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6일 월요일

불안한 뿌리

이런 불안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천변에서 피어오른 날벌레 떼에 둘러싸여 팔다리를 휘젓다 간신히 그곳을 빠져나왔을 때, 불현듯 귓속 깊은 곳이 가려워 정말이지 무심코,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거칠게 헤집었더니 손끝에 피가 묻어나왔다. 묻어나온 피는 나의 것일까, 귓속에 들어간 벌레의 것일까? 미량의 맑은 피가 묻어 있을 뿐, 손끝이 그리 지저분하지 않은 것을 보면 나의 피일 것 같다. 그렇지만 이렇게 깨끗한 귓속이 벌레 떼의 습격을 받은 직후에 갑작스럽게 가려워졌던 것을 생각하면 날벌레 한 마리가 어찌어찌 귓속으로 들어갔을 가능성도 적지 않을 듯하다. 그렇다면 이 피가 차라리 벌레의 것이기를 바라야 한다. 살아 있는 아주 작은 벌레가, 귓속의 솜털 때문에, 나오지는 못하고 그냥 거기에 남아 있다면? 내 귓속의 뭔가를 양분 삼아 아주 오래 살아남는다면? 심지어 그것이 암컷이고, 알을 낳을 준비가 되어 있는 개체였다면?
누구나 이 같은 불안 하나로 중이염에 걸릴 수 있다.
이때 실제로 중이염을 유발하는 것은 오염된 물에서 나온 병균 덩어리 날벌레가 아니라 불안에 못 이겨 미친 듯이 귀를 파기 시작하는 습관이다.

최근에 나는 어떤 양치기의 불안에 대한 글을 읽었다.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다.
국경 가까이에서 양치기 노릇을 하던 한 남자가 이웃나라에서 돌아오는 선교사를 보았다. 양치기는 신앙이 있었지만 한철 내내 산등성이 목장에서 보내야 하는 처지라 제례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선교사는 양치기의 청으로 그의 거처에 하룻밤 머물며 신의 뜻에 대해 들려주기로 했다.
양치기는 신앙이 있었지만 여가시간에 경전을 읽기보다 수음하기를 좋아했다. 이와 같은 흠을 선교사가 알아차리지 못하기를 바랐다. 선교사는 양치기에게 경전에 실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중에는 땅을 향해 사정한 남자가 신벌을 받아 죽은 이야기도 있었다. 선교사는 그에 더하여 땅에 떨어진 정액에서 인간을 닮은 극독초가 자란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날 밤에 양치기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선교사가 자신의 비밀, 즉 양떼를 돌보기보다 멀찍한 곳에서 사타구니 만지기에나 더 열중하는 습성을 꿰뚫어보고 저를 책망한 것 같아서 부끄럽고 분했다. 또한 선교사의 말대로 아무 곳에나 털어놓은 자신의 분비물에서 극독초가 자라면, 양들이 그것을 먹고 잘못되기라도 하면... 양치기는 그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머리에서 떨쳐버리려 애썼지만, 그보다는 선교사가 거짓말을 했을 리 없다는 생각을 하는 편이 훨씬 쉬웠다.
양치기는 생각했다. 양 몇 마리가 죽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저 수다쟁이가 그게 내 잘못이라는 사실을 누구에게 말하지만 않으면 된다. 그렇지만 저 수다쟁이가 마을로 내려가서 내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지? 불안감을 이길 수 없었던 양치기는 동틀녘에 선교사를 죽였다. 양치기가 수다쟁이라고 생각한 선교사는 끅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었다.
선교사의 말대로 양치기가 땅에 뿌린 씨에서 정말로 극독초가 자랐을까?
결국 그의 분비물에서 맨드레이크가 자라기는 했다. 선교사가 속했던 수도회에서 돌아올 때가 지난 선교사의 행방을 추적한 끝에 양치기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양치기는 신앙이 있었지만 교수형을 당했다. 광장에서 수치에 떨며 자기의 죄를 고하고 뛰어내렸다. 축 늘어진 하반신에서 갖가지 분비물이 섞이어 뚝뚝 떨어졌다.
이처럼 맨드레이크는 목매달아 죽은 사람에게서 떨어진 분비물로 말미암아 생겨난다. 숨이 붙어 있는 동안의 분비물은 아무 의미가 없다. 따라서 맨드레이크 싹을 틔우려면 씨주머니로 쓸 남자가 숨을 완전히 거둘 때까지, 분비물이 다 떨어지고 마를 때까지 매달아두는 것이 유익하다. 모 마녀회에서는 이를 땅을 저주로 수태하는 것으로 풀이하는데, ‘관점’으로서 소개할 뿐, 탁월하거나 적절한 시각은 아니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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