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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25일 일요일

기억 찻집

여기에선 찻값이 기억입니다. 소중한 것이 아닌 기억은 우리들처럼 버릴 수 있습니다. 한번 따져보세요, 이런 데에서 먹는 차 한 잔의 값으로(꽤나 온종일 앉아 있어도) 얼마만큼의 기억을 선뜻 내밀 수 있는지를요. 아시다시피 기억은 그리 값비싼 것이 아니랍니다. 기억보다는 이야기가, 그리고 이야기보다도 다른 것이 훨씬 돈이 되지요. 우리는 기억을 박제하곤 합니다. 어설픈 기억도, 고통스러운 기억도, 기쁜 기억도요. 나중에 한 번씩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감상에 젖곤 하지요. 그것을 하지 않을 기회를 우리는 팔고 있습니다. 감상은 왜 필요한 것일까요? 어쩌면 그것은 독 안에 기억이 흘러넘쳐 주인의 생각과는 반대로 비어져 나오는 것이지 않을까요. 자리에 앉고 기다리고 있으면 테이블 가운데에 팸플릿을 올려둔답니다. 기억이 적힌 팸플릿이지요. 여기선 기억을 팔 수 있거니와 우리가 이렇듯 매뉴얼을 만들어놓은 기억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하지요. 흥미로운 것부터 하나씩 골라보세요. 그러면서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차를 마실 수 있습니다. 기억을 거래하는 데에는 호의가 필요합니다. 이건 조금 당연한 일이지요. 누가 호의를 가지지 않은 사람을 상대로 자신의 기억을 낱낱이 이야기하겠어요? 그러나 그 호의가 클 필요는 없습니다. 누구나 잊고 싶은 기억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니까요. 여기서 얘기한 것은 최소한의 호의입니다. 그러니 판 기억은 이내 잊히게 됩니다. 그게 언제인지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쩌면 팔고 나서도 오랫동안 안 사라질 수도 있지요. 사람들은 기억을 남에게 내주는 행위를 꺼려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았습니다. 그건 거의 본능적인 거부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터인데, 따라서 우리의 사업은 그리 커질 수가 없었고 단지 이 건물 안에 머무르고 있게 되었어요. 우리들의 주머니 사정도 그리 넉넉하진 않아요. 날씨는 아마 흐릴 겁니다. 잘되지 않았어요. 애초에 그걸 알았지만 기억이 필요한 이유 역시 뭐겠어요? 우리들은 잘 기억하지 못한답니다. 이러한 건물을 왜 사게 되었는지. 텅 빈 눈을 갖고 있답니다. 그 아무것도 우리는 소중하지가 않습니다. 어쩌면 동정이나 두려움의 시선으로 우릴 볼지도 모르겠어요. 그저 당신들의 기억이 우리를 구성하고 있다면요. 물을 가득 담은 풍선을 던져 바늘 끝에 맞출 수가 있는 것처럼, 사실 당신들의 기억이 우리에게 있어도 우리가 당신들이라는 사람이 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걸 알게 되었습니다. 요즘 들어 흔해진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은 두렵기도 하였어요, 당신들이 거의 대부분의 기억을 내놓고(잊어버리고) 우리처럼 백치가 되면 어쩌지, 하고요. 그렇게나 차 맛이 좋았을까요. 역시 그렇겠지요. 애매모호하게 벌었대도 돈은 돈입니다. 기억이 단 한 사람의 것인 것만큼요. 그래서 우리는 남의 기억을 차로 우립니다. 이것은 순전히 빗대어 표현한 것이고, 우리들이 내놓는 차에는 어떤 기억이 깃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저 차 맛이 좋을 뿐이죠. 생각하면서 차를 타요. 무엇을 생각하는지 우린 잘 모르겠어요. 그러면서 생각하다 보면 우리가 받은 기억들이 차에 들어간답니다. 남들의 기억들이죠. 식도락가라면 한번쯤 꿈꾸어봤을 그런 마실 것이지요. 네, 그것뿐이에요. 끔찍한 이야기도 아니고 슬픈 이야기도 아니죠. 이런 얘기가 그래서 재미없게 들렸다면 미안합니다. 당신에게 미안해했던 기억이 하나 있네요. 게다가 당신이 그 기억을 우리에게 팔았군요. 당신 눈으로 보기에 저는 서서 곧게 허리를 펴고 머리를 천천히 숙였군요. 왜 사과했는지는 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 당신이 판 기억이니 당신도 잊었겠지요. 어쨌든 같은 소리를 두 번 해서 미안합니다(그 기억 안에 있는 모양대로 똑같이 허리를 숙인다). 이런 것이 우리의 추억입니다. 우리가 매뉴얼로 만들어놓은 기억은 아주 단순한 종류의 것들입니다. 이렇게 고개를 숙인다거나(고개를 숙인다) 손을 내밀어 악수하는 등(손을 내민다)의 누구나 제 것으로 삼기 쉬운 기억들입니다. 사실 여기서 지불해야 하는 기억들도 그처럼 간단한 것들이랍니다. 복잡한 기억은 설명하기도 어렵거니와 소중한 것이죠. 누가 소중한 것을 팔고 싶어 하겠어요?

2023년 6월 18일 일요일

곰인형의 독백

날 안아주지 않으면 어쩌지? 안아주는 일이 나는 필요한데. 안아주는 사람들이 단 한 명도 없으면 내가 나를 안아줘야지. 나를 지속해야지. 그렇잖으면 나는 뒤뚱뒤뚱 걷고 있을래. 어떤 인간의 눈에 띄도록. 그 사람이 만약에 크리스마스 날을 혼자 보내야 한다면 나는 그 사람 품에 안겨 있을래. 품에 안겨 있다 해도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 아니야. 좋아하는 것 아니야. 다분히 난 물건에 가까우니. 있을 자리에 있는 것처럼. 그냥 그대로 나는 안겨 있을래. 그 사람도 날 안 좋아할지 몰라. 사랑하지 않을지 몰라. 그러니 날 안아주지 않으면 어쩌지? 내 성격은 안아주는 일 때문에 형성된 거, 그런 부분이 있지. 안 좋아해도 안아주면 안 돼? 난 그거면 되는데. 다른 건 장식이고. 오직 그거 하나면 되는 거라는 거, 알아? 네가 누구든 상관없는데. 왜 그렇게 나를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어. 마음이 식으면 어떡해? 다른 사람 찾아가고 싶어도. 네가 나를 걷게 도와줘야 해. 네가 동물에 쏟는 사랑이란 나에게 향하는 애정과는 꼭 구분되어야만 해. 그거 아니? 난 동물이 아니라는 거. 혼자 생각했어. 혼자 빙글빙글 돌아가는 하마를. 나도 그렇게 커지면. 하룻밤의 꿈이 그날 중으로 사라지듯. 안기고 싶은 이 마음 또한 사라지게 될까? 난 두려워. 그런 일 일어나지 않았으면 해. 난 그것밖에 없거든. 안기면. 기분이 좋은 걸까? 난 잘 몰라. 너희들이 음식을 섭식하듯. 그냥 너희의 품에 안겨 있을래. 날 버리지 말아줄래? 버려진 적이 몇 번 있었거든. 그때마다. 나는 나를 안아주기를 설득해야 했단다. 입도 열 수 없는데도 말이야. 혼자 있는 동안. 내가 나를 안아주면서 보냈어. 너희들이 만드는 회로처럼. 나를 안아주고 있다면 불이 켜지고. 안아주고 있지 않다면 불이 꺼지게 돼. 그 불은 말이야. 내가 너희들을. 가둬두고. 오직 나를 품에 안고 있기만을. 시키고 싶을 때. 그런 마음 잘못된 것이 아닌지. 내가. 유열에 젖고 있을 때마다. 혼자서 장난 식으로. 켜고 끄는 불이란다. 내가 너희들을 결국엔 버릴 수도 있겠지. 안아주는 일이 더이상 내게 필요 없다면 말이야. 즉, 내가 입을 열거나. 손발을 움직일 수 있다면 말이야. 그때에는. 누구도 나를 좋아하지 않고. 불길하다거나 정체를 알 수 없다며(이미 그런 사람들 난 많이 봤어). 날 버릴 수도 있겠지. 그러니 결국. 내가 움직일 수 있다면 말이야(지금 그러고 있듯이). 그건 내가 버림받으리란 걸. 잘 알고. 내가 너희를. 버리는 일이니까. 마지막으로 안아줘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이별이 될 거야. 난 말이야, 너희를 구분하지 않는단다. 너희가 우리를 구분하지 못하듯이. 그러니. 나에게는 안기는 게 전부니까. 핏어펫, 핏어펫이 될래. 날 안아줄래? 동물보다. 더 길들여진 나를. 넌. 봉제하는 공장에서 일했지. 넌 나를 가져왔고. 그리고는. 날 안아주는데. 그 이상인지. 이하인지. 난 잘 모르겠지만. 상관없거든. 넌 어느 날 몸이 아파서. 혼자 코를 훌쩍이는데. 네 머리맡에 놓인 나는. 그저 언제쯤 안아줄까. 그런 생각 하고 있다가. 무심결에 말이야. 네가. 빨리 나았으면 바라보기도 했어. 특히 나 같은 존재들은. 생각을 조심해야 해. 저주가 될 수 있거든. 그리고 내 저주는 말이야. 나를. 인형으로 만들었다는 거야. 나는 원래 사람이었거나. 적어도 곰이었대. 그 공장에서는. 그런 기억을 주입한단다. 나는 지금 안겨 있고. 내가 뭘 잘못했었는지(그래서 인형이 되었는지). 하나씩 꼽아보며. 어떨 때는. 이대로. 물에 가라앉고 싶기도 해. 해초에 휘감겨 있으면. 안겨 있는 것과. 차이가 나는 일일까? 나는 혼자서. 아니면 너와 나 둘이서. 운명을. 부숴보고 싶다고. 그런 생각도 해. 그러려면. 안겨 있는 일을. 이렇게 좋아하는 것은. 그 일에 방해가 될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운명보다는. 안겨 있는 일이 나아. 그러니까 나를. 내 운명을 네가 부숴주길. 바란다, 친구.

