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1일 금요일

11월 더미 태우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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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를 해야겠다. 뭘 쓸지는 아직 생각해내지 않았다. 사실 쓸 만한 것은 전부 다 쓰고 있기 때문에 더 쓸 것이 없는 듯도 하다. 근 몇 년 동안 보잘것없는 밑천을 거의 다 쓰기도 했다. 그리고 거지 상태로, 다음과 같은 뭔가를 쓰고 싶다. 텀은 월 2회. 연속성이 있을 것. 시의성도 조금. 읽기에 지나치게 무겁지 않고, 한 번 읽고 치워 버릴 만하지도 않게. 야구카드 정도의 아름다움이 있어야 한다. 일기와 구분된다. ~했다와 ~할 것이다와 ~야 한다와 ~하고 싶다가 뒤섞인 뭔가가 아니다. 패턴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반복적인 뭔가였으면 한다. 다른 데서 쓰고 있는 다른 것들과는 무관해야 하고, 남이 만든 뭔가와도 무관해야 한다. 이거는... 여기다 이렇게 적었다는 거는 결국 당분간 안 쓰겠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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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이 곡물창고 1년째다. 그날은 곡물창고의 날이다. 쌀, 보리, 콩, 조, 기장, 수수, 밀, 옥수수 따위 곡물로 만들어진 음식을 챙겨 먹고 밤에는 곡주를 마신다. 빼갈이 좋겠다. 보드카도 좋다. 그날은 고기를 삼간다. 굳이 먹어야 한다면 새고기만 가능하다. 글도 몇 자 쓴다. 딱 몇 자다. 문단은 안 된다. 이제는 中華時代, 이렇게. 향을 피우든가 향초를 켜고 누워서 냄새를 맡는다. 전깃불을 꺼야 한다. 누구도 만나지 않고. 그러다 잠들 것이다. 곡물창고는 긴 기획이다, 괜히 구글에 기댄 게 아니다, 앞으로 최소 5년은 기본으로 간다, 당연히 건립일도 챙겨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그리고 경작지 꿈을 꾼다. 도중에 일어나 초를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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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이나 칼을 차고 다니고 싶다는 생각은 날이 추워지면서부터 들었다. 그것은 모두가 잘 볼 수 있도록 허리에 차야 한다. 홀스터나 칼집. 무거운 신발도 신어야 한다. 그렇게 하고 걸어가는 것이다. 집까지. 어디까지든. 하지만 요즘만치 추우면 외투를 입어야 하고 외투 위에다 벨트를 찰 수는 없다. 거추장스럽겠지만 소총 메기는 대안이 될 것이다. 그러면 모두가 소총을 멨으면 좋겠다. 내가 갖고 다녀도 이상하지 않도록. 내 소총이 있다면 이래저래 꾸미고 싶다. 스티커도 붙이고 스트랩도 예쁜 것으로. SMG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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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원 딱 걸고 비밀스럽게 시험적으로 원고 모집을 해봤는데 투고는 없었다. 어느 정도 될 것 같으면 고정 코너로 삼으려고 했다. 무슨 만 원 정도로는 당연히 안 되는 것이었다. 장난으로라도 있지 않을까 했는데 장난으로도 없었다. 삼만이면 될까? 되어야 한다고 보는데, 이런 종류의 일에 대한 나 자신의 판단력을 신뢰하기 어려우므로 역시 좀 아리송하다. 아마 안 될 것 같다. 어쨌든 내가 딱 그 정도 느낌, 월 만 원어치 느낌으로 쓰고 있기에 그 넘게 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마 돈이 문제가 아닐 것이다. 공고公告를 바로? 이쪽도 안 오면 끝이고, 와도 좀 문제다. 그냥 청탁이 깔끔할 수도 있겠다. 무슨 청탁을 말하는 건가? 가상의 누군가에게 청탁을 하는 식으로 해서... 이런 건 어떤가? 악마에게 청탁을 거는 것이다. 정말 그런 식이라면 유치할 거고, 골자가 그렇다는 얘기다. 사타닉한, 최악의 적들이 있고, 그들의 옆에 서서, 차분하게 최악의 주장을 펼쳐보는 것이다. 혐오와 살인, 자살과 전쟁, 강간과 방화 등의 이런저런 죄악을 합리화하고 변호하는 것이다. 교인의 옆에서 노인의 옆에서, 군인의 옆에서 선생의 옆에서, 남자 옆에서 여자 옆에서, 사장 옆에서 회장 옆에서... 악마보다야 나은 것을 고안해야 할 것이다. 이건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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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절에는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없어진다. 