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14일 수요일

달의 나무

달의 나무에 작은 달들이 얽혀 있다. 분진을 이용한 번식은 달 바람이 불고 있는 가운데 아주 적은 확률로 가능하다. 걸을 때마다 마주치는 웅덩이들 위에 작은 달들이 떠 있다. 사찰에서 관리하는 연꽃 모양 같기도 하고. 그런 달들이 웅덩이 위에 떠 있는 이유는 작은 달들도 뜨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하늘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 있는 웅덩이를 보다 보면 으레 궁금했던 달의 뒷면을 볼 수도 있다. 작은 달들은 이 조그만 항성인 달과 똑같이 생겼다. 달의 나무는 크기만 다를 뿐인 똑같은 것을 계속해서 만들어낸다. 꽤나 신기한 나무라고 할 수도 있을 터이고 병맛이라는 것과 같을 수도 있다. 먼바다에 이는 풍랑과 같은 모습을 빌리는 지켜본다. 달의 나무에 얽힌 달들이 달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다. 지나쳐 오면서 봤던 웅덩이들에 작은 달들이 몇 개씩 떠 있었던 이유는 빌리가 그것들을 하나씩 웅덩이 위에다 놔뒀기 때문이다. 빌리는 달의 수분을 돕는다. 달의 웅덩이에는 물이 없고 그래서 정확히 말하면 작은 달들의 웅덩이에는 달이 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닥에서 굴러다니고 있다고 해야 한다. 작은 달들은 동물일까, 식물일까? 빌리의 입장은 그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하나씩의 항성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구태여 나무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이 달 위에 뿌리를 내린 그 나무와 작은 달들 사이에는 동족이라 부를 만한 아무 근거가 없다. 그 사이에 가로놓인 것은 쓸쓸함이나 황량함이라는 것이고 빌리는 누워서 달의 저녁이 오는 것을 보고 있다. 여기에는 대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시선을 옮기면 깊은 우주의 모습 또한 볼 수 있다. 달에 일어난 일은 최근 지구에서 도착한 탐사 차량이 왔다 갔다는 것이다. 긴 치맛단의 옷을 입은 고아한 사람이 그 탐사 차량 위에 타고 있었는데 먼 곳에서 당도한 인간들의 착시가 공유된 것인지도 모른다. 암석 하나를 부숴서 떼어갔는데 마침 그것이 부숴준 돌덩어리를 가져다가 빌리는 깎기 시작했다. 달의 나무는 빌리가 만든 것이다. 달의 축소된 전체 모습을 깎아서 나무에다 얽어 놓은 것도 빌리가 하는 일 중의 일부이다. 그 달의 내부에는 마찬가지로 지각이 있고 맨 가운데에는 씨앗이 있다. 유칼립투스 나무는 적절한 환경만 갖춰진다면 씨앗이나 그것의 부서진 분진만으로도 달에서 뿌리내릴 수 있고 번식까지도 가능하다. 빌리는 달의 치즈 같은 이야기를 믿는다. 실제로 와본 달에는 그런 게 없었지만 지금도 없어진 빌리를 찾고 있는 지구의 동지 같은 이들처럼 안 와본 곳에는 적당한 판타지가 있다는 걸 빌리는 알고 있다. 빌리가 여기서 권태로워 보일 수 있는 생활을 하는 이유는 어릴 적 읽은 동화책에서 달이 나왔었기 때문이다. 빌리는 항성인들 중 하나로 언젠가 지구에서 살았었다. 빌리가 타고 다니는 차량은 롤스로이스였고 잘 알겠지만 빌리는 큰돈을 벌었다. 이방인들이 가득한 지구에서 빌리는 의태하는 것처럼 들키지 않고 살았다. 우주인의 덕목이라고 할 수 있는 들키지 않음은 대학에서 배운 것이다. 잘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빌리와 같이 나고 자란 이들은 빌리처럼 사는 것이 꿈이라고 할 수 있다. 대기가 없는 작은 항성에서 예술적인 일을 하며 보내는 것. 예술가에게 후원되는 금액도 막대해서 빌리는 그것으로 학자금 대출을 갚고 있다. 우주 예술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지만 빌리가 하는 일이 예술로 취급받는 것은 현대 지구인들이 보기엔 그리 이해가 가지 않는 데가 있다. 단순히 똑같은 것만 만들어내기를 한다니. 물론 한 항성을 그대로 만들어내는 것인 만큼 거기에 쓰이는 기예가 짐작하기 어려운 수준의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단순히 똑같은 것이잖은가. 그런 걸 어디에 쓰나. 물론 예술의 용처가 결정되는 것은 사람들의 의지가 아니라 예술적인 시스템 안일 수도 있다. 그러나 빌리의 예술에 대한 일종의 낮잡아 보는 시선을 갖고 가는 것은 적절해 보인다. 사실 똑같은 것을 만들어내기 분야라는 것은 빌리가 온 데에서도 반신반의하거나 그 존립 가치에 대해 설왕설래하기도 한다. 다만 이것은 다분히 예술 철학, 그러니까 거기에선 철학 자체로 취급받는 한 학파에 의해 지탱되고 있어서 이 기술을 연마했을 때 돌아오는 이득이 크고, 먹고 살 걱정도 없어진다. 빌리는 책상에 노트북을 켜고 자기가 만든 달의 나무를 송출하고 있다. 동기화 통신망은 값이 비싸기에 지연된 통신망으로 하고 있기는 한데, 오히려 그 편이 운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빌리의 영상은 물론 영상보다는 고정된 사진에 가깝고 지구인들이 종종 찾는 움직이는 바탕화면이라는 것과 뭐 그리 차이가 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시청자 수는 꽤 높은 편이랄 수 있다. 똑같은 것 만들기 학파는 우선 똑같이 만들 대상을 선택하는 것에 매우 파고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까 적절한 대상을 선정하는 것만으로도 인정받는 것이다. 똑같이 만들기 기예에 있어서는 뭐랄까 탈락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데, 왜냐하면 그 교육 과정이 아주 잘 되어 있어서다. 빌리가 지구에서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동화책의 시점이 지구에서 본 달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빌리는 어른이 되었고 그 느낌을 한가득 기억하고 있다. 화면이 옮겨져 웅덩이가 찍히고 그 안엔 빌리가 준비한 물이 고여 있다. 그 위에 떠 있는 달은 하늘에 떠 있는 달과 그리 차이가 나는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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