는 일. 그러고 보니 오늘이 2일이 아니라 1일이다. 그래서 관리인이 없나? 하지만 불은 이미 피웠다. 올해도 곧 끝이다.

2017년 11월 2일 목요일

10월 더미 태우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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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를 갖고 싶다. 더 정확히는 묏자리를. 숲속에 반듯 널찍한 구멍을 파놓고 싶다. 이 나라엔 산뿐이고 숲이랄 건 없지만서도. 파놓고서 가끔 가 주변을 매만져두고 싶다. 부장품들을 미리 가져다 둔다. 전혀 쓰지 않지만 버리지도 않을 물건들이다. 내가 여생을 비참히 보내지 않는다면 아마 보물함이 거기 들어갈 것이다. 호박, 흑단, 산호, 물총새깃이 들어 있는 작은 나무함이다. 작은 금붙이나 터키석이 추가될 수도 있다. 청금석도 좋다. 도기나 조약돌 따위. 그리고 그들을 닦을 수 있는 천. 개다리소반도 가져다 둘 것이다. 개다리소반을 주우러 동네를 쏘다녔던 기억이 난다. 결국 줍지 못하고 샀었다. 만 원을 주고. 상인은 다리 하나에 이천오백 원이라고 했다. 묏자리에는 이제 죽을 때까지 읽지 않을 두어 권의 책도 들어간다. 묘를 만들며 쓴 도구들도 함께 묻어야 한다. 물이 차지 않게 지상 둘레에 얕은 흙담을 올리고 천막을 친다. 20년 정도만 소일하듯 해도 진시황 부럽지 않게 될 것이다. 개 무덤도 그 안에 만들면 되고, 후손을 걱정할 필요도 없이, 거기 앉아서 내 벽들과 함께 살다가, 그냥 거기 누워 죽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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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켓북은 상당히 관심사다. 포켓북을 만들고 싶다. 포켓북이라는 형식에 맞는 내용이라면 무엇이든 가져와서. 시집, 단편소설, 유머집, 소사전, 논문, 저작권 풀린 옛 고전의 한 부분, '무엇을 할 것인가', 마오 어록, 박근혜의 산문, 김재규 일대기, 우주세기 연표, 야인시대 64화(심영 에피소드)의 각본, 한국의 시·군 목록, 그런 잡다한 것들을 같은 시리즈로 하나씩 만들고 싶다는 얘기다. 안주머니나 손가방에 쏙 들어가는, 손바닥만 한 종합 문고다. 번호가 있어야 수집욕을 자극할 수 있다. 표지가 예뻐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나씩 띄엄띄엄 나오면 안 되고 와장창 쏟아져 나와야 한다. 순서대로 나오면 안 된다. 이 형식에 내가 쓴 것을 슬쩍 끼워 넣는다는 것이 당연한 핵심이고, 그 참에 네가 쓴 것도 슬쩍 끼운다는 것이 두 번째 핵심이다. 협동농장총서. '***문고' 같은 이름도 좋겠는데 적당한 ***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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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점대 갖기. 주역점에 쓰는 점대를 말한다. 산가지, 서죽이라고도 불린다. 주역을 배운 것은 대학생 때 교양수업에서였다. 몇 없었던 만족스런 강의였다. 주역점을 쳐서 해석해 오는 것이 과제였던지라 나무젓가락을 깎아 점대를 만들었다. 한동안 그걸 갖고 점을 쳐댔다. 축제 때도 치고 엠티 가서도 치고 이거 위험해지는 거 아냐? 싶을 때까지 쳤다. 그때 만든 점대를 계속 갖고 있다가 한 개를 잃어버렸다. 본래 50개 중에 한 개는 빼놓고 치므로 점을 치려면 칠 수는 있으나 법에 맞지 않는다. 하나만 새로 만들기엔 이전 것들에 든 길 탓에 너무 튄다. 사려고 하면 값이 보통이 아니다. 아마추어 주역쟁이들은 이것저것으로 자작해서들 쓰는 모양이다. 김발을 사다가 끈을 풀어서 쓴다는 사람도 있다. 나도 이제 나이도 적당히 찼고, 새로 한 세트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좋게 해 가지고. 얼마 전 꿈에서도 거짓말처럼 이 생각을 했다. 꿈속의 대밭을 보면서 저걸로 서죽을 만들면 어떨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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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차 말했지만 이제는 中化시대다. 