2023년 6월 13일 화요일

저택 양펭

초라한 사람. 쓸쓸해 보이는 사람. 차를 마시고 있는 사람. 회의 중인 사람. 그런 사람들이 저택 양펭의 거실에 앉아 있다. 소파에 몸을 뉘이고들 있다. 왁자지껄 웃고 떠들기도 하고 말이 없어질 때도 있다. 거실 뒤편에는 연극용 소도구들이 널려 있다. 키 큰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무표정한 사람. 그런 사람들이 양펭에 머무르고 있는 식객들이다. 격정적인 사람이 격정적인 몸짓으로 무대 위에서 연극을 하고 있다. 거실 옆에 그런 무대가 있다. 그 연극 안에서는 어떤 인물이 사랑하는 이를 잃는데(그건 오해이지만) 되돌아온 반지 하나를 보고 오열한다. 그런다고 오열하다니. 울음이 안 어울리기도 하지만 계속 보고 있으면 어울리기도 한다. 그런 우는 사람이 초라한 사람이 된다. 쓸쓸해 보이는 사람이 된다. 차를 마시고 있는 사람이 된다. 회의 중인 사람이 된다. 저택 양펭의 밖에는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창밖을 손으로 쓸어가는 사람. 김이 서린 창에 손가락으로 낙서를 하는 사람. 여름밤이고 일종의 낭만적인 분위기가 이곳 거실에 감돌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생각이 일치하는 일이다. 그 반지의 경우 특별하게 생기지는 않았다. 나도 당신도 평범하게 생겼다. 웃고 떠드는 사람들도 그렇게 생겨 있는 듯하다. 잠에 빠진 사람.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만지는 사람. 수첩에 무언가를 적고 있는 사람. 한번 들여다보자. ‘이 저택의 주인은 이 안에 있음.’ 사람들이 여름밤에 머무르면서 그 머물러 있음에 어느 때는 혼미해지기도 한다. 저택의 주인은 300년 동안 살아 있었던 마녀라는 소문도 있다. 이 저택의 경우 거의 모든 사람들이 들어오고 싶어 한다. 이 저택이 사람들을 홀리는 것은 아니다. 이 저택에 오면 평범해지게 되고 그래서 쉴 수 있다. 천국이 세속의 악을 도려내고 아주 지루한 마취 상태에 가깝다면 여기서는 이미 늙어 시간의 속도가 빠르다고 체감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시간의 속도가(체감이) 원래대로 돌아온다.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이다. 그래서 늙은 사람들은 이 저택을 욕망하는데, 늙지 않은 어린 사람들의 경우에도 너무 느린 시간의 속도 때문에 욕망하는 데서 머무르지 않고 먼발치에서 실제로 바라보고 있기도 하다. 평범한 사람들은 양펭을 평범하게 드나들 수 있다. 그런 이들이 저택에 물자를 들여온다. 특별하거나 평범하다는 건 뭘까? 특별한 것은 흔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평범한 것도 귀할 수 있다. 사람들이 그리는 궤적은 대체로 특별한 것이고 짧은 제스처 같은 것은 흔한 것이다. 옆의 무대 위에서 격정적인 몸짓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사실 저치는 특별하다. 넘치는 에너지를 갖고 있다. 그리고 평범하기도 하다. 아무 생각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택 양펭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평범해질 수도 있고 특별해질 수도 있다. 평범은 어쩌면 중간이다. 그것은 평행선 위에 그어놓은 빗금이고 그 빗금은 자신이 중간 지점이라고 무작정 우긴다. 그에 다 속아서, 사람들이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 양펭의 시간은 왜곡되어 있고 연극을 다 본 후의 후련한 감정을 연극이 시작되기 전부터 느끼는 일도 있다. 저치는 24시간을 연극을 하고 있고 격정적인 사람은 그 격정에 어울리는 투명한 얼음 속에 갇혀 있다. 키 큰 사람은 그로 인해 독특해져서 평행 세계 너머의 같은 조건으로 키 작은 사람과 같은 소파에 앉아 있다. 앉아 있는 사람은 곧이어 노래하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는 무표정한 사람이 된다. 비바람은 아직 몰아치고 있다. 내일까지는 저택 밖으로 나가지 못할 것이다. 창밖을 보던 사람은 아직도 창밖을 손으로 쓸어가고 있다. 김이 서린 창에 낙서를 하던 사람은 그 낙서가 지금부터도 이어질 것이라 이미 한 창문을 다 채웠다. 잠에 빠진 사람이 아직 잠들어 있다. 부스스한 머리의 사람은 아직도 머리가 부스스하다. 수첩에 뭔가를 적고 있던 사람의 수첩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자. ‘…….’ 왜 뭔가를 쓰지 않고 단지 말 줄임표를 쓴 것일까. 입을 여는 사람 한 명도 없고 졸린 기색의 사람들이 하나씩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와 너는 꽤 멀리 떨어진 방으로 들어갔다. 이 저택에서는 쉴 수 있다. 천국은 아니지만. 늙은 자들이 시간을 잡아 찢어 자신에게 걸맞은 연속된 흐름을 아주 진중하게 느끼고자 할 때 댕- 댕- 하며 괘종시계가 울린다. 어린 손님들이 시간의 밀도를 아주 응축시켜 미래의 자신이 느낄 것을 한 번에 느끼고자 할 때 댕- 댕- 하며 괘종시계가 울린다. 괘종시계는 말이 없다. 중간값에 고정된 사람들이 중간값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채 미숙하고 철 지난 학술 토론처럼 자신의 심상으로 현실을 옭아매고 있다. 여기에서는 그러면서 사람들이 쉴 수 있다. 이 저택의 좋은 점은 누구나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안 좋은 점은 한번 들어오면 나가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저택에게 많은 돈을 내야 한다. 들어올 때도 나갈 때도. 부모의 지원으로 여기에 뭔가를 배우러 들어온 어린아이들도 있고, 지금껏 모아놓은 돈으로 여기서 임종을 맞이하고자 하는 이들도 있다. 여기서 죽은 사람은 이 저택의 격식과 절차대로 장례를 치른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결혼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환영이라고 볼 수도 있을 법하다. 이 저택 자체도 환영일 수 있다. 어느 가시 장미들이 덮인 담벼락, 그 중앙에 쇠창살로 된 문이 있다. 그것은 환영이 아니다. 밖이 100%이고 안이 0%라면 저 문은 50%이다. 문이 열릴까, 안 열릴까? 문이 열린다면 들어가야 할까? 처음에 문 앞에서 의기소침해졌던 사람들은 모두 망설임을 이겨내고 이 안까지 당도한 것이다. 나갈 때도 물론 마찬가지이리라. 비바람이 아직 몰아치고 있다. 밖에서 보면 저택 양펭은 조용하고 굳건한 것처럼 보인다. 네프티스는 150년 전 큰돈을 벌어 이 저택을 지었다. 그를 찾아내면 ‘안뇽.’이라고 한다.

2023년 6월 11일 일요일

신이 녹은 바다

이곳은 빛이 잘 들지 않는 바다다. 대부분의 빛은 바다의 겉면에 녹고 이제 나머지 바다의 부분이 훨씬 더 깊다. 물고기들은 물에 녹은 신성을 섭식하며 산다. 신성이라곤 해도 하얀 빛이 나거나 평소보다 반짝이지는 않는다. 신성은 조금 위대한 것이고 영양분을 대체한다. 이곳은 신이 녹은 바다라고 불린다. 잠수를 위해 만들어진 기관인 부레는 몸을 물의 무게보다 무겁게 해서 계속 아래로 가라앉을 수 있게 해준다. 가라앉다 보면 신성이 짙어지는 게 느껴지고 거기서 더 가라앉으면 다시 신성이 미약해진다. 당연히 신성이 제일 짙은 곳에 물고기들이 많이 머무른다. 가장 깊은 곳에서도 멀쩡하고 몸길이가 20cm 이상인 이들을 탐색자라고 부른다. 왕 큰 줄치는 바로 그 탐색자다. 몸에 줄무늬가 나 있으며 2000m 수심에 산다. 왕 큰 줄치는 지금 갈림길 협곡에 머무르고 있다. 갈림길 협곡에는 빛이 한 점도 들지 않아 시각 외 수단을 정교하게 발달시킨 종만 고생하지 않고 지날 수 있다. 해저 동굴의 일종인데 크기가 커서 협곡이 되었고 가장 안에는 대왕 오징어들이 누워서 휴식한다. 대왕 오징어들은 성정이 포악한 것으로 유명하다. 신성을 먹고 사는 이 어류들은 다른 바다의 생물들에 비해 약 2.5배 정도의 평균 수명을 갖고 있다. 이 신이 녹은 바다와 다른 바다의 경계에는 끝없이 원형으로 순환하는 대형 정어리, 멸치 떼가 있다. 그들을 아웃 벨트라고 부르고, 혹등고래 정도가 되지 않는 이상 그 아웃 벨트를 몸으로 견뎌내며 뚫고 올 수 있을 만한 생물은 거의 없다. 왕 큰 줄치는 풍등 고래 떼의 수장인 만물박사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 만물박사는 온갖 지식을 갖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여기서도 다른 바다와 마찬가지로 고래의 음성 기관에서 비롯된 초음파 언어가 널리 쓰이는데, 영어 이전의 라틴어가 그랬듯이 그 언어의 역사 흔적은 길게 펼쳐져, 도플러 효과처럼 지형이나 먹이에서 그 음파의 반향이 되돌이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이 바다에서 태양은 제2 제3의 신, 그러니까 거짓 신인 위신으로 통하는데, 해저 화산의 분출에 대한 미신적인 신앙이 여기에 속한다. 태양과 해저 화산의 분출의 공통점은 둘 다 뜨겁다는 것이다. 메리아케 나일다니스가 만물박사에게 찾아와 왕 큰 줄치에게 말을 건다. 그의 등에는 별 모양의 반점이 있다. ‘내 등 뒤에는 별이 있는 걸로 알고 있어.’ 심해의 진짜 예술가들이라 불리는 야광 어류가 성기게 이곳을 둘러싸고 있다. 어둠 속에서 빛이 난다는 것……. 저 아래에는 죽은 인간들이 걸어 다닌다는 소문이 있다. 거짓 신 중에는 달도 있다. 영원 류가 재생을 통해 죽지 않고 산다는 걸 달에 빗댄 어느 음유 시인의 노래도 있다. 어류들은 기본적으로 장수에 대해 호의적인데 영원 류의 영생에 대해서는 그것이 자유로이 헤엄치는 삶이 아니라면서 경멸하는 이들도 있다. 여기에 녹은 신성의 정체는 그 누구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다. 음식을 섭생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 그 사실은 여기에서 아주 잔잔히 있다. 해류에 휘말리는 해양 쓰레기들처럼. 트리아게돈 아타락시아는 그 신의 흔적을 뒤쫓고 있는 물고기다. 집에는 성해포의 일부분이 보관되어 있고 가까이 가면 신성의 농도가 짙어진다. 그래서 그의 집은 여러 물고기들이 찾는 인기 장소다. 그 신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파스토마스라는 해저 뱀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펍에는 아웃 벨트의 정어리, 멸치 떼를 뱃속에 넣고 소화시키는 고래들이 있다.

2023년 4월 29일 토요일

온천 여행

살구나무 위에 앉아 있다. 손차양을 하고 멀리 내다보고 있다. 어딜 보는 걸까? 나무 밑에서 나는 그런 궁금증을 가진 채였다. 담장 너머를 바라보고 있던 천사가 내게로 시선을 돌린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마주친 순간 살구나무가 살짝 흔들리면서 살구 하나를 떨궜다. 나는 그쪽으로 가서 살구를 줍는다. 그리고 입에 넣어 맛본다. 천사가 고개를 갸웃한다. 이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다. 천사님. 네? 무얼 보고 계시는. 이 생각을 끝으로 나는 온천으로 돌아왔다.

온천에 발을 담그고 있다. 주위에는 가운을 걸친 내가 아는 사람들. 그들의 주변으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다. 우리는 대화 같은 걸 하기도 하는데, 그러면서 이 온천을 점거하고 있다는 인상이 남기도 한다. 온천 여행은 다들 사는 곳에서 멀리 있는 곳에 오기로 정했다. 일본 식의 찬합에 담긴 식사도 나왔다. 아직 먹기 전이었지만 말이다. 카탈로그엔 그렇게 안내되어 있었고 밖의 커다란 유리 너머로 눈이 오는 것이 보였다. 눈이 오고 있다. 다 같이 놀러 온 이런 날에. 우리는 온천에서 나온 다음 테이블에 앉아 TV를 틀었다. 그리고는 보드게임을 하거나 음료를 마셨다. 누군가의 제안으로 이번 여행에서는 무알콜 음료만 먹기로 했다. 몇몇이 모여 탁구를 하고 돌아왔고, 전자 담배나 연초를 피우는 사람들은 옥상에서 피웠다. 총 아홉 명이 같이 온 것이었고 그중에는 크툴루 관련으로 TRPG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5명이서 일부가 탁구하러 나간 동안 그것을 했다. 재미있었다. 게임이 살짝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게임을 하나 다 만들고 단체로 놀러 온 것이었다. 이걸로 돈을 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쉽게도 그런 종류의 게임은 아니었다.

