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5일 월요일

콩 이야기


콩은 시간을 두고 충분히 볶아야 했다. 먼저 살짝 삶은 다음 볶기 시작하면 시간이 절약되지만 그러면 맛이 덜하지. 스승의 가르침이었다. 날콩을 충분히 볶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덜 볶아진 콩을 식탁에 차려낸 것은, 불앞에 오래 서있는 것이 힘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스승의 약한 턱 때문이었다. 식탁에 앉아 식사를 시작한 스승의 입안에서 덜 익은 콩이 우드득거렸다. 스승은 나를 한 번 쳐다보고선 다시 시선을 접시로 돌리고 먹기를 계속했다. 하지만 접시를 다 비우지는 못한 채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승이 콩을 왜 이렇게 덜 익혔냐고 물어보면 대답해 줄 변명을 콩이 거의 날 것일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지만 질문 없는 대답은 존재할 수 없었고 찝찝한 마음으로 식탁을 치웠다. 어쨌든 치우는 것도 내 일이었다.
밖으로 나간 스승이 정원사에게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고의적으로 덜 익힌 콩을 내놓았다는 것인데, 순박한 정원사는 그 말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어린애가 미숙해서 잘못 익힌 걸 가지고 그러냐며 스승을 타박했다. 스승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도 이게 먹힐 만한 투덜거림인지 확신이 없었을 스승을 생각하자 측은함과 동지애가 밀려왔지만 금세 사라졌다. 하지만 동지애 정도는 남겨두어도 괜찮을 것이다. 동료와의 사이가 꼭 좋을 필요는 없지. 서로를 완벽에 가깝게 이해한다는 점에서 서로 이외에 적합한 동료를 찾기 어려울 우리였다. 변명을 생각해내야 했던 나의 마음도 스승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겠지. 그래도 제대로 식사를 마치지 못한 것, 혹은 질문을 기다리고 있던 나에 대한 섭섭함 때문에 밖으로 나가 투덜거렸을 것이다. 너무 멀리 나가지는 않고 내 귀에는 들릴 정도의 거리에서 이해받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우리가 같이 사랑하는 정원사에게.
나이 든 사람의 턱이 덜 익힌 콩을 얼마나 더 견뎌낼 수 있을지 아무런 정보도 확신도 없었다. 가끔은 잘 익힌 콩을 내놓아야 그동안의 실수를 완성할 수 있었는데 그 주기가 너무 빨리 돌아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접시를 말끔히 비워내는 스승의 모습을 상상하면 끔찍했다. 사실 모든 행동과 말이 꼴보기 싫었지만 그래도 콩을 볶고 식탁을 치워야 했다. 수행자의 감정을 돌보지 않는 의무 때문에 가끔 짜증을 내며 울고 싶었지만 그조차도 해서는 안된다는 걸 알았기에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조용히 욕을 하거나 얼굴을 찌푸릴 뿐이었다. 나는 순박한 정원사를 두고 떠날 수 없었고 그건 스승도 그랬다. 우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정원사를 사랑하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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