중화시대가 온다. 나는 그럴 필요가 있는 단어에서는 언제나 한자를 병기하고 있는데, 다 중화시대를 대비하는 차원이다. 한 자라도 더 써두고 더 봐두면 좋지 않겠나? 그런 의미에서 중국어 스터디 그룹를 만들고 싶다. 중국어를 배웠으면 배웠지 왜 굳이 그룹이 필요한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런 것 같다. 정말로 갖고 싶은 것은 뭐 무슨 그룹인 것 같기도 하다. 그놈의 그룹... 벽 같은 것이다. '한계가 있어야 전진이 있다'라는 식으로. 서로의 한계가 되어 주는... 주역을 통해 중국어를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 너무 오래되었나? 협동농장총서에 주역해설도 넣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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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러 다니기 좋은 시기도 끝나 간다. 바퀴 달린 탈것을 갖고 싶다 노래를 부르고 다니기도 했다. 바퀴는 세 개 이상, 승객을 한 명은 태울 수 있어야 하고, 짐을 실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인력이라도 괜찮다. 세발 자전거가 그나마 현실적이다. 장은 잘 보지도 않지만, 그걸로 장을 보러 다니면 좋겠다. 좋기로는 짐마차가 가장 좋다. 마차면 마구간도 있어야 한다. 마구간도 물론 갖고 싶다. 마구간 정도는 있어야 성공한 인생이 아닌가? 마부를 하기는 싫다. 나로서는 그런 크기의 큰 짐승을 감당할 수 없다. 나귀 정도라면 어떻게든 될지도 모르지만. 나귀 마차. 오토바이라면 사이드카다. 오토바이는 너무 좁다. 자동차라면 다마스 정도가 귀엽다. 라보도 괜찮다. 그런 것들을 끌고 다니기다. 버스도 전철도 아닌, 개인적인 이동 방안이 필요하다. 개인적인 이동 방안을 위한, 개인적인 이동 방안의 계류지가 필요하다. 아니면 개인적인 이동방안 속에서 잘 수 있어야 한다. 그쪽이라면 내 것이 아닌 역들이 있어야 할 것이고, 아니다, 그런 것은 필요가 없다! 외양도 포장마차도... 그런 것들은 필요가 없고 가질 수도 없다. 무덤이 그러한 것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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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옷을 입은 관리인은 자신의 의자를 가지고 나왔다. 튼튼하고 우아한 철제 의자. 그는 내게도 차를 따라 주었다. 어두운 빛에 구수한 향이다. 그는 '좋은 거'라고만 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두툼하며 묵직한 그의 컵은 그와 나 사이에 놓인 소반 위에 있다. 그는 내 메모를 하나씩 읽고 내게 돌려준다. 나는 나의 메모를 하나씩 받아 불 속으로 던진다. 그 화는 빛날 화 자를 써야 한다는 이야기 말고 다른 말은 없었다. 메모들은 곧 다 탄다. 속절없다. 땔나무 구하기는 제법 힘들었다. 차는 별 도움이 안 됐다. 다음엔 지게를 지고 산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다. 관리인은 지게가 있다 말하고, 차에 대해 묻는다. 만든 것이냐고. 주운 것이다. 훔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고친 이는 나다. 새 왼쪽 바퀴를 구하고 아주 기뻤던 이야기를 했다. 관리인은 산에 대해 말한다. 옛날에는 저 산에 나무가 없었다. 산 이름을 묻자 알려주었다. 노인들이 다 죽어 놔서... 지금 그의 무릎에는 보란 듯이 이사야가 올라앉아 있다. 그는 쥐잡이를 만지지도 않고 부르지도 않는다. 이사야는 그곳에서 편안해 보인다. 저번 주부터 내게 쌀쌀맞게 군다. 쥐무덤을 찾아낸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통조림은 먹었고, 그곳에서 졸고 있는 것이다. 관리인이 뭘 적고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이것도 그에게 보여준다. 그는 이것도 태우는 거냐고 묻고, 나는 그렇다고 답한다.