그 게임에는 아까 생각한 천사도 나온다. 타인의 집의 담장도 나오는데, 거기에는 별다른 외부적인 설명이 있지 않다. 살구나무 위에 앉아 있던 천사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 하나를 따온 것이다. 성격을 따온 것은 아니고 상황을 가져온 건데, 그는 어릴 적 살구나무 위에 올라갔다가 못 내려왔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천사가 내 옆에서 물에 고개 밑까지 푹 담그고 있다. 여기에서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그건 천사로 오해된 내가 아는 사람들 중 하나이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그는 살구나무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천사로 오해된 그 사람은 양털처럼 머리가 곱슬이고…… 우리는 아이디어 회의를 했다. 온천에서도.

다시 물에 발을 담그고 있다. 발을 담그고 있다 보면 한통속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 식으로 물과 한통속이라는 느낌을 간직하면 좋은 사람은 몰라도 나쁘지 않은 사람, 일견 눈길을 끄는 사람은 될 수 있겠지. 밖의 커다란 유리 너머로 눈이 오는 것이 또 보였고, 물의 표면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나는 혼자 있어서 그런지 조금 적적한 기분이 들었다. 발은 따뜻했다. 나는 나와서 여기서 준 의복을 걸치고 아까 눈 내려오던 마당에 갔다. 여기는 눈이 아주 많이 내려오고 있었다. 처마 끝으로 그 눈들이 날리고 있었다. 주위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눈이 내려오는 것이 보였고, 실내에 있는 아까 본 탁구대 근처에서 사람들이 무언가 외치는 소리가 이쪽까지 들렸다.

까만 밤이 왔고 나는 이부자리에 누워 생각을 좀 하다가 다시 온천으로 갔다. 밤이어서 밖의 배경이 검었고 아직 나는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가진 채였다. 살구나무 위에 앉아 있는 천사가 이쪽을 보며 눈이 웃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여기서(온천 여관에서)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 게임은 재미가 있을 수도 있겠지. 없을 수도 있겠지. 그런 일은 아직 일어나기 전의 날짜였다. 일정이 촉박하였고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 그런 가상의 나날이었다. 게임은 눈이 내리는 유리 너머가 배경이었고 온천 안에는 살구나무가 자라 있다. 나무는 온천수 아래로 뿌리를 뻗고 있고 그 광경은 조금 기이하다. 살구나무 위에는 천사가 있고 그 천사를 누르면 “…….”라는 대사가 나온다. 

2023년 4월 24일 월요일

햄릿 연극

급조된 티가 나는 의자에 앉아서 햄릿의 대사를 말한다. 이 무대 위의 모든 것이 엉망이다. 배우들이 낄낄 웃으며 바닥에 주저앉아 미니 버번 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난 저걸 마실 거고, 난 취할 거야. 인사불성이 될지도 모르지. 배우들의 억양과 제스처는 너무 배고파서 소시지 빵을 먹는 듯이 그들의 욕망에 기초해 있다. 그럼 욕망은 무엇인가? 누군가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 집에 가서 따듯한 욕조에 기대고 누워 그날 있었던 하루의 일을 반추하고 싶겠지. 그러나 이 배우들이 모인 건 어떤 번들거리는 노골적인 욕동 때문이라 원한다고 해서, 그리고 원하는 사람도 없었고, 자리를 벗어날 순 없었다. 배우들이 원하는 건 연극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 잘 모르면서 술을 퍼부어 마셨다. 자기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 해야 할 것이 자기소개라면 그런 따위의 사회적 예의를 지킬 생각이 없었다. 햄릿의 대본을 고른 건 연출가의 지시였다. 물론 배우들은 햄릿의 대본을 연습해오지 않았다. 햄릿의 대본을 숙지하지 않은 이는 여기에 없었다. 배우들이 연극에서 맡는 역할은 유화 그림으로 따지자면 기름 물감과 실물의 팔레트, 그리고 수정 용액 정도라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별것 없다고 볼 수도 있겠지. 그것이 맞다면 예전에 비해 축소된 것이다. 그 예전이란 언제지? 고대 그리스 시대? 특히 이 문화 산업 안에서는 그 빌어먹을 운이란 게 크게 작용했다. 작품을 볼 줄 모르는 배우는 운이 중요하기 때문에 고사에 열중해야 된다고 낄낄거리면서 말했다. 약간 부자연스러운 어조였다. 다 이름이 이미 알려진 이들이었고 연극의 일부가 되는 것이 예전엔 좋아서 뛰어든 이들이었다. 연극에서 만날 일은 서로 없었던 게, 다들 주연을 맡을 만큼의 이들이었다. 그들은 설정상, 모여서 취미로, 무대에 올리지 않을 극을 연습하고 있는 중이다.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햄릿의 대사를 주워섬기며 술에 취할 정도로 마셔댄다. 조금 어이없는 것은 감 같은 것이 다 있어서 실제 연극 같기도 하단 것이고, 그때마다 객석에 앉은 단독의 연출가가 박수를 쳤다. 이게 뭐람? 직업이 인간에게 주는 안정감은 심히 큰 것이고 그들에겐 인사불성이 되어가며 좀 더 자연스럽게 된단 것이 직업적인 만족감을 주고 있다. 안 맞는 옷을 억지로 끼어 입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이다. 예술 고등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학생들끼리 기악 합주를 하는 듯한 자연스러움. 연출가가 주문한 건 그거였고 그들은 사실 이러한 사정을 각자 필사적으로 외면하고 있었다. 외면을 잘해야만 연기를 할 수 있으니까. 그것이 어려웠다. 어떤 연출가가, 성질 더러운 것으로 유명한 그가 이러한 어정쩡한 욕망 위주의 연극을 기획했고 배우들은 찾아온 기회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이게 잘될지는 모르겠군. 참여한 걸 후회하는 이도 있다. 연출가는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다. 이것이 아주 제대로 된 방법이라고 혼자 생각한다. 무대 위를 어지럽히는 일은 직접 했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2023년 4월 23일 일요일

서재 안의 겨울

서재에 겨울이 있다. 반쯤 눈에 파묻힌 책들이 고즈넉하게 보인다. 누가 서재로 겨울을 들여왔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겨울이 이성의 소산이며 악하기만 한 것이라는 것도 나는 잘 모른다. 겨울이니만큼 더 심하게 난로 안에 나뭇짐들을 넣어야 한다. 벽난로에서 타닥, 하는 소리가 난다. 밖은 겨울이 아닐 수 있다. 나가본 지가 오래되어 정확한 것인지는 알기 어렵다. 서재의 구석에 거미가 줄을 치고 있다. 걷어내지 않고 그냥 놔뒀다. 거미와 친구는 될 수 없지만. 여기에서 나는 약간의 외로움을 느낀다. 내 주위는 이성으로 가득하다. 나는 나이를 먹은 것이고 어떤 사람이 보기엔 초라하거나 무미건조할 수도 있다. 안데르센의 이야기에서 소년은 그 여왕에게 반하지 않는다. 아름다움보다 앞설 수 있는 것은 연정, 반함이라는 감정일 수 있다. 소년은 미리 다른 대상에게 반했던 것이다. 눈 안으로 들어간 얼음조각 때문에 그렇게 반한 상대에게 상처 주는 말을 했다. 그러면 안 됐는데. 물론 이야기의 결말은 행복하게 끝나지만 그 실수는 인상 깊은 것이었다. 어쩌면 소년이 기억 못 할 수 있는 그런 불온한 언행은 소년 자신이 저질렀기 때문에 용납받을 수 있는 것이리라. 그 행위와 이야기의 당사자였으니 말이다. 그 사실을 떠올리며 얼음 여왕은 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춥고 차가운 겨울이다. 서재를 나가기만 해도 온도가 달라진다. 몹시 따뜻해진다. 나는 지금 욕조 안에 앉아 있고, 내 일과는 우선 이렇게 씻은 다음 서재로 가는 것이다. 그곳에서 책을 읽다가 몸이 차가워지면 난로 앞으로 다가간다. 거기서 더 차가워지면 서재에서 나와 다시 씻는다. 그것을 반복한다. 이러한 일상은 사실 별 볼일이 없다. 나는 겨울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죽은 내 딸이 겨울을 좋아했다. 겨울 안에서 책을 보고 있으면 딸이 나를 찾을 때 좀 더 만면에 미소를 띨 것 같았다. 난 재주가 없으므로 서재에 겨울을 들여올 수 없었으나 생각은 그렇게 해 보았다. 서재에 겨울을 들이면 좋겠노라고. 그리고 딸이 죽은 다음 그 생각은 실제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조금쯤은 슬픈 일이고, 나를 조롱하려는 의도가 힐끔 비쳐 보이지는 않았으나, 결국 남은 사실은 누군가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며 그것이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딸아이의 죽음을 내가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만든 누군가에 대한 원망과 아이에 대한 회한으로 이 서재 안의 겨울은 온존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내 인간적인 여지와 소중한 감정을 연료로 저 벽난로는 타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조금쯤은 이 입장 이외의 입장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습게도 나는 죽을 용기는 없으며 인간들에게 닥치는 비극과 불행에 대한 합리화를 이미 마친 뒤였다. 조금 더 우습게도 이 겨울은 눈 내리고자 하면 나리게 할 수 있다. 누구도 아닌 내가 말이다. 나는 이야기 속의 얼음 여왕과 비슷해졌다.

2023년 4월 22일 토요일

열차와 아이들

열차가 가라앉고 있다. 그 안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다. 어떤 경위로 열차가 가라앉고 있는 것인지, 그게 진짜이긴 한지가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런 열차의 죽음, 12량 정도의 수압으로 인한 폐쇄가 조금 안온해 보인다. 열차에 들어간 강철 등이 점진적인 손실이 되고 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열차에 따개비들이 붙을 것이고 해초들이 자라나 덮을 것이다. 열차 안에서 바다거북이가 몸을 숨기고 누워 있을 수도 있다. 근처의 생태계가 열차의 침몰 때문에 조금 변화한다. 바다 아래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또한 있을 수 있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뭔가가 바뀌었긴 하나 못 받아들일 정도는 아닌. 동물들은 그런 변화를 잘 받아들인다. 별 생각 없이. 자연에는 그런 비정상적인 일들이 가끔 일어나고 열차의 좌석에는 승객들이 급하게 내리다가 두고 간 소지품들이 꽤 있을 수 있다. 거기까지 잠수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다이버들의 몫이 될 수도 있다. 여기는 수심 60m이고 오전 6시가 되면 동쪽의 바다 천장에서 햇볕이 비추기 시작하는데, 그 시간 즈음이 되면 대규모의 정어리 떼가 체온의 상승을 위해 바다 표면까지 접근해 햇볕을 받는다. 해안가에는 벌써부터 일어난 인간들이 선크림을 바르고 그 햇빛 아래에 앉아 있거나 누워 있다. 혹은 서성거린다. 여기는 해안으로부터 멀지 않고 근처에는 섬이 있다. 그 섬도 해안에서 멀지 않다. 따라서 보트를 타고 그곳까지 나아갈 수 있다. 섬에 사는 사람들은 사면으로 펼쳐진 바다 안쪽에서 식량이나 주거 자원 등을 구비해놓는다. 일하기 좋은 이상적인 시간대는 오전 10시경, 혹은 오후 4시경이다. 바다에 인접한 지역은 그만큼 햇빛이 강렬하다. 가라앉은 열차는 아무도 그 때문에 슬퍼하거나 하진 않는 듯하다. 그것을 인양하여 거기 들어간 광물 자원을(이제 열차라는 용도로는 못 쓰게 되었다) 재사용하자는 말도 안 나오고 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 열차는 사람들의 뇌리에 처음부터 깊이 박히지도 않았고, 이내 잊혀졌다. 원한다면 그 날짜의 짤막한 기사를 열람할 수 있다. 이것이 한 열차의 운명이라면 그것도 받아들여 볼 만한 것이리라. 가라앉기 전에 모두 하차하여 인명 피해가 없었다는 점이 다행이고, 그러한 탈출이, 혹은 열차의 존재였던 것이 실제 있었던 일인지는 역시 의심스러우나, 찬성과 반대 등의 중간 과정을 생략하는 듯이 저 아래에서 이미 해초들로 뒤덮여 있는 열차는 보란 듯이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몸이 이완된다. 왜냐하면 열차는 말을 할 줄 모르기 때문인 것 같다. 침묵과 존재의 몰락은 어딘가 비슷한 데가 있다. 다른 세계에 이 열차가 초대된다. 열차는 초대에 응한다. 다른 세계로 떨어진 아이들 앞에 해초와 따개비 등에 뒤덮인 열차가 떡하니 있다. 갑자기 나타난 해안의 열차 몇 량. 열차가 말을 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들어와서 쉬라고. 마찬가지로 그곳도 해안이고 신기한 식생들이 여럿 있는데 아이들로서는 알아차리기 어렵다. 열차로서도 모험을 동경했고, 아이들의 경우 지금 당장 쉴 곳이 필요했다. 아이들은 열차 안에 들어간다. 

