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5일 금요일

호위 무사

낭자, 나는 강물 위에 떠 있소.

    강물에 뜬 채 어딘지도 모를 기슭에 닿아 있소.

    기슭에 자란 버들나무에 등을 기대고 호흡을 가다듬고 있소.

        나를 데리고 온 강물은 내가 흘린 피에 닿아 제 몸도 붉어졌구려.

나는 내 몸이 품어왔던 시간이 나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낭자에게 편지를 쓰오.

        낭자를 만나게 해주었던 운명의 실은 언제부터 베틀 위에 올라 있었던 것인지.

        낭자는 표국의 호위를 받으며 길 떠나던 첫날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소.

        그러나 내가 보기에 운명이라는 강물은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나를 낭자에게로 데려간 것 같소.

    말한 바 없으나, 나는 표국에서 표사로 있을 사람은 아니었다오.

나는 본디 배화교의 사람으로, 우리를 해하려는 무리에게 이미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있었소.

산중에서 쫓기다 낭떠러지로 몰려 떨어졌을 땐 끝인 줄만 알았지.

그때도 강물이 나를 어디론가 데려갔으니, 이미 강물은 내 목숨을 한 번 구해준 셈이구려.

    강물에 떠밀려 도착한 곳은 알려지지 않은 비경이었소.

    노랗고 붉은 과일들이 탐스럽게 열린 과일나무가 많았다오.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아팠음에도 허기는 어찌나 견디기 어렵던지.

        나는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거의 기다시피 하여 나무 아래까지 가서 낙과를 삼켰소. 그 과일이 신기 과일인지도 미처 몰랐다오.

    나는 오래 안 가 기력을 회복하였소. 그러자 우습게도 앞날이 염려되더군.

    비경을 둘러보니 누군가가 나를 위해 준비한 양 강기슭에 거룻배 한 척이 매여 있더구려.

        과일은 물론이요, 온갖 비급들이 가득했소.

        나는 거룻배를 타고 강물이 나를 인도하는 대로 몇 날 며칠을 떠내려갔다오.

        신기 과일이 있어 배고프지 않았고, 비급들은 읽는 대로 내게 새로운 지경을 펼쳐 보였소.

    과거를 강물에 흘려 보내고, 교리도 기슭에 묻어두고 살아가려 했지.

나는 들짐승처럼 아무렇게나 떠돌아다녔소.

    먹을 것이 생기면 먹고, 누울 곳이 생기면 자고. 

    가끔 악행을 일삼는 이들을 보면 무시하지 못하여 저지하고.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표국의 표사가 되어 있었다오.

        하남의 어느 객잔에서 무뢰배의 버릇을 고쳐주던 나를 눈여겨본 총표두가 나를 표국의 식객으로 초대하였고,

    잠시 머물다 떠나려 했던 것이, 밥만 얻어먹고 떠나기 무람하여 한두 건의 일을 거들었을 뿐인데.

            참, 세상 일 알다가 모를 일이지 않소?

    몇 차례 낭자의 호위를 더 맡게 되고, 흐르는 시간이 서로를 조금씩 더 알게 만들고

    결국 낭자의 세가에 들어가 낭자의 호위 무사가 되기까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침묵을 나누었는지, 

    그리고 간간이 그 침묵을 적시는 다디단 말을 나누었는지.

낭자를 처음 보았을 때 내 숨 찰나간 멎었지요.

    내가 물속의 잉어였다면 낭자 마주하기 부끄러워 수심 깊은 곳으로 숨었을 테고,

    하늘의 기러기였다면 낭자 보느라 날갯짓도 잊어 땅으로 떨어졌을 게요.*

        그런 낭자를 끝까지 지키지 못해 내가 많이 미안하오.

            낭자는 지금 내가 말없이 구름처럼 그대 떠난 줄로 알겠지요.

수원지가 있어 물줄기가 예까지 이어지듯이

과거는 그리 쉽게 떼어낼 수 없는 것인가 보오.

    내가 배화교의 사람으로 자랐다는 사실 자체가 누구들에겐 그토록이나 증오할 거리가 된다는 게 어이없고도 원망스럽구려.

    따라붙은 가막새들이 보이기에 낭자에게 해를 끼칠까 싶어 산중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소.

            그리고 달이 차고 기울 때까지 이어진 칼부림,

    헤아리지 못할 만큼 많은 이들을 베었으나 나 또한 응분의 대가로 자상을 입었소.

    잠깐 정신을 잃고 다시 눈을 뜨니 강물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오.

여기까지 읊고 나니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야기들이 많구려.

어쩌면 나는 이미 몇 번이나 비슷한 일을 겪고, 몇 번이나 죽음을 계속해왔는지도 모르겠소.

마치 전장에 부러진 채 꽂혀 있는 수천 자루의 칼날들, 칼 무덤의 형상과도 같이.

            매화가 만발하던 어느 날, 낭자가 내게 물었지요. 나를 영원 동안 지켜주지 않겠느냐고.

            그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소.

            아마도 낭자는 속으로 야속했을 거요. 아니 꼭 그랬었기를 바라오.

            호위 무사로서 연심을 품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 생각한 점도 없지 않으나,

    나 역시 여인의 몸이기에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오.

            혹여 다른 이들이 알았다면 어느 쪽이든 무사하지 못했겠지요.

            낭자는 내가 그런 줄을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소.

            아니 꼭 알았었기를 바라오.

    그러면 지금에라도 나는 너무나 기쁠 터이니. 

    이렇게 죽더라도 덜 억울할 터이니.

낭자, 나는 다시 강물 위에 떠 있소.

흐르는 강물에 몸을 맡긴 채 흘러가고 있소.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내 뺨을 어루만지는 낭자의 손길 같은 이것이 내가 느끼는 마지막 감각인 듯하오.

눈이 부셔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소.

바람이 좋구려.





*침어낙안(沈魚落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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