2017년 10월 2일 월요일

9월 더미 태우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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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펜이 아니라 검은 펜으로 글씨를 쓰고 싶다. 써서 붙여 놓기다. 쓰는 행위를 하고 싶다는 얘기지만 뭘 쓸 것이냐가 실은 중요하다. 오래된 소설의 유서 깊은 부분이 좋을 것이다. 아니면 오래된 팸플릿. 포이어바흐 테제 같은 것. 버리기 아까워 붙여 놓겠다는 얘기지만 실은 붙여 놓는다는 행위가 중요하다. 나는 벽에다 뭘 그려 붙이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벽이 비어 있는 게 이상한가? 벽 보기를 좋아하는 것일 테다. 말도 모르는 아기 때부터 누워서 멍하니 벽을 보고 있곤 했다. 기억이 난다. 거짓말이지만. 하여간 그렇게 했다. 그랬던 것 같다. 아무것도 없는 벽이 좀 허전해 보였음이 분명하다. 저 벽에다가 뭘 좀 붙이면 좋겠군, 했던 것이 분명하다. 조금 자란 다음에는, 침대에 누워 벽지의 패턴이나 벽과 천장이 모이는 구석을 한참 보았던 기억이 난다. 벽에다 처음 뭘 붙였던 건 초등학생 때였다. 그림 같은 걸 그려서. 내가 그린 것을 계속 들여다 보곤 했다. 아기 때의 다짐을 떠올렸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면 글자를 붙인 적은 없다. 언제나 그림이었다. 그림 쪽이 획수가 압도적으로 많으니까 볼 것도 많다. 더 좋은 글씨를 쓰고 싶다. 종합적으로 필요한 것은 족자 모양의 화이트보드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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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꿈 얘기가 보통 아무 재미가 없는 것과 같이 내 꿈 얘기도 써놓고 보면 별 재미없다. 어느 정도냐 하면 일기보다 더 재미없는 정도다. 꿈은 글로 남길수록 더 많이 꾸게 되는데, 꿈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즐거운 일은 아니다. 꿈은 감각과 감정과 상황과 이미지의 뒤범벅일 뿐이다. 서랍을 정리하기 위해 쏟았을 때의 혼돈 같은 것이다. 그 재료를 가지고 아무리 조리 있게 말을 만들어 봤자 뭔가의 뒤범벅일 뿐이다. 꿈이 조금이라도 재밌다면 꿈의 이전 때문이다. 꿈 이전의 맥락이 점점 흐려지면서 꿈의 재미도 점점 떨어진다. 꿈 자체는 시간이 지날수록 재미가 없어지는 종류의 것, 문자로 남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렇기 때문에, 꿈 기록하기는 언제나 구미가 당기는 계획이다. 모으기 좋은 허망한 것이니까. 그것은 나의 것이 전혀 아니면서도 나만의 도록처럼 보일 것이다. 굳이 하겠다면 공개되지 않아야 하겠다. 재미가 없다는 사실이 들통나지 않도록. 그러나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는 그런 일은 해봤댔자 금방 질리고 만다. 하지만 그럼에도, 꿈 이야기가 자신의 뒤쪽, 미래와 관계하도록 만들 수 있다면 어떤가? 말하자면 꿈 해몽 일지의 형태라면? 요셉 어쩌고 하면서 말이다. 비록 지금은 이사야를 택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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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하는 일은 대개 바보 같은 일이고, 그래서 혼자서 하는 일은 정말로 진지한 일이다. 하지만 최고로 혼자 하는 일이라도 교류에의 열망이 거기에 숨어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교류회, 가상의 교류회를 혼자서 만들기, 이것은 오래된 기획이고 주제다. 이 가상의 교류회는 마음대로 소집되며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한다. 사람을 기다릴 필요도 없고 제한된 자원을 놓고 합의할 필요도 없다. 무제한 완전 갖춤의 교류회. 하지만 그래서야 무엇을 왜 교류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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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으로! 아름다움의 필수 요소인 균형과 긴장감과 어려움은 결국 '통제할 수 없는 바깥'과 '복잡해지려는 안쪽'의 경계면에 깃든다. 그것을 가리켜 형상이라 한다. 나는 그렇게 본다. 기획들의 외부 접점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게 생각된다는 얘기다. 실루엣만으로 그 뒤에 선 군중들에게 긴장감을 불어넣는, 인도자 같은 것을. 그 인도자는 리듬을 안다. 스케일을 안다. 