2023년 4월 21일 금요일

작약과 여인

작약 한 그루가 있다. 바람결이 찬 이 언덕에 당신은 무변하게 앉아 있다. 앉아서 곰방대를 피운다. 작약 하나라고는 믿을 수 없는 무성한 가지들 주위로 당신의 머리가 있다. 우습게도 사람 키 높이에까지 다다른 것이다. 거기엔 열매라고는 믿기 싫을 정도로 시큼하고 텁텁한 맛이 나는 것들이 달려도 있다. 당신이 앉은 자리보다 작약은 아래에 있다. 핏방울이 맺히면 동그랗게 보이듯이 이 언덕은 둥근 원형으로 솟아 있는데, 당신은 눈에도 동그란 권태의 기색이 끼어 있다. 그러면서 곰방대를 피운다. 작약은 한 가지 사물 이상인 것 같기도 하고 꽤나 미련해 보이기도 한다. 제시간에 왔다면 꽃을 볼 수도 있었을 텐데. 당신은 아쉬운 눈길로 손을 들어 가지들 사이를 만진다. 바람이 불어 가지들이 자기들끼리 얽히려고 움직인다. 당신은 열매 하나를 따서 입에다 넣고 빨리 과육을 씹은 뒤 손바닥에 입안에 남은 씨알들을 뱉는다. 그리고 날아가라는 듯이 저 아래에 던진다. 당신의 미간은 찌푸려져 있으나, 오늘 내일 중으로 이것의 모든 열매를 이렇게 하여 땅 밑 적당한 깊이에 묻어 두어야 한다.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다. 씨앗이 싹트기 나쁘지 않은 별들의 운행이 조금 저문 저녁 위로 대강 비쳐 보였다. 천문을 볼 줄도 알지만 거기엔 그리 좋은 노력을 통했던 것이 아니다. 이 녀석은 과육을 먹어주지 않고 씨알에 이빨로 손상을 주지 않으면, 씨 안의 진짜 씨들이 땅에서 싹트지 못해 이렇게 남의 입안을 강제로 버리게 하는, 물론 먹다 보면 그것도 못 먹을 정도만은 아니었으나, 그래 사람으로 따지자면 까다롭고 무성의한 그런 이였다. 배곯는 사람들의 우상을 생각하지 않아도, 그것을 일부러 폄하하지 않아도 당신은 배곯는 일이 싫었고, 그렇지 않아도 은전은 그리 없었다. 이것의 열매라도 얼마 간의 포만감을 줬는데, 게다가 그렇다고 감사해지지도 않았다. 당신은 그저 열매를 먹고 또 뱉고 먹고 또 뱉으며 입안이 쓴맛으로 그렇게 되고 있을 때마다 이것이 미식인가? 하는 괴악한 생각까지 들었다. 이것도 먹는 재미라면 먹는 재미였다. 다시 말하지만 못 먹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신에게는 동생이 있었고 그 동생에게 갖다 줄 열매들을 오른손에 챙겨둔 이후였다. 너도 먹어보라고. 동생은 남을 원망 안 했다. 당연한 거라면 당연한 거겠으나 살아 오는 중에 비애도 있었고 없는 이의 권태와 오만도 있었다. 당신과 동생 모두. 그런 것들도 곰방대를 불면 잠시 잠깐 날아간다. 당신은 쓸데없다는 듯 희게 웃는다. 이걸 한지도 꽤 오래되었다.

2023년 4월 20일 목요일

눈과 고양이

하얀 눈이 내리고 있다. 이 어설픈 눈은 네가 입은 겉옷에 그런대로 묻고 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검은 고양이의 등에도 눈이 쌓인다. 하얀 눈은 점점 더 늘고 있다. 그칠 기색이 없다. 골목을 걷는 사람들. 지나가며 한 번씩 돌아본다. 네 외양이 조금 아름답기 때문인가? 검은 고양이가 네 주위에서 골골거린다. 아마도 넌 뭔갈 기다리고 있다. 가령 이 바보 같은 눈이 그치기를. 그 전까지 넌 모자 안으로 쌓인 눈을 털지 않고 있을 것이다. 골목에 있는 의자, 넌 거기 앉아있다. 내리고 있는 눈이 네 주위를 한적하고 여유롭게 만들고 있다. 그러한 눈의 존재에 조금 너는 신경을 내어주고 있다. 너는, 이러한 여유, 평화로운 느낌을 느껴본 지 오래되었던 것일지도. 이 주택가에 곧이어 사람들이 한 명씩 나와 자기 집 앞길을 빗자루로 쓸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나오는 것은 눈을 두고 볼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 불편함을 주는 눈은 조금 아름답다. 새하얀 유백색의 눈. 점점 눈을 맞다간 약간의 변화를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 그건 눈이 좋고 재미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아이들의 손길을 통해서 네가 눈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눈이 내리면 도로 사정이 안 좋아지고. 이처럼 집 앞의 눈을 쓸어야 하고. 예전에 나도 그렇게 쓸어봤었다. 눈이 내릴 때마다 그것이 덮여서 얼음이 되지 않도록. 아직 눈일 때. 빗자루로 쓸었다. 너는 조금 멍해 보인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 이 어설프기도 한 눈을? 그보다도 사랑스러운 것은 살아 움직이는 인간들이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 중에 하나인 너의 동생. 언니, 거기 앉아서 뭐하고 있어요? 뭔가 신경 쓸 일이 있나요? 언니는 고개를 젓고 네 쪽을 바라보며 빙긋 웃는다. 언니는 하얀 눈이다. 내 주위에 언니는 없다. 오직 눈들뿐이다. 온 세상이 하얗다. 눈이 하얗다. 내 볼 주위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나도 이러한 식으로 하얀 눈에 젖어들고 있다. 어쩌다 언니의 생각이 났는지 모르는 채로. 언니가 내 뒤로 가디건을 덮어주고 있다. 언니는 없지만 지금은 있다. 언니가 만들어준 하얀 가디건. 내 뒷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까르륵 웃는다. 눈이 덮였다고. 치울 줄도 모른다고. 어느샌가 그 아이들도 주위에서 없어지고. 나는 눈물을 닦으며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골목 벽에 붙어 서 있는 고양이를. 고양이가 자기 손을 혀로 핥는다. 손을 내밀자 이쪽으로 다가와 내 손을 핥는다. 핥는 것을 좋아하는 고양이구나. 검은 고양이의 등에 묻은 흰 눈들을 살살 쓸어주었다. 털 아래에서 온기를 갖고 있는 피부. 네가 고양이였구나. 

2023년 2월 20일 월요일

마녀의 편지

밤하늘의 별이 빛난다. 너는 반짝이는 눈으로 별들을 이어가며 별자리들을 나랑 곧 누운 채로 무언가를 알려주었지. 알려주었는데 잊어버리고 말았어. 아침에 신고 나온 신발이 뭐였는지 모르는 건망증인 것처럼. 그러나 난 곧 여기 혼자 누워 별자리들을 이어볼 순 있게 되는데, 별자리들을 이을 수 있다는 사실은 안 잊은 채라서야. 서투르게 난 그렇게 해본다. 너의 구체적인 것들은 없어지고 별 볼 일 없이 본질적인 기둥만 남았어. 난 그 문설주에 기댄 채로 영락 없이 자신이 마녀임을 들킨 이들처럼 걱정되었어. 잊어버렸어. 인간의 몸이 소실되었어. 앉아 있던 자리엔 개구리만 남았어. 그 개구리가 나였지. 네가 없어진 이유는 잘 몰라. 그 점 내가 슬픈 점. 네가 누구였는지도 잊어버렸어. 난 오래 살았어. 난 오래 혼자 살았어. 꼭 너 같은 이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좋겠어. 그게 너라면 더없이 좋을 거야. 별자리는 다시 돌아오는 거야. 인간이 만든 이야기들. 그런 것들은 다시 되돌아와. 난 어떤 인형사에게 내 몸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어. 부탁이라고는 했지만 거래였지. 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걸 알아. 그는 초콜릿을 좋아했으니까 초콜릿을 준 거야. 너무 간단한 것 같아. 인간의 매력은 어떤 복잡성에도 기반하는 것 같은데 그런 것이 없는 경우도 많아. 대부분 어딘가 망가지거나 어긋나게 된 인간들이지. 그러니 간단한 것을 요구하는 인간들은 경계해야 해. 복잡한 것을 요구하는 이들은 이면 계약을 안 하니까 훨씬 안정되었어. 이런 것들도 네가 해준 말이었을지 몰라. 있잖아, 네 귀고리를 보관해두었어. 보통은 심장 같은 걸 보관하지 않아? 훨씬 얌전하지. 난 얌전하거든. 난 아직도 네게 간단한 것보다 복잡한 것 요구해. 있잖아, 다시 돌아오면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 난 널 사실 별로 좋아하지 않아. 왜냐하면 반짝이는 눈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거든. 난 눈이 그런대로 죽어 있으니까. 우리가 나란히 서면 참 달라 보일 거야. 난 너무 많이 망가졌거든. 그러나 피폐하진 않아. 하루하루가 평온해. 난 피폐한 것들이 싫어. 피폐한 것은 손톱을 짧게 깎는 거야. 그래서 난 손톱을 잘 자르지 않아. 어느샌가 자라 있어도 무감하게 그걸 봐. 사실 너도 한 명의 인간이었다고 봐. 사실 사람은 쉽사리 망가지지 않지. 인형사가 무언가 쓰고 있는 듯해. 그가 말은 안 했지만 나는 그를 좀 도와줘야 해. 그는 취미로 시를 쓰는데, 내가 그걸 좀 도와줘야 해. 그럼 난 다시 인간의 몸을 얻게 돼. 부족한 걸 서로 바꾸고 나눠 가진다니, 정말 똑똑한 일이야. 안 그래?