취미마저 쉬고 싶다. 그러고 보면 연말이 아닌가? 연말이라면 역시 송년회다. 토탈브레이크 송년회를 하고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눕거나 앉아서 하고 싶은 걸 하다가 알아서 밥 먹고 스스로 잠들며... 모이지도 않는다. 이건 곡물창고의 날과 함께 진행하면 될 것 같다. 다른 기획도 있다. 하나는 불의 송년회다. 원탁에 그냥 둘러 앉아 각자 가지고 온 초를 꺼내놓는 것이다. 다같이 켜도 좋고 두어 개만 켜도 좋다. 앞에 물, 좋은 술, 좋은 차, 그리고 컵과 잔을 두는 물의 송년회도 있다. 마음껏 마셔도 좋다. 뱃지와 돌멩이, 장신구, 주사위 따위를 늘어놓고 이야기하는 광물의 송년회, 말린 고기와 과일, 과자를 두고 영상물을 보는 생물-번개의 송년회, 향을 피우고 담배를 피우고 음악을 트는 공기의 송년회, 이 다섯 송년회를 다 함께 해서 지구별 송년회, 그리고 거기에 몇몇 외계 문물을 가져와 교류하는 것까지 더하면 코스모 송년회다. 곡물창고의 날로 시작해 월화수목금토 매일 저녁 60분씩 해 가지고 마지막 토탈브레이크까지 굿바이 코스모 송년주간으로 해도 되겠다. 쓰고 나니 벌써 이미 한 기분, 충만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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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아주 춥고, 나는 오두막을 갖고 싶다. 바깥의 일이 다 고통스런 나날들이다. 내 바람은 일단 오두막에 들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순 없다. 바구니 짜기 같은 소일을 하면 좋겠다. 손이 시렵지 않겠나? 발로 할 수 있는 일이면 좋겠다. 발도 그러나 시려울 것이다. 발을 집어넣을 수 있는 담요가 있어야 한다. 손도 집어넣고. 머리도 집어넣어야 한다. 외풍에 대한 방비가 철저히 이뤄진 오두막이고 그 방비는 내가 한 것이다. 무지개천 같은 것으로. 오두막 안에는 난로가 있고 연통이 있다. 난로는 켜지 않았다. 땔나무가 없기 때문에. 그래도 바깥보단 따뜻한 편이다. 웅크리고 있자니 바람 소리가 들린다. 어디서 통하는 바람인가? 바깥은 보이지 않는다. 다 가려놓았기 때문에. 오두막 어딘가에 쥐가 있는 것 같고 문간에는 총이 기대어져 있다. 그런 식이다. 당연히 그곳에서 송년회를 하고, 그 오두막을 떠나며, 그 오두막이 송년회만을 위한 오두막, 송년장이었음이 밝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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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반 위의 쥐잡이는 그사이 살을 더 찌운 것 같다. 딱 차게 들어가 앉은 택배박스는 역시 주운 것이다. 받는 이 칸에 유명한 가수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 가수가 근방에 산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혹시 하는 생각에 처분하지 못하고 뒀던 것이다. 혹시... 이사야는 그 속에서 눈을 감고 고개를 세운 채 미동도 없이, 뭔가를 깊고 그윽하게 생각하고 있는 눈치다. 그가 꾸고 있을, 반쯤은 추억이고 반쯤은 예언인 폭풍 같은 꿈을 상상해 본다. 최근 그가 창고 안에서 번개처럼 뛰어다니는 걸 자주 봤다. 쫓았던 것이 쥐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날이 추워지면서 하여튼 뭔가가 들어온 것이다. 매양 그러는 걸 보면 잡기에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젖은 깃발처럼 흔들리던 누런 꼬리가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다. 어린 시절 들었던, 고양이의 꼬리를 붙잡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 척추가 빠진다는 이야기. 그건 관리인의 손도끼를 만지다가 떠오른 것이다. 손때를 탄 자루가 딱 겨울 이사야의 꼬리만큼 도톰하다. 관리인은 뭐 한 십 몇 년 됐다고 했다. 이것으로 어제 나무를 해 왔다. 나무를 했다기엔 민망한 정도지만. 오늘 돌려주러 갔는데 관리인은 자리에 없었고, 대신 못 보던 포대가 있었다. 이사야를 위한 사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이제야 퍼뜩 든다. 떠들어 보진 않았다. 그 사료를 먹고 힘이 나서 그렇게 뭘 쫓아다닌 것이 아닌가? 그런 것은 이사야의 일이다. 마구 뛰어다닌 끝에 배불리 먹고, 불가에서 꿈꾸는 일. 그러고 보니 오늘이 2일이 아니라 1일이다. 그래서 관리인이 없나? 하지만 불은 이미 피웠다. 올해도 곧 끝이다.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