참과 거짓이 자리를 바꾸는 순간을 안다. 그렇지, 자꾸 이런 이야기는 쓰지 말자. 형상을 만들자. 형상으로! 이런 이야기는 하지 말고! 시리즈는 쉬운 형상에 속한다. 시리즈 내 리듬이란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스케일 큰 것이 필요하다. 리듬은 리듬의 없음을 통해서만 있다. 요는 시리즈가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단발의 뭔가를. '특별 기획'을! 내가 원한다면 이 취미를 위해 월에 1만원까지는 지출할 수 있다. 고료로 만 원을 주고 글을 하나 받는다. 받아서 특집입고 태그를 붙이고, 관리인 계정으로 올린다. 접촉 가능한 주변의 필자와 주제도 짧게 생각해 봤다. [가을특집] "수염과 커피", "초등학생을 위한 인술강의", "기회의 땅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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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르날이란 무엇인가? 어쩌면 독자투고를 받을 수도 있겠다. 메일로. 자유주제로. 또는 주제를 정해서. 한 번 보고 치울 만한 짧은 공짜 글을. 게재 심사는 아마 관리인이 할 것이다. 일단 윤리 심의 기준을 만들어 적용하고 그 다음 제비뽑기나 사다리타기, 심사-추첨제다. 하지도 않을 텐데 벌써 귀찮다. 지면상의 제한이 없는데 추첨이 왜 필요한가? 제한은 만들면 그만이다. 아니 그보다 도대체 누가 투고를 한단 말인가? 그와 관련해서는 절대로 오지 않는 투고를 언제까지고 기다리는 이야기나 할 수 있을 것이며, 기적적으로 온다 해도 관리인이 대부분 쳐낼 것이다. 하지만 투고 자체는 나쁘지 않다. 최근 많이 읽힘 가젯을 독자투고란으로 바꿔도 된다. 일주일에 하나를 받아서 매주 바꾼다면...? 그런데 어차피 관리인이 올리는 거면 그냥 자기가 직접 써 버리면 그만 아니겠나? 투고도 관리인이 하고 심사도 관리인이 하고... 필진에게 최대한의 자유도를 보장한다는 의미에서 보면 못할 것도 없는 기획이다. 나 자신에게 최대의 자유를... 하지만 그래서야 무엇을? 왜? 여기서 나 자신의 운신 폭은 더 좁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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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건 굿즈의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 손수건은 가볍고 얇고, 그걸로 할 수 있는 일도 적지 않다. 일테면, 뭔가를 닦을 수 있다. 보관도 배지에 비해 훨씬 쉬운 편 아닌가? 매듭법을 배워 유행시키자. 스카우트처럼. 손수건대도 만드는 것이다. 손수건대에 손수건을 달아서 백팩에... 옛 일본의 족경대처럼. 두껍게 만들면 핀버튼이나 배지 따위를 달 수도 있다. 이건 완전 러브라이버구나. 곡물창고의 굿즈를 만든다면 역시 삼베 손수건이겠다. 이걸 벽에다가 붙여 놓으면... 또 벽인가? 벽이 아주 많이 필요하겠다. 아주 많은 내 몫의 벽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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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마자는 죽은 쥐 한 마리가 제법 멀쩡한 상태로 놓인 것을 봤다. 분명 어디 멀리 있는 건 아니다. 이사야 말이다. 재가 앉을까봐 밥그릇으로 캔을 덮었다. 가릴 것 같진 않지만. 메모들과 함께 타고 있는 것은 의자가 되려다 만 나무토막이다. 연장을 꺼내 준 관리인에게 미안하다. 지금 앉은 의자는 주워 온 것이다. 싣고 온 것. 약간 높다. 다리를 좀 잘라 볼까 하다 그만뒀다. 내가 만들었을 리 없는, 낡고 야무진 의자를 보고서도 관리인은 별말 없이 연장을 받았다. 관리인에겐 그런 세심한지 무심한지 모를 구석이 있다. 혼자서 좀 그런 기분이 들어서 계획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했다. 언제 음료수라도 하나 들고 갈 것이다. 짐승도 답례를 아니까. 이럴 때 관리인도 불러 차라도 같이 마시는 건 어떨지? 좋은 생각이다. 아까 관리실에 들렀을 때 찻주전자 같은 걸 본 듯도 하다. 수돗가에서 뜬 물을 끓이면 된다. 허름하게 생기긴 했어도 지하수를 쓴다. 그러면 내 컵을 가지고 다녀야겠다. 양철컵. 매달 수 있게 끈을 달고. 차에 고리를 달아야 할 것이다. 어디에 달까? 차는 창고 건물 옆에 대어져 있다. 덮어 놓은 호루도 관리인이 내어 준 것이다. 그도 여기저기로 끌고 다니며 뭘 싣고 오거나 간다. 내가 그러는 것처럼. 대충 그런 이야기를 하면 좋을 것이다. 뭘 싣고 오가는지. 불을 보며 앉아 함께 차를 마시면서. 나무가 들어가선지 타는 냄새가 좋다. 다음엔 땔나무를 좀 해올까? 방금 이사야의 울음소리가 들린 것 같다. 요옹... 그것이 나를 부르는 소리인 줄을 안다. 그쪽으로 간다. 쥐무덤은 소각장에서 울타리 쪽으로 4보 앞이다. 쥐잡이가 알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2017년 9월 2일 토요일