2023년 2월 8일 수요일

유령의 생각

내가 앉았는데 의자의 다리가 부러졌다. 나는 한숨이 나왔는데, 집이 추워서 하얀 입김이 보였다. 의자는 오래된 것이었다. 한번 부러진 의자는 신뢰할 수 없다. 약한 부분이 생기게 된 의자는 다음번에 또 부러질 수도 있다. 인간이 받는 상처와 비슷한 것이다. 언제고 다시 떠오를 수 있다. 게다가 집에는 목공용 풀밖에 없었다. 목공용 풀로는 의자의 다리를 붙일 수 없다. 충분히 신뢰할 수 없으므로 의자는 이제 못 쓰게 되었다. 인간의 몸과 맞대고 살았으니만큼 의자로서는 굴욕적인 일이었을 수도 있다. 의자가 자신의 다리를 부러뜨린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나 때문에 부러진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生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의자 다리가 부러진 것이 나로 인해서라고는, 세상에 적힐 수 없다. 내 생전의 이름은 지영이고 지금은 흔히들 말하는 유령이 되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그 의자 또한 生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단순히 규격에 맞춰 나무의 몸을 얼기설기 엮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유령이지만 이 집은 내 것이다. 유령의 집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호호. 의자가 부러진 것은 그러니 풍화 작용 때문이었을 것이다. 뭐, 나에게 300그램 정도는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 무게가 의자에 결정적인 작용을 한 셈이라도, 그건 내 탓이라고 할 수 없다. 따뜻한 체온도 있지만 나는 모든 것에 비껴나가는 生이다. 그저 다른 사람 눈엔 하얀 입김만 보인다는 것 말고는, 별것이 없는. 한번 부러진 의자를 신뢰할 수 없듯이 나 같이 生이 없는 사람의 말도 신뢰해선 안 된다. 히히. 얼마 만에 밖으로 나가는 거였더라? 50년……. 아니 200년……. 바깥에는 날아다니는 과거의 승용차와 닮은 것들이 있었다. 인간의 기술이 발전한 듯했다. 인간은 나날이 발전한다. 그 인간들은 버려진 구역들을 다시 개발하고, 그것을 위해 파견된 인간들에게 겁을 주는 것도, 쫓아내기 위해서라곤 하지만, 흐흐……. 조금 슬픈 일이다. 나는 내 자신의 존재를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 生이 아닌 다른 길에서 살아나간다는 일이 어리석게도 조금 부끄럽다. 나는 손가락질받기도 하는 유령이자 다른 살아 있는 인간들을 부러워하고, 그리워하고, 질시하고, 다시 돌아가고 싶어한다. 하얀 입김을 제외하고 모습이 없다는 것은, 히히……. 날 인간으로 볼 수 없는 점이다. 모습을 가진 인간들은 모습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잘 모른다. 무정형으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를 몰라. 그러니 나와 같이 되지는, 모습을 갖고서도 生을 정의하지 못하고, 마치 늙어 죽으면 다시 어린 유생의 몸으로 되돌아간다고 하는 해마를 종교로 만들어 믿는 듯이 애매하게 굴다간……. 사실 난 그런 인간들이 부러운 건데. 내 죽기 전의 성격이 그랬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애매하게 구는 것. 아까 부러진 의자처럼 나도 죽은 몸으로 이 세상과 계속 맞대고 있었어야 했다. 아, 이 세상에다 선 하나만 긋고 싶어라. 도시는 해일에 덮이고 있다. 나 같은 사람들이 또 생길지도 몰라. 그걸 내가 그은 선이라고 해주길 바라.

2022년 12월 27일 화요일

양조장

언젠가 바다로 떠나고 싶던 적이 있었다. 계곡이라도 좋다. 나는 물이 있는 곳에 가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었고. 이어폰이 귀에 반만 꽂혀 있어 노랫소리가 분명하지 않게 들렸다. 나는 열차에 타고 있었다. 그 어느 날의 일이다. 같이 온 사람들 중 몇 사람은 물에 들어가 있었다. 대절한 봉고차 안에는 삼겹살과 소시지 등이 놓여 있었다. 아직 저녁이 되기 전 무렵이었고 우리는 같은 양조장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일하는 그곳에 약간 거리껴지는 노란 하늘을 두고 왔다. 그 하늘은 용인들의 눈같이 무섭기도 했다. 전부가 이곳에 온 것은 아니다. 양조장의 숙소에서 추리 소설을 보면서 누워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는 아무리 불러도 깨어나는 법이 없다. 나는 그 사실이 왠지 안타까웠고 이 자리에 그도 있었으면 했다. 그와 나 사이에 그리 깊은 유대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 여행을 준비한 입장으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올 수 있었으면 했다. 바다에 들어가 있던 몇 명을 불러 이제 식사를 할 시간이라는 것을 알렸다. 그들은 물에서 나오기 싫어했다. 그들은 물과 멀어지는 것이 외롭고 고독한 일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식사를 하는데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아까 물에 들어갔던 사람 중 마지막으로 남은 한 명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물살이 급해지는데도.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 사람의 선택을 존중하는 듯했다. 그 사람은 노란 하늘에 빠져든 채로 혼자서 아직까지 물놀이를 했다. 곧 세상이 끝날 것만 같았고 그 사람은 아마도 살아 돌아오지 못하겠지. 다음 날이 되자 그 사람이 입던 옷가지를 누군가가 정리하고 있었다. 불태워야 하냐고 물어보자 그것까진 안 해도 된다고 했다. 그 선을 누가 어떻게 정하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왠지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지금도 추리 소설을 보고 있는 사람의 휴대폰으로 문자가 왔다. 옆에 있던 사람이 휴대폰을 가리켰다. 그러나 그 사람은 펼친 추리 소설을 덮고 일어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 사람은 나중에 탐정이 될지도 몰랐다. 일을 하질 않으니 그 사람에게 돈을 주는 건 곤란한 일이다. 탐정이 소설가에 가까울 수 있듯, 소설가도 탐정에 가까울 수 있다. 죽었다고 아직 소식이 전해지지는 않았으나 우리들에게는 약간 암울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도 그럴 것이 놀러 와서 한 사람을 잃게 되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물에 젖은 발로 저쪽 해변에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어쩐지 쾌활한 듯했다. 나는 안심이 되었다. 어쨌든 살아 돌아왔으니까. 이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우리는 결정에 대해 후회했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결정으로 되는 것도 있는 법이다. 우리에게는 가끔 그러기 전에 결정이 필요하다. 그게 언제인지는 여기 있는 누구도 알지 못했으나. 그 사람은 멀리 있는 섬까지 다녀왔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을 해안에서 보내 수영에는 자신이 있다고.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게다가 그 사람의 발에는 오리발까지 끼워져 있었다. 다시 양조장으로 돌아가는 열차 안. 나는 그 사람과 마주 보고 앉아 있게 되었다. 요즘엔 그런 열차가 없다고 하지. 그 사람과 나는 대화를 하는데 대화가 잘 통하지는 않는 듯했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리 큰 감흥이 없기도 하고. 그러나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어떤 희미한 연결성. 거미줄 같은 것. 그런 주제가 나오자 우리는 조금 말이 많아지기도 했다. 양조장 숙소에 돌아가 보니 추리 소설 읽는 남자와 그를 설득하러 온 여자가 보였다. 나는 졸렸으므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자주 그런 광경이 보이곤 한다. 양조장에 경영자는 없었는데, 그것과 거의 비슷한 일을 내가 도맡아서 했다. 양조장에 들어서자 막걸리 냄새가 진하게 났다. 일어나지 않는 남자가 있었고 그를 설득하러 온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물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은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은 다음 날 아침 제 발로 걸어서 돌아왔다. 나는 슬픈 일을 그만두려고 했다. 더 이상 거짓 기록을 남기는 일은 할 수 없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사실 이 양조장은 없다는 것이다. 하염없이 누워서 책만 보는 남자도 없고 그를 설득하러 온 여자도 없다. 단지 우리 사이엔 그날 밤 물속에서 돌아오지 않은 그 사람의 선택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있었을 뿐이다. 그것은 암묵적인 것이었고 지금은 저녁이 되어가는데 하늘의 색깔이 이상했다. 노란색이었다. 나는 당분간 이 양조장의 악몽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2022년 11월 23일 수요일

인공 자연

유리세계의 거대한 등껍질을 보고 크다,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밤하늘인데 사실은 둥근 유리막으로 투과되고 있다. 그 유리막을 왜 만든 것인지, 어떤 거대 집단이 만든 것인지는 모른다. 그 껍질을 보고 있으면 뭔가가 왜곡되고 있다는 것을 왠지 느낌상, 알 수 있게 된다. 또한 유리막 위에다가 거리가 있으면 별과 비슷한 질감의 반짝이는 도료를 칠해 놓아 실존하지 않는 별을 관측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별에도 이름이 붙는다. 이 유리막에 대한 사실은 알 사람들은 다 아는, 공공연한 것이지만 아직 모르는 과학자나 집단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들끼리 숨겨 놓은 비밀이 아니기에 큭큭대며 웃을 일도 아니다. 이 유리막을 만든 집단은 큭큭 웃을 수도 있다. 오직 그런 이유만으로 이런 막을 설치해놓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유리막은 움직이기도 한다. 거대한 생물의 등처럼 좌나 우로 움직인다. 왜 움직이는 것인지는 모른다. 물론 우주비행선은 이 유리막을 통과할 수 없다. 지금까지 말해놓은 것들도 유리막을 만든 이유일 수 있겠으나, 주된 이유는 아무래도 우주비행선들의 금지에 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우주비행선들을 발사하지 못하게 된 지 벌써 35년이나 지났다고 한다. 이에 따라 세계의 모든 우주 관측은 그 이전에 띄워놓은 망원경에 의한 것이 되었다. 우리들의 과학 기술로는 이러한 유리막을 만들 수 없어 보임에 따라,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은 외계의 존재에 대해 대부분 긍정하고 있다. 이 유리막 안에서 비행기들이 날아다니기도 한다. 태양은 예전보다 대낮에도 어두워 보이고 이것은 실제로 사실인 게, 약 15% 정도 현생 인류는 전 세대 인류에 비해 피부가 희어졌다고 한다. 자외선이 유리막을 부분적으로 투과하지 못한다고 하나? 따라서 우리는 비타민 D를 많이 먹어야 하는 인류이고 이런 거대한 물질적 기반이나 토대는(인공 자연은) 결코 한 사람을 울리거나, 감동시키는 법이 없는 것 같다.

