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29일 목요일

공짜책

댓글들을 모아 책으로 내겠다는 것은 미친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미친 세상에 걸맞은 미친 책이, 미친 원고가 필요했다. 눈길을 확 잡아끄는 글, 붙은 듯이 뇌리에 남는 글, 그날 잠을 못 이루게 하는 글, 그런 글을 찾다 보니 결론은 댓글이었던 것이다. 아직까지도 나는 이 댓글들보다 추하고 흉하고 무섭고 로맨틱한 글을 읽어보질 못했다. 댓글은 저 고딕문학의 정통한 후예, 최첨단 후예다. 댓글들을 읽을 때마다 문자 그대로 등줄기가 오싹해진다. ‘때마다 반드시’라는 건 정말 대단한 거다. 그 어떤 위대한 작가라도 한 번은 실패한다고 하지 않나? 댓글은 그 어떤 대문호도 아닌,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미친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손으로 완성해낸... 아니, 완성은 못한, 끝없이 쓰이고 있는 불멸의 명작, 끝없이 쓰이고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 단점도 없는, 그래서 끝이 나기만 한다면 성경에 비견할 만한 원고다. 왜 아닐까! 이 ‘공짜책’ 출판사를 만든 계기가 된, 여전히 잊을 수 없는 댓글 하나가 있다. 그대로 옮길 수는 없고 내용만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지금 이 나라의 책값은 너무 비싸다, 정부가 이익집단들에 휘둘려 국민 정서에 맞지 않는 이상한 정책을 자꾸 밀어붙이기 때문이다, 책값을 비싸게 만드는 것은 사실 이 정권 우민화 기조의 일환이다, 우리는 여기에 맞서야 한다... 맞서야 한다... 난 이 댓글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맞선다니 어떻게, 누구에 맞선다는 것일까? 그것은 알 수 없었다. 그게 중요한가? 맨날 별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들에 죽자 사자 매달려있는 쓰레기 같은 원고들만 들여다보던 중 마주친 그 댓글에서 느낀 청량감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 과감함, 그 호쾌함! 이런 글을 두고 일필휘지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우리 공짜책 출판사의 정신이었다. 우리 출판사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우리의 정신이 거기에 있었다. 우리는 맞서야만 한다! 우리의 첫 번째 책은 이런 식으로 우리를 감동시킨 댓글들을 800매 정도 모은 것이었는데, 500부를 찍어 90부 정도 힘겹게 공짜로 배부하다가 깨달았다. 우리의 책은 굳이 종이로 만들어질 필요가 없다는 거였다. 두 번째로는 좀 더 구체적인 테마를 정해서 모은 댓글들을 전자책으로 만들어 배부했는데, 도합 20종을 내고 총합 9회 정도 다운로드된 시점에 또한 깨달았다. 우리의 책이 굳이 다른 책들과 함께 취급될 필요가 없다는 거였다. 세 번째 책은 웹페이지 형태로 만들어 누구나 접속하여 읽을 수 있도록 만들었고, 네 번째 책은 일종의 게시판에 게시물 형태로 만들어 9000개까지, 그다음엔 원글과 댓글을 함께 올려보고, 그 다음엔... 우리가 최종적으로 깨달은 것은 굳이 우리가 책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거였다. 댓글은 쓰일 것이고 그것이 계속 책으로 만들어지기만 한다면... 우리가 이제 마지막으로 만들고 있는 책은 ‘댓글을 책으로 만드는 백만 가지 방법’이다. 내가 ‘우리’라고 하는 것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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