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25일 수요일

잠들어 있는 여름

우리가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여름은 펜글씨 교본처럼 우릴 따라 하고 있다. 딸기가 올려진 케잌같이 중요해 보이는 이 여름의 우릴 따라함은 사실 여름이 덧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덧없는 그것은 관심을 받고 싶어 한다. 자신이 내보일 수 있는 마지막 매력인 밤의 시간이 오자 옷을 벗는 듯 그것은 더위와 상관없어진다. 그리고 나이프와 포크 등의 식기를 갖춘 것처럼 여름의 밤은 자기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는 채로 식탁 앞에 앉아서 미묘해진다. 우리는 식탁 앞에 앉아서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여름의 키는 이 식탁의 높이에 대해서라면 미묘하게 낮고 안 맞는 것이라, 식사 예절을 차릴 수도 없이 먼 데에 위치한 맛있는 음식이 담긴 접시를 누군가가 신경 써서 덜어줘야 한다. 사람들이 식탁에서 전부 나갔다. 여름은 자기 자신의 시간이 본질적으로는 낮이라는 걸, 사람들을 귀찮게 하고 옷을 헐렁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걸, 가끔은 자신의 더위가 몸이 약한 사람들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는 걸 혼자인 식탁 의자에 앉아 가만히 생각해 본다. 여름은 제가 부리는 일사병의 요정들을 맞은편 식탁에 앉히고 혼낸다. 그러지 말라는 것이다. 일사병의 요정들은 입을 내민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여름도 안다. 여름은 자연스럽게 바닷가를 좋아하는데, 왜냐하면 이 외로워하는 여름은 사람들이 놀러 오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물을 데울 수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고. 사람은 계절과는 상관없는 듯이 편한 차림을 하고 바닷가의 물에 몸이 젖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공놀이를 하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인스타에 올릴 자기 자신의 사진을 찍고 있다. 여름도 초코가 올라간 와플처럼 자기 자신을 찍어서 인스타에 올리고 싶다. 그런데 이 어린 성정의 여름은 사진 찍히는 걸 부끄러워하고 까르륵 웃는다. 주위에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물을 튀기면서 놀고 있고, 튀는 물에 여름이 입은 옷이 젖는다. 이런 여름의 뒷모습을 아직 다가오지 않은 가을과 겨울이, 그리고 이미 지나버린 봄이, 유난히 신경을 쓰며 몰래 지켜보고 있다. 사계 중에서 여름은 장난기가 있고 혼자 있을 때 외로워하며 그중 나이가 제일 어리다. 그래서 여름은 가장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으며, 별 이유가 없어도 혼자 웃는다. 가끔 울상이 될 때도 있다. 왜냐하면 활동적인 여름은 자주 넘어지기 때문이다. 팔꿈치가 다 까졌다. 여름의 넘어짐은 장마가 되어 꽤 긴 기간 동안을 집요하게 사람들을 따라다닌다. 어떤 사람은 ‘이거 실은 저 구름이 날 따라오는 것 아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반쯤은 맞는 말이다. 여름은 시선이 간 인간들한테 눈독 들이기도 한다. 여름이 흘리는 눈물은 떨어지면서 굳어져 우박이 된다. 여름 중에서 우박이 쏟아지는 날은 며칠 없으므로, 여름도 자주 울지는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여름은 제가 흘린 눈물을, 굳어진 그것을 손에 들고 다른 이에게 가져다주려고 한다. 흘러내리는 것은 손안에 컴팩트하게 쥘 수가 없으므로, 그리고 평범한 빗물이 굳어진 것인데도 여름은 어리니까 가치의 경중을 잘 모른다. 그저 가져다줄 수 있기에 가져다주는 것이다. 여름에게는 그 우박 보석을 가져다줄 만한 이가 있다. 그것은 여름의 언니이다. 여름에게 있어서 언니란 자주 보지 못하고 친구 같으며 별것 아닌 일로도 재잘재잘 말하곤 하는, 없는 부모와 비슷한 이라고 볼 수 있다. 여름의 언니의 이름은 세실이고 여름은 혼자 지붕 위에, 여름밤의 한중간에 앉아 있는 세실에게 불꽃놀이를 보여주고 있다. 이미 주변 마을은 축제 준비를 마쳤고 거기선 얇은 망으로 금붕어를 건져 올릴 수 있으며 탕후루를 팔기도 하고 꼬치에 자꾸 양념 붓으로 맛있는 양념을 덧바르며 굽기도 한다. 그 속으로 들어가면 장난감과 인형이 기다리고 있는 사격을 할 수도 있고 언니의 손을 여름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 위에서 잡고 있다. 잘 외로워하긴 하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도 여름은 어쩐지 곤란하다. 그런 여름의 얼굴을 세실은 바라보며 웃는다. 여름은 세실의 웃음을 좋아하고, 왠지 좋아할 것 같아서 한 번 일부러 넘어져 봤다가(자주 그러는 것처럼) 절대 그러지 말라는 언니의 당부를 듣는다. 그러다 크게 다치면 무지무지 아플 거란 말에 여름은 침을 삼킨다. 여름의 언니는 여름의 머리 위를 잔잔하게 쓸며 여름에게 고민은 없는지 물어본다. 여름이 꺼내놓은 고민에 세실은 다시 한번 웃는다. 이 여름이 지나고 나면 자신은 잠 속에 빠지거나 다른 계절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면서 재밌는 일은 없는지 구경만 해야 한다는 건데 졸려 하고 있을 여름에게 잠을 깨울 수 있는 방법, 역시 세실에게도 없다. 그럼 책을 써보면 어떻겠니? 네가 잠들어 있어도 사람들이 읽어줄 텐데. 정말로 사람들이 읽어줄까요? 제가 쓴 것을?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네가 잘 쓴다면 읽어주겠지. 여름은 오늘 밤 반복적으로 졸고 있다. 여름이 꾸는 꿈은 미몽에서 벗어나려고 불을 한없이 뒤쫓는 벌레들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그리고 여름이 잠들어 있을 때는 세실도 가만히 눈을 감는다. 사실 세실은 여름의 언니인 것처럼 여름 앞에서 굴어보기도 하지만 그도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 어느 여름날, 장마가 한참 내리던 시절 어느 처마 밑에 있는 아이, 비를 피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를 세실은 눈여겨보았었다. 그 아이가 지금 잠들어 있는 여름이었고 세실은 그 아이에게 다가가 졸고 있는 것을 깨웠다. 여기서 잠들면 여름 감기에 걸릴 수도 있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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