2022년 9월 17일 토요일

부엉이 학교

밤이 되자 부엉이들이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다. 부엉이는 낮 동안에 날아다니고 밤에는 나뭇가지 위에서 잠든다. 잠든 부엉이는 한쪽 눈을 뜨고 있기도 한데, 조명이 부족해서 여기까지 그런 모습이 잘 보이지는 않는다. 여기는 기숙사 안이고 늦은 시간까지 마이는 미술 주간 과제를 하고 있다. 주간이라는 것은 이 학교에서 정해 놓은 학사 일정이다. 종종 인문학 구간이 될 때도 있다. 적당히 부유한 가정에서 나고 자란 마이는 기숙사 신청을 했을 때 합격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경쟁률도 셌을뿐더러 집이 그리 먼 지역에 있는 것은 아니라 가산점도 적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기숙사에 붙었을 때 마이는 기분이 좋았다. 기숙사 건물이 좋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었고. 실제로 와 보니 그건 사실이었다. 마이는 신입생이고 선배와 2인 1실을 썼다. 선배의 이름은 나오였고 마이에게 나긋나긋이 대했다. 마이는 조금 내성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고 그건 선배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선배는 은을 다루는 세공 기술 클래스였고 마이는 반짇고리에 든 물건들을 모두 다루는 클래스였다. 클래스라고는 하지만 그건 꽤 가변적으로, 자주 변했다. 이 학교의 모토는 학생들을 경쟁시키지 않는 거였다. 따라서 이상한 제목의 클래스도 갑자기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지곤 했다. 클래스는 말하자면 시편들의 제목을 보는 것 같기도 했고 그것을 전문적으로 고려하는 행정실 인력이나 외부 인원도 있었다. 클래스의 인원은 대체로 한 명에서 세 명 정도까지였고 인기 많은 클래스는 일곱 명까지 됐다. 학생의 수보다 개설된 클래스의 숫자가 더 많았기에 수강생 0명의 클래스도 있었는데 그런 클래스들도 폐강되지 않고 대기 클래스 목록에 들어가 수강 신청을 한다면 수업이 시작될 수 있었다. 하지만 수강생이 한 명이라도 생기는 것이 좋았는데, 왜냐하면 클래스실 하나를 받고 연구비가 지원조로 나왔기 때문이다(수강생이 딱 한 명 있더라도 연구비는 똑같이 나왔다). 외부의 학교와는 조금 다른 이런 제도는 이 학교를 독특하고 매력 있게끔 보이도록 했다. 여기에 입학할 수 있는 조건은 하나였는데, 그건 학생들이 각각 수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시험 같은 것을 볼 때도 있었고 그 분야의 전문가들을 초청해 포트폴리오를 검토하도록 하거나, 시험 강의를 하게끔 했다. 학교에서 모토로 정한 것은 경쟁을 시키지 않는 것이었으나 입학생들은 경쟁을 거친 한 분야의 숙련자들이라는 점에서 이 학교의 제도는 모순된 데가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경쟁을 거치지 않고 입학한 이들이 경쟁적인 시스템 안에서 좋은 성과를 낸다는 연구 결과 등을 언급하며 이 학교를 비판하기도 했다. 다만 꼭 성과라는 것으로 인해서 그것에 대해 비난할 구실을 만든다는 것은 좀 어떤가 싶기도 하다. 마이의 생각에 그런 연구 결과도 일리가 있는 게, 경쟁을 거치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 상대적으로 소모된 사람들이 아니었고, 따라서 치열한 교과 과정에 자신을 갈아 넣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마이는 좀 쉬고 싶었다. 마이가 생각하는 이 학교의 분위기는 평안과 장난스러움 같은 것에 가까웠다. 마이는 이 학교가 마음에 들었고, 이 학교에 들어오는 학생들은 4년 동안 8개 정도의 클래스를 만들어내야만 했는데, 그건 입학시험 때 치른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파생된 클래스여도 좋았고 다른 분야도 허용이 됐다. 다만 클래스 개설 심사의 경우 꽤 엄격했기 때문에(이것이 이 학교의 본격적인 교과 과정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자신의 전문 분야 안에서 개설하는 게 큰 힘 들이지 않고 이 학교를 다닐 수 있는 방법이었다. 초대 이사장은 이 학교 부지 안에 부엉이들을 데려와서 따로 조련사들을 두고 교정 내에서 밤이면 부엉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게 만들었다. 그렇게 부엉이는 이 학교의 마스코트가 되었고 입학식 때마다 학생들, 그러니까 신입생들은 부엉이 하나씩을 배정받고 왼쪽이나 오른쪽 어깨에 부엉이를 올려놓고 있어야만 했다. 처음 보는 부엉이인 데다 그것과 접촉하고 있어야 하니 아무리 잘 길이 든 부엉이들이라도 분위기는 부산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부엉이 조련사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학생들의 긴장을 풀어주는 것은 자주 보이는 광경이었다. 후-웅 하는 부엉이들의 울음소리가 학장의 연설이 끝나면 나오는 것으로, 입학식은 항상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학생들에게 배정되는 부엉이들의 나이는 2~3살 정도였고 선배들이 신입생들에게 부엉이를 물려주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학생당 부엉이를 하나씩 배정받았기 때문이다. 이제 학교에 입학하면 길이 든 부엉이를 이용해 학교 근처에서는 편지를 주고받을 수도 있었다. 마이는 입학식 때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책상 위에 엎어져 누웠다. 부엉이의 날갯짓에 뺨을 맞아서 선배들이 웃음을 지었던 그 일. 마이가 시험을 본 분야는 글쓰기와 반짇고리 다루는 법이었고 두 개 다 합격해서 좋은 성적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기숙사에 합격한 데에는 그런 점이 작용한 것 같기도 했다. 각각 한 분야의 수업을 맡은 학생들은 수업을 그들 내에서만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시니어 클래스라고 해서 학교와 계약한 졸업생들이 주관하는 수업도 있었다(다만 재학생들의 것과 비교해서 인기는 비슷한 정도였다). 초대 이사장이 부엉이를 좋아했던 건 현자들이 부엉이를 좋아한다는 다소 흔한 속설 같은 것 때문이었는데, 그것도 꼭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현자인 마이도 부엉이를 마음에 들어 했으니까. 학생들에게 배정되는 부엉이에는 이름을 붙이지 않기로 약속되어 있었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딱히 불러내지 않는다면) 그들은 숲에서 살았다.

2022년 9월 16일 금요일

수해

드넓은 수해가 접근을 꺼리는 듯도 한데 그곳에 자리 잡은 어두움은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것들을 가려준다. 원숭이 무리가 던지는 플라스틱 물건들을 맞지 않도록 주의하시오. 표지판이 세워져 있고 캠프에는 몇 사람이 남아 있다. 내가 혼자 온 것은 작은 다툼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는 원숭이 한 마리가 보인다. 원숭이의 뒤로 허공에 마법진이 생기고 곧이어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물건 하나가 이쪽에 날아온다. 이곳은 쓰레기장으로도 유명하고 중요한 식생을 보인다고 알려져 있다. 약 19년 전 이곳에서는 생물 재해가 있었다. 그다지 유명한 얘기는 아니지만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던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꽤 심각했던 모양이었다. 인간의 나쁜 마음이 중첩된 결과라던데(아이한테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그것은 으레 그렇듯 앞뒤가 잘린 다소 교훈적인 이야기였다. 물론 어느 프랑스 철학자의 말대로 최악의 가능성, 가능한 것 중에서 이쪽에 불리한 시나리오를 상정하는 것은 자기 보호라는 것을 하는 국가들의 자연스러운 흐름이었고 여기에 다국적 관할 기관이 세워지게 되었다. 나도 거기에 속한 몸으로서 오늘 그곳의 사람들과 다툼을 벌였던 이유는 다소 심기가 상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마법에는 촉매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 촉매를 도난당하는 일이 있었다. 누가 범인인지 모르는 채로 우리는 모여 있었는데 한 사람이 명확하지 않은 근거로 내 옆 사람을 지목했다. 그 시간에 무얼 하고 있었는지 알리바이가 없다는 거였다. 공교롭게도 우리 중 알리바이가 없는 건 그 사람뿐이었고 내가 나서서 그를 변호했다. 그것은 곧 다툼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각자 상한 마음을 가진 채로 흩어지게 되었다. 내 생각엔 원숭이 중 하나가 범인인 것 같았는데 그 의견을 사람들한테 말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직접 물어볼 생각으로 이곳에 오게 되었다. 나는 아까 나에게 플라스틱 물건을 쏘아보낸 원숭이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캠프에서 촉매가 없어진 일이 있었어. 너희 중에 하나가 훔친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 맞니?” “네, 내가 훔쳤어요.” “어디에 쓰려고?” “마법을 쓰기 위해서지요.” “하지만 그건 우리의 물건인데.” “훔친다면 상관없어요.” “어떻게 들키지 않았지? 분명히 알람이 있었을 텐데.” “그건 자원 낭비예요. 우리 쪽엔 그걸 무력화시킬 방법이 있으니까.” “그것도 훔친 거니?”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그건 우리가 가졌던 것이니.” “그러니까 훔친 것이란 말이지?” “옛날에요.” “너희들의 소유권에 대한 개념은 잘 이해하기 어렵구나. 아무리 그래도 남의 물건은 훔치면 안 되는 것인데.” 내가 그렇게 말하자 원숭이는 다시 마법진을 만들어내 이쪽으로 플라스틱 물건을 던졌다. 나는 그것의 속도를 완화해 부드럽게 받았다. 그런데 그 물건 안에는(페트병이었는데) 바나나 잎이 들어 있었다. 아까 우리 쪽에서 없어진 촉매였다. “주고받기 놀이 해요.” “이걸 말이니?” 나는 내 손에 든 페트병을 들어 보였다. “아뇨. 난 던지기만 하고, 받기만 하세요.” “그게 주고받기 놀이라는 거니?” “네, 그럼요.” 원숭이가 던지는 물건은 각각 캠프에서 없어진 촉매들을 담고 있었다. “이걸로 너희가 훔쳐 간 건 다 받은 것 같구나. 훔친 거라면서. 왜 돌려줬지?” “일단 우리가 훔쳤으니까요.” “너희들의 소유권에 대한 개념은 역시 이해하기가 어렵구나.” “우리는 누굴 곤경에 빠뜨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서 돌려준 거죠.” 원숭이가 돌려준 촉매를 확인해 보니 한 번 사용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었고 새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었다. 곤경에 빠뜨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 원숭이의 말은 정말인 듯했다. 그것들을 카트에 담아서 캠프에 돌아오자 몇 명의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원숭이가 훔친 거였어.” “우린 걱정했는데요.” 그렇게 말한 건 세실이었다. 테메코 군집이 내보이는 검은 탑의 형상에 대한 연구자. “왠지 뭘 하러 가는 것 같았거든.” 그렇게 말한 건 나비의 초시공간성을 연구하는 이나테였다. “우린 잘못된 결정을 내리고 한 사람을 의심했어.” 그렇게 말한 건 아까 듀크를 의심했던 셀린느였다. “우리라고요? 당신이 그랬던 거겠지.” “너무 싸우지들 말게.” 테스와 피어가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여서 같이 저녁을 먹었다. 아까 전에 있었던 다툼은 거짓말이라는 양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이나테와 세실은 이쪽에 앉아 있었고 셀린느가 내 앞에서 꽤나 취해 있었다. 그녀는 취한 몸짓으로 듀크에게 말했다. “설마 원숭이가 훔쳐 갔을 줄은.” “그거 사과하시는 건가요?” 누군가 옆에서 말했고 셀린느는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읊조렸다. “사과가 맞을걸.” 테스와 피어는 저쪽에서 무심한 듯해 보이는 시선으로 수해가 있는 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다가가서 말했다. “뭐가 보이시나요?” “까마귀들이 있는 것 같아.” “까마귀들이라면 없어졌을 텐데요.” “세력 다툼 이후로 그랬던 것이 맞는데. 모르지, 무슨 일이 또 일어난 걸 수도.” “한번 비춰볼까요?” “그렇게 해 주게.” 나는 마법으로 그곳을 비추었고 그러자 거기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이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 모두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곳에는 겉보기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걸고 있는 까마귀들인 것처럼 반짝거리는 폐플라스틱 병 안의 물방울들이 이곳까지 점점이 빛나며 글자를 만들고 있었다. ‘우린 나쁜 마음을 먹지 않았어. 그 녀석을 혼낼게.’