8월 더미 태우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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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농장 이야기는 여러 번 했었다. 협동농장을 만들 것이라고. 주력 사업은 마리화나 쿠키다. 먼저 대마 합법화가 필요하겠다. 작목반과 제과반, 풀에서 입으로... 생산한 대마를 바탕으로 뮤지션들을 포섭해 음반 레이블을 운영한다는 이야기도 했었다. 풀에서 귀로... 출판도 한다. 대마 화분 키우기 핸드북, 캐나다 나홀로 대마 여행기 등... 풀에서 눈으로. 이렇게 음반과 대마와 책을 패키지로 묶어 선물 세트를 구성한다. 이것이 농장의 삼두마차다. 잎사귀 마차. 잎사귀를 쓰는 건 아니지만 잎사귀가 예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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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농장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미래 인류의 단백질 공급을 책임질, 식용 곤충 사업으로 확장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애벌레 건조 분말을 굳힌 애벌레 큐브가 아이템이다. 말하자면 치킨 스톡 같은 거다. 하나 넣으면 멀건 국도 고소해지고... 포장 디자인이 중요하다. 채식의 새로운 길도 제시할 수 있는 것 아니겠나? 두더지 큐브 같은 이름은 어떨까. 아니면 지빠귀 큐브, 또는 PA(포스트 아포칼립틱) 큐브... 간식 접근이 아니라 식품 접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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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산보회. 코스를 정하고 날을 정해서 산보를 하고 돌아오는 것이다. 남는 건 사진뿐이니까 기왕이면 찍을 만한 것이 있는 곳으로. 첫 코스로는 벌레 쿠키 같은 걸 파는 모처의 카페에 다녀오기를 생각했었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대낮부터 떼 지어 다니는 거는 보기에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듣고서 과연 그런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만뒀다. 하지만 언젠가 가볼까,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만 한다. 생각만. 무슨 모임을 만드는 게 유행이라고 한다. 유행 좋다. 유행이 돌고 도는 것은 유행들의 숨겨진 목적이 세대를 건너며 성취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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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좀 된 것이다. 사전이라는 형식이 좋겠다는 생각. 그 형식으로 뭘 쓴다면 좋을 것 같다고. 뭐가 좋나?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일단 해 본 것은 일기 같은 사전이었는데 해 보니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한편으로 그것은 일기 이후에 대한 기획이기도 했는데, 그 면에서는 아무것도 일기라는 고유한 형식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일기의 형식을 바깥으로 반출해 낼 수는 있어도. 일기 같은 것을 원한다면 그저 일기인 편이 좋다. 누구에게 좋나? 자신에게 좋은 것이다. 하지만 일기라면 정말 질려 버렸다. 일기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을 더 제대로 기획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전다운 사전을 기획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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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매짜리 글을 쓰고 1매씩 포스터 형태로 나눠 10개월 동안 출간. 2개월은 놀고 마신다. 12개월은 너무 기니까. 포스터사이즈는 A2 또는 B1. 물론 좋은 그림이 그려져 있어야 한다. 내용 10매는 엄청 재밌어야 한다. 엄청 재밌는 얘기. 그림이야 뭐든 멋있게 그리면 된다지만 거기 들어갈 것을 쓰는 일은 아주 도전적일 것이다. 