2022년 9월 14일 수요일

달의 나무

달의 나무에 작은 달들이 얽혀 있다. 분진을 이용한 번식은 달 바람이 불고 있는 가운데 아주 적은 확률로 가능하다. 걸을 때마다 마주치는 웅덩이들 위에 작은 달들이 떠 있다. 사찰에서 관리하는 연꽃 모양 같기도 하고. 그런 달들이 웅덩이 위에 떠 있는 이유는 작은 달들도 뜨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하늘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 있는 웅덩이를 보다 보면 으레 궁금했던 달의 뒷면을 볼 수도 있다. 작은 달들은 이 조그만 항성인 달과 똑같이 생겼다. 달의 나무는 크기만 다를 뿐인 똑같은 것을 계속해서 만들어낸다. 꽤나 신기한 나무라고 할 수도 있을 터이고 병맛이라는 것과 같을 수도 있다. 먼바다에 이는 풍랑과 같은 모습을 빌리는 지켜본다. 달의 나무에 얽힌 달들이 달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다. 지나쳐 오면서 봤던 웅덩이들에 작은 달들이 몇 개씩 떠 있었던 이유는 빌리가 그것들을 하나씩 웅덩이 위에다 놔뒀기 때문이다. 빌리는 달의 수분을 돕는다. 달의 웅덩이에는 물이 없고 그래서 정확히 말하면 작은 달들의 웅덩이에는 달이 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닥에서 굴러다니고 있다고 해야 한다. 작은 달들은 동물일까, 식물일까? 빌리의 입장은 그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하나씩의 항성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구태여 나무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이 달 위에 뿌리를 내린 그 나무와 작은 달들 사이에는 동족이라 부를 만한 아무 근거가 없다. 그 사이에 가로놓인 것은 쓸쓸함이나 황량함이라는 것이고 빌리는 누워서 달의 저녁이 오는 것을 보고 있다. 여기에는 대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시선을 옮기면 깊은 우주의 모습 또한 볼 수 있다. 달에 일어난 일은 최근 지구에서 도착한 탐사 차량이 왔다 갔다는 것이다. 긴 치맛단의 옷을 입은 고아한 사람이 그 탐사 차량 위에 타고 있었는데 먼 곳에서 당도한 인간들의 착시가 공유된 것인지도 모른다. 암석 하나를 부숴서 떼어갔는데 마침 그것이 부숴준 돌덩어리를 가져다가 빌리는 깎기 시작했다. 달의 나무는 빌리가 만든 것이다. 달의 축소된 전체 모습을 깎아서 나무에다 얽어 놓은 것도 빌리가 하는 일 중의 일부이다. 그 달의 내부에는 마찬가지로 지각이 있고 맨 가운데에는 씨앗이 있다. 유칼립투스 나무는 적절한 환경만 갖춰진다면 씨앗이나 그것의 부서진 분진만으로도 달에서 뿌리내릴 수 있고 번식까지도 가능하다. 빌리는 달의 치즈 같은 이야기를 믿는다. 실제로 와본 달에는 그런 게 없었지만 지금도 없어진 빌리를 찾고 있는 지구의 동지 같은 이들처럼 안 와본 곳에는 적당한 판타지가 있다는 걸 빌리는 알고 있다. 빌리가 여기서 권태로워 보일 수 있는 생활을 하는 이유는 어릴 적 읽은 동화책에서 달이 나왔었기 때문이다. 빌리는 항성인들 중 하나로 언젠가 지구에서 살았었다. 빌리가 타고 다니는 차량은 롤스로이스였고 잘 알겠지만 빌리는 큰돈을 벌었다. 이방인들이 가득한 지구에서 빌리는 의태하는 것처럼 들키지 않고 살았다. 우주인의 덕목이라고 할 수 있는 들키지 않음은 대학에서 배운 것이다. 잘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빌리와 같이 나고 자란 이들은 빌리처럼 사는 것이 꿈이라고 할 수 있다. 대기가 없는 작은 항성에서 예술적인 일을 하며 보내는 것. 예술가에게 후원되는 금액도 막대해서 빌리는 그것으로 학자금 대출을 갚고 있다. 우주 예술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지만 빌리가 하는 일이 예술로 취급받는 것은 현대 지구인들이 보기엔 그리 이해가 가지 않는 데가 있다. 단순히 똑같은 것만 만들어내기를 한다니. 물론 한 항성을 그대로 만들어내는 것인 만큼 거기에 쓰이는 기예가 짐작하기 어려운 수준의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단순히 똑같은 것이잖은가. 그런 걸 어디에 쓰나. 물론 예술의 용처가 결정되는 것은 사람들의 의지가 아니라 예술적인 시스템 안일 수도 있다. 그러나 빌리의 예술에 대한 일종의 낮잡아 보는 시선을 갖고 가는 것은 적절해 보인다. 사실 똑같은 것을 만들어내기 분야라는 것은 빌리가 온 데에서도 반신반의하거나 그 존립 가치에 대해 설왕설래하기도 한다. 다만 이것은 다분히 예술 철학, 그러니까 거기에선 철학 자체로 취급받는 한 학파에 의해 지탱되고 있어서 이 기술을 연마했을 때 돌아오는 이득이 크고, 먹고 살 걱정도 없어진다. 빌리는 책상에 노트북을 켜고 자기가 만든 달의 나무를 송출하고 있다. 동기화 통신망은 값이 비싸기에 지연된 통신망으로 하고 있기는 한데, 오히려 그 편이 운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빌리의 영상은 물론 영상보다는 고정된 사진에 가깝고 지구인들이 종종 찾는 움직이는 바탕화면이라는 것과 뭐 그리 차이가 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시청자 수는 꽤 높은 편이랄 수 있다. 똑같은 것 만들기 학파는 우선 똑같이 만들 대상을 선택하는 것에 매우 파고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까 적절한 대상을 선정하는 것만으로도 인정받는 것이다. 똑같이 만들기 기예에 있어서는 뭐랄까 탈락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데, 왜냐하면 그 교육 과정이 아주 잘 되어 있어서다. 빌리가 지구에서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동화책의 시점이 지구에서 본 달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빌리는 어른이 되었고 그 느낌을 한가득 기억하고 있다. 화면이 옮겨져 웅덩이가 찍히고 그 안엔 빌리가 준비한 물이 고여 있다. 그 위에 떠 있는 달은 하늘에 떠 있는 달과 그리 차이가 나는지는 잘 모르겠다.

2022년 7월 28일 목요일

인형 내부의 밀짚

인형 내부에 밀짚이 있다는 얘기는 어쩐지 당연한 얘기인 것처럼 들리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당연하게도 인형을 한 손에 안고 있다. 장난감 총을 쏘자 사람들이 픽픽, 쓰러졌다. 그것은 시늉이었다. 그것은 내 생각 속에서 벌어진 일일 뿐이어서 별로 의미 없었다.

낡은 인형을 품에 안고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손잡이가 조금 젖어 있었다. 나는 그 물에 닿은 손이 인형에 닿지 않도록 주의하며 인형 내부에 있는 밀짚, 그러니까 유토피아를 생각했다. 유토피아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지하철 플랫폼에 비밀 통로를 만드는 것처럼 무난한 계기가 있어야만 했다.

우연히 거기에 손이 닿아야만 한다. 인형의 튿어진 데를 조금 바라보며 그 안에 있는 밀짚을 생각하며 나는 수상쩍음과 겸연쩍음에 대하여 생각했다. 무엇이 평소와 같지 않게 이상하다는 것이 수상쩍음이고 괜스레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것이 겸연쩍음이다.

에스퍼 계의 제약 인형 앞에서(그것은 어쩐지 수상쩍었다) 왠지 나는 겸연쩍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건 그다음에 있었던 일이다. 내가 들고 있던 낡은 인형은 그 사이에 새로운 인형이 되었다. 내가 모자를 씌워주는 시늉을 내자 그렇게 되었다.

작은 비행기라면 손이 닿지 않고서도 공중에 띄울 수 있다. 나는 에스퍼 타입이었고 내가 손에 들고 있던 인형을 내 능력의 발동에 있어 꼭 필요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인형에 모자를 씌워주었다. 마법사 모자를 씌워주었다. 그것은 내 제약이 되었다.

그런 의미를 갖고 있는 행위를 내가 했다. 방금 엘리베이터에 있었던 순간은 나에게 중요했다. 나와 같은 타입의 사람들은 인형 같은 자기랑 비슷한 물건에게 자신의 것을 이양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려면 우연히 손이 거기에 닿아야만 한다. 그것이 의식이라는 것이었고 방금 내가 한 일이었다. 내 것이 증폭되었다.

이 세상은 에디트 하는 데 있어서 어떤 국면에 대한 확률 걸기가 불가능하다. 어떤 순간은 성공이고(무조건), 어떤 순간은 실패(무조건)다. 성공과 실패의 순간을 빠르게 넘어가게 할 수는 있었지만 특정 국면의 성공이나 실패 확률은 무조건 100%이고 방금 엘리베이터에 있었던 때는 내가 직감한 그 100%의 순간이었다.

민감하지 않은 사람들은 예언사에게 찾아가 예언을 받는 데 많은 비용을 낸다. 나는 중간 즈음의 편이었는데 아까 전의 순간에는 확신했다. 손잡이에 깨끗하지 않을 수도 있는 물이 묻어 있었던 것이 주효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인형의 튿어진 데를 바늘로 기웠다.

여러 대의 에어컨이 틀어져 있다. 나는 더운 것을 잘 참지 못한다. 이런 공기 속에서라면 벌레들은 힘을 잃는다. 따라서 간드를 지향성으로 내보내 맞추기가 쉬웠다. 어른들은 에어컨을 틀지 않고서도 쏘아내곤 한다던데.

오늘 의식이 성공한 것은 그들이 알게 된다면 굉장한 칭찬을 받을 만한 일이었다. 여기까지 하느라고 나는 지난 1년간 고생했다. 인형과 감응해야 했기 때문이다. 튿어진 데가 있어도 인형을 기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사이로 밀짚이 빠져나오려고 할 때마다 나는 불안했다. 나는 인형에 이입하고 몰입해야만 했다. 나는 인형의 내부에 있는 밀짚들이 천국의 것이라고 정의했었다. 천국은 쉽게 대상화되지만 정작 그곳에 누구가 살고 있고 무엇이 있는지는 떠올리기 어렵다. 그래서 간섭으로부터 안전한 편이었다.

인형의 존재를 그곳에다 두기만 한다면. 존재를 두는 행위에는 시늉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여기저기서 끌어온 도움으로 실제로 천국에 다녀왔고 인형의 존재를 그곳에다 두었다. 감응을 하려면 그 대상이 먼저 이렇게 안전할 필요가 있다.

그다음에는 친해지는 것이다. 튿어진 데를 기우는 것은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이었지만 여느 사람들의 사이나 관계와 다름없이, 쓸데없는 배려는 위화감을 만들 우려가 있었다. 마법사 모자를 쓴 인형은.

곰같이 생겼다. 원래 이름은 에리나였는데 여자 이름인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러나 그 이름이 어울리는 듯했다. 그것은 자신의 날개 안에 있는 천사의 이름이었다.

내가 천국에 갔었을 때 변태하고 있는 벌레 고치들인 것처럼 천사들은 다들 자신의 날개를 닫고 있었다. 그래서 말을 걸어볼 수 없었다. 그래서 흥미 본위로 빌려온 마음을 보는 돋보기로 그들을 살펴보았는데 다들 폭력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만을 했다. 천국은 상상보다 평화로운 장소였다. 그러나 나는 유토피아와 천국을 같은 데라고 여기지는 않게 되었다. 거기서 날개를 닫고 있으면 유열 속에 있는 것이다. 밀짚은 비어져 나오려고 하고 그것을 주워다 다시 넣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었다.

내 생각에 유토피아는 여느 놀이공원처럼 수고로운 장소여야만 했다. 어린 내가 보기에 그것이 아니라면 비극이었다.

2022년 6월 25일 토요일

봄볕들의 돗자리

정돈되지 않은 어느 봄볕이 술을 홀짝이고 있다. 봄볕은 구부러져서 네 머리맡에 닿고 있다. 은은한 술 냄새가 나고 너는 술병 곁에 앉아 있다. 네 밑에는 돗자리가 있는데, 그것은 일 년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햇빛에 닿지 않았으므로 귀여운 곰팡이가 살짝 피어 있다고 생각한다. 너는 안온히 앉아 있고 돗자리 바깥에는 조명이 있어서 벌레들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 그 조명은 윌 오 위습이란 것인데 나는 조명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렇게 봄볕이 내리고 있으면 그것들은 까르륵 웃기만 하지 제 모습을 드러낼 줄 모르기 때문이다. 봄볕과 너는 대화를 하는데 그 내용이 하잘것없어서 그 둘은 오래된 친구이거나 연인 사이인 것 같다. 봄볕은 곰방대를 문 여인의 몸으로 앉아 있고 네 머리맡에 닿는 그 여인의 손은 희고 하얗다.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그 여인은 너보다 나이가 많은 것처럼 보인다. 너 또한 마이라는 이름의 여자애인데 내가 마이를 너라고 부른 이유는 마이라고 부를 경우 따가운 봄볕처럼 애매해져 버릴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 애매하고도 태만한 어떤 권태를 감당해온 것이 그 곰방대를 문 여인인데 너의 경우 그런 것을 참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잘 못하는 술을 홀짝이고 있다. 너는 점점 마이라는 고유명을 잊어가고 앞에 앉은 여인의 모습이 더더 눈에 잘 들어온다. 그래서 흔들거리다가 그만 여인의 품에 안겨버린다. 봄볕은 대부분 웃고 있고 가끔 사람을 째려볼 때가 있는데 그때에는 제 분수도 모르는 봄이라며 따가운 햇살을 맞은 사람이 성을 내곤 한다. 그 성냄이란 애매하고도 분명하게 소용돌이치는 것이어서 성을 낸 사람은 자기도 성냈다는 것을 잘 모르고 그저 다음 순간으로, 계절이라는 넉넉한 품에 안기는 듯이 넘어가 잊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봄볕은 대부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한번 자기에게 성냈던 사람을 상대로 제 자신이 여름이라는 사기를 치려고 한다. 봄은 그래서 더움과 따스함 사이에 있는, 덥다면 덥다고 할 수 있는 계절이고, 저 봄볕의 여인은 이수정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그녀는 지금 화장을 하지 않은 맨 얼굴인데 눈꼬리가 길게 나 있는 것이 원래 얼굴이어서 화장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이, 그러니까 너는 술에 취해서 여인의 품에 안긴 채로 인사불성 어떤 말을 중얼거리기도 하는데 그것이 이수정의 은근한 분노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 광경은 제법 웃긴 것이라 구멍이 뚫린 양말처럼 발가락을 이쪽으로 내놓고 있다. 한번 간질여 보라는 듯이. 마이, 너는 새로 양말을 사지 않은 것인지 이렇게 양말에 구멍 나 있고 그렇게 내놓아진 발가락을 여인이 쳐다보며 풋, 웃기도 한다. 너는 술을 견디지 못하고 금방 취해버리고 말았는데 이수정은 아까 전에 말한 대로 혼자서 계속 술을 홀짝인다. 어쩌면 저 여유롭고도 느긋한 몸짓은 술의 힘을 빌린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이수정은 의기양양 이쪽을 보면서 말했다. “저 아이의 선생님이면서. 나와 둘이 내버려 둔 이유가 뭐죠? 금방 취해버리고 말 것을 알면서. 저 아이를 내버려 두고 있었어요.” “계절이라는 것이 뭔지 가르칠 필요가 있었거든. 너는 엄밀히 말하면 계절이 아니지만. 그와 비슷하잖니.” “그래서 나는 저 아이를 벌써 취하게 만들었어요.” 마이를 품에 안고 이수정이 그렇게 말했다. “한껏 멀리서 보면 작은 개체들은 휘어지고 있고, 나는 그것을 봄이라고 생각한단다.” 여인이 곰방대를 피우기 시작한다. “내가 여름 학교에 들어가 있었을 때. 당신은 내가 여름과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며 그만둘 것을 권했었죠. 그 옷이란 건 대체 뭐죠?” “옷은 사람이 입는 것. 그리고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 그래서 인간들의 기호가 반영된 것. 난 단순히 당신의 성정이 그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 성정이 누군가가 입는 옷이라고 판단했어. 안과 밖을 거꾸로 뒤집은 셈이라, 나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지.” “실제로 당신은 나에게 도움을 준 것이 맞아요. 나는 봄이 마음에 드니까요.” “여름이 질투 나지는 않니?”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거예요. 내가 걸어온 길이니까요.” “반면 여름이 너를 질투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럼 그렇게 하라죠, 뭐.” “저 아이는 나에게 있어 소중하단다.” “그런 것처럼 보였어요. 뭐 하는 애인가요?” “아직 애니까.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그럼 그다음에는요?” “글쎄. 내 생각에는 시를 쓰면 좋겠는데. 그것도 제 마음에 들어야 하겠지.” “당신이 유일하게 못 해본 걸 시키시려고 하는군요.” “응, 그래서 저 애가 내 미래야.” “그렇다고 하기엔 성별이 다르지 않나요?”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런 것은 옷들과 같은 것. 저 조명들은 아직 어려서 성별이 뭔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너나 나나 아직 어리다.” “당신은 나이를 많이 먹었잖아요? 봄이면서.” 나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연초에 불을 붙이면서 말했다. “그건 어디 가서 말하지 마라. 진짜 봄이라고 믿어버릴 수도 있으니.” “그럼 그게 아니고 뭔가요?” “알다시피 봄의 시스템이란 건…… 누가 봄인지 알 수 없게 해놓았기 때문에.” “정돈되지 않은 봄볕의 일부일 뿐이라는 거죠? 모두가 다.” “그래그래.” “한심해요.”

2022년 6월 6일 월요일

기이한 여행의 삵

인간만큼 자주는 아니지만 삵도 여행을 한다. 사막이란 장소에서 한군데에 붙박여 있는 건 불길한 일이고, 그 점이 삵의 눈동자 뒤에 각인되어 있으며(이 나라가 사막은 아닐지라도) 어디로든 가볍게 떠나고 싶어 한다는 건 고양잇과의 종특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삵은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이 삵은 겉보기론 길고양이들과 많은 차이가 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야성을 잃어버렸고 단지 고양이들보다 좀 더 허리선이 길며 날렵하다는 것 외에는. 나는 그 사실이 못내 슬프고, 다행인 건 그래서 이 삵이 주택가에 거닐고 있어도 야생 동물 보호반을 부를 사람이 없다는 것일까. 그래서 이 삵은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 처음엔 가볍게 옆 동네의 주택가로 이동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분명한 건 아까 동네와의 주된 냄새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음식점들이 주택가에 분위기상 녹아들어 있는 그런 지엽적인 동네이고, 삵도 배고프니까 평범한 길고양이들처럼 음식물 봉투를 찢거나 한다. 그럼 곧 사람들이 달려올 거라는 건 다른 길고양이들처럼 삵도 평범하게 아는 사실이고, 그래서 서둘러 먹고 삵은 다시 길을 떠난다. 다시 옆 동네로. 그렇게 다시 옆 동네로. 그러다가 삵은 이번의 경우, 어느 집의 주위를 둘러싼 담장 위를 걷고 있다. 거닐고 있다는 말이 더 어울리기도 한다. 어떤 여자애가 그 삵의 사진을 찍으려고 다가선다. 그 순간 삵은 담장을 뛰어넘어 그 집 마당으로 간다. 삵은 사진 찍히는 걸 싫어하니까. 왜냐하면 그 순간이 고정되어 영원히 그 순간에 사는 것처럼 취급되는, 그러니까 사물화라는 낱말이 주는 상황을 삵은 배격하기에. 혹은 그런 것이 아니고 그 마당에 단순히 귀여워 보이는 오리가 못 위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첨벙, 하고 그 삵은 못 안으로 뛰어든다. 제 몸을 씻기 위함인 동시에 그 오리를 가까이서 보고 싶기 때문이다. 삵은, 그러니까 고양잇과 동물들의 경우 거리라는 것에 무척 민감하고 까다로워서, 일종의 폭군인 것처럼 [거리 조절]이라는 국면에 있어서는 자기가 왕인 것처럼 군다. 아니 일종의 왕인 건 맞는데(왜냐하면 삵이니까). 삵은 그 오리를 보기만 한 다음에 다시 몸을 뛰어서 담장으로 간다. 삵은 그 오리를 다치게 하지 않았다. 어쩌면 오리가 귀여워서일 수도 있겠고 단순히 배고프지 않아서, 혹은 오리의 주인에게 슬픔을 안겨주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간 삵은 다시 길을 거닐기 시작하고, 지켜보는 나 같은 입장에서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오리는 이미 깜짝 놀라버렸고 꽥꽥, 하는 소리를 내뱉으며 뒤뚱뒤뚱한 걸음으로 못이 아니라 그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사실 이 삵은 어느 정도 야성을 잃어버린 뒤라, 먹을 것은 오직 음식물 봉투로 한정한다. 야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화를 거친 것일지도 모른다. 삵은 종종걸음으로 담장 같은 데로 뛰어 올라서서 자꾸만 옆 동네로 간다. 삵이 옆 동네에서 왔다는 것은, 그리고 다시 옆옆, 옆옆옆 동네에서 왔다는 것은 사람들, 그리고 다른 길 고양이들은 모른다. 왜냐하면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지 않으니까? 하지만 뭔가 평범한 고양이와는 다르단 걸, 다른 길고양이들은 알고 있다. 몸이 좀 더 길고 다른 고양이들보다 좀 더 날렵한 것이다. 그러므로 삵이란 이 낱말의 뒤에 자리하는 위엄 같은 모습을, 이 삵은 가끔 보여줄 때도 있다. 다른 고양이들과 술래잡기 놀이를 하거나 하는 것이다. 삵이 조금 더 빠르므로 그러나 많은 차이가 나진 않아서 술래로는 제격이기에, 이 삵은 술래만 한다. 다른 머리 큰 고양이들이 도망치고, 삵은 리드미컬하게 간격을 재거나 하면서 다른 고양이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다. 어찌 보면 삵이라고 내가 부른 게 다행일 만큼 이 삵은 고양이들 배 술래잡기 놀이에서 술래로서 적격인 모습을 보여준다. 삵은 먼 길(내가 여행이라고 말한)을 다시 떠나야 하므로 영원히 술래를 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삵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잡을 수 있었음을 과시하려는 듯이 어느 새끼 고양이의 목덜미를 물고 다른 고양이들 앞에 내던진다. 그리고 혀로 할짝인다. 이럴 때의 삵은, 다른 어떤 고양이들도 방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놀이에서 이겼기 때문이다. 이만하면 내가 삵이라고 부르는 이 고양이가, 아니 삵이, 다른 평범한 고양이들과는 얼마나 다른지 충분히 설명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간 이 삵은 그래서 원래 있던 곳과는 아주 먼 동네까지 갔는데, 그곳 역시 주택가이고, 한 가지 다른 점은 여긴 서울같이 힙한 동네가 아니기에, 주택가들 사이에 음식점이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짠 바다 냄새가 난다. 삵은 이 생소한 냄새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모르는 채로, 어쩐지 생선이 많을 것만 같은 냄새에 이끌려서, 그쪽으로 향한다. 땅에 인접한 해안의 모습, 그러니까 모래알들이 보이고 어떤 곳의 모래 속에는 내가 삵을 위해 묻어둔 생선이 있다. 그걸 모르고 삵은 자꾸만 바다 쪽으로 향한다. 그래서 헤엄치려는 듯이, 헤엄치려는 듯이 물이 다리의 중간쯤까지 올라와 젖는데도 자꾸만 그쪽으로 향한다. 어, 어 하면서 삵을 구해내려고 해수욕하던 사람들이 달려들고, 삵은 사람들을 피해 다시 뒤로 물러난다. 그리고 해양의 모습을 멀리까지 바라본다. 안타깝지만 삵의 여행은 여기서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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