두고두고 봐도 괜찮아야 하고, 독립성과 연속성이 있어야 한다. 글씨는 손글씨다. 못 쓰면 안 되고 너무 잘 써도 안 된다. 그림을 보듯 읽을 글자여야 하지만 캘리그래피 식이면 안 된다. 양피지 같은 걸로 만들어서 평소에 말아 보관할 수 있는 형식도 생각해볼 만. 물론 비싸게 팔아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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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오니 캐치볼을 하고 싶다. 캐치볼 모임의 기획은 다음과 같다. 인원: 6인, 장소: 유수지 축구장, 주제: 육망성(사탄소환). 캐치볼을 하려면 일단 글러브가 있어야 하는데 글러브를 사기는 좀 아까운 느낌이 있고, 그러니까 그 정도로 캐치볼을 자주 할 것 같진 않고, 나로서는 그냥 길을 가다가 하나 줍고 싶다. 귀신 들린 글러브를. 그것을 끼면 마구를 잡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주변에 마구를 던질 수 있는 아무도 없지만. 그것은 아무 사탄도 소환할 수 없지만 육망성 캐치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싶은 것과도 같은 이치다. 나는 사실 안 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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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뀌는 냄새에 연기 냄새가 더해진다. 양철 밥그릇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사야는 가로로 누워 불을 쬐고 있다. 소각장은 충동적으로 만든 것이지만 이사야의 하얀 배털에 간혹 떨어져 붙는 재를 보고 있자니, 역시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벽돌들을 싣고 오면서, 이 창고의 아침 실루엣을 보다가, 그런 걸 만들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저기 저쯤에서 연기가 나면 괜찮을 것 같아서. 벽돌들은 한참 봐두기만 하다가 가져온 것이었다. 필요시가져가시요, 갈겨 적힌 널판 옆에 마구 쌓인 벽돌들을 바라보다가, 그저 갑자기, 별 필요도 없는데. 벽돌들을 좀 잘 놓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에 했다. 누구든 좋다면 뭐라도 좋으니 좀. 따지고 보면 이 창고부터가 그런 것 아닌가? 그게 뭐 누구의 벽돌인지, 누가 들인 가마니인지 별 중요한 일도 아니다. 중요한 일이지만. 이제 나는 이사야가 자고 있던 게 아니라, 누워 고개를 젖힌 채 뭔가를 골똘히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알림판에 뭘 달고 있는 창고관리인이다. 무슨 쓰잘데없는 사진 같은 것일 테다. 오늘의 관리인은 작업복도 제복도 아닌 평범한 차림새다. 그는 날마다 입고 싶은 대로 입고서 나타난다. 처음 관리인이 됐을 때는 뭘 열심히 써서 보내기도 하더니 이제는 환경정리의 날(관리인 혼자 멋대로 정한 날이다) 말고는 얼굴을 잘 비치지 않는다. 소각장을 만든다고 했을 때 어어 그러쇼 하고 반색하는 구석이 있었던 걸 보면, 관심이 있어서 오늘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이사야는 여전히 관리인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무슨 생각일지. 관리인을 먹을 생각인지? 관리인은 이사야를 좋아하지 않는다. 여기서 쥐를 잡을 이유가 없다는 거였다. 그래도 관리인을 이사야를 쥐잡이라고 부른다. 쥐잡이를 만진다고 쪼그려 앉아 있자니 다리가 아프다. 의자를 구해다가 둬야겠다.

2017년 8월 9일 수요일

소각장 만든 날

소각장이 창고 뒤편에 생긴다. 무슨무슨 ‘장’이라거나, ‘생겼다’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수준이다. 자투리 공터에 멀건 불벽돌로 삼면 벽을 별 마감도 없이 얕게 세워둔 것뿐이다. 쥐잡이 이사야를 위한 밥그릇도 이곳에 가져다 놓을 것이다. 그것은 양철 그릇이다. 내가 땡볕에 공구리를 갤 때부터 이사야는 옆에 와서 한참 보고 있었다. 그에게 캔 하나를 까주는 것으로, 여하간 소각장이 생겼다. 우리가 하지 않거나 못할 일, 누가 하거나 안 해도 상관이 없는 일들이 적혀 있는 무의미한 메모들이 이 소각장에 던져질 것이다. 그것들은 보는 사람도 없이 쌓이다가 매월 2일 태워진다. 1일은 월급날이고. 우리가 소각장에서 만나는 것은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보기 위해서지. 이사야는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좋은 소리를 내면서 깡통 속의 물고기에 열중하고 있다. 시원해져서 다행이다.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